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와 드골

고객평점
저자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
출판사항연암서가, 발행일:2014/10/15
형태사항p.391 국판:22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94054605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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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프랑스와 세계의 운명을 바꾼
말로와 드골의 위대한 우정의 역사

지금까지 출판된 기록이나 증언에 의하면, 드골과 말로의 관계는 불균형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이들의 관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직급상 상관이었던 드골이 항상 주도권을 쥐었고, 말로가 그 뒤를 떠받쳤다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이와 같은 불균형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드골과 말로의 관계가 위계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한 상호주체성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옮긴이 서문 중에서

프랑스와 세계의 운명을 바꾼
말로와 드골의 위대한 우정의 역사

“우선 과거를…….” 이것이 드골 장군이 앙드레 말로에게 건넨 첫마디이다. 첫 만남. 1945년 7월 18일 수요일 아침 11시, 파리 생도미니크 가(街)에서 두 전설이 만났다. 자유프랑스의 수장과 양차대전 사이에 반파시즘 투쟁에 참여한 신화적 작가가 만난 것이다. 포옹도, 완곡한 표현도, 예의상의 표현도 없이 드골 장군은 앙드레 말로의 과거 정치 참여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공격했다. 놀란 앙드레 말로는 일단 자신의 정치 참여의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한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그는 1930년대 파시즘에 맞섰던 투쟁을 설명했다. 앙드레 말로는 계속해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설명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프랑코 장군의 군대와 맞서 스페인 공화국 정부 편에서 싸웠다고 주장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스탈린의 공산주의자들과는 한 패가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앙드레 말로는 알자스로렌 부대에서 했던 레지스탕스운동과 신조에 대해 설명했다.

드골 장군과 앙드레 말로는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25년 이상 그 강도 면에서 한결 같았던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 첫 만남에서 모든 것이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 첫 만남은 심지어 늦은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출판된 기록이나 증언에 의하면, 드골과 말로의 관계는 불균형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이들의 관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직급상 상관이었던 드골이 항상 주도권을 쥐었고, 말로가 그 뒤를 떠받쳤다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는 이와 같은 불균형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드골과 말로의 관계가 위계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한 상호주체성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옮긴이 서문 중에서

주요 내용

“우선 과거를……” 이것은 드골 장군이 앙드레 말로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의 첫 만남은 1945년 7월 18일 수요일 아침 11시에 이루어졌다. 드골 장군은 완곡한 표현이나 예의상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공격을 했다. 앙드레 말로의 과거 정치 참여에 대해서 그랬다. 일단 그와 같은 태도에 놀란(“놀랄 만한 시작”) 앙드레 말로는 일단 자신의 정치 참여의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나로 말하자면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에 참여한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그는 1930년대 파시즘에 맞섰던 투쟁을 설명했다. “나는 로맹 롤랑과 함께 세계반파시스트위원회의 대표를 지냈습니다. 또한 지드와 함께 히틀러에게―그는 우리들을 맞아 주지 않았습니다―이른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디미트로프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재판에 항의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앙드레 말로는 계속해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설명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프랑코 장군의 군대와 맞서 국제전투비행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공화국 정부 편에서 싸웠던 것이다. 그리고 말로는 그 와중에서도 스탈린 공산주의자들과는 한 패가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 다음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으로 싸우러 갔습니다. 국제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제의용군은 그 당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이 의용군이 조직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공산당은 고민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앙드레 말로는 알자스로렌 부대에서 했던 레지스탕스 운동과 신조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전쟁, 진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프랑스는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프랑스와 결혼을 했습니다……” 드골 장군과 앙드레 말로는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25년 이상 동안 그 강도 면에서 한결 같았던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18쪽

