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조선의 민중은 언제부터 국민이 되었는가?
일본인 학자가 바라본 조선의 근대 국가화 과정
1919년 3.1 운동은 근대 조선의 대표적인 민중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백성들은 손에 태극기를 쥐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조선의 국민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 국기는 서구적 근대의 산물이 아닌가? 조선이 개항하기 시작한 188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 이런 서구적 근대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40년의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저자 쓰키아시 다쓰히코는 근대적 조선 형성의 근원을 개화 운동가들로부터 찾는다. 개화 운동가들은 독립협회 활동, 계몽 운동 등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근대화시키고 국민을 창출해 내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노력과 더불어 근대화를 통한 전제적 황권을 도모했던 조선 왕조, 근대화를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일본을 포함한 세계열강, 각자의 이해가 얽혀 들어가면서 19세기가 끝나 가는 가운데 조선의 백성들은 어느샌가 조선의 국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길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하다
<양절체제(兩截體制)>. 조선은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 이외의 서구 국가들과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청국도 이들 국가와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청국은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청은 여전히 종주국으로서 조선의 주권에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양절체제는 이렇듯 청과 대등한 관계에 있는 동시에 청에게 종속되는 두 개로 나누어진 조선의 체제를 지칭한 용어로 유길준이 집필한 『서유견문』의 제3편 「방국의 권리」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 용어는 당시 조선이 청과 맺고 있던 부조리한 관계를 고발하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최초의 국제법적 근거로서 1880년대 전반부터 청일전쟁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집필함으로서 근대 조선 개화파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니게 된다. 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 특히 청과의 종속 관계를 비판했던 급진 개화파가 당시 저작을 거의 남기지 않았거나, 혹은 전해지고 있지 않은 가운데, 『서유견문』으로부터 체계화된 개화사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길준이 국제법의 틀에서 조선의 위치를 새롭게 지정하면서 가졌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유길준의 저작들을 분석하면서 양절체제가 시작되었던 이 시기에 유길준이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분석한다. 유길준은 「경쟁론」에서 적극적인 개국 진취론을 펼친다. 국제 질서를 국가 간의 경쟁 상태로 파악하고 이 경쟁에 조선도 뛰어들어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제 폐지, 실학의 도입, 그리고 백성들을 교육하여 <진취의 기상>을 심어 주는 일이 필요했다. 특히 조선의 백성들을 독립국 조선에 충군애국하는 <국민>으로 계몽하고자 했다. 이는 곧 근대적 국민 국가의 성립, 즉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시작이었다.
독립협회,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을 증오하다
유길준을 비롯하여 개화파가 가지고 있었던 염원, 즉 독립한 주권 국가를 만들어 내고,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는 국민이 되도록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의지는 갑오개혁으로 이어진다. 비록 갑오개혁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좌절되었으나, 법령상으로만 남게 된 이러한 국민 창출 정책은 곧 관이 아닌 민간에서 실질적인 국민 창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을 이끈 단체가 바로 독립협회로, 독립협회는 1896년 결성 당시부터 1899년 초 해산당할 때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독립신문」, 그리고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독립협회가 결성된 1896년은 갑오개혁을 거친 조선 정부가 국제법에 눈을 뜨고, 이에 근거한 독립국으로 변모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한 시기였다. 독립협회는 왕실과 정부 고관들이 독립문, 독립공원 등을 건설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으며, 그만큼 정부에 의한 독립의 과시나 왕권 강화책과 밀접한 상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상호성 속에서 독립협회는 국가와 황실의 경축일 등 국가적 의례를 이용하여 국기와 국가(國歌)를 보급해 나갔다. 이는 일종의 <상징 조작>으로서, 조선 민중이 아직 완전한 국민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황에서 민중을 하나로 만들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저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경축회, 토론회, 연설회 등에 관한 활동을 그들이 발행한 「독립신문」의 기사를 통해서 추적한다. 「독립신문」의 기사야말로 독립협회의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료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 창출을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그들의 계몽 대상이었던 민중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독립신문」의 기사를 분석하면서 독립협회가 민중에 대해 가졌던 관점이 우민관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조선은 현재 <병>에 걸린 상태였다. <조선 병을 고치려면 인민이 아무쪼록 외국 사람 모양으로 학문을 배우고 외국 사람 모양으로 생각을 하며 외국 모양으로 행실을 하여 조선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과 같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인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없이 자기 한 몸 건사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것이 독립협회가 생각했던 <조선 병>의 근본이었다. 