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빛과 소리의 고유한 스펙트럼을 파고들며,
의미와 세계를 무한 확장하는 새로운 언어의 출현
“단호한 감정 관찰”, “말의 뜻과 방향을 제어하여 낯선 세계로 자신을 개방하는 독특한 힘”, “삶을 압축하여 간파하는 솜씨”가 남다르다는 평과 함께 201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을 받아 등단한 송승언이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를 출간했다. 사물과 자연, 관계의 풍경에서 의미를 지워내듯 최소화한 이미지를 담담하게 개관하는 그의 시는, 문장의 분절과 중첩, 예측을 벗어난 독특한 배치를 통해 시적 리듬을 획득하며, 이제껏 경험해보지 않은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의 의식을 무한 확장시킨다. 이번 시집에 묶인 시 55편 모두 ‘풍경의 지속―시선의 집중―시간의 채집―음악의 반복―시점의 전환―영원의 분절―죽음을 내재한 삶의 지속’이라는 재료와 의도, 설계와 구조를 띠고 있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절제 없는 의식의 분열이나 경계의 무력화 혹은 모호함으로 섣불리 분류될 수 없는, 시 한 편 한 편의 축조된 단단함은 송승언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만하다. 신인답지 않은 이 시적 완미함이야말로 지난 4년 동안 ‘첫 시집이 가장 기대되는 시인’으로 송승언이 주목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송승언의 시는 지금 깨어 있는 잠 속에 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빛과 소리의 매 순간을 기록하며, 새로운 의미의 원천이 될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해가는 중이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날리고 눈이 쌓이고
날리는 눈 사이에 흰 새가 뒤섞여 날고
회전하는 겨울 속에서 머리카락은 점점 검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에서
미처 찍지 못한 흑점처럼
〔…〕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멈추면
완성되지 못하는 침묵이 굴속에서 울었다 (「유형지」 부분)
시를 짓는 일―삶을 담담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는 태도
송승언의 시는 텅 빈 이미지를 낯설게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 시작된다. 시적 화자는 감정의 큰 동요 없이 다만 절제된 언어로 간명하게 이미지-풍경을 서술한다. 이렇다 할 정보나 사건 없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창밖인지 심해인지, 말하는 주체가 나인지 너인지조차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 대신에 아무것도 없다는, 무엇이 아니라는 인식만이 명징하게 자기 지시적으로 반복된다.
주인이 죽어 주인 없는 개도 없었고 아무도 없는 정자도 없었지 공원을 뒤덮는 안개도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분)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녹음된 천사」 부분)
이런 ‘이미지의 현상화’는 “사물의 생각을 읽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공유할 수 없다. 사람도, 사물도, 자연도, 그 모든 풍경마저도”(『시향』 제55호, 2014년 9월 인터뷰)라고 말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연유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의 색만 발견”하고 “서로의 표정에 세 들어 사는 임차인”(「변검술사」)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나와 너, 꿈과 현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대립과 엇갈림을 집요하게 주시한다. 그 균열 한가운데서 파생되는, 의미가 증발되어버린 창백한 공간과 어떤 적요한 사건들이 불러오는 느낌은 지극히 낯설고 초현실적이다.
네가 너인 까닭은 식탁에서 나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의자에 같이 앉는다면 우리는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다른 것을 주문하기로 한다 목소리와 표정에 감응하는 법 없기로 내가 어떤 것으로 불리는 법 없기로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으로
다만 있다고 한다면 추락하기로, 벼랑에서 떨어져 부서진 상태이기로, 더 부서질 수 없을 파편들로
너와 내가 아닌 모든 자리로 말이 되어 번개가 되어 일용할 만나가 되어
(「돌의 감정」 부분)
시의 재료와 설계―빛과 음악으로, 집중과 반복으로
시집 『철과 오크』의 많은 시들에서 우리는, 시적 주체인 관찰자의 시선이 투명하고 명징해질수록, 시간과 소리의 채집을 촘촘히 거듭해갈수록, 그 뒤를 잇는 침묵과 죽음의 이미지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마치 “공회당의 불가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듣다 졸다가, 곧 깨어나”듯(「공화국」) 우리의 눈과 귀가 시적 풍경과 목소리에 점점 포박되어간다.
