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치명적인 사랑과 나락으로 떨어진 삶
유미주의의 주창자로 이름을 날린 와일드는 1891년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하여 문학·예술 평론집 『의도들』, 단편집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 동화집 『석류나무 집』을 출간하고, 희곡 『살로메』의 집필을 끝내며 작가로서 정점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해에 그의 삶을 끝없는 격랑 속으로 몰고 간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처음 만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아홉 번이나 읽고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온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다녔던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의 재학생으로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3년 동안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와일드의 삶을 철저히 파괴했다. 더글러스는 과격한 성격에 낭비벽이 있었으며 와일드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도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는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퀸스베리 후작은 자신의 아들과 와일드를 떼어놓기 위해 그를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다녔다. 그들 부자에게 지칠 대로 지친 와일드는 결국 퀸스베리 후작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나 1895년 열린 수차례의 재판은 여러모로 와일드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그는 ‘다른 남성들과 역겨운 외설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는다. (더글러스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와일드의 재판이 시작된 다음날 유럽으로 떠나 3년간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유죄선고를 받자 런던의 극장과 서점가에서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런던 최고의 유명 인사에서 무명의 죄수로 한순간에 전락해버린 것이다.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독일로 떠났으며 와일드라는 성을 홀랜드로 바꾸었다. 그는 두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 그가 죽은 뒤에도 그 후손은 와일드라는 성을 되찾지 않았다.
와일드가 복역했던 19세기 말 영국의 교도소는 말 그대로 끔찍했다. 그는 무거운 형벌과 고된 노역, 배고픔과 추위, 일상적인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와일드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지적 허기였다. 그러다 복역중에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의 배려로 와일드는 책을 읽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교도소장은 와일드가 쓴 편지를 모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그가 출소할 때 돌려주었다. (당시 레딩 교도소에서는 편지를 하루에 한 쪽밖에 쓸 수 없었고, 다 쓴 편지는 펜과 함께 바로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이 편지에서는 종종 문법적 오류나 잘못된 문학적 인용이 발견된다.) 『심연으로부터』는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쓰인 지 65년 만에 출간된 『심연으로부터』 원본
1897년 5월 19일 출소한 뒤,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그다음 날 프랑스 디에프에 도착해 로버트 로스를 만났다. (로버트 로스는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으로 그의 가장 충실한 친구였다. 그는 죽어서도 와일드와 함께 묻혔다.) 그는 로스에게 편지 뭉치를 건네면서 한 부는 타자해서 간직하고 원본은 더글러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편지를 간직하고 있던 로스는 원본은 자신이 갖고 한 부를 타자해서 더글러스에게 주었다.
이 편지는 1905년 독일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같은 해에 런던에서도 편지의 삭제판이 출간되었다. 당시 로스는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도록 더글러스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구절을 삭제했는데 무려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분량이었다. 그래서 원본이 공개될 때까지 일반 사람들은 이 편지를 와일드의 단순한 참회록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본 또한 대부분 이러한 삭제판을 대본으로 하여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는 1905년 로스가 삭제판을 펴내면서 붙인 제목이다(구약 시편 130편). 와일드가 처음에 붙인 제목은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쓴 편지(Epistola: In Carcere et Vinculis)’이다. 로스는 향후 5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편지의 원본을 영국박물관에 맡겼다. 편지의 수신인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12년이었다. 로스의 친구 아서 랜섬이 『오스카 와일드: 비평적 연구』라는 책에서 로스가 알려준 삭제된 구절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더글러스는 랜섬과 편집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랜섬은 다음 쇄에서 문제가 된 구절들을 삭제했고, 로스가 요구한 대로 더글러스 생전에는 와일드의 편지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비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로스는 와일드의 차남 비비언 홀랜드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타자한 편지를 전해주었다(이 원고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고, 특히 로스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와 퀸스베리 후작을 비판하는 대목을 100여 군데나 삭제했다). 1945년 더글러스가 사망하자 비비언은 1949년에 로스에게서 받은 불완전한 원고를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와일드는 편지는 1962년, 쓰인 지 6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마지막 날들
와일드가 이 기나긴 편지를 쓴 중요한 동기는 편지를 다 쓰고 출소를 기다리고 있던 1897년 4월 1일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자네가 나의 문학과 관련한 유언집행자가 되려면 퀸스베리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나의 기이한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문서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할 거야. 이 편지를 다 읽으면, 자넨 그 속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음의 극치와 천박한 허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내 행동에 대한 심리적인 해명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거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더글러스의 생전에는 아닐지 몰라도. 하지만 난 언제까지고 저들에 의해 기괴한 공시대에 매달려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이 영원히 퀸스베리 부자의 방패막이와 무기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나는 내 행위에 대한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단지 해명할 뿐이지.
