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경제학은 어떻게 시대의 모순에 맞서는가
현실을 넘어서 자립의 경제학을 꿈꾼 어느 거인의 초상
1980년대의 지식인 및 학생들에게 ‘사회구성체 논쟁’은 시대의 모순을 해명하려는 화두였다. 폭압적인 군사 정권 아래서 당대의 주요 모순을 규명하려는 논쟁이었기에, 진보 진영의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 시발점을 만든 이가 바로 박현채였다. 그야말로 동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이슈메이커였던 셈이다.
이슈메이커로서 박현채의 저력은, 그가 당대의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유신 체제에서 대학생들은 그의 『민족경제론』을 발판 삼아 당대의 문제들에 대한 시야를 열어나갔고, 책은 시대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발표했던 ‘대중경제론’ 역시 박현채의 개입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갈고닦은 경제학을 통해 현실에 뛰어들려 했고,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경제학의 목적이자 학술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경제가 삶의 중심 화두가 된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박현채를 되돌아보는 것은 경제학이 어떻게 시대의 모순에 개입하는가를 되짚어보는 작업이다. 군사 정권의 폭압, 해외 독점자본의 전방위적 압력, 그리고 남북 분단의 모순을 넘어서려 했던 경제학자로서 그가 지향했던 자립의 경제학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시대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지성 박현채에 대한 최초의 평전
1970~1980년대의 한국 지성사를 논할 때, 박현채(朴玄埰 , 1934~1995)는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인물이다. 그는 당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자신의 생각을 펴온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이다. 폭압적 군사정권 시기에 그가 집필한 『민족경제론』(1967)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으며, 1971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경제정책인 ‘대중경제론’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1980년대 한국 지성계를 뒤흔든 사회구성체 논쟁에 불을 지핌으로써, 당대의 핵심 모순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에 미쳤던 지대한 영향에 비해 동시대에 그에 대한 논의는 다소 주춤한 듯하다. 어린 시절 일본어로 서구, 특히 좌파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에 중심을 둔 그의 포지션상 고담준론의 용어들과 수치로 표현되는 데이터를 근거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나간 측면이 있기에, 그의 글은 지금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또한 박현채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민족경제론’에 붙은 ‘민족’의 의미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소 낡게 다가오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 지성사를 조망할 때 박현채는 반드시 되짚어봐야 할 거목이다.
걸물이라 불릴 만큼 괴짜 기질을 선보이기도 했던 그의
박현채라는 프리즘을 통해 당대 사회를 바라보는 작업은,
저자는 박현채 생전에 직접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으며 수많은 저서들과 박현채의 지인들, 가족들을 만나 교감한 끝에 이번 평전을 내놓았다. 평전 전문 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김삼웅의 열여덟 번째 평전으로 『박현채 평전』은 박현채의 치열했던 삶, 그리고 그의 사상과 저술까지 한데 묶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살렸다.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의 이번 주인공은 박현채(朴玄埰 , 1934~1995)다. 박현채는 한국 현대사에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대표적 인물 중 하나임에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1967년 발표한 민족경제론은 자립적 국민경제, 한국형 혼합경제 체제 등을 주 내용으로 제시했다. 이를 기반으로 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의 경제정책 ‘대중경제론’을 마련했는데 대기업 위주가 아닌 중소기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대외의존에서 벗어난 자립경제를 강조했다. 폭압적 군사독재 시기에 실천적 지성으로 제공되었던 『민족경제론』은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당대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1985년 『창작과 비평』에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를 기고하면서 시작된 사회구성체 논쟁은 당대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당면 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주장이었다. 당대의 체제를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분단된 두 개의 사회구성체가 아닌 통일을 염두에 둔 사회구성체를 주장했다. 이렇게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이슈들은 남긴 박현채. 저자는 박현채 생전에 직접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으며 수많은 저서들과 박현채의 지인들, 가족들을 만나 교감한 끝에 이번 평전을 내놓았다. 평전 전문 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김삼웅의 열여덟 번째 평전으로 『박현채 평전』은 박현채의 치열했던 삶, 그리고 그의 사상과 저술까지 한데 묶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살렸다.
