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33년만에 공개된 5·18 광주사태의 진상
본서는 201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광주 5·18사태에 관한 전체 기록을 기본 자료로 5·18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본부에서는 5·18 광주사태에 시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증언과 당시 작성되어 배포되었던 유언비어 벽보나 선동삐라 등 모든 자료들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이제 광주사태의 진상은 전 세계인에게 공개되었다.
이 책은 광주 민주화운동 본부에서 제공한 자료의 안내를 받아 5·18 광주사태의 현장 한 가운데로 독자들을 안내해준다. 이제 5·18의 평가에 대한 논쟁은 잠시 미뤄두고 그 진실부터 알아보자.
단단한 사료들의 바탕 위에 명쾌하게 5·18을 둘러싼 각종 사건들을 해석하고 해설하는 본서『역사로서의 5·18』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제2권 : 5·18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제3권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비화들
제4권 : 5·18재판 법리의 모순
33년 만에 밝혀진 5·18 광주사태의 진상과 진실!
''광주사태''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려지는 5·18 사건의 정론 및 바른 해석을 위한 지침서
본서 저자는 1980년 5월의 사건 해석을 위한 몇 가지 명제를 제시하는데, 그 중 시대 배경을 이루는 정치적 동인(動因)에 대한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명제 1: 5월 시위구호는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명제 2: 학생이 아니라, 북한 세력이 전두환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제 1: 5월 시위구호는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5월 중순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는데, “개헌 반대”는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고, 그 새 헌법에 의거하여 1년 내로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탄생한 과도정부였던 반면 1980년 봄의 시위는 과도정부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것을 훼방하기 위한 시위였었기에 그 시위구호가 “개헌 반대”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사건 이래 적화통일세력은 줄곧 무장봉기에 위한 공산주의 혁명 노선을 유지하였다. 1975년 월남에서 도시 게릴라 방법에 의한 무장봉기로 공산주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을 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는 남한에서 그 방법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구체화하였다. 이것이 1979년 11월의 〈명동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부터는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으로 발전하고, 이듬해 1980년 3월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을 지지하던 세력의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잔당이므로 과도정부는 헌법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고, 민중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시킨 후 김대중이 임명하는 쉐도우 내각이 새 헌법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집권 전략이 성사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도정부의 선거법 개정을 방해하여야 했으며 그래서 당시 시위 구호가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다.
이것은 당시 학생으로서 시위현장에 있었던 시대의 증인인 저자 자신이 아는 사실이요 〈5·18 이전 성명서〉로서의 기록물들에 명시되어있는 사실이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친 시민군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선거가 아닌 무장봉기의 수단에 의하여 정권을 교체시키려던 의지가 시민군 성명서들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역사로서의 5·18』독자들은 5·18 사건의 정치적 동인은 합헌적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이었다는 사실을 본서 제1권 2장 “5·18은 사전에 준비된 무장폭동인가 사후의 저항운동인가?” 제3권 7장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8장 “5·18이 헌법수호라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9장 “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1장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제4권 12장 “5·18의 민족민주에 대한 법리해석의 문제” 그리고 13장 “광주운동권사에 비춰본 5·18” 등에서 분명하게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제 2: 학생이 아니라, 북한 세력이 전두환을 제거하려고 했다.
시민군이 악을 쓰며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를 외쳤으나, 그들은 전두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난생 처음으로 그 이름 석자를 들어 보았을 뿐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인물은 애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시민군이 아무런 생각 없이 외친 구호에는 별 의미가 없었으되 "아무개를 찢어죽이자"는 구호는 본래 북한의 군중대회 구호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강명도는 1996년에 그의 저서『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북한 당국이 전두환을 공적 1호로 삼고 제거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국가관이 분명하며, 확실하게 대한민국 편에 서 있던 인물이 북한의 첫 번째 공적이었다.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여배우 최은희가 납북되었을 때, 전두환 소장이 1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본서의 저자는 그 부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 편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두환 사단장이 부임하자마자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오산리에서 금촌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는 매일 새벽 6시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사단장이 선두에서 뛰는 그 긴 구보행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서려 있었고, 전 부대장병들의 우렁찬 함성에서 조국을 지키려는 뜨거운 충정이 느껴졌다.
