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제1부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
성해응의 산문 작품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 묘지명, 애사(哀辭) 등이 많다. 대상은 대부분 대를 이어 교유한 친구와 가족이다.
그는 일찍이 “나는 평소 교유를 즐기지 않아 교유한 것은 오직 대대로 교유한 이들이다.” “나는 중년이후부터 벗이라고 할 만한 이가 없었다. 실로 내가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벗이 되기에 부족하였고 세상 또한 벗을 구하는 자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젊어서 졸박하여 감히 사람들에게 벗을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나를 벗하는 이가 적었다.” “나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아 술을 마시는 자를 보면 문득 꾸짖어(…)” “나는 평소 성질이 급하여 부인은 항상 온화하고 천천히 할 것을 경계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성격이 급하고 내성적이며 술을 좋아하지 않아 교유관계가 넓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성대중(成大中)이 40여 년 동안 오랜 관직생활을 한 데다 성품이 온화하여 한 가지 선(善)이나 장점만 있어도 두루 취하여 교유관계가 폭넓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성해응은 부친으로부터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교유권은 대부분 계승하였다. 그의 교유는 심지어 3대를 이어오기도 할 만큼 기간이 길었고, 폭이 넓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사귐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쇠락과 죽음을 목도한 후 느낀 비애와 상실감, 그리고 함께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글로 표출한 것이 많다.
뛰어난 역량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죽은 친구 이원순의 죽음을 애도한 「담박하고 깊은 우정」에서는 진솔한 우정의 장면을 하나씩 보여준다. 이원순 역시 대를 이어 교유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성해응의 부친과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뵙고 그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 추억이 된 서글픔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검서관으로 재직한 성해응은 국왕 정조의 사랑을 받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선배 학자들과 규장각에서 함께 근무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학적 역량을 드높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덕무의 부친에 이어 이덕무가 죽고, 박제가와 유득공도 불우하게 죽었다.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가 죽으면서, 성해응은 이덕무의 집안 삼대에게 곡하게 된 것이다. 이광규의 부음을 듣고 이덕무의 죽음이 떠오른 데다 박제가와 유득공의 죽음이 연상되면서 기억의 지층 아래 봉인해둔 아픔이 상기되었다. 이에 슬프고 고통스러운 심경으로 「이덕무 삼대에게 곡하다」를 썼다.
부인의 죽음을 맞아 지은 「아내의 방」은 인생의 동반자로서 부인에 대한 존경과 사모하는 마음이 절제된 필치로 담담하게 그려졌다. 병이 위중한데도 남편의 밥상을 차린 부인의 사랑이 숭고하기만 하다. 자신의 병은 돌보지 않고 남편을 간호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옛 자취를 돌아보며 통한에 찬 부정(夫情)이 애절하다. 학자로 널리 알려진 성해응의 인간적 면모와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2부 -일상의 아름다움
아버지의 친구이자 존경하던 선배 학자인 나열(羅烈)이 30여 년 전에 지어준 시를 우연히 발견하고 감회가 일어 글을 지었다. 나열이 방문했을 때 마침 출타 중이던 부친을 대신해서 성해응이 접대하였다. 창가에 등불을 돋우고 다과를 올리며 고서화를 열람하였다. 때 맞춰 가을 하늘에는 비가 올 듯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둘이 마주 보며 나눈 담소는 밤이 깊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 여운을 이어 다음날 함께 송재도의 집을 방문하였다. 송재도는 아버지와 나열의 친구이다. 그는 이때 도성에 있었는데 나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석양이 사립문에서 꺾일 무렵 막 도착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성해응은 농사를 돌보기 위해 곧바로 돌아갔다. 나열은 이틀을 묵은 후 도성으로 돌아갈 때 성해응에게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바로 이 시를 31년 만에 우연히 발견하고 「돌아가신 선배들을 그리며」를 지었다. 선배 학자들의 풍모와 자취에 대한 그리움이 늦가을 정취와 잘 어우러진다.
