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개혁과 수구의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던 조선 후기,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그 형제들의 희망과 좌절의 기록이
다시 한 번 현재진행형의 살아 있는 드라마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열한 살 때 부친 사도세자가 노론 벽파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목도한 정조는 반란과 암살의 위협 속에서도 초계문신제도 신설, 규장각 설치 등을 통해 신진세력을 양성하며 사회경제적 개혁과 문예부흥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조심스레 관철해나갔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용상에서 그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바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같은 새로운 사상과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들이었다(1권 58쪽).
실학의 완성자, 개혁 군주 정조의 오른팔,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끝내 완성해낸 집념의 지성인, 문학·역사·철학·과학기술 등 모든 학문분야를 섭렵한 천재,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최일선에서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 오늘날 다산 정약용을 수식하는 단어는 수없이 많지만 실제로 그는 타고난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웠고,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배권력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해 그 삶은 고달팠다. 그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이벽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1권 95쪽), 성균관에 입학한 지 6년이 지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정조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1권 100쪽). 그러나 정조의 혹독한 훈련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는 개혁의 중심이자 최대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가 곡산에서 부사로 재직할 때 펼친 선정은 나중에 국문을 당할 때 민심을 두려워한 지배층이 그를 사형시키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2권 147쪽).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자찬 묘지명」을 비롯해 안타깝게 스러져간 당대 인물들에 대한 묘지명을 저술하며, 불의한 시대의 검열을 넘어 후세에 역사의 진실을 전하는 데 주력하기도 했다. 당대 현실에서 패배한 듯 보였으나 결코 희망을 묻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부당한 박해도, 뼈저린 외로움과 생활의 누추함도 그의 정신을 잠식하지는 못했다(2권 304~310쪽, 331~335쪽). 우리는 이렇듯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통해 삶의 모순을 뛰어넘은 다산의 위대한 정신을 감동의 순간으로 만날 수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문에서 “자산은 흑산이다.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자玆 자는 흑黑 자와 같다.”라고 쓸 정도로 시대의 어둠을 두려워했던 인물이었지만(2권 248쪽), 아우의 질문을 받으면 참고서적 하나 없는 흑산도에서 놀라운 수준의 식견을 보여주던 든든한 형이기도 했다(2권 234쪽). 다산처럼 학문에만 전념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대부들이 경전 연구에 매진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벼슬을 거부한 채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어류 생태 연구서 『자산어보』나 정부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 등을 집필한 정약전이야말로 진정한 실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었고,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한 시조로 꼽히는 이벽은 그들의 큰형 약현의 처남이었다.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는 이렇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이 제사 문제 등 성리학과 충돌되는 면 때문에 천주교를 결국 저버린 반면, 늦게 받아들인 정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했다. 그는 부친과 형제들을 떠나 타향에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잠시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2권 63쪽). 그리고 양반 지식인 신자로서 자신의 역할은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임을 깨닫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주교요지』에는 당시 사람들이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신유박해 때 사형장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목덜미를 형틀에 대고 하늘을 보았다고 한다. 자신은 떳떳하므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죽겠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망나니가 헛칼질로 목을 반밖에 자르지 못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성호를 그었다고 전해진다(2권 90~91쪽).
당대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으로 폐쇄적이고 닫힌 체제의 벽을 뛰어넘으려고 했던 정약용 형제들은 이렇듯 모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자유롭고 인간적인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의 치열한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또 자칫 무미건조한 학습서가 될 수도 있는 역사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과 해석과 흐름을 제시하는 이덕일 저자의 필치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개정증보판으로 새로 출간된 이번 책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 그 생생함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저 : 이덕일
李德一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를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선명하게 풀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 등의 문제작을 펴내면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 등 생존 당시 주목 받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들이나 역사 속에 안타깝게 묻혀버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이덕일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미스터리와 의문에 대한 문제제기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논쟁적인 주제로 새로운 역사해석의 선두에 서있다.