박현채, 불운한 시대의 불온한 경제학자
박현채는 누구인가? 1934년 태어난 박현채는 어릴 적부터 박헌영과 함께 활동한 이모부, 사회주의운동을 한 당숙 등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좌파 친척들과 함께 해방을 맞은 박현채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운동을 접하게 된다. 학창시절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박현채는 17세가 되던 해 빨치산으로 입산하여 광주 지구 부대원이 된다.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다 화순경찰서에 체포된 후 부모님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석방될 수 있었다. 다시 학업에 집중한 끝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대 후반까지 안병직, 정윤형, 전철환 등 후진국연구회 서클을 만들어 공부를 하기도 한다. 서울대 대학원 이론경제학과에 다니면서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연구원으로 들어간 박현채는 이후 비판적 농업경제학자들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에서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 등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1964년에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이후 국민경제연구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경제학자의 길에 들어선다. 도서출판 한길사와 ‘한길역사기행’, ‘한길역사강좌’ 등을 통해 ‘지리산과 민족사’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하고, 『태백산맥』을 연재 중인 조정래를 만나 자신의 지리산 체험을 구술하고 함께 답사하며 소년 전사 조원제를 묘사하는 데 생생한 정보를 전달한다. 『박현채 평전』에서는 식민지 시대 태어나 폭압적 군사독재 시기를 거친 그의 다채로운 삶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학계의 평가, 사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벌였던 사업 등을 소개한다.
금 우리가 박현채를 되돌아보는 의미
어릴 적부터 좌파 친척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밝았던, 그리고 마르크스의 서적에 심취했던 박현채에게 왜 민족의 문제가 중심 화두가 되었을까? 박현채는 흔히 좌파로 분류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수많은 글들에서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본인도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박현채의 궁극적 고민은 시대적 모순을 고민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와 전두환의 5공 체제 시절, 비판적 지식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사회 활동을 억업 당했고, 아첨하는 이들과 기회주의자들만이 풍미했다. 그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뿐만 아니라 민족, 인권, 분단 문제 등 시대적 모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단순한 헌법 개정이 아니라 진정한 민족해방, 낡은 것의 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 민족 분단 상황의 극복에 의한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박현채 사상의 핵심은 현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공동체 정신이었다. 그가 지향했던 공동체 문화는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물론 세계화 시대에 ‘민족’은 일견 낡은 화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로 경제위기를 반복해서 겪고 있고,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 그가 지향했던 자립적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화두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김삼웅
현대사연구가 및 정치평론가. 1943년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다. 소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 및 하버드대학교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다.《민주전선》등 진보매체에서 활동했으며,《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동호지필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친일인명사전》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독립기념관 이사, 백범 학술원 연구위원,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제7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성균관대학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정치문화를 가르쳤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발간의 글_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정출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점필재연구소 소장)
머리말_ 박현채, 불운한 시대의 불온한 경제학자
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 면서기의 아들로 태어나다|좌익 친척들과 해방을 맞이하다|독서회를 조직, 사회주의 서적에 심취하다|어른 못지않은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소년