동생 성해운이 고향 포천의 화산 남쪽에 집을 짓고 매화, 국화, 복숭아, 살구, 사과, 자두, 배, 무궁화, 왜홍, 산단, 작약, 모란 등 몇십 종을 골고루 심었는데 대나무만 한 그루도 없었다. 대나무는 제 살던 곳을 떠나 옮겨 심으면 죽어버린다. 매화, 국화 (…) 모란 등은 꽃과 열매의 색과 향기가 대나무보다 훨씬 아름답지만 데리고 와 키우기에 쉽다. 성해운은 이런 대나무의 본성을 사모하여 새 집의 이름을 죽곡정사(竹谷精舍)라 지었다. 성해응은 이식하기 어려운 대나무의 절개를 사모하고 이를 선비의 절개에 비유하여 죽곡정사라 명명한 아우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대나무 없는 곳에 대나무 집이라 이름 한 아우에게」를 지었다.
사내아이가 냇가에서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서 보여주었다. 성해응은 물고기가 죽을까 염려되어 표주박에 물을 담아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물고기는 이내 꼬리를 흔들고 마치 강호에서 노니는 듯하였다. 얼마 뒤 한 마리는 화분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겨울을 지내고 살았다. 봄이 되자 물고기를 냇가에 풀어주도록 하였다. 지난겨울 혹한에 잉어, 메기처럼 큰 물고기들도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러니 작은 물고기가 살아남은 것은 요행 중의 요행이다. 그런데 이것은 제수용으로도 쓸 수 없을 만큼 작아서 살아남은 것이다. 만약 기름지고 맛이 좋았다면 진작 사람들의 그물과 낚시에 걸려 삶겨지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작고 힘없는 것이 처지에 안주하지 못하고 떨쳐 움직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작은 것은 길어지기를 바라고 가는 것은 커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길어지고 커지면 근심도 그에 비례하는 법이다. 어디에 처할지는 본인이 선택할 몫이다. 「물고기를 기르며」는 작은 물고기를 통해 인간의 처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약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현재 처한 상황에 만족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제3부 -박학과 실용
성해응은 좋은 문장의 조건으로 기(氣)와 법(法), 식(識)을 제시한 뒤, 특히 ‘식’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문장의 기세와 법도가 있어도 이들을 운용할 수 있는 ‘식’, 즉 ‘견식(見識)’이 있어야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논리다. ‘견식’의 강조는 박학한 학문 성향과 연동된다. 풍부한 견식이야말로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구사하는 동인(動因)이다. 실제로 그는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지리, 서화, 산수, 화훼, 금석(金石), 도검(刀劍) 등에 관한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식 정보를 많이 기록하여 박학한 학문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채소밭에 고구마를 심었다. 땅은 비옥했지만 재배 방법이 잘못되어 작은 고구마만 열렸다. 그래서 고구마에 관한 책을 두루 읽어 고구마의 성질과 효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옥하여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 밥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 그러니 흉년이 들어도 고구마를 활용하지 않는다. 습속을 바꾸는 것은 이처럼 어렵다. 그런데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은 스스로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된다. 성해응이 미미한 초목에도 정성을 다한 이유이다. 「고구마를 어떻게 보급시킬 것인가」는 구황 작물로 효능이 뛰어난 고구마가 조선에 널리 전파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고 국익과 민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번식시킬 것을 주장한 글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한 실학자적 사고가 잘 드러난다.
다양한 고사를 활용하여 송이버섯의 효능에 대해 기록한 「송이버섯의 이로움」, 18세기 조선 벼루의 대표적인 종류와 재질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벼루의 장인 김도산과 신경록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좋은 벼루의 계보」, 조선의 유명한 샘물의 위치와 수질, 기원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한 「전국 샘물을 품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익을 독점하며 접근성과 생산성의 측면에서 가장 이익이 큰 명태에 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최고의 생선 명태」, 읍루산 담비로 만든 갖옷의 훌륭함을 소개하고 갖옷 제도의 유래와 특징을 기록한 「읍루의 담비 갖옷」 등은 유익하면서 흥미롭다. 성해응의 박학하고 고증적인 학문 성향이 잘 표출되어 있는 글이다.
