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자부의 세기
최근 일부 국학 연구자(한문학, 미술사, 한국사)들이 한국사의 18세기 중 몇몇 국면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탈중화론, 진경문화, 실학과 같은 문화적 흐름과 영?정조 시대의 새로운 군주관(절대군주론) 등의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영?정조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려는 움직임이라 여겨진다.
18세기는 한국에서만 의미 있는 세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18세기가 상공업 발달, 문예부흥, 영?정조 같은 탕평군주의 시대였다면, 서양에서도 18세기는 절대왕정, 계몽사상, 시민혁명의 시대였고, 중국은 경제 번영, 문운, 평화의 시대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자부의 세기였던 것이다.
비교사를 통해 본 조선의 18세기
역사학이 근대화 과정의 산물이듯, 비교사 역시 그 일환이었다.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세이고 탈중심주의가 키워드이지만, 연구방법으로서 비교사는 여전히 유용하다. 비교는 반드시 우열과 성패를 가늠하기보다, 그저 각각의 특성과 그 원인을 구명하는 발견수단으로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와 동?서양사를 모두 아우르는 연구 지평을 갖는 역사학회는 항상 공동주제의 기획에서 이러한 비교사의 방법을 의식해왔다. 《정조와 18세기―역사로서 18세기, 서구와 동아시아의 비교사적 성찰》은 바로 이 비교사의 방법을 통해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서구 및 동아시아와 교차 검토한다. 2011년 12월 열린 역사학회의 학술대회에서 여러 연구자들은 조선의 18세기가 청, 일본, 그리고 서양의 18세기와 어떻게 달랐고, 왜 그랬는가를 살핌으로써 해당 시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이 책은 그 결실이다.
《정조와 18세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수창은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에서 18세기 조선의 정치현실과 정치이념을 17~19세기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그는 특히 18세기 조선의 탕평정치나 그와 연관된 정치사상에서 진보성의 계기를 확인하기 힘들다고 강조한다. 18세기 조선의 절대군주제론은 그저 17세기 사족에 의한 붕당정치가 드러낸 폐단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그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구체제를 극복할 계기는 될 수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유럽 절대주의군주와 조선의 탕평군주의 역사상이 구별된다. 탕평군주의 이념과 정책이 거둔 성과가 작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해체단계에 접어든 구체제의 수습책에 불과하다. 오수창은 조선의 근대적 전망은 19세기에 직접 국가와 대결하기에 이르는 민의 정치의식과 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18세기, 국정 운영 틀의 혁신〉을 쓴 박광용은 조선의 18세기 정치사를 전후 장기적 맥락에서 파악하거나, 그 속에서 근대성의 맹아를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17세기의 붕당에 의한 공론정치와 비교해 18세기 탕평정치가 갖는 몇 가지 새로운 면모를 상세히 논의한다. 그에게 탕평정치를 집약하는 핵심어는 ‘일통’인 듯하다. 말하자면 북극성과 같은 초월적 위상의 군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백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백성을 공경한다거나 백성이 군주와 한 핏줄이라는 식의 담론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경구의 〈개념사와 내재적 발전: ‘실학’ 개념을 중심으로〉는, 18세기부터 나타나는 조선의 개혁사상가들을 가리켜 20세기부터 쓰기 시작한 ‘실학’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한 방법적 시론이다. 그에 의하면, 실학이라는 단어, 혹은 그에 상응하는 지적 운동은, 긴 유동성을 가지며, 따라서 그것을 실제 경험하는 당사자의 관점(내부의 시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경구가 보기에, 실학의 개념사는 내재적 발전론과 흡사하다. 서구모델의 단선적 발전도식 대신, 다기한 변화양상을 포착하는 다중적 근대성과 소통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에서 정치적 ‘근대화’의 한 국면으로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 수립을 꼽아야 한다면, 중화적 질서가 지배하던 동아시아에서, 특히 조선이나 일본의 경우 그에 비견되는 현상은 의당 탈중화(계승범의 용어로는 ‘자국화’)일 수밖에 없다. 계승범의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는 바로 이 점에서 그동안의 논의와 궤도를 달리한다. 계승범이 보기에, 탈중화 담론은 청이 구축한 새로운 중화질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오히려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지배양반층이 존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왕실의 정치선전에 불과했다. 요컨대 계승범은, 18세기 조선의 탈중화 담론을, 정치적 차원에서든 문화적 차원에서든, 근대성의 한 계기로서 ‘자국화’ 운동이라 보지 않는 듯하다.