2장 프롤레타리아를 꿈꾸던 청년 박현채
17세 소년, 빨치산 되다|목숨을 내걸지언정 그 길을 가야겠으니|소년들로 구성된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 생활|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꼬챙이|임무 수행 도중 경찰에 체포되다
3장 ‘지식 보따리상’의 길에 들어서다
자신의 과거를 숨겨야만 했던 빨치산 출신 대학생|농연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딛다|거침없는 성격, 전임 박차고 보따리 장사로|인혁당 사건에 연루, 감옥에서 한 해를 보내다|‘간첩 지식인’, 지식의 날개를 펴다|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를 구상하다
4장 ‘박현채학’의 중심, 민족경제론
『민족경제론』, 경제사상에 단비를 뿌리다|관념적 이론을 넘어, 역사와 운동을 향하여|‘금서’의 딱지가 붙었음에도 동시대와 호흡한 명저|민족이 곧 민중이고, 민중이 바로 민주주의다
5장 피로 물든 시대, 목숨을 건 외침
인간성 회복을 위한 경제이론을 추구하며|엉뚱한 사건에 연루, 다시 옥고를 치르다|5·18 민주항쟁 전야, 심상치 않은 광주에서|광기의 시대, ‘농민 조직화’를 주장하다|왕성한 필력, 멈추지 않는 학문적 열정
6장 경제평론가에서 경제사상가로 거듭나다
사회구성체 논쟁의 시대가 열리다|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올라, 논쟁을 전개하며|즐기던 술·담배도 줄이고 글쓰기에 전념하다|유토피아를 꿈꾸며, 공동체주의를 향하여
7장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이론을 펼치다
인문사회 무크의 단골 필자|민족의 한이 서린 지리산을 답사하다|민중문학으로 관심을 확장시키다|‘한길역사강좌’의 인기 강사로 자리매김하다|고은, 리영희 등의 지식인·문인들과의 막역한 교우
8장 6월항쟁의 격랑 속에서
저항적 지식인들, 출판계로 몰려들다|지식인들의 산행 모임 ‘거시기 산악회’ 조직|사유의 영역과 폭이 넓어진 ‘논설의 생산 공장’|분단에서 농어촌 문제까지, 시대의 화두를 아우르며
9장 외골수 지식인, 고난 끝에 날개를 달다
보상 바라지 않는 삶을 생활신조 삼아|줄탁동시, 박현채와 조정래의 만남|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하다|글쓰기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을 보이며|민족민주운동을 바탕으로 한 한국 현대사 집필
10장 자서전 집필을 뒤로한 채 영면하다
해외여행 길에 올라 중국 견문록 쓰기도|야생초 시들어 지듯이|말년을 갉아먹은 자서전 집필|갑작스런 죽음, 사후 다양한 기념사업|후진에 남긴 ‘민봉학(民峯學)’
주석|주요 저술 및 참고문헌 목록|박현채 원고 목록|연보|찾아보기
경제학은 어떻게 시대의 모순에 맞서는가
현실을 넘어서 자립의 경제학을 꿈꾼 어느 거인의 초상
1980년대의 지식인 및 학생들에게 ‘사회구성체 논쟁’은 시대의 모순을 해명하려는 화두였다. 폭압적인 군사 정권 아래서 당대의 주요 모순을 규명하려는 논쟁이었기에, 진보 진영의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 시발점을 만든 이가 바로 박현채였다. 그야말로 동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이슈메이커였던 셈이다.
이슈메이커로서 박현채의 저력은, 그가 당대의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유신 체제에서 대학생들은 그의 『민족경제론』을 발판 삼아 당대의 문제들에 대한 시야를 열어나갔고, 책은 시대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발표했던 ‘대중경제론’ 역시 박현채의 개입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갈고닦은 경제학을 통해 현실에 뛰어들려 했고,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경제학의 목적이자 학술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경제가 삶의 중심 화두가 된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박현채를 되돌아보는 것은 경제학이 어떻게 시대의 모순에 개입하는가를 되짚어보는 작업이다. 군사 정권의 폭압, 해외 독점자본의 전방위적 압력, 그리고 남북 분단의 모순을 넘어서려 했던 경제학자로서 그가 지향했던 자립의 경제학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시대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지성 박현채에 대한 최초의 평전
1970~1980년대의 한국 지성사를 논할 때, 박현채(朴玄埰 , 1934~1995)는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인물이다. 그는 당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자신의 생각을 펴온 대표적인 실천적 지성이다. 폭압적 군사정권 시기에 그가 집필한 『민족경제론』(1967)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으며, 1971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경제정책인 ‘대중경제론’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1980년대 한국 지성계를 뒤흔든 사회구성체 논쟁에 불을 지핌으로써, 당대의 핵심 모순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에 미쳤던 지대한 영향에 비해 동시대에 그에 대한 논의는 다소 주춤한 듯하다. 어린 시절 일본어로 서구, 특히 좌파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에 중심을 둔 그의 포지션상 고담준론의 용어들과 수치로 표현되는 데이터를 근거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나간 측면이 있기에, 그의 글은 지금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또한 박현채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민족경제론’에 붙은 ‘민족’의 의미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소 낡게 다가오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 지성사를 조망할 때 박현채는 반드시 되짚어봐야 할 거목이다.