제4부 -학문과 경세의 깨우침
이 장은 학문과 경세에 관한 성해응의 깊이 있는 통찰과 이를 풀어내는 논리가 명쾌하여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스승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옛사람들은 덕을 사모하여 스승을 선택했지만 지금 사람들은 세력을 사모하여 스승을 선택한다. 덕 있는 자가 반드시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세력이 없는 자가 많다. 요즘은 풍속이 날로 쇠퇴해져 스승을 반드시 집으로 불러 먹여주며 자제를 가르치게 한다. 자제들은 평소 교만한 데다 먹여주는 세력을 믿고 스승을 대한다. 스승 또한 위엄이 없어 꾸짖지도 회초리를 들지도 못하며 그저 가르치기만 한다. 자제들은 이미 스승을 낮춰보며 가르침을 받으니 학업이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면 또 이것으로 스승이 힘쓰지 않아 그렇다고 책망한다. 이 때문에 현명한 자는 스승 노릇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제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찾아가서 배워야지 스승을 집에 모시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스승의 도가 엄하다는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학문에 나아갈 수 있다.
「스승을 부르지 말고 찾아가서 배워라」는 스승의 덕이 아닌 세력을 쫓아 배우는 작금의 세태를 비판하며, 스승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승을 집으로 부르지 말고 자제들이 찾아가서 배우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스승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해법을 제시하여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시와 그림은 작은 재주지만 연습하여 신묘함을 터득하면 즐기기에 충분하다. 무릇 멀어서 쫓아갈 수 없고, 가깝되 잡을 수 없으며, 농밀하되 부섬(富贍)한 데는 이르지 않고, 건장하되 거친 데까지는 이르지 않으며, 심원하되 궁벽한 것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 시와 그림이 경지에 들어간 경우이다. 저 먼 곳에서 안개비가 갑자기 몰려와 앞산의 한 자락을 가렸다가 홀연히 흩어져 산줄기가 언뜻 드러날 때 온갖 형상이 넘쳐난다. 이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시와 그림으로 잘 표현하기 위해서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정진하는 사람만이 좋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여 서화의 효용성을 긍정하였다. 성해응의 섬세하고 충만한 감성과 심원한 예술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서북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라」는 조선 왕조의 지나친 숭문주의를 비판하고 문무(文武)를 함께 장려하여 국가 위기에 무인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한 글이다. 문무(文武)는 각각 용도와 특장(特長)이 있기 때문에 문인만 지나치게 우대하여 무인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종국에는 심각한 국력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무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제고하고 구체적 실현 방법을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연행(燕行) 가는 조카를 전송하면서 써준 「중국의 정세를 잘 파악하라」는 청나라의 기강 해이와 재용 고갈을 간파하고 그것이 청조의 쇠락 조짐임을 예견한 것이다. 그래서 조카에게 청의 멸망이 조선에 미칠 여파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정세 파악을 잘하고 돌아올 것을 당부하였다. 시대를 앞선 예리한 식견과 대처 방안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두 작품은 성해응의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제5부 -기인과 열녀
성해응은 훌륭한 덕행과 뛰어난 재주, 기이한 면모를 지닌 인물들을 두루 취재하여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층민들의 자취를 포착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들은 충효열 등 유교 사회에서 높이 평가하는 가치를 실현하였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세상에서 인멸될 처지였다.
결성 황리에 사는 이금사의 집안 내력과 이름을 모른다. 얼굴을 본 적이 없고 그 사람을 잘 모르니 그의 음악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금사가 언제나 거문고를 잡고 곁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런 것일까? 김기서의 글 때문이다. 사실 김기서도 그 사람을 잘 모른다. 친구의 별장에서 한 번 연주를 들었을 뿐이다. 더욱이 성해응에게 이금사에 대해서 이렇다 할 언급도 없었다. 그런데도 성해응은 이금사의 음악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른바 의경(意境)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도 만들어진 무형의 형상은 마음으로 감동하여 이미지[想]가 생기고 그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성해응은 이금사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지만 김기서의 글을 읽고 감동받아 뛰어난 절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때 생성된 의경은 ‘신(神)’의 경지이다. 이금사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음악은 성해응의 글을 통해 생동하게 전해진다. 성해응은 자신이 체험한 ‘의경’과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뛰어난 필치로 묘사하였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섬세한 감성이 있어서 가능하였다. 「마음으로 듣는 아름다운 소리」는 그의 예술적 감성과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영천 박 열부와 충복 만석」은 억울하게 죽은 영천의 박 열부에 대한 송사 사건을 소재로 한 기사다. 박 열부가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군수 앞에서 옷섶을 풀어헤쳐 가슴을 보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이런 결행을 하지 않고서는 원통함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조술이 관리들을 매수하여 법망에서 벗어나는 장면, 아내와 결별하면서까지 주인의 원통한 죽음을 밝히려는 노복 만석 등의 모습이 몇 번의 전환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된 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사건은 당시 영천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조정에서도 사관(査官)을 파견하여 조사할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이 글의 핵심은 논평이다. 박 열부 송사 사건은 사안이 분명하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의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하급 관리의 거짓말과 눈가림, 이에 속은 군수의 어리석음, 재수사의 명을 받았음에도 직접 조사하지 않고 엉터리 장계를 올린 사관들의 일처리 방식, 엄정하게 조사하여 사건을 해결한 동료 따돌리기 등 온갖 부정과 부패로 인해 해결이 어려웠던 것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무능함과 부패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성해응의 냉철한 통찰과 이를 풀어내는 논리가 명쾌하다.
