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 책 [돈, 탐욕, 神]의 밑바탕은 저자가 풋내기 성인일 때 품었던 한 가지 의문이다. 과연 자본주의가 기독교의 도덕성 및 세계관과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 윤리와 모순된다면, 크리스천인 자신은 자본주의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답을 찾았고, 자본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요소들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자유시장경제가 번성하려면 경쟁만이 아니라 법의 지배와 협력, 안정된 가정, 자기희생, 만족을 뒤로 미룬 헌신, 미래의 희망에 근거한 기꺼운 위험 감수와 같은 미덕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나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들이 부닥친 어려운 문제들을 풀려면, 경제적인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본주의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랬듯이,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흐리게 하는 뿌연 안개를 걷어내라고 권한다. 아래의 것들이 그가 말하는, 우리의 잘못된 믿음들에서 비롯하는 의문들과 그것들에 대한 그의 답이다.
1.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곧, ‘무엇과 비교해서 공정하냐’는 것이다. 어느 사회가 그것을 대신할 사회보다 더 공정하다면, 만인 평등의 유토피아에 비해 ‘불공정하다’고 해서 헐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유토피아와 비교한다면, 어떤 현실 사회는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도 좋아 보일 수 없다. 모든 것이 시원찮게 생각되고 왜곡되어 보일 것이다. 시장에서의 임금과 노동의 자유로운 교환이 노예제도처럼 보이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은 적자생존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심지어는 도둑질과 헛갈릴 것이다. 또 은행 업무는 고리대금이나 착취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한 체제들끼리 비교한다면, 현대 자본주의는 어느 것보다 공정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지금 모습의 우리 사회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공정한 사회,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노력한다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는 그 같은 망상에 이끌린 행동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20세기에 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사회주의만큼 극명하게 보여준 예는 없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다면서, 역시 사회주의를 좇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2. 좋은 의도는 결과에 우선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철학자 에티엔느 질송은 “경건한 마음이 솜씨를 대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올바른 의도를 가졌다는 것과 일을 올바르게 한다는 것은 별개라는 의미이다. 탑승객들을 염려하여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고자 하는 비행사의 바람이 비행기를 실제로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그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들에서 우리의 동기를 믿고 안심하는 것은 도덕적 방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에는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가 따른다. 즉, 도움이 되거나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최저생활임금, 공정무역, 대외원조, 정부 복지사업 등의 경우가 그렇다. 예컨대 대외원조는 여러 차례의 재난구호 원조처럼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제3세계의 빈곤 해결책으로는 완전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 나라를 빈곤하게 만드는 부패한 독재자들의 버팀목 구실을 했을 뿐이다. 많은 정부 복지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인들은 혼외출산과 아동빈곤, 노숙, 약물남용 등 모든 사회적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기대해왔다. 이와 함께 정부의 몸집은 계속 커졌다. 미국 역사의 절반이 훨씬 넘는 기간에 걸쳐 연방정부의 지출은 국민 1인당 연간 20달러(현재 가치) 안팎이었지만, 지금은 무려 1인당 1만 달러가 훨씬 넘는다. 1960년대 중반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빈곤과의 전쟁’은 ‘빈민과의 전쟁’이 되어버렸다. 수조 달러를 쏟아 붓고도 승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쁜 경제 ? 사회적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미국 사회복지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즉 가족의 붕괴와 사생아 출산, 다음 세대로 떠넘겨지는 의존 상태 등은 모든 통계에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동정심에서는 오래 갔지만 분별력에서는 곧 바닥을 드러낸, 인기를 얻었던 많은 정책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3. 자본주의는 불공평한 경쟁을 부추기지 않는가?
