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비주얼 컬쳐 시대의 이해』라는 이 제목은 지금 시대의 문화가 갖는 주요한 특징을 ‘비주얼’이라는 수식을 통해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규정에 대해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시각에 작용하는 내용물들을 생산하는 활동이 과연 지금 시대의 문화에만 적용되는 특징인가? 저자들은 이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주요한 특징을 ‘비주얼’이라는 수식에 집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소나 건축, 회화에 있어 탁월한 작품들을 남긴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를 떠올려본다면 시각에 호소하는 문화적 생산물들은 대부분의 시대에 있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는 문화적 활동은 지금 시대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비주얼’ 문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떻게 ‘비주얼’은 현재의 문화적 특징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추리하기 위한 또 다른 단서에 주목해야 한다. 이 책에 붙은 부제인 ‘아날로그/디지털 이미지의 역할과 기능’은 ‘비주얼’과 ‘아날로그/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정보를 처리하고 나타내는 두 양식인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이미지가 구별된 계기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물음을 개괄하면서 이미지가 지금 시대를 설명하는 중심적 주제로 자리 잡은 현사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은밀한 전제와 함께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전제가 무엇인지 추리할 필요가 있다.
한 시대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주제들이란 늘 있기 마련이다. 그 주제는 특정 시대에 물질적, 정신적 활동이 이루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을 포괄하여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특정한 이념일 수도 있고, 주의 혹은 사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주제로서 지목되는 그 순간, 그 주제는 가능한 한 특정 시대의 문화 전반에 걸쳐 모든 활동과 결과물들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점이다. 다소 고상하게 표현된 문화 연구라 할 수 있을 예술사에서 이런 양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일종의 거시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작업의 매력은 설명의 경제성에 있다.
이에 반해 다종다양한 결과들을 하나로 포섭할 수 있는 주제들에 비해 양식이나 기법들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건축과 조소와 같이 확연하게 입증되는 대상이 아닌 한 개인의 심미안이 표현되는 회화나 문학 작품을 검토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아마도 기법과 양식이란 그 대상을 생산한 개인의 숙련과 기발함 혹은 종종 드문 천재성으로 이해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기법과 양식은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형성한 담론장에서 명명되고 결정되고 유포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법과 양식은 한 시대의 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를 보조하고 돋보이게 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설명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해설이 재생산되는 것은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을 인솔하면서 작품들을 설명하는 도슨트에게서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과 설명, 그리고 이를 유포하고 재생산하는 모든 활동은 나름의 근거들과 정당성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문화적 활동에서 기법과 양식은 특이한 지위를 획득한 것 같다. 이전의 기법과 양식이 한 개인의 신체적 습관으로 자리 잡은 고유한 표현 방법이었다면, 지금의 문화적 활동은 상대적으로 통속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문화적 생산물을 생산하는 수단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고유한 개성을 대변하며 전문적 해설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기법이 아닌 누구나 손쉽게 파악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러한 매개적 수단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며, 디지털 카메라, 스마트 폰 등 다양한 기기들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단들이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0과 1의 이진법적 배치를 통해 정보를 처리하고 생산하는 디지털 기술을 떠올리게 된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종래에는 숙련을 통해 기법을 연마한 특정 개인들만이 생산할 수 있던 문화적 산물들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용이한 기기들로 대체한 것이며, 이 기기들이 생산해내는 것이 디지털 이미지이다. 달리 말해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그 수단을 토대로 하여 대량으로 생산되는 기기들이 문화를 생산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과 이러한 기술적 산물에 의해 구현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지금 시대의 문화적 생산물 전체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가 되었음을 함축한다. 