드골 장군이 앙드레 말로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찰했던 것처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골 장군이 앙드레 말로를 그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1943년 5월, 알제로 가는 비행기에서 드골 장군은 비서실장이던 가스통 팔레브스키에게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10년 이래로 프랑스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1933)과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주 베르나노스, 1936)이네. 하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풍부함과 다양성 면에서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으뜸이 아닌가 하네.” 그렇기 때문에 드골 장군이 앙드레 말로를 만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더욱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1쪽

앙드레 말로 쪽에서도 드골 장군 개인에 대해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9월, 작가이자 초기 레지스탕스 운동 대원이었던 로제 스테판이 말로로 하여금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넣었을 때, 그는 스테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드골을 에워싸고 있는 악시옹 프랑세즈 장교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앙드레 말로는 1941년 3월 20일에 런던에 있던 드골 장군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 대해 답신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22쪽

“우선 과거를……” 1945년 7월 18일 수요일, 앙드레 말로와 샤를 드골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화제는 주로 공산주의자들과 현재의 정치 상황에 맞춰졌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앙드레 말로는 드골 장군에게 주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전달했다. “나는 붉은 군대에 의해 행해지고, 소련의 정치 경찰인 게페우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프랑스 혁명을 믿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던 시기에 드골 장군은 처음에는 말로의 이와 같은 말에 의혹을 보내지만 이내 매료되게 된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앙드레 말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역사 분야에서 최근 2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은 민족의 우선권입니다. 이는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월성이 아니라 특수성입니다. 마르크스, 빅토르 위고, 미슐레는 유럽 합중국을 믿었습니다. -29쪽

어쨌든 만남은 끝났다. 한 시간이 지났다. 앙드레 말로는 감정을 실어, “진짜 레지스탕스 대원 3분의 2를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드골 장군은] 슬프게, “잘 압니다. 나는……”이라고 대답했다. 앙드레 말로는 그때 드골 장군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역시 당신의 사람들을 잃게 될 것이란 걸 난 잘 알고 있소.” “다시 찾은 파리에서 뭐가 가장 인상적이던가요” 그러자 앙드레 말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거짓이죠……” -32쪽

샤를 드골의 어린 시절은 지도자의 것이었다. 형제들과 납으로 된 장난감 병정놀이를 할 때 “샤를은 항상 프랑스의 왕이었다. 그는 항상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없었다.” 열다섯 살 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독일 원정” 이야기를 쓰면서 드골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프랑스군의 수장인 “드골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회 수도사 학교 친구들에게도 그는 이렇게 도전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개성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할 수 있다. 미래는 우리들의 공적으로 가득할 것이다.” 지도자가 될 분명한 징후들이 있었던 것이다. -35쪽

샤를 드골이 군인이 되고자 결심했던 것은 열다섯 살 무렵, 즉 오랫동안 작가라는 직업을 껴안기를 주저한 후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작가라는 직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에 그의 가족적인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비록 그 당시의 분위기가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패한 후 독일에 대해 복수를 하자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샤를 드골이 육군사관학교(생시르)를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의 야심 때문이었다. -37쪽

앙드레 말로의 어린 시절은 독학자의 그것이었다. “나는 나의 청소년 시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청소년 시절은 사람을 과거로 잡아당기는 일종의 감정이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말로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앙드레 말로는 어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들이다. 몇 세대를 거쳐 蝸㈎정착했던 앙드레 말로의 집안은 수공업, 어부, 선주의 프티부르주아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알퐁스는 앙드레 말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왕도』에서 묘사한 주인공과 가장 닮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나이 든 바이킹으로서 그가 맞은 죽음이 그러하다. 배보다는 포도주 통 제조 자격증을 더 자랑스러워했던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거의 모든 재산을 까먹었으나,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여러 의식을 간직하고자 했다. 자기의 마지막 배의 뱃머리를 전통에 따라 도끼로 두 쪽을 내는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39쪽

