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번쯤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다투어 보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이 동물들 간의 관계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이들이 모두 ‘동물의 왕’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왕은 오직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따라서 진정한 동물의 왕이 누구인가를 놓고 벌였던 그 논쟁은 동물들에게 위계와 특성을 부여하여 동물들의 세계에 일정한 질서를 구축하려는 나름의 문화적 인식의 형성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전통문화와 서구문화 사이의 충돌이 상징체계 안에서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반도의 산야에서 동물의 왕으로 군림해 왔던 호랑이와 외래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사자와의 싸움은 점차 사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듯하다. 실제 두 동물의 결투 결과가 어떠하든 전설에 등장하는 호랑이보다는 《밀림의 왕자 레오》나 《라이언 킹》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달되는 ‘동물의 왕’ 사자에 관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갈수록 호랑이에게는 왕으로서의 위엄보다는 거칠고 야성적인 외톨이 강자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이처럼 동물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구성물이다. 우리는 우화나 전설,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동물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동물들에 관한 특정한 인식을 형성한다. 그래서 어떤 동물을 한 번도 보거나 접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동물에 대한 일정한 가치판단이나 이미지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 나타난다.
동물도 역사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미셸 파스투로는 “자연사가 일종의 특정한 형태의 문화사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유럽에 서식했던 동물들 가운데 가장 힘센 포식자였던 곰을 소재로 동물에 관한 유럽의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추적한다. 그가 곰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우리에게 호랑이가 그렇듯이 서구의 전통에서는 그 동물이 사자 이전의 전통적인 왕이었으므로 ‘동물의 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에서 동물이 주제가 되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동물은 경제와 문화, 종교와 상징 등 역사의 중요한 주제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미셸 파스투로는 이 책에서 동물이 어떻게 역사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입증한다. 그의 이러한 개척적인 연구는 창의적인 연구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해 역사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세사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1947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유럽의 상징사 연구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이루었는데, 문장·인장·이미지들을 대상으로 문장학과 색의 역사 등 역사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대중들에게 흥미롭고 쉽게 전달하는 저술가로도 이름이 높아 지금까지 40여 권의 저술을 출간했다. 한국에서도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블루, 색의 역사》, 《색의 비밀》 등 다수의 저작이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최근에는 동물의 역사라는 주제로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이 책 《곰, 몰락한 왕의 역사》로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대중교양과 중세사 연구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책을 선정해 수여하는 제1회 중세 프로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자가 언제나 동물의 왕은 아니었다
모든 문화는 자신의 역사에서 한번쯤은 ‘동물의 왕’을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동물은 우화와 전설, 휘장과 같은 모든 종류의 상징들에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우월함을 지니며 신앙과 숭배, 제의의 중심부에 놓인다.
오늘날 서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에서 ‘동물의 왕’이란 칭호를 받는 동물은 사자이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13세기부터는 사자가 동물의 왕으로서 상징체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나타났다. 13세기의 백과사전들에서 사자는 ‘동물의 왕(rex animalium)’이라고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왕의 덕목인 힘과 용기·관대함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시리즈 문학인 《여우이야기》에서도 사자는 왕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사자가 언제나 왕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자는 유럽의 숲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동물이었으므로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북부 유럽 사회들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원형경기장에서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들여온 사자의 결투를 즐기던 로마인들에게도 사자는 왕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오히려 유럽의 많은 지역들에서는 수천 년 동안 곰이 사자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동물의 왕으로 숭배되었다. 곰에 대한 숭배는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듯이 고대에 북반구 지역들에서 폭넓게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아이누인과 시베리아의 다양한 원주민들, 스칸디나비아의 라플란드인, 캐나다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등에게서 곰 숭배의 전통이 발견된다.
고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문화권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서 동물의 왕은 곰이었다. 무적의 야수이자 숲의 주인, 힘과 용기의 화신인 곰은 지배자와 전사의 표상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곰, 동물의 왕이자 왕의 동물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기독교화하기 이전까지의 곰 숭배는 고대와 중세의 기록들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곰은 동물과 인간세계 사이에 위치한 특별한 존재로 숭배되었고, 인간의 조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곰에 관한 수많은 금기들이 생겨났는데, 특히 많은 사회들에서 그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게르만인들은 곰의 털빛을 나타내는 ‘갈색(bher, berun)’이란 말로 곰을 불렀다. 오늘날 영어에서 곰을 나타내는 ‘베어(bear)’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켈트인들은 ‘남자(matu)’라는 말로, 슬라브인들은 ‘꿀을 먹는 자’, ‘꿀 도둑’ 등으로 곰을 표현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라플란드인들은 ‘할아버지’, ‘선조’, ‘숲의 노인’, ‘털북숭이 노인’, ‘모든 것을 듣는 자’ 등으로 곰을 나타냈다. 이렇듯 곰을 조심스럽게 완곡한 표현으로 바꿔 부른 것은 곰에 대한 두려움과 이들 사회에서 곰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을 보여준다.
