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조금씩 달라도 우린 모두 친구예요!
《까만 펜과 비밀 쪽지》에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이 등장한다. 투명해 보일 만큼 얇은 피부를 지닌 에리파도 있고,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인 아리안도 있고, 까만색 사인펜에 비유될 만큼 새까만 파트릭도 있다.
맨 처음에 에리파가 파트릭에게 보이는 행동 때문에 앞으로 인종 차별에 관한 얘기가 펼쳐질 것으로 쉽게 예상이 되지만, 막상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인종 차별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은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 비록 주근깨투성이긴 하지만 우유처럼 피부가 뽀얀 아리안이 까만색 사인펜처럼 새까만 나에게 흑인이니 뭐니 하는 요상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듯이, 피부색은 아이들 사이에서 그저 개인적인 특성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다문화 관련 도서들이 아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한 뒤 옳음과 그름을 가르는 데 충실했다면, 이 책에서는 흑백 논리를 벗어나 지극히 어린이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너’와 ‘나’가 아닌 ‘우리’, 즉 화해와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대놓고 다문화 이야기를 꺼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부분에서도 거북함이나 불편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양한 인종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되레 어른들이 본받았음직한 세계 시민의 자세를 만날 수 있을뿐더러,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한없이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친구’라는 든든하고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모습이 읽는 이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이젠 전쟁에 대한 기억도 두렵지 않아요!
이 책의 한 축이 다문화라면, 또 하나의 축은 전쟁 혹은 난민이라 할 수 있다. 에리파는 사실 처음에 파트릭이 까매서 싫었던 게 아니다. 단지, 그동안 전쟁의 위협 속에서 난민으로 떠돌며 지냈기 때문에 누군가와 첫 대면을 할 때 두려움이 앞섰던 것뿐이다. 그것은 에리파가 파트릭의 가방에 불안한 마음을 담은 그림 쪽지를 넣어 두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림 쪽지를 가방에서 발견하던 날, 파트릭은 아리안이 연애편지를 넣어 둔 줄 알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친다. 그런데 막상 펼친 종이쪽지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무시무시한 탱크와 총을 든 군인,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악어…….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서랍에다 차곡차곡 모아 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종이쪽지에 그려진 그림들이 에리파가 밤마다 꾸는 악몽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선생님에게서 에리파가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을 겪은 뒤 말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듣는다. 파트릭은 자신이 악몽에 시달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에리파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악몽을 없애 주기로 마음을 먹고는 에리파를 위해서 생명 점수가 아주 높은 포켓몬스터 스페셜 카드를 정성들여 만든다. 그리고 에리파가 그린 그림 쪽지들을 불에 태워 악몽과 함께 날려 버리려 하는데……. 그만 교장 선생님에게 들켜서 엄청난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한다. 부모님을 학교로 모시고 오라는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순간, 에리파가 파트릭을 구하기 위해 힘겹게 말문을 연다.
“안 돼, 혼내지 마!”
에리파가 비록 처음에는 멋모르고 파트릭에게 상처를 주지만, 자신이 가진 아픔을 이해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파트릭의 순수하고 진실된 모습에서 크게 감동을 받아 어렵사리 ‘긴급 구조’의 말문을 튼 것이다. 이는 곧 전쟁에 대한 에리파의 아픈 기억이 파트릭의 우정으로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까만 펜과 비밀 쪽지》에서는 전쟁과 난민이라는 어렵고 무거운 주제조차도,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우정 앞에서는 따뜻한 햇살 아래 봄눈처럼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다문화와 전쟁이라는 묵직한 소재는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무르익고, 책장을 덮는 순간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해맑으면서도 쫀득한 우정이 가장 긴 여운을 남긴다. 소재의 무거움이 ‘메시지’로 와 닿지 않고 오롯이 ‘이야기’로 읽힌 덕분이다.
내용 소개
우리 반 새 친구
이 책은 주인공 파트릭이 다니는 학교에 어느 날 에리파가 전학을 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낯선 나라에서 전학 온 에리파는 짝꿍 파트릭에게 첫 만남에서 본의 아니게 큰 충격을 줍니다. 에리파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친구인 파트릭을 처음 만나 생긴 오해 때문이에요. 이로 이해 파트릭 역시 씩씩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화를 냅니다.
“여기, 파트릭 옆에 앉는 거다.”
