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무인정권 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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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윤용혁
출판사항혜안, 발행일:2014/10/31
형태사항p.347p. 국판:23CM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84945197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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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삼별초를 둘러싼 모든 쟁점들을 종합, 정리하다
‘삼별초’는 13세기 고려의 몽골에 대한 유레없는 항전 역사의 키워드이지만, ‘반역’으로 낙인찍히면서 수백 년간 ‘잊혀진 역사’이기도 했다. 삼별초는 대 몽골전쟁 직전에 성립하여 몽골의 침입에 저항한 가장 중추적 집단으로 존재하였다가, 몽골의 고려 지배가 실현되면서 소멸된 운명적 존재였다. 삼별초의 수명은 44년, 그것은 고려의 항몽전쟁 43년 세월과 사실상 그대로 일치하고 있는 셈이다. 고려-몽골간 여몽전쟁과 삼별초 관련 연구 전공자인 저자 윤용혁 교수는 이 삼별초에 대해 논란이 되었던 여러 쟁점들을 정리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삼별초를 어떻게 위치해야 할 것인지를 이 책에서 다루었다.

우선 저자는 몽골전란을 1231년 몽골군 1차 침입과 강화천도에서부터 1281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까지의 ‘50년 전쟁’이었다고 규정한다. 이 기간 중 몽골의 고려 침입은 흔히 6차에 걸친 과정이지만, 대소 11회에 걸친 것이었고, 이는 삼별초의 흥망과 겹치는 것이다.
삼별초는 몽골 침입 직전인 1230년 경에 조직되어, 항전의 중심 동력으로 기능하다, 고려-몽골간 화의에 의하여 1270년 해체의 명을 받는다. 이후 개경으로 돌아간 고려정부에 맞서 고려 영토의 남쪽 진도와 대양의 섬 제주도에까지 내려가 1273년 ‘산화’하는 44년의 극적 생애를 보내, 대몽항전의 전체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여몽전쟁은 고려 중앙군이 거의 전면에 나서지 않은 기이한 전쟁이었다. 군대가 싸웠던 전쟁이 아니라, 농민과 노비, 소민과 부곡민 등 한마디로 국가로부터 별다른 덕을 입지 못하던 민중의 전쟁이자, 전선의 앞뒤도 없이 끝없이 이어졌던 전쟁이었다. 처인성, 충주성 전투 등의 빛나는 항전사는 이들에 의해 써진 것이다.
그렇다면, 여몽전쟁에서 삼별초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삼별초의 전신이라 할 야별초는 1230년 최우 집권기에 성립하여, 1252년 좌, 우별초로 분리되고, 여기에 최항 집권기인 1255년 설치된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라는 명칭이 이루어졌다. 삼별초는 대개 지방 출신으로 농민 혹은 가세를 잃은 향리 신분 정도였다. 지방적 성격이 강하였던 것은, 장기간의 전란을 통하여 삼별초 부대가 지방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인원을 충원하였기 때문이다.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빠져나온 신의군의 경우는 특히 지방 출신이 절대적 비중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삼별초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신분층에서 무반으로 신분 상승을 기대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배중손에 대한 자료가 남겨져 있지 않은 이유의 하나도 그가 신분적으로 그렇게 드러난 가문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륙에서의 여몽전쟁은 산성에의 입보를 통한 수성전의 양상이 기본을 이루었다. 강화도에 거점을 둔 삼별초는 강도의 치안유지 및 강도 방호에 업무의 중심이 두어졌지만, 필요에 따라 본토에서의 전란에 투입되었다. 소병력의 단위부대가 수시로 파견되어 적을 기습하거나, 전황 정보를 수집하였고, 특히 전쟁이 장기화되자 삼별초군이 내륙 주민을 산성으로 옮기고 몽골의 공격에 대응하는 입보책을 직접 주관하기도 하였다.