흔히 자본주의는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냉혹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거래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는, 이른바 제로섬 게임의 착각에 빠졌을 때의 생각이다. 건강한 자본주의는 강자가 약자를 파괴하는 정글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이 있는 한 경쟁은 언제나 있지만, 법의 지배에 근거한 시장경제에서 힘의 논리는 경쟁자를 앞서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자유시장의 모든 참여자는 소비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힘을 다한다. 경쟁자보다 소비자들에게 더 잘 봉사하고자 하는 성실과 창의가 경쟁의 토대이다. 결코 자본주의가 불공평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장의 경쟁은 거의 언제나 독점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경쟁보다는 자유로운 상호 협력과 의존이다. 가령 자그마한 MP3 플레이어 하나가 시장에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이 그것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것은 모른 채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수십 가지의 언어를 말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들의 상호 협력과 의존이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협력과 의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자유시장이다. 물론 MP3 플레이어를 머릿속에 그리고 또 실현시키는 기업가의 비전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첫 단계이다.
4. 내가 부유해지면 누군가는 가난해지지 않는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난이 세계 어디서나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의 진정한 걱정은 어떤 사람들은 부유한데 다른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가 다른 사람의 가난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내가 부유해지면 누군가 그만큼 가난해지지 않는가 하는 걱정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풍요의 시대에 살게 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빈곤에 대해 일종의 죄의식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갖기가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은 한 사회의 부가 고정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부는 옮겨질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유물론적 사고에 갇힌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한 사회의 부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커졌다. 새로운 부는 물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생각하고 특징짓고 변형시키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창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부가 당신의 빈곤을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고유의 악덕은 축복의 불공평한 배분이다”라는 처칠의 언명은 지금도 우리를 붙잡는다. 그래서 국가를 공정한 부의 분배자로 만들려는 유혹 또한 우리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국가는 물론 그 어떤 조직도 그런 구실을 할 수 없을뿐더러, 열정적으로 그 같은 시도를 했던 곳마다 재앙적인 결과를 겪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질병이 문제이듯 빈곤 또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옳다. 그러나 질병의 문제가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프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빈곤의 문제도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빈곤의 유일한 해결책은 부의 창출이다.
5. 자본주의의 토대는 탐욕이 아닌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토대가 탐욕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 비판자는 물론 열렬한 옹호자들도 그렇다. 하지만 결코 자본주의는 탐욕에 근거하지 않는다. 탐욕은 기독교의 일곱 가지 대죄 가운데 하나이듯 인간의 가장 몹쓸 악덕의 하나이다. 조지 길더는 『부와 빈곤Wealth and Poverty』에서, 탐욕스런 사업가는 부르주아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인물로서 “자본주의의 전형이 아니라 정반대의 존재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기업가를 미래의 불확실한 호혜를 기대하고 이웃 부족에게 먼저 선물과 찬사를 건넨 원시사회의 부족 우두머리에 비유한다.
실로 현대 자본주의는 많은 미덕을 요구한다. 일테면 기업가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을 축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향락주의자와 달리, 기업가는 자기 부의 대부분을 소모하지 않고 챙겨둔다. 하지만 수전노나 겁쟁이와는 달리, 모은 것을 감춰놓는 대신 스스로 위험에 내맡긴다. 회의론자와 달리, 그는 자신의 이웃과 파트너, 사회, 고용인 그리고 ‘우주의 보상 논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생각한다. 충동적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언제나 선택에 신중하다. 틀에 박힌 이들과 달리,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원의 새로운 창조 ? 결합 방법을 스스로 찾는다. 탐욕이 아니라 이 같은 미덕들이 바로 로버트 시리코가 ‘기업가의 소명’이라고 부른 것의 본질이며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6. 언제나 기독교는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았는가?
현대인 대부분은 돈을 사고파는 것 자체에 죄의식 따위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인류 역사의 수백 년 동안 위대한 철학자와 기독교 신학자 모두 돈에 이자를 붙이는 것을 고리대금이라고 부르며, 지독한 죄악이라고 설파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사업 투자는 물론 이윤의 추구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돈에 이자를 붙이는 것, 즉 돈을 빌려주고 이익을 얻는 것은 오랫동안 반대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그것의 태동을 막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돈을 구덩이 속의 메마른 불임자에서 다산의 상징자로 변모하게 한 은행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절대적 요소라고 본 것은 맞지만,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로막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존 누난의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고리대금을 둘러싼 기독교의 지루한 논쟁이 서구가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리대금에 관한 학술적인 이론이 경제학의 기초 이론이다. 실로 그것이 서구에 알려진 경제학의 최초의 시도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을 도왔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7. 자본주의는 추한 소비지상주의문화를 낳지 않는가?
