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공적 연금제도를 가진 복지국가에서 회피할 수 없지만 가장 뜨거운 주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연금 제도 개혁일 것이다. 이제 공적 연금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한국의 경우에도 최근 노인들에게 20만 원씩 지급하기로 한 기초 연금 제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인데, 노인 인구의 증가 속도와 노인 빈곤 문제의 심각함을 고려할 때 연금제도는 앞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연금 분야는 그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아 논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정치학자가 영국 연금 개혁의 ''정치''에 주목한 책이라는 점에서 연금 문제의 큰 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영국 사례, 즉 서로 성격이 다른 세 차례의 연금 개혁을 비교함으로써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연금 개혁은 정치적 문제
연금 개혁이 정치적 문제인 것은 무엇보다도 공적연금이 민간연금과 달리 어떤 형태로든 재분배와 사회적 연대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회계약이며, 여러 사회 세력 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연금은 복지국가의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연루되어 있는, 성숙한 복지국가의 최대 지출 프로그램이다. 특히 기여와 급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연금제도를 택한 나라들의 경우 연금은 일종의 ''정치적으로 구축된 소유권''이 된다. 사람들은 연금 급여는 평생에 걸친 기여의 대가이며 따라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연금의 재조정은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격렬한 갈등을 수반하게 되며 이는 세대와 계층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수립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사회계약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데 있다.
1986년 대처 정부의 연금 개혁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영국 연금 개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개혁이다. 대처 정부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공적연금의 잔여화와 노후 소득 보장의 시장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1986년 개혁은 바로 그 물꼬를 튼 개혁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공적연금이 삭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진 후속 개혁과 그 누적적 효과들은 마침내 대처 정부의 최초 목표를 달성하게 했다. 공-사 연금 간의 균형이 뒤바뀐 것이다. 1986년 개혁은 또한 연금 정치 자체를 재구조화한 개혁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86년 개혁은 공적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을 약화시킨 반면, 민간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들을 창출하고 강화했다.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의 변화는 향후 연금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수당의 연금 개혁에 대해, 노동당은 자신이 집권하면 보수당의 개혁을 되돌려 과거의 연금제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1997년 드디어 권력을 장악한 신노동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동당의 개혁은 보수당의 연금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문제점들을 손질하는 선에 그쳤다. 민간연금의 비중이 높아진 기존의 연금 체계를 받아들이되 그 폐해를 시정하는 것, 즉 저소득층의 노후소득보장을 강화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에 맞는 새로운 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요컨대 1990년대 말 노동당 정부의 연금 개혁은 ‘제3의 길’ 논리에 충실하게, 1980년대 이후 영국의 연금 개혁을 지배해 온 민영화?자유화?개인화의 논리를 계승하되, 국가 규제와 저소득층에 대한 재분배를 약간 강화하는 데 그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노동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간층과 경영계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보았고,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노선과 정책을 상당 정도 수정했다. 그 결과 노동당은 선거에서 과거 보수당에 표를 던졌던 상층 노동자들과 중간층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반면, 노조와의 특수 관계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런 노동당의 권력 자원의 변화, 그리고 ‘증세 불가’를 출발점으로 하는 우경화된 복지 정책의 전반적 틀이야말로 신노동당의 1차 연금 개혁의 성격을 규정한 권력 자원적 요소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노동당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정책들의 범위는 협소해져 있었다. 결국 권력 자원을 얻기 위한 과정 자체가 그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줄였고, 향후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운신의 폭 내에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반면, 신노동당 2차 개혁은 권력 재창출을 통해 좀 더 여유가 있어진 신노동당의 입지를 반영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동당 정부에 의해 2002년 시작되어 2011년에 마무리된 일련의 연금 개혁은 1980년대 이후 연금 개혁의 일관된 기조였던 민영화?자유화?개인화에서 벗어나 제한적이나마 연금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강화와 노동시장 약자에 대한 배려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 개혁은 초당적 합의에 입각해, 노동당 정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보수-자유 연립정부에 의해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영국의 연금 개혁이 말해 주는 것들
① 영국 연금 개혁의 역사는 연금 민영화를 통해 시민들의 노후 보장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지를 잘 보여 준다. 영국은 1994년 세계은행이 권고했고 세계의 보수정당들이 대안으로 주장해 온 다주제 연금제도를 일찍이 선제적으로 도입한 사례다. 즉 소위 선진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국가는 1층의 기초연금만을 책임지고 나머지는 직업연금이나 개인연금 등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세계은행의 초기 권고를 충실히 실행에 옮긴 나라인 셈이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의 영국의 경험은 이런 제도로는 노년 빈곤과 노년 불평등을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대처 정부의 개혁은 노년 빈곤과 노후 불평등을 심각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으며, 보수당 정부가 설정했던 연금 민영화의 기본 방향을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노후보장이 될 만한 적절한 연금을 제공하고자 했던 노동당의 1차 개혁 역시 그 결과 국가연금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늘었다. 결국 노동당은 2007년 그간의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노후보장에서 국가 역할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기초연금의 강화와 국가 및 고용주가 기여하는 개인연금의 의무화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영국이 안고 있는 노후보장의 취약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다.
