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인류 사회의 패턴과 사회질서
인류와 사회는 그 삶의 조건인 제도나 전제들을 절대적이고 자명하고 본디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곤 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증거에 의해서 그 믿음을 굳히기도 한다. 일종의 ‘상식’처럼 은연중에 제공되는 통념을 아무런 검증이나 비판 없이 사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가와 사상가들은 인류 역사의 패턴을 이해하고 미래에 나타날 사회를 예측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인간과 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가 너무도 복합적이고 다양하고 우연적이다.
이 책에서 어니스트 겔너는 역사의 ‘예측 불가능성’을 단언한다. 원시사회에서 농경사회, 산업사회로 이어지는 이른바 3단계론에서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정한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를 올바르게 파악했다고 해도, 그 요소들의 비율이 조금만 바뀌어도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음을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겔너에 따르면, 사회질서란 그것을 낳는 기본 요소들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가능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요소들의 집합이 다른 결과물을 낳을 수도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똑같은 카드들을 쥐고서도 다른 방식으로 패를 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어떤 선택이 왜 이루어진 것인지를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거나 어렵다고 해서 ‘이해’의 가능성까지 포기한다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마저 사라진다. 그러면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고 예측만으로는 어떤 확실한 믿음을 주거나 위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관의 필요성이 나온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처럼 예측을 반대하는 이들은 예측이라는 목욕물과 함께 ‘이해’라는 아기까지 쏟아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해를 하려면 쓸모없는 예측도 필요한 법이다. 어떤 일이 실현될 것인지 늘 미리 파악할 수는 없지만, 또는 아마도 늘 미리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선택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철학자이다.”
이성 중심의 역사관
이성 중심의 역사관이 맞닥뜨린 문제와 곤란함은 상당하다. 이 역사관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합리주의적 낙관주의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지난날보다 오늘날 훨씬 인기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실존주의, 정신분석, 스토리텔링이 유행하고 급기야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까지 이른 20세기 후반에 이성 중심의 역사관이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하지만 수렵 시대부터 컴퓨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인식적 변화를 차분하게 그려 보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고, 그것이 꼭 낙관주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인식 활동의 본성은 늘 똑같은 게 아니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상황이 변할 뿐 아니라 그 변화는 깊고도 근본적이다. 똑같은 변화가 단순히 한 번 더 되풀이되는 게 아라 ‘유형’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겔너는 이 책의 목적을 인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자신의 역사관을 공식화하면서 연역적인 방법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인류 역사에 작용하는 기본적인 요소(생산, 억압, 인식)를 선택하여 그림을 그린 뒤에, 그것이 역사 기록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전제를 다듬는 방식이다. 쟁기, 칼, 책은 바로 인류 역사의 세 가지 요소를 구현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이 상징물들은 문화와 언어, 개념, 감수성, 권력, 이데올로기, 합법화, 성문화(成文化), 분업,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와 만나면서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나갔다.
거대한 전환, 신석기혁명과 산업혁명
인류가 등장한 이후 나타난 신석기혁명과 산업혁명, 이 두 차례의 거대한 도약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렇지만 두 차례의 거대한 이행이 인류의 의도적인 설계와 계획에 따라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 역사가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앞선 단계가 나중 단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앞선 단계 다음에 반드시 뒤의 단계가 온다는 뜻은 아니다. ‘수렵채취 사회→농경 사회→산업 사회’ 이 3단계로 인류 역사가 진행되어 왔지만 단계별 이행 과정에서 필연성은 없었다. 처음 씨를 뿌린 농부들은 무엇을 거두게 될지 알지 못했고, 쟁기와 칼을 버리고 상업과 생산, 혁신을 선택한 산업 부르주아들도 근대의 모습을 예상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회질서는 역사에 의해 안내되었지만, 앞선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매우 달라서 그 모습을 올바르게 예상하거나 계획하거나 뜻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제의와 문자를 중심으로 개념을 각인시키고 개념 안에 담겨 있는 강제와 의무를 사회 구성원의 감정에 새겨 넣는 ‘억압’의 시대는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를 거쳐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갔다. 인구 증가가 생산 능력을 넘어서게 될 거라던 맬서스의 예측에 인류 역사는 과잉 생산과 소비사회로 답했다. 산업사회는 ‘나날이’ 발전하는 뛰어난 기술이 생산의 토대가 되는 사회이다. 테크놀로지의 본성과 분업에 바탕을 둔 대규모 생산조직의 실재가 산업사회의 특징이 된다. 쟁기(생산), 칼(억압), 책(인식과 지식)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 긴장과 갈등 속에 권력을 차지했지만 점차 포괄적 분업과 협력, 동의를 통해 사회의 모양새를 결정한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분명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적인 전제정치보다 시민들의 삶에 훨씬 더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의 복합성과 기반 구조에 대한 그 의존성은 그 구성원들을 온순하게 만들고 관료주의적 지침에 늘 복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나치에 지배된 유럽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은, 그 수용소의 야만성이 아니라 나치가 야만성을 이용하지 않고도 거둘 수 있었던 복종의 규모였다. 사람들은 추방과 궁극적 제거의 다양한 단계에서 협력했다. 관료적 질서에 대한 복종은 습관적이고 통상적이며 필연적이다. 지속적으로 지시에 순응한 끝에 이른 곳이 가스실 문 앞이라면, 그때는 이미 저항하기에 늦다.