이헌창은 〈근대경제성장의 기반 형성기로서 18세기 조선의 성취와 그 한계〉에서 근대적 변혁(과학혁명, 산업혁명, 민주혁명)을 겪은 18세기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 동시대 조선의 사정을 측정하려 한다. 18세기 조선은 근대경제로 도약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었는가? 근대경제성장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적인 다섯 가지 지표가 그의 시금석이다. 기술 발전과 인구 증가, 시장 발달(도시화율), 효율적 경제제도(사유재산권의 법제화), 인적 자본의 축적, 사회와 국가의 발전. 조선의 근대 이행의 문제에 관해 대립하는 두 학설, 즉 자본주의맹아론과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근대화론 사이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18세기 조선의 경제는 농업기술과 인적 자본 등에서 상정하고 있었지만, 근대경제로 도약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약의 계기는 후일에 주어질 것이다.
한승현의 〈중국의 18세기―서유럽과 조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는 이중적 비교, 즉 18세기 중국을 동시대 서유럽 및 조선과 견준다. 캘리포니아 학파(포메란츠와 골드스톤 등)는 세계경제체제가 그 이전 비서구 세계에 이미 존재했으며, 특히 서구 발흥기(16~18세기)에 아시아의 경제 발전 수준은 서구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브리스는 군사력 수준, 정부의 경제개입방식, 중앙집권적 화폐금융제도, 관료제 등에서 영국이 겪은 혁명적 변화가 중국의 경우에는 미약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한승현은 이 반론, 특히 18세기 중국의 중앙정부가 취약했다는 브리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의 비교를 시도한다. 한승현에 의하면, 18세기 중국과 조선은 강력한 군주권을 구축하려 한 점에서 흡사하다. 청조의 황제들은 다민족, 다문화 국가의 통합의 구심점으로 군주권의 강화를 꾀했다. 조선의 영?정조대에서도 비슷한 정치사상과 정책이 확인된다. 군사의 개념, 정조의 비밀어찰, 군주의 순행 등이 그것이다.
하우봉은 〈18세기 일본사상의 전개양상과 성격〉을 통해 18세기에 일본 사상계가 유교(주자학) 전통의 대안을 찾는 역동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일본은 사상적 역동성 속에서, 배움의 대상을 중화에서 서양으로 교체한다. 그 변화의 계기이자 결과로서, 일본사상의 몇 가지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일본화(탈중화주의), 국제화 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그것이다. 계승범의 글이 보여준 바, 18세기 조선의 탈중화주의가 갖는 한계와 사뭇 대조적이다.
이영림의 〈18세기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는 이 책에 실린 유일한 서양사 글이지만, 18세기 동아시아를 비추어 볼 서구 근대성의 거울을 제공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의 의도는, 적어도 프랑스사에 관한 한, 근대화 여정의 전형성 타파다. 그는 계몽사상→시민혁명의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혁명, 즉 교회와 국가의 전제專制에 대한 저항을 촉발한 것은 18세기 초 얀센주의로 인해 빚어진 종교적 갈등이었고, 계몽사상은 18세기 중엽부터야 비로소 혁명의 에너지가 된다. 계몽사상 철학자들이 국가와 교회를 상대로 한 싸움에 적극 뛰어드는 것은 신학논쟁의 정치투쟁으로의 전환이 확연해지는 때부터라는 것이다.
김기봉은 〈태양왕과 만천명월주인옹: 루이 14세와 정조〉를 통해 18세기 조선의 국왕 정조와 17세기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와의 비교를 시도한다. 비교의 궁극적 의도는 네거티브한 것으로, 최근 일부 한국학 연구자들의 동향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들은 18세기의 조선, 특히 국왕 정조에게서,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와 흡사한 양상들에 착안하고, 따라서 프랑스 절대군주정이 근대국가 형성의 한 경로였듯이, 한국사에서도 내재적 발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기봉은 그들과 견해를 달리한다. 두 군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18세기가 17~18세기 프랑스처럼 근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와 관련해, 김기봉은 특히 학계 일각의 절대계몽군주론을 의식한 듯, 강한 반론을 제기한다. 정조는 조선의 새 지식인을 문체반정이라는 문화독재로 억압한 보수반동군주였으며, 그래서 조선은 근대를 향한 내재적 발전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폭넓은 연구방법과 관점, 조선의 18세기를 다채롭게 하다
이 책에서는 통상 근대화의 표준으로 간주되는 서양의 18세기가 전형적이기는커녕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취급된다. 이영림의 글만이 그에 할애되어 있으나 그 또한 전형의 해체를 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다수의 글들이 명시적, 암묵적으로 서양의 18세기 발전수준을 거울 삼아 전개된다.