걸물이라 불릴 만큼 괴짜 기질을 선보이기도 했던 그의
박현채라는 프리즘을 통해 당대 사회를 바라보는 작업은,
저자는 박현채 생전에 직접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으며 수많은 저서들과 박현채의 지인들, 가족들을 만나 교감한 끝에 이번 평전을 내놓았다. 평전 전문 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김삼웅의 열여덟 번째 평전으로 『박현채 평전』은 박현채의 치열했던 삶, 그리고 그의 사상과 저술까지 한데 묶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살렸다.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의 이번 주인공은 박현채(朴玄埰 , 1934~1995)다. 박현채는 한국 현대사에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대표적 인물 중 하나임에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1967년 발표한 민족경제론은 자립적 국민경제, 한국형 혼합경제 체제 등을 주 내용으로 제시했다. 이를 기반으로 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의 경제정책 ‘대중경제론’을 마련했는데 대기업 위주가 아닌 중소기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대외의존에서 벗어난 자립경제를 강조했다. 폭압적 군사독재 시기에 실천적 지성으로 제공되었던 『민족경제론』은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당대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1985년 『창작과 비평』에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를 기고하면서 시작된 사회구성체 논쟁은 당대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당면 과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주장이었다. 당대의 체제를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분단된 두 개의 사회구성체가 아닌 통일을 염두에 둔 사회구성체를 주장했다. 이렇게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이슈들은 남긴 박현채. 저자는 박현채 생전에 직접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으며 수많은 저서들과 박현채의 지인들, 가족들을 만나 교감한 끝에 이번 평전을 내놓았다. 평전 전문 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김삼웅의 열여덟 번째 평전으로 『박현채 평전』은 박현채의 치열했던 삶, 그리고 그의 사상과 저술까지 한데 묶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살렸다.
박현채, 불운한 시대의 불온한 경제학자
박현채는 누구인가? 1934년 태어난 박현채는 어릴 적부터 박헌영과 함께 활동한 이모부, 사회주의운동을 한 당숙 등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좌파 친척들과 함께 해방을 맞은 박현채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운동을 접하게 된다. 학창시절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박현채는 17세가 되던 해 빨치산으로 입산하여 광주 지구 부대원이 된다.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다 화순경찰서에 체포된 후 부모님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석방될 수 있었다. 다시 학업에 집중한 끝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대 후반까지 안병직, 정윤형, 전철환 등 후진국연구회 서클을 만들어 공부를 하기도 한다. 서울대 대학원 이론경제학과에 다니면서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연구원으로 들어간 박현채는 이후 비판적 농업경제학자들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에서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 등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1964년에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이후 국민경제연구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경제학자의 길에 들어선다. 도서출판 한길사와 ‘한길역사기행’, ‘한길역사강좌’ 등을 통해 ‘지리산과 민족사’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하고, 『태백산맥』을 연재 중인 조정래를 만나 자신의 지리산 체험을 구술하고 함께 답사하며 소년 전사 조원제를 묘사하는 데 생생한 정보를 전달한다. 『박현채 평전』에서는 식민지 시대 태어나 폭압적 군사독재 시기를 거친 그의 다채로운 삶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학계의 평가, 사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벌였던 사업 등을 소개한다.