억압에 맞선 지식의 주권과 인식의 성장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맥락을 찾아내려는 겔너의 꾸준한 시도는 이성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에 수시로 등장시켜 비판하는 플라톤, 데카르트, 흄, 칸트, 헤겔, 이븐 할둔,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 살린스, 폴라니, 하이에크, 포퍼, 베블런은 모두 겔너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성을 인류 발전의 목표이자 종착점이라고 보고 인류 역사를 합리성의 전개 과정으로 파악하는 겔너의 공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수렵채취 시대부터 오늘날의 컴퓨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인식적 변화를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성찰할 수 있었던 게 용기나 낙관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성과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대단히 연역적이고 추상적인 논의임에도, 스스로 내놓은 전제를 끝없이 의심하며 다듬어 진리에 다가가는 힘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책의 마지막까지 밀어붙이는 치밀함은 동시에 독자들의 고통까지 요구한다.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 논객의 진면목
1995년 11월 5일, 민족주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 어니스트 겔너가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데일리텔레그래프), “비판적 이성주의를 옹호한 십자군”(인디펜던트)이라고 평가했다. 겔너는 여러 언어를 구사했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유럽과 이슬람, 러시아를 아우르는 연구를 바탕으로 정립한 민족주의 이론은 탁월한 학문적 성취였고 《민족과 민족주의》는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민족주의가 전통사회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시민혁명과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산물이라는 견해는 인류학과 역사학 넘어 서양 학계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철학,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등 20세기의 거의 모든 인문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학자이지만, 어니스트 겔너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낯선 인물이고 그의 저작도 번역된 게 거의 없다. 젊은 학자로서 우파의 거목인 이사야 벌린이나 칼 포퍼를 비판하는 한편, 페리 앤더슨이나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진보적 학자와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그는 그 어떤 진영도 학파도 형성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마르크스 인류학을 소개하고 에밀 뒤르켐과 막스 베버의 사회학 전통을 흡수한 겔너 당대 영국 학계에서 독특한 사상가였음이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사회학자라 평가하고 사회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철학자로 평가했지만, 정작 철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고 사회학자들은 뛰어난 사회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정적인 강의와 논쟁적인 글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매우 통섭적인 철학을 내놓았고,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동시에 근대 과학의 영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언뜻 보아 모순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사야 벌린이나 비트겐슈타인, 칼 포퍼와 논쟁을 벌이고 모교인 옥스퍼드대학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풍토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한편,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찰스 테일러 같은 학자들의 맹렬한 적수이기도 했다. 유럽 지성계를 풍미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켜 “오늘날 가장 지배적인 형태의 상대주의이며, 사실상 두 세기 전 계몽시대 유럽의 질서를 전복시킨 낭만주의 운동의 재연”이라고 공격했다. 형태를 달리하는 모든 상대주의에 맞서 치열하게 이성과 진리를 옹호한 겔너의 지적 후예들은 오늘날 그를 대신하여 전투를 이어 오고 있다.