곰은 특히 전사와 지배자들에게 숭배되었다. 전사들은 독특한 의식으로 곰이 지닌 힘과 용기를 자신에게 가져오려고 했으며, 왕들과 족장들은 곰을 자신들의 무기와 문장에 새겨 넣어 그 힘을 붙잡아 두려 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영웅담과 전설에는 고대의 전사들이 야수와 같은 용맹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곰의 피를 마시거나, 곰의 피로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곰 가죽을 쓰고 전쟁에 나섰다. 이들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웠던 자들이 베르세르키르(Berserkir)이다. 그들은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곰으로 변했다고 여겼으며 어떤 두려움이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이 사회들에서는 곰과의 일대일 결투는 성인전사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전사로서의 남다른 자질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이런 전통은 이 사회들이 기독교화한 뒤에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는데, 중세의 연대기와 전설들에서는 곰과 싸워 이긴 뒤에 지배자나 왕으로 영광을 누린 영웅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고대에 특별한 존재로 숭배되던 곰은 왕의 동물이기도 했다. 켈트·게르만·스칸디나비아·발트·슬라브 등 유럽 북부 어디에서나 곰은 권력의 상징이자 통치의 표상으로 나타났다. 왕들은 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동물원에 여러 마리의 곰들을 보유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중세 동물원은 부유함과 권력을 나타내기 위한 정치적 도구였다. 중세 초 동물원에서 곰은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으며 12세기까지도 모든 왕실과 군주의 동물원은 여러 마리의 곰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곰은 왕이 다른 왕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왕가의 혼수품이나 평화협정을 위한 선물 목록에도 곰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곰, 인간의 친족이자 조상
그리고 곰은 인간과 가장 닮은 존재로 여겨졌다. 실제로 곰은 인간과 유사한 점이 많은 동물이다. 다른 네발짐승들과 달리 직립할 수 있으며 상체와 하체가 구분되는 겉모습도 사람과 흡사하다. 그리고 걸을 때는 뒤꿈치를 포함해 발바닥 전체로 땅을 딛는다. 행동도 사람과 유사한 점이 많았고 가죽을 벗기면 인간의 몸과 비슷했기 때문에 곰 고기를 먹는 것이 식인으로 여겨졌다. 심지어는 곰이 동물이 아니라 저주에 걸려 곰 가죽을 뒤집어쓰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세의 동물지들도 곰과 인간의 유사성을 즐겨 강조했는데, 특히 곰이 사람처럼 암컷과 수컷이 서로 얼굴과 배를 마주한 채 짝짓기를 한다는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1세기 로마의 학자인 플리니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이로부터 곰과 인간의 친족성을 강조한 수많은 믿음과 전설·이미지들이 생겨났다. 수컷 곰은 인간 여성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여겨졌다. 수곰이 인간 여성을 납치하고 강제로 범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곰인 존재가 태어나는 이야기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곰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존재들은 언제나 용맹한 전사이자 명망 있는 가문의 시조가 되었는데,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의 왕가들은 경쟁적으로 자신들이 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곰에 대한 숭배의 흔적은 신화나 어원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곰은 위대한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상징이었다. 아르테미스란 이름 자체도 곰을 가리키는 인도유럽어 어근(‘art-’, ‘urs-’ 등)에서 비롯된 것인데,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의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지명도 ‘곰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2세기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는 고대 아르카디아인들이 곰 가죽을 쓰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두이나 여신이나 알프스 지방에서 야생동물의 수호자로 숭배되던 안다르타 여신, 아르티오 여신 등도 아르테미스 여신과 마찬가지로 곰 숭배와 연관되어 있다. 이 밖에도 게르만과 스칸디나비아에는 곰과 연관된 이름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는데, 북유럽에서 전사들과 천둥, 번개의 신은 모두 ‘곰-신’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이름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화한 이후에도 라틴어의 형태에 맞추어 변화한 채 세례명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세문학의 대표적인 영웅 가운데 하나인 그 유명한 아서 왕의 이름도 곰을 나타내는 어근에서 비롯되었다. 아서 왕 전설의 일부 이야기에는 왕이 마치 곰처럼 두 팔로 끌어안아 상대를 죽이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고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아서 왕 전설이 ‘곰-왕’이나 ‘곰-신’ 숭배에서 비롯되었다가 나중에 전설적인 군주의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한다.
곰은 왜 사자에게 동물의 왕 자리를 빼앗겼을까
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지배자와 전사의 표상, 극한의 야성과 강력한 성욕의 상징, 인간의 친족이거나 조상, 존경과 숭배의 대상, 수많은 이교 제의의 주인공, 젊은 처녀와 소녀들의 연인인 곰은 교회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형태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곰 숭배는 이교도들의 개종을 방해했다. 알프스에서 발트 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곰은 그리스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곰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곰을 동물의 왕 자리와 제단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5세기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부터 시작된 교회의 오랜 싸움은 서기 1천년이 지나면서야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고대 곰 숭배의 마지막 잔재들이 제거되고, 동방의 전통에서 비롯된 이국적인 동물인 사자가 유럽 전역에서 곰이 차지하고 있던 동물의 왕 자리를 완전히 빼앗으면서 끝이 났다.
그 기간 동안 사제와 신학자들은 전쟁에서 이기려고 온갖 방법들을 동원했다. 교회는 곰을 토착동물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동물로 여겼고, 심지어 악마의 창조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체계적인 사냥을 통한 물리적 제거, 다수의 성인들을 내세운 상징적 정복, 문헌·이미지·설교를 동원한 악마화 작업 등을 통해서 곰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전승과 믿음들을 뿌리 뽑으려 했다.
교회는 인간과 가장 닮은 존재로 여겨지던 동물을 기괴하고 혐오스런 존재로 바꾸기 위해 곰을 악마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4세기에서 5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이러한 움직임은 본격화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곰은 악마”라고 선언하여 곰에 관한 기독교 상징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곰은 야만과 난폭함·잔인성을 상징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악마의 이미지도 곰처럼 묘사되었다.
중세에는 색이 어두운 동물들은 밤이나 죽음과 관계된 불길하고 해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갈색은 검은색에 지옥의 불길 색깔이 합쳐진 것으로 여겨져 검은색 동물보다 더 불길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서는 털이 동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악마의 이미지에서도 그의 야만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위협적인 이빨이나 발톱, 뿔이 아니라 털이었다. 그래서 온몸이 거친 갈색 털로 뒤덮여 있는 곰은 가장 야수적이고 악마적인 동물로 여겨졌다.