앙드레 말로의 어머니 베르트 말로의 고향은 라미였다. 그녀는 파리로 와 정착한 쥐라 산맥 출신의 빵 장수 아버지와 이탈리아계이자 양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계속되는 내적 상처의 연속이었다.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앙드레 말로보다 단지 1년 늦게 태어난 아들이 겨우 3개월 만에 죽었고, 말썽 많았던 부부 관계는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어쩌면 앙드레 말로에 대한 그녀의 서툰 행동은 그녀가 항상 간직하고 있던 마음의 상처로 설명된다. “어머니는 아들이 밉다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의 불쑥 튀어나온 귀로 인해 그의 얼굴이 밉상이 될 정도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부부 관계의 실망에서 유래한 사디즘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 당시 교육을 받았다는 생각에 의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41쪽

샤를 드골은 박식한 가정환경에서 교육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이렇게 해서 그는 독서 취향을 갖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고전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세귀르 백작 부인의 작품, 쥘 베른의 작품, 『집 없는 아이』(엑토르 말로), 『로빈슨 크루소』(대니얼 디포), 『모히칸족의 최후』(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등과 같은 단편들과 장편들을 읽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새끼 독수리』(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드베르주라크』(에드몽 로스탕) 등을 위시해 많은 작품들을 읽을 것을 권유하면서 그를 이끌었다. 샤를 드골의 교육과 지식은 예수회 수도사 학교에서의 교육으로 윤택해지기도 했다. 이 학교는 그에게 지적,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시르 준비 과정, 그리고 1914~1918년 전쟁 동안에 겪었던 포로 생활 등을 통해 그는 놀랄 만한 교양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때 얻었던 교양 덕택으로 그는 평생 동안 사색하고 행동하고, 미래를 구상하는 데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 비극은 물론이거니와 베를렌의 시를 외우면서 놀랄 만한 기억력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샤를 드골의 독서는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했다. 그리스·라틴 역사학자들, 교회의 교부들, 코르네유, 라신, 라로슈푸코, 라브뤼예르, 보쉬에, 파스칼, 샤토브리앙, 위고, 발자크. 비니, 라마르틴, 플로베르 등의 저작들을 섭렵했다. -43쪽

앙드레 말로의 지적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두 명의 주요 인물은 도스토옙스키와 니체이다. 그에게서 있어서 니체는 서구 사상으로의 안내자이다. “그는 가치를 재발명했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아주 중요한 발견이었다. “우선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힘이 있다.” 열여섯 살 이후에 쥘 미슐레 역시 앙드레 말로의 세계로 편입된 주요 저자였다. 미슐레가 가진 역사에 대한 정열 때문이었다. “미슐레는 ‘프랑스는 하나의 인격이다’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빅토르 위고 역시 앙드레 말로의 역사 감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역사는 그 자체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전설도 그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전설적 진리, 그것은 현실이라는 결과를 가진 발명이다. 역사와 전설은 하나의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시적인 인간의 모습에 영원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앙드레 말로에게 지적으로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영역은 동양 사상, 보다 일반적으로는 서양 문명과 다른 문명과의 비교였다. 앙드레 말로는 진정한 문학적 절충주의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절충주의는 알고자 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땅, 알려지지 않은 땅을 탐사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 그리고 분명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갈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드골 장군을 위시해 앙드레 말로를 알았던 자들은 그의 엄청난 기억력, 그의 풍부하고도 다양한 지식에 경악하곤 했다. 앙드레 말로와의 거의 모든 대화는 그의 독백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드골 장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앙드레 말로는 풍요로운 정신을 통해 상대방을 수준 높은 대화의 경지로 이끌곤 했다.
샤를 드골과 앙드레 말로, 만일 그들이 그들 각자의 개성을 넘어 역사와 문학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면, 그들이 만나서 정립했던 것과 같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의 정신 유산에 대한 취향과 감수성을 갖지 않은 뛰어난 책사는 없다. 알렉산더 대왕의 성공에는 항상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앙드레 말로와 샤를 드골의 어린 시절의 유일한 공통점은 책과 역사에 대한 동일한 열정이었다. 후일 그들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서로를 존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정의 시작에 언어, 즉 문학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47쪽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샤를 드골은 생시르(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장교였고, 앙드레 말로는 아직 청소년이었다.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20세기가 탄생한 것이다. 샤를 드골과 앙드레 말로는 이 전쟁을 겪게 된다. 한 사람은 비극적인 전선에서, 다른 사람은 태평한 후방에서 겪게 된다. 이 전쟁은 한 사람에게는 끔찍한 참호로 기억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여러 일화로 기억될 것이다. -52쪽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태평한 댄디의 모습과, 전선과 포로 생활을 겪고 돌아온 군인의 모습이 완전히 대조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무공 이야기를 통해 이 전쟁을 겪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은 자들과 참호의 끔찍함 속에서 이 전쟁을 겪었다. 하지만 앙드레 말로와 샤를 드골은 역사와 영웅주의 곁을 스쳐 지나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골 대위는 포로로 잡혔으며, 앙드레 말로는 너무 젊었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영광에 목이 말랐다. 하지만 이들의 야망의 원천은 아주 달랐다. 앙드레 말로의 운명은 보통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복수라는 감정 위에서 펼쳐지게 될 것이다. 반면, 드골 대위의 운명은 자존심, 그것도 자기가 예외적인 존재라는 자존심 위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 -69쪽