가장 분명하게는 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 발전의 수준을 다룬 이헌창, 루이 14세와 정조의 절대왕정을 비교한 김기봉, 그리고 중국의 18세기 경제 발전을 주로 서양과 비교한 한승현의 글이 그렇다. 18세기 조선의 탈중화를 ‘자국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계승범의 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 근대화의 한 국면인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수창과 이경구는 궁극적으로 조선 정치사상과 개념사에서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탐색하지만, 탐색기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구적 기준을 전유한다. 그에 반해 박광용과 하우봉은 철저하게 내부의 시선으로 각각 조선의 18세기 정치사와 일본의 18세기 문화사를 소묘한다.
이처럼 폭넓은 방법적 스펙트럼은 비교사로서 이 책이 건강하다는 증거라 생각된다. 각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과 연구방법이 조선의 18세기를 좀 더 다채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독자들이 그러한 다채로움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작가 소개
편자 : 역사학회
김경현 :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이다.
오수창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다.
박광용 :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다.
이경구 : 한림대학교 과학원 HK교수이다.
계승범 :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이헌창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한승현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하우봉 :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이영림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김기봉 :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 주요 목차
서문│역사로 본 18세기 - 김경현
1부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오수창
조선의 18세기, 국정 운영 틀의 혁신│박광용
개념사와 내재적 발전 : ''실학'' 개념을 중심으로│이경구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계승범
근대경제성장의 기반 형성기로서 18세기 조선의 성취와 그 한계│이헌창
2부
중국의 18세기 - 서유럽과 조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한승현
18세기 일본사상의 전개양상과 성격│하우봉
18세기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이영림
태양왕과 만천명원주인오오 : 루이14세와 정조│김기봉
참고문헌 및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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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자부의 세기
최근 일부 국학 연구자(한문학, 미술사, 한국사)들이 한국사의 18세기 중 몇몇 국면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탈중화론, 진경문화, 실학과 같은 문화적 흐름과 영?정조 시대의 새로운 군주관(절대군주론) 등의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영?정조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려는 움직임이라 여겨진다.
18세기는 한국에서만 의미 있는 세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18세기가 상공업 발달, 문예부흥, 영?정조 같은 탕평군주의 시대였다면, 서양에서도 18세기는 절대왕정, 계몽사상, 시민혁명의 시대였고, 중국은 경제 번영, 문운, 평화의 시대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자부의 세기였던 것이다.
비교사를 통해 본 조선의 18세기
역사학이 근대화 과정의 산물이듯, 비교사 역시 그 일환이었다.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세이고 탈중심주의가 키워드이지만, 연구방법으로서 비교사는 여전히 유용하다. 비교는 반드시 우열과 성패를 가늠하기보다, 그저 각각의 특성과 그 원인을 구명하는 발견수단으로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와 동?서양사를 모두 아우르는 연구 지평을 갖는 역사학회는 항상 공동주제의 기획에서 이러한 비교사의 방법을 의식해왔다. 《정조와 18세기―역사로서 18세기, 서구와 동아시아의 비교사적 성찰》은 바로 이 비교사의 방법을 통해 18세기 조선의 역사를 서구 및 동아시아와 교차 검토한다. 2011년 12월 열린 역사학회의 학술대회에서 여러 연구자들은 조선의 18세기가 청, 일본, 그리고 서양의 18세기와 어떻게 달랐고, 왜 그랬는가를 살핌으로써 해당 시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이 책은 그 결실이다.
