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징비록》의 이면을 살펴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신립 장군, 그리고 류성룡과 선조를 재조명한 역사 팩션
2015년 3월 현재 KBS 1TV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방영 중이다. 서애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의 시기에 조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류성룡과 징비록에 관한 책도 수십 종 가까이 출간되었다. 드라마의 인기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출간된 대다수의 책들이 류성룡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그렇다면 류성룡은 정말로 영웅으로 추앙받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반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문화와 콘텐츠라는 것은 다양성을 중요시한다. 어떠한 시각이 있다면 그에 반대되거나 그와 다른 면을 조명하는 시각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류성룡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책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기록으로 남은 《징비록》의 이면에 다른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의문으로 이 책 『징비록의 그림자』는 시작한다.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저자 이희진은 전공인 전쟁사 관련 답사기를 쓰면서 의문을 가졌다. 임진왜란 초기의 ‘탄금대 전투’를 깊이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그 실상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탄금대 전투에 대한 역사왜곡이 심하다는 사실과, 왜곡된 사실 대부분이 현장 지휘관인 신립 장군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일반적으로 신립 장군은 패장으로 기록되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말처럼 신립 장군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진족과 북방 영토에서 싸우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신립 장군은, 아이러니하게도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는 완패하고 만다. 그렇기에 신립을 제대로 기억하려는 시도와 노력도 없었다. 저자는 신립 장군을 우리나라 ‘문중사학’의 희생자, 기득권층에 희생된 대표적인 ‘실무자’로 여기며, 이러한 역사는 비단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재도 진행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신립 장군과 탄금대 전투의 실상, 나아가 임진왜란 발발 전과 초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탄금대 전투’는 탄금대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사료와 답사를 토대로 치밀하고 생생하게 재해석한 흥미로운 이야기
신간 『징비록의 그림자』(부제: 《징비록》의 이면과 신립 장군을 재조명한 역사 팩션)는 부제처럼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신립 장군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초기와 탄금대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책은 ‘류성룡의 영웅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신립 장군에 초점을 맞추고 신립 장군을 재조명하는 데 의의를 둔다. 실제 답사와 고증을 통해 탄금대 전투를 새롭게 해석하는 이 책은 하나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을 통해 재구성해보는 흥미 있는 팩션이다. 책은 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북방 영토를 지키는 ‘전쟁의 신’ 신립 장군을 기록한다. 제2장에서는 임진왜란 전 통신사 파견과 선조의 내면갈등을 다루며, 제3장에서는 전쟁 발발 후 탄금대 전투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그렇다면 탄금대 전투가 왜 중요한가? 먼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말을 인용하여 류성룡이 《징비록》에 기록한 대목을 보면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 생각해 상세히 적어둔다.
―류성룡의 《징비록》 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립 장군과 탄금대 전투의 모습은 위의 인용처럼 조령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적을 맞은 신립의 실책이 그 중심에 있다. 《징비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며, 류성룡은 그 책임을 신립에게 지우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 일본군은 말 그대로 정예 병력이었다. 이에 맞서는 조선은 일본이 침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급하게 모은 병력은 고작 8,000여 명. 그것도 농민이 주축이 된 오합지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음에도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말을 인용하여 신립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탄금대 전투에 대해 저자는 할 말이 많다. 전쟁사가 전공인 저자는 답사를 통해서 고증을 했다. 조령은 천혜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일본군은 굳이 조령을 거치지 않고도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조령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와줘서 거기서 막는다면야 소수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일본군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자신들이 불리한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한 번의 전투로 승리를 해야 하는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정예병에 오합지졸로 맞서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북방에서 기병으로 여진족을 막아내며 변경을 지킨 신립 장군은 자신의 주특기를 최대한 살려 전투에 임해야 했고, 그래서 선택한 곳은 기병에 최적화된 평야지대인 달천평야였다. 기병은 말의 돌진력으로 힘을 얻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장수 고니시도 훌륭한 ‘전쟁의 신’ 중 한 명이었다. 거기에 일본군은 전쟁을 준비하고 온 2만 명의 정예병, 조선군은 기병 5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농민과 유생들로 구성된 백도(白徒)였다. 탄금대 전투는 두 명의 훌륭한 장수가 맞붙은 전투이지만 어마어마한 전력 차이는 그 어떤 명장이 와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류성룡이 사지로 신립을 보냈다는 것을 《징비록》의 기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류성룡은 나라만을 생각한 충성스러운 우국지사의 면모만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리를 추구하는 정치가의 모습을 더 담고 있다. 어디까지나 그 판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신립 장군과 전투에 대한 흥미진진한 묘사, 선조 임금과 대신들의 갈등, 일본 통신사 파견의 실제 모습, 전쟁에 대한 일본의 입장과 조선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시선 등 책에서는 기존의 인식과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사료를 바탕으로 한 저자의 상상력이 한껏 가미되어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창작이 절묘하게 얽혀 읽다. 역사 팩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책은 기존의 임진왜란, 징비록, 류성룡과 관련된 책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줄 것이다.