② 영국의 경험은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연금 민영화가 더 우월한 대안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영국의 경우 연금 민영화는 단기적으로는 국가의 재정 부담을 줄이지 못했다. 민영화를 유도하기 위해 막대한 조세 환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초연금이 빈약한 상태에서 결국 노동시장 약자들은 노후를 공공부조나 공공부조성 연금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연금이라는 항목을 통한 지출은 줄었으나, 이는 공공부조 지출로 이전되어 버렸을 뿐, 국가의 재정지출 자체는 줄지 않은 셈이다. 요컨대 연금 민영화가 가져오는 유형?무형의 사회적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③ 영국의 경험은 일단 민영화를 통해 공적연금과 민간연금에 대한 새로운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공적연금 체계를 과거와 같은 형태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86년 보수당 정부의 연금 개혁은 연금 정치 자체를 재구조화한 개혁이었다. 이 개혁은 공적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을 약화시킨 반면, 민간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들을 창출하고 강화했다.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의 변화는 향후 연금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연금 체계에 대한 지지자 집단이 생성되자 노동당이 권력에 복귀해도 제도를 되돌리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노동당은 민간연금 우위의 연금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았다. 국가 개입을 강화한 신노동당 2차 개혁조차도 민간연금을 근간으로 한 연금 체계 자체는 손대지 않은 것이었다.
④ 영국의 연금 개혁은 합의적 개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여 준다. 양당제와 다수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연금 개혁에 있어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정책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신노동당 2차 개혁(대부분의 행위자들이 반대했던!)의 경우에는 유례없는 합의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 연금위원회는 연금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들’, 즉 방대하고도 꼼꼼한 기초 자료를 면밀히 수집한 후 대중적으로 잘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했다. 이는 최소한 “상태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함으로써 향후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한 합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 이에 기초해 개혁 세력은 권력 내부의 반대 세력을 설득하고, 사용자단체(CBI)?노조(TUC)?연금산업 및 야당과 초당적 합의를 이루는 한편, ⓒ 여러 창의적 이벤트를 통해 숙의적 국민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합의는, 이후 보수당이 집권했을 때에도 정책의 방향이 크게 바뀌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영국의 연금 개혁이 한국에 주는 함의
① 한국은 2008년 기초연금을 도입하는 대신 급여를 삭감하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영국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우리의 2008년 개혁은 기초연금의 도입을 통한 연금제도의 다층화가 국민연금의 약화를 동반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려를 던진다. 2008년 개혁으로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2028년에는 40%로 떨어지게 되었다(40년 가입 평균 소득자 기준). 실제로 대부분의 가입자들이 40년을 채우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균 소득자의 실제 소득 대체율은 약 20%에 불과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김수완?권문일 2009).
이렇게 된다면 국민연금은 소득보장의 중추가 되기에 미흡한 제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평균 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는 상위 중산층의 경우 보험료 부과 소득 상한제와 국민연금의 재분배 기능으로 인해 소득 대체율은 더욱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은 평균 소득자 이상의 중산층으로 하여금 퇴직연금을 통해 노후 소득을 보완하려는 욕구를 증대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는 영국식의 외부 대체 요구, 즉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국민연금에서 탈퇴하겠다는 요구로 나아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실제로 한 조사 결과는 노조 간부들이 국민연금보다 퇴직연금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미 퇴직 연금 사업자들은 외부 대체의 필요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양재진 2012).
