책 소개
▣ 출판사서평
“개인 전기를 중국 근대사로 써내는 일은 오직 량치차오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역사의 전진을 추동한 ‘신민新民’ 량치차오 사후 출간된 전기 가운데 가장 객관적이고 가장 상세하며 가장 방대한 평전!
이 책은 량치차오의 생애와 경력을 날줄로 삼고 그가 중국 근현대사의 대표 인물 14명과 교류한 내용을 씨줄로 삼아, 량치차오라는 인물과 그가 견지한 사상의 역사적 가치 및 현재적 의의를 새롭게 평가한다. 이 책이 씨줄로 삼은 인물은 캉유웨이·황쭌셴·탄쓰퉁·왕캉녠·탕차이창·쑨중산·장타이옌·양두·위안스카이·차이어·장바이리·딩원장·후스·쉬즈모다. 이 책은 이처럼 역사를 ‘사람과 사람’ 중심으로 보는 얼개에 기대 량치차오의 삶을 풍요롭게 조명하면서, 각 인물 간의 관계와 이들이 시대와 벌이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여준다.
아울러 저자는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에 이르는 대변동의 국면에서 당대 지식인이 겪은 고통과 방황 및 고난에 찬 탐색과정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과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량치차오라는 필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관문으로 들어서는 출발점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셰시장
解璽璋
1953년 베이징 출생.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문화비평가다. 그의 경력에는 중국현대사를 거치며 지식인이 겪은 굴곡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중학교를 2년 반 다니다가 베이징화공北京化工 제2공장으로 하방되어 노동자 생활을 했고, 당시 함께 하방된 대학생으로부터 중국 고전문학을 배우면서 노동자신문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때의 편집 경력이 바탕이 되어 런민대 신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중국 신문사新聞史 과목을 들으며 량치차오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졸업 논문도 량치차오에 관해 썼다. 졸업 후에는 『베이징일보北京日報』와 『베이징만보北京晩報』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며 다양한 문예평론을 발표했다. 량치차오에 관한 공부를 계속 해오다가 2012년 4년간의 집필 끝에 무려 70만 자가 넘는 『량치차오 평전梁啓超傳』을 출간했다. 이 밖에도 『한 사람의 독서사一個人的閱讀史』 『소음과 적막喧?與寂寞』 『아속雅俗』 등의 저서가 있다.
역 : 김영문
경북 영양의 전통 가문에서 태어나 취학 전에 한문을 익혔다. 경북대 중문학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진 해외 박사후 과정에 선발되어 베이징대에 유학하여 중국문학을 연구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중한사전』 편찬 작업의 교열 업무를 담당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수년간 『문선역주文選譯註』 작업에 매진, 국내 최초로 『문선역주(文選譯註)』 (전10권: 공역) 완역본을 출간하였다. 경북대·대구대·서울대 등에서 중국어문학·중국문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과목을 강의하며 방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현재 한문·중국어문학·중국문화와 관련된 강의·저술·번역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인문학에 미친 프리랜서다. 대표적인 저역서로 『노신의 문학과 사상』(공저), 『루쉰과 저우쭈어런』(쑨위 저, 공역, 문광부 추천도서), 『루쉰 시를 쓰다』(역주, 학술원 추천도서), 『내 사랑 샤에게(2010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시집)』(류샤오보 저, 번역), 『문선역주』(전10권, 공역), 『내 정신의 자서전』(첸리췬 저, 번역)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 _ 류짜이푸劉再復
제1장 신후이 소년: 량치차오 가계
조부: ‘의리’를 강구하고 ‘절개’를 중시하다 | 조부의 가르침 아래 ‘소년등과 하다’ | 부모: 수신과 구제 | 소년 시절에 청운의 큰 뜻을 품다
제2장 집안 가득 뛰어난 인재: 량치차오와 자녀들
동서양 장점을 융합한 아버지의 자식교육 | 폐부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럽고 순수한 부성애 | 셴얼 쓰순: 량치차오의 유능한 조수 | 쓰청 교육: 학문은 모름지기 흥미를 느껴야 한다 | 량쓰융: 부친의 지지하에 고고학자가 되다 | 량쓰중: 그의 정치 열정이 부친에게 인정을 받다 | 량치차오의 다른 자녀들 | 신민을 길러내다
제3장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알아주다: 량치차오의 혼인과 애정
총명하고 강인한 리 부인 | 힘든 일을 감내하며 원망도 두려워하지 않은 왕 부인 | 홍안紅顔의 젊은 지기 허 소저
제4장 서생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다: 량치차오와 캉유웨이(상)
난하이 성인 캉유웨이 | “사상계의 일대 폭풍” | 재목이 가득했던 만목초당 | 갑오회시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그리고 공거상서 | 신정과 「황제에게 올리는 세번째 상소문」 | 『만국공보』 발간 및 강학회 | 스승과 제자가 처음으로 의견이 갈리다 | 보국회의 단명 | 무술유신으로 팔고문을 폐지하다 | 경사대학당과 상하이역서국 | 무술변법은 왜 실패했을까?