교회는 곰의 신체뿐 아니라 습성에도 수많은 악덕을 덮어씌웠다. 교부들의 문헌과 참회규정서, 동물학 서적 등은 곰에게 폭력과 분노, 잔인함, 탐식, 탐욕, 음욕, 게으름, 무절제 등의 악덕을 부여했다. 곰은 악마의 상징이자 도구, 심지어는 악마 그 자체로 여겨졌다. 곰은 분노에 차 있고, 음탕하고, 식탐이 많으며, 질투가 심하고, 게으른 동물로 묘사되었다.
곰을 순종적이고 길들여진 동물로 묘사하여 곰을 상징적으로 몰락시키기 위한 작업도 함께 추진되었다. 성인들이 어떻게 덕과 능력으로 곰을 물리치고 복종시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인전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성인들은 곰의 폭력성을 길들이고, 명령을 내리고, 복종시키고, 일을 하게 만든다. 그는 야수를 가축으로 바꾸고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도 한다. 성인전과 도상, 설교를 통해 널리 퍼져간 이런 이야기들은 북유럽 지역과 산간지방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교적인 곰 숭배에 맞서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교회는 곰 숭배와 관련된 기념일과 의례들을 성인들의 축일로 대체하여 이교 숭배의 잔재들을 제거하려 했다. 곰에 대한 숭배 의식은 9월과 곰의 동면을 전후로 한 11월에서 2월 사이에 몰려 있었는데, 교회는 곰과 관련된 성인들의 축일로 그것들을 대체해갔다.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 축일의 거대한 연결망은 옛 로마와 이교의 달력을 완전히 잠식해 들어가서 이교의 신들과 신화적 존재들, 자연과 동물들에게 바쳐졌던 숭배를 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르만 국가들에서는 곰 자체를 없애려는 대량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게르만 지역에서 곰을 학살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 살육은 이교 숭배의 근절이라는 폭넓은 정책의 일부였다. 곰은 산악지대인 프랑크 왕국의 동부와 북동부로 이동했는데, 그 뒤 개간과 삼림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으면서 더 산간지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곰의 몰락과 사자의 대관식
곰을 상대로 벌인 교회의 오랜 싸움은 서기 1천년이 지나면서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곰은 우화와 속담, 도상 등에서 조롱과 굴욕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축제나 장터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 되었다. 곰은 사로잡혀 재갈이 물리고 쇠사슬이 채워진 채 조련사와 곡예사들에 의해 여기저기의 성과 광장, 시장으로 끌려 다녔다. 이것은 곰의 지위를 더욱 떨어뜨리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동물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에 반대했지만 곰을 망신시키는 것은 예외로 했으며 전시하는 일도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곰의 폐위는 서서히 일어났으며 결코 완전하지도 않았다. 곰은 여전히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왕실동물로서의 옛 지위를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유럽의 숲들에서 숭배를 받던 위대한 야수도, 전사들의 신도 아니었다. 12세기에서 13세기로 넘어갈 때 곰은 결국 폐위되었고, 교회는 목적을 이루었다. 이제 곰은 사슴이나 멧돼지처럼 단지 커다란 사냥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곰을 동물의 왕 자리에서 끌어내린 교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더 통제하기 쉬운 다른 야생동물을 그 자리에 대신 앉히려 했다. 동방에서 온 동물의 왕이자 성서와 그리스·로마의 전통 안에 있던 사자가 바로 교회가 지지하는 새 후보였다. 유럽의 숲에는 존재하지 않고 문자의 전통으로만 전해지는 사자는 곰보다 훨씬 통제하기 쉬웠다. 하지만 기독교 상징체계의 전통에서 사자는 양면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서에서 사자는 이스라엘의 적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잔인하고 나쁜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장 용감한 동물이자 강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선한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세 초기의 기독교 상징에서는 사자가 이런 양면적인 존재로 표현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11세기와 12세기 무렵에 ‘나쁜 사자’와 ‘선한 사자’를 완전히 분리시켰다.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타고난 본성이 사악한 ‘나쁜 사자’는 레오파르두스(Leopardus)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표범을 가리키는 레오파드(Leopard)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사자(Leo)와 전설의 동물인 파르두스(pardus)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여겨진 레오파르두스는 사자의 적이자 영웅들을 죽음의 길로 이끄는 악한 존재였다. 이처럼 사자의 나쁜 측면을 완전히 별도의 이름과 특성을 지닌 존재로 분리함으로써 사자는 정의롭고 관대한 성격을 지닌 동물의 왕으로 온전히 즉위할 수 있었다. 사자는 기독교 상징체계에서 동물의 왕이자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제국을 사방으로 넓혀갔다.
곰이 몰락하고 사자가 동물의 왕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2세기까지는 기사가 되려는 포부를 품은 젊은 전사가 자신의 힘과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곰과 싸웠다. 그러나 13세기의 이야기들에서는 곰이 아니라 사자나 용과 싸웠다. 성인이나 성녀를 야수가 살려주는 이야기들에서도 이제는 곰이 아니라 사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문헌과 도상에서도 곰의 존재는 갈수록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도처에서 다른 동물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악마의 동물지에서도 곰은 더 이상 맨 앞에 서지 못했다. 악마는 염소, 늑대, 개, 올빼미와 같은 동물로 변장하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으며, 마녀집회에서도 곰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13세기 이후에는 동물원에서도 더 이상 곰은 왕의 동물이 아니었다. 곰을 선물하는 일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되었다. 군주의 동물원이 되려면 이제는 곰이 아니라 사자가 있어야 했다. 군주들 간에 주고받는 선물로도 사자가 사용되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중반 사이에 편찬된 『여우이야기』 시리즈는 곰의 몰락에 관한 확실한 증거이다. 이 이야기들에서 동물들은 봉건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곰은 언제나 여우에게 끊임없이 골탕을 먹으며 경멸과 비웃음을 사는 존재로 묘사된다. 중세에 폭넓게 읽힌 이 이야기들은 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켜 곰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셸 파스투로는 “서구 유럽에서 곰 문화사는 『여우이야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한편, 곰의 육중함과 비대함에 대한 조롱과 경멸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비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치체계의 변화와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1세기까지만 해도 왕이나 지배자들은 몸집이 크고 뚱뚱할 때 더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13세기 이후에는 뚱뚱한 것은 추하고 저속하고 게으르고 교양 없고 아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날씬함과 호리호리함, 음식과 술이 주는 쾌락에 대한 절제가 군주의 덕목이 되었다.