에리파는 꿈쩍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자, 봐라.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듯이 직접 내 옆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에리파에게 똑같이 해 보라고 손짓을 했다. 에리파는 한참이나 뚱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고새를 가로저었다.
“왜 그러니, 에리파? 앉기 싫어?”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려 있었다. 에리파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때 에리파가 한 행동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에리파는 내 책상 위에 뒹굴고 있던 까만색 사인펜을 집어 들어 플로랑스 선생님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음에 나는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는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나는 하도 화가 나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우아, 대단한 전학생이 오셨네! 까만색 사인펜, 이거 무슨 뜻이야?”
선생님은 나를 눈빛으로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파트릭, 진정해. 에리파는 아마도 흑인 친구를 태어나서 처음 봤을 거야. 못된 마음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미친놈처럼 정신없이 필통을 뒤졌다. 내가 꺼낸 것은 잘못된 글씨를 지우는 하얀색 수정펜이었다. 허깨비처럼 생긴 그 아이를 향해 수정펜을 들이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너는! 네 얼굴은 이 수정펜이랑 똑같거든!” ―14~17쪽에서
책가방 속의 종이쪽지
에리파에게는 남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에리파는 체첸에서 전학을 왔는데, 사실 전학을 온 까닭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에요. 짝꿍 파트릭에게도 낯선 나라인 체첸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것도 아주 무섭고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에리파는 말을 못 하게 되었어요. 파트릭은 언제부터인가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 쪽지가 자신의 가방에 담겨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나는 책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그런데 종이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냉큼 낚아챘다. 아리안이구나!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틀림없었다. 아리안이 내 책가방에 쪽지를 몰래 넣어 둔 거다. 나는 쪽지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쪽지 내용이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졌다. 커다란 하트, 그리고 그 안에는 똑 부러지면서도 다정다감한 글이 빼곡히 적혀 있겠지. ……나는 조심스레 쪽지를 한 번, 두 번, 세 번 펼쳤다. 이제 한 번만 더 펼치면 내용이 한눈에 들어올 터였다. 심호흡을 하고 종이를 활짝 펼쳤다.
그런데 종이에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볼펜으로 그린 텡크, 그것도 아주 거대한 탱크였다. 대포에서 폭죽 같은 것이 마구마구 터지는 탱크.
뭐야, 어떤 멍청이가 내 책가방에 이따위 탱크 그림을 넣어 둔 거야? 그래, 톰이겠지. 이렇게 쓸데없는 장난을 칠 사람이 톰밖에 더 있겠어? 그러다 문득 그림 한 귀퉁이에서 서명을 발견했다. 글씨가 아주 작았다. 종이에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들여다보았다. AABABB라고 쓰여 있었다. ―43~45에서
포켓몬스터 스페셜 카드
파트릭은 그림 쪽지들을 보면서 비로소 에리파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림들은 전쟁의 충격으로 말조차 잃어버린 짝궁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림 쪽지에 그려진 것은 온통 탱크와 대포 등 무서운 것들로 가득했거든요. 파트릭은 그림들을 보면서 자신도 악몽을 꾸었을 때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다시는 같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카드를 만들어서 이를 없앴던 기억이 떠올랐지요. 파트릭은 에리파를 돕기 위해 생명 점수가 높은 포켓몬스터 직접 카드를 만들어서 짝꿍을 돕기로 했습니다.
나는 포켓몬스터 스페셜 카드를 만들어 주기로 작정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내 딴에는 최대한 열심히 만들었다. 나는 생명 점수 300의 에리푸르 카드를 만들었다.
연푸른색 눈동자에다가 근육이 잘 발달한 다리, 발톱이 아주 긴 북극곰 비슷한 몬스터를 그렸다. 여기에 ‘무시무시한 꿈 잡아먹기 공경’과 ‘목구멍에서 안 나오는 말 끌어내기 공격’이라는 두 가지 특수 공격 능력을 추가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그럴듯했다. 나는 카드를 필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에리파의 그림들은 내 학습 자료 파일에 챙겼다.
엄마 아빠가 직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주방에 가서 벽장을 뒤졌다. 작은 빨간색 라이터를 찾아서 주머니에 챙겼다. 나는 얼른 내 방으로 돌아와 라이터를 책가방에 숨겼다. 자, 이걸로 내일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68~69쪽에서
안 돼, 혼내지 마
드디어 파트릭이 에리파를 돕는 날, 에리파의 악몽이 담긴 그림 쪽지를 불태우려다 그만 교장 선생님께 들키고 맙니다. 파트릭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에리파가 잃었던 말을 다시 찾게 됩니다.