[서평]
“무엇보다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어니스트 겔너는 매우 높은 곳에서 삶을 바라볼 줄 알았다. 그는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로 관심을 넓혀 근대사회가 형성되는 양상을 눈부시고도 명쾌한 논리로 드러냈다.”
《타임스》
“학계의 거물이자 탁월한 지식인인 겔너는 언론의 욕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개 토론을 즐겼고 폐부를 찌르는 위트와 인상적인 언변으로 한 수 뒤처진 논객들을 격분시켰다. 그는 이미 스무 권이 넘는 책과 논문들을 쏟아 낸 바 있음에도 ‘책을 또 쓰고 말았습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라는 사과를 입버릇처럼 되풀이했다.”
《이코노미스트》
▣ 작가 소개
저 : 어니스트 겔너
Ernest Gellner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하고 1962년부터 1984년까지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철학과 과학 방법론을 가르쳤다. 그 뒤 케임브리지대학 사회인류학 교수로 부임하여 1993년까지 역사학과 철학, 사회과학을 넘나들며 강의하고 연구했다. 유럽과 이슬람, 러시아를 아우르는 연구를 바탕으로 민족주의 분야에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냈다. 저술과 강의, 정치 활동을 통해 일생토록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폐쇄적인 사고 체계에 맞섰고, 특히 정신분석, 상대주의, 실존주의, 자유시장의 독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논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퇴임한 뒤 체코 프라하의 센트럴유러피안대학 민족주의연구센터를 맡아 연구와 국제회의를 활발하게 펼치다가 1995년 세상을 떠났다.
Words and Things(1959), Contemporary Thought and Politics(1974), Muslim Society(1981), Nations and Nationalism(1983, 《민족과 민족주의》,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2009), State and Society in Soviet Thought(1988), Conditions of Liberty(1994) 《쟁기, 칼, 책》(2013)등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고, 평전 Ernest Gellner: An Intellectual Biography(Verso, 2012)가 출간되었다.
역 : 이수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진실한 책 한 권이 가진 힘을 믿는 전문번역가이다. 한 권의 책을 옮길 때마다 첫번째 독자라는 설렘을 느끼며, 독자로서 느낀 감동을 잘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문장과의 싸움은 늘 어렵지만, 그 과정에서 글쓴이, 등장인물들, 독자들, 그리고 자신과 말없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화로운 삶의 지속』『교실의 고백』『흡연의 문화사』『사라진 내일』『사코와 반제티』『어린이를 위한 불편한 진실』『돌연변이들』을 우리말로 옮겼고, 『빛을 훔쳐온 까마귀』를 쓰기도 했다. 이외 역서로는 『쟁기, 칼, 책』등이 있다
▣ 주요 목차
1장 역사를 보는 눈
역사철학
역사의 구조
3단계론
생산, 억압, 인식
석기시대는 어느 쪽으로 결정적 한 표를 던질 것인가?
의심스런 증인
2. 공동체에서 사회로
인식의 진화와 언어
복합적 감수성
생각은 자유롭지 않다
사회적·논리적 일관성
종착지
3. 타자의 등장
인식적 전환의 경로
육신을 벗어난 말씀
플라톤 철학
최초의 통합
개념의 권위
플라톤의 오류
4. 긴장
신성한 질서
교회와 국가
프로테스탄티즘
5. 성문화
종교개혁에서 계몽주의로
지식의 주권
개념의 폐위
도구적 합리성
계몽주의의 빛과 그늘
진보의 철학
6. 억압 질서와 권력
권력의 유형
계급
사회구조의 변화
7. 생산, 가치, 유효성
경제적 변화
생산과 억압
경제의 세 단계
보편화된 시장으로의 이데올로기 이행
재진입 문제
계몽된 이성의 순환 논리
객관성
8. 새로운 풍경
문화의 개념과 이성의 한계
평등주의
이다음에 오는 것
9. 오늘날의 세계
경제 권력
새로운 억압 체제
두 러닝메이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우파의 대안
진화의 패러독스
새로운 사회계약
1945년 체제
10. 전망
분업과 재후퇴
생산의 미래
인식의 미래
억압의 미래
변화의 의미
감사의 말
주석
어니스트 겔너 연보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인류 사회의 패턴과 사회질서
인류와 사회는 그 삶의 조건인 제도나 전제들을 절대적이고 자명하고 본디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곤 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증거에 의해서 그 믿음을 굳히기도 한다. 일종의 ‘상식’처럼 은연중에 제공되는 통념을 아무런 검증이나 비판 없이 사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가와 사상가들은 인류 역사의 패턴을 이해하고 미래에 나타날 사회를 예측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인간과 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가 너무도 복합적이고 다양하고 우연적이다.