또한 그 편지 속에는 감옥에서의 나의 정신적 성장과, 지난 삶에 대한 지적 태도와 나의 기질의 필연적인 변화를 다루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는 자네를 비롯하여 변함없이 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내 편에 서 있는 이들이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세상과 맞서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기를 바라.
출소 후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서배스천 멜모스라는 가명을 쓰며 지냈다. 마지막 작품이 된 『레딩 감옥의 발라드』를 출간하긴 했으나 더 이상은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 그는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상실했으며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에서 대부분 홀로 고독과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의 자리는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와일드는 더글러스와 재회했다. 1897년 8월, 그들은 루앙에서 만나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나폴리를 비롯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던 그들은 와일드의 아내, 친구들, 퀸스베리 후작의 비난과 압력에 다시 헤어졌다. 그를 염려하던 로스에게 와일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로비, 오늘 자네 편지를 받았네.
내가 보시(더글러스)에게 돌아간 건 심리학적으로 불가피한 일이었어. (…)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나는 사랑의 기운 없이는 살 수 없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지. (…) 베른발에서 지낸 마지막 한 달 동안 난 너무나 외로워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네. 세상이 내게 문을 닫아걸었을 때, 사랑의 문은 아직 열려 있었던 거야. 사람들이 내가 보시에게 돌아간 것을 비난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게. 그는 내게 사랑을 선물해주었다고. 외로움과 오욕 속에서, 끔찍한 속물세계와 석 달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갔던 거야. 물론 나는 종종 불행할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네. 그가 내 삶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거야.
생애 마지막 날들을 와일드는 파리의 싸구려 호텔들을 전전하며 보냈다. 1900년 9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10월에는 호텔방에서 귀 수술을 받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에 귀의했다. 11월 30일, 두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와일드는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막염이었다.
앙드레 지드가 만난 오스카 와일드
이 책에 함께 실린 앙드레 지드의 글 두 편(「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심연으로부터』를 읽고」. 이 글들은 지드의 『오스카 와일드』라는 책에 실려 있다)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와일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지드는 1891년 11월 26일 파리에서 와일드를 처음 만났다. 당시 와일드는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와일드를 만난 청년 지드는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폴 발레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와일드를 만난 이후로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그는 평생 와일드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다. 지드가 와일드에게서 받은 영향은 실제로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에서 지드는 파리에서 와일드를 처음 만난 이후 피렌체, 알제리, 베른발 그리고 다시 파리에서 그와 여러 차례 마주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회상한다. 「『심연으로부터』를 읽고」는 와일드의 편지를 이해하는 데 각별한 도움을 준다.
책 앞에는 특별히 화보를 실었다. 와일드와 더글러스가 함께 찍은 사진, 재판 당시의 신문 삽화, 『심연으로부터』의 초고, 와일드가 말년에 기거했던 호텔방 사진 등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자료들 위주로 구성했다. 화보를 통해 와일드의 드라마틱한 삶과 이 책의 매력을 좀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초 오스카 와일드의 에세이 선집 『거짓의 쇠락』(은행나무, 2015)을 펴낸 역자 박명숙은 와일드의 삶을 파고들며 텍스트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원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심연으로부터』 완역본을 선보이게 되었다. 작품의 이해를 돕는 충실한 주석과 와일드 고유의 스타일을 살린 섬세한 번역을 통해 독자는 그동안 잘못 이해되어온 이 책의 내용과 예술가로서의 오스카 와일드의 진면목을 새로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연으로부터』에서 발췌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
“감옥에서 지내는 우리로서는, 슬퍼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우리는 고통이 주는 통증과 쓰라린 순간들에 대한 기억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밖에 없어.”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지.”
