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환각의 세계를 둘러싼 잔인한 오해와 따뜻한 진실
“당신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신병이 아니라 신경학적인 증상이에요.”
기획의도
인간은 모두 환각을 경험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치과 진료 후 겪는 환각과 올리버 색스의 ‘낯선 다리’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고 치료받은 날, 뺨이나 혀가 기묘하게 부풀어 있거나 엉뚱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낀 적이 있는지? 뺨과 혀가 ‘내 것’이 아닌 듯한 자기 소외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 거울에 비춰 얼굴이 평소와 같음을 확인해도 이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마취약이 기운을 다하고서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온다. 뇌로 들어가는 감각 정보가 차단될 때 신체상에 환각이 나타나는 흔하고 가벼운 예다. 환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신체상 환각의 더 심각한 예는 척수나 말초신경이 손상되어 생기는 환상이다. 신체가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감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내면의 상을 잃었을 때 이런 환각이 일어난다. 《환각》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등반 사고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고 신경근 접합부가 손상되었을 때 이것을 직접 경험했다. 다리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낯선 무생물체가 들어선 것이다(그 기이한 경험을 올리버 색스는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로 펴내기도 했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분명 존재하는 다리가 마치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드는 ‘과학적인 이유’를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소유권의 부재, 자기 소외감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인간애로 쓴 일생의 역작, 환각의 자연사
올리버 색스가 그동안 여러 책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특히 이 책 《환각》에서 그의 진솔한 공감이 빛을 발한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경험과 그가 상담한 환자들의 사연, 그리고 전 세계에서 독자들이 편지로 전해 온 고백을 통해 환각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탐험한다.
환각은 현대 문화에서 정신과 병동에나 존재하는 광기의 전조로 터부시된다. 그래서 환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인정하거나 내색하지 못한다. 스스로 미쳐가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미쳤다는 낙인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의 조직과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창이자 전 세계 문화와 예술의 주요한 원천이 되는 환각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환각의 힘은 1인칭 시점으로만 온전히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환각을 이해하는 데 당사자들의 증언은 더욱 소중하다. ‘환각의 자연사’ 혹은 ‘환각의 선집’으로 부를 수 있는 《환각》은 다양한 환각 경험을 조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쳐온 올리버 색스의 특별한 역작이다.
환각은 정신이상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샤를보네증후군, 시각을 잃고서도 ‘보는’ 사람들
시각을 잃은 사람 가운데 10∼20퍼센트 정도에서 환각을 보는 샤를보네증후군이 나타난다. 섬세한 동양 옷을 입은 사람들, 터무니없이 복잡한 악보, 접시 위에 놓인 가짜 음식, 기형적이거나 해체된 얼굴, 갑자기 두 갈래로 나뉘는 길 등, 대단히 복잡하고 장식적이면서 생생한 환각이 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뇌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정신이 맑은 사람에게도 샤를보네증후군은 발생한다. 이들이 보는 환영은 ‘정신병’이 아니라 실명에 대한 뇌의 반응이다. 마치 “뇌가 시각적 손상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지각의 세계를 잃어버린 대신 환각의 세계를 얻기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 어느 환자는 환각이 “아주 친절하다”고 표현하며, 자기 눈이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한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우리도 앞이 안 보이면 도통 재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증후군을 마련했습니다. 앞만 보며 살아오던 당신의 삶에 일종의 피날레 같은 것이죠. 대단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선책이랍니다.” (48쪽)
때때로 샤를보네증후군 환각은 예술적인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녹내장으로 실명한 뒤에 첫 시집을 출간해 찬사를 받은 버지니아 해밀턴 어데어는 “환각의 천사”가 시적인 환영들을 보내준다고 표현했다. 샤를보네증후군 환각은 때로 곤혹스러운 것도 있지만 대개는 위협적이지 않으며, 환자들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또렷하게 자각하기 때문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고 건강한 일상을 살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의 부름을 듣는 사람들
스텐퍼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로젠한은 자신을 포함한 가짜 환자 8명이 병원을 찾아가는 실험을 했다. ‘실재하지 않는 목소리가 들리는’ 가짜 증세 외에는 정상적으로 행동했고, 정신병력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받았으며 가짜 증세가 사라졌다고 말해도 진단은 수정되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리는 증상이 즉시 정신장애로 낙인찍힌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그리 드물지 않고,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오히려 환청은 모든 문화에 존재하고, 나아가 많은 문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리스신화와 기독교의 신은 종종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가. 목소리와 달리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청각 환각은 더 흔하다. 수면 부족이나 감각이 제한된 상태에서 모터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듣는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한편 단순한 소음이 아닌 ‘음악’이 연주되는 환각은 증세를 겪는 사람을 더 위축시킨다. ‘머릿속에서’ 들려온다는 사실 때문에 정신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음악 환각은 오랫동안 드문 현상으로 숨겨져 왔으나, 뇌졸중, 종양, 동맥류, 감염증, 신경변성의 진행, 중독성 장애나 대사 장애 등으로 유발되어 원인이 치료되면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음악 환각을 겪는 사람 중 일부는 환각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어떤 이들은 내면의 음악을 즐기고 그 음악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느낀다.
