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난 그 고통을 느껴야 되네. 내가 산다면 그게 이유가 되어야 해.”
고통이 삶의 목적인 남자, 수치로 물들다
지평선을 향하는 태양이, 마치 그 일을 목격하겠다는 듯 나를 향해 뜨겁게 빛을 내리쬐었다. 그때 어땠던가? 아내와 딸 가운데 하나를 내 의지로 버려야 했던 그때에, 나는 생명, 그 감당할 수 없는 뜨거움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내 몸이 다 녹아버릴 만큼 뜨겁게 울었다.(198면)
나는 죄를 씻고 싶지 않았고, 정화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죄를 지은 자로 남아 있고 싶었다. 죄를 씻는다면, 그 뒤에 무엇이 남는가? 그 삶을 견딜 수 있는가?(57면)
주인공 원길은 아내와 함께 딸 강주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다. 그러나 아내는 몽골사막을 건너다 쓰러지고 말았고, 원길은 그런 아내를 사막에 남겨둔 채 강주를 업고 돌아섰다. 이후 남한에 온 원길은 같은 처지의 영남과 동백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아 생을 이어간다는 수치심에 물들어 있다. 동백은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손가락질 받는 것으로 속죄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덜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동백이 떠난 뒤에도 원길은 매순간 자책과 자학을 반복한다. 아내를 버리고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라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184면)로 규정하며 다만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영남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며 올림픽을 유치한 지방도시로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처절한 번민은 계속된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 와서 며칠 채소도 심고 닭도 사왔더니, 새벽마다 그놈들 우는 소릴 들으니까, 병이 도진 것처럼 다시 살고 싶었네. 아침에 볕이 들어서 채소가 파랗게 자라는 걸 보니 죽는 게 서러워서 못 견디겠더군. (…) 다시 살고 싶었네. 정말이네. 염치도 없이 살고 싶었네.(180면)
생에의 의지를 ‘병’이라 표현할 만큼 그들의 수치심은 극심하다. 조그마한 생의 기미를 볼 때마다 불쑥불쑥 치솟는 삶에의 욕망은 자괴감에 더욱 불을 지필 뿐이다. 그러나 『수치』는 탈북자들의 “험난한 인생역정과 사회적 곤경”(한기욱, 추천사)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 작품이 아니다. 전수찬은 주인공들의 겪고 있는 내적 고통을 고도로 자본화된 한국사회, 그 안에서도 물신성이 첨예화되는 사건 하나에 맞붙인다.
영남이 이사 간 도시의 올림픽 선수촌 공사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유골이 다량 출토된다. 전국은 민간인 학살의 범인이 미군이냐 인민군이냐 하는 진실공방으로 떠들썩해지고, 정부는 인민군의 범행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마을로 몰려와 공사를 중단하고 진실을 규명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지역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윤리적 상상력의 의미를 심문하는 역작
부끄러움이 메마른 척박한 땅에 뿌려진 씨앗
『수치』의 주인공들은 남한 사회의 소수자이자 퇴락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제삼자로 자리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한국사회의 팽배한 물신주의가 인간성을 어떻게 배반하는지 폭로한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상처 앞에서 정부와 지역주민, 정부를 불신하는 시위대 모두가 자신의 물질적, 정치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졌어야만 했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는 어느 쪽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 누가 학살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수없이 외치는 영남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만 남길 뿐이다. 바로 이 지점, 수치심에 삶마저 포기하려는 주인공들과 이권 앞에 인간의 도리조차 행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거리에 작품의 메시지가 송곳처럼 파고든다. 날이면 날마다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삶이 내뿜는 아름다움에 매번 좌절하고 마는 영남과 원길의 애처로운 고뇌가 스스로의 삶을 물질에 저당 잡히고 염치를 파한 채 살아가는 이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전수찬이 ‘수치’를 집요하게 이끌고 온 것은 최소한의 윤리조차 내던진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숙면 뒤에 몸은 신선하게 깨어난다. 밤새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듯 몸이 가벼운 아침에, 나는 그 텅 빈 머리로 죽음을 생각했다. 아침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신선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어린아이가 죽음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새로웠다. (…) 그것이 신선했다. 그것이 아침마다 두려웠다.(189~90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무감한 사람들, 봄날 힘차게 움을 틔우는 새싹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단단한 권력구조, 인간성을 탈각시키는 자본의 원리에 위태로이 떠밀려가는 사회에 대한 안쓰러움이 작품 전반에 짙게 묻어난다. 전수찬은 이러한 사회· 윤리적 사유의 얼개를 하나의 사건에 밀착시켜 탁월하게 표현했다. 탈북자들의 실존적 고민과 이 땅의 윤리적 척박함이 뒤섞여 명과 암의 앉은자리를 다시금 더듬어보게 한다. 작품의 거개가 대화로 이루어졌음에도 사건의 진행에 빈틈이 없고 주인공의 내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수치』가 이룬 또 하나의 성취다.