교장 선생님이 벌ㄸ?ㄱ 일어났다. 교장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는 얘기를 했던가? 음, 어쨌든 교장 선생님은 이제 일어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학교에서 불을 가지고 놀았어! 친구들이 위험에 빠지면 어쩌려고! 너희 부모님을 불러야겠다. 단단히 혼이 나야 해! 어떤 벌을 받을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대체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거냐?”
알았다. 알고 있었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그저 에리파를 무시무시한 꿈에서 구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 순간, “착한 뜻을 품고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속담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 지옥에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부를 테고, 부모님은 속상해 죽을 지경이 될 테고, 나는 이 일로 두고두고 혼이 날 거다.
내가 이 끔찍한 운명을 피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 어떤 목소리가 있었다. 들릭락 말락, 어찌나 작은지 처음에는 내 머릿속에서는 지어낸 상상의 소리인 줄 알았다.
그 작은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안 도, 혼내지 마, 남자애. 나 혼내, 에리파.”
―79~80쪽에서
▣ 작가 소개
글 : 엘렌 리스 Helene Rice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남프랑스를 비롯해서 영국, 캘리포니아, 이탈리아 등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다양한 문화 및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민족학과 사회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 뒤 교사가 되어,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는 나라의 학생들을 주로 가르쳤다. 그러다 어린이 책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출판사에서 그림책을 펴냈다. 《까만 펜과 비밀 쪽지》는 그가 어린이를 위해서 쓴 첫 번째 동화이다.
그림 : 앙투안 데프레 Antoine Deprez
프랑스 릴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와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리옹의 에밀 콜 그래픽아트스쿨에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어린이 책을 비롯해서 신문, 잡지 등에 그림을 그렸다. 그 외에 포스터 작업이나 매장 디스플레이, 순수 미술 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역자 : 이세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국을 읽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등의 인문 교양서와 《곰이 되고 싶어요》 《돌아온 꼬마 니콜라》 《앙코르 꼬마 니콜라》 《꼬마 니콜라와 빨간 풍선》, 수지 모건스턴의 《엠마》 시리즈 외 다수의 어린이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조금씩 달라도 우린 모두 친구예요!
《까만 펜과 비밀 쪽지》에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이 등장한다. 투명해 보일 만큼 얇은 피부를 지닌 에리파도 있고,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인 아리안도 있고, 까만색 사인펜에 비유될 만큼 새까만 파트릭도 있다.
맨 처음에 에리파가 파트릭에게 보이는 행동 때문에 앞으로 인종 차별에 관한 얘기가 펼쳐질 것으로 쉽게 예상이 되지만, 막상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인종 차별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은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 비록 주근깨투성이긴 하지만 우유처럼 피부가 뽀얀 아리안이 까만색 사인펜처럼 새까만 나에게 흑인이니 뭐니 하는 요상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듯이, 피부색은 아이들 사이에서 그저 개인적인 특성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다문화 관련 도서들이 아이들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한 뒤 옳음과 그름을 가르는 데 충실했다면, 이 책에서는 흑백 논리를 벗어나 지극히 어린이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너’와 ‘나’가 아닌 ‘우리’, 즉 화해와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대놓고 다문화 이야기를 꺼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부분에서도 거북함이나 불편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양한 인종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되레 어른들이 본받았음직한 세계 시민의 자세를 만날 수 있을뿐더러,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한없이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친구’라는 든든하고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모습이 읽는 이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이젠 전쟁에 대한 기억도 두렵지 않아요!
이 책의 한 축이 다문화라면, 또 하나의 축은 전쟁 혹은 난민이라 할 수 있다. 에리파는 사실 처음에 파트릭이 까매서 싫었던 게 아니다. 단지, 그동안 전쟁의 위협 속에서 난민으로 떠돌며 지냈기 때문에 누군가와 첫 대면을 할 때 두려움이 앞섰던 것뿐이다. 그것은 에리파가 파트릭의 가방에 불안한 마음을 담은 그림 쪽지를 넣어 두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림 쪽지를 가방에서 발견하던 날, 파트릭은 아리안이 연애편지를 넣어 둔 줄 알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친다. 그런데 막상 펼친 종이쪽지에는 이상한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무시무시한 탱크와 총을 든 군인,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악어…….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서랍에다 차곡차곡 모아 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종이쪽지에 그려진 그림들이 에리파가 밤마다 꾸는 악몽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선생님에게서 에리파가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을 겪은 뒤 말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듣는다. 파트릭은 자신이 악몽에 시달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에리파의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악몽을 없애 주기로 마음을 먹고는 에리파를 위해서 생명 점수가 아주 높은 포켓몬스터 스페셜 카드를 정성들여 만든다. 그리고 에리파가 그린 그림 쪽지들을 불에 태워 악몽과 함께 날려 버리려 하는데……. 그만 교장 선생님에게 들켜서 엄청난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한다. 부모님을 학교로 모시고 오라는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순간, 에리파가 파트릭을 구하기 위해 힘겹게 말문을 연다.