“신들은 참 이상해. 우리를 벌줄 때 우리의 악덕을 그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파멸로 이끄니 말이야. 나 역시 당신과 당신 가족에 대해 연민과 애정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끔찍한 곳에서 눈물 흘리고 있진 않았을 거야.”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게 아니야. 비합리적인 순간이 때로는 가장 근사한 순간이 될 수도 있거든.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논리적인 면에서 비롯되지.”
“사랑은 시장에서 거래를 하지도, 행상꾼의 저울을 사용하지도 않아. 사랑의 기쁨은 지적인 기쁨처럼 사랑 자체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지. 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것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야.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입술에 거짓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야. 에머슨은 언젠가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행위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아.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그들의 생각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고, 그들의 삶은 모방이며, 그들의 열정은 인용일 뿐이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장담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위선적인 말일 수 있지만,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전이지.”
“예술에서 좋은 의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형편없는 예술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우린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의 감정들에도 비용을 지불해야만 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 감정들을 더 고귀하게 만드는 거야.”
“모든 재판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재판이야. 모든 선고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듯이.”
▣ 작가 소개
저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뛰어난 구술가이자 당대를 호위한 유미주의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와일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다른 유명 작가, 예를 들면 예이츠나 버나드 쇼 등과 마찬가지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즉 자못 엄격해 보이는 도덕주의, 위선적인 진지함과 엄숙함이 대중의 삶을 억누르던 시대에 와일드는 내면의 개인주의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본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그의 기질은 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외양으로도, 그리도 작품으로도 드러났다. 젊은 시인인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한바탕 동성애 사건뿐만이 아니더라도 남자들이 검은색과 회색 옷만을 걸치고 다니던 시절 그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으며 머리는 치렁치렁 길게 기르고 단춧구멍에는 초록색 꽃을 꽂고 다녔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상류층과 어울리면서도 그가 내적으로 추구한 것은 결국 〈멋〉 아니면 〈미(美)〉였다. 그는 뛰어난 구술사로 수많은 경구가 가득한 희곡을 남겼고, 강연에도 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1854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시인인 어머니와 유명한 의사이자 민속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유미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888년 단편집 『행복한 왕자』를 발표했고, 1891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2년에는 단편집 『석류나무 집』을 발표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발표 당시 격론을 일으켰으며, 특히 『행복한 왕자』는 19세기 말 물질주의가 만연한 영국 사회에 사랑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이상주의를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작품으으로, 비평가 월터 페이터로부터 동화 중의 걸작이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독설과 위트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말솜씨로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진지함의 중요성』(1895) 같은 희곡으로 극작가로서 위상을 다졌으며, 1893년에는 비극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1895년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옥중기』를 썼다. 1897년에 출옥하여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900년에 사망했다.
