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브라질이 낳은 하버드 로스쿨의 비전가
로베르토 망가베이라(Roberto Mangabeira)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웅거는 라틴아메리카 태생이다. 웅거의 외할아버지는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때 그의 어머니가 독일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만나 1947년 브라질에서 그를 낳았다. 웅거는 브라질 출신이라는 점을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한 축으로 놓고 있어서, 고향에서 쓰는 ‘망가베이라’라는 이름이 언제나 함께 불리길 원한다.
리우데자네이루 대학교를 졸업한 웅거는 미국 하버드로 건너가 법학석사 과정을 밟는다. 이후 웅거의 삶은 평탄일로를 걷는 듯하다. 1970년대 중반 29세 나이로 일찌감치 하버드 로스쿨 종신재직권을 받았고, 『지식과 정치』(1975) 『현대사회에서의 법』(1976)이라는 두권의 책으로 미국 법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비판법학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웅거는 근대 서구의 정치사상을 재검토하는 것을 자기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지식과 정치』에서는 자유주의 사회의 현실에 나타난 한계를 명쾌하게 드러냈으며, 이를 토대로 『현대사회에서의 법』에서 자유주의 법체계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웅거의 주장은 하버드의 던컨 케네디와 위스콘신의 데이비드 트루벡 등 1970년대 진보적인 법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미국에서 비판법학운동이 일어나는 데 이론적 지침으로 자리매김했다. 비판법학운동은 세계의 변화에 매우 둔감했던 법학계에서는 아주 예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참여자들은 근대 서구사회가 구축해온 법제도의 타당성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고 자유주의 법체계의 기본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많은 소장학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으로 기울면서, 웅거의 사회이론은 이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웅거는 궁극적으로 “해체가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관념들을 갖고 연구하고 싶어” 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리처드 로티, 1987). 1987년 웅거가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한 『정치』 삼부작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단, 이후의 논쟁들은 웅거가 서구 사상사의 계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와 같이 주변적인 문제에 관심을 둘 뿐 이 작업의 진의를 알아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주목할 것은 웅거의 이론 작업이 당시 세계정세를 좌지우지하던 “미국의 대학 앞마당”에서, 군사독재와 쿠데타로 혼란에 빠진 고국 브라질의 정치 상황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나온 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웅거 이론의 남다른 역사성과 현실성이 생겨난다. 그에게 근대 서구의 사상과 제도를 검토하는 일은 브라질을 비롯한 비서구 국가에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려는 목표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제였다. “브라질에서는 발전과 민주주의의 문제가 경제의 세계화와 제도적 복제를 결합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주류적인 이론은 숙명론처럼 두 언어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화석화되고 축약된 마르크스주의의 언어였으며, 다른 하나는 미국의 대학들에서 수립된 스타일인 응용된 실증주의 사회과학의 언어였다.”(역자 서문) 다른 사회적·역사적 경험을 가진 곳에는 다른 사회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이론작업은 『정치』를 통해 무르익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급진적 기획, 『정치』
웅거는 자신의 작업을 ‘사회이론’이라 이름 붙인다. 정치든 경제든 법이든, 그의 저술에서는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폭넓은 이론으로 확장된다. 『정치』 역시 분과학문으로서 정치학에 국한되지 않는 사유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웅거가 생각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회는 인간이 만들고 상상하는 것, 즉 ‘인공물’로서의 사회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근대 이래 모든 사회사상은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웅거는 이 진정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불행히도 어느 사회사상에서도 온전히 구현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디어를 밀고 나가려면 우선 개인의 일상과 사회구조가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개인의 일상은 사회구조 안에서 제약을 받지만, 그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은 개인의 일상에 잠재되어 있다. 일상은 사회구조라는 ‘맥락’에 속해 있지만, 그 일상에서는 ‘맥락’과 갈등을 겪고 한걸음 비껴나 맥락을 ‘탈맥락화’해서 보는 일마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구조에 대한 고려를 배제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구조를 고정된 법칙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인공물로서의 사회라는 이념을 구현하는 데 실패한다.
