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고독과 권태…… 일상 속에 꿈처럼 숨어 있던 낯설고 매혹적인 삶의 이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꼬리 긴 여름에 일어난 이야기
한은형의 인물들은 대개 고독과 권태에 싸여 있다. 그들은 지극히 속물적인 상류층이기도 하고, 부유하든 그렇지 않든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생활인이기도 하며, 유명배우이거나 기자이기도 하다. 각자 다른 일을 하며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보이지만, 모두들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어한다. 마치 우리가 그러하듯.
그는 지나치게 정상적이었고 말짱했다.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런 말을 할수록 크지 않은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졌다. “괜찮아 괜찮아 안 취했어”라거나 “걱정 마 걱정 마 나 멀쩡해”를 번갈아 말하면서.(「그레이하운드의 기원」, 76쪽)
그들은 늘 무언가에 취해 있으려 한다. 아니, 어쩌면 취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안 취했어”라거나 “걱정 마 걱정 마 나 멀쩡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다. 그들 앞에 놓인 일상은 불안정하기 일쑤고, 내일은 끔찍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삶에는 왜 대단한 무엇이 없는가? 그들은 어떤 ‘일탈’을 꿈꾼다.
그는 외로워서 이성을 만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혼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것에도 질려버렸다. 그건 마치 우습지도 않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홀로 헛웃음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게 누군가가 보고 글로 써준다면, 작품으로 만들어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면의 초상화 같은 것을 갖게 된다.(「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43쪽)
‘자위自慰’―스스로 위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모든 순간들은 당연한 듯 찾아오지 않으며, 찰나의 우연들이 건네는 몇 안 되는 기회가 있을 뿐이다.
미카엘의 집을 뒤로하고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총소리 같은 게 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34쪽)
예컨대 총소리 같은 것. 한은형의 소설에는 이런 기이한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잘 짜인 문장들이 어떤 위화감도 없이 독자를 무대 위로 떠민다. 우리는 꼽추 ‘미카엘’을 따라 사람이 종종 빠져죽는 호수 근처에 지어진 별장의 비밀 파티에 초대받기도 하고(「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치과 의사의 마스터베이션을 지켜보면서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너구리상象 앞으로 가기도 한다(「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개가 된 남자를 그리워하기도 하고(「그레이하운드의 기원」), 평양에서 교통경찰을 하는 여자를 그리워하기도 한다(「샌프란시스코 사우나」).
문장의 겹과 겹 사이를 파고드는 몽롱한 도발, 위험한 장난…
한은형의 문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은 문장 자체가 뜻하는바 이외에도 그 사이사이의 여백을 살펴보게끔 한다. 얼핏 낯설어 보이는 배열들 속에 그 몽롱한 도발은 숨어 있다. 뜻한 듯 뜻하지 않은 듯 흐릿한 매혹의 단어들, 의도 없이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 시나브로 설득되는 기이한 표현들. 그것은 간혹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장난이기도 하다.
나는 바랐다. 눈이 굵어지길, 전차가 더 천천히 움직이길, 단전이 되길, 전차가 멈춰 서길, 오래도록 그런 채로 있길, 지친 사람들이 전차에서 내리길, 내리길, 내리길, 그래서 우리만이 남아 있게 되길. 나는 바랐다. 운전수도 어디로 가버린다. 전차 위로 눈이 쌓인다, 쌓인다, 쌓인다, 거리의 불이 꺼진다. 차례대로 하나씩. 마침내 불은 하나만 남는다. 그 불빛을 그녀의 눈동자에서 본다. 하나만 남았던 불이 꺼지고, 거리는 사라진다. 전차 안은 어둡지 않다. 숨과 열기로.
