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객지 - 황석영 중단편전집1
다섯 채의 합숙소 왼편에 잇달아 지어진 서기실에는 사흘 동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굳게 닫힌 창구 위에 작업조의 명단이 찢겨진 채 붙어 있고 인부들은 부엌 옆의 흙벽에
기대거나 문가 툇마루에 앉아서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축들이 최십장의
아내에게 식사를 재촉하자 여자는 부엌문을 소리나게 닫고 안에서 짜증을 부렸다
서기들이 오기 전엔 못 줘요. 인부들은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전표 남은 것 있니? 웬걸, 나두 다 썼네.. 빚이 이천원일세
탑」, 「객지」,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섬섬옥수」, <장길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등 황석영이 절창으로 분출해낸 작품들을 쭉 따라가다 보면 마치 여러 형체의 산을 한품에 안고 유유자적하는 하나의 산맥 속에 문득 들어선 듯하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마치 이런저런 들풀과 잡목들의 훈향까지 감지되는 「삼포 가는 길」같은 서정이 있는가 하면, 뾰족뾰족한 바위산의 벼랑에서 「객지」처럼 '꼭 내 일이 아니라도 좋다'며 솟구치는 매의 기상도 있고, 또 <장길산>처럼 우뚝선 채 긴 능선으로 달려나가는 서사의 거산(巨山)도 있다. 이처럼 호방하면서도 섬농(纖 )하니, 한마디로 옛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굽고 고부리고 뛰고 나아감이 스스롭다는 굴곡초매(屈曲超邁)의 격이 아니던가. - 임규찬(문학평론가·성공회대 교수)
황석영 문학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위협하는 부당한 힘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기록이다. 경이로운 것은 그 투쟁이 증오의 발산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며, 맹목적인 파괴와 전복 대신 늘 새로운 창조와 생성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분단과 산업화로 인한 파행과 박탈의 현실을 생생하게 목도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도 결코 훼손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거듭 확인한다. 그러므로 황석영의 소설은 한국인의 역동적인 근대 경험에 대한 가장 정직한 윤리적 동참이자,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치열한 예술적 탐색이다. 한국의 현대문학은 황석영에 이르러 감동과 깨달음, 상상력과 역사의식, 미학과 윤리학의 심오한 통일을 완성했다. - 진정석(문학평론가)
황석영의 소설은 어느 것이나 그 배후에 불길이 어른거린다. 그 불길은 시대의 참상과 무죄한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아픈 분노의 불길이자 혁명과 유토피아로 상징되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타는 듯한 열망의 불길이다. 그 불길은 그러나 섣불리 바깥을 향해 번져가며 즉각적인 화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내연하며 오래도록 타오르는 은근함 또한 갖추고 있다.
황석영의 밀도 높은 무장과 풍부한 장면 묘사, 견고한 구성 등은 바로 이러한 생생한 원체험의 불길을 다스리고 갈무리함으로써 얻어진, 오랜 수련과 탐구의 결정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 시대에 아직도 장인(匠人)으로서의 소설가상을 구현하고 있는 희귀한 존재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남진우(문학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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