한편 북한에서는 "내가 여자지만 가장이고 가르치는 학생이 수백 명인데 어떻게 사람을 무작정 끌고 올 수 있느냐"고 따지는 최은희의 말에 김정일의 부관은 "3년 있으면 남조선 해방하고 갈 텐데 3년만 기다리라.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하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지 3년째 되는 1980년에 그녀는 북한에서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뉴스도 들었다. 북한 고위층이 말하는 통일의 기회란 남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면 남침 땅굴 등으로 게릴라 부대를 침투시켜 내전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탈북자들도 북한의 적화통일 전술은 국군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게릴라 부대를 땅굴로 침투시키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바, 이런 전망에서 살펴볼 때, 북한이 1980년대 초에 그토록 전두환을 제거하려고 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북한 당국이 1980년에 통일이 완성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최은희를 회유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전두환이 남침 땅굴을 찾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전방 지역에는 여전히 지뢰가 많았으며 남침땅굴 측량기사로 일하다가 귀순한 김부성 씨도 자기가 판 땅굴을 찾다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었다. 국방과학연구소 기술진마저 갱도가 있을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을 때, 만약 전두환 소장이 포기하였더라면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제3땅굴을 영영 찾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장에서 사병들의 선두에서 달리던 전 장군은 지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최전방에서도 마침내 1978년 10월 17일 땅굴을 찾아내는 명장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육군 본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여름 보안 사령관이라는 새 직책에 임명되었다.
1980년 5월 19일 서울의 대학가에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고 쓴 대자보가 나붙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라서 수도권에서 편하게 근무하였으므로 퇴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왜곡된 정보로 학생들을 속일 수는 있었어도 서울에서는 시위대를 형성할 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다. 광주 사태 33주년의 시점에서 그 때를 뒤돌아보아도 남침 땅굴을 찾아낸 인물은 안보의 기둥이었으며, 학생들 편에서는 국가 안보의 기둥을 제거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북한 편에서는 전두환이 적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제거하려고 하였다.
합헌적 선거가 아니라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던 김대중 진영 편에서도 전두환이 가장 큰 걸림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때는 시위 주동자들이 전두환도 최규하 대통령 및 신현확 총리와 마찬가지로 유신잔당이이기에 숙청 대상이라고 선동하더니, 15년 후 5·18 재판 때는 말바꾸기를 하여 시민군은 ''유신잔당'' 편이었는데 전두환이 유신잔당에 반기를 들기에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는 허위 주장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본서 독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본서 제1권 1장 1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는 자들의 소동", 2장 3 "5·18 이전에 민중봉기 선동한 5·18 성명서", 제2권 5장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 제3권 7장 5 " 말바꾸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법리" 그리고 제4권 12장 3 "5·18 성명서 상투어에 반영된 이념" 등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김대령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후 미국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인식론 연구논문으로 Ph.D. 학위를 받았다. 그 즈음 대학가 대자보로 나붙었던 5·18 성명서들을 꼼꼼히 읽고 있었던 저자는 19일부터 공세 수위를 높인 시위를 전개하도록 사전 준비된 사실들을 현장 목격하였다. 5·18 재판 때 이 사실을 감추고 말바꾸기를 한 쪽이 승자가 된 후 다시 여러 해가 지나 2003년 연초에 북핵 위기의 충격이 있었을 때 또 하나의 충격이 있었다. 공교육이 청소년들에게 왜곡된 사관을 가르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5·18에 대하여 왜곡된 주장을 공유하는 쪽에서 북핵 두둔 혹은 종북 발언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기독교적 가치관을 위한 선택이 분명해졌다. 왜곡된 사관을 더 이상 방관하며 침묵할 때가 아니라, 이제는 논객의 붓을 들 용기를 선택할 때가 된 것이다. 이념 양극화의 돌쩌귀가 광주사태에 대한 사관일진대, 그 사관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5·18 사관을 객관화하는 작업에는 사학을 바탕으로 한 인식론 연구가의 참여가 필요하므로 저자가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 주요 목차
제7장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1. 광주청문회 증인들의 숨바꼭질 관전
2. 김대중과 정동년의 광주청문회 위증
3. 5·18에 맴도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역사적 전망
4. 국민이 인식하는 바와 전혀 다른 5·18재판 판결
5. 말바꾸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법리
6. 두 개의 내란설 vs. 제3세력의 개입설
7. 차명 대필 활동가 박현채의 민란 선동논리
8. 사라진 5·18비밀문서와 보존된 기록들
9. 타임머신 독심술에 의한 판결 사례
가. 1심의 황당한 판단
나. 2심의 황당한 법리 해석
제8장 5·18이 헌법수호라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 5·18 이전의 성명서를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2. 시민군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세력이었는가?