불 주위를 돌며 그림자들이 들썩이고 있다
장작이 뒤스르는 틈을 타, 죽은 새들은 불 속에서 솟아올랐다 (「야영지」 부분)
백수는 전도하러 과부의 몸에 들어간다
승합차에 어린아이 한 덩어리 들어간다
이 길과 저 길은 통하지 않는다 (「정육점이 있는 골목」 부분)
영혼을 보는 시선은 피했다 모퉁이마다 노인이 출몰하는 골목 고정되지 않는 모퉁이를 빙글빙글 도는 일
죽은 새에게 온기가 있어 양손은 따뜻하고 양손이 차가울 때까지 죽은 새로 저글링을 하는 일
성당에 들지 않고 성당을 뜨지 않는 일 성당 주변을 빙빙 돈다 냉담자들만이 음악을 하지
나는 음악을 했지 음악을 한다는 말은 이상한 말 나는 음악을 했다 죽은 새로 했다 열심히 했다 (「새와 드릴과 마리사」 부분)
이러한 궁긍증은 또 다른 이미지의 연쇄를 불러오고, 그 연쇄된 이미지의 파동이 다시 우리를세련된 시적 리듬의 경험으로 이끈다. 이처럼 한번에 닿지 않는 송승언 시의 미묘함의 정체를 풀기 위해 우리는 시 편편의 제목에 이따금 등장하는 음악 용어(론도, 카논, 드론)나 게임 용어(셰이프시프터, 디오라마, 드론), 혹은 빛과 물, 길과 숲, 새들의 의미를 함께 묻게 된다〔“매 순간 나를 관통하는 빛”(「담장을 넘지 못하고), “밝아지는 네가 공중에 겹쳐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갔다 비상구로 나가는 너의 등에서, 빛”(「취재원), “말이 되지 않으려는 저 빛들”(「위법」)〕.
몸을 잃어가며 장작이 빛난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거실의 음악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이곳에는 질문도 없고 답도 없다 (「많은 손들을 잡고」 부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계속되는 정오에는 눈을 감았다 더 많은 빛
더 많은 침묵이 흐르고 있다 귀를 막아도 끊이지 않는 소음처럼 (「드론」 부분)
“음악을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데, 반복되는 풍경, 이미지들을 기저음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소리 또는 노이즈 같은 것들 있잖아요. 그 기저음 위에서 운동할 것들이 떠오르면 쓰기 시작하죠. 말하자면 어떤 단상에서 시를 시작하기보다는, 환경을 먼저 구축한 뒤에 그 환경과 합일하거나 불화하는 대상들을 표식음처럼 새기는 편이에요. 하지만 어떤 반복이든 영원히 동일한 반복은 없잖아요? 반복하는 자신이 스스로 뒤틀리거나, 혹은 그 반복을 바라보거나 듣는 쪽에서 뒤틀림을 느끼게 되는데 그걸 알게 될 때쯤엔 구축해둔 모든 게 끝나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빛은 가장 명징한 표식음 같아요. 눈 뜨고 감아야 할 때를 알리는 종소리 같다고나 할까요. 〔…〕 속성과 범위의 차이는 있지만 자연물은 대부분 무한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침묵이거나 노이즈라고 할 수 있어요. 새들은 시에 따라 조금 의미가 다르긴 한데, 대체적으로는 전서구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시향』 2014년 9월, 인터뷰 재인용)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철과 오크」 전문)
이것은 하나의 시적인 사건―낯설고도 단단한 시집의 출현
집요한 시선, 문장의 분절과 독특한 배치, 이미지의 연쇄와 파동으로 송승언의 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의식과 세계의 이면을 일깨워준다. 시를 따라 오감과 이성의 경계를 관통하듯 빛과 소리의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창문 너머 골목을, 공원을 가로질러 숲을, 꿈의 너울을 헤친 해변을 서성여보자. 무심한 듯 단단한 한 채의 집, 『철과 오크』 가까이 선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아니 이상하게 아름다운 시詩-집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그런 모양으로 보트가 흔들린다