금 우리가 박현채를 되돌아보는 의미
어릴 적부터 좌파 친척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밝았던, 그리고 마르크스의 서적에 심취했던 박현채에게 왜 민족의 문제가 중심 화두가 되었을까? 박현채는 흔히 좌파로 분류된다. 실제로 그가 남긴 수많은 글들에서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본인도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박현채의 궁극적 고민은 시대적 모순을 고민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와 전두환의 5공 체제 시절, 비판적 지식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사회 활동을 억업 당했고, 아첨하는 이들과 기회주의자들만이 풍미했다. 그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뿐만 아니라 민족, 인권, 분단 문제 등 시대적 모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단순한 헌법 개정이 아니라 진정한 민족해방, 낡은 것의 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 민족 분단 상황의 극복에 의한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박현채 사상의 핵심은 현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공동체 정신이었다. 그가 지향했던 공동체 문화는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물론 세계화 시대에 ‘민족’은 일견 낡은 화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로 경제위기를 반복해서 겪고 있고,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 그가 지향했던 자립적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화두일 것이다.
▣ 작가 소개
저 : 김삼웅
현대사연구가 및 정치평론가. 1943년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다. 소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석사 및 하버드대학교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다.《민주전선》등 진보매체에서 활동했으며,《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동호지필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친일인명사전》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 4.3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독립기념관 이사, 백범 학술원 연구위원,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제7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으며, 성균관대학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정치문화를 가르쳤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국회 추천),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발간의 글_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정출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점필재연구소 소장)
머리말_ 박현채, 불운한 시대의 불온한 경제학자
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 면서기의 아들로 태어나다|좌익 친척들과 해방을 맞이하다|독서회를 조직, 사회주의 서적에 심취하다|어른 못지않은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소년
2장 프롤레타리아를 꿈꾸던 청년 박현채
17세 소년, 빨치산 되다|목숨을 내걸지언정 그 길을 가야겠으니|소년들로 구성된 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 생활|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꼬챙이|임무 수행 도중 경찰에 체포되다
3장 ‘지식 보따리상’의 길에 들어서다
자신의 과거를 숨겨야만 했던 빨치산 출신 대학생|농연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딛다|거침없는 성격, 전임 박차고 보따리 장사로|인혁당 사건에 연루, 감옥에서 한 해를 보내다|‘간첩 지식인’, 지식의 날개를 펴다|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를 구상하다
4장 ‘박현채학’의 중심, 민족경제론
『민족경제론』, 경제사상에 단비를 뿌리다|관념적 이론을 넘어, 역사와 운동을 향하여|‘금서’의 딱지가 붙었음에도 동시대와 호흡한 명저|민족이 곧 민중이고, 민중이 바로 민주주의다
5장 피로 물든 시대, 목숨을 건 외침
인간성 회복을 위한 경제이론을 추구하며|엉뚱한 사건에 연루, 다시 옥고를 치르다|5·18 민주항쟁 전야, 심상치 않은 광주에서|광기의 시대, ‘농민 조직화’를 주장하다|왕성한 필력, 멈추지 않는 학문적 열정
6장 경제평론가에서 경제사상가로 거듭나다
사회구성체 논쟁의 시대가 열리다|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올라, 논쟁을 전개하며|즐기던 술·담배도 줄이고 글쓰기에 전념하다|유토피아를 꿈꾸며, 공동체주의를 향하여
7장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이론을 펼치다
인문사회 무크의 단골 필자|민족의 한이 서린 지리산을 답사하다|민중문학으로 관심을 확장시키다|‘한길역사강좌’의 인기 강사로 자리매김하다|고은, 리영희 등의 지식인·문인들과의 막역한 교우
8장 6월항쟁의 격랑 속에서
저항적 지식인들, 출판계로 몰려들다|지식인들의 산행 모임 ‘거시기 산악회’ 조직|사유의 영역과 폭이 넓어진 ‘논설의 생산 공장’|분단에서 농어촌 문제까지, 시대의 화두를 아우르며
9장 외골수 지식인, 고난 끝에 날개를 달다
보상 바라지 않는 삶을 생활신조 삼아|줄탁동시, 박현채와 조정래의 만남|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하다|글쓰기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을 보이며|민족민주운동을 바탕으로 한 한국 현대사 집필
10장 자서전 집필을 뒤로한 채 영면하다
해외여행 길에 올라 중국 견문록 쓰기도|야생초 시들어 지듯이|말년을 갉아먹은 자서전 집필|갑작스런 죽음, 사후 다양한 기념사업|후진에 남긴 ‘민봉학(民峯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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