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난중일기란 무엇인가?
이순신李舜臣이 쓴 임진왜란 7년간 진중일기. 7책 205장. 필사본. 국보 제76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일어난 다음 달 5월 1일부터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전 7책 중 제1책은 <임진일기壬辰日記>로 27매(1592.5.1.∼1592.5.4., 1592.5.29.∼1592.6.10., 1592.8.24.∼1592.8.28., 1593.2.1.∼1593.3.22.), 제2책은 <계사일기癸巳日記>로 30매(1593.5.1.∼1593.9.15.), 제3책은 <갑오일기甲午日記>로 52매(1594.1.28.∼1594.11.18.)로 되어 있다. 제4책은 <병신일기丙申日記>로 41매(1596.1.1.∼1596.10.11.), 제5책은 <정유일기丁酉日記>로 27매(1597.4.1. ∼1597.10.28.), 제6책은 <정유무술일기丁酉戊戌記>로 20매(1597.8.4.∼1598. 1.4.), 제7책은 <무술일기戊戌日記>로 8매(1598.9.15.∼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狀啓·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일기의 주요 내용은 엄격한 진중 생활과 국정에 관한 솔직한 감회, 전투 후의 비망록과 수군 통제에 관한 비책, 시취時趣의 일상 생활 등이 실려 있다. 이밖에 가족·친지·부하·장졸·내외 요인들의 내왕, 부하들에 대한 상벌, 충성과 강개의 기사, 전황의 보고, 장계 및 서간문의 초록 등이 실려 있어, 임진왜란의 상황과 이순신의 전략, 나라의 충절,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감동을 준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 제6으로 <임진장초壬辰狀草>와 함께 영인, 간행되었고 부산대학교에서 간행한 영인본 등이 있다.
청춘들이여 읽어라! 삶의 용기를 얻으리!
세계해전사에 유례없는 전공에 빛나는 불멸의 영웅!
애국정신과 휴머니즘이 넘치는 웅장한 전쟁일기!
민족혼을 심어주는 국민독본! 임진왜란 국보급 으뜸 사료!
한국 일기문학의 최고봉! 영웅의 절절한 인간상!
불멸의 전쟁서사시 《난중일기》!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여 역사에 용명勇名을 길이 남긴 우리의 많은 선조 가운데서도 국난을 한 몸으로 막아낸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 이순신은 우리나라에서만 추앙받는 위인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발굴과 연구를 토대로 이제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위대한 전략가이자 훌륭한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순한 무장武將만이 아닌 훌륭한 정치가이며 외교가, 과학자 또한 탁월한 문학가였다. 그가 남긴 문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은 임진왜란 7년 동안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이다. 이순신이 죽은 뒤 200년이 지나서 조선 정조 때 이순신의 시문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행적과 관련 문서들을 집대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충무공전서》이다. 그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 《난중일기》이다.
《난중일기》는 7년 1604일의 기록으로 생사를 다투던 전란 중의 진중일기이다. 이에 따르면 이순신은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는 그의 진중생활과 국정에 대한 거리낌없는 사실 기록, 비밀스런 군사계책,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안부 기록, 부하들의 상벌 기록, 날씨, 꿈자리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 등 광범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전체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정확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인간 이순신의 절절한 민족혼 휴머니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된 이순신은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일본군 침략에 대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난중일기》를 1592년(임진년) 1월 1일부터 시작하여 7년 동안 기록했다. 일본군의 침략 조짐을 미리 알아채고 진영에서 보고들은 여러 사건과 문제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일기 내용의 대부분은 전쟁의 출동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공문 발송 등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개인적인 가족사에 대한 걱정과 진중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도 곳곳에 잘 배어 있다. 또한 그 문장이 간결하고도 진실해서 인간 이순신의 절절한 충효신의忠孝信義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진중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료이며 동시에 영웅의 인간적 면모도 꼼꼼히 살필 수 있는 한국 일기문학의 백미이다. 이처럼 《난중일기》는 오늘날 우리 민족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고전이고, 우리 국민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국민독본인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사에 빛나는 이순신대첩!