신립 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
저자는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은 다른 자료를 통해 유추하거나 답사를 통해 고증했고, 저자의 상상력으로 빈 부분을 채워나갔다. 소설의 형식으로 본문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족하거나 충족되지 않은 부분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조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실제로 어떻게 전투가 벌어졌는지 등을 분석하여 [신립 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라는 제목으로 책의 뒷부분에서 별도로 면밀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명명처럼 ‘탄금대 전투’가 탄금대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다.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사이에 솟아 있는 작은 동산이다. 이런 지역에서는 8,000명의 병력조차 제대로 배치하기가 곤란하니, 2만여 명의 일본군은 올라올 틈조차 없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단월역에서 조금 물러난 달천평야이다. (중략) 신립이 이곳에 방어선을 치고 있으면, 일본군은 산과 하천 사이로 난 길에서 평야지대로 진입하는 상황이 된다. 이때 학익진을 치고 있다가 양 측면의 기병이 일본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하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 한니발이 3배가 넘는 로마군을 격파할 때에도 쓴 전술이 바로 이것이고, 이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병을 활용하는 전술의 고전(古典)이 되었다.” (본문 292-293쪽)
이와 더불어, 일본군 조총부대의 매복 역시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조총부대의 매복이 가능했던 우측 산에 이일을 보내 방어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일본군이 이곳에 병력을 투입하여 중과부적으로 막지 못한 상황을 설명한다. 또한 조선 기병이 재돌격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며 역으로 포위당하여 진영이 달천 쪽으로 밀린 것을,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며 싸운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탄금대 전투’는 신립이 무능하여 전투를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전력차를 잘 활용하여 싸운 고니시의 선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라는 제목으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을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책의 구성이 팩션이다 보니 소설의 형태를 빌렸고, 그에 따라 허구이거나 막연한 추측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화 하나하나, 사소한 내용들 모두 사료를 바탕으로 면밀히 구성하여 작성된 것이다. 일례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 조선군 병력이 8만이라고 기록된 것을 토대로, 제3장에서는 고니시 루이스가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조선군이 8만이라고 적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본문 279쪽). 그 외에도 선조가 정말 무능하기만 한 임금이었는지, 일본의 장수 고니시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통신사 부사로 파견된 김성일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진짜 이유, 체찰사 류성룡의 숨겨진 이면 등을 드러내며 팩션(faction) 속에서 ‘팩트(fact)’를 정리해놓았다.
선조는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다
선조는 전쟁에 대해서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자기 한 몸 수습하려고 피란 갈 생각에 급급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고 위협을 느끼자 여러 대책을 논의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신하들은 대부분 전쟁 준비를 할 여건이 좋지 않다고 보고를 했다. 선조가 무능하고 편협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대중들도 그런 모습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선조는 여러 대책을 시도했다. 왕이라도 독단적으로 정책을 수행하기 어려운 사림정치 구조에서, 선조가 유능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무능한 왕으로 몰아가는 것은 어폐가 있다.