현대 문화 활동 전반은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들이 맺는 계열적 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주어진 대상을 재현하는 수동적 매개가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들을 형성해내는 적극적인 생산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러한 기술적 수단의 혁명적 발전은 문화 연구에서 있어 전통적으로 시도되었던 거시적 주제를 포착하는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문화가 특이한 것은 이념과 주의와 사조의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수단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라는 이 새로운 수단은 이미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하고 계열화하여 우리의 시각에 제시한다. 디지털화된 이미지는 전통적인 시각과 재현의 문제를 아득히 넘어서서 철저하게 재구성된 이미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상 『비주얼 컬쳐 시대의 이해』의 문제 제기는 “아날로그/디지털 이미지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부제에 숨겨져 있는 셈이며, 특히 기술적 수단과 그로 인해 생산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새로운 문화적 매개이자 산출물이 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지금의 문화를 ‘비주얼’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시각에 제시되는 이미지들이 디지털화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문화적 생산물이 영화와 게임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TV, 애니메이션 등과 더불어 영화와 게임이야말로 디지털 이미지들을 고유한 방식으로 계열화하여 제시하는 문화 산업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계열화를 통해 형성되는 디지털 이미지는 결코 허구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을 넘어선 일종의 ‘과잉-현실’이라는 점인데, 디지털 기기들은 현대인들에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허구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론에서 제시되는 ‘이미지텔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정립시키려는 노력의 이유를 추리해 볼 수 있다. 저자들은 그간 현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주요한 분석 방식으로 자리 잡은 ‘스토리텔링’, 즉 개념과 스토리를 통해 이미지를 설명하고 구조화하려는 시도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우리가 간략히 검토한 디지털 이미지의 특이성을 간과한 채, 문자를 통해 이미지를 포획하고 획정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자가 아닌 디지털 이미지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 비주얼 시대의 이미지는 디지털화된 이미지를 의미하며, 디지털 이미지들은 우리가 속해 있는 물리계, 사회, 법과 같은 다양한 질서를 따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예컨대 특정 시대의 사회적 배경이나 질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관을 잘 보여주는 영화를 떠올려보자. 책에서 각각의 챕터를 차지하고 있는 , <아웃 오브 아프리카>, <세 얼간이>는 이러한 요소들을 부각하고 재현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들은 각각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20세기 일본의 재일동포사회, 식민지 아프리카 사회, 21세기의 인도 대학의 교육관에 종속되고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배경들은 각 장면들, 즉 특정한 방식으로 계획되어 촬영된 디지털 이미지들의 계열화의 결과로 나타난다.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시대의 질서나 과거 시대상의 세부적인 모습을 특정한 방식을 통해서만 나타내야 한다는 어떤 강요에 의해 조작되는 대상이 아니다. 세 영화들은 특정 사회의 단면들과 이를 통해 제시하려는 의미들을 이미지들의 계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의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떠올리기 쉽지 않거나, 공상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미래 시대에 대한 허구들까지도 언제든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고 제시될 수 있는 것이며, <블레이드 러너>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이에 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디지털 이미지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과잉-현실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영화들이 특정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선 현실이다. 우리는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느끼는 현실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술적 수단의 발달과 함께 이런 심리적 체험은 점점 강화되고 있지만, 디지털 이미지의 과잉-현실성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영화를 포함한 현대 문화 산업을 주도하는 생산물들이 허구임에도 현실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디지털 이미지들이 계열화를 통해 질서, 인과 관계를 형성하며, 배경과 상황은 이러한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조작될 수 있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조작된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이다. 즉 기술적 조작과 계열화를 통해 상황에 대한 재현을 넘어서 특정한 의도나 의미로 형성된 이미지이다. 따라서 비주얼 시대의 이미지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종래적 방식으로 개념화하고 문자화하는 것은 지금 시대의 디지털 이미지의 본성을 간과하는 셈이다.