1920년대에 서로 아주 다른 앙드레 말로와 샤를 드골은 만개하게 된다. 앙드레 말로는 실패했던 성공했던 간에 그 자신이 저지른 사건의 리듬을 따라 살아가는 모험가였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책으로 변형시키게 된다. 그는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는 대신 기복이 심한 부부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샤를 드골은 군에서 경력에 따라 생활하는 장교 신분이었다. 그는 벌써 군의 위계질서에 대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상황이었다. 진정한 지성으로서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며, 세계에 대해 견자(見 ?로서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독했지만 가족들과는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 앙드레 말로는 규칙을 위반했지만, 샤를 드골은 그것을 지켰다. 앙드레 말로는 잘 닦인 길 밖을 갔지만, 샤를 드골은 주어진 길을 따라갔다. 요컨대 장교와 모험가의 삶은 1920년대까지도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72쪽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로 되돌아온 후 여러 해 동안 주로 문명 탐사에 몰두했다. 또한 그것이 그의 주된 힘이기도 했다. 『서양의 유혹』에서는 극동 지방을 여행했던 A.D.라고 불리는 25세의 프랑스인과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한 중국인 링 사이의 편지 교환이 소개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앙드레 말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즉 니체에 의해 선언된 “신의 죽음”이 신앙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적 죽음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분명 더 고귀한 신앙이 있다. 마을에 있는 모든 십자가들이 보여주는 신앙이 그것이다. 죽은 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 십자가들 말이다. 이 신앙은 그 자체로 사랑이자 평화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허약함이 나를 위해 호소하는 평화를 요구하기 위해 결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죽은 정복자들만이 잠들어 있고, 그들의 빛나는 슬픔이 점점 더 커져 가는 거대한 공동묘지인 유럽, 너는 내 주위에 황량한 지평선과 고독의 오랜 주인인 절망이 가져다주는 거울만을 남겨 줄 뿐이다.” 1926년과 1927년 사이에 행해지고 집필된 여러 대담과 글에서―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에 대하여」이다―앙드레 말로는 아시아 문명과 대조시키면서 유럽 문명을 탐사하고 있다. -99쪽

앙드레 말로와 샤를 드골은 각자의 상반된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즉 식민화된 민족들이 외부 후견 세력과 지배로 인해 더 이상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그들 두 사람 모두 양심의 굴종도 영혼의 비굴함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샤를 드골과 인도차이나에서 시간을 보냈던 앙드레 말로 사이의 공통점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 위에서는 아무것도 건설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긍심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1930년대 초에 서로 상반된 경험과 전혀 다른 삶을 영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앙드레 말로와 샤를 드골은 벌써 자신들의 사람됨과 개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탁월한 지성을 가진 두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고 또 그들을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들이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 각자는 상대방에게서 예외적인 존재를 만났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111쪽

