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이 가결됨으로써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이 시작되었다. ‘반탁’을 내걸고 미소공위 반대투쟁을 해온 친일파 중심의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미국이 드디어 미소공위를 버리고 유엔으로 가자,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에 열을 올렸다.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엔의 조선문제 개입은 그야말로 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낸 조치였다. 이 위험에 대해 조선의 정치세력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그 여덟 번째 책『해방일기 권 -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은 조선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가게 된 까닭과 함께 이에 대한 조선의 정치세력의 대응을 주시하며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있었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가장 큰 문제는 분단 상태다. 건국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그 문제들에 대한 어떤 책임이 이승만 세력과 김일성 세력, 미국과 소련에 있었는지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미·소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미국은 미소공위를 배제하고 안보리마저 회피하며 수적 우세를 자신할 수 있는 유엔총회로 조선 문제를 가져간 것은 소련의 동의 없이 한국의 정부수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유엔에서는 일사천리로 미국이 원하는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국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조기 철군’과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을 주장하며 유엔 결정을 보이콧했다. 저자는 소련의 대응 방식을 ‘모 아니면 도’로 평가하며, 미·소간 적대적 공생관계가 한반도의 분단건국의 조건을 완성되었다고 본다. 소련은 왜 현실성 없는 주장만 하다가 원치 않는 결의안이 나오자 향후 진행을 보이콧한다고 했을까? 저자는 두 나라의 직접 작용을 없앨 경우 이북의 친소세력이 이남의 친미세력보다 우위에 설 것으로 소련은 예상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에서 함께 조선을 떠나자고 주장했다고 본다. 그러지 못할 경우 북쪽 절반을 확실히 움켜쥐는 편이 낫다고 스탈린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친일파,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도착이 임박한 1947년 연말,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불행의 씨앗인 ‘분단’ 정국 앞에 선 정치상황은 어떠했던가. 친일파집단은 한민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모여 1947년 봄부터 미소 대립이 뚜렷해지자 분단건국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평양의 집권세력은 겉으로 분단건국에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독자적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바 ‘혁명기지’를 세워 극우파의 ‘반공통일’에 ‘국토완정’으로 맞선다는 복안이었다. 좌우합작을 통한 분단건국 저지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중간파는 영수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행방을 잃고 있었다. 막강한 공권력과 자금(테러자금 포함)을 장악한 극우파의 반공 공세에 위축된 중간파는 1947년 연말 민족주주연맹을 결성하면서도 좌익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이 분단건국 저지 노력에 참여할 기색을 보임에 따라 ‘좌우합작’이 아닌 ‘우익연합’으로 중간파의 노선이 돌아서게 된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 등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반탁운동을 함께했다. 그런데 미소공위가 최종 결렬에 이르고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뚜렷해지자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입장을 초지일관 지킨 것이라고 불 수 있지만 저자는 분단건국 방안이 구체화함에 따라 ‘임정 봉대’ 주장이 분단건국 추진세력 내에서 외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1947년 가을 중 김구의 행보에는 그가 민족주의 이념보다 전략적 득실에 따라 분단건국에 대한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12월 초 김구는 이승만과의 빅딜, 즉 자신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조건으로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한다며 돌아섰다. 유엔에서 분단건국의 결과를 초래할 조선 문제 처리가 진행되는 동안 세력 확장에만 몰두해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던 백범 김구의 너무
빠른 표변이었다. 이제는 중도 우익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중간파의 민족자주연맹만이 분단건국에 확고히 반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1.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9월 3~26일
1947. 9. 3. 미국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웨드마이어 특사
1947. 9. 7. 갈림길에 선 이승만과 김구
1947. 9. 17. 조선 문제, 드디어 유엔으로
1947. 9. 19. 1947년의 유엔은 어떤 기구였나?
1947. 9. 21. 유엔 안보리의 거부권, ‘비민주적’인 것인가?
1947. 9. 24. “미소공위 끝났어요? 그럼 집에 갑시다”
1947. 9. 26. 민족주의자 이시영의 세 차례 퇴진 성명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국은 왜 미소공위를 버리는가?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9월
2. 미군정이 키워낸 ‘부패공화국’
1947년 10월 3~31일
1947. 10. 3. 미국인이 본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
1947. 10. 5. 마셜플랜이 미소공동위원회에 끼친 영향
1947. 10. 8. 친일파 옹호는 미군정의 임무!
1947. 10. 12. 군정청 상무부는 이권의 복마전?
1947. 10. 15. 장택상식 ‘거지 단속’과 ‘폭동음모 분쇄’
1947. 10. 17. 조선 문제 드디어 유엔에 상정
1947. 10. 19. 미국 ‘좌경 저널리스트’가 본 조선의 분단건국 과정
1947. 10. 21. 10월 21일, 대한민국 ‘경찰의 날’이 될 수 없다
1947. 10. 24. 재산 뺏긴 김지태, 인격까지 짓밟아야 하나?