저자들은 이를 여러 영화들을 주제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평가 혹은 분석에 의해 정형화되고 자리 잡은 주제와는 다른 부분들을 이끌어내면서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지들을 “주체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말한다는 “이미지텔링”의 양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이러한 이미지가 말하는 바를 들으려는 시도를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마지막 장에서 이를 조심스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하나의 도상이 다양한 의도들의 개입과 함께 디지털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점을 다루면서, 저자들은 디지털 이미지가 갖는 해학적 패러디의 효과와 가능성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누구나 그 기술을 용이하게 다룰 수 있는 기기들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기기의 사용법을 숙지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며, 이런 점에서 이미지를 변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이는 누구나 이미지를 통해 짓궂은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의 장난을 통해 현실을 논리적이고 정돈된 방식으로 비판하는 대신 패러디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은 어찌되었든 일정한 형식으로 요구하고, 상황에 따라 권위의 보조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패러디에는 이러한 형식과 권위가 불필요하다. 오히려 익명을 가장하고, 의도와 무관함을 가장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이미지를 개념화한 일련의 구조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이기에 패러디의 효과는 다양한 분기로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미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분석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의 비주얼 문화를 대표하는 디지털 이미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의 효과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패러디의 효과를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만은 없다는 점은 분명한데, 지금의 문화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산업, 즉 자본의 전략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분배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이미지는 순수하게 말하는 주체가 물론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기술적 조작과 계열화된 이미지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미지는 주체라기보다는 가장된 주체, 전략적으로 주체의 자리에 기입된 또 다른 매개가 아닐까? 이미지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를 주체로 내세운 은밀한 전략들이 요구하는 바를 대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목소리에 충혈된 현대인의 눈은 과연 자본의 전략과 패러디의 효과를 구별하기에는 이미 깊은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상과 같은 일련의 물음들이 디지털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한 이미지텔링의 방법론이 정착하고 확장되기 위해 다루어져야 할 주제가 될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현대 비주얼 문화에 대해 말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장의 형성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 작가 소개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프랑스 부르고뉴대학교에서 베르그송의 방법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는 주로 비주얼 컬처, 글로컬 문화, 상상력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키워드 100으로 읽는 문화콘텐츠 입문사전』(공저),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유전자』(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글로컬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의 새로운 지형도」 등이 있다.
『비주얼 컬쳐 시대의 이해』라는 이 제목은 지금 시대의 문화가 갖는 주요한 특징을 ‘비주얼’이라는 수식을 통해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규정에 대해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시각에 작용하는 내용물들을 생산하는 활동이 과연 지금 시대의 문화에만 적용되는 특징인가? 저자들은 이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주요한 특징을 ‘비주얼’이라는 수식에 집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소나 건축, 회화에 있어 탁월한 작품들을 남긴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를 떠올려본다면 시각에 호소하는 문화적 생산물들은 대부분의 시대에 있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는 문화적 활동은 지금 시대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비주얼’ 문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떻게 ‘비주얼’은 현재의 문화적 특징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추리하기 위한 또 다른 단서에 주목해야 한다. 이 책에 붙은 부제인 ‘아날로그/디지털 이미지의 역할과 기능’은 ‘비주얼’과 ‘아날로그/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정보를 처리하고 나타내는 두 양식인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이미지가 구별된 계기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물음을 개괄하면서 이미지가 지금 시대를 설명하는 중심적 주제로 자리 잡은 현사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은밀한 전제와 함께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전제가 무엇인지 추리할 필요가 있다.
한 시대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주제들이란 늘 있기 마련이다. 그 주제는 특정 시대에 물질적, 정신적 활동이 이루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을 포괄하여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특정한 이념일 수도 있고, 주의 혹은 사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주제로서 지목되는 그 순간, 그 주제는 가능한 한 특정 시대의 문화 전반에 걸쳐 모든 활동과 결과물들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점이다. 다소 고상하게 표현된 문화 연구라 할 수 있을 예술사에서 이런 양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일종의 거시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작업의 매력은 설명의 경제성에 있다.
