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차 문화’가 담겨 있는 옛글을 엄선하여 번역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시대 범위는 여말선초의 문인을 시작으로 1500년대 중반까지로 한정했다. 주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다양한 차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을 선집해서 번역했다.
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집 속에 담겨 있는 차와 관련된 시와 산문을 선집하는 한편, 「조선왕조실록」의 차 기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차 기록을 따로 모았다.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천년을 이어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차 문화에 관한 문헌 기록 자료를 집대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차시(茶詩)를 포함한 개인 문집의 자료,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삼국사기」 등의 관찬 사료(官撰史料)와 「동문선」, 「임원경제지」, 「성호사설」 등의 별집류(別集類)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자료까지 차에 관한 모든 문헌 자료를 망라할 계획이다.
옛글을 통해 천년의 차 문화를 만나다
한국에 차가 전래된 것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인도 공주 허황옥부터라는 설이 있을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차와 관련한 오랜 문화적 전통은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 공통된 것으로, 한자와 유교, 선종 계통의 불교와 함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는 주요한 코드이다.
한국에서의 차 문화 관련 문헌 자료의 정리와 소개는 일부 애호가들의 손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때문에 전문 연구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내용이 소략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고,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접하기에도 힘들었다.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전문 연구자들이 관련 문헌을 폭넓게 정리하고 번역했다. 삼국시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차 관련 문헌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번역함으로써 차 문화 연구의 기초 자료는 물론 일반인들의 한국 차 문화 이해에 기여할 것이다.
개인의 기호품으로 정착한 차(茶), 차 문화
― 조선 초기 차 문화의 특징
삼국시대와 고려의 차 문화가 왕실과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차 문화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조선 초기는 차 문화가 개인화되고 기호품화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차 관련 글에서는 차 문화의 전래와 발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려의 차 문화가 농익은 불교문화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음은 기간된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 초기는 흔히 한국의 차 문화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인식되어 왔다. 이전 시기, 특히 고려에 비해 남겨진 글이나 서적이 소박하기 때문인데, 이는 바꿔 말하면 국가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차 문화 발달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차 문화가 개인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고, 한적하고 담백한 취미를 가진 관료와 문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차가 애호되었다.
이 책은 변중량(卞仲良, 1345~1398)에서부터 심언광(沈彦光, 1487~1540)에 이르기까지 모두 46명 189편의 시문을 수록하였다. 그중에는 김종직(金宗直), 김시습(金時習), 이목(李穆) 등 기왕에 다인(茶人)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인물들도 있으나, 이원(李原), 변계량(卞季良), 유방선(柳方善), 성현(成俔), 남효온(南孝溫) 등 새롭게 다인의 대열에 등장한 인물들이 많다. 이들은 대개 서너 편 내외의 시를 남기고 있다.
만년에 궁벽한 곳 좋아하여
먼 산에 거처를 잡았네.
차를 심고 약초밭 일구며
대나무 심어 낚싯대 만드네.
봄빛에 잠이 안 와 심란한데
새소리가 한적함을 깨누나.
누가 알리요, 초가집 아래
누워 노니는 이 느긋함을
_유방선, 「즉사」(卽事)
이 시의 작자 유방선은 자연에 묻혀 사는 한가롭고 근심 없는 일상을 읊고 있다. 특히 “차를 심고 약초밭 일구며”라고 한 대목을 보면, 개인적으로 차를 재배하여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김시습의 「천원역 누각에서」(川原驛樓)나 「차나무를 기르며」(養茶)를 보면, 개인적 필요에 의해 차를 길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민간에서 차 재배가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차 문화의 지속적인 발전
차 문화가 발달하게 된 데에는 불교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 삼국시대와 고려의 기록을 보면 사찰 경내에 따로 다헌(茶軒)을 마련하거나 공양을 위해 인근에 차밭을 가꾸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통도사 인근에 전문적으로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소촌(茶所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이전 시기의 기록들에 비해 조선 초기의 기록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한 자료들을 일별해 보면, 일반적인 시문에 비해 절을 무대로 하거나 스님과 교유한 사잽 등이 월등히 많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사찰이 차 문화의 주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고려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는 차 문화의 공백기를 매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원(茶園)의 조성과 차 전문 기록의 등장
조선 초기의 차 관련 자료로 손꼽히는 것은, 김종직이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엄천사 북쪽 죽림에 차밭을 조성하고 지은 「다원」(茶園)이라는 시이다. 그 서문을 보면, 당시에 차를 공물로 바치던 실상, 차의 거래가 등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나라에 바치는 차가 본 군(郡)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 해마다 백성들에게 이를 부과한다. 백성들은 찻값을 가지고 전라도에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얻는다. 내가 처음 이 고을에 부임하여 그 폐단을 알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자체적으로 얻어서 납부하도록 하였다.