1930년대에 앙드레 말로는 모험가에서 반파시스트 투사로, 샤를 드골은 야심적인 장교에서 반항아로 변신하게 된다. 그들 각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이번에는 세계가 그들에게 그 무게를 강요하게 된다. 갈색의 페스트, 즉 파시즘이 유럽을 정복한 것이다. 군화 발자국 소리가 점차 커졌다. 1922년 10월 이래로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이 점차 나치즘으로 기울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그동안 앙드레 말로는 참여, 행동, 연설 등을 통해 한 세대 전체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특히 스페인 내전 동안 참여 작가로서의 신화를 몸소 구현하게 된다. 한편, 샤를 드골은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들이 매일 그들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양지에서가 아니라 음지에서 프랑스군의 방어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구상을 위해 몰두하게 된다. 숲 속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발언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약간의 반골 정신을 내보이기도 했다. -114쪽

앙드레 말로가 나치즘과 파시즘의 위험을 비난하기 위해 투사로서의 활동을 배가하는 있는 동안,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대 상황에 대해 점점 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밀 메예와 뤼시앵 나솅의 도움으로 깊이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진 후에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사 작전을 고안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34년에 그는 베르제 르브로 출판사에서 『미래의 군대』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문 장갑부대의 창설을 주장했다. “세계의 동향,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정세, 약자를 도울 수 있는 우리의 의무, 국제 질서의 유지 등과 같은 요인들을 고려하면 직업군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창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가 자국 군대의 직업주의와 그 질적 우수성에 의해서뿐만이 아니라 또한 현대적 기술에 대한 적응 능력에 의해서도 방어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가 선호한 군부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만 명으로 구성된 단위부대로서, 여섯 개의 장갑부대와 한 개의 경화기부대가 그것이다. 이 경화기부대는 기동력이 좋은 포병, 보병 여단, 기술지원팀, 요격 장치를 갖춘 공중정찰 부대를 포함하고 있어야 했다. 이와 같은 부대 구성의 목표는 전쟁 발발 초기에 적군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군의 기동력을 둔화시키는 것이었다. -131쪽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앙드레 말로와 마찬가지로 샤를 드골도 각자 성인으로서의 삶의 문턱에 있었다. 그들은 각자 예고된 사건들이 그들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놓을 것이라는 점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때 앙드레 말로는 37세, 샤를 드골은 48세였다. 그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서 모든 것이 대조되었지만―심지어 샤를 드골의 반나치즘, 명석한 군사적 반사 신경과 앙드레 말로의 지식인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투쟁까지도 전혀 닮지 않았다―그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 즉 인간의 자유, 존엄성, 그리고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이 그것이다. -148쪽

레지스탕스와 알자스로렌 여단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에 대한 매우 섬세한 자각을 이끌어 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매우 힘든 시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프랑스는 독일군들에게 둘러싸여 당신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시골 아낙네였습니다. 그녀는 그 독일군이 당신을 쏴 죽이고 한 발짝 다가와 당신을 보며 성호를 그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미사를 드리지 않을 한 지역에서 말이죠……” 드골 장군과 앙드레 말로는 이제 만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무엇보다 프랑스, 그리고 그들이 고민하는 하나의 이념이 그들의 충실한 우정을 연결시켜 주는 요소들이었다. 프랑스는 그들 만남의 원천이요 빛이었다. 1945년 7월부터 싹트는 그들의 우정을 받쳐 주는 초석도 바로 프랑스였다. -169쪽