그러나 일찌감치 2층 소득 비례 공적연금을 의무적인 기업연금으로 대체할 수 있게 했던 영국의 오늘날 상황은 이런 연금제도가 결코 바람직한 대안일 수 없음을 잘 보여 준다. 영국의 경험은 또한 경로가 이렇게 설정되고 나면, 그 경로로부터 이탈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보여 준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에서 적절한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다층제 연금제도가 어떤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연금을 명실상부한 노후 소득보장의 중추로 만들고, 다른 목표들을 상황과 형편에 맞게 조절하는 방식으로 연금제도를 다듬어 갈 필요가 있다.
② 영국의 경험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기초연금 지급 방식 논란에도 일정한 시사를 준다. 기초연금의 인색한 설계는 당장 연금 지출을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풍선효과처럼 다른 부작용을 부르고 이는 다시 공공 지출을 늘리는 역할을 하기 쉽다. 영국에서는 기초연금 급여를 물가에 연동해 기초연금액이 낮아졌지만, 이는 결국 공공부조 혹은 연금크레디트라는 형태의 공공부조성 급여를 늘렸다. 또한 자격 있는 빈자를 가려내기 위한 자산조사는 저소득층의 저축 유인을 감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행정적 비용을 유발했고, 제도를 하염없이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면서도 빈곤 감소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2013년 보수-자유 연립정부는 연금 수급 연령을 더 올리는 대신 기초연금과 제2국가연금과 통합해 2016년부터 30년 이상 가입자에게 주 140파운드의 균등 연금을 지급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영국의 국가연금은 베버리지 이후 약 3세대 동안 온갖 복잡한 제도를 실험하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애초의 출발점, 즉 빈곤 방지에 초점을 둔 균등률 기초연금을 수립하는 것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영국의 긴 실험은 ‘자격 있는 빈자’를 가려내는 수고보다 차라리 적정 수준의 보편 급여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부족한 기초연금액은 결국 노년의 공공부조 수급 자 수를 늘리게 될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에 연동한 기초연금 지급은, 비록 일부일지라도 국민연금 가입자의 이탈을 불러 전체 노후보장 체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영국의 경험은 노년의 기초 보장이 결국 어떤 형태로든 국가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풍선효과를 낳는 복잡한 제도 설계가 아니라 증세를 통한 비용 조달이 답일 것이다. 이 역시 오랜 실험 끝에 영국민이 도달한 결론이다.
③ 2000년대의 합의적 연금 개혁 방식도 한국 사회가 특히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금은 개개인들에게는 직업 선택이나 인생 주기에 따른 장기적 재무 설계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는 계층 간, 세대 간 재분배 계약이다. 당연히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해야 하며, 그렇다는 확신을 줄 때 제도가 시민들의 순응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안정적이어야 할 연금이 어떤 이유에서인가 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개혁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이해 당사자들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합의와 지지가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영국에서 대중적 협의를 통한 합의 형성 과정은 증세에 대한 동의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영국의 합의적 개혁 경험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영국이 집권 정부가 일방주의적 정책 결정을 하기 수월한 제도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대결의 정치 문화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이런 합의적 개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금 개혁은, 아마도 외교 안보 정책과 더불어, 저출산?고령화의 위험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초당적?합의적 정책 결정이 필요한 영역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김영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공회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연구관으로 일했다.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있다. 관심 분야는 한국과 유럽의 복지국가와 복지 정치, 복지국가와 젠더, 복지 태도 등이다. 저서로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편??(1996)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사회투자국가가 우리의 대안인가?”(2007), “복지동맹 문제를 중심으로 본 보편적 복지국가의 발전 조건”(2012), “한국인의 복지태도: 비일관성과 비계급성 문제를 중심으로”(2011, 공저), “Institutions of Interest Representation and the Welfare State in Post-Democratization Korea”(2010) 등이 있다.