그는 최근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방송과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독자들을 미지의 역사로 이끌고 있다. 학자풍의 딱딱한 글을 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덕일은 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야사와 어울려 흥미로운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밝혀내어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저서로『운부 1.2.3』『사도세자의 고백』『우리 역사의 수수께끼』1ㆍ2권,『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누가 왕을 죽였는가』『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오국사기』『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설득과 통합의 리더 류성룡』『조선 최대 갑부 역관』『조선 선비 살해 사건』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제6장 구시대로 회귀하다
귀경
정조, 의문사하다
정조어찰첩
정조 즉위 당일, 정조를 배신하다
여유당을 지은 뜻
대박해의 문
제7장 하늘에 속한 사람 정약종
모든 양반이 배교할지라도
『주교요지』의 세계
유교의 비판에 대한 대응 논리
정학으로 알았지 사학으로 알지 않았다
제8장 어둠의 시대
전멸하는 남인들
계속되는 비극들
죽음의 땅, 국청에서
귀양지 장기에서
황사영 백서사건
제9장 유배지에서
거듭되는 이별
유배지에서 시킨 자녀 교육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제10장 주역의 세계로 나아가다
상례를 연구한 이유
제3차 예송논쟁의 조짐
『주역』의 세계로
성인들이 『주역』을 쓴 이유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들, 『주역사전』
왕필은 죽어서 돼지 치는 종놈이 되었다
『주역』은 점치는 책이 아니다
제11장 생태학자 정약전
『송정사의』에 담긴 뜻
정약용과 정약전의 학문세계
유배지 형제의 사랑과 슬픔
제12장 만남과 헤어짐
혜장선사
정약전의 죽음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제13장 고향에 돌아와
「자찬 묘지명」을 쓴 이유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묘지명을 지은 뜻
태워버려도 괜찮다
『여유당전서』및 정약전·정약종 저서 해제
다산 정약용의 연보
개혁과 수구의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던 조선 후기,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그 형제들의 희망과 좌절의 기록이
다시 한 번 현재진행형의 살아 있는 드라마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열한 살 때 부친 사도세자가 노론 벽파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목도한 정조는 반란과 암살의 위협 속에서도 초계문신제도 신설, 규장각 설치 등을 통해 신진세력을 양성하며 사회경제적 개혁과 문예부흥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조심스레 관철해나갔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용상에서 그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바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같은 새로운 사상과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들이었다(1권 58쪽).
실학의 완성자, 개혁 군주 정조의 오른팔,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끝내 완성해낸 집념의 지성인, 문학·역사·철학·과학기술 등 모든 학문분야를 섭렵한 천재,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최일선에서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 오늘날 다산 정약용을 수식하는 단어는 수없이 많지만 실제로 그는 타고난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웠고,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배권력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해 그 삶은 고달팠다. 그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이벽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1권 95쪽), 성균관에 입학한 지 6년이 지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정조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1권 100쪽). 그러나 정조의 혹독한 훈련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는 개혁의 중심이자 최대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가 곡산에서 부사로 재직할 때 펼친 선정은 나중에 국문을 당할 때 민심을 두려워한 지배층이 그를 사형시키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2권 147쪽).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자찬 묘지명」을 비롯해 안타깝게 스러져간 당대 인물들에 대한 묘지명을 저술하며, 불의한 시대의 검열을 넘어 후세에 역사의 진실을 전하는 데 주력하기도 했다. 당대 현실에서 패배한 듯 보였으나 결코 희망을 묻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부당한 박해도, 뼈저린 외로움과 생활의 누추함도 그의 정신을 잠식하지는 못했다(2권 304~310쪽, 331~335쪽). 우리는 이렇듯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통해 삶의 모순을 뛰어넘은 다산의 위대한 정신을 감동의 순간으로 만날 수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문에서 “자산은 흑산이다.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자玆 자는 흑黑 자와 같다.”라고 쓸 정도로 시대의 어둠을 두려워했던 인물이었지만(2권 248쪽), 아우의 질문을 받으면 참고서적 하나 없는 흑산도에서 놀라운 수준의 식견을 보여주던 든든한 형이기도 했다(2권 234쪽). 