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밀사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외교(1925~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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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임경석
출판사항푸른역사, 발행일:2012/12/29
형태사항p.203 A5판:21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94079776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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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두 사람, 조동호와 조봉암

조선공산당, 조동호와 조봉암을 모스크바 밀사로 선발하다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서울 시내 한가운데 황금정黃金町 1정목町目(현재의 을지로 입구)에 위치한 중국요리점 아서원雅敍園 깊숙한 내실에서 은밀한 회합이 열렸다. 조선공산당을 설립하기 위한 ‘제1회 조선공산당대표회’ 회합이었다. 둘러앉은 인텔리풍의 청?장년층 19명은 경향 각지에 산재한 비밀 공산주의 세포 단체의 대표자들이었다. 이들은 국제공산당 가입을 현실화하기 위해 당 대표자를 모스크바에 직접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5월 27일 조동호와 조봉암에게 위임장을 발급한다. 조동호는 당의 ‘전권대표’, 조봉암은 ‘전권보좌 대표’였다.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린 이튿날인 4월 18일 밤 12시, 서울 한복판에 있던 박헌영의 살림집에 28개 세포 단체의 대표자 20명이 모여들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논의한 결과 조선공산당의 지도에 복종하며 국제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정했다. 고려공산청년회가 정식으로 창립되는 순간이었다. 이틀 뒤인 4월 21일, 새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회 첫 회의에서 국제공청에 파견할 대표자 선정이 이루어졌다. “동무 박철환朴鐵丸”, 바로 ‘혁명의 탄환’ 조봉암이었다.

조동호와 조봉암, 모스크바 여정에 오르다
조동호와 조봉암이 모스크바 밀사로 선발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내의 다른 누구보다 코민테른 외교를 잘 풀어갈 수 있는 경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젊은 나이인데다가 초창기 이래 오랜 기간 당원으로 활동한 활동가였으며, 당과 공청 창립대회의 혁혁한 공로자였다. 그들은 당과 공청의 과거 역사와 현황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진술할 능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동료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직접 생활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조동호와 조봉암이 모스크바 여정에 올랐다. 그러나 둘은 함께하지 못했다. 재중국 코민테른 관계자들이 모스크바 파견자의 단일화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봉암이 단독으로 모스크바에 가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전권대표 보좌 겸 고려공청 전권대표’. 당과 공청의 대표자를 겸임한 채 국제공산당과 국제공산청년동맹에 외교 교섭차 나선 것이다. 반면 조동호는 상해에 머물며 조봉암 외교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1925년 8월 8일과 8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서 국제당 앞으로 조선공산당의 창립 경위와 활동상을 알리는 공식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조봉암, 모스크바에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에 나서다

조봉암, 조선문제위원회에 조선공산당 승인을 요구하다
코민테른은 많은 나라의 공산당이 가입해 있는 국제기구였던 만큼 내부 구성과 직제가 복잡했고 각 부서마다 고유한 업무 영역과 권한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간 조봉암이 문을 두드려야 할 곳은 조선 담당 부서, 바로 동방부였다. 이 기구가 조선 문제를 다루는 주무 부서였다. 조봉암은 국제공청 역사상 본부 최고위직에 진출한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조훈과 러시아 내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의 중진이었던 남만춘의 도움을 받아 이곳 동방부에서 조선공산당을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외교 활동을 시작한다.
1925년 9월 3일, 국제당 집행위원회 비서부는 ‘조선 문제’에 관해 조선 문제를 심의하는 특별위원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조선문제위원회(위원회의 의장 이름을 따서 미츠케비치위원회라고 불림)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조봉암은 이 위원회에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대표회’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 당을 국제공산당의 지부로 인정하고, 대표회 석상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회를 국제공산당의 유일한 교섭 파트너로 승인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승인뿐만 아니라 “변경함이 없을 것”까지 요구했다.

9월결정서, 조선공산당의 지위와 국제공산당과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다
1925년 9월 21일, 국제공산당 간부회는 회의를 통해 미츠케비치위원회에서 최종 확정한 조선문제결정서를 채택하기로 결정한다. ‘9월결정서’(정식 명칭은 〈조선 문제에 관한 국제당 간부회의 최종 결정: 조선공산단체의 당면 과제〉)라 불리는 이 문서는 조선공산당의 지위와 국제공산당과의 상호관계를 규정한 역사적인 문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조봉암의 최대 관심사였던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 여부다. 총 15개항 중 첫 세 항에서 이에 언급하고 있다. 승인 판정을 연기하긴 하지만, 최종 판정이 내려지기 전이라 하더라도 ‘조선공산단체’ 중앙위원회를 국제당의 기지로 삼는다는 결정이 담겨 있었다. 사실상의 승인이었다. 9월결정서 채택 후 국제공산당 동방부는 여러 가지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특히 9월결정서의 내용과 의미를 해설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조선공산당은 물론이고 당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공산주의 그룹들에게도 띄웠다. 결정서의 효력을 현실화하고, ‘조선공산당 잠정 승인’에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조선공산당 외 공산 그룹들의 반발도 염두에 둔 조치였다. 구체적으로, 이 편지에는 신생 공산당을 강력히 엄호하고 당외 공산 그룹을 압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외 공산 그룹은 어떤 경우에도 공산당 중앙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조봉암의 외교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외 공산 그룹들,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잠정 승인에 반발하다