유럽과 미국, 일본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자국의 인민은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상투와 망건, 김치, 미신 등 조선의 모든 것들이 독립협회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후진성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립협회에게 있어서 민중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독립협회는 국가에 무관심한 민중이 <국민>이 됨으로서 민권이 생기고, 정부나 권세가로부터 압박을 받지 않게 된다고 주장했다. 우민이 <충군애국>의 마음을 가진 <국민>이 되면 민권이 생겨나고, 군주의 권위가 높아지며, 국가도 부강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나아가 한국이 외국으로부터 멸시당하지 않게 될 터였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아직 민중이 나라의 주체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고, 그 결과 민중을 <국민화>하는 장(場)이자 도구로서, 경축회나 대중 집회 등을 더욱 활용했다. 민중들은 그런 장소에서 국왕, 그리고 대한제국 건국 이후 황제를 위해 만세를 외쳤는데, 누구든지 참가할 수 있는 만세 제창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은 조선.한국의 <국민화>란 점에서는 큰 의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국기나 애국가와 함께 3.1 운동으로 이어진 민중 행동의 원형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황실을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모두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이후 더 이상 한국에서 일본이 가지는 영향력을 부정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양위시키고 이후 한국에 대해 황실 이용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순종의 즉위식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단발을 하고 군복을 입은 새로운 황제상을 창출하는 일이었다. 이토는 순종을 시켜 서울과 그 주변으로 행차하게 함으로써 그 지역에 새로운 황제상을 널리 알렸고, 순종의 초상 사진을 널리 배포함으로써 범위를 전국으로 넓혔다. 황제를 <보이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동시에 황실이 가진 정무의 실권과 경제적 기반을 빼앗고 상징적인 존재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다.
그렇다면 왜 황실 이용 정책이었을까? 우선 한국에서 배일 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국제 여론을 고려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이 한국 황실을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실적이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자치 육성 정책>이 가진 본질이었다. 유럽의 왕실 의례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황실 의례를 형성한 일본의 경험을 한국에 들여옴으로써 한국 황실을 <문명화>시켰다는 인정을 받으려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에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하게 보장>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인정하도록 했고, 제2차 한일협약에서는 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모순된 논리를 보였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일본을 통해 보장받고 있음을 계속 표명할 필요가 있었고, 대한제국 황실은 그 상징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측에서도 19세기 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등을 통해 군주의 권위 아래에서 충군애국의 심성을 가진 국민을 창출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이토는 알고 있었다. 제국.황실의 기념일 등을 이용해 국기나 만세 등으로 <국민> 창출 운동을 실시했던 독립협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토의 황실 이용책은 이러한 한국 측 운동 역시 전제하고 있었다.
황실 이용책이 좌절되고 내셔널리즘이 완성되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과는 달리 황실 이용책은 한국 측의 내셔널리즘을 불러일으키면서 보호국 지배에 역효과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순종의 지방 행차에서 일어났던 일장기 게양 거부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각지에서 순종을 맞이할 때에 한일 양국의 국기를 게양하고 학생들은 양국 국기를 교차시켜서 손에 들고 있으라는 훈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평안남도 관찰사의 강제 지도가 있었던 평양에서도 한일 양국기를 교차한 학교는 공립 학교뿐, 신민회의 대성학교를 비롯한 여러 사립 학교는 태극기만을 걸었다. 다른 경유지에서도 이런 식으로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
저자는 이 사건이 개화 운동가들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선을 일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독립신문」 이래의 계몽 논설은 민중의 애국심이 부족하다며 그러한 우민을 국민화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대한매일신보」 등에 나오는 논설에서 한국 민중의 국가적 정신, 자국 정신이 확고해졌다고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은 자력으로 <문명화>할 수 없으며, 황제를 장악한 후에 일본이 문명화를 지도한다면 한국민은 저절로 일본을 따를 것이라고 보았다. 한국 측에서도 역시 아직 한국에는 <문명화>된 국민이 없다는 우민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자치 육성 정책의 틀 안에서 실력 양성 운동을 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학생들이 보인 저항은 한일의 친목을 전제로 한 이토의 자치 육성 정책을 근본부터 파탄 내는 것이었다.