우리는 버려지거나 잊힐 것이다.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때 문을 열고 걸어나올 것이다. 나왔다. 눈에 새로운 길을 내면서, 내가 앞서 걸을 것이다.(「샌프란시스코 사우나)」, 107쪽)
시간은 분절할 수 없이 연속적이지만 우리는 늘 순간 속에서만 살아나간다. 한 시간 두 시간, 오늘 그리고 내일, 삶은 순간순간이 짜깁기된 퀼트에 가깝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그의 문장도 어느 부분은 구멍이 나기도 하고, 종종 오염되어 있기도 하며, 어떤 얼룩들은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오리지널리티가 아니던가. 이 소설가의 독창성은 근래 보기 드문 것임에 틀림없다.
혁명은 입맞춤이 되고
평론가 황현경에 따르면 한은형의 소설들은 ‘진짜’ 연애소설이다. 삶의 지리멸렬함을 단번에 떨쳐버리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이 ‘연애’이니, 그 커다란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은형은 소설 중 많은 부분을 연애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부가 되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기쁘게 예쁜 노랑 육각연필 같았다. 뻔뻔한 오줌싸개였고, 고장난 라디오였으며, 너무 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없는 돌 문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단 하나뿐인 완전한 강아지였다.(「그레이하운드의 기원」, 67쪽)
연인에 대한 이 노골적인 찬사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언젠가 끝나버릴지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기 원한다. 굳이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아니, 대단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그것은 어쩌면 프렌치 레볼루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살짝 벌리며 시작하는, 귀여울 정도로만 도발적인 이 청량한 발음에 익숙해지다보면 그것은 프랑스혁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차라리 프렌치 키스와 더 가까운 어떤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의 일부는 이 귀엽고 낭만적인 발성이 끌어들인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47쪽)
무시무시한 롤러코스터가 아니어도 된다. 혁명이 아니어도 된다. 달콤한 키스 한 번이면 된다. ‘프렌치 레볼루션’이 ‘프렌치 키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소설가의 낭만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연애든 삶이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아주 작고 미묘한 차이에서부터 나온다.
소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연인의 조건,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D박사를 앞에 두고서야 깨달았다. 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그는 즉흥적으로 상대에게 달려가는 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연구를 그르칠 위험이 있었으니까. 위대한 연인에게는 어떤 덕목이 있는 걸까. 그는 D박사를 쳐다보았다. 저 여자는 알고 있겠지.(「연인형 로봇」, 141쪽)
소설가는 알고 있다. 무모하고 비논리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예컨대 “즉흥적으로 상대에게 달려가는 일 같은” 어떤 것을. 그것은 “봄볕이 내리는 잔디에 앉아 졸고 있는 기분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는 ‘부디 마주치지 말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찾아나선다.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며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남들이 말하는 행복이 이런 건가. 좋아서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봄볕이 내리는 잔디에 앉아 졸고 있는 기분에 가까웠다. 재신은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잠이 왔고, 그것은 꽤 좋은 징조 같았다.(「결혼」, 199쪽)
인공낙원의 소설가
한은형의 소설들은 한 편의 무대예술이다. 주인공이 등장하고, 무대에서 사건이 펼쳐지고, 끝나면 암전이다. 늘 암전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짧은 연극 같은 삶. 대개 커튼콜은 없다.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매끈한 고독이다.