제5장 서로 다른 길을 가다: 량치차오와 캉유웨이(하)
일본에 도움을 구하다 | 보황운동 | 새로운 사상과 지식의 유혹을 받다 | ‘새로운’ 국민: 자유 쟁취와 민권 신장 | 『청의보』에서 『신민총보』까지 | 공교 보호의 입장을 버리다 | 캉유웨이의 ‘반혁명’ | 사제 간의 갈등, 관계 악화 | 진화공사 사건으로 보황회가 붕괴되다 | 량치차오와 신해혁명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결별
제6장 스승과 벗을 겸하다: 량치차오와 황쭌셴
인경려 주인 황궁두 | 독서냐 구국운동이냐? | 시무학당을 주관하다 | 후난 신정 | 평생 스승과 벗을 겸하다
제7장 간담상조肝膽相照: 량치차오와 탄쓰퉁
프레지던트로 뽑힐 만한 탄쓰퉁 | 사방을 방랑하던 탄쓰퉁의 소년 시절 | 탄쓰퉁: 학문과 사상의 대전환 | 치국 방략: ‘독단적 통치술’을 ‘합의적 통치술’로 바꾸다 | 업무와 독서 두 가지 모두 그르치지 않다 | “후난의 선비는 관직에 등용할 만하다” | 시무학당에서 영재를 기르다 | 민지를 계발한 남학회 | 유신파와 수구파가 물과 불처럼 대립하다 | 무술변법, 백일유신 | 탄쓰퉁의 옥중 마지막 편지, 진짜인가? 가짜인가?
제8장 시대를 알고 사무에 통달하다: 량치차오와 왕캉녠
같은 스승 밑 동문으로 깊은 우의를 맺다 | 함께 『시무보』를 창간하다 | 협력에서 원한으로
제9장 뜨거운 피를 조국에 바치다: 량치차오와 탕차이창
황상이 폐위되다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황제 보위 | 류양 지사 | 시무학당에서 우의를 맺다 | 탕차이창과 캉·량 | 『청의보』: 유신의 목구멍이 되다 | 부상扶桑에서 학교를 열다 | 량치차오: 변화에 뛰어난 호걸 | 경자년 황제 보위勤王를 위한 거사
제10장 근세 영웅의 쌍벽: 량치차오와 쑨중산
쑨중산과 캉유웨이는 왜 친교를 맺을 수 없었을까? | 량치차오가 쑨중산을 흠모하며 연합을 시도하다 | 호놀룰루로 간 후 쑨중산과 물불 같은 관계가 되다
제11장 적이면서 벗: 량치차오와 장타이옌
『시무보』의 두 건필 | 존경심과 적개심 사이 | 무술정변 이후 두 사람의 사상 분열이 가속화하다 | 량치차오의 미국 유람기 | 보황과 입헌 그리고 배만혁명 | 장타이옌이 서재로 물러난 뒤 둘 사이가 점차 멀어지다
제12장 나 홀로 인재를 아끼다: 량치차오와 양두
젊은 기상으로 시무학당에서 재능을 겨루다 | 일본에서 다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아끼다 | 철도 부설권 쟁취와 입헌 참여,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 | 신당 성립, 영도권 귀속문제로 의견 차이가 생기다 | 정문사를 설립해 어려운 틈새에서 분투하다 | 양두, 민국의 ‘제사’가 되려는 꿈을 꾸다가 불문으로 은퇴하다
제13장 성공 직전의 실패: 량치차오와 위안스카이
만청 시기의 첫번째 합작 | 위안스카이 타도가 캉과 량의 주요 목표가 되다 | 민국 시기의 재합작 | 량치차오가 재정문제와 정당문제를 이야기하다 | 량치차오의 귀국과 출로
제14장 뜻이 같고 생각도 일치하다: 량치차오와 차이어