당준비회?스파르타쿠스당?까엔당, 반대 입장을 표명하다
조봉암이 남만춘과 함께 국제공산당이 채택한 9월결정서를 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특히 9월결정서로 인해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된 고려공산당창립대회준비위원회(당준비회) 주도 그룹이 격렬한 분노를 표출했다. 당준비회는 국제공산당의 1924년 2월결정서에 입각해서 설립된,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의 직속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연해주 조선인 사회에서 가장 폭넓은 인맥과 영향력을 갖고 있던 ‘국민의회 그룹’ 인사들도 9월결정에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이들이 조선 내지에 구축한 독자적인 비밀결사 스파르타쿠스당은 당준비회와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을 인정하지 않았다. 합법적 사상 단체 북풍회를 주된 활동 근거지로 삼아 ‘북풍파’라고 곧잘 불리던 조선 내지의 비합법 공산주의 그룹 까엔당은 1925년 4월 17일의 회합이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아니라 ‘3개 공산 그룹 대표자들의 연합회의’였다는 주장까지 했다. 조봉암이 국제공산당에 허위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입장을 국제공산당에 전달할 대표 두 사람(신철과 김영우)을 선정,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서북노 3파 연합,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단독 가입 저지를 위해 연합하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한 ‘화요회 공산당’과 함께 조선 내지에서 활동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양대 공산 그룹이었던 서울청년회(서울파) 역시 국제공산당의 9월결정서 내용에 반대하고 나섰다. ‘화요회 공산당’이 스스로를 조선공산당이라 부르는 것은 참칭이고, 다른 공산 그룹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서울청년회 내부의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도 까엔당과 마찬가지로 김영우, 이운혁, 최창익을 파견,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잠정 승인을 취소시키려 했다. 각 공산 그룹은 각개 약진 방식으로는 ‘화요회 공산당’의 국제공산당 단독 가입을 막기 어렵다는 공동 인식 하에 행동 통일을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조선 내지에 근거를 둔 3개 공산주의 그룹이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단독 가맹을 저지하기 위해 외교운동에 나섰다. 국제공산당 외교를 둘러싼 분파 투쟁이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운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각 공산주의 그룹의 대표자들이 저 멀리 모스크바까지 찾아가서 국제공산당을 상대로 하는 외교전을 전개하는 복잡한 양상이 펼쳐졌다. 이 그룹들은 정치적 연합을 결성했다. ‘회요회 공산당’의 독주에 맞서는 비주류 연합, 이른바 스파르타쿠스당, 까엔당, 고려공산동맹의 ‘서북노 3파 연합’이 모스크바에 등장한 것이다.

조동호,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승인을 이끌어내다

조동호, 뒤늦게 모스크바로 떠나다
조봉암이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잠정 승인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내는 동안 상해에 머물며 조봉암을 측면 지원했던 조선공산당 전권대표 조동호는 1925년 12월 30일 뒤늦게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9월결정 이후 후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조선공산당 창당대회에서 채택했다는 강령, 규약, 정책 결정안 등의 문헌을 모스크바에 전해야 했다. 둘째,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정식 승인’을 이끌어 내야 했다. 셋째, 9월결정서에 맞서는 국내외 여러 공산 그룹들의 반대운동에 대응해야 했다. 1926년 1월 중순경 모스크바에 도착한 조동호는 “1925년 4월 17일 서울 대회에서 결성된 공산당과 그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의 ‘정식 승인’을 요구했다. 연해주 조선인들의 조선공산당 반대운동을 중지시키는 조치를 취해줄 것도 요청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온 것은 조동호만이 아니었다. ‘화요회 공산당’에 맞서는 비주류 연합진영의 대표자들도 모스크바에 집결, 각 그룹의 독자 보고서와 합동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에 임했다.