_김종직, 「다원」 중에서
당시 공물은 대체로 각 지방의 토산물로 부과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경우 다른 고장에서 구입해서 납부해야 했고, 그만큼 백성의 부담은 무거웠다. 함양의 실정이 그랬다. 이웃 전라도에서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구하여 나라에 바쳤던 것이다. 비싼 값이었다.
김종직의 관영차밭 조성터에 세운 기념비
김종직은 신라 시대에 당나라에서 차종(茶種)을 구해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엄연한데 산 아래 볕이 좋은 함양에서 차를 재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부로(父老)에게 자문을 구하며 종자가 있는 곳을 알아보라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읍에서 이십여 리 남쪽에 있는 엄천사(嚴川寺) 대밭에서 차종(茶種)을 찾았다. 그런데 이 대밭은 주인이 있는 사유지였다. 김종직은 즉각 땅주인에게 주위의 관전(官田)으로 보상하고 차밭을 조성했다. 이제 4~5년만 기다리면 함양에서도 차가 생산되어 백성의 수고를 덜면서 나라의 공물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뻤다. 김종직은 이때의 기쁨을 「다원」 2수에 담았는데, 아래의 시는 그 첫 번째 시이다.
신령한 싹 올려 성군꼐 축수코자 하는데
신라 때의 종자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지리산 아래에서 채취하였으니
우리 백성들 부담을 덜 수 있을까 기쁘네.
_김종직, 「다원」 제1수
또한 이 시기 주목을 요하는 것으로 차에 관한 전문 저술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이목(李穆, 1471~1498)의 「다부」(茶賦)가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글을 짓게 된 동기, 품종, 산지, 풍광, 채취, 달이기, 마시기, 다섯 가지 공과 여섯 가지 덕, 차에 대한 자신의 철학 등을 읊은 것으로, 차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이고 종합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서에 등장하는 차 문화 관련 기록
이 책은 개인의 문집 속에 들어 있는 차 관련 작품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종, 세종, 성종 대의 차 관련 기사를 수록하였다. 다방(茶房)을 비롯한 중앙 아전들의 전근에 관한 규정, 사헌부의 다시(茶時)에 관한 논의, 조선과 명나라 혹은 유구국 사이에서 차나 차 도구를 선물한 기록, 궁중 의식에 차를 사용한 일, 중국의 차 전매법에 대한 논의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이와는 별도로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조선 초기 차의 주요 산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전역의 토산품을 열거한 대목을 보면, 경상도의 밀양, 울산, 진주, 함양, 고성, 하동, 산음, 진해, 전라도의 고부, 옥구, 부안, 정읍, 나주, 영암, 영광, 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 장성, 순창, 구례, 광양, 장흥, 담양, 순천, 무진, 보성, 낙안, 고흥, 동복, 진훤 등이 차의 산지로 나열되어 있다. 특히 나주목 무장현의 용산(龍山)과 재역(梓亦), 장흥도호부의 요량(饒良)·수태(守太)·칠백유(七百乳) 등 13곳, 동복현의 와지다공리(瓦旨茶貢里)에는 다소(茶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의 구성
ㆍ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차 관련 문헌을 엄선, 번역한 것이다.
ㆍ 작품의 수록 순서는 저자의 생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단 『조선왕조실록』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별도로 장을 마련했다.
ㆍ 권말에 인명사전과 서명사전 항목을 마련하여, 중요하게 거론되는 사람과 책의 경우 설명을 따로 하였다.