량치차오 마음에 쏙 든 애제자, 차이어 | 광시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대사를 도모하다 | 우창봉기에 호응했지만 종족혁명은 주장하지 않다 | 량치차오가 귀국해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다 | 혁명 성공 후 군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 윈난 경영에 고심하다 | 량치차오의 건국 방침 | ‘제2차 혁명’이 남긴 화근 | 스승과 제자가 손을 잡고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반대하다 | 국가를 위해 싸우고, 인격을 위해 싸우다 | 각 성이 독립하자 우울증과 조급증으로 사망한 위안스카이 | 대세가 안정되었지만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다
제15장 시대의 고난을 함께하다: 량치차오와 장바이리
일본에 유학해 명성을 멀리까지 떨치다 | 학교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자살하겠다 | 량과 장이 낙담해 함께 정치 소용돌이에 말려들다 |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가? | 정계를 은퇴하고 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 5·4운동 배후의 량치차오 | 유럽여행 인상기 『구유심영록』 | “중국을 위해 약방문을 찾다” | 한 편의 서문이 뜻밖에도 한 권의 저서가 되다 | 문화전파에 진력하다 | 연성자치 및 각 성 입헌
제16장 나이를 잊은 사귐: 량치차오와 딩원장
소년 천재 딩원장 | 영국 유학이라는 모험 | 귀국하여 취업하다 | 지질학 선구자 | 유럽 견학 후 베이징대학과 접촉하다 | 후스와 사귀다 | 지식인의 정치토론 | ‘정신의 기황을 구제하다’ | 과학과 현학 논쟁 | 쑹후 시정독판 | 량치차오가 세상을 떠난 후 딩원장이 뒷일을 처리하다
제17장 앞사람을 잇고 뒷사람을 계도하다: 량치차오와 후스
소년 후스, ‘량 선생에게 무궁한 은혜를 입다’ | 후스와 량치차오는 언제 처음 만났는가? | 학술 논쟁과 기세 싸움 | ‘국학서목’ 논쟁 | 신문화 제창이 꼭 구문화 배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전환기의 길을 연 선봉장
제18장 사제지간의 정의情誼: 량치차오와 쉬즈모
사제지간의 정의 | 재능이 넘치는 쉬즈모 | 린후이인과의 사랑 때문에 장유이와 이혼하다 | 쉬즈모는 왜 눈앞의 박사학위를 포기했나? | 타고르의 중국 방문 | 루샤오만과 사랑을 나누고, 『신보』 부간을 접수하다 | 주례가 신랑을 훈계하다 | 량치차오도 세상을 떠나고, 시인도 천상으로 날아가다
제19장 적막한 량치차오 사후
량치차오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르다 | 잦은 변화에도 자신이 세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은 량치차오 | 적막한 사후 | 량치차오를 새롭게 인식하다
저자 후기 / 옮긴이의 말 / 부록: 중국 근현대 인명 중한 발음 비교표
참고문헌 / 찾아보기
“개인 전기를 중국 근대사로 써내는 일은 오직 량치차오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역사의 전진을 추동한 ‘신민新民’ 량치차오 사후 출간된 전기 가운데 가장 객관적이고 가장 상세하며 가장 방대한 평전!