나는 상상했다. 북한의 거리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일들을. 소년이 되기 전의 남자아이 같은 선의와 천진함으로 그것들을 놓아두는 것이다. 레고 블록을 내려놓듯이. 거리에는 차가 없고, 공기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온순한 이 초현실의 거리에 현실을 더하는 일을 한다. 색과 더러움과 활기를 더한다. 가로등을 꽂고, 음수대를 꽂고, 나무와 꽃들을 꽂을 것이다. 그녀가 서 있는 하얀 동그라미 안을 녹지로 바꾼다. 그녀의 발바닥에 완곡이 흐른다. 도서관도 놓고, 피시방도 놓고, 섹스숍도 놓는다. 위대한 지도자의 동상을 포위한다. 포위시킨다. 섹스숍 앞에 추위로 살이 튼 볼 빨간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 볼이 더 빨개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키득거렸다.(「샌프란시스코 사우나」, 107~108쪽)
“이 세상이 커다란 꿈같다”(「붉은 펠트 모자」, 132쪽)고,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이백을 들어 말해보면 될까. “세상이 커다란 꿈과 같은데/ 어찌 아등바등 살아가리오.” 소설가가 꿈꾸는 낙원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은형은 여름에 등단했다. 그리고 여름이 배경인 소설을 많이도 썼다. 여름 동안의 어떤 날들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고, 또 어떤 날들은 견딜 수 없이 끔찍할 것이다. 소설처럼 일관성 있게 기쁘거나 슬프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아버렸다. 피곤하고 지루해 보이는 이 성한 한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긴 여름을 함께 견뎌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곳, 앞뒤가 똑같은 그 너구리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
한은형의 데뷔작을 처음 읽던 순간을 기억한다. 몇 차례나 읽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숨을 골라야했다. 그날 내 방 창밖 풍경이 아직 생생하다. 흐린 하늘에 전선줄이 얽혀 있었다. 늘 바라다보이던 이웃집의 붉은 지붕도 그대로였다. 범속한 오후였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나서도 바깥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어떤 소설은 소리없이 내부의 치명적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한은형의 인물은 권태롭고 황폐한 ‘속물들’이거나 절박하고 고독한 ‘꼽추들’이다. 그 둘이 각각이 아니라는 것을, 속물과 꼽추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인물 군상을, 작가는 가장 질서정연한 플롯 속에 우아하고 첨예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그의 소설들은 때로는 완벽하게 가공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무대예술이거나 허공 위에 매끈하게 쌓아올린 조형예술로 느껴진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균형적이고 너그럽지 않은 게임을 따라가다보면 뻐근한 존재론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니 한은형은 진부한 독자가 기대하는 장르적 관습을 발로 뻥 차려는 야심으로 충만한 소설가다. 진짜 젊은 작가다. 회피하고 싶은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_정이현(소설가)
글을 쓴다는 건 정말이지 기쁘고 또 기쁜 일이다. 읽고 쓴다는 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열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완전한 행복 같은 게 있다면 바로 그때뿐이다. 비논리적이고 불완전한 아름다움의 세계는 어쩌면 그렇게 완전한가. 책에서 빠져나오면 인생은 피곤하고, 일상은 지루하고, 사랑은 쓸쓸하다. 그러니 소설로 달아나게 해주는 이 삶을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_‘작가의 말’에서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앞면이 뒷면이고 뒷면이 앞면인 너구리상처럼 ‘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서 있는 그곳에서 본 꼬리의 방향이 반대편에서는 또 다르게 보일 테니 ‘다’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도 다도 볼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재현도 실패하게 마련 아닌가. 그렇게 쓰인 소설이 더 본 듯 다 본 듯 자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 아닌가. 그런데도 쓰려거든 이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한은형은 이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쓰고 있다. 여기 여덟 편은 그렇게 쓰인 정직한 소설들이다. _황현경(문학평론가)
:: 수록작품 발표 지면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 『문학동네』 2012년 가을호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 『문학동네』 2013년 여름호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 [문장웹진] 2013년 3월호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 미발표작
붉은 펠트 모자 … 테마소설집 『도시와 나』(바람, 2013)
연인형 로봇 … 국립국어원 웹진 [쉼표, 마침표.] 2014년 6월호
기자의 일 … 『문학들』 2014년 봄호(발표 당시 제목 「두 개의 심장」)
결혼 … 『황해문화』 2013년 봄호
▣ 작가 소개
저자 : 한은형
1979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12년 제19회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 주요 목차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붉은 펠트 모자
연인형 로봇
기자의 일
결혼
고독과 권태…… 일상 속에 꿈처럼 숨어 있던 낯설고 매혹적인 삶의 이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꼬리 긴 여름에 일어난 이야기
한은형의 인물들은 대개 고독과 권태에 싸여 있다. 그들은 지극히 속물적인 상류층이기도 하고, 부유하든 그렇지 않든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생활인이기도 하며, 유명배우이거나 기자이기도 하다. 각자 다른 일을 하며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보이지만, 모두들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어한다. 마치 우리가 그러하듯.