▣ 작가 소개
저자 : 성해응
정조순조 연간에 활동한 문인 학자로, 자는 용여(龍汝)이고 호는 연경재(硏經齋)난실(蘭室)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서족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비롯하여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와 음성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박학고증과 실용의 학문을 추구하여 한학(漢學)을 바탕으로 한 경학과 우리나라 역사지리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특히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라, 고평할 만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신분적 처지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이들의 자취를 취재하여 기록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150여 권의 『연경재전집』이다.
역자 : 손혜리
경북대 한문학과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연경재 성해응 문학 연구』와 『실학파 문학 연구』(공저)가 있고, 『유배지에서 역사를 노래하다, 영남악부』, 『역주 이십일도회고시』 외 다수의 공역서가 있다. 논문으로는 「조선 후기 지식인의 생업에 대한 인식과 현실적 대응」,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들의 명(明) 유민(遺民)에 대한 기록과 편찬 의식」, 「과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서얼가의 학지(學知) 생성과 가학(家學)의 성립」 외 다수가 있다.
▣ 주요 목차
성해응론 -이 땅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기록
제1부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
담박하고 깊은 우정(李時和哀辭)
내 딸 증만(?女墓誌)
아내의 방(祭亡室文)
덕에 비해 지위가 낮았던 나덕야(羅君攸哀辭)
이덕무 삼대(三代)에게 곡하다(李奉?哀辭)
실학에 힘쓴 유득공(柳惠甫哀辭)
술 마시다 죽은 이이호(哀李彛好文)
제2부 일상의 아름다움
돌처럼 단단한 우정(送金時明序)
선과 복은 마주치지 않는가(書贈菱濠羅景先)
돌아가신 선배들을 그리며(題海陽詩後)
대나무 없는 곳에 대나무 집이라 이름 한 아우에게
(竹谷精舍記)
내가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竹谷賞荷記)
명산을 유람하는 이유(名山記序)
물고기를 기르며(養魚小記)
병상에서 쓴 편지(寄沈橋金元博尹聖兪書)
포천 지역의 공부 모임(詩社記)
아우의 회갑을 축하하며(仲弟鵬之六十一歲序)
제3부 박학과 실용
고구마를 어떻게 보급시킬 것인가(藷說)
정원에 심을 화훼 목록(花譜小序)
송이버섯의 이로움(松芝說)
좋은 벼루의 계보(硯譜)
전국 샘물을 품평한다(東國泉品序)
퉁소 부는 이한진(題丹室閔公玉簫詩後)
조선의 명필 한석봉(題韓石峯筆帖後)
최고의 생선 명태(北海魚族記)
읍루의 담비 갖옷(?婁貂記)
귀고리의 유래(兩耳懸珥環)
제4부 학문과 경세의 깨우침
스승을 부르지 말고 찾아가서 배워라(師說)
훌륭한 문장이란(秋潭集序)
시와 그림의 신묘한 경지(東詩畵譜序)
과거 문장의 병폐(題科體詩後)
서북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라(奬人材)
중국의 정세를 잘 파악하라(送從子祐曾入燕序)
제5부 기인과 열녀
마음으로 듣는 아름다운 소리(復書竹下哀李琴師文後)
이 시대의 기남자 백동수(書白永叔事)
신선 이정해(書李神仙事)
김은애가 추문에 대처하는 방법(金銀愛傳)
계모에게 맞아 죽은 장 처녀(書淸安張處女獄事)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강상 효녀(江上孝女傳)
영천 박 열부와 충복 만석(書榮川朴烈婦事)
원문
제1부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
성해응의 산문 작품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 묘지명, 애사(哀辭) 등이 많다. 대상은 대부분 대를 이어 교유한 친구와 가족이다.