1947. 10. 29. “나는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1947. 10. 31. 미·소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구 선생도 불순부정(不純不正)한 우익인가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0월
3. 38선을 굳힌 것은 누구였던가?
1947년 11월 2~30일
1947. 11. 2. 38선 이야기(1) 30분 만에 그어진 38선, 정말인가?
1947. 11. 5. 38선 이야기(2) 전기를 북쪽에서 얻어 쓰려니······
1947. 11. 7. 38선 이야기(3) 연백평야의 물값 시비
1947. 11. 14. 미국 속셈은 알겠는데, 소련 속셈은?
1947. 11. 16. 김구, 드디어 이승만과 갈라지려나?
1947. 11. 19. 드러나는 ‘민족진영’의 정체
1947. 11. 21. 송전(送電) 문제에 대한 한 수필가의 증언
1947. 11. 23. 김구, 다시 이승만 밑으로
1947. 11. 26. 허울이 벗겨진 ‘남조선과도정부’
1947. 11. 28. “의회 만드는 게 소꿉장난인 줄 아나?”
1947. 11. 30. 민족의 지도자는 어디에?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군정 연장을 획책하셨다고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1월
4. 어지러워진 김구의 행보
1947년 12월 2~31일
1947. 12. 2. 장덕수의 암살, 배후는 역시 김구?
1947. 12. 7. 김구의 ‘남조선 총선거’ 지지, 너무 빠른 표변
1947. 12. 10. 김구가 돌아서고 중간파만 남아서······
1947. 12. 13. 전력 운용 하나도 감당 못하던 ‘과도정부’
1947. 12. 14. 장덕수 암살로 궁지에 몰린 김구
1947. 12. 17. 동력 꺼진 기계와 같은 남조선 경제
1947. 12. 21. 김구의 오락가락 행보, “조직이 뭐길래······”
1947. 12. 24. 남조선의 도깨비방망이, 군정재판
1947. 12. 26. 전쟁 중에도 유화적 태도를 지킨 호찌민
1947. 12. 28. 엉망으로 돌아가는 도쿄전범재판
1947. 12. 31. “해방일기”를 잇는 “대한민국 실록”을 내다보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경제민주화를 벌써 주장하셨군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2월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이 가결됨으로써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이 시작되었다. ‘반탁’을 내걸고 미소공위 반대투쟁을 해온 친일파 중심의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미국이 드디어 미소공위를 버리고 유엔으로 가자,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에 열을 올렸다.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엔의 조선문제 개입은 그야말로 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낸 조치였다. 이 위험에 대해 조선의 정치세력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그 여덟 번째 책『해방일기 권 -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은 조선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가게 된 까닭과 함께 이에 대한 조선의 정치세력의 대응을 주시하며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있었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가장 큰 문제는 분단 상태다. 건국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그 문제들에 대한 어떤 책임이 이승만 세력과 김일성 세력, 미국과 소련에 있었는지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미·소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미국은 미소공위를 배제하고 안보리마저 회피하며 수적 우세를 자신할 수 있는 유엔총회로 조선 문제를 가져간 것은 소련의 동의 없이 한국의 정부수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유엔에서는 일사천리로 미국이 원하는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국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조기 철군’과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을 주장하며 유엔 결정을 보이콧했다. 저자는 소련의 대응 방식을 ‘모 아니면 도’로 평가하며, 미·소간 적대적 공생관계가 한반도의 분단건국의 조건을 완성되었다고 본다. 소련은 왜 현실성 없는 주장만 하다가 원치 않는 결의안이 나오자 향후 진행을 보이콧한다고 했을까? 저자는 두 나라의 직접 작용을 없앨 경우 이북의 친소세력이 이남의 친미세력보다 우위에 설 것으로 소련은 예상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에서 함께 조선을 떠나자고 주장했다고 본다. 그러지 못할 경우 북쪽 절반을 확실히 움켜쥐는 편이 낫다고 스탈린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친일파,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도착이 임박한 1947년 연말,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불행의 씨앗인 ‘분단’ 정국 앞에 선 정치상황은 어떠했던가. 친일파집단은 한민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모여 1947년 봄부터 미소 대립이 뚜렷해지자 분단건국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평양의 집권세력은 겉으로 분단건국에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독자적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바 ‘혁명기지’를 세워 극우파의 ‘반공통일’에 ‘국토완정’으로 맞선다는 복안이었다. 좌우합작을 통한 분단건국 저지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중간파는 영수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행방을 잃고 있었다. 막강한 공권력과 자금(테러자금 포함)을 장악한 극우파의 반공 공세에 위축된 중간파는 1947년 연말 민족주주연맹을 결성하면서도 좌익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이 분단건국 저지 노력에 참여할 기색을 보임에 따라 ‘좌우합작’이 아닌 ‘우익연합’으로 중간파의 노선이 돌아서게 된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 등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반탁운동을 함께했다. 그런데 미소공위가 최종 결렬에 이르고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뚜렷해지자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입장을 초지일관 지킨 것이라고 불 수 있지만 저자는 분단건국 방안이 구체화함에 따라 ‘임정 봉대’ 주장이 분단건국 추진세력 내에서 외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1947년 가을 중 김구의 행보에는 그가 민족주의 이념보다 전략적 득실에 따라 분단건국에 대한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12월 초 김구는 이승만과의 빅딜, 즉 자신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조건으로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한다며 돌아섰다. 유엔에서 분단건국의 결과를 초래할 조선 문제 처리가 진행되는 동안 세력 확장에만 몰두해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던 백범 김구의 너무
빠른 표변이었다. 이제는 중도 우익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중간파의 민족자주연맹만이 분단건국에 확고히 반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1.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
1947년 9월 3~26일
1947. 9. 3. 미국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웨드마이어 특사
1947. 9. 7. 갈림길에 선 이승만과 김구
1947. 9. 17. 조선 문제, 드디어 유엔으로
1947. 9. 19. 1947년의 유엔은 어떤 기구였나?