웅거의 사회이론은 이러한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를 넘어서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는다. 물론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웅거는 자신의 이론을 ‘초자유주의’(superliberalism)라고도 하는데, 자유의 제도적 형태를 바꿈으로써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를 향한 열망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다. 또 한편으로는 구조와 제도에 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마르크스주의의 필연론적인 법칙화에서 구출해내겠다는 야심 찬 목표가 있다. 이 책의 제1부와 제2부는 이러한 이론적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서구(북대서양 국가)와 비서구(소련·중국·일본 등)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제3부와 제4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웅거의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유, 즉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는 경멸적인 딱지가 붙은 프루동 등의 ‘프티부르주아 급진주의’를 현재 시점에서 복원한다는 점이다. 웅거는 프티부르주아 급진주의가 내건 소규모 상품생산과 경제적 분권화의 논리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포섭돼버린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발견한다. 서구 국가들이 시행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재분배 정책은 시장경제와 대의민주주의라는 더 큰 제도적 틀이 설정해놓은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웅거는 실질적인 정치·경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이를테면 정부 조직상으로는 중앙 집중된 권력기구를 분산화하고 중간급의 조정기구를 두며, 경제 조직상으로는 국가 차원의 중앙자본기금, 자본 할당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투자기금, 노동자·기술자·기업가 팀으로 구성된 1차 자본수급자 등 3개 층위로 나뉜 소유 구조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다시금 웅거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차별화되는데, 그는 ‘국가’가 개입되는 것에 급진주의자들이 보이는 알레르기 반응을 거두고 현실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 혹은 전략을 찾는 데 집중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야 한다”
웅거의 사회이론이 갖는 방법론적 구체성은 ‘슈퍼이론’(super-theory)과 ‘울트라이론’(ultra-theory)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부정의 능력’에서 출발한다고 여긴다. ‘부정의 능력’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편지에서 따온 개념으로, 원래 고정된 철학이나 기존 자연체계에 대한 거부라는 의미에서 사용됐다. 웅거 역시 이 개념을 빌려 이미 형성된 사회구조의 맥락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로 나아가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슈퍼이론’과 ‘울트라이론’은 이러한 부정의 능력을 공유한다. 다만, 울트라이론은 “끊임없는 부정의 노동” 속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현실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웅거가 보기에 푸코나 그람시가 이에 속한다). 반면 슈퍼이론은 사회를 재구성하는 프로그램, 이를 위한 이론의 체계화에 관심을 둔다(웅거는 상대적으로 슈퍼이론을 더 지지한다). 웅거는 슈퍼이론과 울트라이론 중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의 주된 관심, 나아가 자신의 지향이, 어느 선에서 결국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에도 이론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현실사회에서 사용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있음을 나타내 보이려 한다.
이러한 웅거의 입장은 “모든 것이 정치”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구조가 어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혹은 실제적인 필요 때문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며, 사회의 모든 조직, 모든 위계질서와 분업을 늘 다시 상상하고 다시 배치할 수 있음을 누차 강조한다.
인공물로서의 사회라는 관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려는 이론에서, 이러한 광의의 정치 관념은 사회형성이라는 관념으로 융합된다. “모든 것은 정치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포괄적인 관념을 더욱 전환시킨다. 이러한 추가적인 전환은 사회형성 활동이 미리 설정된 각본에 따르지 않으며, 그 결과들은 법칙과 같은 경제적·조직적·심리적 제한요소들이나 압도적인 발전경향의 성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다. (본문 57면)
웅거가 사회 재구성을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행 경로를 여러 프로그램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사회모델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에 가능했다. 지금도 여전히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최선의 모델로 언급되는 와중에, 30년 전 그는 “현재 선진 사회에서 확립된 형태들은 훨씬 더 넓은 제도적 가능성의 세계의 부분집합일 뿐”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국가나 조직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하는 곳은 ‘아직 탐험해보지 않은 세계의 다른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는 브라질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비서구권 국가의 제3의 모델을 염두에 두었던 데서 얻은 인식일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웅거는 국가 주도의 하향식 모델이 보인 성과가 눈에 띄지만, 국가와 대기업의 동반자 관계, 과도한 자원이 투입되고 있는 교육제도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진보는 요원한 일임을 지적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기 위해, 어떤 지적 풍토를 만들고, 사회적 공감대를 조성하며, 프로그램을 계획할 것인가. 로베르토 M. 웅거의 이 책이 새로운 발상에 강력한 자극이 될 것을 기대해본다.