공적 연금제도를 가진 복지국가에서 회피할 수 없지만 가장 뜨거운 주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연금 제도 개혁일 것이다. 이제 공적 연금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한국의 경우에도 최근 노인들에게 20만 원씩 지급하기로 한 기초 연금 제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인데, 노인 인구의 증가 속도와 노인 빈곤 문제의 심각함을 고려할 때 연금제도는 앞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연금 분야는 그 내용이 워낙 전문적이고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아 논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정치학자가 영국 연금 개혁의 ''정치''에 주목한 책이라는 점에서 연금 문제의 큰 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영국 사례, 즉 서로 성격이 다른 세 차례의 연금 개혁을 비교함으로써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연금 개혁은 정치적 문제
연금 개혁이 정치적 문제인 것은 무엇보다도 공적연금이 민간연금과 달리 어떤 형태로든 재분배와 사회적 연대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회계약이며, 여러 사회 세력 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연금은 복지국가의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연루되어 있는, 성숙한 복지국가의 최대 지출 프로그램이다. 특히 기여와 급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연금제도를 택한 나라들의 경우 연금은 일종의 ''정치적으로 구축된 소유권''이 된다. 사람들은 연금 급여는 평생에 걸친 기여의 대가이며 따라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연금의 재조정은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격렬한 갈등을 수반하게 되며 이는 세대와 계층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수립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사회계약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데 있다.
1986년 대처 정부의 연금 개혁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영국 연금 개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개혁이다. 대처 정부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공적연금의 잔여화와 노후 소득 보장의 시장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1986년 개혁은 바로 그 물꼬를 튼 개혁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공적연금이 삭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진 후속 개혁과 그 누적적 효과들은 마침내 대처 정부의 최초 목표를 달성하게 했다. 공-사 연금 간의 균형이 뒤바뀐 것이다. 1986년 개혁은 또한 연금 정치 자체를 재구조화한 개혁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86년 개혁은 공적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을 약화시킨 반면, 민간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들을 창출하고 강화했다.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의 변화는 향후 연금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수당의 연금 개혁에 대해, 노동당은 자신이 집권하면 보수당의 개혁을 되돌려 과거의 연금제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1997년 드디어 권력을 장악한 신노동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동당의 개혁은 보수당의 연금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문제점들을 손질하는 선에 그쳤다. 민간연금의 비중이 높아진 기존의 연금 체계를 받아들이되 그 폐해를 시정하는 것, 즉 저소득층의 노후소득보장을 강화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에 맞는 새로운 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요컨대 1990년대 말 노동당 정부의 연금 개혁은 ‘제3의 길’ 논리에 충실하게, 1980년대 이후 영국의 연금 개혁을 지배해 온 민영화?자유화?개인화의 논리를 계승하되, 국가 규제와 저소득층에 대한 재분배를 약간 강화하는 데 그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노동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간층과 경영계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보았고,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노선과 정책을 상당 정도 수정했다. 그 결과 노동당은 선거에서 과거 보수당에 표를 던졌던 상층 노동자들과 중간층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반면, 노조와의 특수 관계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런 노동당의 권력 자원의 변화, 그리고 ‘증세 불가’를 출발점으로 하는 우경화된 복지 정책의 전반적 틀이야말로 신노동당의 1차 연금 개혁의 성격을 규정한 권력 자원적 요소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노동당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정책들의 범위는 협소해져 있었다. 결국 권력 자원을 얻기 위한 과정 자체가 그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줄였고, 향후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운신의 폭 내에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반면, 신노동당 2차 개혁은 권력 재창출을 통해 좀 더 여유가 있어진 신노동당의 입지를 반영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동당 정부에 의해 2002년 시작되어 2011년에 마무리된 일련의 연금 개혁은 1980년대 이후 연금 개혁의 일관된 기조였던 민영화?자유화?개인화에서 벗어나 제한적이나마 연금 전반에 대한 국가 개입의 강화와 노동시장 약자에 대한 배려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 개혁은 초당적 합의에 입각해, 노동당 정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보수-자유 연립정부에 의해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영국의 연금 개혁이 말해 주는 것들
① 영국 연금 개혁의 역사는 연금 민영화를 통해 시민들의 노후 보장을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지를 잘 보여 준다. 영국은 1994년 세계은행이 권고했고 세계의 보수정당들이 대안으로 주장해 온 다주제 연금제도를 일찍이 선제적으로 도입한 사례다. 즉 소위 선진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국가는 1층의 기초연금만을 책임지고 나머지는 직업연금이나 개인연금 등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세계은행의 초기 권고를 충실히 실행에 옮긴 나라인 셈이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의 영국의 경험은 이런 제도로는 노년 빈곤과 노년 불평등을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대처 정부의 개혁은 노년 빈곤과 노후 불평등을 심각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으며, 보수당 정부가 설정했던 연금 민영화의 기본 방향을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노후보장이 될 만한 적절한 연금을 제공하고자 했던 노동당의 1차 개혁 역시 그 결과 국가연금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늘었다. 결국 노동당은 2007년 그간의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노후보장에서 국가 역할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기초연금의 강화와 국가 및 고용주가 기여하는 개인연금의 의무화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영국이 안고 있는 노후보장의 취약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다.