이에 반해 다종다양한 결과들을 하나로 포섭할 수 있는 주제들에 비해 양식이나 기법들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건축과 조소와 같이 확연하게 입증되는 대상이 아닌 한 개인의 심미안이 표현되는 회화나 문학 작품을 검토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아마도 기법과 양식이란 그 대상을 생산한 개인의 숙련과 기발함 혹은 종종 드문 천재성으로 이해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기법과 양식은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형성한 담론장에서 명명되고 결정되고 유포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법과 양식은 한 시대의 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를 보조하고 돋보이게 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설명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해설이 재생산되는 것은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을 인솔하면서 작품들을 설명하는 도슨트에게서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과 설명, 그리고 이를 유포하고 재생산하는 모든 활동은 나름의 근거들과 정당성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문화적 활동에서 기법과 양식은 특이한 지위를 획득한 것 같다. 이전의 기법과 양식이 한 개인의 신체적 습관으로 자리 잡은 고유한 표현 방법이었다면, 지금의 문화적 활동은 상대적으로 통속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문화적 생산물을 생산하는 수단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고유한 개성을 대변하며 전문적 해설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기법이 아닌 누구나 손쉽게 파악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러한 매개적 수단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며, 디지털 카메라, 스마트 폰 등 다양한 기기들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단들이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0과 1의 이진법적 배치를 통해 정보를 처리하고 생산하는 디지털 기술을 떠올리게 된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종래에는 숙련을 통해 기법을 연마한 특정 개인들만이 생산할 수 있던 문화적 산물들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용이한 기기들로 대체한 것이며, 이 기기들이 생산해내는 것이 디지털 이미지이다. 달리 말해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그 수단을 토대로 하여 대량으로 생산되는 기기들이 문화를 생산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과 이러한 기술적 산물에 의해 구현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지금 시대의 문화적 생산물 전체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가 되었음을 함축한다. 현대 문화 활동 전반은 이러한 디지털 이미지들이 맺는 계열적 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주어진 대상을 재현하는 수동적 매개가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들을 형성해내는 적극적인 생산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러한 기술적 수단의 혁명적 발전은 문화 연구에서 있어 전통적으로 시도되었던 거시적 주제를 포착하는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문화가 특이한 것은 이념과 주의와 사조의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수단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라는 이 새로운 수단은 이미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하고 계열화하여 우리의 시각에 제시한다. 디지털화된 이미지는 전통적인 시각과 재현의 문제를 아득히 넘어서서 철저하게 재구성된 이미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상 『비주얼 컬쳐 시대의 이해』의 문제 제기는 “아날로그/디지털 이미지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부제에 숨겨져 있는 셈이며, 특히 기술적 수단과 그로 인해 생산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새로운 문화적 매개이자 산출물이 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지금의 문화를 ‘비주얼’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시각에 제시되는 이미지들이 디지털화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문화적 생산물이 영화와 게임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TV, 애니메이션 등과 더불어 영화와 게임이야말로 디지털 이미지들을 고유한 방식으로 계열화하여 제시하는 문화 산업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계열화를 통해 형성되는 디지털 이미지는 결코 허구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을 넘어선 일종의 ‘과잉-현실’이라는 점인데, 디지털 기기들은 현대인들에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허구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론에서 제시되는 ‘이미지텔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정립시키려는 노력의 이유를 추리해 볼 수 있다. 저자들은 그간 현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주요한 분석 방식으로 자리 잡은 ‘스토리텔링’, 즉 개념과 스토리를 통해 이미지를 설명하고 구조화하려는 시도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우리가 간략히 검토한 디지털 이미지의 특이성을 간과한 채, 문자를 통해 이미지를 포획하고 획정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자가 아닌 디지털 이미지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 비주얼 시대의 이미지는 디지털화된 이미지를 의미하며, 디지털 이미지들은 우리가 속해 있는 물리계, 사회, 법과 같은 다양한 질서를 따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예컨대 특정 시대의 사회적 배경이나 질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관을 잘 보여주는 영화를 떠올려보자. 책에서 각각의 챕터를 차지하고 있는 , <아웃 오브 아프리카>, <세 얼간이>는 이러한 요소들을 부각하고 재현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들은 각각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20세기 일본의 재일동포사회, 식민지 아프리카 사회, 21세기의 인도 대학의 교육관에 종속되고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배경들은 각 장면들, 즉 특정한 방식으로 계획되어 촬영된 디지털 이미지들의 계열화의 결과로 나타난다.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시대의 질서나 과거 시대상의 세부적인 모습을 특정한 방식을 통해서만 나타내야 한다는 어떤 강요에 의해 조작되는 대상이 아니다. 