ㆍ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전7권으로 간행될 예정이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1. 조선 후기의 차 문화 - 시
2. 조선 후기의 차 문화 - 산문
3. 삼국시대ㆍ고려의 차 문화
4. 조선 초기의 차 문화
5. 조선 중기의 차 문화(근간)
6. 조선 말기 및 근대의 차 문화(근간)
7. 승려의 차 문화(근간)
▣ 작가 소개
송재소_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조창록_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이규필_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 주요 목차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을 펴내며
‘조선 초기의 차 문화’를 엮어 내며
일러두기
변중량(卞仲良, 1345~1398)
한적한 집에서 우연히 읊다
권근(權近, 1352~1409)
지관사 서봉에 오르다 / 16일 집에 당도하여 편지를 얻어보고 / 매계 스님이 평전을 전송하는 시권 끝에 쓴다 / 장의사의 청재에서 초사를 짓다 / 복재가 안양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 눈 내리는 가운데 시를 지어 /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
이직(李稷, 1362~1431)
우산 장로의 시권에서 차운하여 / 시출당 / 9일 법림사 주지 월창방장을 방문하여
이원(李原, 1368~1429)
한적하게 살며 / 앞의 운자를 써서 춘정에게 드림 / 사가정 시를 차운하다 / 관음사에서 밤을 보내며 / 허 스님에게 주다 / 연정에서 윤 교수를 초대하여 / 다시 명정암 시를 차운하여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백화사에서 경도를 바라보며 / 자다가 일어나 / 오원의 용봉사에 쓰다 / 윤후의 시권에 쓰다 / 밤에 앉아 / 서경 사상께서 돌솥을 선물했기에 시로 보답하다
하연(河演, 1376~1453)
벗이 무쇠탕관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다 / 산옹이 잣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다 / 지리산의 산승이 햇차를 보내오다
유방선(柳方善, 1388~1443)
동암에게 주다 / 호 스님에게 부치다 / 즉사 / 우연히 짓다 / 새벽에 산승의 집을 찾다 / 산승을 찾아가다 / 산중 생활 / 명곡 스님에게 드리다 / 초가의 벽에 장난삼아 적다 / 회포를 읊다 / 산사에 세 들어 살며 / 공덕사에 계신 명곡 스님께 시를 올리다 / 명곡 스님을 곡하다 / 지리산 심 스님이 시를 청하기에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여승을 읊어 고부 군수에게 부치다
박휘겸(朴?謙, 미상)
불우헌음
최항(崔恒, 1409~1474)
매창에 비친 달
김수온(金守溫, 1409~1481)
호로새 / 풍기 김공이 찾아준 것에 사례함 / 궁실과 저택은 사대부가 거처하는 곳이니 / 실제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선종 판사 수미가 찾아오셨기에 이튿날 아침 시로 사례하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병가를 얻다 / 안견의 [산수도]에 쓰다-겨울 경치 / 다조 / 외질 이생이 시골집으로 나를 방문하다 / 2월 22일 밤에 눈보라가 크게 몰아쳐서, 새벽에 일어나서 짓다 / 세 번째 화답하다 / 앞의 운을 사용하여 - 일휴에게 부쳐서 화답하기를 요구하다 / 병중에 오은군에게 부치고 겸하여 기백에게 적어 보내다 / 다섯 번째 화답하다 / 앞의 운에 네 번째로 화답하여 홍이부, 윤담수에게 부치다 / 잠 스님이 작설차를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 잠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 / 병중에 밤에 앉아서 / 회포를 써서 김문량에게 부치다 / 경상도 함 감사가 차와 먹, 초와 포를 부쳐 준 것에 사례하다 / 남원부사로 가는 양성지를 받들어 전송하며 / 회포를 쓰다 / 삼각산을 바라보며 / 숲속 정자에서 석양에 읊다 - 잠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 / 밤에 읊다 / 이차공의 차운시에 받들어 수답하다 / 아침 비가 내리다 / 달을 보며 차를 마시다 / 한가한 가운데 본 것으로 장난삼아 쓰다 / 바둑을 마치고 누워서 읊다 / 진원 박 태수가 차를 부쳐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 앞의 운을 사용하다 / 차를 달이다 / 차를 달이다 / 백발 / 동짓날 이틀 뒤 청재에 들어가 자심에게 부치다 / 차를 끓이며
이승소(李承召, 1422~1484)
일암 전 장로에게 주다 / 유구국 사신 자단 스님의 운에 받들어 화답하다 / 차를 달이며 연구를 짓다 / 고평 / 행산에서 한낮에 쉬다