‘자본주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도시의 불규칙한 팽창, 탐욕스런 사업가, 공장식 축산, 세계 구석구석에 파고든 맥도널드 햄버거 그리고 어디서든 끊임없이 들리는 “소비하고 소비하라”는 외침을 머리에 떠올린다. 오늘날 소비를 부추기는 메시지는 더없이 크고 분명하다. 우리가 무의미한 무한경쟁을 무시하려고 애쓸 때마다 온갖 광고가 눈과 귀를 유혹한다. 결국 우리는 단지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두 해마다 멀쩡한 컴퓨터와 휴대폰을 갈아치운다.
하지만 소비지상주의는 자본주의 관습 및 제도와 전적으로 상반된다. 바로 이것이 소비자 지출에 관한 통계가 경제의 장기적인 건강을 나타내는 믿을 만한 지표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소비는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부의 창출과 축적 및 투자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소비지상주의문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은 자유로운 시장과 자유로운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 착각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고취하고, (일테면 탐욕 같은) 우리의 저급한 본능도 모두에게 매력적인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한몫 거들 수 있게 이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선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8. 우리는 모든 자원을 거덜낼 것인가?
지구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우리는 토끼처럼 번식하고 메뚜기처럼 먹어서, 곧 식량 ? 경지 ? 에너지가 바닥날 것이다. 만일 지금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온 말들이다. 이미 19세기 초에 토머스 맬서스는 식량 부족에 따른 광범위한 기근을 예언했고, 1972년 로마클럽은 우리가 모든 자원을 거덜내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현대 자본주의는 한정된 자원을 지금 모두 써버려서 미래 세대들의 몫을 훔치는 폰지 사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정반대이다. 인류 역사에서 거의 모든 자원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 흔하고 풍부해졌으며 더 값싸졌다. 자원은 물질에 불과한 것들이 아니다. 자원은 사람과 물질이 만나는 곳에서 나타나며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창출된다. 우리는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자원을 찾아내고 또 창조한다. 게다가 갈수록 많은 물질적 필요가 ‘정보’라고 하는 정신적 자원으로 대체되고 있다. 결국 줄리안 사이먼이 ‘궁극의 자원’이라고 부른 것,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인간의 창조적인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바로 사람이 궁극의 자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인간의 창의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는 한, 귀중한 자원이 고갈되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식량이나 에너지가 바닥나지도 않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제이 리처즈 Jay W. Richards
미국 유수의 민간 싱크탱크인 IFWE(Institute for Faith, Work, and Economics)와 Discovery Institute의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과 논문, 칼럼을 썼으며 2010년『돈 탐욕 神』으로 템플턴상(Tempelton Enterprise Award)을 받았다. Acton Institute의 지원으로 ‘기업가의 사명’, ‘자유의 탄생’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흙의 경이’, ‘선택받은 행성’ 등 그의 책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세계 곳곳의 연구소와 대학, 그리고 미국 의회에서 강연을 했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 ?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자 : 송대원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E. F. 슈마허의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A Guide for the Perplexed』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서론. 크리스천이 자본주의자일 수 있는가?
1장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는가?
2장 좋은 의도는 결과에 우선하는가?
3장 자본주의는 불공평한 경쟁을 부추기지 않는가?
4장 내가 부유해지면 누군가는 가난해지지 않는가?
5장 자본주의의 토대는 탐욕이 아닌가?
6장 언제나 기독교는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았는가?
7장 자본주의는 추한 소비지상주의 문화를 낳지 않는가?
8장 우리는 모든 자원을 거덜낼 것인가?