욕망과 상상 속에서의 곰
그러나 이러한 몰락이 상상의 세계에서 곰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입지가 줄어들수록 표상과 상상의 영역에서 곰의 자리는 더 커졌다. 서식지가 파괴되어 많은 지역들에서 사라진 곰은 점차 허구의 동물, 이국적인 존재, 꿈과 환상의 대상으로 되어갔다. 그래서 곰은 왕조나 귀족의 상징이나 표장으로 나타났고, 공상적이거나 유희적인 존재가 되었다.
수컷 곰의 야성적인 힘, 무성한 털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신비로운 매력을 발휘했다. 여기에서 여성과 곰, 여성과 야생인간이라는 예술적 주제가 생겨났다. 한쪽에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하얀 아름다움이 있었고, 반대쪽에는 두껍고 덥수룩하고 짙은 털이 있었다. 요컨대 미녀와 야수였다. 14~15세기에는 미녀와 야수를 소재로 한 문헌과 도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에도 그런 전승에 영향을 받은 문학작품들이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곰은 인형이나 장난감, ‘쿵푸 팬더’나 ‘곰돌이 푸’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고 있다.
이처럼 미셸 파스투로는 곰에서 사자로 동물의 왕이 교체된 오랜 문화적 변동의 과정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만이 아니라 동물 세계와 관련된 모든 가치와 인식 체계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 밝혀낸다. 따라서 곰이라는 동물이 유럽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지만, 이 책의 초점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에 있다. 동물이 어떤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 사회의 다양한 특성들과 구조들, 행동 양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도 곰은 특별한 동물이었다. 오랜 세월 호랑이가 동물의 왕으로 여겨졌지만 그 동물이 조상이나 친족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곰은 우리에게도 조상이나 친족으로 여겨진 유일한 동물이다. ‘단군신화’만 하더라도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나가 동물의 세계로 돌아갔지만 곰은 인간과 하늘을 잇는 매개자로 남는다. 곰나루 이야기를 비롯한 몇 되지 않는 곰에 관한 전설에서도 곰은 인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모성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곰은 미셸 파스투로가 전하는 유럽 사회의 현실보다도 훨씬 더 참혹하고 우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지난 2013년 11월 좁은 우리에 갇힌 채 곰 사육농가의 항의시위에 끌려나온 반달가슴곰의 처량한 모습이 각종 매체에 보도되었다. 그 모습은 한때 이 땅에서도 인간의 친족이자 조상으로 숭배되었을 그 동물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곰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분석하면서 미셸 파스투로가 이끌어낸 다음과 경고는 귀 기울일 만하다. “인간은 그의 선조이자 동족, 첫 번째 신인 곰을 죽임으로써 오랜 옛날 자신에 대한 기억을 죽였다. 이는 사실 상징적으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였다.”
▣ 작가 소개
저 : 미셸 파스투로
Michel Pastoureau
1947년 파리에서 태어난 미셸 파스투로는 소르본대학과 국립고문서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72년에 국립고문서학교에서 중세 문장과 관련된 동물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 뒤 국립도서관 메달 진열실에서 학예관으로 일했으며, 1982년에 고등연구실천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중세 상징사를 강의했다. 또한 20년간(1987-2007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객원교수를 지내며, 유럽 사회의 상징의 역사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했다. 다양한 학술활동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최근 수년 동안에는 많은 유럽 대학들, 특히 로잔대학과 제네바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랑스학사원(금석학·문학 아카데미)의 통신원이며, 프랑스문장학및인장학협회 회장이다.
미셸 파스투로의 초기 연구들은 그의 논문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문장, 인장 그리고 이미지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 연구들은 문장학을 온전한 학문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그후 1980년대부터는 특히 색의 역사 및 이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회화사와 관련된 것들을 포함하여 이 분야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정립되어야 했으며, 그는 회화사 분야에 관한 최초의 국제적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중세 동물의 역사, 동물우화집, 동물학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
역사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전문적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를 대중들에게 흥미롭고 쉽게 전달하는 저술가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저술활동을 활발히 펼쳐 지금까지 40여권의 책을 펴냈는데, 한국에서도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블루 색의 역사: 성모 마리아에서 리바이스까지』, 『색의 비밀,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곰, 몰락한 왕의 역사』 등 다수의 저작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역자 : 주나미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중세사를 전공했다. 「카타르파 교리의 특징과 그 현실적 의미」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양 중세 성모마리아 숭배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두산백과사전의 역사·신화 분야 전문 집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동물과 마주한 역사가
제1부. 숭배 받는 곰 - 구석기시대에서 봉건시대까지
태초의 신?