세계인의 축전? 그건 참가하는 사람들 얘기지, 주최하는 쪽에서는 간단히 말해서 장사야 장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자네, 이 올림픽 유치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아? (…) 그리고 애초에 벌어들일 게 없으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유치하려고 들겠어? 세계인의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 기를 쓰겠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기를 쓰겠어? 다 돈 때문이지! 경제효과니 하는 말들이 다 그런 말이야. 여기 온 지 사년이나 됐다면서 아직 그런 말이 뭔지도 모르나? 아직 자본주의가 뭔지도 몰라?(165면)
유골 출토 사건이 올림픽 건설 사업의 발목을 잡자 이권이 걸린 협회의 우두머리는 이렇게 외친다. 그리고 이 외침은 전혀 낯설지 않다. 전수찬은 질문한다. 우리가 아직 윤리를 논하고, 도덕을 세우고, 수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 것들을 잃고 사는 삶이 인간적인 삶이겠느냐고.
▣ 작가 소개
저자 : 전수찬
1968년 대구에서 태어나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어느덧 일주일』로 제9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어느덧 일주일』 『오래된 빛』 『수치』가 있다.
“난 그 고통을 느껴야 되네. 내가 산다면 그게 이유가 되어야 해.”
고통이 삶의 목적인 남자, 수치로 물들다
지평선을 향하는 태양이, 마치 그 일을 목격하겠다는 듯 나를 향해 뜨겁게 빛을 내리쬐었다. 그때 어땠던가? 아내와 딸 가운데 하나를 내 의지로 버려야 했던 그때에, 나는 생명, 그 감당할 수 없는 뜨거움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내 몸이 다 녹아버릴 만큼 뜨겁게 울었다.(198면)
나는 죄를 씻고 싶지 않았고, 정화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죄를 지은 자로 남아 있고 싶었다. 죄를 씻는다면, 그 뒤에 무엇이 남는가? 그 삶을 견딜 수 있는가?(57면)
주인공 원길은 아내와 함께 딸 강주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다. 그러나 아내는 몽골사막을 건너다 쓰러지고 말았고, 원길은 그런 아내를 사막에 남겨둔 채 강주를 업고 돌아섰다. 이후 남한에 온 원길은 같은 처지의 영남과 동백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아 생을 이어간다는 수치심에 물들어 있다. 동백은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손가락질 받는 것으로 속죄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덜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동백이 떠난 뒤에도 원길은 매순간 자책과 자학을 반복한다. 아내를 버리고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라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184면)로 규정하며 다만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영남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며 올림픽을 유치한 지방도시로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처절한 번민은 계속된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 와서 며칠 채소도 심고 닭도 사왔더니, 새벽마다 그놈들 우는 소릴 들으니까, 병이 도진 것처럼 다시 살고 싶었네. 아침에 볕이 들어서 채소가 파랗게 자라는 걸 보니 죽는 게 서러워서 못 견디겠더군. (…) 다시 살고 싶었네. 정말이네. 염치도 없이 살고 싶었네.(180면)
생에의 의지를 ‘병’이라 표현할 만큼 그들의 수치심은 극심하다. 조그마한 생의 기미를 볼 때마다 불쑥불쑥 치솟는 삶에의 욕망은 자괴감에 더욱 불을 지필 뿐이다. 그러나 『수치』는 탈북자들의 “험난한 인생역정과 사회적 곤경”(한기욱, 추천사)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 작품이 아니다. 전수찬은 주인공들의 겪고 있는 내적 고통을 고도로 자본화된 한국사회, 그 안에서도 물신성이 첨예화되는 사건 하나에 맞붙인다.