결론. 모든 것이 함께하여 선을 이루게 하라
추천하는 글. 자본주의 미덕을 다시 생각한다 - 이상돈(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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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돈, 탐욕, 神]의 밑바탕은 저자가 풋내기 성인일 때 품었던 한 가지 의문이다. 과연 자본주의가 기독교의 도덕성 및 세계관과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 윤리와 모순된다면, 크리스천인 자신은 자본주의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답을 찾았고, 자본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요소들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자유시장경제가 번성하려면 경쟁만이 아니라 법의 지배와 협력, 안정된 가정, 자기희생, 만족을 뒤로 미룬 헌신, 미래의 희망에 근거한 기꺼운 위험 감수와 같은 미덕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나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들이 부닥친 어려운 문제들을 풀려면, 경제적인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본주의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랬듯이, 가장 먼저 우리의 생각을 흐리게 하는 뿌연 안개를 걷어내라고 권한다. 아래의 것들이 그가 말하는, 우리의 잘못된 믿음들에서 비롯하는 의문들과 그것들에 대한 그의 답이다.
1.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곧, ‘무엇과 비교해서 공정하냐’는 것이다. 어느 사회가 그것을 대신할 사회보다 더 공정하다면, 만인 평등의 유토피아에 비해 ‘불공정하다’고 해서 헐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유토피아와 비교한다면, 어떤 현실 사회는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도 좋아 보일 수 없다. 모든 것이 시원찮게 생각되고 왜곡되어 보일 것이다. 시장에서의 임금과 노동의 자유로운 교환이 노예제도처럼 보이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은 적자생존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심지어는 도둑질과 헛갈릴 것이다. 또 은행 업무는 고리대금이나 착취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한 체제들끼리 비교한다면, 현대 자본주의는 어느 것보다 공정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지금 모습의 우리 사회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공정한 사회,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노력한다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우리는 그 같은 망상에 이끌린 행동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20세기에 배웠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사회주의만큼 극명하게 보여준 예는 없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찾는다면서, 역시 사회주의를 좇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2. 좋은 의도는 결과에 우선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철학자 에티엔느 질송은 “경건한 마음이 솜씨를 대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올바른 의도를 가졌다는 것과 일을 올바르게 한다는 것은 별개라는 의미이다. 탑승객들을 염려하여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고자 하는 비행사의 바람이 비행기를 실제로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그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들에서 우리의 동기를 믿고 안심하는 것은 도덕적 방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에는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가 따른다. 즉, 도움이 되거나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최저생활임금, 공정무역, 대외원조, 정부 복지사업 등의 경우가 그렇다. 예컨대 대외원조는 여러 차례의 재난구호 원조처럼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제3세계의 빈곤 해결책으로는 완전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 나라를 빈곤하게 만드는 부패한 독재자들의 버팀목 구실을 했을 뿐이다. 많은 정부 복지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인들은 혼외출산과 아동빈곤, 노숙, 약물남용 등 모든 사회적 문제를 정부가 해결해주기를 기대해왔다. 이와 함께 정부의 몸집은 계속 커졌다. 미국 역사의 절반이 훨씬 넘는 기간에 걸쳐 연방정부의 지출은 국민 1인당 연간 20달러(현재 가치) 안팎이었지만, 지금은 무려 1인당 1만 달러가 훨씬 넘는다. 1960년대 중반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빈곤과의 전쟁’은 ‘빈민과의 전쟁’이 되어버렸다. 수조 달러를 쏟아 붓고도 승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쁜 경제 ? 사회적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미국 사회복지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즉 가족의 붕괴와 사생아 출산, 다음 세대로 떠넘겨지는 의존 상태 등은 모든 통계에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동정심에서는 오래 갔지만 분별력에서는 곧 바닥을 드러낸, 인기를 얻었던 많은 정책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3. 자본주의는 불공평한 경쟁을 부추기지 않는가?