3.‘신현확 물러가라’구호의 꼴불견
제9장 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 약탈과 도덕성 결여에 의한 국민 결집?
2. 무장봉기파와 수습위 간의 다툼
3. 시민 연행에 의한 결집?
4.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했던 시민들
5. 코뮌주의자들과 수습위 간의 다툼
6. 북한 지령문처럼 보이는 5·18성명서
7. 차량을 약탈하는 헌법기관?
8. 경상도 차량에 불 지르는 헌법기관?
9. 지역감정 자극 유언비어
제10장 중학생 시민군이 헌법기관이라고?
1. 중고생 봉기위원회가 헌법기관이었는가?
2. 중고생·청소년 시민군
3. 해남시민군이 되어 송정리에서 죽은 영암 고등학생
4. 김영찬군과 상필이는 헌법기관이었는가?
5. 윤기권의 월북은 헌법기관의 월북이었는가?
6. 고등학생 시민군 김효석군의 무용담
제11장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1.‘광주해방구’주역으로서의 코뮌주의 혁명가들
2. 코뮌주의자들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법리 잣대
3. 〈광주해방구〉를 설치한 코뮌주의자들의〈민족민주 혁명론〉
33년만에 공개된 5·18 광주사태의 진상
본서는 201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광주 5·18사태에 관한 전체 기록을 기본 자료로 5·18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본부에서는 5·18 광주사태에 시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증언과 당시 작성되어 배포되었던 유언비어 벽보나 선동삐라 등 모든 자료들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이제 광주사태의 진상은 전 세계인에게 공개되었다.
이 책은 광주 민주화운동 본부에서 제공한 자료의 안내를 받아 5·18 광주사태의 현장 한 가운데로 독자들을 안내해준다. 이제 5·18의 평가에 대한 논쟁은 잠시 미뤄두고 그 진실부터 알아보자.
단단한 사료들의 바탕 위에 명쾌하게 5·18을 둘러싼 각종 사건들을 해석하고 해설하는 본서『역사로서의 5·18』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제2권 : 5·18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제3권 :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비화들
제4권 : 5·18재판 법리의 모순
33년 만에 밝혀진 5·18 광주사태의 진상과 진실!
''광주사태''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려지는 5·18 사건의 정론 및 바른 해석을 위한 지침서
본서 저자는 1980년 5월의 사건 해석을 위한 몇 가지 명제를 제시하는데, 그 중 시대 배경을 이루는 정치적 동인(動因)에 대한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명제 1: 5월 시위구호는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명제 2: 학생이 아니라, 북한 세력이 전두환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제 1: 5월 시위구호는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5월 중순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는데, “개헌 반대”는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고, 그 새 헌법에 의거하여 1년 내로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탄생한 과도정부였던 반면 1980년 봄의 시위는 과도정부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것을 훼방하기 위한 시위였었기에 그 시위구호가 “개헌 반대”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사건 이래 적화통일세력은 줄곧 무장봉기에 위한 공산주의 혁명 노선을 유지하였다. 1975년 월남에서 도시 게릴라 방법에 의한 무장봉기로 공산주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을 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는 남한에서 그 방법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구체화하였다. 이것이 1979년 11월의 〈명동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부터는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으로 발전하고, 이듬해 1980년 3월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을 지지하던 세력의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잔당이므로 과도정부는 헌법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고, 민중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시킨 후 김대중이 임명하는 쉐도우 내각이 새 헌법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집권 전략이 성사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도정부의 선거법 개정을 방해하여야 했으며 그래서 당시 시위 구호가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다.