고니시는 조선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1586년을 전후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의지를 밝히자,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일본에는 자신들이 번국인 조선과의 교류를 맡는 것으로 해놓고, 실상은 조선과 일본의 교역을 독점하여 큰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니시는 전쟁이 벌어지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고, 최대한 전쟁의 발발을 늦추며 조선과 일본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김성일의 변명: 그는 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가
기존의 통신사는 문화적 교류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1590년의 통신사 파견은 전쟁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임무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당시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이전의 관념을 고집했다. “인심이 동요할까 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김성일은 본인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한 셈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론이 되면 기득권층이 이미 장악하고 있던 정권 유지에 변수가 될 것이고, 그러한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전쟁 준비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혜택이 줄어들거나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은 과연 정철 혼자 추진한 것일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의 사료에는 류성룡이 정철에게 세자 책봉 문제에 대해 의논한 것으로 나온다.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그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으나, 정작 이산해는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인빈 김 씨의 오빠 김공량에게 “정철이 세자 세우기를 청하고 신성군 모자를 없애려 한다”라고 정보를 흘렸다. 선조는 인빈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뜬소문으로 여기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판단했고, 그 자리에 정작 이산해는 없었으며 류성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선조의 눈 밖에 났고, 결과적으로 동인(류성룡)이 다시 정국 주도권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신립 장군이 사지로 가게 된 까닭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맞아 충주로 내려가 전투를 치르기 전, 류성룡은 체찰사에 김응남은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명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장수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나 않을까 조정에서 걱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전 경험이 없는 문신이 지휘관을 간섭하면 작전을 그르칠 소지가 있다. 신립 장군은 이에 대해 우려했고, 류성룡은 부사 김응남과 함께 모아놓은 병력을 직접 인솔하고 내려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신립은 김응남을 부사로 데리고 가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이에 류성룡은,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아무려면 어떻겠느냐. 우선 내가 모아놓은 병사들을 이끌고 공이 앞장서라. 나는 또 병사를 모아 뒤를 따르겠다”라고 하면서, 군관들의 성명이 적혀 있는 명단을 건네주었다. 마치 신립이 왜적 막는 공을 빼앗기기 싫어서 상관인 김응남에게 심한 말을 한 모습으로 《징비록》에 기록한 것이다.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오합지졸로 일본군을 막는 것이 무리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던 류성룡은 신립이 자청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부대를 넘겨주었고, 장수를 감시한다고 마련한 체찰사임에도 류성룡 자신은 물론 김응남 역시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 기록에서는 신립이 공을 탐내는 듯한 모습으로 적어놓고, 실제로 본인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면서 직접 부대를 인솔하고 내려갈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희진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를 거쳐 서강대학교에서 가야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성무 박사의 장남이지만, 늘 역사학계의 비주류임을 자청한다. 고대사가 전공인지라 이른바 식민사관과 항상 긴장관계에 있고 이를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면서 여러 형태로 낙인이 찍혔다고 주장한다. 서강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학생들의 평가와는 반대로 고정이 되지는 못했다. 답답하여 시작한 저작 활동을 통해 간결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저술가로서의 입지를 크게 다졌다.