그는 지나치게 정상적이었고 말짱했다.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런 말을 할수록 크지 않은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졌다. “괜찮아 괜찮아 안 취했어”라거나 “걱정 마 걱정 마 나 멀쩡해”를 번갈아 말하면서.(「그레이하운드의 기원」, 76쪽)
그들은 늘 무언가에 취해 있으려 한다. 아니, 어쩌면 취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안 취했어”라거나 “걱정 마 걱정 마 나 멀쩡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다. 그들 앞에 놓인 일상은 불안정하기 일쑤고, 내일은 끔찍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삶에는 왜 대단한 무엇이 없는가? 그들은 어떤 ‘일탈’을 꿈꾼다.
그는 외로워서 이성을 만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혼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것에도 질려버렸다. 그건 마치 우습지도 않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홀로 헛웃음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게 누군가가 보고 글로 써준다면, 작품으로 만들어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면의 초상화 같은 것을 갖게 된다.(「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43쪽)
‘자위自慰’―스스로 위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모든 순간들은 당연한 듯 찾아오지 않으며, 찰나의 우연들이 건네는 몇 안 되는 기회가 있을 뿐이다.
미카엘의 집을 뒤로하고 다시 숲 밖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총소리 같은 게 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34쪽)
예컨대 총소리 같은 것. 한은형의 소설에는 이런 기이한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잘 짜인 문장들이 어떤 위화감도 없이 독자를 무대 위로 떠민다. 우리는 꼽추 ‘미카엘’을 따라 사람이 종종 빠져죽는 호수 근처에 지어진 별장의 비밀 파티에 초대받기도 하고(「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치과 의사의 마스터베이션을 지켜보면서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너구리상象 앞으로 가기도 한다(「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개가 된 남자를 그리워하기도 하고(「그레이하운드의 기원」), 평양에서 교통경찰을 하는 여자를 그리워하기도 한다(「샌프란시스코 사우나」).
문장의 겹과 겹 사이를 파고드는 몽롱한 도발, 위험한 장난…
한은형의 문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은 문장 자체가 뜻하는바 이외에도 그 사이사이의 여백을 살펴보게끔 한다. 얼핏 낯설어 보이는 배열들 속에 그 몽롱한 도발은 숨어 있다. 뜻한 듯 뜻하지 않은 듯 흐릿한 매혹의 단어들, 의도 없이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 시나브로 설득되는 기이한 표현들. 그것은 간혹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장난이기도 하다.
나는 바랐다. 눈이 굵어지길, 전차가 더 천천히 움직이길, 단전이 되길, 전차가 멈춰 서길, 오래도록 그런 채로 있길, 지친 사람들이 전차에서 내리길, 내리길, 내리길, 그래서 우리만이 남아 있게 되길. 나는 바랐다. 운전수도 어디로 가버린다. 전차 위로 눈이 쌓인다, 쌓인다, 쌓인다, 거리의 불이 꺼진다. 차례대로 하나씩. 마침내 불은 하나만 남는다. 그 불빛을 그녀의 눈동자에서 본다. 하나만 남았던 불이 꺼지고, 거리는 사라진다. 전차 안은 어둡지 않다. 숨과 열기로.