이것은 당시 학생으로서 시위현장에 있었던 시대의 증인인 저자 자신이 아는 사실이요 〈5·18 이전 성명서〉로서의 기록물들에 명시되어있는 사실이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친 시민군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선거가 아닌 무장봉기의 수단에 의하여 정권을 교체시키려던 의지가 시민군 성명서들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역사로서의 5·18』독자들은 5·18 사건의 정치적 동인은 합헌적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이었다는 사실을 본서 제1권 2장 “5·18은 사전에 준비된 무장폭동인가 사후의 저항운동인가?” 제3권 7장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8장 “5·18이 헌법수호라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9장 “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1장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제4권 12장 “5·18의 민족민주에 대한 법리해석의 문제” 그리고 13장 “광주운동권사에 비춰본 5·18” 등에서 분명하게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제 2: 학생이 아니라, 북한 세력이 전두환을 제거하려고 했다.
시민군이 악을 쓰며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를 외쳤으나, 그들은 전두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난생 처음으로 그 이름 석자를 들어 보았을 뿐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인물은 애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시민군이 아무런 생각 없이 외친 구호에는 별 의미가 없었으되 "아무개를 찢어죽이자"는 구호는 본래 북한의 군중대회 구호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강명도는 1996년에 그의 저서『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북한 당국이 전두환을 공적 1호로 삼고 제거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국가관이 분명하며, 확실하게 대한민국 편에 서 있던 인물이 북한의 첫 번째 공적이었다.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여배우 최은희가 납북되었을 때, 전두환 소장이 1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본서의 저자는 그 부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 편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두환 사단장이 부임하자마자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오산리에서 금촌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는 매일 새벽 6시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사단장이 선두에서 뛰는 그 긴 구보행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서려 있었고, 전 부대장병들의 우렁찬 함성에서 조국을 지키려는 뜨거운 충정이 느껴졌다.
한편 북한에서는 "내가 여자지만 가장이고 가르치는 학생이 수백 명인데 어떻게 사람을 무작정 끌고 올 수 있느냐"고 따지는 최은희의 말에 김정일의 부관은 "3년 있으면 남조선 해방하고 갈 텐데 3년만 기다리라.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하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지 3년째 되는 1980년에 그녀는 북한에서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뉴스도 들었다. 북한 고위층이 말하는 통일의 기회란 남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면 남침 땅굴 등으로 게릴라 부대를 침투시켜 내전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탈북자들도 북한의 적화통일 전술은 국군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게릴라 부대를 땅굴로 침투시키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바, 이런 전망에서 살펴볼 때, 북한이 1980년대 초에 그토록 전두환을 제거하려고 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북한 당국이 1980년에 통일이 완성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최은희를 회유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전두환이 남침 땅굴을 찾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전방 지역에는 여전히 지뢰가 많았으며 남침땅굴 측량기사로 일하다가 귀순한 김부성 씨도 자기가 판 땅굴을 찾다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었다. 국방과학연구소 기술진마저 갱도가 있을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을 때, 만약 전두환 소장이 포기하였더라면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제3땅굴을 영영 찾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장에서 사병들의 선두에서 달리던 전 장군은 지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최전방에서도 마침내 1978년 10월 17일 땅굴을 찾아내는 명장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육군 본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여름 보안 사령관이라는 새 직책에 임명되었다.
1980년 5월 19일 서울의 대학가에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고 쓴 대자보가 나붙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라서 수도권에서 편하게 근무하였으므로 퇴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왜곡된 정보로 학생들을 속일 수는 있었어도 서울에서는 시위대를 형성할 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다. 광주 사태 33주년의 시점에서 그 때를 뒤돌아보아도 남침 땅굴을 찾아낸 인물은 안보의 기둥이었으며, 학생들 편에서는 국가 안보의 기둥을 제거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북한 편에서는 전두환이 적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제거하려고 하였다.