그는 일찍이 “나는 평소 교유를 즐기지 않아 교유한 것은 오직 대대로 교유한 이들이다.” “나는 중년이후부터 벗이라고 할 만한 이가 없었다. 실로 내가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벗이 되기에 부족하였고 세상 또한 벗을 구하는 자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젊어서 졸박하여 감히 사람들에게 벗을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 또한 나를 벗하는 이가 적었다.” “나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아 술을 마시는 자를 보면 문득 꾸짖어(…)” “나는 평소 성질이 급하여 부인은 항상 온화하고 천천히 할 것을 경계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성격이 급하고 내성적이며 술을 좋아하지 않아 교유관계가 넓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성대중(成大中)이 40여 년 동안 오랜 관직생활을 한 데다 성품이 온화하여 한 가지 선(善)이나 장점만 있어도 두루 취하여 교유관계가 폭넓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성해응은 부친으로부터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교유권은 대부분 계승하였다. 그의 교유는 심지어 3대를 이어오기도 할 만큼 기간이 길었고, 폭이 넓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사귐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쇠락과 죽음을 목도한 후 느낀 비애와 상실감, 그리고 함께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글로 표출한 것이 많다.
뛰어난 역량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죽은 친구 이원순의 죽음을 애도한 「담박하고 깊은 우정」에서는 진솔한 우정의 장면을 하나씩 보여준다. 이원순 역시 대를 이어 교유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성해응의 부친과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뵙고 그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 추억이 된 서글픔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검서관으로 재직한 성해응은 국왕 정조의 사랑을 받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선배 학자들과 규장각에서 함께 근무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학적 역량을 드높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덕무의 부친에 이어 이덕무가 죽고, 박제가와 유득공도 불우하게 죽었다.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가 죽으면서, 성해응은 이덕무의 집안 삼대에게 곡하게 된 것이다. 이광규의 부음을 듣고 이덕무의 죽음이 떠오른 데다 박제가와 유득공의 죽음이 연상되면서 기억의 지층 아래 봉인해둔 아픔이 상기되었다. 이에 슬프고 고통스러운 심경으로 「이덕무 삼대에게 곡하다」를 썼다.
부인의 죽음을 맞아 지은 「아내의 방」은 인생의 동반자로서 부인에 대한 존경과 사모하는 마음이 절제된 필치로 담담하게 그려졌다. 병이 위중한데도 남편의 밥상을 차린 부인의 사랑이 숭고하기만 하다. 자신의 병은 돌보지 않고 남편을 간호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옛 자취를 돌아보며 통한에 찬 부정(夫情)이 애절하다. 학자로 널리 알려진 성해응의 인간적 면모와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2부 -일상의 아름다움
아버지의 친구이자 존경하던 선배 학자인 나열(羅烈)이 30여 년 전에 지어준 시를 우연히 발견하고 감회가 일어 글을 지었다. 나열이 방문했을 때 마침 출타 중이던 부친을 대신해서 성해응이 접대하였다. 창가에 등불을 돋우고 다과를 올리며 고서화를 열람하였다. 때 맞춰 가을 하늘에는 비가 올 듯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둘이 마주 보며 나눈 담소는 밤이 깊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 여운을 이어 다음날 함께 송재도의 집을 방문하였다. 송재도는 아버지와 나열의 친구이다. 그는 이때 도성에 있었는데 나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석양이 사립문에서 꺾일 무렵 막 도착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성해응은 농사를 돌보기 위해 곧바로 돌아갔다. 나열은 이틀을 묵은 후 도성으로 돌아갈 때 성해응에게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바로 이 시를 31년 만에 우연히 발견하고 「돌아가신 선배들을 그리며」를 지었다. 선배 학자들의 풍모와 자취에 대한 그리움이 늦가을 정취와 잘 어우러진다.