▣ 작가 소개
저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angabeira Unger
브라질 출신의 하버드 로스쿨 교수. 리우데자네이루 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76년 29세의 나이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종신재직권을 받았다. 1970년대 중반 『지식과 정치』(Knowledge and Politics) 『현대사회에서의 법』(Law in Modern Society)을 출간하며, 미국 법학계를 뒤흔든 비판법학운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후 1987년 『정치』(Politics) 3부작을 통해 자신의 사회이론을 집대성했다.
웅거는 방대한 저술작업을 하면서도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정당활동을 했으며, 1990년에는 직접 브라질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룰라 정부에서 전략기획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며 브라질 론도니아 주의 사회발전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역 : 김정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위스콘신 로스쿨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판법학과 사회이론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왔으며, 웅거의 법이론과 사회이론에 대한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현대사회사상과 법』 『한국의 법문화』가 있으며, 공저로 『법철학』 『현대법철학의 흐름』 『응용법철학』 『자유주의의 가치들』, 역서로 『코드 2.0』 등이 있다.
편 : 추이 즈위안
崔之元
중국 국방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칭화대학 공공관리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개혁이 사회주의 역사경험의 합리적 요소를 살린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좌파 지식인이다. 주요 저서로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저자의 말 - 한국어판에 부쳐 4
역자의 말 11
서문 19
제1부 급진적 반자연주의 사회이론
제1장 서론: 인공물로서의 사회 43
제2장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68
제3장 사회이론의 환경: 추가적인 출발점 79
만들어지고 상상된 것으로서의 사회 79 | 심층구조 사회이론 90 | 진화론적 심층구조 사회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103 | 비진화론적 심층구조 사회이론으로서 경제학 136
제4장 “모든 것은 정치다”라는 슬로건 이해하기: 급진적 반자연주의 사회이론을 향하여 148
이론의 테마들 148 | 실천적 함의들 160 | 모든 것이 정치라는 관념을 발전시키는 두가지 방법: 슈퍼이론과 울트라이론 168
제2부 현대의 형성적 맥락들의 생성
제5장 세 복합체의 기원: 노동조직, 정부, 사적 권리들 179
회의적인 서막: 사적 기업과 정부 정책 179 | 노동조직 복합체의 기원 184 | 사적 권리 복합체의 기원 205 | 통치조직 복합체의 기원 221
제6장 또다른 형성적 맥락의 기원: 공산주의 대안 241
제7장 형성적 맥락의 운용에 나타난 안정성과 탈안정화 263
제8장 부정의 능력과 조형력을 권력 속으로 296
핵심적인 생각 296 | 조형력과 타협: 유럽의 사례들 314 | 잠정적인 결론 337 | 타협의 한계: 중국과 일본의 사례들 345 | 사회적 조형력의 명령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364
제3부 강화된 민주주의의 제도적 프로그램
제9장 원형이론 377
설명적 테마와 프로그램적 테마 377 | 원형이론 420
제10장 실천: 권력의 추구와 권력의 장악 433
변혁적 실천의 문제들 433 | 권력을 추구하는 변혁운동 450 | 권력 영역에서의 변혁운동 485
제11장 입헌적 재조직 499
입헌적 재조직의 실험: 이원제의 사례 499 | 정부의 조직: 중첩적인 권력기관과 기능의 증식 505 | 정부의 조직: 권력기관들의 갈등을 형성하고 해결하기 512 | 정부의 조직: 의사결정기구 517 | 정부의 조직: 미니 헌법의 제정 522 | 당파적 갈등의 조직: 강화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안정 524 | 규칙 깨뜨리기: 분권화의 형태들 542 | 반정부의 조직: 자발적 결사의 구조 545
제12장 경제적 재조직 551
경제의 조직: 현재의 시장체제와 그 비용 551 | 경제의 조직: 순환자본기금과 민주적 통제 567 | 경제의 조직: 중앙집권화의 위험과 그 대응책들 584 | 경제의 조직: 작업 설계 588
제13장 권리들의 체계: 네가지 권리 593
권리들의 체계 593
제4부 강화된 민주주의의 문화 프로그램
제14장 제도적 프로그램에 대한 문화혁명적 대응방안 641
제15장 변혁적 소명의 관념 663
제16장 정신 679
헌법의 정신: 상상되고 왜곡된 역량강화 679 | 대조에 의해서 재정의된 헌법 정신 685 | 불완전의 의미 691
역자 해제 702
웅거의 주요 저작 719
용어 해설 720
사항 찾아보기 732
인명 찾아보기 739
저자·편자·역자 소개 742
브라질이 낳은 하버드 로스쿨의 비전가
로베르토 망가베이라(Roberto Mangabeira)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웅거는 라틴아메리카 태생이다. 웅거의 외할아버지는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때 그의 어머니가 독일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만나 1947년 브라질에서 그를 낳았다. 웅거는 브라질 출신이라는 점을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한 축으로 놓고 있어서, 고향에서 쓰는 ‘망가베이라’라는 이름이 언제나 함께 불리길 원한다.