이 책은 량치차오의 생애와 경력을 날줄로 삼고 그가 중국 근현대사의 대표 인물 14명과 교류한 내용을 씨줄로 삼아, 량치차오라는 인물과 그가 견지한 사상의 역사적 가치 및 현재적 의의를 새롭게 평가한다. 이 책이 씨줄로 삼은 인물은 캉유웨이·황쭌셴·탄쓰퉁·왕캉녠·탕차이창·쑨중산·장타이옌·양두·위안스카이·차이어·장바이리·딩원장·후스·쉬즈모다. 이 책은 이처럼 역사를 ‘사람과 사람’ 중심으로 보는 얼개에 기대 량치차오의 삶을 풍요롭게 조명하면서, 각 인물 간의 관계와 이들이 시대와 벌이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여준다.
아울러 저자는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에 이르는 대변동의 국면에서 당대 지식인이 겪은 고통과 방황 및 고난에 찬 탐색과정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과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량치차오라는 필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관문으로 들어서는 출발점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셰시장
解璽璋
1953년 베이징 출생.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문화비평가다. 그의 경력에는 중국현대사를 거치며 지식인이 겪은 굴곡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중학교를 2년 반 다니다가 베이징화공北京化工 제2공장으로 하방되어 노동자 생활을 했고, 당시 함께 하방된 대학생으로부터 중국 고전문학을 배우면서 노동자신문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때의 편집 경력이 바탕이 되어 런민대 신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중국 신문사新聞史 과목을 들으며 량치차오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졸업 논문도 량치차오에 관해 썼다. 졸업 후에는 『베이징일보北京日報』와 『베이징만보北京晩報』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며 다양한 문예평론을 발표했다. 량치차오에 관한 공부를 계속 해오다가 2012년 4년간의 집필 끝에 무려 70만 자가 넘는 『량치차오 평전梁啓超傳』을 출간했다. 이 밖에도 『한 사람의 독서사一個人的閱讀史』 『소음과 적막喧?與寂寞』 『아속雅俗』 등의 저서가 있다.
역 : 김영문
경북 영양의 전통 가문에서 태어나 취학 전에 한문을 익혔다. 경북대 중문학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진 해외 박사후 과정에 선발되어 베이징대에 유학하여 중국문학을 연구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중한사전』 편찬 작업의 교열 업무를 담당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수년간 『문선역주文選譯註』 작업에 매진, 국내 최초로 『문선역주(文選譯註)』 (전10권: 공역) 완역본을 출간하였다. 경북대·대구대·서울대 등에서 중국어문학·중국문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과목을 강의하며 방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현재 한문·중국어문학·중국문화와 관련된 강의·저술·번역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인문학에 미친 프리랜서다. 대표적인 저역서로 『노신의 문학과 사상』(공저), 『루쉰과 저우쭈어런』(쑨위 저, 공역, 문광부 추천도서), 『루쉰 시를 쓰다』(역주, 학술원 추천도서), 『내 사랑 샤에게(2010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시집)』(류샤오보 저, 번역), 『문선역주』(전10권, 공역), 『내 정신의 자서전』(첸리췬 저, 번역)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서문 _ 류짜이푸劉再復
제1장 신후이 소년: 량치차오 가계
조부: ‘의리’를 강구하고 ‘절개’를 중시하다 | 조부의 가르침 아래 ‘소년등과 하다’ | 부모: 수신과 구제 | 소년 시절에 청운의 큰 뜻을 품다
제2장 집안 가득 뛰어난 인재: 량치차오와 자녀들
동서양 장점을 융합한 아버지의 자식교육 | 폐부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럽고 순수한 부성애 | 셴얼 쓰순: 량치차오의 유능한 조수 | 쓰청 교육: 학문은 모름지기 흥미를 느껴야 한다 | 량쓰융: 부친의 지지하에 고고학자가 되다 | 량쓰중: 그의 정치 열정이 부친에게 인정을 받다 | 량치차오의 다른 자녀들 | 신민을 길러내다
제3장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알아주다: 량치차오의 혼인과 애정
총명하고 강인한 리 부인 | 힘든 일을 감내하며 원망도 두려워하지 않은 왕 부인 | 홍안紅顔의 젊은 지기 허 소저
제4장 서생으로서 나라에 보답하다: 량치차오와 캉유웨이(상)
난하이 성인 캉유웨이 | “사상계의 일대 폭풍” | 재목이 가득했던 만목초당 | 갑오회시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그리고 공거상서 | 신정과 「황제에게 올리는 세번째 상소문」 | 『만국공보』 발간 및 강학회 | 스승과 제자가 처음으로 의견이 갈리다 | 보국회의 단명 | 무술유신으로 팔고문을 폐지하다 | 경사대학당과 상하이역서국 | 무술변법은 왜 실패했을까?