《정조와 18세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수창은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에서 18세기 조선의 정치현실과 정치이념을 17~19세기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 그는 특히 18세기 조선의 탕평정치나 그와 연관된 정치사상에서 진보성의 계기를 확인하기 힘들다고 강조한다. 18세기 조선의 절대군주제론은 그저 17세기 사족에 의한 붕당정치가 드러낸 폐단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그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구체제를 극복할 계기는 될 수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유럽 절대주의군주와 조선의 탕평군주의 역사상이 구별된다. 탕평군주의 이념과 정책이 거둔 성과가 작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해체단계에 접어든 구체제의 수습책에 불과하다. 오수창은 조선의 근대적 전망은 19세기에 직접 국가와 대결하기에 이르는 민의 정치의식과 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18세기, 국정 운영 틀의 혁신〉을 쓴 박광용은 조선의 18세기 정치사를 전후 장기적 맥락에서 파악하거나, 그 속에서 근대성의 맹아를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17세기의 붕당에 의한 공론정치와 비교해 18세기 탕평정치가 갖는 몇 가지 새로운 면모를 상세히 논의한다. 그에게 탕평정치를 집약하는 핵심어는 ‘일통’인 듯하다. 말하자면 북극성과 같은 초월적 위상의 군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백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백성을 공경한다거나 백성이 군주와 한 핏줄이라는 식의 담론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경구의 〈개념사와 내재적 발전: ‘실학’ 개념을 중심으로〉는, 18세기부터 나타나는 조선의 개혁사상가들을 가리켜 20세기부터 쓰기 시작한 ‘실학’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한 방법적 시론이다. 그에 의하면, 실학이라는 단어, 혹은 그에 상응하는 지적 운동은, 긴 유동성을 가지며, 따라서 그것을 실제 경험하는 당사자의 관점(내부의 시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경구가 보기에, 실학의 개념사는 내재적 발전론과 흡사하다. 서구모델의 단선적 발전도식 대신, 다기한 변화양상을 포착하는 다중적 근대성과 소통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에서 정치적 ‘근대화’의 한 국면으로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 수립을 꼽아야 한다면, 중화적 질서가 지배하던 동아시아에서, 특히 조선이나 일본의 경우 그에 비견되는 현상은 의당 탈중화(계승범의 용어로는 ‘자국화’)일 수밖에 없다. 계승범의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는 바로 이 점에서 그동안의 논의와 궤도를 달리한다. 계승범이 보기에, 탈중화 담론은 청이 구축한 새로운 중화질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오히려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지배양반층이 존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왕실의 정치선전에 불과했다. 요컨대 계승범은, 18세기 조선의 탈중화 담론을, 정치적 차원에서든 문화적 차원에서든, 근대성의 한 계기로서 ‘자국화’ 운동이라 보지 않는 듯하다.
이헌창은 〈근대경제성장의 기반 형성기로서 18세기 조선의 성취와 그 한계〉에서 근대적 변혁(과학혁명, 산업혁명, 민주혁명)을 겪은 18세기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 동시대 조선의 사정을 측정하려 한다. 18세기 조선은 근대경제로 도약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었는가? 근대경제성장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적인 다섯 가지 지표가 그의 시금석이다. 기술 발전과 인구 증가, 시장 발달(도시화율), 효율적 경제제도(사유재산권의 법제화), 인적 자본의 축적, 사회와 국가의 발전. 조선의 근대 이행의 문제에 관해 대립하는 두 학설, 즉 자본주의맹아론과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근대화론 사이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18세기 조선의 경제는 농업기술과 인적 자본 등에서 상정하고 있었지만, 근대경제로 도약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약의 계기는 후일에 주어질 것이다.
한승현의 〈중국의 18세기―서유럽과 조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는 이중적 비교, 즉 18세기 중국을 동시대 서유럽 및 조선과 견준다. 캘리포니아 학파(포메란츠와 골드스톤 등)는 세계경제체제가 그 이전 비서구 세계에 이미 존재했으며, 특히 서구 발흥기(16~18세기)에 아시아의 경제 발전 수준은 서구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브리스는 군사력 수준, 정부의 경제개입방식, 중앙집권적 화폐금융제도, 관료제 등에서 영국이 겪은 혁명적 변화가 중국의 경우에는 미약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한승현은 이 반론, 특히 18세기 중국의 중앙정부가 취약했다는 브리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의 비교를 시도한다. 한승현에 의하면, 18세기 중국과 조선은 강력한 군주권을 구축하려 한 점에서 흡사하다. 청조의 황제들은 다민족, 다문화 국가의 통합의 구심점으로 군주권의 강화를 꾀했다. 조선의 영?정조대에서도 비슷한 정치사상과 정책이 확인된다. 군사의 개념, 정조의 비밀어찰, 군주의 순행 등이 그것이다.