이 책에서 어니스트 겔너는 역사의 ‘예측 불가능성’을 단언한다. 원시사회에서 농경사회, 산업사회로 이어지는 이른바 3단계론에서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정한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를 올바르게 파악했다고 해도, 그 요소들의 비율이 조금만 바뀌어도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음을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겔너에 따르면, 사회질서란 그것을 낳는 기본 요소들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가능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바로 그 요소들의 집합이 다른 결과물을 낳을 수도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똑같은 카드들을 쥐고서도 다른 방식으로 패를 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어떤 선택이 왜 이루어진 것인지를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거나 어렵다고 해서 ‘이해’의 가능성까지 포기한다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마저 사라진다. 그러면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고 예측만으로는 어떤 확실한 믿음을 주거나 위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관의 필요성이 나온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처럼 예측을 반대하는 이들은 예측이라는 목욕물과 함께 ‘이해’라는 아기까지 쏟아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해를 하려면 쓸모없는 예측도 필요한 법이다. 어떤 일이 실현될 것인지 늘 미리 파악할 수는 없지만, 또는 아마도 늘 미리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선택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철학자이다.”
이성 중심의 역사관
이성 중심의 역사관이 맞닥뜨린 문제와 곤란함은 상당하다. 이 역사관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합리주의적 낙관주의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지난날보다 오늘날 훨씬 인기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실존주의, 정신분석, 스토리텔링이 유행하고 급기야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까지 이른 20세기 후반에 이성 중심의 역사관이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하지만 수렵 시대부터 컴퓨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인식적 변화를 차분하게 그려 보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고, 그것이 꼭 낙관주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인식 활동의 본성은 늘 똑같은 게 아니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상황이 변할 뿐 아니라 그 변화는 깊고도 근본적이다. 똑같은 변화가 단순히 한 번 더 되풀이되는 게 아라 ‘유형’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겔너는 이 책의 목적을 인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자신의 역사관을 공식화하면서 연역적인 방법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인류 역사에 작용하는 기본적인 요소(생산, 억압, 인식)를 선택하여 그림을 그린 뒤에, 그것이 역사 기록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전제를 다듬는 방식이다. 쟁기, 칼, 책은 바로 인류 역사의 세 가지 요소를 구현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이 상징물들은 문화와 언어, 개념, 감수성, 권력, 이데올로기, 합법화, 성문화(成文化), 분업,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와 만나면서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나갔다.
거대한 전환, 신석기혁명과 산업혁명
인류가 등장한 이후 나타난 신석기혁명과 산업혁명, 이 두 차례의 거대한 도약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렇지만 두 차례의 거대한 이행이 인류의 의도적인 설계와 계획에 따라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 역사가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앞선 단계가 나중 단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앞선 단계 다음에 반드시 뒤의 단계가 온다는 뜻은 아니다. ‘수렵채취 사회→농경 사회→산업 사회’ 이 3단계로 인류 역사가 진행되어 왔지만 단계별 이행 과정에서 필연성은 없었다. 처음 씨를 뿌린 농부들은 무엇을 거두게 될지 알지 못했고, 쟁기와 칼을 버리고 상업과 생산, 혁신을 선택한 산업 부르주아들도 근대의 모습을 예상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회질서는 역사에 의해 안내되었지만, 앞선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매우 달라서 그 모습을 올바르게 예상하거나 계획하거나 뜻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제의와 문자를 중심으로 개념을 각인시키고 개념 안에 담겨 있는 강제와 의무를 사회 구성원의 감정에 새겨 넣는 ‘억압’의 시대는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를 거쳐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갔다. 인구 증가가 생산 능력을 넘어서게 될 거라던 맬서스의 예측에 인류 역사는 과잉 생산과 소비사회로 답했다. 산업사회는 ‘나날이’ 발전하는 뛰어난 기술이 생산의 토대가 되는 사회이다. 테크놀로지의 본성과 분업에 바탕을 둔 대규모 생산조직의 실재가 산업사회의 특징이 된다. 쟁기(생산), 칼(억압), 책(인식과 지식)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 긴장과 갈등 속에 권력을 차지했지만 점차 포괄적 분업과 협력, 동의를 통해 사회의 모양새를 결정한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분명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적인 전제정치보다 시민들의 삶에 훨씬 더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의 복합성과 기반 구조에 대한 그 의존성은 그 구성원들을 온순하게 만들고 관료주의적 지침에 늘 복종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나치에 지배된 유럽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은, 그 수용소의 야만성이 아니라 나치가 야만성을 이용하지 않고도 거둘 수 있었던 복종의 규모였다. 사람들은 추방과 궁극적 제거의 다양한 단계에서 협력했다. 관료적 질서에 대한 복종은 습관적이고 통상적이며 필연적이다. 지속적으로 지시에 순응한 끝에 이른 곳이 가스실 문 앞이라면, 그때는 이미 저항하기에 늦다.