1944년 8월 25일, 드골 장군은 파리를 수복할 때 두 개의 주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국가의 권위를 회복함으로써 공화국의 합법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종 승리에 프랑스의 군사적 참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파리에 입성할 때 취한 첫 번째 행동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그가 정착하기로 선택한 곳은 공화국의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 궁이나 내각 총리의 관저인 마티뇽이 아니라, 4년 전 그가 생 도미니크 가(街)에 있는 육군부에서 폴 레이노 휘하의 육군 담당 정무차관으로 근무하다 떠났던 자신의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드골 장군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국가의 권위를 회복하고, 비시 정권에 그 어떠한 정당성이나 합법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226쪽

말로는 자신의 장관직의 범주 내에서 세 개의 중요한 문제를 책임졌다. 모든 신문 발행에 요구되는 사전 허가, 출판물의 종이 양 규제, 그리고 종이 공급의 감독이 그것이었다. “내일 공보부 장관이 종이도 공급하지 못한 채 신문들을 허가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 일은 매우 단순하다. 암시장의 종이가 왕이 될 것이고, 당신이나 나나 실제로 가장 돈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종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종이의 완전히 자유로운 확보를 정착시키기 전에 종이 양의 허가와 배분을 없앤다면, 이것은 사실상 이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조건 없이 복원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231쪽

드골 장군은 국가를 재건하고 프랑스를 현대화하기 위해 헌법뿐 아니라 6개월 동안 부여된 전권도 활용했다. 4개월도 안 되어 수많은 기본적인 법안들이 가결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혁명의 기득권을 강화하면서 근대 프랑스의 기초를 다졌던 집정 정부 기간과 비교했다. 통치 행위가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경제 분야였다. 실제로, 당시에 프랑스 경제는 세 개의 주요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막중한 예산 적자, 높은 인플레이션 비율 그리고 프랑화의 안정에 필요한 외국 통화들의 고갈이었다. 1957년의 로마협약의 추인, 새로운 프랑화의 도입 그리고 뤼에프 계획의 실천을 통해 드골 장군은 오래전부터 프랑스 경제를 불구로 만들고 있던 경제적 해악들 전체를 몇 달 만에 해결했다. 신뢰는 보답을 받았다. 12월 21일, 샤를 드골은 상원 선거인단 투표의 78.50%를 얻어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59년 1월 9일, 그는 제5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스인들 가운데 최고 인물이 이제 프랑스에서 최고 인물입니다”, 라고 제4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인 르네 코티는 엘리제 궁에서 치러진 취임식이 끝날 때 정권을 이양하면서 감동적으로 공표했다. -264쪽

앙드레 말로의 우선적 활동이 목표하는 것은 모든 예술 분야들에서 현대적인 창작을 고무시키고, 특히 연극·음악·문화적 자산의 영역에서 문화의 보다 민주적 보급을 확실히 보장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노력을 연극에 기울이는 선택을 했다. 이것은 어떠한 분산도 금지시키는 재정적 수단이 취약하기 때문에 고심 끝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그는 1960년 예산 심의 때 국회에서 이 점을 분명히 말했다. “연극의 문제는 가장 시급합니다. (……) [그래서] [문화부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현대 작가들을 알아보고 지원하는 정책 또한 추진되었다. 그는 공공기관의 주문들과 아틀리에들의 수를 증대시켰다. 그는 가능한 최대한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대단위 전시회들을 기획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술가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설립했다. 또한 그 모든 해들 동안에 그는 예술가들의 보증자로 남았다. 그에게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가와 문화의 관계에서 결코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유일한 기준은 창조자들이나 관객들의 정치적 색깔이었다. -291쪽