세 영화들은 특정 사회의 단면들과 이를 통해 제시하려는 의미들을 이미지들의 계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의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떠올리기 쉽지 않거나, 공상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미래 시대에 대한 허구들까지도 언제든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고 제시될 수 있는 것이며, <블레이드 러너>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이에 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디지털 이미지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과잉-현실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영화들이 특정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선 현실이다. 우리는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느끼는 현실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술적 수단의 발달과 함께 이런 심리적 체험은 점점 강화되고 있지만, 디지털 이미지의 과잉-현실성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영화를 포함한 현대 문화 산업을 주도하는 생산물들이 허구임에도 현실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디지털 이미지들이 계열화를 통해 질서, 인과 관계를 형성하며, 배경과 상황은 이러한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조작될 수 있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조작된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이다. 즉 기술적 조작과 계열화를 통해 상황에 대한 재현을 넘어서 특정한 의도나 의미로 형성된 이미지이다. 따라서 비주얼 시대의 이미지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종래적 방식으로 개념화하고 문자화하는 것은 지금 시대의 디지털 이미지의 본성을 간과하는 셈이다.
저자들은 이를 여러 영화들을 주제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평가 혹은 분석에 의해 정형화되고 자리 잡은 주제와는 다른 부분들을 이끌어내면서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지들을 “주체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말한다는 “이미지텔링”의 양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이러한 이미지가 말하는 바를 들으려는 시도를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마지막 장에서 이를 조심스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하나의 도상이 다양한 의도들의 개입과 함께 디지털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점을 다루면서, 저자들은 디지털 이미지가 갖는 해학적 패러디의 효과와 가능성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누구나 그 기술을 용이하게 다룰 수 있는 기기들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기기의 사용법을 숙지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며, 이런 점에서 이미지를 변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이는 누구나 이미지를 통해 짓궂은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의 장난을 통해 현실을 논리적이고 정돈된 방식으로 비판하는 대신 패러디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은 어찌되었든 일정한 형식으로 요구하고, 상황에 따라 권위의 보조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패러디에는 이러한 형식과 권위가 불필요하다. 오히려 익명을 가장하고, 의도와 무관함을 가장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이미지를 개념화한 일련의 구조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이기에 패러디의 효과는 다양한 분기로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미지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분석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의 비주얼 문화를 대표하는 디지털 이미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의 효과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패러디의 효과를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만은 없다는 점은 분명한데, 지금의 문화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산업, 즉 자본의 전략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디지털 이미지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분배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이미지는 순수하게 말하는 주체가 물론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기술적 조작과 계열화된 이미지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짧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미지는 주체라기보다는 가장된 주체, 전략적으로 주체의 자리에 기입된 또 다른 매개가 아닐까? 이미지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를 주체로 내세운 은밀한 전략들이 요구하는 바를 대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목소리에 충혈된 현대인의 눈은 과연 자본의 전략과 패러디의 효과를 구별하기에는 이미 깊은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상과 같은 일련의 물음들이 디지털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한 이미지텔링의 방법론이 정착하고 확장되기 위해 다루어져야 할 주제가 될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현대 비주얼 문화에 대해 말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장의 형성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 작가 소개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프랑스 부르고뉴대학교에서 베르그송의 방법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는 주로 비주얼 컬처, 글로컬 문화, 상상력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키워드 100으로 읽는 문화콘텐츠 입문사전』(공저),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유전자』(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글로컬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의 새로운 지형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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