억압에 맞선 지식의 주권과 인식의 성장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맥락을 찾아내려는 겔너의 꾸준한 시도는 이성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에 수시로 등장시켜 비판하는 플라톤, 데카르트, 흄, 칸트, 헤겔, 이븐 할둔,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 살린스, 폴라니, 하이에크, 포퍼, 베블런은 모두 겔너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성을 인류 발전의 목표이자 종착점이라고 보고 인류 역사를 합리성의 전개 과정으로 파악하는 겔너의 공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수렵채취 시대부터 오늘날의 컴퓨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인식적 변화를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성찰할 수 있었던 게 용기나 낙관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성과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대단히 연역적이고 추상적인 논의임에도, 스스로 내놓은 전제를 끝없이 의심하며 다듬어 진리에 다가가는 힘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책의 마지막까지 밀어붙이는 치밀함은 동시에 독자들의 고통까지 요구한다.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 논객의 진면목
1995년 11월 5일, 민족주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 어니스트 겔너가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데일리텔레그래프), “비판적 이성주의를 옹호한 십자군”(인디펜던트)이라고 평가했다. 겔너는 여러 언어를 구사했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유럽과 이슬람, 러시아를 아우르는 연구를 바탕으로 정립한 민족주의 이론은 탁월한 학문적 성취였고 《민족과 민족주의》는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민족주의가 전통사회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시민혁명과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산물이라는 견해는 인류학과 역사학 넘어 서양 학계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철학,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등 20세기의 거의 모든 인문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학자이지만, 어니스트 겔너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낯선 인물이고 그의 저작도 번역된 게 거의 없다. 젊은 학자로서 우파의 거목인 이사야 벌린이나 칼 포퍼를 비판하는 한편, 페리 앤더슨이나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진보적 학자와도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그는 그 어떤 진영도 학파도 형성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마르크스 인류학을 소개하고 에밀 뒤르켐과 막스 베버의 사회학 전통을 흡수한 겔너 당대 영국 학계에서 독특한 사상가였음이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사회학자라 평가하고 사회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철학자로 평가했지만, 정작 철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고 사회학자들은 뛰어난 사회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정적인 강의와 논쟁적인 글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매우 통섭적인 철학을 내놓았고,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동시에 근대 과학의 영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언뜻 보아 모순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사야 벌린이나 비트겐슈타인, 칼 포퍼와 논쟁을 벌이고 모교인 옥스퍼드대학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풍토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한편,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찰스 테일러 같은 학자들의 맹렬한 적수이기도 했다. 유럽 지성계를 풍미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켜 “오늘날 가장 지배적인 형태의 상대주의이며, 사실상 두 세기 전 계몽시대 유럽의 질서를 전복시킨 낭만주의 운동의 재연”이라고 공격했다. 형태를 달리하는 모든 상대주의에 맞서 치열하게 이성과 진리를 옹호한 겔너의 지적 후예들은 오늘날 그를 대신하여 전투를 이어 오고 있다.