앙드레 말로의 문화 활동의 상징은 문화원들이었다. “문화원들은 현대의 성당들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을 만나기 위해 서로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앙드레 말로가 각 도(?마다 하나의 문화원을 세우겠다는 꿈을 열정적으로 꾸긴 했다. 하지만 장관으로서 그는 그 반대로 그것들의 설립을 주도하는 원칙들이 실행되는 적은 수의 시설들에 자신의 수단들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문화적 야심을 실현하는 것을 선택했다. 에밀 장 비아지니는 문화원들의 실현 및 기능의 실질적인 양태들을 규정하고 또 “특권을 공동의 자산으로 변모시키려” 노력하면서 이와 같은 과업에 착수했다. 1961년에 첫 번째 5개년 문화계획 추진의 일환으로 피에르 무아노는 문화원 계획위원회에서 문화부를 위한 의견서를 작성했다. 문화원들의 임무는 각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건, 그에게 문화의 유혹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299쪽

대화는 끝났다.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 쉬르 오브에서 기차를 타야 했다. 두 친구는 헤어졌다. 그들은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하게 된다. 드골 장군은 앙드레 말로에게 자신의 정치적 유언을 남겼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시오. 나는 나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나는 프랑스에 대해서도, 프랑스를 위해 해야만 했던 것에 대해서도 별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진지한 것은 우리가 프랑스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었는지 아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하나의 세계의 종말에 맞서 프랑스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습니다.” -349쪽

드골 장군은 앙드레 말로에게 보낸 다양한 편지들에서 우정과 찬양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당신을 찬양하는 데 필요한 것을 그토록 훌륭하게 당신이 수행하는 데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프랑스로 말하면, 매일같이 프랑스는 앙드레 말로가 자신의 자식들 사이에 있으면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헤아린다.” 1964년 부르주의 문화원 개원식 때 드골 장군은 앙드레 말로가 “인간 정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알기를 원하고 알게 해주는 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적임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그를 칭찬한다. 그가 볼 때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옆에서 절대로 필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각각의 정치제도는 시민들의 열정을 일깨우기 위한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시민들은 전망도 없는 일상사 속에 빠져들 것이다. 앙드레 말로는 불꽃을 지니고 있다.” 그는 앙드레 말로를 만나면서 이 만남으로부터 그런 우정이나 그런 충실이 비롯되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나를 믿을 줄 알았다.” 이것은 상호적이었다. -355쪽

1970년 11월 9일 아침나절 내내 드골 장군은 평소대로 자기 사무실에서 『희망의 기억』 제2권 3장의 집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점심 식사 때 부인을 다시 보았다. 짧은 산책을 한 후, 그는 정원을 확장해 그곳에 많은 나무를 심고자 최근에 사들인 땅뙈기를 정리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마을의 농부를 맞이했다. 그 다음에 그는 사무실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오후 5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짧은 산책을 한 후 부인과 차를 마셨다. 그런 다음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서신을 교환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했다. 18시 30분경 식당에 있는 부인에게서 몇몇 주소들을 얻은 후 자기 사무실 덧문들을 닫았다. 그는 15분 후, 19시 15분경에 차려지는 저녁식사를 기다리면서 평소 카드 점치기를 하는 브리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갑자기, 19시 직전에 그는 소리를 외치더니 “오, 여기, 등이 아프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의자에 무너지기 전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그는 의식을 잃었다. -362쪽

어떤 사람들은 앙드레 말로가 드골 장군에 봉사하는 선택을 했다고 많이 비난했다. 그들은 그의 우정과 충실이 투쟁적 소설가와 반파시스트 투사로서의 영광을 고려할 때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에게 드골 장군을 위한 참여는 그의 투쟁의 연속에 불과했다. “[앙드레 말로가] 느끼고 방어하는 것과 같은 드골주의는 자유·형제애·권위라는 세 가지 요구에 부합한다. (……) 그가 보기에 드골주의는 진정한 자유의 지배가 이루어지게 해준다. (……) 그는 그것을 ‘자유를 위한 책임’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단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되고 결집한 시민들의 (……) 형제애로 규정한다. 끝으로 드골주의는 유일하게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고 모든 에너지가 함께 향해야 할 이상을 구현시킬 수 있는 권위가 전면에 존재하는 그 현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형제애는 한 지도자의 영도 아래 위대한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그렇게 앙드레 말로에게 드골주의는 나타난다.” -371쪽