흔히 자본주의는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냉혹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거래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는, 이른바 제로섬 게임의 착각에 빠졌을 때의 생각이다. 건강한 자본주의는 강자가 약자를 파괴하는 정글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이 있는 한 경쟁은 언제나 있지만, 법의 지배에 근거한 시장경제에서 힘의 논리는 경쟁자를 앞서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자유시장의 모든 참여자는 소비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힘을 다한다. 경쟁자보다 소비자들에게 더 잘 봉사하고자 하는 성실과 창의가 경쟁의 토대이다. 결코 자본주의가 불공평한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장의 경쟁은 거의 언제나 독점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경쟁보다는 자유로운 상호 협력과 의존이다. 가령 자그마한 MP3 플레이어 하나가 시장에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이 그것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것은 모른 채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수십 가지의 언어를 말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들의 상호 협력과 의존이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협력과 의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자유시장이다. 물론 MP3 플레이어를 머릿속에 그리고 또 실현시키는 기업가의 비전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첫 단계이다.
4. 내가 부유해지면 누군가는 가난해지지 않는가?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난이 세계 어디서나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의 진정한 걱정은 어떤 사람들은 부유한데 다른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가 다른 사람의 가난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내가 부유해지면 누군가 그만큼 가난해지지 않는가 하는 걱정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풍요의 시대에 살게 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빈곤에 대해 일종의 죄의식까지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갖기가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은 한 사회의 부가 고정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부는 옮겨질 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유물론적 사고에 갇힌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한 사회의 부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커졌다. 새로운 부는 물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생각하고 특징짓고 변형시키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창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부가 당신의 빈곤을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고유의 악덕은 축복의 불공평한 배분이다”라는 처칠의 언명은 지금도 우리를 붙잡는다. 그래서 국가를 공정한 부의 분배자로 만들려는 유혹 또한 우리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국가는 물론 그 어떤 조직도 그런 구실을 할 수 없을뿐더러, 열정적으로 그 같은 시도를 했던 곳마다 재앙적인 결과를 겪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질병이 문제이듯 빈곤 또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옳다. 그러나 질병의 문제가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프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빈곤의 문제도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빈곤의 유일한 해결책은 부의 창출이다.
5. 자본주의의 토대는 탐욕이 아닌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토대가 탐욕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 비판자는 물론 열렬한 옹호자들도 그렇다. 하지만 결코 자본주의는 탐욕에 근거하지 않는다. 탐욕은 기독교의 일곱 가지 대죄 가운데 하나이듯 인간의 가장 몹쓸 악덕의 하나이다. 조지 길더는 『부와 빈곤Wealth and Poverty』에서, 탐욕스런 사업가는 부르주아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인물로서 “자본주의의 전형이 아니라 정반대의 존재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기업가를 미래의 불확실한 호혜를 기대하고 이웃 부족에게 먼저 선물과 찬사를 건넨 원시사회의 부족 우두머리에 비유한다.
실로 현대 자본주의는 많은 미덕을 요구한다. 일테면 기업가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을 축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향락주의자와 달리, 기업가는 자기 부의 대부분을 소모하지 않고 챙겨둔다. 하지만 수전노나 겁쟁이와는 달리, 모은 것을 감춰놓는 대신 스스로 위험에 내맡긴다. 회의론자와 달리, 그는 자신의 이웃과 파트너, 사회, 고용인 그리고 ‘우주의 보상 논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생각한다. 충동적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언제나 선택에 신중하다. 틀에 박힌 이들과 달리,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원의 새로운 창조 ? 결합 방법을 스스로 찾는다. 탐욕이 아니라 이 같은 미덕들이 바로 로버트 시리코가 ‘기업가의 소명’이라고 부른 것의 본질이며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6. 언제나 기독교는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았는가?
현대인 대부분은 돈을 사고파는 것 자체에 죄의식 따위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인류 역사의 수백 년 동안 위대한 철학자와 기독교 신학자 모두 돈에 이자를 붙이는 것을 고리대금이라고 부르며, 지독한 죄악이라고 설파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사업 투자는 물론 이윤의 추구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돈에 이자를 붙이는 것, 즉 돈을 빌려주고 이익을 얻는 것은 오랫동안 반대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반대하여 그것의 태동을 막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돈을 구덩이 속의 메마른 불임자에서 다산의 상징자로 변모하게 한 은행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절대적 요소라고 본 것은 맞지만,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로막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존 누난의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고리대금을 둘러싼 기독교의 지루한 논쟁이 서구가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리대금에 관한 학술적인 이론이 경제학의 기초 이론이다. 실로 그것이 서구에 알려진 경제학의 최초의 시도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을 도왔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7. 자본주의는 추한 소비지상주의문화를 낳지 않는가?