또한 3.1 운동 이후부터 충군과 애국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민족 대표의 선언서에서는 <반만 년 역사의 권위>와 <이천만 민족의 충성>이 자명하기 때문에 <민족 독립>을 주창하고 있는데, 따라서 선언서 말미의 <조선 건국 4252>에서 말하는 조선은 청에 윤허를 받은 사대주의의 상징도, 일본이 정한 국호도 아닌, 단군 조선의 계승이 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대한>과 함께 태극기나 애국가 같은 대한제국의 상징을 계승했지만 군주제를 부정하였고, 태극기나 애국가에서 대한제국적 요소는 어느샌가 잊힌다. 이미 국가적 정신, 자국 정신이 자명한 이상, 일본에 장악된 황제나 황실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충군과 애국은 분리되고, 조선의 내셔널리즘은 새로운 단계를 밟아 나가게 된다.
조선의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광복 이후 한국 근대사 연구는 한국사 안에서 근대를 발견하려는 과제를 가지고 출발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개화사상 연구에서는 계몽서나 신문 논설에서 보이는 근대적 성격을 높이 평가하거나, 한계성을 지적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협회를 예로 들자면,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으며 그 일부는 공화제까지 지향한 혁신적인 단체였다는 견해와, 「독립신문」 논설에서는 우민관이 보이므로 독립협회가 지향하는 방향은 민주주의로서는 한계가 있는 외견적 입헌주의라는 견해가 학계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 쓰키아시는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양측의 주장에 <기묘한 담합>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두 주장 모두에서 민중이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를 선천적으로 지향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내셔널리즘>, <국민 국가> 같은 근대적 가치를 파악하는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데, 이와 같은 연구 경향은 서구의 근대를 기준으로 조선의 근대를 파악하는 것이며 근대의 산물을 초역사적으로 적용하는 행위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대 사람들이 향유하는 민주주의나 기본적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는 국민 국가와 같은 근대의 산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저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국가와 그것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은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개화파가 <국민 국가>를 창출하기 위해 주도한 갑오개혁은 양반과 상민의 차별 폐지, 노비 제도의 폐지, 천민의 해방을 말한 동시에 개혁에 등을 돌리는 자를 <부도국적>으로 지목하여 억압하고 배제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개화사상이 반민중적 성격을 지닌 것은 근대적 성격이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 그 자체가 반민중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개화사상이 얼마나 <민족적>인지 혹은 <민중적>인지를 둘러싸고 논의하기보다, 개화파에 의한 국민 국가의 창출 과정, 그리고 거기서 파생하는 문제를 고찰하는 편이 훨씬 높은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고 제안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쓰키아시 다쓰히코
1962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도쿄외국어대학교 조선어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 사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전공은 한국 근대사이며, 도쿄외국어대학교 외국어학부 조교수를 거쳐 2014년 현재는 도쿄대학교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발표한 논문으로 「근대조선의 조약에 대한 <평등>과 <불평등> ─ 조일수호조약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본 <한국병합>」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문명>, <개화>, <평화>: 한국과 일본』,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장 개화사상 연구의 역사와 과제
제1장 조선의 국민 국가 창출론 형성: 유길준의 대외관과 <국민> 창출론
제2장 개화사상의 구조: 유길준 <西遊見聞>의 문명론적 입헌군주제론
제3장 보호조약 이후의 <실력 양성 운동>의 논리와 활동: 유길준과 한성부민회를 중심으로
제4장 대한제국 성립 전후의 대외적 태도: 외교 의례를 중심으로
제5장 독립협회의 <국민>창출 운동: 새로운 정치문화의 탄생
제6장 <독립신문>의 <자주독립>과 <동양>: 근대 조선의 아시아와 탈아
제7장 근대 조선의 개화운동에서 문명과 민중: 민중 문화와 근대
제8장 보호국기 조선 내셔널리즘의 전개: 이토 히로부미의 황실 이용책과 관련하여
제9장 ''애국 계몽 운동의 문명관 · 일본관'' 재고: 근대 조선 내셔널리즘 연구의 관점에서
종장 결론과 전망
후기 / 역자 후기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조선의 민중은 언제부터 국민이 되었는가?