1947. 9. 21. 유엔 안보리의 거부권, ‘비민주적’인 것인가?
1947. 9. 24. “미소공위 끝났어요? 그럼 집에 갑시다”
1947. 9. 26. 민족주의자 이시영의 세 차례 퇴진 성명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국은 왜 미소공위를 버리는가?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9월
2. 미군정이 키워낸 ‘부패공화국’
1947년 10월 3~31일
1947. 10. 3. 미국인이 본 일본인 그리고 조선인
1947. 10. 5. 마셜플랜이 미소공동위원회에 끼친 영향
1947. 10. 8. 친일파 옹호는 미군정의 임무!
1947. 10. 12. 군정청 상무부는 이권의 복마전?
1947. 10. 15. 장택상식 ‘거지 단속’과 ‘폭동음모 분쇄’
1947. 10. 17. 조선 문제 드디어 유엔에 상정
1947. 10. 19. 미국 ‘좌경 저널리스트’가 본 조선의 분단건국 과정
1947. 10. 21. 10월 21일, 대한민국 ‘경찰의 날’이 될 수 없다
1947. 10. 24. 재산 뺏긴 김지태, 인격까지 짓밟아야 하나?
1947. 10. 29. “나는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1947. 10. 31. 미·소 간 적대적 공생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구 선생도 불순부정(不純不正)한 우익인가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0월
3. 38선을 굳힌 것은 누구였던가?
1947년 11월 2~30일
1947. 11. 2. 38선 이야기(1) 30분 만에 그어진 38선, 정말인가?
1947. 11. 5. 38선 이야기(2) 전기를 북쪽에서 얻어 쓰려니······
1947. 11. 7. 38선 이야기(3) 연백평야의 물값 시비
1947. 11. 14. 미국 속셈은 알겠는데, 소련 속셈은?
1947. 11. 16. 김구, 드디어 이승만과 갈라지려나?
1947. 11. 19. 드러나는 ‘민족진영’의 정체
1947. 11. 21. 송전(送電) 문제에 대한 한 수필가의 증언
1947. 11. 23. 김구, 다시 이승만 밑으로
1947. 11. 26. 허울이 벗겨진 ‘남조선과도정부’
1947. 11. 28. “의회 만드는 게 소꿉장난인 줄 아나?”
1947. 11. 30. 민족의 지도자는 어디에?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군정 연장을 획책하셨다고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1월
4. 어지러워진 김구의 행보
1947년 12월 2~31일
1947. 12. 2. 장덕수의 암살, 배후는 역시 김구?
1947. 12. 7. 김구의 ‘남조선 총선거’ 지지, 너무 빠른 표변
1947. 12. 10. 김구가 돌아서고 중간파만 남아서······
1947. 12. 13. 전력 운용 하나도 감당 못하던 ‘과도정부’
1947. 12. 14. 장덕수 암살로 궁지에 몰린 김구
1947. 12. 17. 동력 꺼진 기계와 같은 남조선 경제
1947. 12. 21. 김구의 오락가락 행보, “조직이 뭐길래······”
1947. 12. 24. 남조선의 도깨비방망이, 군정재판
1947. 12. 26. 전쟁 중에도 유화적 태도를 지킨 호찌민
1947. 12. 28. 엉망으로 돌아가는 도쿄전범재판
1947. 12. 31. “해방일기”를 잇는 “대한민국 실록”을 내다보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경제민주화를 벌써 주장하셨군요”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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