동생 성해운이 고향 포천의 화산 남쪽에 집을 짓고 매화, 국화, 복숭아, 살구, 사과, 자두, 배, 무궁화, 왜홍, 산단, 작약, 모란 등 몇십 종을 골고루 심었는데 대나무만 한 그루도 없었다. 대나무는 제 살던 곳을 떠나 옮겨 심으면 죽어버린다. 매화, 국화 (…) 모란 등은 꽃과 열매의 색과 향기가 대나무보다 훨씬 아름답지만 데리고 와 키우기에 쉽다. 성해운은 이런 대나무의 본성을 사모하여 새 집의 이름을 죽곡정사(竹谷精舍)라 지었다. 성해응은 이식하기 어려운 대나무의 절개를 사모하고 이를 선비의 절개에 비유하여 죽곡정사라 명명한 아우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대나무 없는 곳에 대나무 집이라 이름 한 아우에게」를 지었다.
사내아이가 냇가에서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서 보여주었다. 성해응은 물고기가 죽을까 염려되어 표주박에 물을 담아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물고기는 이내 꼬리를 흔들고 마치 강호에서 노니는 듯하였다. 얼마 뒤 한 마리는 화분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겨울을 지내고 살았다. 봄이 되자 물고기를 냇가에 풀어주도록 하였다. 지난겨울 혹한에 잉어, 메기처럼 큰 물고기들도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러니 작은 물고기가 살아남은 것은 요행 중의 요행이다. 그런데 이것은 제수용으로도 쓸 수 없을 만큼 작아서 살아남은 것이다. 만약 기름지고 맛이 좋았다면 진작 사람들의 그물과 낚시에 걸려 삶겨지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작고 힘없는 것이 처지에 안주하지 못하고 떨쳐 움직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작은 것은 길어지기를 바라고 가는 것은 커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길어지고 커지면 근심도 그에 비례하는 법이다. 어디에 처할지는 본인이 선택할 몫이다. 「물고기를 기르며」는 작은 물고기를 통해 인간의 처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약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욕을 부리지 않고 현재 처한 상황에 만족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제3부 -박학과 실용
성해응은 좋은 문장의 조건으로 기(氣)와 법(法), 식(識)을 제시한 뒤, 특히 ‘식’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문장의 기세와 법도가 있어도 이들을 운용할 수 있는 ‘식’, 즉 ‘견식(見識)’이 있어야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다는 논리다. ‘견식’의 강조는 박학한 학문 성향과 연동된다. 풍부한 견식이야말로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구사하는 동인(動因)이다. 실제로 그는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지리, 서화, 산수, 화훼, 금석(金石), 도검(刀劍) 등에 관한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식 정보를 많이 기록하여 박학한 학문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채소밭에 고구마를 심었다. 땅은 비옥했지만 재배 방법이 잘못되어 작은 고구마만 열렸다. 그래서 고구마에 관한 책을 두루 읽어 고구마의 성질과 효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옥하여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 밥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 그러니 흉년이 들어도 고구마를 활용하지 않는다. 습속을 바꾸는 것은 이처럼 어렵다. 그런데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은 스스로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된다. 성해응이 미미한 초목에도 정성을 다한 이유이다. 「고구마를 어떻게 보급시킬 것인가」는 구황 작물로 효능이 뛰어난 고구마가 조선에 널리 전파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고 국익과 민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번식시킬 것을 주장한 글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한 실학자적 사고가 잘 드러난다.
다양한 고사를 활용하여 송이버섯의 효능에 대해 기록한 「송이버섯의 이로움」, 18세기 조선 벼루의 대표적인 종류와 재질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벼루의 장인 김도산과 신경록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좋은 벼루의 계보」, 조선의 유명한 샘물의 위치와 수질, 기원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한 「전국 샘물을 품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익을 독점하며 접근성과 생산성의 측면에서 가장 이익이 큰 명태에 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최고의 생선 명태」, 읍루산 담비로 만든 갖옷의 훌륭함을 소개하고 갖옷 제도의 유래와 특징을 기록한 「읍루의 담비 갖옷」 등은 유익하면서 흥미롭다. 성해응의 박학하고 고증적인 학문 성향이 잘 표출되어 있는 글이다.