일본인 학자가 바라본 조선의 근대 국가화 과정
1919년 3.1 운동은 근대 조선의 대표적인 민중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백성들은 손에 태극기를 쥐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조선의 국민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 국기는 서구적 근대의 산물이 아닌가? 조선이 개항하기 시작한 188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 이런 서구적 근대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40년의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저자 쓰키아시 다쓰히코는 근대적 조선 형성의 근원을 개화 운동가들로부터 찾는다. 개화 운동가들은 독립협회 활동, 계몽 운동 등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근대화시키고 국민을 창출해 내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노력과 더불어 근대화를 통한 전제적 황권을 도모했던 조선 왕조, 근대화를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일본을 포함한 세계열강, 각자의 이해가 얽혀 들어가면서 19세기가 끝나 가는 가운데 조선의 백성들은 어느샌가 조선의 국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길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하다
<양절체제(兩截體制)>. 조선은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본 이외의 서구 국가들과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청국도 이들 국가와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청국은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청은 여전히 종주국으로서 조선의 주권에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양절체제는 이렇듯 청과 대등한 관계에 있는 동시에 청에게 종속되는 두 개로 나누어진 조선의 체제를 지칭한 용어로 유길준이 집필한 『서유견문』의 제3편 「방국의 권리」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 용어는 당시 조선이 청과 맺고 있던 부조리한 관계를 고발하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최초의 국제법적 근거로서 1880년대 전반부터 청일전쟁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집필함으로서 근대 조선 개화파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니게 된다. 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 특히 청과의 종속 관계를 비판했던 급진 개화파가 당시 저작을 거의 남기지 않았거나, 혹은 전해지고 있지 않은 가운데, 『서유견문』으로부터 체계화된 개화사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길준이 국제법의 틀에서 조선의 위치를 새롭게 지정하면서 가졌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유길준의 저작들을 분석하면서 양절체제가 시작되었던 이 시기에 유길준이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분석한다. 유길준은 「경쟁론」에서 적극적인 개국 진취론을 펼친다. 국제 질서를 국가 간의 경쟁 상태로 파악하고 이 경쟁에 조선도 뛰어들어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제 폐지, 실학의 도입, 그리고 백성들을 교육하여 <진취의 기상>을 심어 주는 일이 필요했다. 특히 조선의 백성들을 독립국 조선에 충군애국하는 <국민>으로 계몽하고자 했다. 이는 곧 근대적 국민 국가의 성립, 즉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시작이었다.
독립협회,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을 증오하다
유길준을 비롯하여 개화파가 가지고 있었던 염원, 즉 독립한 주권 국가를 만들어 내고,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는 국민이 되도록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의지는 갑오개혁으로 이어진다. 비록 갑오개혁은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좌절되었으나, 법령상으로만 남게 된 이러한 국민 창출 정책은 곧 관이 아닌 민간에서 실질적인 국민 창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을 이끈 단체가 바로 독립협회로, 독립협회는 1896년 결성 당시부터 1899년 초 해산당할 때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독립신문」, 그리고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독립협회가 결성된 1896년은 갑오개혁을 거친 조선 정부가 국제법에 눈을 뜨고, 이에 근거한 독립국으로 변모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한 시기였다. 독립협회는 왕실과 정부 고관들이 독립문, 독립공원 등을 건설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으며, 그만큼 정부에 의한 독립의 과시나 왕권 강화책과 밀접한 상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상호성 속에서 독립협회는 국가와 황실의 경축일 등 국가적 의례를 이용하여 국기와 국가(國歌)를 보급해 나갔다. 이는 일종의 <상징 조작>으로서, 조선 민중이 아직 완전한 국민으로 거듭나지 않은 상황에서 민중을 하나로 만들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저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경축회, 토론회, 연설회 등에 관한 활동을 그들이 발행한 「독립신문」의 기사를 통해서 추적한다. 「독립신문」의 기사야말로 독립협회의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료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 창출을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그들의 계몽 대상이었던 민중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독립신문」의 기사를 분석하면서 독립협회가 민중에 대해 가졌던 관점이 우민관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조선은 현재 <병>에 걸린 상태였다. <조선 병을 고치려면 인민이 아무쪼록 외국 사람 모양으로 학문을 배우고 외국 사람 모양으로 생각을 하며 외국 모양으로 행실을 하여 조선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과 같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인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없이 자기 한 몸 건사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것이 독립협회가 생각했던 <조선 병>의 근본이었다. 