1270년 최후의 무인정권 집권자인 임유무가 제거되면서, 고려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무인정권의 붕괴, 몽골에의 복속이라는 커다란 변화는 정치세력의 교체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반몽골 세력의 입지가 상실되자 삼별초는 이 같은 변화에 반발하였다. 몽골과의 전쟁에 의하여, 무인정권이라는 환경에 의하여 성립되고 성장해왔던 삼별초의 성격은 바뀐 정치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다. 삼별초를 중심한 세력은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 정통 고려정부의 계승을 자처하고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1271년 진도의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일부가 다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1273년까지 몽골에 저항하였다. 개경의 고려정부에 반대한 삼별초의 항전은 어떤 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삼별초의 숙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의 역사적 평가와 삼별초 유적
무인정권의 붕괴 후 삼별초는 조선시대까지 역사상 대표적인 ‘반역’의 집단으로서 규정되었다. 부정적인 삼별초 평가가 달라진 것은 700년 세월이 지난 일제 식민지시대부터였다. 왕조에 대한 반란으로서의 ‘삼별초의 난’에서 ‘민족항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해방이후 남북한 모두에게 ‘민족항전’이라는 삼별초에 대한 이런 새로운 평가는 정론으로 자리 잡았다. 북한에서 삼별초는 ‘인민들의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항전의 최상급의 사례로 지금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삼별초는 민주화운동이 강화되던 1980년대 이후, 점차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삼별초는 무인정권에 저항하는 농민을 압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친위군대라거나, ‘5공’을 성립시킨 ‘정치군인 집단’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방적 시각이어서 과거 삼별초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고 신화화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정하지 않은 평가이다.
삼별초는 13세기 ‘몽골의 시대’를 반영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은 13세기에 몽골의 군사적 압박이라는 공통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금과 송이 차례로 몽골의 영토가 되고 그 터 위에 원제국이 수립되었으며, 일본은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군사적 침공에 의하여 큰 충격을 받았다. 1273년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진압한 고려-몽골 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2차에 걸쳐 일본 침략전에 투입되었다. 그 사이 1279년 남송은 몽골에게 멸망하였다. 일본열도를 제외한 동아시아 각국은 13세기말 ‘팍스몽골리카’로 차례로 편입된 것이다. 이같은 몽골제국의 확대과정에서 삼별초는 가장 치열하게 그 흐름에 저항했던 무력 집단이었다. 아울러 삼별초의 종말은 고려후기 이후 반외세의 주체적 정치집단의 소멸,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해양(海洋)의 시대’의 종말과 ‘해금(海禁)의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삼별초 종말 후 한국이 ‘해양무역국가’로 다시 서기까지는 무려 7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삼별초는 750년이 지난 오늘날 강화도성, 진도의 용장성, 제주 항파두성 등 ‘역사 유적’으로 남겨져 있다. 역사로서의 삼별초를 우리가 대면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이 ‘유적’이라는 점에서 삼별초 유적의 의미는 각별하다.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항전의 역사는 지워지고 감추어지면서 삼별초에 관련된 많은 자료 역시 멸실되어버렸다. 삼별초 자료는 거기에 더하여 왕조 권력에 의하여 ‘반란’으로 낙인찍은 단편적 사실만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고려의 대몽항전, 삼별초에 대한 구체적인 전투와 항전의 현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여몽전쟁사를 문헌자료 이외에 보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갖게 한다.
