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전 세계 7개국 언어로 소개된 몽골사 연구의 고전!!!
이 책은 1986년 초판(First Edition)이 출간된 이후, 1990년에 새로운 서문을 추가한 보급판(Paperback Edition)이, 2007년에는 개정판(Second Edition)이 출간될 만큼 ‘몽골사’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영미권에서만 초판과 보급판이 22쇄를 찍었고, 1990년대와 2000년 대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모두 아우른 2007년 개정판도 쇄를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초판 출간이후 스페인어판(1990년), 일본어판(1993년), 이탈리아어판(1997년)이 신속하게 출간되었고, 이 책의 주요한 무대가 되는 이란에서도 이란어판이 발간되었다(이란어판은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출간). 이번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 이외에도, 현재 몽골어판과 새로운 스페인어판이 준비 중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세의 몽골족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라시아의 거의 전 지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 된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판의 출간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2007년의 전면개정판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음으로써,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2007년 개정판 이후 서양에서 발간된 최신 성과물을 소개하고 있다.
폭넓은 사료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바라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골제국의 역사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칭기즈 칸이 몽골지역에서 흥기한 이후, 그의 자손들은 남쪽으로 중국, 서쪽으로는 중동과 유럽으로 팽창해갔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은 중국으로 내려와 원조(元朝)를 세운, 중국역사 속의 몽골족에 관해서일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료가 중국 측의 사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 데이비드 모건 교수는 중동과 유럽 측의 사료를 대거 활용한다.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몽골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언어는 중국어와 페르시아어, 즉 이란어라고 한다. 지은이는 페르시아어와 서양의 여러 언어에 익숙하다. 따라서 그는 몽골족의 지배를 받은 중세 페르시아 측의 사료, 이들을 지켜보았거나 위협을 받았던 유럽과 러시아 측의 사료를 중심으로 하고, 서양언어로 번역ㆍ소개된 중국 측의 사료와 논문도 고루 취합하여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사학사 저작의 가치를 지닌 책: 사료분석의 전범을 보여주다!!!
지은이는 당시의 사료를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특히 페르시아의 사료, 즉 라시드 앗 딘, 주베이니, 주즈자니 등 페르시아인 역사가들이 저술한 기록에 나타난 한계와 특징을 분석하고, 각종 사료의 역사적 가치와 그 의미도 상세하게 고찰하며, 사료의 교차ㆍ분석을 통해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분석이 돋보이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몽골비사』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20세기 서양의 위대한 번역가 아서 웨일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 이유로 그는 『몽골비사』의 내용이 『알탄 뎁테르』(당시 몽골족의 공식적인 역사서)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개를 무서워하고 이복형을 살해한 칭기즈 칸의 약점이나 치부를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든다. 지은이는 특히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집사』를, 중국인ㆍ인도인ㆍ튀르크인ㆍ유대인ㆍ페르시아 인ㆍ프랑크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역사를 포괄한 진정한 세계사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시드 앗 딘이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에 대해서도 폭넓게 서술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일칸국의 재상인 라시드 앗 딘이 공무에 바빴으므로 실제 저술은 카샤니가 맡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인정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카샤니의 다른 저술과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비교ㆍ검토한 후, 카샤니는 라시드 앗 딘의 조수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지은이는 라시드 앗 딘의 한계와 약점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보일(Boyle)은 라시드 앗 딘을 ‘최초의 세계사학자’라고까지 추앙했지만, 지은이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라시드 앗 딘의 관점에 편견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지은이는 근대 이후부터 최근(2007년)까지 출간된 각종 연구서의 사료적 가치와 한계 및 그 의미에 대해서도 친절히 짚어준다. 따라서 이 책은 몽골족의 역사를 정리한 통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사학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1986년 이전의 연구 성과들을 서술한 1장과 1986년 이후의 새로운 성과들을 서술한 9장을 독자들이 순서대로 읽게 되면, 근대 이후 축적되어 온 몽골제국 역사 연구의 발전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연구 경향의 세계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몽골제국이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
몽골제국이 세계사에 남긴 영향은 상당히 중요하다.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중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등의 세계에서 개별적인 역사가 진행되었지만, 몽골제국은 이 지역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광범한 교류’의 시대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몽골지역으로 왔던 카르피니와 뤼브룩 등의 선교사,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온 마르코 폴로, 중국에서 로마를 거쳐 잉글랜드까지 건너갔던 랍반 사우마, 북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지나 중국까지 왔던 이븐 바투타 등은 모두 몽골제국이 만들어 낸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은 제국의 동방과 서방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였다. 특히, 서아시아의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역사서는 제국의 동방과 서방을 모두 다루는 ‘세계사 서술’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문헌이다. 또한, 신대륙을 발견하여 ‘대항해시대’의 막을 열었던 콜럼버스가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여러 번 읽으면서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는 사실은 몽골제국의 여파가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몽골족의 중동 침략은 이슬람 문명을 철저히 파괴했다???