유럽과 미국, 일본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자국의 인민은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상투와 망건, 김치, 미신 등 조선의 모든 것들이 독립협회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후진성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립협회에게 있어서 민중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독립협회는 국가에 무관심한 민중이 <국민>이 됨으로서 민권이 생기고, 정부나 권세가로부터 압박을 받지 않게 된다고 주장했다. 우민이 <충군애국>의 마음을 가진 <국민>이 되면 민권이 생겨나고, 군주의 권위가 높아지며, 국가도 부강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나아가 한국이 외국으로부터 멸시당하지 않게 될 터였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아직 민중이 나라의 주체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고, 그 결과 민중을 <국민화>하는 장(場)이자 도구로서, 경축회나 대중 집회 등을 더욱 활용했다. 민중들은 그런 장소에서 국왕, 그리고 대한제국 건국 이후 황제를 위해 만세를 외쳤는데, 누구든지 참가할 수 있는 만세 제창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은 조선.한국의 <국민화>란 점에서는 큰 의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국기나 애국가와 함께 3.1 운동으로 이어진 민중 행동의 원형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황실을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모두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이후 더 이상 한국에서 일본이 가지는 영향력을 부정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양위시키고 이후 한국에 대해 황실 이용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순종의 즉위식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단발을 하고 군복을 입은 새로운 황제상을 창출하는 일이었다. 이토는 순종을 시켜 서울과 그 주변으로 행차하게 함으로써 그 지역에 새로운 황제상을 널리 알렸고, 순종의 초상 사진을 널리 배포함으로써 범위를 전국으로 넓혔다. 황제를 <보이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동시에 황실이 가진 정무의 실권과 경제적 기반을 빼앗고 상징적인 존재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다.
그렇다면 왜 황실 이용 정책이었을까? 우선 한국에서 배일 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국제 여론을 고려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이 한국 황실을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실적이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자치 육성 정책>이 가진 본질이었다. 유럽의 왕실 의례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황실 의례를 형성한 일본의 경험을 한국에 들여옴으로써 한국 황실을 <문명화>시켰다는 인정을 받으려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에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하게 보장>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인정하도록 했고, 제2차 한일협약에서는 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모순된 논리를 보였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일본을 통해 보장받고 있음을 계속 표명할 필요가 있었고, 대한제국 황실은 그 상징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측에서도 19세기 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등을 통해 군주의 권위 아래에서 충군애국의 심성을 가진 국민을 창출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이토는 알고 있었다. 제국.황실의 기념일 등을 이용해 국기나 만세 등으로 <국민> 창출 운동을 실시했던 독립협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토의 황실 이용책은 이러한 한국 측 운동 역시 전제하고 있었다.
황실 이용책이 좌절되고 내셔널리즘이 완성되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과는 달리 황실 이용책은 한국 측의 내셔널리즘을 불러일으키면서 보호국 지배에 역효과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순종의 지방 행차에서 일어났던 일장기 게양 거부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각지에서 순종을 맞이할 때에 한일 양국의 국기를 게양하고 학생들은 양국 국기를 교차시켜서 손에 들고 있으라는 훈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평안남도 관찰사의 강제 지도가 있었던 평양에서도 한일 양국기를 교차한 학교는 공립 학교뿐, 신민회의 대성학교를 비롯한 여러 사립 학교는 태극기만을 걸었다. 다른 경유지에서도 이런 식으로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
저자는 이 사건이 개화 운동가들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선을 일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독립신문」 이래의 계몽 논설은 민중의 애국심이 부족하다며 그러한 우민을 국민화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대한매일신보」 등에 나오는 논설에서 한국 민중의 국가적 정신, 자국 정신이 확고해졌다고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은 자력으로 <문명화>할 수 없으며, 황제를 장악한 후에 일본이 문명화를 지도한다면 한국민은 저절로 일본을 따를 것이라고 보았다. 한국 측에서도 역시 아직 한국에는 <문명화>된 국민이 없다는 우민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자치 육성 정책의 틀 안에서 실력 양성 운동을 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학생들이 보인 저항은 한일의 친목을 전제로 한 이토의 자치 육성 정책을 근본부터 파탄 내는 것이었다.