“안 돼, 혼내지 마!”
에리파가 비록 처음에는 멋모르고 파트릭에게 상처를 주지만, 자신이 가진 아픔을 이해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파트릭의 순수하고 진실된 모습에서 크게 감동을 받아 어렵사리 ‘긴급 구조’의 말문을 튼 것이다. 이는 곧 전쟁에 대한 에리파의 아픈 기억이 파트릭의 우정으로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까만 펜과 비밀 쪽지》에서는 전쟁과 난민이라는 어렵고 무거운 주제조차도,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우정 앞에서는 따뜻한 햇살 아래 봄눈처럼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다문화와 전쟁이라는 묵직한 소재는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무르익고, 책장을 덮는 순간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해맑으면서도 쫀득한 우정이 가장 긴 여운을 남긴다. 소재의 무거움이 ‘메시지’로 와 닿지 않고 오롯이 ‘이야기’로 읽힌 덕분이다.
내용 소개
우리 반 새 친구
이 책은 주인공 파트릭이 다니는 학교에 어느 날 에리파가 전학을 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낯선 나라에서 전학 온 에리파는 짝꿍 파트릭에게 첫 만남에서 본의 아니게 큰 충격을 줍니다. 에리파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친구인 파트릭을 처음 만나 생긴 오해 때문이에요. 이로 이해 파트릭 역시 씩씩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화를 냅니다.
“여기, 파트릭 옆에 앉는 거다.”
에리파는 꿈쩍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자, 봐라.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듯이 직접 내 옆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에리파에게 똑같이 해 보라고 손짓을 했다. 에리파는 한참이나 뚱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고새를 가로저었다.
“왜 그러니, 에리파? 앉기 싫어?”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려 있었다. 에리파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때 에리파가 한 행동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에리파는 내 책상 위에 뒹굴고 있던 까만색 사인펜을 집어 들어 플로랑스 선생님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음에 나는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는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나는 하도 화가 나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우아, 대단한 전학생이 오셨네! 까만색 사인펜, 이거 무슨 뜻이야?”
선생님은 나를 눈빛으로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파트릭, 진정해. 에리파는 아마도 흑인 친구를 태어나서 처음 봤을 거야. 못된 마음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미친놈처럼 정신없이 필통을 뒤졌다. 내가 꺼낸 것은 잘못된 글씨를 지우는 하얀색 수정펜이었다. 허깨비처럼 생긴 그 아이를 향해 수정펜을 들이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너는! 네 얼굴은 이 수정펜이랑 똑같거든!” ―14~17쪽에서
책가방 속의 종이쪽지
에리파에게는 남모르는 비밀이 있습니다. 에리파는 체첸에서 전학을 왔는데, 사실 전학을 온 까닭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에요. 짝꿍 파트릭에게도 낯선 나라인 체첸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것도 아주 무섭고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에리파는 말을 못 하게 되었어요. 파트릭은 언제부터인가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 쪽지가 자신의 가방에 담겨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나는 책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그런데 종이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냉큼 낚아챘다. 아리안이구나!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틀림없었다. 아리안이 내 책가방에 쪽지를 몰래 넣어 둔 거다. 나는 쪽지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쪽지 내용이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졌다. 커다란 하트, 그리고 그 안에는 똑 부러지면서도 다정다감한 글이 빼곡히 적혀 있겠지. ……나는 조심스레 쪽지를 한 번, 두 번, 세 번 펼쳤다. 이제 한 번만 더 펼치면 내용이 한눈에 들어올 터였다. 심호흡을 하고 종이를 활짝 펼쳤다.
그런데 종이에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볼펜으로 그린 텡크, 그것도 아주 거대한 탱크였다. 대포에서 폭죽 같은 것이 마구마구 터지는 탱크.