영남이 이사 간 도시의 올림픽 선수촌 공사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유골이 다량 출토된다. 전국은 민간인 학살의 범인이 미군이냐 인민군이냐 하는 진실공방으로 떠들썩해지고, 정부는 인민군의 범행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마을로 몰려와 공사를 중단하고 진실을 규명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지역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윤리적 상상력의 의미를 심문하는 역작
부끄러움이 메마른 척박한 땅에 뿌려진 씨앗
『수치』의 주인공들은 남한 사회의 소수자이자 퇴락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제삼자로 자리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한국사회의 팽배한 물신주의가 인간성을 어떻게 배반하는지 폭로한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상처 앞에서 정부와 지역주민, 정부를 불신하는 시위대 모두가 자신의 물질적, 정치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졌어야만 했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는 어느 쪽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 누가 학살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수없이 외치는 영남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만 남길 뿐이다. 바로 이 지점, 수치심에 삶마저 포기하려는 주인공들과 이권 앞에 인간의 도리조차 행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거리에 작품의 메시지가 송곳처럼 파고든다. 날이면 날마다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삶이 내뿜는 아름다움에 매번 좌절하고 마는 영남과 원길의 애처로운 고뇌가 스스로의 삶을 물질에 저당 잡히고 염치를 파한 채 살아가는 이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전수찬이 ‘수치’를 집요하게 이끌고 온 것은 최소한의 윤리조차 내던진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숙면 뒤에 몸은 신선하게 깨어난다. 밤새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듯 몸이 가벼운 아침에, 나는 그 텅 빈 머리로 죽음을 생각했다. 아침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신선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어린아이가 죽음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새로웠다. (…) 그것이 신선했다. 그것이 아침마다 두려웠다.(189~90면)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무감한 사람들, 봄날 힘차게 움을 틔우는 새싹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단단한 권력구조, 인간성을 탈각시키는 자본의 원리에 위태로이 떠밀려가는 사회에 대한 안쓰러움이 작품 전반에 짙게 묻어난다. 전수찬은 이러한 사회· 윤리적 사유의 얼개를 하나의 사건에 밀착시켜 탁월하게 표현했다. 탈북자들의 실존적 고민과 이 땅의 윤리적 척박함이 뒤섞여 명과 암의 앉은자리를 다시금 더듬어보게 한다. 작품의 거개가 대화로 이루어졌음에도 사건의 진행에 빈틈이 없고 주인공의 내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수치』가 이룬 또 하나의 성취다.
세계인의 축전? 그건 참가하는 사람들 얘기지, 주최하는 쪽에서는 간단히 말해서 장사야 장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자네, 이 올림픽 유치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아? (…) 그리고 애초에 벌어들일 게 없으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유치하려고 들겠어? 세계인의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 기를 쓰겠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기를 쓰겠어? 다 돈 때문이지! 경제효과니 하는 말들이 다 그런 말이야. 여기 온 지 사년이나 됐다면서 아직 그런 말이 뭔지도 모르나? 아직 자본주의가 뭔지도 몰라?(165면)
유골 출토 사건이 올림픽 건설 사업의 발목을 잡자 이권이 걸린 협회의 우두머리는 이렇게 외친다. 그리고 이 외침은 전혀 낯설지 않다. 전수찬은 질문한다. 우리가 아직 윤리를 논하고, 도덕을 세우고, 수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 것들을 잃고 사는 삶이 인간적인 삶이겠느냐고.
▣ 작가 소개
저자 : 전수찬
1968년 대구에서 태어나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어느덧 일주일』로 제9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어느덧 일주일』 『오래된 빛』 『수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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