지은이는 몽골족의 중동 침략 과정에서 학살된 인구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하여 요령 있게 분석한다. 중동인의 대학살 당시에 생존했지만 몽골족이 점령하지 못한 델리의 은신처에 있으면서 몽골족에게 적대적이었던 주즈자니, 출생 전이어서 대학살을 목격하지 못했고 이후 바그다드에서 몽골제국의 관료로 일한 주베이니.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기에 완성된 역사서에서 대학살이 이뤄졌다고 기록했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몽골족의 중동 지배는 많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므로, 몽골족의 정복으로 그렇게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을리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교수는 대학살에 대해 수정주의적 입장이다. 그는 몽골족의 파괴 조직체가 히틀러의 조직체에 비하여 원시적이었으므로, 당시 역사가들의 기록만으로 몽골족이 이슬람 세계를 철저히 파괴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지은이는 당시의 기록이 모두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한 점에 착안하여, 그 숫자를 허구로만 볼 수는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는 발굴된 당시의 유적에도 주목한다. 수백 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말하는 사료들과는 달리, 몽골족의 공격에 파괴당한 도시의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규모가 그렇게 많은 인구를 수용할 만큼 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지은이는, 학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록자들이 학살의 현장에 있었더라도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런 수치는 결국 통계학적인 정보를 나타낸다기보다는 몽골족의 침략으로 생성된 두려운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몽골족의 중동 침략에서 살육보다 심각한 것은???
사실 중동에서 학살보다 심각했던 것은 몽골족의 침략이 농업에 끼친 영향이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서 파괴된 것은 도시와 산업문명이었고, 농업과 식량생산 분야의 능력은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유럽의 도시에 퍼부어진 아무리 많은 폭격도 유럽 농경지의 옥수수 재배를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큰 강이 없기 때문에, 농업은 인공적인 관개를 위해 자체적으로 고안한 ‘카나트’(qanat )라는 시설에 의존했다. ‘카나트’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필요한 곳까지 물을 끌어오는 지하수로 장치이다. 이중 일부가 몽골족의 침략 과정에서 파괴되었고, 그 때문에 물이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대부분의 농경지는 곧 사막으로 변했다. 그러나 좀 더 긴 안목으로 생각해보면, ‘카나트’는 실제로 파괴되지 않았더라도 지속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빠르게 작동을 멈춘다. 따라서 농민들이 대거 살해되거나 농지를 버리고 달아나게 되면, ‘카나트’의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토지는 만회할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된다. 천성적으로 유목민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몽골족은 제때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을 취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내륙의 농경 지역이 사라지자 도시는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 이전의 규모에 상당하는 도시로 재건되지 못했다. 그래서 단기간의 침략은 충분히 파괴적이었고, 그 규모에서는 사실 20세기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구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파괴가 이슬람 세계에서 엄청나기는 했지만,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페르시아의 다른 지역은 그 당시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고, 페르시아 남부는 몽골족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
칭기즈 칸은 법전을 반포했다???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칭기즈 칸이 반포한 법전으로 알려진, 이른바 『야사』에 관한 것이다. 이 『야사』는 1710년 프랑스의 프티 드 라 크루아(Petis de la Croix)의 『위대한 칭기즈 칸의 역사』(Histoire du Grand Genghizcan)에서 처음 제시된 이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지은이는 이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칭기즈 칸은 1206년의 ‘쿠릴타이’에서 법전을 제정하여 이 위대한 『야사』가 필사되었고, 그 필사본은 몽골족 제왕(諸王)의 보고(寶庫)에 참고용으로 보관되었으며, 그것은 불멸의 구속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라시드 앗 딘이나 주베이니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견해이다. 적어도 몽골족은 사법행정의 측면에서 관대했고, 공식적으로 반포된 법전의 개념이 몽골족에게 없었다. 실제로 중국 원조(元朝)에서도 몽골족의 사법행정은 송조나 명조치하의 제도보다는 훨씬 잔혹하지 않았고, 사형제를 훨씬 적게 활용했다.
