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머리말 : 민주주의를 향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지금 우리는 이제 막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생전에 새로운 1천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 그것이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 보람이 될지 부끄러움이 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우리 모두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나간 20세기에 대한 냉정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으며, 또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나의 회고록은 일단은 나와 나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지나온 날들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내가 태어났던 암흑의 일제시대부터, 1998년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전 과정은 바로 파란에 찬 우리의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내가 헤쳐 나온 20세기 후반의 개인사는 그대로 한국의 현대정치사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내 생애는 우리나라 현대정치사를 관통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의 현장은 한국 현대정치의 생생한 현장 바로 그것이었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원내총무, 야당총재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마침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나는 운명적으로 정치를 껴안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광의 시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 오랜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있었다. 최연소 야당총재, 최다선 원내총무라는 기록 뒤에는 초산테러, 국회의원직 제명, 연금, 단식투쟁 등 현대사의 험난한 파도와 고뇌의 깊은 골짜기를 거쳐 나와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당사에는 5백여 개의 정당들이 출현했다가 포말처럼 사라졌다. 막강한 조직과 거대한 힘을 자랑하던 집권당도 권력을 잃으면 스르르 소멸해 갔다. 그런 정치풍토 속에서도 한민당→민국당→민주당→민정당→신민당→통일민주당으로 한국 야당의 숨결은 연면히 이어져 왔다. 야당의 생명력이 이렇듯 끈질길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국민의 염원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현대 한국정치의 현장을 온몸을 다 바쳐 지켜 낼 수 있었던 것도,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야당의 전통과 나의 신념이 또한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게 하였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민주주의, 그것은 나를 지탱해 주고 저 혹독한 군사독재의 한가운데서도 나의 전의를 불타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야당의 길, 그리고 나의 길은 민주주의를 막아 선 겹겹의 벽에 대한 도전과 좌절, 그리고 재도전의 연속이었다.
야당의 성공적인 도전이 만들어 낸 기회는 그때마다 불행과 비극까지 겹쳤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은 이 나라 야당을 정권교체의 단계에까지 이끌어 올렸으나, 갑작스런 그 분들의 서거로 우리들의 희망은 무너졌다. 1960년 4월혁명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 땅에 안겨 줬지만, 5·16 군사쿠데타가 그 싹을 무참히 짓밟아 버림으로써 역사의 시계를 30년이나 거꾸로 되돌려놓았다.
해공과 유석은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그리고 야당사에서 굵은 발자국을 남겼다. 나는 이들 두 분의 뒤를 이은 정통야당의 적자(嫡子)로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전두환에 이르는 30년 군사독재의 전 기간에 걸쳐,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내 한 몸을 던져 불의를 고발, 권위주의 군부통치에 맞서 싸웠다. 옛말에 “하늘이 나를 냈으니 반드시 재목으로 쓸 데가 있다”(天生我 材有必用)고 했는데, 나는 하늘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나를 쓰려 한다고 믿었다. 역사적 시기마다 시대적 소명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에겐 바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소명감과 열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저 힘들고 고난에 찬 투쟁을 견뎌 왔을 것인가. 누르면 누를수록 불사조처럼 일어서고 또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인가. 스스로 내 몸을 던져 민주주의의 불씨를 살려 낼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투쟁에서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싸웠다. 1983년, 전두환 독재에 맞서 죽음을 건 단식투쟁을 할 때도 나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나는 항상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웠다. 나는 또한 부끄러운 타협을 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해 내고자 하는 내 신념을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할 때에도 나는 “한번 살기 위하여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한번 죽어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면서 구차한 타협을 단호히 거부했다. 나는 거짓과 위선, 그리고 비겁을 가장 큰 죄악으로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싸워 왔다.