② 영국의 경험은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연금 민영화가 더 우월한 대안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영국의 경우 연금 민영화는 단기적으로는 국가의 재정 부담을 줄이지 못했다. 민영화를 유도하기 위해 막대한 조세 환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초연금이 빈약한 상태에서 결국 노동시장 약자들은 노후를 공공부조나 공공부조성 연금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연금이라는 항목을 통한 지출은 줄었으나, 이는 공공부조 지출로 이전되어 버렸을 뿐, 국가의 재정지출 자체는 줄지 않은 셈이다. 요컨대 연금 민영화가 가져오는 유형?무형의 사회적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③ 영국의 경험은 일단 민영화를 통해 공적연금과 민간연금에 대한 새로운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공적연금 체계를 과거와 같은 형태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86년 보수당 정부의 연금 개혁은 연금 정치 자체를 재구조화한 개혁이었다. 이 개혁은 공적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을 약화시킨 반면, 민간연금에 이해관계를 갖는 세력들을 창출하고 강화했다. 그리고 이런 이해관계의 변화는 향후 연금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연금 체계에 대한 지지자 집단이 생성되자 노동당이 권력에 복귀해도 제도를 되돌리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노동당은 민간연금 우위의 연금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았다. 국가 개입을 강화한 신노동당 2차 개혁조차도 민간연금을 근간으로 한 연금 체계 자체는 손대지 않은 것이었다.
④ 영국의 연금 개혁은 합의적 개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여 준다. 양당제와 다수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연금 개혁에 있어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정책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신노동당 2차 개혁(대부분의 행위자들이 반대했던!)의 경우에는 유례없는 합의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 연금위원회는 연금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들’, 즉 방대하고도 꼼꼼한 기초 자료를 면밀히 수집한 후 대중적으로 잘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했다. 이는 최소한 “상태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함으로써 향후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한 합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 이에 기초해 개혁 세력은 권력 내부의 반대 세력을 설득하고, 사용자단체(CBI)?노조(TUC)?연금산업 및 야당과 초당적 합의를 이루는 한편, ⓒ 여러 창의적 이벤트를 통해 숙의적 국민 협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합의는, 이후 보수당이 집권했을 때에도 정책의 방향이 크게 바뀌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영국의 연금 개혁이 한국에 주는 함의
① 한국은 2008년 기초연금을 도입하는 대신 급여를 삭감하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영국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우리의 2008년 개혁은 기초연금의 도입을 통한 연금제도의 다층화가 국민연금의 약화를 동반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려를 던진다. 2008년 개혁으로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2028년에는 40%로 떨어지게 되었다(40년 가입 평균 소득자 기준). 실제로 대부분의 가입자들이 40년을 채우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균 소득자의 실제 소득 대체율은 약 20%에 불과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김수완?권문일 2009).
이렇게 된다면 국민연금은 소득보장의 중추가 되기에 미흡한 제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평균 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는 상위 중산층의 경우 보험료 부과 소득 상한제와 국민연금의 재분배 기능으로 인해 소득 대체율은 더욱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은 평균 소득자 이상의 중산층으로 하여금 퇴직연금을 통해 노후 소득을 보완하려는 욕구를 증대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는 영국식의 외부 대체 요구, 즉 퇴직연금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국민연금에서 탈퇴하겠다는 요구로 나아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실제로 한 조사 결과는 노조 간부들이 국민연금보다 퇴직연금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미 퇴직 연금 사업자들은 외부 대체의 필요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양재진 2012).