현재 온라인상에서 칼럼과 블로그를 통해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이며 특유의 깔끔한 논리와 전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개설서 집필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 『거짓과 오만의 역사』(2001), 『전쟁의 발견』(2004), 『중화사상과 동아시아』(2007),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2008), 『한국사 샤브샤브』(2010), 『다시 보는 한국사』(공저, 2013),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2013),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2014)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차례
영웅 만들기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제1장 무르익는 전쟁의 기운
북방 영토를 지키는 전쟁의 신
일본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먹구름
가도 가도 제자리
제2장 전쟁 전야
어긋난 첫 단추
통신사가 파견되었지만
전쟁을 막을 희망은 사라지고
제3장 예고된 비극
첫 희생양들
뒤늦은 수습
임무를 위하여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신립 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
《징비록》의 이면을 살펴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신립 장군, 그리고 류성룡과 선조를 재조명한 역사 팩션
2015년 3월 현재 KBS 1TV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방영 중이다. 서애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의 시기에 조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류성룡과 징비록에 관한 책도 수십 종 가까이 출간되었다. 드라마의 인기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출간된 대다수의 책들이 류성룡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그렇다면 류성룡은 정말로 영웅으로 추앙받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반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문화와 콘텐츠라는 것은 다양성을 중요시한다. 어떠한 시각이 있다면 그에 반대되거나 그와 다른 면을 조명하는 시각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류성룡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책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기록으로 남은 《징비록》의 이면에 다른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의문으로 이 책 『징비록의 그림자』는 시작한다.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저자 이희진은 전공인 전쟁사 관련 답사기를 쓰면서 의문을 가졌다. 임진왜란 초기의 ‘탄금대 전투’를 깊이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그 실상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탄금대 전투에 대한 역사왜곡이 심하다는 사실과, 왜곡된 사실 대부분이 현장 지휘관인 신립 장군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일반적으로 신립 장군은 패장으로 기록되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말처럼 신립 장군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진족과 북방 영토에서 싸우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신립 장군은, 아이러니하게도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는 완패하고 만다. 그렇기에 신립을 제대로 기억하려는 시도와 노력도 없었다. 저자는 신립 장군을 우리나라 ‘문중사학’의 희생자, 기득권층에 희생된 대표적인 ‘실무자’로 여기며, 이러한 역사는 비단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재도 진행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신립 장군과 탄금대 전투의 실상, 나아가 임진왜란 발발 전과 초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탄금대 전투’는 탄금대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사료와 답사를 토대로 치밀하고 생생하게 재해석한 흥미로운 이야기
신간 『징비록의 그림자』(부제: 《징비록》의 이면과 신립 장군을 재조명한 역사 팩션)는 부제처럼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신립 장군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초기와 탄금대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책은 ‘류성룡의 영웅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신립 장군에 초점을 맞추고 신립 장군을 재조명하는 데 의의를 둔다. 실제 답사와 고증을 통해 탄금대 전투를 새롭게 해석하는 이 책은 하나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을 통해 재구성해보는 흥미 있는 팩션이다. 책은 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북방 영토를 지키는 ‘전쟁의 신’ 신립 장군을 기록한다. 제2장에서는 임진왜란 전 통신사 파견과 선조의 내면갈등을 다루며, 제3장에서는 전쟁 발발 후 탄금대 전투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그렇다면 탄금대 전투가 왜 중요한가? 먼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말을 인용하여 류성룡이 《징비록》에 기록한 대목을 보면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 총병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 생각해 상세히 적어둔다.
―류성룡의 《징비록》 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립 장군과 탄금대 전투의 모습은 위의 인용처럼 조령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적을 맞은 신립의 실책이 그 중심에 있다. 《징비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며, 류성룡은 그 책임을 신립에게 지우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 일본군은 말 그대로 정예 병력이었다. 이에 맞서는 조선은 일본이 침략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급하게 모은 병력은 고작 8,000여 명. 그것도 농민이 주축이 된 오합지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음에도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말을 인용하여 신립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탄금대 전투에 대해 저자는 할 말이 많다. 전쟁사가 전공인 저자는 답사를 통해서 고증을 했다. 조령은 천혜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일본군은 굳이 조령을 거치지 않고도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조령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와줘서 거기서 막는다면야 소수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상대할 수 있겠지만, 일본군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자신들이 불리한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한 번의 전투로 승리를 해야 하는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정예병에 오합지졸로 맞서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북방에서 기병으로 여진족을 막아내며 변경을 지킨 신립 장군은 자신의 주특기를 최대한 살려 전투에 임해야 했고, 그래서 선택한 곳은 기병에 최적화된 평야지대인 달천평야였다. 기병은 말의 돌진력으로 힘을 얻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장수 고니시도 훌륭한 ‘전쟁의 신’ 중 한 명이었다. 거기에 일본군은 전쟁을 준비하고 온 2만 명의 정예병, 조선군은 기병 5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농민과 유생들로 구성된 백도(白徒)였다. 탄금대 전투는 두 명의 훌륭한 장수가 맞붙은 전투이지만 어마어마한 전력 차이는 그 어떤 명장이 와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류성룡이 사지로 신립을 보냈다는 것을 《징비록》의 기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류성룡은 나라만을 생각한 충성스러운 우국지사의 면모만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리를 추구하는 정치가의 모습을 더 담고 있다. 어디까지나 그 판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신립 장군과 전투에 대한 흥미진진한 묘사, 선조 임금과 대신들의 갈등, 일본 통신사 파견의 실제 모습, 전쟁에 대한 일본의 입장과 조선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시선 등 책에서는 기존의 인식과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사료를 바탕으로 한 저자의 상상력이 한껏 가미되어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창작이 절묘하게 얽혀 읽다. 역사 팩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책은 기존의 임진왜란, 징비록, 류성룡과 관련된 책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줄 것이다.