조선공산당, 국제공산당의 정식 승인을 받다
조선 문제가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의 현안 중 하나로 떠올랐다. 조선공산당과 비주류 연합진영, 양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동일한 시기에 상이한 주장을 설파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925년 9월결정서에서 미결로 남겨뒀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국제공산당은 이 문제를 전담하는 특별 기구를 설립했다. 비서부 산하의 조선위원회(쿠시넨위원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조동호는 국제공청 동방부 위원 조훈과 공동으로 국제공산당 동방부에 파격적인 의견서를 제출했다. 저명한 일본인 국제주의자 가타야마 센이 서북노 3파 연합의 파견자들과 연계를 맺고 있음을 문제 삼은 것이다. 여기에 국제공산당 동방부 위원들도 가세하여 중대한 행동에 착수했다. 1926년 2월 7일에 열린 동방부 위원단 회의에 조선 문제를 안건으로 올린 것이다. 이 안건에서는 조선공산당, 즉 ‘화요회 공산당’의 정식 승인 문제를 확대총회에 제기하고 아직 조선공산당에 합류하지 않은 당외 공산 단체 구성원들에게 속히 입당할 것을 종용했다. 쿠시넨위원회는 1926년 2월 21일, 자신들의 입장을 확정했다.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을 승인하고, 동방부의 당외 공산 그룹에 대한 배타적?적대적 태도를 비판하며, 당외 공산 그룹과도 연계를 맺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1926년 2월 17일 개최된 국제공산당 집행위 제6회 확대총회에서 조선소위원회가 성안한 ‘조선문제결정서’가 가결되었다. 이어서 3월 31일 국제공산당 간부회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3월결정서에는 “1925년 4월에 결성된 공산당을 국제당의 지부인 조선공산당으로 승인하자는 동방부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로써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생성 이래 다년간 현안 문제이던 국제공산당 가입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된다.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 외교,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이면을 드러내다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이 공산주의운동에 끼친 영향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은 공산주의운동사의 흐름 속에 커다란 물굽이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먼저 각 공산 그룹의 존재 형태를 변모시켜 나갔다.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 이전에는 여러 공산 그룹이 각자 별립한 조직체로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당외에 존재하던 공산 그룹은 서서히 존립 기반을 상실해 갔다. 당외 공산 그룹의 구성원들은 차츰 조선공산당 안에로 편입되어 들어갔다. 반면 ‘화요회 공산당’이라는 별칭에서 드러나듯 출범 당시에는 여러 공산 그룹의 하나일 뿐이던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 가입 이후 달라졌다. 당외 공산 그룹의 유능한 공산주의자들도 포괄하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실질적인 대표기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국제공산당 가입은 민족해방운동의 지평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본격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여러 공산 그룹에 의해 분립적으로 진행되던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조선공산당의 단일 지도하에 통합됨으로써, 단일한 민족통일전선기관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제공산당에 가입한 조선공산당이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신간회와 같은 단일한 민족통일전선기관은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운동을 수면 위로 올리는 시도
분명 사회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회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 관련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수면 아래 잠긴 채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충분치 못한 사료, 부족한 연구자 등 여러 가지 원인에 따른 결과이리라. 여기에 여전히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의 억압도 한몫을 해온 것은 아닐까 싶다. 다소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사회주의, 공산주의 얘기만 나오면 ‘빨갱이’의 굴레를 덧씌우는 이념적 경직성 또한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우리 역사의 빈 공백으로 만들어온 장본인 중 하나일 것이다. 저자의 이 책은 그러한 공백을 메우는 하나의 시도다. 충실한 자료 검토를 통해 역사학계의 기존 통설을 반박하며 조동호와 조봉암이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이를 두고 국내의 다른 공산주의 그룹들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 결국 국제공산당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살핌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일제 강점기의 풍경을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 작가 소개

저 :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사에 오랫동안 천착해『이정 박헌영 전집』(전9권, 역사비평사) 간행 과정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사회주의운동사를 총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에 착수해 2003년 그 첫 번째 결실인『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을 내놓았다. 그 밖에 연구논문으로「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3ㆍ1운동 전후 한국민족주의의 변화」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1장 두 사람
모스크바행
증명서
밀사를 선발하기까지
두 사람
출발

2장 조봉암의 외교
모스크바의 협력자들
국제당 동방부
미츠케비치위원회
약점
강령 논쟁
1925년 9월결정서
국제공청 외교
후속 조치
강령 문제
귀환길

3장 경쟁자들
‘당준비회’의 분노
국민의회 그룹과 스파르타쿠스당
까엔당의 이탈
고려공산동맹의 반발

4장 조동호의 외교
조동호의 임무
모스크바의 조동호
연합 반대파의 대표자들
쿠시넨위원회
항의
조선공산당 승인안
쿠시넨위원회의 심의
국제당 집행위 제6회 확대총회 조선소위원회
1926년 3월결정서
3월결정서 후속 조치
조선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관계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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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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