성간(成侃, 1427~1456)
절구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즉흥시를 지어 자고 김뉴에게 바치다 / 또 세 수를 짓다 / 엄천사에서 자다 /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마천에 이르러 / 다원 / 제야 즉사 / 지리산 기행
홍유손(洪裕孫, 1452~1529)
은솥에 차를 끓이며
최숙정(崔淑精, 1432~1480)
한인수와 함께 배를 띄워 신륵사 동대에 오르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등불 아래에서 / 잠을 탐해서 / 새벽에 / 준 스님에게 주다 / 민 스님에게 주다 / 술에 취해 사가의 운을 따라 시를 지어 스님에게 주다 / 산속에 살며 / 비온 뒤에 / 바람과 비가 번갈아 치더니 조금 있다가 개다 / 대나무 홈통 / 소나무 정자 / 작설차 / 차를 끓이며 / 뇌검천에서 / 장경문 밖으로 나가 차를 달이며 / 근 선사와 이야기하다 / 보현사에서 회포를 써서 주다 / 장안사 / 진불암 / 나그네 길에 중추절 달을 바라보며 / 천원역 누각에서 / 차나무를 기르며 / 일본 스님 준 장로와 이야기 하며 / 장난삼아 짓다 / 후추와 차 도구를 보내준 것에 감사하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유관을 출발하여 / 사국의 여러 동료들에게 보내다 / 안율보에게 / 매창에 비친 달 / 동관역에 묵으며
성현(成俔, 1439~1504)
제천정에서 달구경을 하다 / 살구꽃을 읊음 / 인제헌에 차운하다 / 사탄을 건너 망일사에 쉬다 / ? 스님의 벽송당기
손조서(孫肇瑞, 미상)
육우의 다천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차를 읊다 / 정자사 / 매창에 비친 달
채수(蔡壽, 1449~1515)
매창에 비친 달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눈 내리는 날 아이를 데리고 정중을 찾아가다 / 은솥에 차를 끓이며
조위(曺偉, 1454~1503)
점필재 선생의 시운을 받들어 화답하다 / 동화사-낙안군 관운산에 있다 / 관아에서 우연히 쓰다 / 눈을 읊다 / 홍주 제영 / 영명사로 스님을 찾아가서 / 가섭암
최부(崔溥, 1454~1504)
중국의 차 접대
성종(成宗, 1457~1494)
매창에 비친 달
이식(李湜, 1458~1488)
즉사 / 밤에 앉아 우연히 지어 정중에게 부치다 / 금헌의 시에 차운하다 / 문연에게 1 / 문연에게 2
김일손(金馹孫, 1464~1498)
매창에 비친 달
이주(李?, 1468~1504)
망해사 / 금골산
정희량(鄭希良, 1469~1502)
눈 온 뒤에 써서 매계 선생께 받들어 올리다 / 밤에 앉아 차를 달이며 / 홀로 앉아 차를 끓이다 / 계문의 시 「상춘」에 차운하다
이목(李穆, 1471~1498)
다부
홍언충(洪彦忠, 1473~1508)
정인사 / 화운하여 산은에게 올리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
경기 도사 황군에게
박상(朴祥, 1474~1530)
상림역장 집에 묵다
김극성(金克成, 1474~1540)
소나무 난간 / 산곡의 운을 쓰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
봄눈
이행(李荇, 1478~1534)
공석 김세필이 작설차를 보내 주었기에 / 새봄 / 자미에게 편지를 부치며-아울러 종이와 돌솥을 준 데 사례하다 / 대숲에서 차 달이기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사상의 시 「취승정야연」에 차운하여 / 봄날 / 법륜사에서 새벽에 떠나며 / 장흥사에서 노닐다가 / 장흥사 사미승 사운에게 주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청학도인의 중추절에 써서 보내온 「유회」에 화답하여 / 매화시 차운
신광한(申光漢, 1484~1555)
한가한 날의 우의 / 김 사또가 숯을 보내 주신 데 사례하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
경희 선사의 시축에 쓰다
김정(金?, 1486~1521)
낮잠에서 깨어 / 벗의 시에 차운하다 / 절구
소세양(蘇世讓, 1486~1562)
경술년 입춘 / 자작 / 쌍봉의 시에 차운하다 / 낮잠 -청구자
심언광(沈彦光, 1487~1540)
서쪽 교외에 쌓인 눈 / 박금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인명사전
서명사전
찾아보기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차 문화’가 담겨 있는 옛글을 엄선하여 번역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시대 범위는 여말선초의 문인을 시작으로 1500년대 중반까지로 한정했다. 주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다양한 차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을 선집해서 번역했다.