앞으로 고려-몽골의 여몽전쟁에 대한 연구는 문헌적 검토 이외에 전투의 현장을 포함하는 고고학적 작업을 더 시야에 두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삼별초 관련 유적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13세기의 치열하였던 고려의 대몽항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역사적 의미이다.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는 그 역사적 의미만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둘째로 삼별초 관련 유적은 단순히 역사적 의미만이 아니라, 성곽과 건물터 등 구체적인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강화도-진도-제주도의 역사문화유산 혹은 자연유산, 관광자원을 삼별초라는 키워드로 엮어 확산할 수 있는 여지도 있기 때문에, ‘삼별초’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존재를 넘어 문화콘텐츠로서의 무궁무진한 효용을 담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곳곳에는 저자가 수없이 답사한 삼별초 유적 현장의 과거, 현재의생생한 모습들이 담겨있다. 삼별초가 ‘잊혀진 역사’로 회귀되지 않고 보다 거시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분투하는 저자의 바쁜 발품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 작가 소개

저자 : 윤용혁(尹龍爀)
1952년 목포에서 출생하여 광주고등학교와 공주사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쓰쿠바(筑波)대학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각 1년 간 연구교수를 하였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공주대의 박물관장?도서관장?대학원장?문화유산대학원장, 그리고 호서사학회장, 한국중세사학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고려 대몽항쟁사 연구』(1991),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2000), 『충청 역사문화 연구』(2009),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2010), 『여몽전쟁과 강화도성 연구』(2011)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제1장 13세기 동아시아사와 삼별초
1. 역사적 존재로서의 삼별초
1) 삼별초가 태어나다 | 2) 벗어날 수 없었던 정치적 굴레 | 3) 삼별초, 조직과 규모 | 4)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
2. 몽골 침입, 어떻게 전개되었나
1) 13세기는 몽골의 시대 | 2) ‘한몽관계 8백 년’ | 3) 50년을 끌었던 몽골 전란
3. 삼별초와 삼별초 유적
1)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 삼별초 | 2) 삼별초와 21세기 동아시아 세계 | 3) 유적으로 살아 있는 삼별초
제2장 강화도성과 삼별초
1. 강도, 40년 항전의 거점
1) 몽골이 공격하지 못한 섬 | 2) 도시건설과 ‘간척’이 함께 진행되다 | 3) 강화도의 삼별초
2. 풀어야 할 과제, 강도 고려 궁궐 71
1) 전란기의 도읍, 강도 | 2) 고고학적 검토의 경과 | 3) 궁궐은 어디에? | 4) 섬 안의 섬, ‘강화도령’ 고종
3. 강화 도성의 성곽
1) 강도 성곽에 대한 논의 | 2)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강도 중성 | 3) 강화도의 산성들
4. 선원사?참성단, 그리고 대장경
1) 선원사, 위치는 맞는가 | 2) 마니산 참성단과 몽골 전란 | 3) 팔만대장경을 만들다
제3장 산성에 입보하며 30년
1. 여몽전투의 현장, 산성
1) 산성에서 전쟁 치르기 | 2) 중세 성곽사에서 몽골 전란의 의미 | 3) 입보 추진에 투입되는 삼별초
2. 북계, 고려를 지키는 방루
1) 여몽전쟁 최초 격전지, 철주성 | 2) 여몽전쟁 최대 공방지, 귀주성 | 3) 자주성을 지켜낸 순천 자주성 | 4) 중앙군이 안주했던 안주성
3. 항전의 거점이 된 현장
1) 살리타이 불운의 현장, 용인 처인성 | 2) 제2의 귀주대첩, 안성 죽주성 | 3) 지역민의 입보 항전, 아산 성안말 산성 | 4) ‘충주성’은 대림산성인가
4. 깊어지는 전쟁, 산악지역의 입보성
1) 강변의 비극, 춘천 봉의산성 | 2) 쟈릴타이를 꺾은 상주 백화산성 | 3) 호남 제일의 보장처, 장성 입암산성 | 4) 한계점에 이른 여몽전쟁, 인제 한계산성
제4장 삼별초와 진도
1. 삼별초, 강도에서 진도로
1) 무인정권을 무너뜨린 삼별초 | 2) “나라를 지키려는 자는 모이라” | 3) 남으로 내려가는 길 | 4) 새로 구축되는 대몽골 방어선
2. 또 하나의 ‘고려’ 정부가 수립되다
1) 준비된 거점, 진도 | 2) 국제적 연대를 추구하다 | 3) 화약무기가 투입된 전투 현장 | 4) 배중손은 변절하였나
3. 진도 삼별초 유적
1) 용장성의 궁궐터 | 2) 용장산성, 언제 쌓았나 | 3) 온왕과 삼별초 유적 | 4) 벽파항과 진돗개
제5장 해상세력으로서의 삼별초와 서, 남해 도서
1. 여몽전쟁과 연안 도서
1) 강도를 뒷받침한 조운시스템 | 2) 서해안의 침몰선 | 3) 조운로에서 확인된 삼별초 자료
2. 섬으로의 입보책과 해상 전투
1) 고려의 해도입보책 | 2) 몽골군의 해상 전투 경험 | 3) 전란기의 삶터, 연안의 도서
3. 완도의 삼별초 민중영웅
1) 완도의 민중영웅 송징 | 2) 장보고가 몰아낸 송징 | 3) 완도 삼별초와 법화사
4. 유존혁의 남해도 삼별초
1) 남해 삼별초와 유존혁 | 2) 남해도의 삼별초 거점 | 3) 삼별초 유적, ‘장군터’
제6장 삼별초와 탐라, 항파두성
1. 탐라 거점기 삼별초의 활동
1) 삼별초의 제주도 차지하기 | 2) 신화적 지도자 김통정 | 3) 삼별초의 ‘탐라 해상왕국’ | 4)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2. 마지막 항몽 거점, 항파두성
1) ‘최후의 진지’ 항파두성 | 2) 성 위로 말이 달렸다? | 3) 해안을 두른 환해장성 | 4) 항파두성 주변의 관련 유적
3. 벼랑 위의 삼별초
1) 삼별초의 최후 | 2) 죽은 자와 산 자 | 3) 오키나와의 ‘계유년’ 고려기와 | 4) 끝나지 않은 전쟁, ‘50년 몽골 전란’
삼별초 관련 연표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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