나는 전 생애를 통해 온 국민들의 성원과 격려를 자양으로 항상 다시 일어났고, 또 그것을 활력소로 삼아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나는 독재적 억압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을 한시도 잊거나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국민과 함께 있으려 했고, 또 함께 있었다. 나는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캄캄한 암흑 속의 나날에도 국민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희망의 다짐이기도 했다. 또한 국민은 그때마다 나에게 큰 희망의 메아리로 되돌려줬다. 이렇게 나는 국민과 더불어 민주화의 길을 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던 순간, 마침내 마침내 국민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는 감동으로 나는 눈물을 흘렸고,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냐를 되새기면서 마음속에 각오를 다졌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벅찬 감격으로 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나는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군의 개혁을 단행했으며, 전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함으로써 이 나라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시켰다.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 대한민국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으로서의 틀과 내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국민과 더불어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해, 그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정착시켰다는 자부심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이룩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대통령으로서 혼신의 노력을 다 바쳤다. 지자제 실시 문제와 관련하여 안기부의 정치개입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지체없이 안기부에 그 책임을 물었다. 한번 잘못되기는 쉬워도 그것을 바로잡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조그마한 위험도 초기에 도려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단호한 의지만이 민주주의를 지켜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국민의 깨어 있는 의식만이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회고록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룩되어 왔는가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단순한 회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해방 후 반세기에 걸쳐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호소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내가 그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걸어왔던 이 나라의 현대정치사, 민주주의의 역사를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특히 1998년 2월 청와대를 나오면서, 이것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작업이요 소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정치는 모든 진실을 어둠 속에 묻어 버린다. 이미 우리 시대의 진실, 민주화를 향한 우리 국민의 피나는 노력은 박정희·전두환 두 군사독재정권의 정보공작정치에 의해 그 원형이 파괴·유린된 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했어야 할 우리 언론들은 진실을 왜곡하거나, 심지어는 보도조차 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발 한발 우리 발로 다가왔듯이, 그 기록도 바로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 없는 역사는 한낱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그것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역사의 교훈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역대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기록을 남긴 이들은 드물다. 더구나 역대 대통령들의 경우,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생애에 대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예는 전무(全無)한 실정이다. 초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보내던 중 타계했고, 박정희의 경우 부하의 총탄에 맞아 살해되는 등, 유고(有故)를 당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기에는 역사적 객관성이나 도덕적 정당성에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중학시절부터 나는 비교적 소상하게 일기를 적는 습관을 지켜 왔다. 날마다의 일기는 내 삶의 축도로서, 거기에는 내 자신의 고뇌와 긴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내 생애를 담아 온 나의 기록들이 지금은 내게 남아 있지 않다. 박정희·전두환 두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통해 내 집은 수차에 걸쳐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때 해방 이후 30년 이상 기록해 온 내 ‘정신의 유산’과 사진, 메모 등 모든 기록물들을 탈취당했다. 일기가 기화가 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 조사를 받는 등 피해를 입어야 했기 때문에 일기 쓰는 습관을 한때 중단한 적도 있었다. 이리하여 그 당시 매일매일 일어났던 정치적 사건이나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왔던 현장은 기록 아닌 기억 속에 저장해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발 이 땅에 소중한 개인의 기록을 적을 수도 없는 그런 시절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 언론이란 기억의 연상작용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객관적인 기록으로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기와 메모, 사진 등 일체의 기록을 빼앗긴 채 흘러간 50여년의 세월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난 1년 10개월여에 걸쳐 사방에 흩어져 있는 나의 족적들을 모아들였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맞추어 보면 텅 빈 공간도 있었고, 연속성이 끊어진 시간도 있었다. 그것을 되살려 내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일기마저 빼앗아 가는 군사정치문화의 행태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단 한 권의 일기장이 기적같이 내게 돌아왔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은 것 같은 그때의 환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독재자들은 가택수색을 통해 나의 개인기록을 탈취해 갔을 뿐만 아니라 언론과 출판을 검열·통제함으로써 나를 비롯한 민주화투쟁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들을 역사에서 지워 버렸다. 국내의 경우 민주화투쟁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미 필름조차 남아 있지 않거나 가위로 오려진 채 ‘검열’이라는 도장에 눌려 아직도 신음하고 있었다. 외신들마저 국내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검열 때문에 이곳저곳이 흉물스럽게 잘려 나가 있었다. 나는 부득이하게 자료를 찾기 위해 뉴욕이나 워싱턴, 도쿄나 모스크바에까지 수소문을 해야 했다.