▣ 작가 소개
저자 : 데이비드 O.모건
1945년 영국 레스터셔 주(Leicestershire-州) 루터워스(Lutterworth)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에서 근대사를 전공하고, 런던대학(University of London) 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연구소(SOAS) 교수를 지냈고, 위스콘신 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역사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이 책 『몽골족의 역사』 이외에도 『중세 페르시아의 역사, 1040~1797년』(Medieval Persia 1040-1797)가 있으며, 이슬람사ㆍ중동사ㆍ중앙아시아사ㆍ몽골사 분야를 연구하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역자 : 권용철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몽골제국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논문으로 「대원제국 말기 권신 바얀의 정치적 행적」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서문
초판 서문
보급판 서문
개정판 서문
머리말
01 몽골사의 연구
『몽골비사』
중국어 사료
페르시아어 사료
유럽의 사료
근대의 연구
02 스텝지대의 유목민: 칭기즈 칸 이전의 아시아
스텝지대의 사회
몽골족의 신앙
몽골족 이전의 스텝지대 국가
13세기 초의 아시아
03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의 건립
칭기즈 칸의 집권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몽골족의 정복이 끼친 영향
04 몽골제국의 특징과 제도
몽골군
법률
조세제도
통신
몽골족의 통치방식
05 중국의 몽골족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
쿠빌라이의 통치
몽골족과 불교
몽골족의 중국 지배
원제국의 쇠퇴
06 서방을 향한 팽창: 러시아와 페르시아의 몽골족
러시아와 동유럽에 대한 침공
킵차크칸국
몽골족과 중동
훌레구의 원정
페르시아의 일칸들
가잔과 그의 개혁
최후의 일칸들
07 몽골족과 유럽
유럽과 아시아
최초의 직접 접촉
일칸과 서구의 기독교 세계
동방에서 보는 유럽의 이미지
몽골족의 유산
08 몽골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09 1985년 이후의 몽골제국사 연구
사료
연구
주석
주요 사건 연대기
세계표
참고문헌
추가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전 세계 7개국 언어로 소개된 몽골사 연구의 고전!!!
이 책은 1986년 초판(First Edition)이 출간된 이후, 1990년에 새로운 서문을 추가한 보급판(Paperback Edition)이, 2007년에는 개정판(Second Edition)이 출간될 만큼 ‘몽골사’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영미권에서만 초판과 보급판이 22쇄를 찍었고, 1990년대와 2000년 대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모두 아우른 2007년 개정판도 쇄를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초판 출간이후 스페인어판(1990년), 일본어판(1993년), 이탈리아어판(1997년)이 신속하게 출간되었고, 이 책의 주요한 무대가 되는 이란에서도 이란어판이 발간되었다(이란어판은 저작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출간). 이번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 이외에도, 현재 몽골어판과 새로운 스페인어판이 준비 중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세의 몽골족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라시아의 거의 전 지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 된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판의 출간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2007년의 전면개정판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음으로써,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2007년 개정판 이후 서양에서 발간된 최신 성과물을 소개하고 있다.
폭넓은 사료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바라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골제국의 역사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칭기즈 칸이 몽골지역에서 흥기한 이후, 그의 자손들은 남쪽으로 중국, 서쪽으로는 중동과 유럽으로 팽창해갔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은 중국으로 내려와 원조(元朝)를 세운, 중국역사 속의 몽골족에 관해서일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료가 중국 측의 사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 데이비드 모건 교수는 중동과 유럽 측의 사료를 대거 활용한다.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몽골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언어는 중국어와 페르시아어, 즉 이란어라고 한다. 지은이는 페르시아어와 서양의 여러 언어에 익숙하다. 따라서 그는 몽골족의 지배를 받은 중세 페르시아 측의 사료, 이들을 지켜보았거나 위협을 받았던 유럽과 러시아 측의 사료를 중심으로 하고, 서양언어로 번역ㆍ소개된 중국 측의 사료와 논문도 고루 취합하여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살펴본다.
사학사 저작의 가치를 지닌 책: 사료분석의 전범을 보여주다!!!