제4부 -학문과 경세의 깨우침
이 장은 학문과 경세에 관한 성해응의 깊이 있는 통찰과 이를 풀어내는 논리가 명쾌하여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스승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옛사람들은 덕을 사모하여 스승을 선택했지만 지금 사람들은 세력을 사모하여 스승을 선택한다. 덕 있는 자가 반드시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세력이 없는 자가 많다. 요즘은 풍속이 날로 쇠퇴해져 스승을 반드시 집으로 불러 먹여주며 자제를 가르치게 한다. 자제들은 평소 교만한 데다 먹여주는 세력을 믿고 스승을 대한다. 스승 또한 위엄이 없어 꾸짖지도 회초리를 들지도 못하며 그저 가르치기만 한다. 자제들은 이미 스승을 낮춰보며 가르침을 받으니 학업이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면 또 이것으로 스승이 힘쓰지 않아 그렇다고 책망한다. 이 때문에 현명한 자는 스승 노릇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제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찾아가서 배워야지 스승을 집에 모시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스승의 도가 엄하다는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학문에 나아갈 수 있다.
「스승을 부르지 말고 찾아가서 배워라」는 스승의 덕이 아닌 세력을 쫓아 배우는 작금의 세태를 비판하며, 스승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승을 집으로 부르지 말고 자제들이 찾아가서 배우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스승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해법을 제시하여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시와 그림은 작은 재주지만 연습하여 신묘함을 터득하면 즐기기에 충분하다. 무릇 멀어서 쫓아갈 수 없고, 가깝되 잡을 수 없으며, 농밀하되 부섬(富贍)한 데는 이르지 않고, 건장하되 거친 데까지는 이르지 않으며, 심원하되 궁벽한 것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 시와 그림이 경지에 들어간 경우이다. 저 먼 곳에서 안개비가 갑자기 몰려와 앞산의 한 자락을 가렸다가 홀연히 흩어져 산줄기가 언뜻 드러날 때 온갖 형상이 넘쳐난다. 이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시와 그림으로 잘 표현하기 위해서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정진하는 사람만이 좋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하여 서화의 효용성을 긍정하였다. 성해응의 섬세하고 충만한 감성과 심원한 예술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서북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라」는 조선 왕조의 지나친 숭문주의를 비판하고 문무(文武)를 함께 장려하여 국가 위기에 무인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한 글이다. 문무(文武)는 각각 용도와 특장(特長)이 있기 때문에 문인만 지나치게 우대하여 무인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종국에는 심각한 국력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무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제고하고 구체적 실현 방법을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연행(燕行) 가는 조카를 전송하면서 써준 「중국의 정세를 잘 파악하라」는 청나라의 기강 해이와 재용 고갈을 간파하고 그것이 청조의 쇠락 조짐임을 예견한 것이다. 그래서 조카에게 청의 멸망이 조선에 미칠 여파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정세 파악을 잘하고 돌아올 것을 당부하였다. 시대를 앞선 예리한 식견과 대처 방안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두 작품은 성해응의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제5부 -기인과 열녀
성해응은 훌륭한 덕행과 뛰어난 재주, 기이한 면모를 지닌 인물들을 두루 취재하여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층민들의 자취를 포착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들은 충효열 등 유교 사회에서 높이 평가하는 가치를 실현하였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세상에서 인멸될 처지였다.
결성 황리에 사는 이금사의 집안 내력과 이름을 모른다. 얼굴을 본 적이 없고 그 사람을 잘 모르니 그의 음악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금사가 언제나 거문고를 잡고 곁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런 것일까? 김기서의 글 때문이다. 사실 김기서도 그 사람을 잘 모른다. 친구의 별장에서 한 번 연주를 들었을 뿐이다. 더욱이 성해응에게 이금사에 대해서 이렇다 할 언급도 없었다. 그런데도 성해응은 이금사의 음악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른바 의경(意境)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도 만들어진 무형의 형상은 마음으로 감동하여 이미지[想]가 생기고 그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성해응은 이금사의 연주를 들은 적이 없지만 김기서의 글을 읽고 감동받아 뛰어난 절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때 생성된 의경은 ‘신(神)’의 경지이다. 이금사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음악은 성해응의 글을 통해 생동하게 전해진다. 성해응은 자신이 체험한 ‘의경’과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뛰어난 필치로 묘사하였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섬세한 감성이 있어서 가능하였다. 「마음으로 듣는 아름다운 소리」는 그의 예술적 감성과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영천 박 열부와 충복 만석」은 억울하게 죽은 영천의 박 열부에 대한 송사 사건을 소재로 한 기사다. 박 열부가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군수 앞에서 옷섶을 풀어헤쳐 가슴을 보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이런 결행을 하지 않고서는 원통함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조술이 관리들을 매수하여 법망에서 벗어나는 장면, 아내와 결별하면서까지 주인의 원통한 죽음을 밝히려는 노복 만석 등의 모습이 몇 번의 전환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된 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사건은 당시 영천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조정에서도 사관(査官)을 파견하여 조사할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이 글의 핵심은 논평이다. 박 열부 송사 사건은 사안이 분명하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의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하급 관리의 거짓말과 눈가림, 이에 속은 군수의 어리석음, 재수사의 명을 받았음에도 직접 조사하지 않고 엉터리 장계를 올린 사관들의 일처리 방식, 엄정하게 조사하여 사건을 해결한 동료 따돌리기 등 온갖 부정과 부패로 인해 해결이 어려웠던 것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무능함과 부패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성해응의 냉철한 통찰과 이를 풀어내는 논리가 명쾌하다.