동물의 왕
인간의 친족
제2부. 싸우는 곰 - 카롤루스대제에서 루이 성왕까지
야수보다 강한 성인
악마가 된 곰
사자의 대관식
제3부. 폐위당한 곰 - 중세 말에서 현재까지
굴욕을 당하는 동물
군주들의 욕망, 여인들의 환상
산에서 박물관으로
곰의 설욕
원주
문헌사료
참고문헌
찾아보기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번쯤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문제를 놓고 친구들과 다투어 보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이 동물들 간의 관계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이들이 모두 ‘동물의 왕’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왕은 오직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따라서 진정한 동물의 왕이 누구인가를 놓고 벌였던 그 논쟁은 동물들에게 위계와 특성을 부여하여 동물들의 세계에 일정한 질서를 구축하려는 나름의 문화적 인식의 형성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전통문화와 서구문화 사이의 충돌이 상징체계 안에서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반도의 산야에서 동물의 왕으로 군림해 왔던 호랑이와 외래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사자와의 싸움은 점차 사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듯하다. 실제 두 동물의 결투 결과가 어떠하든 전설에 등장하는 호랑이보다는 《밀림의 왕자 레오》나 《라이언 킹》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달되는 ‘동물의 왕’ 사자에 관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갈수록 호랑이에게는 왕으로서의 위엄보다는 거칠고 야성적인 외톨이 강자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이처럼 동물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구성물이다. 우리는 우화나 전설,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동물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동물들에 관한 특정한 인식을 형성한다. 그래서 어떤 동물을 한 번도 보거나 접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동물에 대한 일정한 가치판단이나 이미지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 나타난다.
동물도 역사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미셸 파스투로는 “자연사가 일종의 특정한 형태의 문화사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유럽에 서식했던 동물들 가운데 가장 힘센 포식자였던 곰을 소재로 동물에 관한 유럽의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추적한다. 그가 곰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우리에게 호랑이가 그렇듯이 서구의 전통에서는 그 동물이 사자 이전의 전통적인 왕이었으므로 ‘동물의 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에서 동물이 주제가 되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동물은 경제와 문화, 종교와 상징 등 역사의 중요한 주제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미셸 파스투로는 이 책에서 동물이 어떻게 역사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입증한다. 그의 이러한 개척적인 연구는 창의적인 연구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해 역사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세사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1947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유럽의 상징사 연구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이루었는데, 문장·인장·이미지들을 대상으로 문장학과 색의 역사 등 역사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대중들에게 흥미롭고 쉽게 전달하는 저술가로도 이름이 높아 지금까지 40여 권의 저술을 출간했다. 한국에서도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블루, 색의 역사》, 《색의 비밀》 등 다수의 저작이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최근에는 동물의 역사라는 주제로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이 책 《곰, 몰락한 왕의 역사》로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대중교양과 중세사 연구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책을 선정해 수여하는 제1회 중세 프로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자가 언제나 동물의 왕은 아니었다
모든 문화는 자신의 역사에서 한번쯤은 ‘동물의 왕’을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동물은 우화와 전설, 휘장과 같은 모든 종류의 상징들에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우월함을 지니며 신앙과 숭배, 제의의 중심부에 놓인다.
오늘날 서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에서 ‘동물의 왕’이란 칭호를 받는 동물은 사자이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13세기부터는 사자가 동물의 왕으로서 상징체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나타났다. 13세기의 백과사전들에서 사자는 ‘동물의 왕(rex animalium)’이라고 표현되기 시작했으며, 왕의 덕목인 힘과 용기·관대함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시리즈 문학인 《여우이야기》에서도 사자는 왕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사자가 언제나 왕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자는 유럽의 숲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동물이었으므로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북부 유럽 사회들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원형경기장에서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들여온 사자의 결투를 즐기던 로마인들에게도 사자는 왕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오히려 유럽의 많은 지역들에서는 수천 년 동안 곰이 사자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동물의 왕으로 숭배되었다. 곰에 대한 숭배는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듯이 고대에 북반구 지역들에서 폭넓게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아이누인과 시베리아의 다양한 원주민들, 스칸디나비아의 라플란드인, 캐나다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등에게서 곰 숭배의 전통이 발견된다.
고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문화권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서 동물의 왕은 곰이었다. 무적의 야수이자 숲의 주인, 힘과 용기의 화신인 곰은 지배자와 전사의 표상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곰, 동물의 왕이자 왕의 동물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기독교화하기 이전까지의 곰 숭배는 고대와 중세의 기록들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곰은 동물과 인간세계 사이에 위치한 특별한 존재로 숭배되었고, 인간의 조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곰에 관한 수많은 금기들이 생겨났는데, 특히 많은 사회들에서 그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게르만인들은 곰의 털빛을 나타내는 ‘갈색(bher, berun)’이란 말로 곰을 불렀다. 오늘날 영어에서 곰을 나타내는 ‘베어(bear)’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켈트인들은 ‘남자(matu)’라는 말로, 슬라브인들은 ‘꿀을 먹는 자’, ‘꿀 도둑’ 등으로 곰을 표현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라플란드인들은 ‘할아버지’, ‘선조’, ‘숲의 노인’, ‘털북숭이 노인’, ‘모든 것을 듣는 자’ 등으로 곰을 나타냈다. 이렇듯 곰을 조심스럽게 완곡한 표현으로 바꿔 부른 것은 곰에 대한 두려움과 이들 사회에서 곰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을 보여준다.