리우데자네이루 대학교를 졸업한 웅거는 미국 하버드로 건너가 법학석사 과정을 밟는다. 이후 웅거의 삶은 평탄일로를 걷는 듯하다. 1970년대 중반 29세 나이로 일찌감치 하버드 로스쿨 종신재직권을 받았고, 『지식과 정치』(1975) 『현대사회에서의 법』(1976)이라는 두권의 책으로 미국 법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비판법학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웅거는 근대 서구의 정치사상을 재검토하는 것을 자기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지식과 정치』에서는 자유주의 사회의 현실에 나타난 한계를 명쾌하게 드러냈으며, 이를 토대로 『현대사회에서의 법』에서 자유주의 법체계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웅거의 주장은 하버드의 던컨 케네디와 위스콘신의 데이비드 트루벡 등 1970년대 진보적인 법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미국에서 비판법학운동이 일어나는 데 이론적 지침으로 자리매김했다. 비판법학운동은 세계의 변화에 매우 둔감했던 법학계에서는 아주 예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참여자들은 근대 서구사회가 구축해온 법제도의 타당성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고 자유주의 법체계의 기본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많은 소장학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으로 기울면서, 웅거의 사회이론은 이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웅거는 궁극적으로 “해체가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관념들을 갖고 연구하고 싶어” 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리처드 로티, 1987). 1987년 웅거가 자신의 이론을 집대성한 『정치』 삼부작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단, 이후의 논쟁들은 웅거가 서구 사상사의 계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와 같이 주변적인 문제에 관심을 둘 뿐 이 작업의 진의를 알아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주목할 것은 웅거의 이론 작업이 당시 세계정세를 좌지우지하던 “미국의 대학 앞마당”에서, 군사독재와 쿠데타로 혼란에 빠진 고국 브라질의 정치 상황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나온 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웅거 이론의 남다른 역사성과 현실성이 생겨난다. 그에게 근대 서구의 사상과 제도를 검토하는 일은 브라질을 비롯한 비서구 국가에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려는 목표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제였다. “브라질에서는 발전과 민주주의의 문제가 경제의 세계화와 제도적 복제를 결합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주류적인 이론은 숙명론처럼 두 언어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화석화되고 축약된 마르크스주의의 언어였으며, 다른 하나는 미국의 대학들에서 수립된 스타일인 응용된 실증주의 사회과학의 언어였다.”(역자 서문) 다른 사회적·역사적 경험을 가진 곳에는 다른 사회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이론작업은 『정치』를 통해 무르익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급진적 기획, 『정치』
웅거는 자신의 작업을 ‘사회이론’이라 이름 붙인다. 정치든 경제든 법이든, 그의 저술에서는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폭넓은 이론으로 확장된다. 『정치』 역시 분과학문으로서 정치학에 국한되지 않는 사유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웅거가 생각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회는 인간이 만들고 상상하는 것, 즉 ‘인공물’로서의 사회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근대 이래 모든 사회사상은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웅거는 이 진정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불행히도 어느 사회사상에서도 온전히 구현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디어를 밀고 나가려면 우선 개인의 일상과 사회구조가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개인의 일상은 사회구조 안에서 제약을 받지만, 그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은 개인의 일상에 잠재되어 있다. 일상은 사회구조라는 ‘맥락’에 속해 있지만, 그 일상에서는 ‘맥락’과 갈등을 겪고 한걸음 비껴나 맥락을 ‘탈맥락화’해서 보는 일마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구조에 대한 고려를 배제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구조를 고정된 법칙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인공물로서의 사회라는 이념을 구현하는 데 실패한다.