장애와 질병을 끌어안고 삶을 개척하다
창조적이고 급진적이며 용감한 ‘보통 사람들’에 대한 헌사
이 책에서 묘사되는 환각 경험들은 무척 상세하고 생생해서 때로는 상상하기가 꺼려질 정도다. 재미있고 정겨운 환각도 있지만 괴이한 차림의 사람들이나 끔찍한 몰골의 괴물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환각을 받아들이고 제어하면서 환자들은 유쾌하게 일상을 꾸려나가고, 알차고 생산적으로 일하며, 예술적인 영감까지 얻는다. ‘미치지 않았다’는 진단, 자신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힘이 된 것이다. 환각을 보던 환자들은 올바른 진단을 받고 깊이 안도하면서 그로부터 삶이 변했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불길한’ 환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더라도, 신경학적인 증상으로 고쳐 받아들이면서 이들은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세계관을 새로 쓴다.
“이 장애에 대해 적절한 교육을 받았다면, 무언가의 노리개가 되었거나 귀신에 홀렸거나 영적으로 시험당하고 있거나 정신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더 이른 나이에 더욱 건설적인 도움을 구했을 거예요. 지금 마흔세 살입니다. 내가 겪은 많은 경험이 이 장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마음에 새로운 평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 나는 수많은 ‘불길한’ 경험을 재평가해야 하는 새로운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진단에 기초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어린 시절을 손에서 놓는 것, 아니 불가사의하고 마술에 가까운 세계관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애도의 손길을 느끼고 있습니다.” (276쪽)
MRI, fMRI 등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뇌과학은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을 안게 되었지만, 올리버 색스는 시종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한다.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낱낱의 경험을 소중히 다루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그리고 때로 철학적인) 답을 이끌어내는 그의 통찰은 어떤 치료법이나 힐링보다도 위안을 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가 환자들에게서 받은 편지에는 병이 완치되었다는 소식이 아니라 병과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사연들이 담겨 있다. 환자들의 의연하고 밝은 삶을 전할 때의 흐뭇한 필치,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겪는 임종 환각을 “놀라움과 뭉클함”을 안고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통해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의 인간애가 진하게 전해진다.
▣ 작가 소개
저 :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193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와 UCLA에서 수련의 과정을 수료했다. 뉴욕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신경과 교수와 브롱크스 자치구 자선병원인 베스 에이브러햄 병원의 신경과 전문의를 지냈으며, 현재는 뉴욕대학교 의학대학 신경학과 부교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신경학과 임상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5년부터 현재까지 뉴욕에 살고 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집 정원에 양치식물을 키우고, 롱아일랜드 해협에서 수영하는 것을 즐긴다. TV시리즈 <스타트랙>을 빠짐없이 챙겨보며, 19세기 자연주의와 마티스의 그림,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회에 가서 연주를 배경음악으로 삼고 자신의 글을 쓰는 등 괴짜로 알려져 있다.