임진왜란 중의 수많은 전투 가운데서도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도대첩은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을 저지했다는 데에 큰 의의를 가진다. 이 전투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전술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친 전투이다. 이 전투로써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벌 야욕을 꺾었다.
1592년 5월 초 한성부에 입성한 일본군 장수들은 모임을 열고 전국을 나누어 맡아서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순신은 그 정보를 입수하고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도 등지에 출몰하는 일본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의 수군과 합류해서 6일 전라좌·우도 수군 연합함대가 일제히 출전했다. 그리고 노량 앞바다에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했다.
미리 일본군의 도주로 차단을 계획한 이순신은 판옥선 5∼6척으로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몰려나오도록 꾀어냈다. 조선 수군은 치밀한 작전에 따라 전선의 속도를 조절하며 왜선을 유인했다. 일본군 배가 한 줄로 늘어선 형태가 되자 조선 수군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마치 학의 날개처럼 왜선을 좌우에서 에워쌌다. 이것이 바로 학익진鶴翼陣 대형이었다. 학익진법은 고도로 훈련된 정예함대만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이다. 영국의 해군 중장 발라드(G. A. Ballard)는 이순신 함대의 기동성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 기동이 아주 간단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잘 훈련된 해군 장교만이 이 작전을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온 국민 울음 삼키며 읽어야 민족혼 국민독본!
순간적으로 왜선을 에워싼 조선 수군은 먼저 거북선 3척으로 적진을 공격했다. 그 뒤를 이어 모든 전선은 지자?현자?승자총통과 화전을 발사해서 일본 수군을 혼비백산시켰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전선 73척 가운데 47척을 격파하고 12척을 나포했으며 수많은 일본군이 실종되거나 물에 빠져죽었다.
이 한산도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멸시킨 것은 이 한산도대첩뿐이다. 한산도 해전의 승리는 이순신의 합리적이고 치밀한 작전 계획과 그의 지휘대로 움직인 조선 수군의 용감무쌍한 활약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또한 거북선이 일본 수군에게 결정적인 저해요소라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준 해전이었다.
임진왜란의 대세를 결정지은 한산도대첩은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영국을 지켜낸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르해전이나 페르시아군으로부터 그리스를 지켜 낸 살라미스해전 등과 함께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영국의 전쟁역사가인 헐버트는 이렇게 감탄했다.
"이 해전은 한국에서의 살라미스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침략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었다.”
한민족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 어떻게 썼는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서 거북선을 제작하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며 나라가 존망 위기에 처했을 때 왜적을 쳐부숴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왜란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하였다. 원균의 모함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구원으로 백의종군하다가 원균이 대패하자 흩어진 병선 12척을 모아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다. 다시 해상권을 되찾았으나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고 전사한다. 