웅거의 사회이론은 이러한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를 넘어서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는다. 물론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웅거는 자신의 이론을 ‘초자유주의’(superliberalism)라고도 하는데, 자유의 제도적 형태를 바꿈으로써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를 향한 열망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다. 또 한편으로는 구조와 제도에 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마르크스주의의 필연론적인 법칙화에서 구출해내겠다는 야심 찬 목표가 있다. 이 책의 제1부와 제2부는 이러한 이론적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서구(북대서양 국가)와 비서구(소련·중국·일본 등)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제3부와 제4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웅거의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유, 즉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는 경멸적인 딱지가 붙은 프루동 등의 ‘프티부르주아 급진주의’를 현재 시점에서 복원한다는 점이다. 웅거는 프티부르주아 급진주의가 내건 소규모 상품생산과 경제적 분권화의 논리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포섭돼버린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발견한다. 서구 국가들이 시행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재분배 정책은 시장경제와 대의민주주의라는 더 큰 제도적 틀이 설정해놓은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웅거는 실질적인 정치·경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이를테면 정부 조직상으로는 중앙 집중된 권력기구를 분산화하고 중간급의 조정기구를 두며, 경제 조직상으로는 국가 차원의 중앙자본기금, 자본 할당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투자기금, 노동자·기술자·기업가 팀으로 구성된 1차 자본수급자 등 3개 층위로 나뉜 소유 구조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다시금 웅거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차별화되는데, 그는 ‘국가’가 개입되는 것에 급진주의자들이 보이는 알레르기 반응을 거두고 현실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 혹은 전략을 찾는 데 집중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야 한다”
웅거의 사회이론이 갖는 방법론적 구체성은 ‘슈퍼이론’(super-theory)과 ‘울트라이론’(ultra-theory)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부정의 능력’에서 출발한다고 여긴다. ‘부정의 능력’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편지에서 따온 개념으로, 원래 고정된 철학이나 기존 자연체계에 대한 거부라는 의미에서 사용됐다. 웅거 역시 이 개념을 빌려 이미 형성된 사회구조의 맥락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로 나아가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슈퍼이론’과 ‘울트라이론’은 이러한 부정의 능력을 공유한다. 다만, 울트라이론은 “끊임없는 부정의 노동” 속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현실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웅거가 보기에 푸코나 그람시가 이에 속한다). 반면 슈퍼이론은 사회를 재구성하는 프로그램, 이를 위한 이론의 체계화에 관심을 둔다(웅거는 상대적으로 슈퍼이론을 더 지지한다). 웅거는 슈퍼이론과 울트라이론 중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의 주된 관심, 나아가 자신의 지향이, 어느 선에서 결국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에도 이론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현실사회에서 사용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있음을 나타내 보이려 한다.
이러한 웅거의 입장은 “모든 것이 정치”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구조가 어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혹은 실제적인 필요 때문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며, 사회의 모든 조직, 모든 위계질서와 분업을 늘 다시 상상하고 다시 배치할 수 있음을 누차 강조한다.
인공물로서의 사회라는 관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려는 이론에서, 이러한 광의의 정치 관념은 사회형성이라는 관념으로 융합된다. “모든 것은 정치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포괄적인 관념을 더욱 전환시킨다. 이러한 추가적인 전환은 사회형성 활동이 미리 설정된 각본에 따르지 않으며, 그 결과들은 법칙과 같은 경제적·조직적·심리적 제한요소들이나 압도적인 발전경향의 성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다. (본문 57면)
웅거가 사회 재구성을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행 경로를 여러 프로그램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사회모델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에 가능했다. 지금도 여전히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최선의 모델로 언급되는 와중에, 30년 전 그는 “현재 선진 사회에서 확립된 형태들은 훨씬 더 넓은 제도적 가능성의 세계의 부분집합일 뿐”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국가나 조직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찾아야 하는 곳은 ‘아직 탐험해보지 않은 세계의 다른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는 브라질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비서구권 국가의 제3의 모델을 염두에 두었던 데서 얻은 인식일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웅거는 국가 주도의 하향식 모델이 보인 성과가 눈에 띄지만, 국가와 대기업의 동반자 관계, 과도한 자원이 투입되고 있는 교육제도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진보는 요원한 일임을 지적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기 위해, 어떤 지적 풍토를 만들고, 사회적 공감대를 조성하며, 프로그램을 계획할 것인가. 로베르토 M. 웅거의 이 책이 새로운 발상에 강력한 자극이 될 것을 기대해본다.