그 동안 각종 사진과 자료들을 기꺼이 제공해 준 국내외 여러분께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또한 이렇게라도 엮어 놓고 보니, 그 동안 나에게 내 생애 전부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간곡히 권유해 준 여러분들께도 그 따뜻하고 정성스런 애정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많은 점에서 누락과 비약도 있을 것이요, 경중(輕重)과 선후(先後)가 뒤바뀐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회고록은 결코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민주화의 도정을 같이했던 동지들, 그리고 국민 여러분과 함께 쓰고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빠진 것을 보완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땀 흘리며 몸 바쳤던 고통과 고뇌, 그리고 기쁨의 순간들을 이 책에서 가감(加減) 없이 적으려 했다. 또한 그때그때 나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밝히고자 했다. 거짓은 국민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 H. 카는 “역사 없이 자유가 없고, 반대로 자유 없이 역사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항상 떠올리면서 이 회고록을 썼다. 또 나는 현대정치사를 이제 내 손으로 쓴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이 기록이 한국 현대정치사를 위한 생생한 현장의 증언이 되고, 아직은 불안한 이 나라 민주화에 튼튼한 받침대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아울러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반세기에 걸쳐 우리가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화를 바탕으로 ‘21세기 위대한 한민족시대’를 열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내 손명순(孫命順)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내는 평생 내 곁에서 모든 영욕을 함께 했으며, 내가 어려움을 겪었던 고비고비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통해 나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책을 민주화의 도정에서 먼저 가신 분들, 민주투쟁의 현장에서 고난과 시련을 같이했던 동지들, 그리고 나에게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주셨던 민주 국민 여러분께 바친다.
▣ 작가 소개
저 : 김영삼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54년 당시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2015년 11월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지은 책으로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 <40대기수론>, <나와 내 조국의 진실>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제1권
서문 민주주의를 향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제1부 찬란한 예감
1. 어머니와 바다, 내 삶의 터전
2. 추억 속의 앨범, 학창시절
3. 이천 피난시절
4. 손명순과의 결혼 이야기
5. 최연소로 정계에 진출
제2부 야당시절의 초상화
1. 야당의 맹장
2. 5·16쿠데타 전면 부정
3. 바깥에서 본 조국
4. 원내총무 5선 기록
5. 지도자의 길
제3부 40대기수론
1. 초산테러
2. 40대 기수로 돛을 올리다
머리말 : 민주주의를 향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지금 우리는 이제 막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생전에 새로운 1천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 그것이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 보람이 될지 부끄러움이 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우리 모두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나간 20세기에 대한 냉정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으며, 또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나의 회고록은 일단은 나와 나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지나온 날들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내가 태어났던 암흑의 일제시대부터, 1998년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전 과정은 바로 파란에 찬 우리의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내가 헤쳐 나온 20세기 후반의 개인사는 그대로 한국의 현대정치사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내 생애는 우리나라 현대정치사를 관통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의 현장은 한국 현대정치의 생생한 현장 바로 그것이었다.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원내총무, 야당총재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마침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나는 운명적으로 정치를 껴안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광의 시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 오랜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있었다. 최연소 야당총재, 최다선 원내총무라는 기록 뒤에는 초산테러, 국회의원직 제명, 연금, 단식투쟁 등 현대사의 험난한 파도와 고뇌의 깊은 골짜기를 거쳐 나와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당사에는 5백여 개의 정당들이 출현했다가 포말처럼 사라졌다. 막강한 조직과 거대한 힘을 자랑하던 집권당도 권력을 잃으면 스르르 소멸해 갔다. 그런 정치풍토 속에서도 한민당→민국당→민주당→민정당→신민당→통일민주당으로 한국 야당의 숨결은 연면히 이어져 왔다. 야당의 생명력이 이렇듯 끈질길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국민의 염원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현대 한국정치의 현장을 온몸을 다 바쳐 지켜 낼 수 있었던 것도,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야당의 전통과 나의 신념이 또한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게 하였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민주주의, 그것은 나를 지탱해 주고 저 혹독한 군사독재의 한가운데서도 나의 전의를 불타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야당의 길, 그리고 나의 길은 민주주의를 막아 선 겹겹의 벽에 대한 도전과 좌절, 그리고 재도전의 연속이었다.
야당의 성공적인 도전이 만들어 낸 기회는 그때마다 불행과 비극까지 겹쳤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은 이 나라 야당을 정권교체의 단계에까지 이끌어 올렸으나, 갑작스런 그 분들의 서거로 우리들의 희망은 무너졌다. 1960년 4월혁명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 땅에 안겨 줬지만, 5·16 군사쿠데타가 그 싹을 무참히 짓밟아 버림으로써 역사의 시계를 30년이나 거꾸로 되돌려놓았다.