온갖 모함과 박해 속에서도 빛난 그의 우국지성 청렴강직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그 친필초고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초고본 《임진장초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고산고정일《난중일기》 역해본은 전공 학자들이 최근 연구성과까지 모두 반영한 가장 완전한 판본이다. 친필초고본을 표준으로 삼고, 초고의 분실로 인해 《이충무공전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부분을 보충했다. 또한 이에 전서본, 《난중일기초》, 새로 발견된 일기초 등 여러 문헌들과 문맥을 참고하여 바로잡으려 애썼다. 이렇듯 모든 판본을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은 원문을 바탕으로 한 한글번역판에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 주요 목차
머리글
임진년 일기
임진년 정월(1592년 1월)
임진년 2월(1592년 2월)
임진년 3월(1592년 3월)
임진년 4월(1592년 4월)
임진년 5월(1592년 5월)
임진년 6월(1592년 6월)
임진년 8월(1592년 8월)
계사년 일기
계사년 정월(1593년 1월)
계사년 3월(1593년 3월)
계사년 5월(1593년 5월)
계사년 6월(1593년 6월)
계사년 7월(1593년 7월)
계사년 8월(1593년 8월)
계사년 9월(1593년 9월)
갑오년 일기
갑오년 정월(1594년 1월)
갑오년 2월(1594년 2월)
갑오년 3월(1594년 3월)
갑오년 4월(1594년 4월)
갑오년 5월(1594년 5월)
갑오년 6월(1594년 6월)
갑오년 7월(1594년 7월)
갑오년 8월(1594년 8월)
갑오년 9월(1594년 9월)
갑오년 10월(1594년 10월)
갑오년 11월(1594년 11월)
을미년 일기
을미년 정월(1595년 1월)
을미년 2월(1595년 2월)
을미년 3월(1595년 3월)
을미년 4월(1595년 4월)
을미년 5월(1595년 5월)
을미년 6월(1595년 6월)
을미년 7월(1595년 7월)
을미년 8월(1595년 8월)
을미년 9월(1595년 9월)
을미년 10월(1595년 10월)
을미년 11월(1595년 11월)
을미년 12월(1595년 12월)
병신년 일기
병신년 정월(1596년 1월)
병신년 2월(1596년 2월)
병신년 3월(1596년 3월)
병신년 4월(1596년 4월)
병신년 5월(1596년 5월)
병신년 6월(1596년 6월)
병신년 7월(1596년 7월)
병신년 8월(1596년 8월)
병신년 윤8월(1596년 윤8월)
병신년 9월(1596년 9월)
병신년 10월(1596년 10월)
정유년 일기
정유년 4월(1597년 4월)
정유년 5월(1597년 5월)
정유년 6월(1597년 6월)
정유년 7월(1597년 7월)
정유년 8월(1597년 8월)
정유년 9월(1597년 9월)
정유년 10월(1597년 10월)
정유년 11월(1597년 11월)
정유년 12월(1597년 12월)
무술년 일기
무술년 정월(1598년 1월)
무술년 7월(1598년 7월)
무술년 9월(1598년 9월)
무술년 10월(1598년 10월)
무술년 11월(1598년 11월)
이순신 그 격동의 생애
이순신 그 격동의 생애
임진왜란의 발발과 이순신의 활약
조선수군 관할구역 일람―경상도?전라도?충청도
연보
인명 찾아보기
지명 찾아보기
난중일기란 무엇인가?
이순신李舜臣이 쓴 임진왜란 7년간 진중일기. 7책 205장. 필사본. 국보 제76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일어난 다음 달 5월 1일부터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전 7책 중 제1책은 <임진일기壬辰日記>로 27매(1592.5.1.∼1592.5.4., 1592.5.29.∼1592.6.10., 1592.8.24.∼1592.8.28., 1593.2.1.∼1593.3.22.), 제2책은 <계사일기癸巳日記>로 30매(1593.5.1.∼1593.9.15.), 제3책은 <갑오일기甲午日記>로 52매(1594.1.28.∼1594.11.18.)로 되어 있다. 제4책은 <병신일기丙申日記>로 41매(1596.1.1.∼1596.10.11.), 제5책은 <정유일기丁酉日記>로 27매(1597.4.1. ∼1597.10.28.), 제6책은 <정유무술일기丁酉戊戌記>로 20매(1597.8.4.∼1598. 1.4.), 제7책은 <무술일기戊戌日記>로 8매(1598.9.15.∼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狀啓·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일기의 주요 내용은 엄격한 진중 생활과 국정에 관한 솔직한 감회, 전투 후의 비망록과 수군 통제에 관한 비책, 시취時趣의 일상 생활 등이 실려 있다. 이밖에 가족·친지·부하·장졸·내외 요인들의 내왕, 부하들에 대한 상벌, 충성과 강개의 기사, 전황의 보고, 장계 및 서간문의 초록 등이 실려 있어, 임진왜란의 상황과 이순신의 전략, 나라의 충절,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감동을 준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 제6으로 <임진장초壬辰狀草>와 함께 영인, 간행되었고 부산대학교에서 간행한 영인본 등이 있다.
청춘들이여 읽어라! 삶의 용기를 얻으리!
세계해전사에 유례없는 전공에 빛나는 불멸의 영웅!
애국정신과 휴머니즘이 넘치는 웅장한 전쟁일기!
민족혼을 심어주는 국민독본! 임진왜란 국보급 으뜸 사료!