지은이는 당시의 사료를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특히 페르시아의 사료, 즉 라시드 앗 딘, 주베이니, 주즈자니 등 페르시아인 역사가들이 저술한 기록에 나타난 한계와 특징을 분석하고, 각종 사료의 역사적 가치와 그 의미도 상세하게 고찰하며, 사료의 교차ㆍ분석을 통해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분석이 돋보이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몽골비사』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20세기 서양의 위대한 번역가 아서 웨일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 이유로 그는 『몽골비사』의 내용이 『알탄 뎁테르』(당시 몽골족의 공식적인 역사서)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개를 무서워하고 이복형을 살해한 칭기즈 칸의 약점이나 치부를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든다. 지은이는 특히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집사』를, 중국인ㆍ인도인ㆍ튀르크인ㆍ유대인ㆍ페르시아 인ㆍ프랑크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역사를 포괄한 진정한 세계사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시드 앗 딘이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에 대해서도 폭넓게 서술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일칸국의 재상인 라시드 앗 딘이 공무에 바빴으므로 실제 저술은 카샤니가 맡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인정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카샤니의 다른 저술과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비교ㆍ검토한 후, 카샤니는 라시드 앗 딘의 조수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지은이는 라시드 앗 딘의 한계와 약점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보일(Boyle)은 라시드 앗 딘을 ‘최초의 세계사학자’라고까지 추앙했지만, 지은이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라시드 앗 딘의 관점에 편견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지은이는 근대 이후부터 최근(2007년)까지 출간된 각종 연구서의 사료적 가치와 한계 및 그 의미에 대해서도 친절히 짚어준다. 따라서 이 책은 몽골족의 역사를 정리한 통사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사학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1986년 이전의 연구 성과들을 서술한 1장과 1986년 이후의 새로운 성과들을 서술한 9장을 독자들이 순서대로 읽게 되면, 근대 이후 축적되어 온 몽골제국 역사 연구의 발전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연구 경향의 세계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몽골제국이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
몽골제국이 세계사에 남긴 영향은 상당히 중요하다.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중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등의 세계에서 개별적인 역사가 진행되었지만, 몽골제국은 이 지역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광범한 교류’의 시대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몽골지역으로 왔던 카르피니와 뤼브룩 등의 선교사,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온 마르코 폴로, 중국에서 로마를 거쳐 잉글랜드까지 건너갔던 랍반 사우마, 북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지나 중국까지 왔던 이븐 바투타 등은 모두 몽골제국이 만들어 낸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은 제국의 동방과 서방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였다. 특히, 서아시아의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역사서는 제국의 동방과 서방을 모두 다루는 ‘세계사 서술’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문헌이다. 또한, 신대륙을 발견하여 ‘대항해시대’의 막을 열었던 콜럼버스가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여러 번 읽으면서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는 사실은 몽골제국의 여파가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몽골족의 중동 침략은 이슬람 문명을 철저히 파괴했다???
지은이는 몽골족의 중동 침략 과정에서 학살된 인구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하여 요령 있게 분석한다. 중동인의 대학살 당시에 생존했지만 몽골족이 점령하지 못한 델리의 은신처에 있으면서 몽골족에게 적대적이었던 주즈자니, 출생 전이어서 대학살을 목격하지 못했고 이후 바그다드에서 몽골제국의 관료로 일한 주베이니.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기에 완성된 역사서에서 대학살이 이뤄졌다고 기록했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몽골족의 중동 지배는 많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므로, 몽골족의 정복으로 그렇게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을리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교수는 대학살에 대해 수정주의적 입장이다. 그는 몽골족의 파괴 조직체가 히틀러의 조직체에 비하여 원시적이었으므로, 당시 역사가들의 기록만으로 몽골족이 이슬람 세계를 철저히 파괴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지은이는 당시의 기록이 모두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한 점에 착안하여, 그 숫자를 허구로만 볼 수는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는 발굴된 당시의 유적에도 주목한다. 수백 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말하는 사료들과는 달리, 몽골족의 공격에 파괴당한 도시의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규모가 그렇게 많은 인구를 수용할 만큼 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지은이는, 학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록자들이 학살의 현장에 있었더라도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런 수치는 결국 통계학적인 정보를 나타낸다기보다는 몽골족의 침략으로 생성된 두려운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몽골족의 중동 침략에서 살육보다 심각한 것은???