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집 속에 담겨 있는 차와 관련된 시와 산문을 선집하는 한편, 「조선왕조실록」의 차 기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차 기록을 따로 모았다.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천년을 이어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차 문화에 관한 문헌 기록 자료를 집대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차시(茶詩)를 포함한 개인 문집의 자료,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삼국사기」 등의 관찬 사료(官撰史料)와 「동문선」, 「임원경제지」, 「성호사설」 등의 별집류(別集類)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자료까지 차에 관한 모든 문헌 자료를 망라할 계획이다.
옛글을 통해 천년의 차 문화를 만나다
한국에 차가 전래된 것은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인도 공주 허황옥부터라는 설이 있을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차와 관련한 오랜 문화적 전통은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 공통된 것으로, 한자와 유교, 선종 계통의 불교와 함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는 주요한 코드이다.
한국에서의 차 문화 관련 문헌 자료의 정리와 소개는 일부 애호가들의 손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때문에 전문 연구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내용이 소략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고,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접하기에도 힘들었다.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전문 연구자들이 관련 문헌을 폭넓게 정리하고 번역했다. 삼국시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차 관련 문헌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번역함으로써 차 문화 연구의 기초 자료는 물론 일반인들의 한국 차 문화 이해에 기여할 것이다.
개인의 기호품으로 정착한 차(茶), 차 문화
― 조선 초기 차 문화의 특징
삼국시대와 고려의 차 문화가 왕실과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차 문화의 전성기라고 한다면, 조선 초기는 차 문화가 개인화되고 기호품화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차 관련 글에서는 차 문화의 전래와 발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려의 차 문화가 농익은 불교문화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음은 기간된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 초기는 흔히 한국의 차 문화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인식되어 왔다. 이전 시기, 특히 고려에 비해 남겨진 글이나 서적이 소박하기 때문인데, 이는 바꿔 말하면 국가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차 문화 발달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시기는 차 문화가 개인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고, 한적하고 담백한 취미를 가진 관료와 문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차가 애호되었다.
이 책은 변중량(卞仲良, 1345~1398)에서부터 심언광(沈彦光, 1487~1540)에 이르기까지 모두 46명 189편의 시문을 수록하였다. 그중에는 김종직(金宗直), 김시습(金時習), 이목(李穆) 등 기왕에 다인(茶人)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인물들도 있으나, 이원(李原), 변계량(卞季良), 유방선(柳方善), 성현(成俔), 남효온(南孝溫) 등 새롭게 다인의 대열에 등장한 인물들이 많다. 이들은 대개 서너 편 내외의 시를 남기고 있다.
만년에 궁벽한 곳 좋아하여
먼 산에 거처를 잡았네.
차를 심고 약초밭 일구며
대나무 심어 낚싯대 만드네.
봄빛에 잠이 안 와 심란한데
새소리가 한적함을 깨누나.
누가 알리요, 초가집 아래
누워 노니는 이 느긋함을
_유방선, 「즉사」(卽事)
이 시의 작자 유방선은 자연에 묻혀 사는 한가롭고 근심 없는 일상을 읊고 있다. 특히 “차를 심고 약초밭 일구며”라고 한 대목을 보면, 개인적으로 차를 재배하여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김시습의 「천원역 누각에서」(川原驛樓)나 「차나무를 기르며」(養茶)를 보면, 개인적 필요에 의해 차를 길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민간에서 차 재배가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차 문화의 지속적인 발전
차 문화가 발달하게 된 데에는 불교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 삼국시대와 고려의 기록을 보면 사찰 경내에 따로 다헌(茶軒)을 마련하거나 공양을 위해 인근에 차밭을 가꾸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통도사 인근에 전문적으로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소촌(茶所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록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이전 시기의 기록들에 비해 조선 초기의 기록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한 자료들을 일별해 보면, 일반적인 시문에 비해 절을 무대로 하거나 스님과 교유한 사잽 등이 월등히 많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사찰이 차 문화의 주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고려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는 차 문화의 공백기를 매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원(茶園)의 조성과 차 전문 기록의 등장
조선 초기의 차 관련 자료로 손꼽히는 것은, 김종직이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엄천사 북쪽 죽림에 차밭을 조성하고 지은 「다원」(茶園)이라는 시이다. 그 서문을 보면, 당시에 차를 공물로 바치던 실상, 차의 거래가 등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나라에 바치는 차가 본 군(郡)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 해마다 백성들에게 이를 부과한다. 백성들은 찻값을 가지고 전라도에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얻는다. 내가 처음 이 고을에 부임하여 그 폐단을 알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자체적으로 얻어서 납부하도록 하였다.