합헌적 선거가 아니라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던 김대중 진영 편에서도 전두환이 가장 큰 걸림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때는 시위 주동자들이 전두환도 최규하 대통령 및 신현확 총리와 마찬가지로 유신잔당이이기에 숙청 대상이라고 선동하더니, 15년 후 5·18 재판 때는 말바꾸기를 하여 시민군은 ''유신잔당'' 편이었는데 전두환이 유신잔당에 반기를 들기에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는 허위 주장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본서 독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본서 제1권 1장 1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는 자들의 소동", 2장 3 "5·18 이전에 민중봉기 선동한 5·18 성명서", 제2권 5장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 제3권 7장 5 " 말바꾸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법리" 그리고 제4권 12장 3 "5·18 성명서 상투어에 반영된 이념" 등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김대령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후 미국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인식론 연구논문으로 Ph.D. 학위를 받았다. 그 즈음 대학가 대자보로 나붙었던 5·18 성명서들을 꼼꼼히 읽고 있었던 저자는 19일부터 공세 수위를 높인 시위를 전개하도록 사전 준비된 사실들을 현장 목격하였다. 5·18 재판 때 이 사실을 감추고 말바꾸기를 한 쪽이 승자가 된 후 다시 여러 해가 지나 2003년 연초에 북핵 위기의 충격이 있었을 때 또 하나의 충격이 있었다. 공교육이 청소년들에게 왜곡된 사관을 가르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5·18에 대하여 왜곡된 주장을 공유하는 쪽에서 북핵 두둔 혹은 종북 발언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기독교적 가치관을 위한 선택이 분명해졌다. 왜곡된 사관을 더 이상 방관하며 침묵할 때가 아니라, 이제는 논객의 붓을 들 용기를 선택할 때가 된 것이다. 이념 양극화의 돌쩌귀가 광주사태에 대한 사관일진대, 그 사관을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5·18 사관을 객관화하는 작업에는 사학을 바탕으로 한 인식론 연구가의 참여가 필요하므로 저자가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 주요 목차
제7장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1. 광주청문회 증인들의 숨바꼭질 관전
2. 김대중과 정동년의 광주청문회 위증
3. 5·18에 맴도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역사적 전망
4. 국민이 인식하는 바와 전혀 다른 5·18재판 판결
5. 말바꾸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법리
6. 두 개의 내란설 vs. 제3세력의 개입설
7. 차명 대필 활동가 박현채의 민란 선동논리
8. 사라진 5·18비밀문서와 보존된 기록들
9. 타임머신 독심술에 의한 판결 사례
가. 1심의 황당한 판단
나. 2심의 황당한 법리 해석
제8장 5·18이 헌법수호라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 5·18 이전의 성명서를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2. 시민군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세력이었는가?
3.‘신현확 물러가라’구호의 꼴불견
제9장 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 약탈과 도덕성 결여에 의한 국민 결집?
2. 무장봉기파와 수습위 간의 다툼
3. 시민 연행에 의한 결집?
4.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했던 시민들
5. 코뮌주의자들과 수습위 간의 다툼
6. 북한 지령문처럼 보이는 5·18성명서
7. 차량을 약탈하는 헌법기관?
8. 경상도 차량에 불 지르는 헌법기관?
9. 지역감정 자극 유언비어
제10장 중학생 시민군이 헌법기관이라고?
1. 중고생 봉기위원회가 헌법기관이었는가?
2. 중고생·청소년 시민군
3. 해남시민군이 되어 송정리에서 죽은 영암 고등학생
4. 김영찬군과 상필이는 헌법기관이었는가?
5. 윤기권의 월북은 헌법기관의 월북이었는가?
6. 고등학생 시민군 김효석군의 무용담
제11장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1.‘광주해방구’주역으로서의 코뮌주의 혁명가들
2. 코뮌주의자들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법리 잣대
3. 〈광주해방구〉를 설치한 코뮌주의자들의〈민족민주 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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