와일드의 명예는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회복되었으며, 이후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역 : 박명숙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보르도 제3대학에서 언어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공부하고 ‘몰리에르’ 연구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와 배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출판기획 자와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전진하는 진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로랑 구넬의 『가고 싶은 길을 가라』, 『라 퐁텐 그림우화』, 플로리앙 젤러의 『누구나의 연인』, 티에리 코엔의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꿈꾸었다』, 도미니크 보나의 『위대한 열정』, 마리 카르디날의 『두 사람을 위한 하나의 삶』, 장 이브 보리오의 『로마의 역사』,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옮긴이의 말
오스카 와일드 100년 만에 되찾은 이름, 그 명멸의 스토리 …7
심연으로부터 …41
오스카 와일드―앙드레 지드 …241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245
『심연으로부터』를 읽고 …283
미주 ...297
치명적인 사랑과 나락으로 떨어진 삶
유미주의의 주창자로 이름을 날린 와일드는 1891년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하여 문학·예술 평론집 『의도들』, 단편집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 동화집 『석류나무 집』을 출간하고, 희곡 『살로메』의 집필을 끝내며 작가로서 정점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해에 그의 삶을 끝없는 격랑 속으로 몰고 간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처음 만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아홉 번이나 읽고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온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다녔던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의 재학생으로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3년 동안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와일드의 삶을 철저히 파괴했다. 더글러스는 과격한 성격에 낭비벽이 있었으며 와일드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도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는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퀸스베리 후작은 자신의 아들과 와일드를 떼어놓기 위해 그를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다녔다. 그들 부자에게 지칠 대로 지친 와일드는 결국 퀸스베리 후작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나 1895년 열린 수차례의 재판은 여러모로 와일드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그는 ‘다른 남성들과 역겨운 외설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는다. (더글러스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와일드의 재판이 시작된 다음날 유럽으로 떠나 3년간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유죄선고를 받자 런던의 극장과 서점가에서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런던 최고의 유명 인사에서 무명의 죄수로 한순간에 전락해버린 것이다.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독일로 떠났으며 와일드라는 성을 홀랜드로 바꾸었다. 그는 두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 그가 죽은 뒤에도 그 후손은 와일드라는 성을 되찾지 않았다.
와일드가 복역했던 19세기 말 영국의 교도소는 말 그대로 끔찍했다. 그는 무거운 형벌과 고된 노역, 배고픔과 추위, 일상적인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와일드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지적 허기였다. 그러다 복역중에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의 배려로 와일드는 책을 읽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교도소장은 와일드가 쓴 편지를 모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그가 출소할 때 돌려주었다. (당시 레딩 교도소에서는 편지를 하루에 한 쪽밖에 쓸 수 없었고, 다 쓴 편지는 펜과 함께 바로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이 편지에서는 종종 문법적 오류나 잘못된 문학적 인용이 발견된다.) 『심연으로부터』는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쓰인 지 65년 만에 출간된 『심연으로부터』 원본
1897년 5월 19일 출소한 뒤,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그다음 날 프랑스 디에프에 도착해 로버트 로스를 만났다. (로버트 로스는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으로 그의 가장 충실한 친구였다. 그는 죽어서도 와일드와 함께 묻혔다.) 그는 로스에게 편지 뭉치를 건네면서 한 부는 타자해서 간직하고 원본은 더글러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편지를 간직하고 있던 로스는 원본은 자신이 갖고 한 부를 타자해서 더글러스에게 주었다.
이 편지는 1905년 독일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같은 해에 런던에서도 편지의 삭제판이 출간되었다. 당시 로스는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도록 더글러스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구절을 삭제했는데 무려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분량이었다. 그래서 원본이 공개될 때까지 일반 사람들은 이 편지를 와일드의 단순한 참회록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본 또한 대부분 이러한 삭제판을 대본으로 하여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는 1905년 로스가 삭제판을 펴내면서 붙인 제목이다(구약 시편 130편). 와일드가 처음에 붙인 제목은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쓴 편지(Epistola: In Carcere et Vinculis)’이다. 로스는 향후 5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편지의 원본을 영국박물관에 맡겼다. 편지의 수신인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12년이었다. 로스의 친구 아서 랜섬이 『오스카 와일드: 비평적 연구』라는 책에서 로스가 알려준 삭제된 구절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더글러스는 랜섬과 편집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랜섬은 다음 쇄에서 문제가 된 구절들을 삭제했고, 로스가 요구한 대로 더글러스 생전에는 와일드의 편지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비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로스는 와일드의 차남 비비언 홀랜드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타자한 편지를 전해주었다(이 원고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고, 특히 로스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와 퀸스베리 후작을 비판하는 대목을 100여 군데나 삭제했다). 1945년 더글러스가 사망하자 비비언은 1949년에 로스에게서 받은 불완전한 원고를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와일드는 편지는 1962년, 쓰인 지 6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마지막 날들
와일드가 이 기나긴 편지를 쓴 중요한 동기는 편지를 다 쓰고 출소를 기다리고 있던 1897년 4월 1일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자네가 나의 문학과 관련한 유언집행자가 되려면 퀸스베리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나의 기이한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문서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할 거야. 이 편지를 다 읽으면, 자넨 그 속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음의 극치와 천박한 허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내 행동에 대한 심리적인 해명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거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더글러스의 생전에는 아닐지 몰라도. 하지만 난 언제까지고 저들에 의해 기괴한 공시대에 매달려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이 영원히 퀸스베리 부자의 방패막이와 무기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나는 내 행위에 대한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단지 해명할 뿐이지.