또한 3.1 운동 이후부터 충군과 애국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민족 대표의 선언서에서는 <반만 년 역사의 권위>와 <이천만 민족의 충성>이 자명하기 때문에 <민족 독립>을 주창하고 있는데, 따라서 선언서 말미의 <조선 건국 4252>에서 말하는 조선은 청에 윤허를 받은 사대주의의 상징도, 일본이 정한 국호도 아닌, 단군 조선의 계승이 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대한>과 함께 태극기나 애국가 같은 대한제국의 상징을 계승했지만 군주제를 부정하였고, 태극기나 애국가에서 대한제국적 요소는 어느샌가 잊힌다. 이미 국가적 정신, 자국 정신이 자명한 이상, 일본에 장악된 황제나 황실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충군과 애국은 분리되고, 조선의 내셔널리즘은 새로운 단계를 밟아 나가게 된다.
조선의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광복 이후 한국 근대사 연구는 한국사 안에서 근대를 발견하려는 과제를 가지고 출발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개화사상 연구에서는 계몽서나 신문 논설에서 보이는 근대적 성격을 높이 평가하거나, 한계성을 지적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협회를 예로 들자면,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으며 그 일부는 공화제까지 지향한 혁신적인 단체였다는 견해와, 「독립신문」 논설에서는 우민관이 보이므로 독립협회가 지향하는 방향은 민주주의로서는 한계가 있는 외견적 입헌주의라는 견해가 학계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 쓰키아시는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양측의 주장에 <기묘한 담합>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두 주장 모두에서 민중이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를 선천적으로 지향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내셔널리즘>, <국민 국가> 같은 근대적 가치를 파악하는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데, 이와 같은 연구 경향은 서구의 근대를 기준으로 조선의 근대를 파악하는 것이며 근대의 산물을 초역사적으로 적용하는 행위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대 사람들이 향유하는 민주주의나 기본적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는 국민 국가와 같은 근대의 산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저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 국가와 그것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은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개화파가 <국민 국가>를 창출하기 위해 주도한 갑오개혁은 양반과 상민의 차별 폐지, 노비 제도의 폐지, 천민의 해방을 말한 동시에 개혁에 등을 돌리는 자를 <부도국적>으로 지목하여 억압하고 배제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개화사상이 반민중적 성격을 지닌 것은 근대적 성격이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 그 자체가 반민중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개화사상이 얼마나 <민족적>인지 혹은 <민중적>인지를 둘러싸고 논의하기보다, 개화파에 의한 국민 국가의 창출 과정, 그리고 거기서 파생하는 문제를 고찰하는 편이 훨씬 높은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고 제안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쓰키아시 다쓰히코
1962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도쿄외국어대학교 조선어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 사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전공은 한국 근대사이며, 도쿄외국어대학교 외국어학부 조교수를 거쳐 2014년 현재는 도쿄대학교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발표한 논문으로 「근대조선의 조약에 대한 <평등>과 <불평등> ─ 조일수호조약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본 <한국병합>」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문명>, <개화>, <평화>: 한국과 일본』,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장 개화사상 연구의 역사와 과제
제1장 조선의 국민 국가 창출론 형성: 유길준의 대외관과 <국민> 창출론
제2장 개화사상의 구조: 유길준 <西遊見聞>의 문명론적 입헌군주제론
제3장 보호조약 이후의 <실력 양성 운동>의 논리와 활동: 유길준과 한성부민회를 중심으로
제4장 대한제국 성립 전후의 대외적 태도: 외교 의례를 중심으로
제5장 독립협회의 <국민>창출 운동: 새로운 정치문화의 탄생
제6장 <독립신문>의 <자주독립>과 <동양>: 근대 조선의 아시아와 탈아
제7장 근대 조선의 개화운동에서 문명과 민중: 민중 문화와 근대
제8장 보호국기 조선 내셔널리즘의 전개: 이토 히로부미의 황실 이용책과 관련하여
제9장 ''애국 계몽 운동의 문명관 · 일본관'' 재고: 근대 조선 내셔널리즘 연구의 관점에서
종장 결론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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