신립 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
저자는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은 다른 자료를 통해 유추하거나 답사를 통해 고증했고, 저자의 상상력으로 빈 부분을 채워나갔다. 소설의 형식으로 본문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족하거나 충족되지 않은 부분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조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실제로 어떻게 전투가 벌어졌는지 등을 분석하여 [신립 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라는 제목으로 책의 뒷부분에서 별도로 면밀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명명처럼 ‘탄금대 전투’가 탄금대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다.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達川)이 합류하는 사이에 솟아 있는 작은 동산이다. 이런 지역에서는 8,000명의 병력조차 제대로 배치하기가 곤란하니, 2만여 명의 일본군은 올라올 틈조차 없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단월역에서 조금 물러난 달천평야이다. (중략) 신립이 이곳에 방어선을 치고 있으면, 일본군은 산과 하천 사이로 난 길에서 평야지대로 진입하는 상황이 된다. 이때 학익진을 치고 있다가 양 측면의 기병이 일본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하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 한니발이 3배가 넘는 로마군을 격파할 때에도 쓴 전술이 바로 이것이고, 이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병을 활용하는 전술의 고전(古典)이 되었다.” (본문 292-293쪽)
이와 더불어, 일본군 조총부대의 매복 역시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조총부대의 매복이 가능했던 우측 산에 이일을 보내 방어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일본군이 이곳에 병력을 투입하여 중과부적으로 막지 못한 상황을 설명한다. 또한 조선 기병이 재돌격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며 역으로 포위당하여 진영이 달천 쪽으로 밀린 것을,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며 싸운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탄금대 전투’는 신립이 무능하여 전투를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전력차를 잘 활용하여 싸운 고니시의 선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라는 제목으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을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책의 구성이 팩션이다 보니 소설의 형태를 빌렸고, 그에 따라 허구이거나 막연한 추측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화 하나하나, 사소한 내용들 모두 사료를 바탕으로 면밀히 구성하여 작성된 것이다. 일례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 조선군 병력이 8만이라고 기록된 것을 토대로, 제3장에서는 고니시 루이스가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조선군이 8만이라고 적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본문 279쪽). 그 외에도 선조가 정말 무능하기만 한 임금이었는지, 일본의 장수 고니시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통신사 부사로 파견된 김성일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진짜 이유, 체찰사 류성룡의 숨겨진 이면 등을 드러내며 팩션(faction) 속에서 ‘팩트(fact)’를 정리해놓았다.
선조는 무능한 임금이 아니었다
선조는 전쟁에 대해서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자기 한 몸 수습하려고 피란 갈 생각에 급급했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고 위협을 느끼자 여러 대책을 논의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신하들은 대부분 전쟁 준비를 할 여건이 좋지 않다고 보고를 했다. 선조가 무능하고 편협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대중들도 그런 모습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선조는 여러 대책을 시도했다. 왕이라도 독단적으로 정책을 수행하기 어려운 사림정치 구조에서, 선조가 유능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무능한 왕으로 몰아가는 것은 어폐가 있다.