네가 실린 보트가 흔들린다
네가 실린 보트가 흔들린다
여러 보트가 흔들린다
감겼다가 풀어지는
스트링처럼
형벌을 받는 형세로 흔들린다
그런 모양으로 흔들린다
그런 모양으로 부서진다
너의 보트가 보트가 아니게 된다
네 얼굴이 물 위에 둥둥 떠 있게 된다
네 얼굴이 외친다
나는 기록한다
흔들리는 보트에서 흔들리는 필체로
흔들리는 생각으로 흔들리는
여러 보트가 부서진다
기록한다 네 얼굴이
질린다 붉게 질린다
하얗게 질린다 파랗게 질린다
더 질리기 전에 둥둥 떠 있게 된다
너의 얼굴이 얼굴이 아니게 된다
그런 모양으로 흔들린다
바다가 출렁이지 않고 보트가 흔들린다
표정 없이 떠다니는 부표들의 형세로
스트링처럼 감았다가 풀어놓은
여기까지 기록하는 것은 내가 아니게 된다 (「보트」 전문)
〔시집 해설〕
시인이 거듭하는 음악의 반복에는 어떤 실패에 대한 근본적 자각, 상징으로부터 의미를 완전히 비우는 일의 불가능함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이 있다. 〔…〕 영원성은 상징으로 드높여질 수 있는 의미의 섬광이 아니라, 끊임없이 쪼개지고, 나눠지고, 부서지고, 추락하면서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실천하는 파생과 변주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현실 너머에 있는 초월의 세계가 아니라, 세속의 저 지리멸렬한 반복이다. 음악이야말로 의미론적 규정의 협조 없이도 시의 자기 지시성이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형식이자 역사와 반향하는 시간적 체험이다. 〔…〕 시인은 구태여 말하지 않고도 풍경의 명징함을 내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현실의 균열과 부재의 흔적을 건사하고 급기야 우리가 ‘무의미의 의미’라고 부를 수 있을 어떤 이미지-풍경을 독자의 느낌에 낯섦의 형식으로 새긴다. 이 낯선 느낌은 그 자체로 『철과 오크』에서 시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하나의 대표적 표징이자 이미지 앞에서 의식의 권리를 잠시나마 양도하려는 자아의 집중된 의지의 실천 속에서 확보되는 해방의 계기에 가깝다. (강동호, 「의미의 미니멀리즘」에서)
작가 소개
시를 비롯해 말이 되는 글과 말이 되지 않는 글을 쓴다. 쓴 책으로 『철과 오크』, 『사랑과 교육』이 있다.
목 차
1부
녹음된 천사
커브
물의 감정
담장을 넘지 못하고
취재원
법 앞에서
디오라마
셰이프시프터
심부름
환희가 금지됨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종소리
증기의 방
변검술사
굴
돌의 감정
2부
베테랑
이파티예프로 돌아오며
사냥꾼
숲 속의 의자
여름
기원
내 책상이 있던 교실
백조공원
공화국
야영지
성문에서
정육점이 있는 골목
새와 드릴과 마리사
드론
철과 오크
수확하는 사람
망원
축성된 삶의 또 다른 형태
유리 해골
R의 죽음
지엽적인 삶
많은 손들을 잡고
피동사
3부
저녁으로
면회
죽은 시들의 성찬
재앙
나타샤
위법
카논
그의 이름을 모른다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밝은 성
이장(移葬)
론도
눈 속의 잠
보트
에덴
유형지에서
해설_ 의미의 미니멀리즘 / 강동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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