우리는 버려지거나 잊힐 것이다.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때 문을 열고 걸어나올 것이다. 나왔다. 눈에 새로운 길을 내면서, 내가 앞서 걸을 것이다.(「샌프란시스코 사우나)」, 107쪽)
시간은 분절할 수 없이 연속적이지만 우리는 늘 순간 속에서만 살아나간다. 한 시간 두 시간, 오늘 그리고 내일, 삶은 순간순간이 짜깁기된 퀼트에 가깝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그의 문장도 어느 부분은 구멍이 나기도 하고, 종종 오염되어 있기도 하며, 어떤 얼룩들은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오리지널리티가 아니던가. 이 소설가의 독창성은 근래 보기 드문 것임에 틀림없다.
혁명은 입맞춤이 되고
평론가 황현경에 따르면 한은형의 소설들은 ‘진짜’ 연애소설이다. 삶의 지리멸렬함을 단번에 떨쳐버리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이 ‘연애’이니, 그 커다란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은형은 소설 중 많은 부분을 연애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부가 되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기쁘게 예쁜 노랑 육각연필 같았다. 뻔뻔한 오줌싸개였고, 고장난 라디오였으며, 너무 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없는 돌 문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단 하나뿐인 완전한 강아지였다.(「그레이하운드의 기원」, 67쪽)
연인에 대한 이 노골적인 찬사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언젠가 끝나버릴지라도, 우리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기 원한다. 굳이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아니, 대단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그것은 어쩌면 프렌치 레볼루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살짝 벌리며 시작하는, 귀여울 정도로만 도발적인 이 청량한 발음에 익숙해지다보면 그것은 프랑스혁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차라리 프렌치 키스와 더 가까운 어떤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의 일부는 이 귀엽고 낭만적인 발성이 끌어들인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47쪽)
무시무시한 롤러코스터가 아니어도 된다. 혁명이 아니어도 된다. 달콤한 키스 한 번이면 된다. ‘프렌치 레볼루션’이 ‘프렌치 키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소설가의 낭만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연애든 삶이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아주 작고 미묘한 차이에서부터 나온다.
소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연인의 조건,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D박사를 앞에 두고서야 깨달았다. 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그는 즉흥적으로 상대에게 달려가는 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연구를 그르칠 위험이 있었으니까. 위대한 연인에게는 어떤 덕목이 있는 걸까. 그는 D박사를 쳐다보았다. 저 여자는 알고 있겠지.(「연인형 로봇」, 141쪽)
소설가는 알고 있다. 무모하고 비논리적이고 불완전한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예컨대 “즉흥적으로 상대에게 달려가는 일 같은” 어떤 것을. 그것은 “봄볕이 내리는 잔디에 앉아 졸고 있는 기분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는 ‘부디 마주치지 말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찾아나선다.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며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남들이 말하는 행복이 이런 건가. 좋아서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봄볕이 내리는 잔디에 앉아 졸고 있는 기분에 가까웠다. 재신은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잠이 왔고, 그것은 꽤 좋은 징조 같았다.(「결혼」, 199쪽)
인공낙원의 소설가
한은형의 소설들은 한 편의 무대예술이다. 주인공이 등장하고, 무대에서 사건이 펼쳐지고, 끝나면 암전이다. 늘 암전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짧은 연극 같은 삶. 대개 커튼콜은 없다.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매끈한 고독이다.