곰은 특히 전사와 지배자들에게 숭배되었다. 전사들은 독특한 의식으로 곰이 지닌 힘과 용기를 자신에게 가져오려고 했으며, 왕들과 족장들은 곰을 자신들의 무기와 문장에 새겨 넣어 그 힘을 붙잡아 두려 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영웅담과 전설에는 고대의 전사들이 야수와 같은 용맹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곰의 피를 마시거나, 곰의 피로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곰 가죽을 쓰고 전쟁에 나섰다. 이들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웠던 자들이 베르세르키르(Berserkir)이다. 그들은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곰으로 변했다고 여겼으며 어떤 두려움이나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이 사회들에서는 곰과의 일대일 결투는 성인전사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전사로서의 남다른 자질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이런 전통은 이 사회들이 기독교화한 뒤에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는데, 중세의 연대기와 전설들에서는 곰과 싸워 이긴 뒤에 지배자나 왕으로 영광을 누린 영웅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고대에 특별한 존재로 숭배되던 곰은 왕의 동물이기도 했다. 켈트·게르만·스칸디나비아·발트·슬라브 등 유럽 북부 어디에서나 곰은 권력의 상징이자 통치의 표상으로 나타났다. 왕들은 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동물원에 여러 마리의 곰들을 보유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중세 동물원은 부유함과 권력을 나타내기 위한 정치적 도구였다. 중세 초 동물원에서 곰은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으며 12세기까지도 모든 왕실과 군주의 동물원은 여러 마리의 곰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곰은 왕이 다른 왕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왕가의 혼수품이나 평화협정을 위한 선물 목록에도 곰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곰, 인간의 친족이자 조상
그리고 곰은 인간과 가장 닮은 존재로 여겨졌다. 실제로 곰은 인간과 유사한 점이 많은 동물이다. 다른 네발짐승들과 달리 직립할 수 있으며 상체와 하체가 구분되는 겉모습도 사람과 흡사하다. 그리고 걸을 때는 뒤꿈치를 포함해 발바닥 전체로 땅을 딛는다. 행동도 사람과 유사한 점이 많았고 가죽을 벗기면 인간의 몸과 비슷했기 때문에 곰 고기를 먹는 것이 식인으로 여겨졌다. 심지어는 곰이 동물이 아니라 저주에 걸려 곰 가죽을 뒤집어쓰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세의 동물지들도 곰과 인간의 유사성을 즐겨 강조했는데, 특히 곰이 사람처럼 암컷과 수컷이 서로 얼굴과 배를 마주한 채 짝짓기를 한다는 독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1세기 로마의 학자인 플리니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이로부터 곰과 인간의 친족성을 강조한 수많은 믿음과 전설·이미지들이 생겨났다. 수컷 곰은 인간 여성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여겨졌다. 수곰이 인간 여성을 납치하고 강제로 범해 반은 인간이고 반은 곰인 존재가 태어나는 이야기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곰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존재들은 언제나 용맹한 전사이자 명망 있는 가문의 시조가 되었는데,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의 왕가들은 경쟁적으로 자신들이 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곰에 대한 숭배의 흔적은 신화나 어원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곰은 위대한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상징이었다. 아르테미스란 이름 자체도 곰을 가리키는 인도유럽어 어근(‘art-’, ‘urs-’ 등)에서 비롯된 것인데,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의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지명도 ‘곰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2세기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는 고대 아르카디아인들이 곰 가죽을 쓰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두이나 여신이나 알프스 지방에서 야생동물의 수호자로 숭배되던 안다르타 여신, 아르티오 여신 등도 아르테미스 여신과 마찬가지로 곰 숭배와 연관되어 있다. 이 밖에도 게르만과 스칸디나비아에는 곰과 연관된 이름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는데, 북유럽에서 전사들과 천둥, 번개의 신은 모두 ‘곰-신’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이름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화한 이후에도 라틴어의 형태에 맞추어 변화한 채 세례명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세문학의 대표적인 영웅 가운데 하나인 그 유명한 아서 왕의 이름도 곰을 나타내는 어근에서 비롯되었다. 아서 왕 전설의 일부 이야기에는 왕이 마치 곰처럼 두 팔로 끌어안아 상대를 죽이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고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아서 왕 전설이 ‘곰-왕’이나 ‘곰-신’ 숭배에서 비롯되었다가 나중에 전설적인 군주의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한다.
곰은 왜 사자에게 동물의 왕 자리를 빼앗겼을까
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지배자와 전사의 표상, 극한의 야성과 강력한 성욕의 상징, 인간의 친족이거나 조상, 존경과 숭배의 대상, 수많은 이교 제의의 주인공, 젊은 처녀와 소녀들의 연인인 곰은 교회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형태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곰 숭배는 이교도들의 개종을 방해했다. 알프스에서 발트 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곰은 그리스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곰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곰을 동물의 왕 자리와 제단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5세기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부터 시작된 교회의 오랜 싸움은 서기 1천년이 지나면서야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고대 곰 숭배의 마지막 잔재들이 제거되고, 동방의 전통에서 비롯된 이국적인 동물인 사자가 유럽 전역에서 곰이 차지하고 있던 동물의 왕 자리를 완전히 빼앗으면서 끝이 났다.
그 기간 동안 사제와 신학자들은 전쟁에서 이기려고 온갖 방법들을 동원했다. 교회는 곰을 토착동물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동물로 여겼고, 심지어 악마의 창조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체계적인 사냥을 통한 물리적 제거, 다수의 성인들을 내세운 상징적 정복, 문헌·이미지·설교를 동원한 악마화 작업 등을 통해서 곰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전승과 믿음들을 뿌리 뽑으려 했다.
교회는 인간과 가장 닮은 존재로 여겨지던 동물을 기괴하고 혐오스런 존재로 바꾸기 위해 곰을 악마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4세기에서 5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이러한 움직임은 본격화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곰은 악마”라고 선언하여 곰에 관한 기독교 상징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곰은 야만과 난폭함·잔인성을 상징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악마의 이미지도 곰처럼 묘사되었다.
중세에는 색이 어두운 동물들은 밤이나 죽음과 관계된 불길하고 해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갈색은 검은색에 지옥의 불길 색깔이 합쳐진 것으로 여겨져 검은색 동물보다 더 불길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서는 털이 동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악마의 이미지에서도 그의 야만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위협적인 이빨이나 발톱, 뿔이 아니라 털이었다. 그래서 온몸이 거친 갈색 털로 뒤덮여 있는 곰은 가장 야수적이고 악마적인 동물로 여겨졌다.