제5장 서로 다른 길을 가다: 량치차오와 캉유웨이(하)
일본에 도움을 구하다 | 보황운동 | 새로운 사상과 지식의 유혹을 받다 | ‘새로운’ 국민: 자유 쟁취와 민권 신장 | 『청의보』에서 『신민총보』까지 | 공교 보호의 입장을 버리다 | 캉유웨이의 ‘반혁명’ | 사제 간의 갈등, 관계 악화 | 진화공사 사건으로 보황회가 붕괴되다 | 량치차오와 신해혁명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결별
제6장 스승과 벗을 겸하다: 량치차오와 황쭌셴
인경려 주인 황궁두 | 독서냐 구국운동이냐? | 시무학당을 주관하다 | 후난 신정 | 평생 스승과 벗을 겸하다
제7장 간담상조肝膽相照: 량치차오와 탄쓰퉁
프레지던트로 뽑힐 만한 탄쓰퉁 | 사방을 방랑하던 탄쓰퉁의 소년 시절 | 탄쓰퉁: 학문과 사상의 대전환 | 치국 방략: ‘독단적 통치술’을 ‘합의적 통치술’로 바꾸다 | 업무와 독서 두 가지 모두 그르치지 않다 | “후난의 선비는 관직에 등용할 만하다” | 시무학당에서 영재를 기르다 | 민지를 계발한 남학회 | 유신파와 수구파가 물과 불처럼 대립하다 | 무술변법, 백일유신 | 탄쓰퉁의 옥중 마지막 편지, 진짜인가? 가짜인가?
제8장 시대를 알고 사무에 통달하다: 량치차오와 왕캉녠
같은 스승 밑 동문으로 깊은 우의를 맺다 | 함께 『시무보』를 창간하다 | 협력에서 원한으로
제9장 뜨거운 피를 조국에 바치다: 량치차오와 탕차이창
황상이 폐위되다 |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황제 보위 | 류양 지사 | 시무학당에서 우의를 맺다 | 탕차이창과 캉·량 | 『청의보』: 유신의 목구멍이 되다 | 부상扶桑에서 학교를 열다 | 량치차오: 변화에 뛰어난 호걸 | 경자년 황제 보위勤王를 위한 거사
제10장 근세 영웅의 쌍벽: 량치차오와 쑨중산
쑨중산과 캉유웨이는 왜 친교를 맺을 수 없었을까? | 량치차오가 쑨중산을 흠모하며 연합을 시도하다 | 호놀룰루로 간 후 쑨중산과 물불 같은 관계가 되다
제11장 적이면서 벗: 량치차오와 장타이옌
『시무보』의 두 건필 | 존경심과 적개심 사이 | 무술정변 이후 두 사람의 사상 분열이 가속화하다 | 량치차오의 미국 유람기 | 보황과 입헌 그리고 배만혁명 | 장타이옌이 서재로 물러난 뒤 둘 사이가 점차 멀어지다
제12장 나 홀로 인재를 아끼다: 량치차오와 양두
젊은 기상으로 시무학당에서 재능을 겨루다 | 일본에서 다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아끼다 | 철도 부설권 쟁취와 입헌 참여,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 | 신당 성립, 영도권 귀속문제로 의견 차이가 생기다 | 정문사를 설립해 어려운 틈새에서 분투하다 | 양두, 민국의 ‘제사’가 되려는 꿈을 꾸다가 불문으로 은퇴하다
제13장 성공 직전의 실패: 량치차오와 위안스카이
만청 시기의 첫번째 합작 | 위안스카이 타도가 캉과 량의 주요 목표가 되다 | 민국 시기의 재합작 | 량치차오가 재정문제와 정당문제를 이야기하다 | 량치차오의 귀국과 출로
제14장 뜻이 같고 생각도 일치하다: 량치차오와 차이어