그러나 일찌감치 2층 소득 비례 공적연금을 의무적인 기업연금으로 대체할 수 있게 했던 영국의 오늘날 상황은 이런 연금제도가 결코 바람직한 대안일 수 없음을 잘 보여 준다. 영국의 경험은 또한 경로가 이렇게 설정되고 나면, 그 경로로부터 이탈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보여 준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에서 적절한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다층제 연금제도가 어떤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연금을 명실상부한 노후 소득보장의 중추로 만들고, 다른 목표들을 상황과 형편에 맞게 조절하는 방식으로 연금제도를 다듬어 갈 필요가 있다.
② 영국의 경험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기초연금 지급 방식 논란에도 일정한 시사를 준다. 기초연금의 인색한 설계는 당장 연금 지출을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풍선효과처럼 다른 부작용을 부르고 이는 다시 공공 지출을 늘리는 역할을 하기 쉽다. 영국에서는 기초연금 급여를 물가에 연동해 기초연금액이 낮아졌지만, 이는 결국 공공부조 혹은 연금크레디트라는 형태의 공공부조성 급여를 늘렸다. 또한 자격 있는 빈자를 가려내기 위한 자산조사는 저소득층의 저축 유인을 감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행정적 비용을 유발했고, 제도를 하염없이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면서도 빈곤 감소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2013년 보수-자유 연립정부는 연금 수급 연령을 더 올리는 대신 기초연금과 제2국가연금과 통합해 2016년부터 30년 이상 가입자에게 주 140파운드의 균등 연금을 지급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영국의 국가연금은 베버리지 이후 약 3세대 동안 온갖 복잡한 제도를 실험하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애초의 출발점, 즉 빈곤 방지에 초점을 둔 균등률 기초연금을 수립하는 것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영국의 긴 실험은 ‘자격 있는 빈자’를 가려내는 수고보다 차라리 적정 수준의 보편 급여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부족한 기초연금액은 결국 노년의 공공부조 수급 자 수를 늘리게 될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에 연동한 기초연금 지급은, 비록 일부일지라도 국민연금 가입자의 이탈을 불러 전체 노후보장 체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영국의 경험은 노년의 기초 보장이 결국 어떤 형태로든 국가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풍선효과를 낳는 복잡한 제도 설계가 아니라 증세를 통한 비용 조달이 답일 것이다. 이 역시 오랜 실험 끝에 영국민이 도달한 결론이다.
③ 2000년대의 합의적 연금 개혁 방식도 한국 사회가 특히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금은 개개인들에게는 직업 선택이나 인생 주기에 따른 장기적 재무 설계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는 계층 간, 세대 간 재분배 계약이다. 당연히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해야 하며, 그렇다는 확신을 줄 때 제도가 시민들의 순응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안정적이어야 할 연금이 어떤 이유에서인가 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개혁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이해 당사자들과 시민들의 광범위한 합의와 지지가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영국에서 대중적 협의를 통한 합의 형성 과정은 증세에 대한 동의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영국의 합의적 개혁 경험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영국이 집권 정부가 일방주의적 정책 결정을 하기 수월한 제도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대결의 정치 문화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이런 합의적 개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금 개혁은, 아마도 외교 안보 정책과 더불어, 저출산?고령화의 위험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초당적?합의적 정책 결정이 필요한 영역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김영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공회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연구관으로 일했다.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있다. 관심 분야는 한국과 유럽의 복지국가와 복지 정치, 복지국가와 젠더, 복지 태도 등이다. 저서로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편??(1996)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사회투자국가가 우리의 대안인가?”(2007), “복지동맹 문제를 중심으로 본 보편적 복지국가의 발전 조건”(2012), “한국인의 복지태도: 비일관성과 비계급성 문제를 중심으로”(2011, 공저), “Institutions of Interest Representation and the Welfare State in Post-Democratization Korea”(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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