올리버 색스의 저서들은 그가 임상에서 만나온 수많은 신경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엉클 텅스텐』, 『소생』 등이 있다. 특히 『소생』은 그가 베스 에이브러햄 병원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으로,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흥행하기도 했다. 로버트 드 니로와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을 맡았고, 우리나라에는 1991년에 <사랑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소생』과『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뉴욕타임즈>는 문학과 의학을 접목한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해 그를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칭송했다. 2002년에는 록펠러대학교가 과학자이면서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는 루이스 토마스 상을 수상했고, 영국의 주요 문학상인 호손덴 상, 포크 상, 구겐하임 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은 어린 시절부터 양치식물의 원시성과 생명력, 적응력에 매료되었던 그의 멕시코 식물 탐사여행기다. 뉴욕식물원 이사이자 미국양치류협회 정회원이기도 한 그는 미국양치류협회의 개성적인 동료들과 식물 탐사여행을 다니며, 지금도 사무실에서 황금털미역고사리 화분을 기르고 있다.
역자 : 김한영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문학과 언어학, 과학을 아우르는 관심을 바탕으로, 생경한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맞춤하게 옮기는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빈 서판》 《본성과 양육》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본능》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의 내전기》 《사랑을 위한 과학》 등이 있고, 최근 번역서로는 《죽음과 섹스》 《진선미》 《지혜의 집》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 들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부문을 수상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1장 침묵의 군중: 샤를보네증후군
2장 죄수의 시네마: 감각 박탈
3장 몇 나노그램의 와인: 후각 환각
4장 헛것이 들리는 사람들
5장 파킨슨증이 불러일으키는 지각오인
6장 변성 상태
7장 무늬: 시각적 편두통
8장 ''신성한''질환
9장 반쪽 시야를 차지한 환각
10장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
11장 수면의 문턱에서
12장 기면증과 몽마
13장 귀신에 붙들린 마음
14장 도플갱어: 나를 보는 환각
15장 환상, 환영, 감각 유령
감사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환각의 세계를 둘러싼 잔인한 오해와 따뜻한 진실
“당신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신병이 아니라 신경학적인 증상이에요.”
기획의도
인간은 모두 환각을 경험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치과 진료 후 겪는 환각과 올리버 색스의 ‘낯선 다리’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고 치료받은 날, 뺨이나 혀가 기묘하게 부풀어 있거나 엉뚱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낀 적이 있는지? 뺨과 혀가 ‘내 것’이 아닌 듯한 자기 소외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 거울에 비춰 얼굴이 평소와 같음을 확인해도 이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마취약이 기운을 다하고서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온다. 뇌로 들어가는 감각 정보가 차단될 때 신체상에 환각이 나타나는 흔하고 가벼운 예다. 환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신체상 환각의 더 심각한 예는 척수나 말초신경이 손상되어 생기는 환상이다. 신체가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감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내면의 상을 잃었을 때 이런 환각이 일어난다. 《환각》의 저자 올리버 색스는 등반 사고로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고 신경근 접합부가 손상되었을 때 이것을 직접 경험했다. 다리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낯선 무생물체가 들어선 것이다(그 기이한 경험을 올리버 색스는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로 펴내기도 했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분명 존재하는 다리가 마치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드는 ‘과학적인 이유’를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소유권의 부재, 자기 소외감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인간애로 쓴 일생의 역작, 환각의 자연사
올리버 색스가 그동안 여러 책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특히 이 책 《환각》에서 그의 진솔한 공감이 빛을 발한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경험과 그가 상담한 환자들의 사연, 그리고 전 세계에서 독자들이 편지로 전해 온 고백을 통해 환각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탐험한다.
환각은 현대 문화에서 정신과 병동에나 존재하는 광기의 전조로 터부시된다. 그래서 환각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인정하거나 내색하지 못한다. 스스로 미쳐가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미쳤다는 낙인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의 조직과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창이자 전 세계 문화와 예술의 주요한 원천이 되는 환각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환각의 힘은 1인칭 시점으로만 온전히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환각을 이해하는 데 당사자들의 증언은 더욱 소중하다. ‘환각의 자연사’ 혹은 ‘환각의 선집’으로 부를 수 있는 《환각》은 다양한 환각 경험을 조사하는 일에 일생을 바쳐온 올리버 색스의 특별한 역작이다.