량치차오 마음에 쏙 든 애제자, 차이어 | 광시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대사를 도모하다 | 우창봉기에 호응했지만 종족혁명은 주장하지 않다 | 량치차오가 귀국해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다 | 혁명 성공 후 군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 윈난 경영에 고심하다 | 량치차오의 건국 방침 | ‘제2차 혁명’이 남긴 화근 | 스승과 제자가 손을 잡고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반대하다 | 국가를 위해 싸우고, 인격을 위해 싸우다 | 각 성이 독립하자 우울증과 조급증으로 사망한 위안스카이 | 대세가 안정되었지만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다
제15장 시대의 고난을 함께하다: 량치차오와 장바이리
일본에 유학해 명성을 멀리까지 떨치다 | 학교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자살하겠다 | 량과 장이 낙담해 함께 정치 소용돌이에 말려들다 |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가? | 정계를 은퇴하고 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 5·4운동 배후의 량치차오 | 유럽여행 인상기 『구유심영록』 | “중국을 위해 약방문을 찾다” | 한 편의 서문이 뜻밖에도 한 권의 저서가 되다 | 문화전파에 진력하다 | 연성자치 및 각 성 입헌
제16장 나이를 잊은 사귐: 량치차오와 딩원장
소년 천재 딩원장 | 영국 유학이라는 모험 | 귀국하여 취업하다 | 지질학 선구자 | 유럽 견학 후 베이징대학과 접촉하다 | 후스와 사귀다 | 지식인의 정치토론 | ‘정신의 기황을 구제하다’ | 과학과 현학 논쟁 | 쑹후 시정독판 | 량치차오가 세상을 떠난 후 딩원장이 뒷일을 처리하다
제17장 앞사람을 잇고 뒷사람을 계도하다: 량치차오와 후스
소년 후스, ‘량 선생에게 무궁한 은혜를 입다’ | 후스와 량치차오는 언제 처음 만났는가? | 학술 논쟁과 기세 싸움 | ‘국학서목’ 논쟁 | 신문화 제창이 꼭 구문화 배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전환기의 길을 연 선봉장
제18장 사제지간의 정의情誼: 량치차오와 쉬즈모
사제지간의 정의 | 재능이 넘치는 쉬즈모 | 린후이인과의 사랑 때문에 장유이와 이혼하다 | 쉬즈모는 왜 눈앞의 박사학위를 포기했나? | 타고르의 중국 방문 | 루샤오만과 사랑을 나누고, 『신보』 부간을 접수하다 | 주례가 신랑을 훈계하다 | 량치차오도 세상을 떠나고, 시인도 천상으로 날아가다
제19장 적막한 량치차오 사후
량치차오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르다 | 잦은 변화에도 자신이 세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은 량치차오 | 적막한 사후 | 량치차오를 새롭게 인식하다
저자 후기 / 옮긴이의 말 / 부록: 중국 근현대 인명 중한 발음 비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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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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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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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