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자연과 우주를 성찰케 하는 소박한 일상의 노래,
제1회 지용신인문학상, 2011년 『한국일보』『경상일보』신춘문예 당선
김철순 시인의 첫 번째 동시집
김철순 시인은 1995년 제1회 지용신인문학상에서 시 「가뭄」외 한 편으로 등단한 후, 농부와 주부로서의 삶을 꾸준히 시어로 표현하며 시집 『꿈속에서 기어나오고 싶지 않은 날』(1997)『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2003)를 냈다.
그런 그가 오 년 전부터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됐다. 54세, 늦은 나이에 동심에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고 한다.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가 날뛰는 얼룩말로 보이기도 하고, 잘 익은 콩꼬투리에서 튀어나오는 콩알이 뻐꾸기 울음소리로, 가을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귀뚜라미 소리가 여름을 반으로 접어서 박는 재봉틀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땅을 일구는 삶을 살아온 시인은 자연에 가장 가까운 글을 일구어 나갔다. 그렇게 동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사과의 길」과 「냄비」가,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할미꽃」과 「고무줄놀이」가 나란히 당선되었다. 당시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 심사위원이었던 김용택, 이상희 시인은 그의 동시에 대해 “아기자기한 이미지의 환상적 서사, 소박한 일상의 노래가 자연과 우주를 성찰케 한다.”라고 평했다.
그의 첫 동시집 『사과의 길』은 엄마의 마음과 농부의 마음으로 담은 아이들과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오랜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그의 상상력은 아이의 눈높이에 살뜰히 맞춘 입말로 세계에 고착된 인식을 뒤흔든다. 나아가 대상을 둘러싼 환경, 대상의 이면까지도 응시하는 포용의 상상력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 준다.
애정 어린 관찰에서 피어난 감각적이고 산뜻한 발상
김철순의 동시 속에서는 익숙한 주변 사물이나 경험이라 할지라도 낯설고 특별한 것으로 변신한다. 주전자는 오리로, 국그릇 속의 콩나물은 연못의 올챙이로, 가래떡 뽑는 기계는 두 개의 똥꼬가 달린 이상한 동물로 탈바꿈한다. 아이들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인의 발상에 금세 빠져들고, 어느덧 시인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쉿!
조용히 해
저,
두 귀 달린 냄비가
다 듣고 있어
우리 이야기를 잡아다가
냄비 속에 집어넣고
펄펄펄
끓일지도 몰라
그럼,
끓인 말이 어떻게
저 창문을 넘어
친구에게 갈 수 있겠어?
저 산을 넘어
꽃을 데려올 수 있겠어?
_「냄비」전문
냄비의 손잡이가 두 개의 귀로 변조된 발상이 새롭다. 함기석 시인은 이 동시를 두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 낳는 후속 장면이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귀 달린 냄비가 우리의 이야기를 잡아다가 냄비 속에 집어넣고 펄펄 끓이면, 말이 원래 갖고 있던 이야기의 순수성은 변질된다. 냄비라는 일상의 사물에 대한 시인의 인식 전환이 냄비의 기능과 가치를 바꾸고, 말과 말의 죽음이 낳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고 짚었다. 낯익은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김철순 시인의 남다른 통찰력은 대상에 대한 깊고 오랜 관찰에서 빚어졌다. 그 관찰이 곧바로 군더더기 없는 시어로 상큼하게 버무려져 한 편의 시로 태어난다.
봄이 오면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 위의 할머니
하늘나라 가신 할머니들
모두모두
지팡이 짚고
땅으로 내려오신다
_「할미꽃」전문
「할미꽃」은 대상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잘 보여 주는 동시다. 할미꽃의 외관 포착에 그치지않고 할미꽃에서 하늘나라 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우리 할머니들이 간직한 내적 슬픔, 견딤의 시간까지 응시한다. 일상의 자연물에서 우주로까지 나아가는 통찰의 시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대상을 관찰하였더니 미처 몰랐던 모습이 보이고, 시인의 발견에 응답하듯 대상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여 준다. 대상을 향한 시인의 사려 깊은 눈맞춤은 시인과 대상의 호혜로운 관계를 낳는다. 그 관계가 그의 시를 보다 풍요롭게 한다.