고니시는 조선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1586년을 전후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의지를 밝히자,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일본에는 자신들이 번국인 조선과의 교류를 맡는 것으로 해놓고, 실상은 조선과 일본의 교역을 독점하여 큰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니시는 전쟁이 벌어지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고, 최대한 전쟁의 발발을 늦추며 조선과 일본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김성일의 변명: 그는 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가
기존의 통신사는 문화적 교류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1590년의 통신사 파견은 전쟁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임무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김성일은 당시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이전의 관념을 고집했다. “인심이 동요할까 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김성일은 본인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한 셈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론이 되면 기득권층이 이미 장악하고 있던 정권 유지에 변수가 될 것이고, 그러한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전쟁 준비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혜택이 줄어들거나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은 과연 정철 혼자 추진한 것일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의 사료에는 류성룡이 정철에게 세자 책봉 문제에 대해 의논한 것으로 나온다.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그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으나, 정작 이산해는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인빈 김 씨의 오빠 김공량에게 “정철이 세자 세우기를 청하고 신성군 모자를 없애려 한다”라고 정보를 흘렸다. 선조는 인빈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뜬소문으로 여기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판단했고, 그 자리에 정작 이산해는 없었으며 류성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선조의 눈 밖에 났고, 결과적으로 동인(류성룡)이 다시 정국 주도권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신립 장군이 사지로 가게 된 까닭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맞아 충주로 내려가 전투를 치르기 전, 류성룡은 체찰사에 김응남은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명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장수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나 않을까 조정에서 걱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전 경험이 없는 문신이 지휘관을 간섭하면 작전을 그르칠 소지가 있다. 신립 장군은 이에 대해 우려했고, 류성룡은 부사 김응남과 함께 모아놓은 병력을 직접 인솔하고 내려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신립은 김응남을 부사로 데리고 가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이에 류성룡은,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아무려면 어떻겠느냐. 우선 내가 모아놓은 병사들을 이끌고 공이 앞장서라. 나는 또 병사를 모아 뒤를 따르겠다”라고 하면서, 군관들의 성명이 적혀 있는 명단을 건네주었다. 마치 신립이 왜적 막는 공을 빼앗기기 싫어서 상관인 김응남에게 심한 말을 한 모습으로 《징비록》에 기록한 것이다.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오합지졸로 일본군을 막는 것이 무리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던 류성룡은 신립이 자청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부대를 넘겨주었고, 장수를 감시한다고 마련한 체찰사임에도 류성룡 자신은 물론 김응남 역시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 기록에서는 신립이 공을 탐내는 듯한 모습으로 적어놓고, 실제로 본인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면서 직접 부대를 인솔하고 내려갈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희진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를 거쳐 서강대학교에서 가야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성무 박사의 장남이지만, 늘 역사학계의 비주류임을 자청한다. 고대사가 전공인지라 이른바 식민사관과 항상 긴장관계에 있고 이를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면서 여러 형태로 낙인이 찍혔다고 주장한다. 서강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학생들의 평가와는 반대로 고정이 되지는 못했다. 답답하여 시작한 저작 활동을 통해 간결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저술가로서의 입지를 크게 다졌다.
현재 온라인상에서 칼럼과 블로그를 통해 역사왜곡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이며 특유의 깔끔한 논리와 전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개설서 집필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 『거짓과 오만의 역사』(2001), 『전쟁의 발견』(2004), 『중화사상과 동아시아』(2007),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2008), 『한국사 샤브샤브』(2010), 『다시 보는 한국사』(공저, 2013),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1』(2013), 『우리 역사를 바꾼 전쟁들』(2014)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차례
영웅 만들기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제1장 무르익는 전쟁의 기운
북방 영토를 지키는 전쟁의 신
일본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먹구름
가도 가도 제자리
제2장 전쟁 전야
어긋난 첫 단추
통신사가 파견되었지만
전쟁을 막을 희망은 사라지고
제3장 예고된 비극
첫 희생양들
뒤늦은 수습
임무를 위하여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신립 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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