▣ 작가 소개
저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angabeira Unger
브라질 출신의 하버드 로스쿨 교수. 리우데자네이루 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76년 29세의 나이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종신재직권을 받았다. 1970년대 중반 『지식과 정치』(Knowledge and Politics) 『현대사회에서의 법』(Law in Modern Society)을 출간하며, 미국 법학계를 뒤흔든 비판법학운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후 1987년 『정치』(Politics) 3부작을 통해 자신의 사회이론을 집대성했다.
웅거는 방대한 저술작업을 하면서도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정당활동을 했으며, 1990년에는 직접 브라질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룰라 정부에서 전략기획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며 브라질 론도니아 주의 사회발전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역 : 김정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위스콘신 로스쿨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판법학과 사회이론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왔으며, 웅거의 법이론과 사회이론에 대한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현대사회사상과 법』 『한국의 법문화』가 있으며, 공저로 『법철학』 『현대법철학의 흐름』 『응용법철학』 『자유주의의 가치들』, 역서로 『코드 2.0』 등이 있다.
편 : 추이 즈위안
崔之元
중국 국방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칭화대학 공공관리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개혁이 사회주의 역사경험의 합리적 요소를 살린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좌파 지식인이다. 주요 저서로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저자의 말 - 한국어판에 부쳐 4
역자의 말 11
서문 19
제1부 급진적 반자연주의 사회이론
제1장 서론: 인공물로서의 사회 43
제2장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68
제3장 사회이론의 환경: 추가적인 출발점 79
만들어지고 상상된 것으로서의 사회 79 | 심층구조 사회이론 90 | 진화론적 심층구조 사회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103 | 비진화론적 심층구조 사회이론으로서 경제학 136
제4장 “모든 것은 정치다”라는 슬로건 이해하기: 급진적 반자연주의 사회이론을 향하여 148
이론의 테마들 148 | 실천적 함의들 160 | 모든 것이 정치라는 관념을 발전시키는 두가지 방법: 슈퍼이론과 울트라이론 168
제2부 현대의 형성적 맥락들의 생성
제5장 세 복합체의 기원: 노동조직, 정부, 사적 권리들 179
회의적인 서막: 사적 기업과 정부 정책 179 | 노동조직 복합체의 기원 184 | 사적 권리 복합체의 기원 205 | 통치조직 복합체의 기원 221
제6장 또다른 형성적 맥락의 기원: 공산주의 대안 241
제7장 형성적 맥락의 운용에 나타난 안정성과 탈안정화 263
제8장 부정의 능력과 조형력을 권력 속으로 296
핵심적인 생각 296 | 조형력과 타협: 유럽의 사례들 314 | 잠정적인 결론 337 | 타협의 한계: 중국과 일본의 사례들 345 | 사회적 조형력의 명령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364
제3부 강화된 민주주의의 제도적 프로그램
제9장 원형이론 377
설명적 테마와 프로그램적 테마 377 | 원형이론 420
제10장 실천: 권력의 추구와 권력의 장악 433
변혁적 실천의 문제들 433 | 권력을 추구하는 변혁운동 450 | 권력 영역에서의 변혁운동 485
제11장 입헌적 재조직 499
입헌적 재조직의 실험: 이원제의 사례 499 | 정부의 조직: 중첩적인 권력기관과 기능의 증식 505 | 정부의 조직: 권력기관들의 갈등을 형성하고 해결하기 512 | 정부의 조직: 의사결정기구 517 | 정부의 조직: 미니 헌법의 제정 522 | 당파적 갈등의 조직: 강화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안정 524 | 규칙 깨뜨리기: 분권화의 형태들 542 | 반정부의 조직: 자발적 결사의 구조 545
제12장 경제적 재조직 551
경제의 조직: 현재의 시장체제와 그 비용 551 | 경제의 조직: 순환자본기금과 민주적 통제 567 | 경제의 조직: 중앙집권화의 위험과 그 대응책들 584 | 경제의 조직: 작업 설계 588
제13장 권리들의 체계: 네가지 권리 593
권리들의 체계 593
제4부 강화된 민주주의의 문화 프로그램
제14장 제도적 프로그램에 대한 문화혁명적 대응방안 641
제15장 변혁적 소명의 관념 663
제16장 정신 679
헌법의 정신: 상상되고 왜곡된 역량강화 679 | 대조에 의해서 재정의된 헌법 정신 685 | 불완전의 의미 691
역자 해제 702
웅거의 주요 저작 719
용어 해설 720
사항 찾아보기 732
인명 찾아보기 739
저자·편자·역자 소개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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