환각은 정신이상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샤를보네증후군, 시각을 잃고서도 ‘보는’ 사람들
시각을 잃은 사람 가운데 10∼20퍼센트 정도에서 환각을 보는 샤를보네증후군이 나타난다. 섬세한 동양 옷을 입은 사람들, 터무니없이 복잡한 악보, 접시 위에 놓인 가짜 음식, 기형적이거나 해체된 얼굴, 갑자기 두 갈래로 나뉘는 길 등, 대단히 복잡하고 장식적이면서 생생한 환각이 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뇌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정신이 맑은 사람에게도 샤를보네증후군은 발생한다. 이들이 보는 환영은 ‘정신병’이 아니라 실명에 대한 뇌의 반응이다. 마치 “뇌가 시각적 손상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지각의 세계를 잃어버린 대신 환각의 세계를 얻기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 어느 환자는 환각이 “아주 친절하다”고 표현하며, 자기 눈이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한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우리도 앞이 안 보이면 도통 재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증후군을 마련했습니다. 앞만 보며 살아오던 당신의 삶에 일종의 피날레 같은 것이죠. 대단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선책이랍니다.” (48쪽)
때때로 샤를보네증후군 환각은 예술적인 영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녹내장으로 실명한 뒤에 첫 시집을 출간해 찬사를 받은 버지니아 해밀턴 어데어는 “환각의 천사”가 시적인 환영들을 보내준다고 표현했다. 샤를보네증후군 환각은 때로 곤혹스러운 것도 있지만 대개는 위협적이지 않으며, 환자들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또렷하게 자각하기 때문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고 건강한 일상을 살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의 부름을 듣는 사람들
스텐퍼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로젠한은 자신을 포함한 가짜 환자 8명이 병원을 찾아가는 실험을 했다. ‘실재하지 않는 목소리가 들리는’ 가짜 증세 외에는 정상적으로 행동했고, 정신병력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받았으며 가짜 증세가 사라졌다고 말해도 진단은 수정되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리는 증상이 즉시 정신장애로 낙인찍힌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그리 드물지 않고,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오히려 환청은 모든 문화에 존재하고, 나아가 많은 문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리스신화와 기독교의 신은 종종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가. 목소리와 달리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청각 환각은 더 흔하다. 수면 부족이나 감각이 제한된 상태에서 모터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듣는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한편 단순한 소음이 아닌 ‘음악’이 연주되는 환각은 증세를 겪는 사람을 더 위축시킨다. ‘머릿속에서’ 들려온다는 사실 때문에 정신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음악 환각은 오랫동안 드문 현상으로 숨겨져 왔으나, 뇌졸중, 종양, 동맥류, 감염증, 신경변성의 진행, 중독성 장애나 대사 장애 등으로 유발되어 원인이 치료되면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음악 환각을 겪는 사람 중 일부는 환각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어떤 이들은 내면의 음악을 즐기고 그 음악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느낀다.
장애와 질병을 끌어안고 삶을 개척하다
창조적이고 급진적이며 용감한 ‘보통 사람들’에 대한 헌사
이 책에서 묘사되는 환각 경험들은 무척 상세하고 생생해서 때로는 상상하기가 꺼려질 정도다. 재미있고 정겨운 환각도 있지만 괴이한 차림의 사람들이나 끔찍한 몰골의 괴물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환각을 받아들이고 제어하면서 환자들은 유쾌하게 일상을 꾸려나가고, 알차고 생산적으로 일하며, 예술적인 영감까지 얻는다. ‘미치지 않았다’는 진단, 자신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힘이 된 것이다. 환각을 보던 환자들은 올바른 진단을 받고 깊이 안도하면서 그로부터 삶이 변했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불길한’ 환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더라도, 신경학적인 증상으로 고쳐 받아들이면서 이들은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세계관을 새로 쓴다.