해공과 유석은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그리고 야당사에서 굵은 발자국을 남겼다. 나는 이들 두 분의 뒤를 이은 정통야당의 적자(嫡子)로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전두환에 이르는 30년 군사독재의 전 기간에 걸쳐,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내 한 몸을 던져 불의를 고발, 권위주의 군부통치에 맞서 싸웠다. 옛말에 “하늘이 나를 냈으니 반드시 재목으로 쓸 데가 있다”(天生我 材有必用)고 했는데, 나는 하늘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나를 쓰려 한다고 믿었다. 역사적 시기마다 시대적 소명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에겐 바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소명감과 열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저 힘들고 고난에 찬 투쟁을 견뎌 왔을 것인가. 누르면 누를수록 불사조처럼 일어서고 또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인가. 스스로 내 몸을 던져 민주주의의 불씨를 살려 낼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투쟁에서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싸웠다. 1983년, 전두환 독재에 맞서 죽음을 건 단식투쟁을 할 때도 나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나는 항상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웠다. 나는 또한 부끄러운 타협을 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해 내고자 하는 내 신념을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할 때에도 나는 “한번 살기 위하여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한번 죽어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면서 구차한 타협을 단호히 거부했다. 나는 거짓과 위선, 그리고 비겁을 가장 큰 죄악으로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싸워 왔다.
나는 전 생애를 통해 온 국민들의 성원과 격려를 자양으로 항상 다시 일어났고, 또 그것을 활력소로 삼아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나는 독재적 억압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을 한시도 잊거나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국민과 함께 있으려 했고, 또 함께 있었다. 나는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캄캄한 암흑 속의 나날에도 국민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희망의 다짐이기도 했다. 또한 국민은 그때마다 나에게 큰 희망의 메아리로 되돌려줬다. 이렇게 나는 국민과 더불어 민주화의 길을 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199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던 순간, 마침내 마침내 국민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는 감동으로 나는 눈물을 흘렸고,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냐를 되새기면서 마음속에 각오를 다졌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벅찬 감격으로 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나는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군의 개혁을 단행했으며, 전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함으로써 이 나라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시켰다. 1948년의 정부수립 이래, 대한민국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으로서의 틀과 내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국민과 더불어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해, 그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정착시켰다는 자부심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이룩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대통령으로서 혼신의 노력을 다 바쳤다. 지자제 실시 문제와 관련하여 안기부의 정치개입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지체없이 안기부에 그 책임을 물었다. 한번 잘못되기는 쉬워도 그것을 바로잡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조그마한 위험도 초기에 도려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이러한 단호한 의지만이 민주주의를 지켜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국민의 깨어 있는 의식만이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회고록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룩되어 왔는가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단순한 회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해방 후 반세기에 걸쳐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호소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내가 그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걸어왔던 이 나라의 현대정치사, 민주주의의 역사를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특히 1998년 2월 청와대를 나오면서, 이것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작업이요 소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정치는 모든 진실을 어둠 속에 묻어 버린다. 이미 우리 시대의 진실, 민주화를 향한 우리 국민의 피나는 노력은 박정희·전두환 두 군사독재정권의 정보공작정치에 의해 그 원형이 파괴·유린된 지 오래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했어야 할 우리 언론들은 진실을 왜곡하거나, 심지어는 보도조차 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발 한발 우리 발로 다가왔듯이, 그 기록도 바로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 없는 역사는 한낱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못한다. 그것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역사의 교훈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역대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기록을 남긴 이들은 드물다. 