하우봉은 〈18세기 일본사상의 전개양상과 성격〉을 통해 18세기에 일본 사상계가 유교(주자학) 전통의 대안을 찾는 역동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일본은 사상적 역동성 속에서, 배움의 대상을 중화에서 서양으로 교체한다. 그 변화의 계기이자 결과로서, 일본사상의 몇 가지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일본화(탈중화주의), 국제화 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그것이다. 계승범의 글이 보여준 바, 18세기 조선의 탈중화주의가 갖는 한계와 사뭇 대조적이다.
이영림의 〈18세기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는 이 책에 실린 유일한 서양사 글이지만, 18세기 동아시아를 비추어 볼 서구 근대성의 거울을 제공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의 의도는, 적어도 프랑스사에 관한 한, 근대화 여정의 전형성 타파다. 그는 계몽사상→시민혁명의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혁명, 즉 교회와 국가의 전제專制에 대한 저항을 촉발한 것은 18세기 초 얀센주의로 인해 빚어진 종교적 갈등이었고, 계몽사상은 18세기 중엽부터야 비로소 혁명의 에너지가 된다. 계몽사상 철학자들이 국가와 교회를 상대로 한 싸움에 적극 뛰어드는 것은 신학논쟁의 정치투쟁으로의 전환이 확연해지는 때부터라는 것이다.
김기봉은 〈태양왕과 만천명월주인옹: 루이 14세와 정조〉를 통해 18세기 조선의 국왕 정조와 17세기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와의 비교를 시도한다. 비교의 궁극적 의도는 네거티브한 것으로, 최근 일부 한국학 연구자들의 동향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들은 18세기의 조선, 특히 국왕 정조에게서,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와 흡사한 양상들에 착안하고, 따라서 프랑스 절대군주정이 근대국가 형성의 한 경로였듯이, 한국사에서도 내재적 발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기봉은 그들과 견해를 달리한다. 두 군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18세기가 17~18세기 프랑스처럼 근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와 관련해, 김기봉은 특히 학계 일각의 절대계몽군주론을 의식한 듯, 강한 반론을 제기한다. 정조는 조선의 새 지식인을 문체반정이라는 문화독재로 억압한 보수반동군주였으며, 그래서 조선은 근대를 향한 내재적 발전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폭넓은 연구방법과 관점, 조선의 18세기를 다채롭게 하다
이 책에서는 통상 근대화의 표준으로 간주되는 서양의 18세기가 전형적이기는커녕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취급된다. 이영림의 글만이 그에 할애되어 있으나 그 또한 전형의 해체를 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다수의 글들이 명시적, 암묵적으로 서양의 18세기 발전수준을 거울 삼아 전개된다.
가장 분명하게는 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 발전의 수준을 다룬 이헌창, 루이 14세와 정조의 절대왕정을 비교한 김기봉, 그리고 중국의 18세기 경제 발전을 주로 서양과 비교한 한승현의 글이 그렇다. 18세기 조선의 탈중화를 ‘자국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계승범의 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 근대화의 한 국면인 민족주의 혹은 국민국가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수창과 이경구는 궁극적으로 조선 정치사상과 개념사에서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탐색하지만, 탐색기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구적 기준을 전유한다. 그에 반해 박광용과 하우봉은 철저하게 내부의 시선으로 각각 조선의 18세기 정치사와 일본의 18세기 문화사를 소묘한다.
이처럼 폭넓은 방법적 스펙트럼은 비교사로서 이 책이 건강하다는 증거라 생각된다. 각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과 연구방법이 조선의 18세기를 좀 더 다채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독자들이 그러한 다채로움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작가 소개
편자 : 역사학회
김경현 :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이다.
오수창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다.
박광용 :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이다.
이경구 : 한림대학교 과학원 HK교수이다.
계승범 :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이헌창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한승현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하우봉 :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이영림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김기봉 :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 주요 목차
서문│역사로 본 18세기 - 김경현
1부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오수창
조선의 18세기, 국정 운영 틀의 혁신│박광용
개념사와 내재적 발전 : ''실학'' 개념을 중심으로│이경구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계승범
근대경제성장의 기반 형성기로서 18세기 조선의 성취와 그 한계│이헌창
2부
중국의 18세기 - 서유럽과 조선과의 비교를 중심으로│한승현
18세기 일본사상의 전개양상과 성격│하우봉
18세기 프랑스의 종교와 정치│이영림
태양왕과 만천명원주인오오 : 루이14세와 정조│김기봉
참고문헌 및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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