“이 장애에 대해 적절한 교육을 받았다면, 무언가의 노리개가 되었거나 귀신에 홀렸거나 영적으로 시험당하고 있거나 정신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더 이른 나이에 더욱 건설적인 도움을 구했을 거예요. 지금 마흔세 살입니다. 내가 겪은 많은 경험이 이 장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마음에 새로운 평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 나는 수많은 ‘불길한’ 경험을 재평가해야 하는 새로운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진단에 기초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어린 시절을 손에서 놓는 것, 아니 불가사의하고 마술에 가까운 세계관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애도의 손길을 느끼고 있습니다.” (276쪽)
MRI, fMRI 등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뇌과학은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을 안게 되었지만, 올리버 색스는 시종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한다.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낱낱의 경험을 소중히 다루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그리고 때로 철학적인) 답을 이끌어내는 그의 통찰은 어떤 치료법이나 힐링보다도 위안을 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가 환자들에게서 받은 편지에는 병이 완치되었다는 소식이 아니라 병과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사연들이 담겨 있다. 환자들의 의연하고 밝은 삶을 전할 때의 흐뭇한 필치,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겪는 임종 환각을 “놀라움과 뭉클함”을 안고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통해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의 인간애가 진하게 전해진다.
▣ 작가 소개
저 :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193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와 UCLA에서 수련의 과정을 수료했다. 뉴욕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신경과 교수와 브롱크스 자치구 자선병원인 베스 에이브러햄 병원의 신경과 전문의를 지냈으며, 현재는 뉴욕대학교 의학대학 신경학과 부교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신경학과 임상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5년부터 현재까지 뉴욕에 살고 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집 정원에 양치식물을 키우고, 롱아일랜드 해협에서 수영하는 것을 즐긴다. TV시리즈 <스타트랙>을 빠짐없이 챙겨보며, 19세기 자연주의와 마티스의 그림,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회에 가서 연주를 배경음악으로 삼고 자신의 글을 쓰는 등 괴짜로 알려져 있다.
올리버 색스의 저서들은 그가 임상에서 만나온 수많은 신경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엉클 텅스텐』, 『소생』 등이 있다. 특히 『소생』은 그가 베스 에이브러햄 병원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으로,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흥행하기도 했다. 로버트 드 니로와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을 맡았고, 우리나라에는 1991년에 <사랑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소생』과『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뉴욕타임즈>는 문학과 의학을 접목한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해 그를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칭송했다. 2002년에는 록펠러대학교가 과학자이면서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수여하는 루이스 토마스 상을 수상했고, 영국의 주요 문학상인 호손덴 상, 포크 상, 구겐하임 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올리버 색스의 오악사카 저널》은 어린 시절부터 양치식물의 원시성과 생명력, 적응력에 매료되었던 그의 멕시코 식물 탐사여행기다. 뉴욕식물원 이사이자 미국양치류협회 정회원이기도 한 그는 미국양치류협회의 개성적인 동료들과 식물 탐사여행을 다니며, 지금도 사무실에서 황금털미역고사리 화분을 기르고 있다.
역자 : 김한영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문학과 언어학, 과학을 아우르는 관심을 바탕으로, 생경한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맞춤하게 옮기는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빈 서판》 《본성과 양육》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본능》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의 내전기》 《사랑을 위한 과학》 등이 있고, 최근 번역서로는 《죽음과 섹스》 《진선미》 《지혜의 집》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 들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부문을 수상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1장 침묵의 군중: 샤를보네증후군
2장 죄수의 시네마: 감각 박탈
3장 몇 나노그램의 와인: 후각 환각
4장 헛것이 들리는 사람들
5장 파킨슨증이 불러일으키는 지각오인
6장 변성 상태
7장 무늬: 시각적 편두통
8장 ''신성한''질환
9장 반쪽 시야를 차지한 환각
10장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
11장 수면의 문턱에서
12장 기면증과 몽마
13장 귀신에 붙들린 마음
14장 도플갱어: 나를 보는 환각
15장 환상, 환영, 감각 유령
감사의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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