또한 그 편지 속에는 감옥에서의 나의 정신적 성장과, 지난 삶에 대한 지적 태도와 나의 기질의 필연적인 변화를 다루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는 자네를 비롯하여 변함없이 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내 편에 서 있는 이들이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세상과 맞서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기를 바라.
출소 후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서배스천 멜모스라는 가명을 쓰며 지냈다. 마지막 작품이 된 『레딩 감옥의 발라드』를 출간하긴 했으나 더 이상은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 그는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상실했으며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에서 대부분 홀로 고독과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의 자리는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와일드는 더글러스와 재회했다. 1897년 8월, 그들은 루앙에서 만나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나폴리를 비롯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던 그들은 와일드의 아내, 친구들, 퀸스베리 후작의 비난과 압력에 다시 헤어졌다. 그를 염려하던 로스에게 와일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로비, 오늘 자네 편지를 받았네.
내가 보시(더글러스)에게 돌아간 건 심리학적으로 불가피한 일이었어. (…)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나는 사랑의 기운 없이는 살 수 없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지. (…) 베른발에서 지낸 마지막 한 달 동안 난 너무나 외로워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네. 세상이 내게 문을 닫아걸었을 때, 사랑의 문은 아직 열려 있었던 거야. 사람들이 내가 보시에게 돌아간 것을 비난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게. 그는 내게 사랑을 선물해주었다고. 외로움과 오욕 속에서, 끔찍한 속물세계와 석 달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갔던 거야. 물론 나는 종종 불행할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네. 그가 내 삶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거야.
생애 마지막 날들을 와일드는 파리의 싸구려 호텔들을 전전하며 보냈다. 1900년 9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10월에는 호텔방에서 귀 수술을 받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에 귀의했다. 11월 30일, 두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와일드는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막염이었다.
앙드레 지드가 만난 오스카 와일드
이 책에 함께 실린 앙드레 지드의 글 두 편(「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심연으로부터』를 읽고」. 이 글들은 지드의 『오스카 와일드』라는 책에 실려 있다)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와일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지드는 1891년 11월 26일 파리에서 와일드를 처음 만났다. 당시 와일드는 작가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와일드를 만난 청년 지드는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폴 발레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와일드를 만난 이후로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그는 평생 와일드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다. 지드가 와일드에게서 받은 영향은 실제로 그의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에서 지드는 파리에서 와일드를 처음 만난 이후 피렌체, 알제리, 베른발 그리고 다시 파리에서 그와 여러 차례 마주친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회상한다. 「『심연으로부터』를 읽고」는 와일드의 편지를 이해하는 데 각별한 도움을 준다.
책 앞에는 특별히 화보를 실었다. 와일드와 더글러스가 함께 찍은 사진, 재판 당시의 신문 삽화, 『심연으로부터』의 초고, 와일드가 말년에 기거했던 호텔방 사진 등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자료들 위주로 구성했다. 화보를 통해 와일드의 드라마틱한 삶과 이 책의 매력을 좀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초 오스카 와일드의 에세이 선집 『거짓의 쇠락』(은행나무, 2015)을 펴낸 역자 박명숙은 와일드의 삶을 파고들며 텍스트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원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심연으로부터』 완역본을 선보이게 되었다. 작품의 이해를 돕는 충실한 주석과 와일드 고유의 스타일을 살린 섬세한 번역을 통해 독자는 그동안 잘못 이해되어온 이 책의 내용과 예술가로서의 오스카 와일드의 진면목을 새로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연으로부터』에서 발췌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
“감옥에서 지내는 우리로서는, 슬퍼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우리는 고통이 주는 통증과 쓰라린 순간들에 대한 기억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밖에 없어.”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지.”