한국 일기문학의 최고봉! 영웅의 절절한 인간상!
불멸의 전쟁서사시 《난중일기》!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여 역사에 용명勇名을 길이 남긴 우리의 많은 선조 가운데서도 국난을 한 몸으로 막아낸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서 이순신은 우리나라에서만 추앙받는 위인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발굴과 연구를 토대로 이제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위대한 전략가이자 훌륭한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순한 무장武將만이 아닌 훌륭한 정치가이며 외교가, 과학자 또한 탁월한 문학가였다. 그가 남긴 문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은 임진왜란 7년 동안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이다. 이순신이 죽은 뒤 200년이 지나서 조선 정조 때 이순신의 시문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행적과 관련 문서들을 집대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충무공전서》이다. 그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이 《난중일기》이다.
《난중일기》는 7년 1604일의 기록으로 생사를 다투던 전란 중의 진중일기이다. 이에 따르면 이순신은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는 그의 진중생활과 국정에 대한 거리낌없는 사실 기록, 비밀스런 군사계책,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안부 기록, 부하들의 상벌 기록, 날씨, 꿈자리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 등 광범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전체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정확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인간 이순신의 절절한 민족혼 휴머니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된 이순신은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일본군 침략에 대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난중일기》를 1592년(임진년) 1월 1일부터 시작하여 7년 동안 기록했다. 일본군의 침략 조짐을 미리 알아채고 진영에서 보고들은 여러 사건과 문제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일기 내용의 대부분은 전쟁의 출동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공문 발송 등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개인적인 가족사에 대한 걱정과 진중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도 곳곳에 잘 배어 있다. 또한 그 문장이 간결하고도 진실해서 인간 이순신의 절절한 충효신의忠孝信義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진중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이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료이며 동시에 영웅의 인간적 면모도 꼼꼼히 살필 수 있는 한국 일기문학의 백미이다. 이처럼 《난중일기》는 오늘날 우리 민족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고전이고, 우리 국민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국민독본인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사에 빛나는 이순신대첩!
임진왜란 중의 수많은 전투 가운데서도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도대첩은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을 저지했다는 데에 큰 의의를 가진다. 이 전투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전술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친 전투이다. 이 전투로써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벌 야욕을 꺾었다.
1592년 5월 초 한성부에 입성한 일본군 장수들은 모임을 열고 전국을 나누어 맡아서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순신은 그 정보를 입수하고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도 등지에 출몰하는 일본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의 수군과 합류해서 6일 전라좌·우도 수군 연합함대가 일제히 출전했다. 그리고 노량 앞바다에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했다.
미리 일본군의 도주로 차단을 계획한 이순신은 판옥선 5∼6척으로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몰려나오도록 꾀어냈다. 조선 수군은 치밀한 작전에 따라 전선의 속도를 조절하며 왜선을 유인했다. 일본군 배가 한 줄로 늘어선 형태가 되자 조선 수군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마치 학의 날개처럼 왜선을 좌우에서 에워쌌다. 이것이 바로 학익진鶴翼陣 대형이었다. 학익진법은 고도로 훈련된 정예함대만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이다. 영국의 해군 중장 발라드(G. A. Ballard)는 이순신 함대의 기동성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 기동이 아주 간단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잘 훈련된 해군 장교만이 이 작전을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온 국민 울음 삼키며 읽어야 민족혼 국민독본!
순간적으로 왜선을 에워싼 조선 수군은 먼저 거북선 3척으로 적진을 공격했다. 그 뒤를 이어 모든 전선은 지자?현자?승자총통과 화전을 발사해서 일본 수군을 혼비백산시켰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전선 73척 가운데 47척을 격파하고 12척을 나포했으며 수많은 일본군이 실종되거나 물에 빠져죽었다.
이 한산도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멸시킨 것은 이 한산도대첩뿐이다. 한산도 해전의 승리는 이순신의 합리적이고 치밀한 작전 계획과 그의 지휘대로 움직인 조선 수군의 용감무쌍한 활약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또한 거북선이 일본 수군에게 결정적인 저해요소라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준 해전이었다.