_김종직, 「다원」 중에서
당시 공물은 대체로 각 지방의 토산물로 부과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경우 다른 고장에서 구입해서 납부해야 했고, 그만큼 백성의 부담은 무거웠다. 함양의 실정이 그랬다. 이웃 전라도에서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구하여 나라에 바쳤던 것이다. 비싼 값이었다.
김종직의 관영차밭 조성터에 세운 기념비
김종직은 신라 시대에 당나라에서 차종(茶種)을 구해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엄연한데 산 아래 볕이 좋은 함양에서 차를 재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부로(父老)에게 자문을 구하며 종자가 있는 곳을 알아보라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읍에서 이십여 리 남쪽에 있는 엄천사(嚴川寺) 대밭에서 차종(茶種)을 찾았다. 그런데 이 대밭은 주인이 있는 사유지였다. 김종직은 즉각 땅주인에게 주위의 관전(官田)으로 보상하고 차밭을 조성했다. 이제 4~5년만 기다리면 함양에서도 차가 생산되어 백성의 수고를 덜면서 나라의 공물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뻤다. 김종직은 이때의 기쁨을 「다원」 2수에 담았는데, 아래의 시는 그 첫 번째 시이다.
신령한 싹 올려 성군꼐 축수코자 하는데
신라 때의 종자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지리산 아래에서 채취하였으니
우리 백성들 부담을 덜 수 있을까 기쁘네.
_김종직, 「다원」 제1수
또한 이 시기 주목을 요하는 것으로 차에 관한 전문 저술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이목(李穆, 1471~1498)의 「다부」(茶賦)가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글을 짓게 된 동기, 품종, 산지, 풍광, 채취, 달이기, 마시기, 다섯 가지 공과 여섯 가지 덕, 차에 대한 자신의 철학 등을 읊은 것으로, 차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이고 종합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서에 등장하는 차 문화 관련 기록
이 책은 개인의 문집 속에 들어 있는 차 관련 작품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종, 세종, 성종 대의 차 관련 기사를 수록하였다. 다방(茶房)을 비롯한 중앙 아전들의 전근에 관한 규정, 사헌부의 다시(茶時)에 관한 논의, 조선과 명나라 혹은 유구국 사이에서 차나 차 도구를 선물한 기록, 궁중 의식에 차를 사용한 일, 중국의 차 전매법에 대한 논의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이와는 별도로 「세종실록 지리지」를 통해 조선 초기 차의 주요 산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전역의 토산품을 열거한 대목을 보면, 경상도의 밀양, 울산, 진주, 함양, 고성, 하동, 산음, 진해, 전라도의 고부, 옥구, 부안, 정읍, 나주, 영암, 영광, 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 장성, 순창, 구례, 광양, 장흥, 담양, 순천, 무진, 보성, 낙안, 고흥, 동복, 진훤 등이 차의 산지로 나열되어 있다. 특히 나주목 무장현의 용산(龍山)과 재역(梓亦), 장흥도호부의 요량(饒良)·수태(守太)·칠백유(七百乳) 등 13곳, 동복현의 와지다공리(瓦旨茶貢里)에는 다소(茶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의 구성
ㆍ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차 관련 문헌을 엄선, 번역한 것이다.
ㆍ 작품의 수록 순서는 저자의 생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단 『조선왕조실록』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별도로 장을 마련했다.
ㆍ 권말에 인명사전과 서명사전 항목을 마련하여, 중요하게 거론되는 사람과 책의 경우 설명을 따로 하였다.