다산처럼 학문에만 전념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대부들이 경전 연구에 매진하는 현실에서 오히려 벼슬을 거부한 채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어류 생태 연구서 『자산어보』나 정부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 등을 집필한 정약전이야말로 진정한 실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정약용 형제의 매형이었고,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한 시조로 꼽히는 이벽은 그들의 큰형 약현의 처남이었다.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는 이렇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이 제사 문제 등 성리학과 충돌되는 면 때문에 천주교를 결국 저버린 반면, 늦게 받아들인 정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했다. 그는 부친과 형제들을 떠나 타향에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잠시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2권 63쪽). 그리고 양반 지식인 신자로서 자신의 역할은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임을 깨닫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주교요지』에는 당시 사람들이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신유박해 때 사형장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목덜미를 형틀에 대고 하늘을 보았다고 한다. 자신은 떳떳하므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죽겠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망나니가 헛칼질로 목을 반밖에 자르지 못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성호를 그었다고 전해진다(2권 90~91쪽).
당대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으로 폐쇄적이고 닫힌 체제의 벽을 뛰어넘으려고 했던 정약용 형제들은 이렇듯 모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자유롭고 인간적인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의 치열한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또 자칫 무미건조한 학습서가 될 수도 있는 역사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과 해석과 흐름을 제시하는 이덕일 저자의 필치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개정증보판으로 새로 출간된 이번 책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 그 생생함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저 : 이덕일
李德一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를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선명하게 풀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 등의 문제작을 펴내면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 등 생존 당시 주목 받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들이나 역사 속에 안타깝게 묻혀버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이덕일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미스터리와 의문에 대한 문제제기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논쟁적인 주제로 새로운 역사해석의 선두에 서있다.
그는 최근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방송과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독자들을 미지의 역사로 이끌고 있다. 학자풍의 딱딱한 글을 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덕일은 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야사와 어울려 흥미로운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밝혀내어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저서로『운부 1.2.3』『사도세자의 고백』『우리 역사의 수수께끼』1ㆍ2권,『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누가 왕을 죽였는가』『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오국사기』『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설득과 통합의 리더 류성룡』『조선 최대 갑부 역관』『조선 선비 살해 사건』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제6장 구시대로 회귀하다
귀경
정조, 의문사하다
정조어찰첩
정조 즉위 당일, 정조를 배신하다
여유당을 지은 뜻
대박해의 문
제7장 하늘에 속한 사람 정약종
모든 양반이 배교할지라도
『주교요지』의 세계
유교의 비판에 대한 대응 논리
정학으로 알았지 사학으로 알지 않았다
제8장 어둠의 시대
전멸하는 남인들
계속되는 비극들
죽음의 땅, 국청에서
귀양지 장기에서
황사영 백서사건
제9장 유배지에서
거듭되는 이별
유배지에서 시킨 자녀 교육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제10장 주역의 세계로 나아가다
상례를 연구한 이유
제3차 예송논쟁의 조짐
『주역』의 세계로
성인들이 『주역』을 쓴 이유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들, 『주역사전』
왕필은 죽어서 돼지 치는 종놈이 되었다
『주역』은 점치는 책이 아니다
제11장 생태학자 정약전
『송정사의』에 담긴 뜻
정약용과 정약전의 학문세계
유배지 형제의 사랑과 슬픔
제12장 만남과 헤어짐
혜장선사
정약전의 죽음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제13장 고향에 돌아와
「자찬 묘지명」을 쓴 이유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묘지명을 지은 뜻
태워버려도 괜찮다
『여유당전서』및 정약전·정약종 저서 해제
다산 정약용의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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