임진왜란의 대세를 결정지은 한산도대첩은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영국을 지켜낸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르해전이나 페르시아군으로부터 그리스를 지켜 낸 살라미스해전 등과 함께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영국의 전쟁역사가인 헐버트는 이렇게 감탄했다.
"이 해전은 한국에서의 살라미스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침략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었다.”
한민족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 어떻게 썼는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서 거북선을 제작하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며 나라가 존망 위기에 처했을 때 왜적을 쳐부숴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왜란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하였다. 원균의 모함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구원으로 백의종군하다가 원균이 대패하자 흩어진 병선 12척을 모아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다. 다시 해상권을 되찾았으나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고 전사한다. 온갖 모함과 박해 속에서도 빛난 그의 우국지성 청렴강직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그 친필초고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초고본 《임진장초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고산고정일《난중일기》 역해본은 전공 학자들이 최근 연구성과까지 모두 반영한 가장 완전한 판본이다. 친필초고본을 표준으로 삼고, 초고의 분실로 인해 《이충무공전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부분을 보충했다. 또한 이에 전서본, 《난중일기초》, 새로 발견된 일기초 등 여러 문헌들과 문맥을 참고하여 바로잡으려 애썼다. 이렇듯 모든 판본을 일일이 대조하여 바로잡은 원문을 바탕으로 한 한글번역판에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 주요 목차
머리글
임진년 일기
임진년 정월(1592년 1월)
임진년 2월(1592년 2월)
임진년 3월(1592년 3월)
임진년 4월(1592년 4월)
임진년 5월(1592년 5월)
임진년 6월(1592년 6월)
임진년 8월(1592년 8월)
계사년 일기
계사년 정월(1593년 1월)
계사년 3월(1593년 3월)
계사년 5월(1593년 5월)
계사년 6월(1593년 6월)
계사년 7월(1593년 7월)
계사년 8월(1593년 8월)
계사년 9월(1593년 9월)
갑오년 일기
갑오년 정월(1594년 1월)
갑오년 2월(1594년 2월)
갑오년 3월(1594년 3월)
갑오년 4월(1594년 4월)
갑오년 5월(1594년 5월)
갑오년 6월(1594년 6월)
갑오년 7월(1594년 7월)
갑오년 8월(1594년 8월)
갑오년 9월(1594년 9월)
갑오년 10월(1594년 10월)
갑오년 11월(1594년 11월)
을미년 일기
을미년 정월(1595년 1월)
을미년 2월(1595년 2월)
을미년 3월(1595년 3월)
을미년 4월(1595년 4월)
을미년 5월(1595년 5월)
을미년 6월(1595년 6월)
을미년 7월(1595년 7월)
을미년 8월(1595년 8월)
을미년 9월(1595년 9월)
을미년 10월(1595년 10월)
을미년 11월(1595년 11월)
을미년 12월(1595년 12월)
병신년 일기
병신년 정월(1596년 1월)
병신년 2월(1596년 2월)
병신년 3월(1596년 3월)
병신년 4월(1596년 4월)
병신년 5월(1596년 5월)
병신년 6월(1596년 6월)
병신년 7월(1596년 7월)
병신년 8월(1596년 8월)
병신년 윤8월(1596년 윤8월)
병신년 9월(1596년 9월)
병신년 10월(1596년 10월)
정유년 일기
정유년 4월(1597년 4월)
정유년 5월(1597년 5월)
정유년 6월(1597년 6월)
정유년 7월(1597년 7월)
정유년 8월(1597년 8월)
정유년 9월(1597년 9월)
정유년 10월(1597년 10월)
정유년 11월(1597년 11월)
정유년 12월(1597년 12월)
무술년 일기
무술년 정월(1598년 1월)
무술년 7월(1598년 7월)
무술년 9월(1598년 9월)
무술년 10월(1598년 10월)
무술년 11월(1598년 11월)
이순신 그 격동의 생애
이순신 그 격동의 생애
임진왜란의 발발과 이순신의 활약
조선수군 관할구역 일람―경상도?전라도?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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