1976년 8월부터 앙드레 말로는 화학요법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진척된 단계의 암에 걸려 있었다. 11월 15일, 그는 폐울혈 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크레테이유의 앙리 몽도르 의료센터로 옮겨졌다. 조그만 메모철에 그는 이렇게 갈겨썼다. “이와는 다른 식으로 되어야 할 텐데.” 그의 딸 플로랑스와 소피 드 빌모랭은 그의 머리맡에서 교대로 시중을 들었다. 그는 나아지는 것 같았다. 11월 22일 그는 폐 혈전증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23일 아침 6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이것은 끝이 없는 고역이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24일 베리에르의 작은 묘지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특별한 의식행사는 없지만 군중은 많았고 꽃들도 많았다. 두 개의 붉은 화관이 특별히 눈에 띄었다. 하나는 앙드레 말로가 드나들었던 라세르 레스토랑에서 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온 것이었다. 운집한 군중 한가운데는 알자스로렌 여단의 옛 부속사제였던 피에르 보켈 신부가 있었는데, 앙드레 말로는 그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380쪽

▣ 작가 소개

저자 :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
프랑스 정치외교 분야 엘리트의 산실인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을 졸업하고, 1999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파리와 뉴욕의 여러 법률사무소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 ‘뒤발 스탈라 & 아소시에’라는 법률사무소를 직접 개설하고 상법과 형법 분야 전문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파리 변호사협회 연수 담당 총무로 일하고 있다. 파리 정치대학에서 역사와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파리 제13대학에서 상법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201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클로드 모네와 조르주 클레망소: 하나의 역사, 두 개의 기질이 있다.

역자 : 변광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같은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폴 발레리 대학)에서 사르트르 연구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대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프랑스인문학 연구모임 ‘시지프’를 이끌고 있다.
저서로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등이 있고, 역서로는 레비나스 평전, 사르트르 평전, 마르셀 뒤샹 평전, 사르트르와 카뮈: 우정과 투쟁, 공공의 적들, 변증법적 이성비판,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등이 있다.

역자 : 김웅권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리모주 대학과 몽펠리에 3대학(폴 발레리 대학)에서 앙드레 말로의 소설 연구로 문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연구원과 학술연구교수, 한남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하였고, 프랑스에서 기획된 앙드레 말로 사전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 등 국내외 학술지에 앙드레 말로에 관한 논문 30여 편을 발표했으며, 앙드레 말로: 소설 세계와 문화의 창조적 정복(프랑스학회 출판 장려상 수상), 말로와 소설의 상징시학: 왕도 새로 읽기, 앙드레 말로의 문학 세계: 동서 정신의 대화 등의 저서와 프랑스에서 출간된 앙드레 말로 사전(공저)이 있다. 역서로는 상상의 박물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S/Z, 타자로서 자기 자신, 몽상의 시학, 재생산에 대하여, 파스칼적 명상, 행동의 구조, 순진함의 유혹 등 50여 권이 있다.

▣ 주요 목차

옮긴이 서문
서문

제1장 만남 : “우선 과거를……” 1945년 7월 18일
제2장 파리의 릴 출신 소년과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한 소년 1890/1901-1914
제3장 군인과 댄디 1914-1920
제4장 장교와 모험가 1920-1930
제5장 반항아와 투사 1930-1939
제6장 개종 1939-1945
제7장 신념의 길 1939-1945
제8장 동지들 1945-1958
제9장 권좌에의 복귀 1958-1962
제10장 창립자 반(!)장관과 문화 문제 1959-1969
제11장 권좌의 기간 1962-1969
제12장 1969년 12월 11일 목요일 마지막 만남
제13장 “비극적인 자매인 이 두 영혼은
서로가 빛과 그림자로 뒤섞여 함께 날아갔다”

출전 및 참고문헌
후기
감사의 말

작가 소개

목 차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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