교회는 곰의 신체뿐 아니라 습성에도 수많은 악덕을 덮어씌웠다. 교부들의 문헌과 참회규정서, 동물학 서적 등은 곰에게 폭력과 분노, 잔인함, 탐식, 탐욕, 음욕, 게으름, 무절제 등의 악덕을 부여했다. 곰은 악마의 상징이자 도구, 심지어는 악마 그 자체로 여겨졌다. 곰은 분노에 차 있고, 음탕하고, 식탐이 많으며, 질투가 심하고, 게으른 동물로 묘사되었다.
곰을 순종적이고 길들여진 동물로 묘사하여 곰을 상징적으로 몰락시키기 위한 작업도 함께 추진되었다. 성인들이 어떻게 덕과 능력으로 곰을 물리치고 복종시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인전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성인들은 곰의 폭력성을 길들이고, 명령을 내리고, 복종시키고, 일을 하게 만든다. 그는 야수를 가축으로 바꾸고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시키기도 한다. 성인전과 도상, 설교를 통해 널리 퍼져간 이런 이야기들은 북유럽 지역과 산간지방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교적인 곰 숭배에 맞서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교회는 곰 숭배와 관련된 기념일과 의례들을 성인들의 축일로 대체하여 이교 숭배의 잔재들을 제거하려 했다. 곰에 대한 숭배 의식은 9월과 곰의 동면을 전후로 한 11월에서 2월 사이에 몰려 있었는데, 교회는 곰과 관련된 성인들의 축일로 그것들을 대체해갔다.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 축일의 거대한 연결망은 옛 로마와 이교의 달력을 완전히 잠식해 들어가서 이교의 신들과 신화적 존재들, 자연과 동물들에게 바쳐졌던 숭배를 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르만 국가들에서는 곰 자체를 없애려는 대량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게르만 지역에서 곰을 학살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 살육은 이교 숭배의 근절이라는 폭넓은 정책의 일부였다. 곰은 산악지대인 프랑크 왕국의 동부와 북동부로 이동했는데, 그 뒤 개간과 삼림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으면서 더 산간지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곰의 몰락과 사자의 대관식
곰을 상대로 벌인 교회의 오랜 싸움은 서기 1천년이 지나면서 점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곰은 우화와 속담, 도상 등에서 조롱과 굴욕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축제나 장터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 되었다. 곰은 사로잡혀 재갈이 물리고 쇠사슬이 채워진 채 조련사와 곡예사들에 의해 여기저기의 성과 광장, 시장으로 끌려 다녔다. 이것은 곰의 지위를 더욱 떨어뜨리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회는 동물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에 반대했지만 곰을 망신시키는 것은 예외로 했으며 전시하는 일도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곰의 폐위는 서서히 일어났으며 결코 완전하지도 않았다. 곰은 여전히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왕실동물로서의 옛 지위를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유럽의 숲들에서 숭배를 받던 위대한 야수도, 전사들의 신도 아니었다. 12세기에서 13세기로 넘어갈 때 곰은 결국 폐위되었고, 교회는 목적을 이루었다. 이제 곰은 사슴이나 멧돼지처럼 단지 커다란 사냥감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곰을 동물의 왕 자리에서 끌어내린 교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더 통제하기 쉬운 다른 야생동물을 그 자리에 대신 앉히려 했다. 동방에서 온 동물의 왕이자 성서와 그리스·로마의 전통 안에 있던 사자가 바로 교회가 지지하는 새 후보였다. 유럽의 숲에는 존재하지 않고 문자의 전통으로만 전해지는 사자는 곰보다 훨씬 통제하기 쉬웠다. 하지만 기독교 상징체계의 전통에서 사자는 양면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서에서 사자는 이스라엘의 적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잔인하고 나쁜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장 용감한 동물이자 강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선한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세 초기의 기독교 상징에서는 사자가 이런 양면적인 존재로 표현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11세기와 12세기 무렵에 ‘나쁜 사자’와 ‘선한 사자’를 완전히 분리시켰다.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타고난 본성이 사악한 ‘나쁜 사자’는 레오파르두스(Leopardus)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표범을 가리키는 레오파드(Leopard)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사자(Leo)와 전설의 동물인 파르두스(pardus)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여겨진 레오파르두스는 사자의 적이자 영웅들을 죽음의 길로 이끄는 악한 존재였다. 이처럼 사자의 나쁜 측면을 완전히 별도의 이름과 특성을 지닌 존재로 분리함으로써 사자는 정의롭고 관대한 성격을 지닌 동물의 왕으로 온전히 즉위할 수 있었다. 사자는 기독교 상징체계에서 동물의 왕이자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제국을 사방으로 넓혀갔다.
곰이 몰락하고 사자가 동물의 왕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2세기까지는 기사가 되려는 포부를 품은 젊은 전사가 자신의 힘과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곰과 싸웠다. 그러나 13세기의 이야기들에서는 곰이 아니라 사자나 용과 싸웠다. 성인이나 성녀를 야수가 살려주는 이야기들에서도 이제는 곰이 아니라 사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문헌과 도상에서도 곰의 존재는 갈수록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도처에서 다른 동물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악마의 동물지에서도 곰은 더 이상 맨 앞에 서지 못했다. 악마는 염소, 늑대, 개, 올빼미와 같은 동물로 변장하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으며, 마녀집회에서도 곰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13세기 이후에는 동물원에서도 더 이상 곰은 왕의 동물이 아니었다. 곰을 선물하는 일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되었다. 군주의 동물원이 되려면 이제는 곰이 아니라 사자가 있어야 했다. 군주들 간에 주고받는 선물로도 사자가 사용되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중반 사이에 편찬된 『여우이야기』 시리즈는 곰의 몰락에 관한 확실한 증거이다. 이 이야기들에서 동물들은 봉건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곰은 언제나 여우에게 끊임없이 골탕을 먹으며 경멸과 비웃음을 사는 존재로 묘사된다. 중세에 폭넓게 읽힌 이 이야기들은 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켜 곰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셸 파스투로는 “서구 유럽에서 곰 문화사는 『여우이야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한편, 곰의 육중함과 비대함에 대한 조롱과 경멸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비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치체계의 변화와 동시에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1세기까지만 해도 왕이나 지배자들은 몸집이 크고 뚱뚱할 때 더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13세기 이후에는 뚱뚱한 것은 추하고 저속하고 게으르고 교양 없고 아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날씬함과 호리호리함, 음식과 술이 주는 쾌락에 대한 절제가 군주의 덕목이 되었다.