뭐야, 어떤 멍청이가 내 책가방에 이따위 탱크 그림을 넣어 둔 거야? 그래, 톰이겠지. 이렇게 쓸데없는 장난을 칠 사람이 톰밖에 더 있겠어? 그러다 문득 그림 한 귀퉁이에서 서명을 발견했다. 글씨가 아주 작았다. 종이에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들여다보았다. AABABB라고 쓰여 있었다. ―43~45에서
포켓몬스터 스페셜 카드
파트릭은 그림 쪽지들을 보면서 비로소 에리파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림들은 전쟁의 충격으로 말조차 잃어버린 짝궁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림 쪽지에 그려진 것은 온통 탱크와 대포 등 무서운 것들로 가득했거든요. 파트릭은 그림들을 보면서 자신도 악몽을 꾸었을 때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다시는 같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카드를 만들어서 이를 없앴던 기억이 떠올랐지요. 파트릭은 에리파를 돕기 위해 생명 점수가 높은 포켓몬스터 직접 카드를 만들어서 짝꿍을 돕기로 했습니다.
나는 포켓몬스터 스페셜 카드를 만들어 주기로 작정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내 딴에는 최대한 열심히 만들었다. 나는 생명 점수 300의 에리푸르 카드를 만들었다.
연푸른색 눈동자에다가 근육이 잘 발달한 다리, 발톱이 아주 긴 북극곰 비슷한 몬스터를 그렸다. 여기에 ‘무시무시한 꿈 잡아먹기 공경’과 ‘목구멍에서 안 나오는 말 끌어내기 공격’이라는 두 가지 특수 공격 능력을 추가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그럴듯했다. 나는 카드를 필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에리파의 그림들은 내 학습 자료 파일에 챙겼다.
엄마 아빠가 직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주방에 가서 벽장을 뒤졌다. 작은 빨간색 라이터를 찾아서 주머니에 챙겼다. 나는 얼른 내 방으로 돌아와 라이터를 책가방에 숨겼다. 자, 이걸로 내일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68~69쪽에서
안 돼, 혼내지 마
드디어 파트릭이 에리파를 돕는 날, 에리파의 악몽이 담긴 그림 쪽지를 불태우려다 그만 교장 선생님께 들키고 맙니다. 파트릭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에리파가 잃었던 말을 다시 찾게 됩니다.
교장 선생님이 벌ㄸ?ㄱ 일어났다. 교장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는 얘기를 했던가? 음, 어쨌든 교장 선생님은 이제 일어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학교에서 불을 가지고 놀았어! 친구들이 위험에 빠지면 어쩌려고! 너희 부모님을 불러야겠다. 단단히 혼이 나야 해! 어떤 벌을 받을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대체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거냐?”
알았다. 알고 있었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그저 에리파를 무시무시한 꿈에서 구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 순간, “착한 뜻을 품고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속담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 지옥에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부를 테고, 부모님은 속상해 죽을 지경이 될 테고, 나는 이 일로 두고두고 혼이 날 거다.
내가 이 끔찍한 운명을 피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 어떤 목소리가 있었다. 들릭락 말락, 어찌나 작은지 처음에는 내 머릿속에서는 지어낸 상상의 소리인 줄 알았다.
그 작은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안 도, 혼내지 마, 남자애. 나 혼내, 에리파.”
―79~80쪽에서
▣ 작가 소개
글 : 엘렌 리스 Helene Rice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남프랑스를 비롯해서 영국, 캘리포니아, 이탈리아 등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다양한 문화 및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민족학과 사회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 뒤 교사가 되어,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는 나라의 학생들을 주로 가르쳤다. 그러다 어린이 책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 출판사에서 그림책을 펴냈다. 《까만 펜과 비밀 쪽지》는 그가 어린이를 위해서 쓴 첫 번째 동화이다.
그림 : 앙투안 데프레 Antoine Deprez
프랑스 릴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와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리옹의 에밀 콜 그래픽아트스쿨에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어린이 책을 비롯해서 신문, 잡지 등에 그림을 그렸다. 그 외에 포스터 작업이나 매장 디스플레이, 순수 미술 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역자 : 이세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국을 읽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등의 인문 교양서와 《곰이 되고 싶어요》 《돌아온 꼬마 니콜라》 《앙코르 꼬마 니콜라》 《꼬마 니콜라와 빨간 풍선》, 수지 모건스턴의 《엠마》 시리즈 외 다수의 어린이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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