[서평]
“무엇보다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어니스트 겔너는 매우 높은 곳에서 삶을 바라볼 줄 알았다. 그는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분야로 관심을 넓혀 근대사회가 형성되는 양상을 눈부시고도 명쾌한 논리로 드러냈다.”
《타임스》
“학계의 거물이자 탁월한 지식인인 겔너는 언론의 욕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개 토론을 즐겼고 폐부를 찌르는 위트와 인상적인 언변으로 한 수 뒤처진 논객들을 격분시켰다. 그는 이미 스무 권이 넘는 책과 논문들을 쏟아 낸 바 있음에도 ‘책을 또 쓰고 말았습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라는 사과를 입버릇처럼 되풀이했다.”
《이코노미스트》
▣ 작가 소개
저 : 어니스트 겔너
Ernest Gellner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하고 1962년부터 1984년까지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철학과 과학 방법론을 가르쳤다. 그 뒤 케임브리지대학 사회인류학 교수로 부임하여 1993년까지 역사학과 철학, 사회과학을 넘나들며 강의하고 연구했다. 유럽과 이슬람, 러시아를 아우르는 연구를 바탕으로 민족주의 분야에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냈다. 저술과 강의, 정치 활동을 통해 일생토록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폐쇄적인 사고 체계에 맞섰고, 특히 정신분석, 상대주의, 실존주의, 자유시장의 독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논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퇴임한 뒤 체코 프라하의 센트럴유러피안대학 민족주의연구센터를 맡아 연구와 국제회의를 활발하게 펼치다가 1995년 세상을 떠났다.
Words and Things(1959), Contemporary Thought and Politics(1974), Muslim Society(1981), Nations and Nationalism(1983, 《민족과 민족주의》,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2009), State and Society in Soviet Thought(1988), Conditions of Liberty(1994) 《쟁기, 칼, 책》(2013)등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고, 평전 Ernest Gellner: An Intellectual Biography(Verso, 2012)가 출간되었다.
역 : 이수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진실한 책 한 권이 가진 힘을 믿는 전문번역가이다. 한 권의 책을 옮길 때마다 첫번째 독자라는 설렘을 느끼며, 독자로서 느낀 감동을 잘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문장과의 싸움은 늘 어렵지만, 그 과정에서 글쓴이, 등장인물들, 독자들, 그리고 자신과 말없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화로운 삶의 지속』『교실의 고백』『흡연의 문화사』『사라진 내일』『사코와 반제티』『어린이를 위한 불편한 진실』『돌연변이들』을 우리말로 옮겼고, 『빛을 훔쳐온 까마귀』를 쓰기도 했다. 이외 역서로는 『쟁기, 칼, 책』등이 있다
▣ 주요 목차
1장 역사를 보는 눈
역사철학
역사의 구조
3단계론
생산, 억압, 인식
석기시대는 어느 쪽으로 결정적 한 표를 던질 것인가?
의심스런 증인
2. 공동체에서 사회로
인식의 진화와 언어
복합적 감수성
생각은 자유롭지 않다
사회적·논리적 일관성
종착지
3. 타자의 등장
인식적 전환의 경로
육신을 벗어난 말씀
플라톤 철학
최초의 통합
개념의 권위
플라톤의 오류
4. 긴장
신성한 질서
교회와 국가
프로테스탄티즘
5. 성문화
종교개혁에서 계몽주의로
지식의 주권
개념의 폐위
도구적 합리성
계몽주의의 빛과 그늘
진보의 철학
6. 억압 질서와 권력
권력의 유형
계급
사회구조의 변화
7. 생산, 가치, 유효성
경제적 변화
생산과 억압
경제의 세 단계
보편화된 시장으로의 이데올로기 이행
재진입 문제
계몽된 이성의 순환 논리
객관성
8. 새로운 풍경
문화의 개념과 이성의 한계
평등주의
이다음에 오는 것
9. 오늘날의 세계
경제 권력
새로운 억압 체제
두 러닝메이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우파의 대안
진화의 패러독스
새로운 사회계약
1945년 체제
10. 전망
분업과 재후퇴
생산의 미래
인식의 미래
억압의 미래
변화의 의미
감사의 말
주석
어니스트 겔너 연보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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