“신들은 참 이상해. 우리를 벌줄 때 우리의 악덕을 그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파멸로 이끄니 말이야. 나 역시 당신과 당신 가족에 대해 연민과 애정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끔찍한 곳에서 눈물 흘리고 있진 않았을 거야.”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게 아니야. 비합리적인 순간이 때로는 가장 근사한 순간이 될 수도 있거든.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논리적인 면에서 비롯되지.”
“사랑은 시장에서 거래를 하지도, 행상꾼의 저울을 사용하지도 않아. 사랑의 기쁨은 지적인 기쁨처럼 사랑 자체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지. 사랑의 목적은 사랑하는 것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자신의 경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야.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입술에 거짓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야. 에머슨은 언젠가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행위보다 귀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아.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그들의 생각은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고, 그들의 삶은 모방이며, 그들의 열정은 인용일 뿐이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장담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위선적인 말일 수 있지만,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전이지.”
“예술에서 좋은 의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형편없는 예술은 모두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우린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의 감정들에도 비용을 지불해야만 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 감정들을 더 고귀하게 만드는 거야.”
“모든 재판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재판이야. 모든 선고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듯이.”
▣ 작가 소개
저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뛰어난 구술가이자 당대를 호위한 유미주의자.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와일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다른 유명 작가, 예를 들면 예이츠나 버나드 쇼 등과 마찬가지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았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즉 자못 엄격해 보이는 도덕주의, 위선적인 진지함과 엄숙함이 대중의 삶을 억누르던 시대에 와일드는 내면의 개인주의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본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그의 기질은 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외양으로도, 그리도 작품으로도 드러났다. 젊은 시인인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의 한바탕 동성애 사건뿐만이 아니더라도 남자들이 검은색과 회색 옷만을 걸치고 다니던 시절 그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으며 머리는 치렁치렁 길게 기르고 단춧구멍에는 초록색 꽃을 꽂고 다녔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상류층과 어울리면서도 그가 내적으로 추구한 것은 결국 〈멋〉 아니면 〈미(美)〉였다. 그는 뛰어난 구술사로 수많은 경구가 가득한 희곡을 남겼고, 강연에도 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1854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시인인 어머니와 유명한 의사이자 민속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유미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888년 단편집 『행복한 왕자』를 발표했고, 1891년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2년에는 단편집 『석류나무 집』을 발표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발표 당시 격론을 일으켰으며, 특히 『행복한 왕자』는 19세기 말 물질주의가 만연한 영국 사회에 사랑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이상주의를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작품으으로, 비평가 월터 페이터로부터 동화 중의 걸작이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독설과 위트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말솜씨로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진지함의 중요성』(1895) 같은 희곡으로 극작가로서 위상을 다졌으며, 1893년에는 비극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1895년 동성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옥중기』를 썼다. 1897년에 출옥하여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900년에 사망했다.
와일드의 명예는 사후 거의 백 년이 지난 1998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오스카 와일드와의 대화」라는 제명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회복되었으며, 이후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역 : 박명숙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보르도 제3대학에서 언어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공부하고 ‘몰리에르’ 연구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와 배재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출판기획 자와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전진하는 진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로랑 구넬의 『가고 싶은 길을 가라』, 『라 퐁텐 그림우화』, 플로리앙 젤러의 『누구나의 연인』, 티에리 코엔의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꿈꾸었다』, 도미니크 보나의 『위대한 열정』, 마리 카르디날의 『두 사람을 위한 하나의 삶』, 장 이브 보리오의 『로마의 역사』,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옮긴이의 말
오스카 와일드 100년 만에 되찾은 이름, 그 명멸의 스토리 …7
심연으로부터 …41
오스카 와일드―앙드레 지드 …241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245
『심연으로부터』를 읽고 …283
미주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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