욕망과 상상 속에서의 곰
그러나 이러한 몰락이 상상의 세계에서 곰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입지가 줄어들수록 표상과 상상의 영역에서 곰의 자리는 더 커졌다. 서식지가 파괴되어 많은 지역들에서 사라진 곰은 점차 허구의 동물, 이국적인 존재, 꿈과 환상의 대상으로 되어갔다. 그래서 곰은 왕조나 귀족의 상징이나 표장으로 나타났고, 공상적이거나 유희적인 존재가 되었다.
수컷 곰의 야성적인 힘, 무성한 털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신비로운 매력을 발휘했다. 여기에서 여성과 곰, 여성과 야생인간이라는 예술적 주제가 생겨났다. 한쪽에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하얀 아름다움이 있었고, 반대쪽에는 두껍고 덥수룩하고 짙은 털이 있었다. 요컨대 미녀와 야수였다. 14~15세기에는 미녀와 야수를 소재로 한 문헌과 도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에도 그런 전승에 영향을 받은 문학작품들이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곰은 인형이나 장난감, ‘쿵푸 팬더’나 ‘곰돌이 푸’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고 있다.
이처럼 미셸 파스투로는 곰에서 사자로 동물의 왕이 교체된 오랜 문화적 변동의 과정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만이 아니라 동물 세계와 관련된 모든 가치와 인식 체계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 밝혀낸다. 따라서 곰이라는 동물이 유럽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지만, 이 책의 초점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에 있다. 동물이 어떤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그 사회의 다양한 특성들과 구조들, 행동 양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도 곰은 특별한 동물이었다. 오랜 세월 호랑이가 동물의 왕으로 여겨졌지만 그 동물이 조상이나 친족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곰은 우리에게도 조상이나 친족으로 여겨진 유일한 동물이다. ‘단군신화’만 하더라도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나가 동물의 세계로 돌아갔지만 곰은 인간과 하늘을 잇는 매개자로 남는다. 곰나루 이야기를 비롯한 몇 되지 않는 곰에 관한 전설에서도 곰은 인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모성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곰은 미셸 파스투로가 전하는 유럽 사회의 현실보다도 훨씬 더 참혹하고 우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지난 2013년 11월 좁은 우리에 갇힌 채 곰 사육농가의 항의시위에 끌려나온 반달가슴곰의 처량한 모습이 각종 매체에 보도되었다. 그 모습은 한때 이 땅에서도 인간의 친족이자 조상으로 숭배되었을 그 동물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과 곰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분석하면서 미셸 파스투로가 이끌어낸 다음과 경고는 귀 기울일 만하다. “인간은 그의 선조이자 동족, 첫 번째 신인 곰을 죽임으로써 오랜 옛날 자신에 대한 기억을 죽였다. 이는 사실 상징적으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였다.”
▣ 작가 소개
저 : 미셸 파스투로
Michel Pastoureau
1947년 파리에서 태어난 미셸 파스투로는 소르본대학과 국립고문서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72년에 국립고문서학교에서 중세 문장과 관련된 동물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 뒤 국립도서관 메달 진열실에서 학예관으로 일했으며, 1982년에 고등연구실천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중세 상징사를 강의했다. 또한 20년간(1987-2007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객원교수를 지내며, 유럽 사회의 상징의 역사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했다. 다양한 학술활동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최근 수년 동안에는 많은 유럽 대학들, 특히 로잔대학과 제네바대학에서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랑스학사원(금석학·문학 아카데미)의 통신원이며, 프랑스문장학및인장학협회 회장이다.
미셸 파스투로의 초기 연구들은 그의 논문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문장, 인장 그리고 이미지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 연구들은 문장학을 온전한 학문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그후 1980년대부터는 특히 색의 역사 및 이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회화사와 관련된 것들을 포함하여 이 분야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정립되어야 했으며, 그는 회화사 분야에 관한 최초의 국제적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중세 동물의 역사, 동물우화집, 동물학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
역사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전문적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를 대중들에게 흥미롭고 쉽게 전달하는 저술가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저술활동을 활발히 펼쳐 지금까지 40여권의 책을 펴냈는데, 한국에서도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블루 색의 역사: 성모 마리아에서 리바이스까지』, 『색의 비밀,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곰, 몰락한 왕의 역사』 등 다수의 저작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역자 : 주나미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중세사를 전공했다. 「카타르파 교리의 특징과 그 현실적 의미」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양 중세 성모마리아 숭배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두산백과사전의 역사·신화 분야 전문 집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동물과 마주한 역사가
제1부. 숭배 받는 곰 - 구석기시대에서 봉건시대까지
태초의 신?
동물의 왕
인간의 친족
제2부. 싸우는 곰 - 카롤루스대제에서 루이 성왕까지
야수보다 강한 성인
악마가 된 곰
사자의 대관식
제3부. 폐위당한 곰 - 중세 말에서 현재까지
굴욕을 당하는 동물
군주들의 욕망, 여인들의 환상
산에서 박물관으로
곰의 설욕
원주
문헌사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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