더구나 역대 대통령들의 경우,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생애에 대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예는 전무(全無)한 실정이다. 초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보내던 중 타계했고, 박정희의 경우 부하의 총탄에 맞아 살해되는 등, 유고(有故)를 당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기에는 역사적 객관성이나 도덕적 정당성에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중학시절부터 나는 비교적 소상하게 일기를 적는 습관을 지켜 왔다. 날마다의 일기는 내 삶의 축도로서, 거기에는 내 자신의 고뇌와 긴장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내 생애를 담아 온 나의 기록들이 지금은 내게 남아 있지 않다. 박정희·전두환 두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통해 내 집은 수차에 걸쳐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때 해방 이후 30년 이상 기록해 온 내 ‘정신의 유산’과 사진, 메모 등 모든 기록물들을 탈취당했다. 일기가 기화가 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 조사를 받는 등 피해를 입어야 했기 때문에 일기 쓰는 습관을 한때 중단한 적도 있었다. 이리하여 그 당시 매일매일 일어났던 정치적 사건이나 우리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왔던 현장은 기록 아닌 기억 속에 저장해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발 이 땅에 소중한 개인의 기록을 적을 수도 없는 그런 시절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 언론이란 기억의 연상작용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객관적인 기록으로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기와 메모, 사진 등 일체의 기록을 빼앗긴 채 흘러간 50여년의 세월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난 1년 10개월여에 걸쳐 사방에 흩어져 있는 나의 족적들을 모아들였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맞추어 보면 텅 빈 공간도 있었고, 연속성이 끊어진 시간도 있었다. 그것을 되살려 내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일기마저 빼앗아 가는 군사정치문화의 행태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단 한 권의 일기장이 기적같이 내게 돌아왔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은 것 같은 그때의 환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독재자들은 가택수색을 통해 나의 개인기록을 탈취해 갔을 뿐만 아니라 언론과 출판을 검열·통제함으로써 나를 비롯한 민주화투쟁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들을 역사에서 지워 버렸다. 국내의 경우 민주화투쟁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은 이미 필름조차 남아 있지 않거나 가위로 오려진 채 ‘검열’이라는 도장에 눌려 아직도 신음하고 있었다. 외신들마저 국내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검열 때문에 이곳저곳이 흉물스럽게 잘려 나가 있었다. 나는 부득이하게 자료를 찾기 위해 뉴욕이나 워싱턴, 도쿄나 모스크바에까지 수소문을 해야 했다.
그 동안 각종 사진과 자료들을 기꺼이 제공해 준 국내외 여러분께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또한 이렇게라도 엮어 놓고 보니, 그 동안 나에게 내 생애 전부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간곡히 권유해 준 여러분들께도 그 따뜻하고 정성스런 애정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많은 점에서 누락과 비약도 있을 것이요, 경중(輕重)과 선후(先後)가 뒤바뀐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회고록은 결코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민주화의 도정을 같이했던 동지들, 그리고 국민 여러분과 함께 쓰고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빠진 것을 보완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땀 흘리며 몸 바쳤던 고통과 고뇌, 그리고 기쁨의 순간들을 이 책에서 가감(加減) 없이 적으려 했다. 또한 그때그때 나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밝히고자 했다. 거짓은 국민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 H. 카는 “역사 없이 자유가 없고, 반대로 자유 없이 역사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항상 떠올리면서 이 회고록을 썼다. 또 나는 현대정치사를 이제 내 손으로 쓴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이 기록이 한국 현대정치사를 위한 생생한 현장의 증언이 되고, 아직은 불안한 이 나라 민주화에 튼튼한 받침대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아울러 우리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반세기에 걸쳐 우리가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화를 바탕으로 ‘21세기 위대한 한민족시대’를 열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내 손명순(孫命順)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내는 평생 내 곁에서 모든 영욕을 함께 했으며, 내가 어려움을 겪었던 고비고비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통해 나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책을 민주화의 도정에서 먼저 가신 분들, 민주투쟁의 현장에서 고난과 시련을 같이했던 동지들, 그리고 나에게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 주셨던 민주 국민 여러분께 바친다.
▣ 작가 소개
저 : 김영삼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54년 당시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2015년 11월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지은 책으로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 <40대기수론>, <나와 내 조국의 진실>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제1권
서문 민주주의를 향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제1부 찬란한 예감
1. 어머니와 바다, 내 삶의 터전
2. 추억 속의 앨범, 학창시절
3. 이천 피난시절
4. 손명순과의 결혼 이야기
5. 최연소로 정계에 진출
제2부 야당시절의 초상화
1. 야당의 맹장
2. 5·16쿠데타 전면 부정
3. 바깥에서 본 조국
4. 원내총무 5선 기록
5. 지도자의 길
제3부 40대기수론
1. 초산테러
2. 40대 기수로 돛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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