‘자본주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도시의 불규칙한 팽창, 탐욕스런 사업가, 공장식 축산, 세계 구석구석에 파고든 맥도널드 햄버거 그리고 어디서든 끊임없이 들리는 “소비하고 소비하라”는 외침을 머리에 떠올린다. 오늘날 소비를 부추기는 메시지는 더없이 크고 분명하다. 우리가 무의미한 무한경쟁을 무시하려고 애쓸 때마다 온갖 광고가 눈과 귀를 유혹한다. 결국 우리는 단지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두 해마다 멀쩡한 컴퓨터와 휴대폰을 갈아치운다.
하지만 소비지상주의는 자본주의 관습 및 제도와 전적으로 상반된다. 바로 이것이 소비자 지출에 관한 통계가 경제의 장기적인 건강을 나타내는 믿을 만한 지표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소비는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부의 창출과 축적 및 투자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소비지상주의문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은 자유로운 시장과 자유로운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 착각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고취하고, (일테면 탐욕 같은) 우리의 저급한 본능도 모두에게 매력적인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한몫 거들 수 있게 이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선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8. 우리는 모든 자원을 거덜낼 것인가?
지구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우리는 토끼처럼 번식하고 메뚜기처럼 먹어서, 곧 식량 ? 경지 ? 에너지가 바닥날 것이다. 만일 지금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온 말들이다. 이미 19세기 초에 토머스 맬서스는 식량 부족에 따른 광범위한 기근을 예언했고, 1972년 로마클럽은 우리가 모든 자원을 거덜내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현대 자본주의는 한정된 자원을 지금 모두 써버려서 미래 세대들의 몫을 훔치는 폰지 사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정반대이다. 인류 역사에서 거의 모든 자원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 흔하고 풍부해졌으며 더 값싸졌다. 자원은 물질에 불과한 것들이 아니다. 자원은 사람과 물질이 만나는 곳에서 나타나며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창출된다. 우리는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자원을 찾아내고 또 창조한다. 게다가 갈수록 많은 물질적 필요가 ‘정보’라고 하는 정신적 자원으로 대체되고 있다. 결국 줄리안 사이먼이 ‘궁극의 자원’이라고 부른 것,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인간의 창조적인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바로 사람이 궁극의 자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인간의 창의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는 한, 귀중한 자원이 고갈되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식량이나 에너지가 바닥나지도 않을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제이 리처즈 Jay W. Richards
미국 유수의 민간 싱크탱크인 IFWE(Institute for Faith, Work, and Economics)와 Discovery Institute의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과 논문, 칼럼을 썼으며 2010년『돈 탐욕 神』으로 템플턴상(Tempelton Enterprise Award)을 받았다. Acton Institute의 지원으로 ‘기업가의 사명’, ‘자유의 탄생’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흙의 경이’, ‘선택받은 행성’ 등 그의 책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세계 곳곳의 연구소와 대학, 그리고 미국 의회에서 강연을 했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 ?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자 : 송대원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E. F. 슈마허의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A Guide for the Perplexed』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서론. 크리스천이 자본주의자일 수 있는가?
1장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는가?
2장 좋은 의도는 결과에 우선하는가?
3장 자본주의는 불공평한 경쟁을 부추기지 않는가?
4장 내가 부유해지면 누군가는 가난해지지 않는가?
5장 자본주의의 토대는 탐욕이 아닌가?
6장 언제나 기독교는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았는가?
7장 자본주의는 추한 소비지상주의 문화를 낳지 않는가?
8장 우리는 모든 자원을 거덜낼 것인가?
결론. 모든 것이 함께하여 선을 이루게 하라
추천하는 글. 자본주의 미덕을 다시 생각한다 - 이상돈(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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