▣ 작가 소개
저자 : 성해응
정조순조 연간에 활동한 문인 학자로, 자는 용여(龍汝)이고 호는 연경재(硏經齋)난실(蘭室)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서족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비롯하여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와 음성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박학고증과 실용의 학문을 추구하여 한학(漢學)을 바탕으로 한 경학과 우리나라 역사지리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다. 특히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라, 고평할 만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신분적 처지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이들의 자취를 취재하여 기록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150여 권의 『연경재전집』이다.
역자 : 손혜리
경북대 한문학과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연경재 성해응 문학 연구』와 『실학파 문학 연구』(공저)가 있고, 『유배지에서 역사를 노래하다, 영남악부』, 『역주 이십일도회고시』 외 다수의 공역서가 있다. 논문으로는 「조선 후기 지식인의 생업에 대한 인식과 현실적 대응」,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들의 명(明) 유민(遺民)에 대한 기록과 편찬 의식」, 「과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서얼가의 학지(學知) 생성과 가학(家學)의 성립」 외 다수가 있다.
▣ 주요 목차
성해응론 -이 땅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기록
제1부 떠난 이들에 대한 기억
담박하고 깊은 우정(李時和哀辭)
내 딸 증만(?女墓誌)
아내의 방(祭亡室文)
덕에 비해 지위가 낮았던 나덕야(羅君攸哀辭)
이덕무 삼대(三代)에게 곡하다(李奉?哀辭)
실학에 힘쓴 유득공(柳惠甫哀辭)
술 마시다 죽은 이이호(哀李彛好文)
제2부 일상의 아름다움
돌처럼 단단한 우정(送金時明序)
선과 복은 마주치지 않는가(書贈菱濠羅景先)
돌아가신 선배들을 그리며(題海陽詩後)
대나무 없는 곳에 대나무 집이라 이름 한 아우에게
(竹谷精舍記)
내가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竹谷賞荷記)
명산을 유람하는 이유(名山記序)
물고기를 기르며(養魚小記)
병상에서 쓴 편지(寄沈橋金元博尹聖兪書)
포천 지역의 공부 모임(詩社記)
아우의 회갑을 축하하며(仲弟鵬之六十一歲序)
제3부 박학과 실용
고구마를 어떻게 보급시킬 것인가(藷說)
정원에 심을 화훼 목록(花譜小序)
송이버섯의 이로움(松芝說)
좋은 벼루의 계보(硯譜)
전국 샘물을 품평한다(東國泉品序)
퉁소 부는 이한진(題丹室閔公玉簫詩後)
조선의 명필 한석봉(題韓石峯筆帖後)
최고의 생선 명태(北海魚族記)
읍루의 담비 갖옷(?婁貂記)
귀고리의 유래(兩耳懸珥環)
제4부 학문과 경세의 깨우침
스승을 부르지 말고 찾아가서 배워라(師說)
훌륭한 문장이란(秋潭集序)
시와 그림의 신묘한 경지(東詩畵譜序)
과거 문장의 병폐(題科體詩後)
서북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라(奬人材)
중국의 정세를 잘 파악하라(送從子祐曾入燕序)
제5부 기인과 열녀
마음으로 듣는 아름다운 소리(復書竹下哀李琴師文後)
이 시대의 기남자 백동수(書白永叔事)
신선 이정해(書李神仙事)
김은애가 추문에 대처하는 방법(金銀愛傳)
계모에게 맞아 죽은 장 처녀(書淸安張處女獄事)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강상 효녀(江上孝女傳)
영천 박 열부와 충복 만석(書榮川朴烈婦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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