나는 상상했다. 북한의 거리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일들을. 소년이 되기 전의 남자아이 같은 선의와 천진함으로 그것들을 놓아두는 것이다. 레고 블록을 내려놓듯이. 거리에는 차가 없고, 공기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온순한 이 초현실의 거리에 현실을 더하는 일을 한다. 색과 더러움과 활기를 더한다. 가로등을 꽂고, 음수대를 꽂고, 나무와 꽃들을 꽂을 것이다. 그녀가 서 있는 하얀 동그라미 안을 녹지로 바꾼다. 그녀의 발바닥에 완곡이 흐른다. 도서관도 놓고, 피시방도 놓고, 섹스숍도 놓는다. 위대한 지도자의 동상을 포위한다. 포위시킨다. 섹스숍 앞에 추위로 살이 튼 볼 빨간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 볼이 더 빨개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키득거렸다.(「샌프란시스코 사우나」, 107~108쪽)
“이 세상이 커다란 꿈같다”(「붉은 펠트 모자」, 132쪽)고,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이백을 들어 말해보면 될까. “세상이 커다란 꿈과 같은데/ 어찌 아등바등 살아가리오.” 소설가가 꿈꾸는 낙원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은형은 여름에 등단했다. 그리고 여름이 배경인 소설을 많이도 썼다. 여름 동안의 어떤 날들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고, 또 어떤 날들은 견딜 수 없이 끔찍할 것이다. 소설처럼 일관성 있게 기쁘거나 슬프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아버렸다. 피곤하고 지루해 보이는 이 성한 한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긴 여름을 함께 견뎌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곳, 앞뒤가 똑같은 그 너구리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
한은형의 데뷔작을 처음 읽던 순간을 기억한다. 몇 차례나 읽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숨을 골라야했다. 그날 내 방 창밖 풍경이 아직 생생하다. 흐린 하늘에 전선줄이 얽혀 있었다. 늘 바라다보이던 이웃집의 붉은 지붕도 그대로였다. 범속한 오후였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읽고 나서도 바깥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어떤 소설은 소리없이 내부의 치명적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한은형의 인물은 권태롭고 황폐한 ‘속물들’이거나 절박하고 고독한 ‘꼽추들’이다. 그 둘이 각각이 아니라는 것을, 속물과 꼽추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인물 군상을, 작가는 가장 질서정연한 플롯 속에 우아하고 첨예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그의 소설들은 때로는 완벽하게 가공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무대예술이거나 허공 위에 매끈하게 쌓아올린 조형예술로 느껴진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균형적이고 너그럽지 않은 게임을 따라가다보면 뻐근한 존재론적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니 한은형은 진부한 독자가 기대하는 장르적 관습을 발로 뻥 차려는 야심으로 충만한 소설가다. 진짜 젊은 작가다. 회피하고 싶은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안다.
_정이현(소설가)
글을 쓴다는 건 정말이지 기쁘고 또 기쁜 일이다. 읽고 쓴다는 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열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완전한 행복 같은 게 있다면 바로 그때뿐이다. 비논리적이고 불완전한 아름다움의 세계는 어쩌면 그렇게 완전한가. 책에서 빠져나오면 인생은 피곤하고, 일상은 지루하고, 사랑은 쓸쓸하다. 그러니 소설로 달아나게 해주는 이 삶을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_‘작가의 말’에서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앞면이 뒷면이고 뒷면이 앞면인 너구리상처럼 ‘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서 있는 그곳에서 본 꼬리의 방향이 반대편에서는 또 다르게 보일 테니 ‘다’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도 다도 볼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재현도 실패하게 마련 아닌가. 그렇게 쓰인 소설이 더 본 듯 다 본 듯 자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 아닌가. 그런데도 쓰려거든 이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한은형은 이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쓰고 있다. 여기 여덟 편은 그렇게 쓰인 정직한 소설들이다. _황현경(문학평론가)
:: 수록작품 발표 지면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 『문학동네』 2012년 가을호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 『문학동네』 2013년 여름호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 [문장웹진] 2013년 3월호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 미발표작
붉은 펠트 모자 … 테마소설집 『도시와 나』(바람, 2013)
연인형 로봇 … 국립국어원 웹진 [쉼표, 마침표.] 2014년 6월호
기자의 일 … 『문학들』 2014년 봄호(발표 당시 제목 「두 개의 심장」)
결혼 … 『황해문화』 2013년 봄호
▣ 작가 소개
저자 : 한은형
1979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12년 제19회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 주요 목차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그레이하운드의 기원
샌프란시스코 사우나
붉은 펠트 모자
연인형 로봇
기자의 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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