사실 중동에서 학살보다 심각했던 것은 몽골족의 침략이 농업에 끼친 영향이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서 파괴된 것은 도시와 산업문명이었고, 농업과 식량생산 분야의 능력은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유럽의 도시에 퍼부어진 아무리 많은 폭격도 유럽 농경지의 옥수수 재배를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큰 강이 없기 때문에, 농업은 인공적인 관개를 위해 자체적으로 고안한 ‘카나트’(qanat )라는 시설에 의존했다. ‘카나트’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필요한 곳까지 물을 끌어오는 지하수로 장치이다. 이중 일부가 몽골족의 침략 과정에서 파괴되었고, 그 때문에 물이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대부분의 농경지는 곧 사막으로 변했다. 그러나 좀 더 긴 안목으로 생각해보면, ‘카나트’는 실제로 파괴되지 않았더라도 지속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빠르게 작동을 멈춘다. 따라서 농민들이 대거 살해되거나 농지를 버리고 달아나게 되면, ‘카나트’의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토지는 만회할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된다. 천성적으로 유목민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몽골족은 제때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을 취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내륙의 농경 지역이 사라지자 도시는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 이전의 규모에 상당하는 도시로 재건되지 못했다. 그래서 단기간의 침략은 충분히 파괴적이었고, 그 규모에서는 사실 20세기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구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파괴가 이슬람 세계에서 엄청나기는 했지만,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페르시아의 다른 지역은 그 당시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고, 페르시아 남부는 몽골족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
칭기즈 칸은 법전을 반포했다???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칭기즈 칸이 반포한 법전으로 알려진, 이른바 『야사』에 관한 것이다. 이 『야사』는 1710년 프랑스의 프티 드 라 크루아(Petis de la Croix)의 『위대한 칭기즈 칸의 역사』(Histoire du Grand Genghizcan)에서 처음 제시된 이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지은이는 이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칭기즈 칸은 1206년의 ‘쿠릴타이’에서 법전을 제정하여 이 위대한 『야사』가 필사되었고, 그 필사본은 몽골족 제왕(諸王)의 보고(寶庫)에 참고용으로 보관되었으며, 그것은 불멸의 구속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라시드 앗 딘이나 주베이니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견해이다. 적어도 몽골족은 사법행정의 측면에서 관대했고, 공식적으로 반포된 법전의 개념이 몽골족에게 없었다. 실제로 중국 원조(元朝)에서도 몽골족의 사법행정은 송조나 명조치하의 제도보다는 훨씬 잔혹하지 않았고, 사형제를 훨씬 적게 활용했다.
▣ 작가 소개
저자 : 데이비드 O.모건
1945년 영국 레스터셔 주(Leicestershire-州) 루터워스(Lutterworth)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에서 근대사를 전공하고, 런던대학(University of London) 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연구소(SOAS) 교수를 지냈고, 위스콘신 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같은 대학 역사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이 책 『몽골족의 역사』 이외에도 『중세 페르시아의 역사, 1040~1797년』(Medieval Persia 1040-1797)가 있으며, 이슬람사ㆍ중동사ㆍ중앙아시아사ㆍ몽골사 분야를 연구하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역자 : 권용철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몽골제국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논문으로 「대원제국 말기 권신 바얀의 정치적 행적」이 있다.
▣ 주요 목차
한국어판 서문
초판 서문
보급판 서문
개정판 서문
머리말
01 몽골사의 연구
『몽골비사』
중국어 사료
페르시아어 사료
유럽의 사료
근대의 연구
02 스텝지대의 유목민: 칭기즈 칸 이전의 아시아
스텝지대의 사회
몽골족의 신앙
몽골족 이전의 스텝지대 국가
13세기 초의 아시아
03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의 건립
칭기즈 칸의 집권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몽골족의 정복이 끼친 영향
04 몽골제국의 특징과 제도
몽골군
법률
조세제도
통신
몽골족의 통치방식
05 중국의 몽골족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
쿠빌라이의 통치
몽골족과 불교
몽골족의 중국 지배
원제국의 쇠퇴
06 서방을 향한 팽창: 러시아와 페르시아의 몽골족
러시아와 동유럽에 대한 침공
킵차크칸국
몽골족과 중동
훌레구의 원정
페르시아의 일칸들
가잔과 그의 개혁
최후의 일칸들
07 몽골족과 유럽
유럽과 아시아
최초의 직접 접촉
일칸과 서구의 기독교 세계
동방에서 보는 유럽의 이미지
몽골족의 유산
08 몽골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09 1985년 이후의 몽골제국사 연구
사료
연구
주석
주요 사건 연대기
세계표
참고문헌
추가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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