아이의 마음이 투영된 환상적 서사, 공감과 위안의 동시
김철순의 동시에는 집과 학교에서 느끼는 아이들의 심리적 갈등이 아이들의 환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텅 빈 운동장을
혼자 걸어 나오는데
운동장가에 있던 나무가
등을 구부리며
말타기 놀이 하잔다
얼른 올라타라고
등을 내민다
내가 올라타자
따그닥따그닥
달린다
학교 앞 문방구를 지나서
네거리를 지나서
우리 집을 지나서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차보다 빠르다
어, 어, 어,
구름 위를 달린다
비행기보다 빠르다
저 밑의 집들이
점점 작게 보인다
_「등 굽은 나무」부분
아이들이 모두 떠난 “텅 빈 운동장”을 “혼자” 걸어 나오는 아이의 모습에서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던 아이의 하루를 짐작할 수 있다. 학교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아이에게 “나무가/ 등을 구부리며/ 말타기 놀이”를 제안한다. 그 나무를 타고 학교와 집을 벗어나는 아이의 환상은 아이가 처한 현실을 넘어 통쾌한 위로를 준다. 아이들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 불러내곤 하는 환상 공간은 김철순의 동시 속에서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일상으로 활기차게 되돌아갈 수 있는 기운을 심어 준다.
엄마가 사과를 깎아요
동그란 동그란
길이 생겨요
나는 얼른 그 길로 들어가요
동그란 동그란 길을 가다 보니
연분홍 사과꽃이 피었어요
아주 예쁜 꽃이에요
조금 더 길을 가다 보니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혔어요
아주 작은 아기 사과예요
해님이 내려와서
아기를 안아 주었어요
가는 비는 살금살금 내려와
아기에게 젖을 물려 주었어요
_「사과의 길」부분
표제 시 「사과의 길」에는 성장에 대한 아이의 두려움이 담겨 있다. 시인은 아기 사과꽃이 붉게 잘 익은 사과가 되는 과정 속에 해님이 아기 사과를 안아 주고, 비가 젖을 물려 주는 이미지를 더하며 아이들의 내면을 보듬어 준다. 아이들이 가진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시인의 바람이 아름다운 시편으로 이어져 가슴 흐뭇한 울림을 남긴다.
김철순의 동시는 언뜻 단순한 듯 보이나 결코 쉽지만은 않다. 낯선 발상과 상상력으로 여러번 곱씹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다. 그의 동시를 찬찬히 읽고 있으면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읽는 이의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든다.
시적 긴장감과 생동감, 재미를 세심하게 살핀
구은선 화가의 다채로운 그림
『사과의 길』은 독특한 그림체와 과감하고 율동적인 화면 구성이 눈길을 끄는 동시집이다. 구은선 화가는 빼어난 해석으로 참신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화가 고유의 미적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는 시 한 편 한 편을 깊게 고민하고, 그 심연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명료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잡아냈다. 마치 한 편의 시 같은 은유가 담긴 그림부터 익살스러움이 살아 있는 캐릭터와 특유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까지, 구은선 화가의 다채로운 그림들이 시의 사유를 더 풍부하게 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철순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1995년 제1회 지용신인문학상에서 시 「가뭄」외 1편이 당선되었고,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사과의 길」과 「냄비」가,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할미꽃」과 「고무줄놀이」가 나란히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작품으로 시집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가 있다.
그린이 : 구은선
감각적인 화면 구성과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주목받으며 출판,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 여행서 《4월의 파리》를 쓰고 그렸고, 그림책 《김치가 최고야》, 《엄마 말 들을걸》 등에 그림을 그렸다.
목 차
책머리에
제1부 팔랑, 봄볕이 떨어진다
나비
봄맞이
달래
망초꽃
봄날
할미꽃
개구리 울음
콩 심는 날
꽃밭
풀들은 입이 없어서
제2부 내 귀를 물고 달아나는
귀뚜라미
꽈리나무 등
태풍
별
내 귀를 물고 달아나는
가을
감꽃 왕관
강아지풀
도토리
아기 쥐와 고양이
제3부 사과의 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과의 길
빨랫줄과 빨래
빨래집게
가래떡
냄비
솜사탕
우산
주전자
콩나물국
염소 똥
까만 염소
가로등
제4부 깍두기 좀 치워 주세요
거울
그럴지도 몰라
수학은 정말 싫어
깍두기
카메라
개구리
뻐꾸기시계
산비둘기
엄마 흉내
고무줄놀이
등 굽은 나무
내 등에 풀을 뽑는 할머니
해설 | 함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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