ㆍ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은 전7권으로 간행될 예정이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1. 조선 후기의 차 문화 - 시
2. 조선 후기의 차 문화 - 산문
3. 삼국시대ㆍ고려의 차 문화
4. 조선 초기의 차 문화
5. 조선 중기의 차 문화(근간)
6. 조선 말기 및 근대의 차 문화(근간)
7. 승려의 차 문화(근간)
▣ 작가 소개
송재소_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조창록_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이규필_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 주요 목차
‘한국의 차 문화 천년’을 펴내며
‘조선 초기의 차 문화’를 엮어 내며
일러두기
변중량(卞仲良, 1345~1398)
한적한 집에서 우연히 읊다
권근(權近, 1352~1409)
지관사 서봉에 오르다 / 16일 집에 당도하여 편지를 얻어보고 / 매계 스님이 평전을 전송하는 시권 끝에 쓴다 / 장의사의 청재에서 초사를 짓다 / 복재가 안양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 눈 내리는 가운데 시를 지어 / 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
이직(李稷, 1362~1431)
우산 장로의 시권에서 차운하여 / 시출당 / 9일 법림사 주지 월창방장을 방문하여
이원(李原, 1368~1429)
한적하게 살며 / 앞의 운자를 써서 춘정에게 드림 / 사가정 시를 차운하다 / 관음사에서 밤을 보내며 / 허 스님에게 주다 / 연정에서 윤 교수를 초대하여 / 다시 명정암 시를 차운하여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백화사에서 경도를 바라보며 / 자다가 일어나 / 오원의 용봉사에 쓰다 / 윤후의 시권에 쓰다 / 밤에 앉아 / 서경 사상께서 돌솥을 선물했기에 시로 보답하다
하연(河演, 1376~1453)
벗이 무쇠탕관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다 / 산옹이 잣을 보내 준 것에 사례하다 / 지리산의 산승이 햇차를 보내오다
유방선(柳方善, 1388~1443)
동암에게 주다 / 호 스님에게 부치다 / 즉사 / 우연히 짓다 / 새벽에 산승의 집을 찾다 / 산승을 찾아가다 / 산중 생활 / 명곡 스님에게 드리다 / 초가의 벽에 장난삼아 적다 / 회포를 읊다 / 산사에 세 들어 살며 / 공덕사에 계신 명곡 스님께 시를 올리다 / 명곡 스님을 곡하다 / 지리산 심 스님이 시를 청하기에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여승을 읊어 고부 군수에게 부치다
박휘겸(朴?謙, 미상)
불우헌음
최항(崔恒, 1409~1474)
매창에 비친 달
김수온(金守溫, 1409~1481)
호로새 / 풍기 김공이 찾아준 것에 사례함 / 궁실과 저택은 사대부가 거처하는 곳이니 / 실제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선종 판사 수미가 찾아오셨기에 이튿날 아침 시로 사례하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병가를 얻다 / 안견의 [산수도]에 쓰다-겨울 경치 / 다조 / 외질 이생이 시골집으로 나를 방문하다 / 2월 22일 밤에 눈보라가 크게 몰아쳐서, 새벽에 일어나서 짓다 / 세 번째 화답하다 / 앞의 운을 사용하여 - 일휴에게 부쳐서 화답하기를 요구하다 / 병중에 오은군에게 부치고 겸하여 기백에게 적어 보내다 / 다섯 번째 화답하다 / 앞의 운에 네 번째로 화답하여 홍이부, 윤담수에게 부치다 / 잠 스님이 작설차를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 잠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 / 병중에 밤에 앉아서 / 회포를 써서 김문량에게 부치다 / 경상도 함 감사가 차와 먹, 초와 포를 부쳐 준 것에 사례하다 / 남원부사로 가는 양성지를 받들어 전송하며 / 회포를 쓰다 / 삼각산을 바라보며 / 숲속 정자에서 석양에 읊다 - 잠 스님의 시에 차운하다 / 밤에 읊다 / 이차공의 차운시에 받들어 수답하다 / 아침 비가 내리다 / 달을 보며 차를 마시다 / 한가한 가운데 본 것으로 장난삼아 쓰다 / 바둑을 마치고 누워서 읊다 / 진원 박 태수가 차를 부쳐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 앞의 운을 사용하다 / 차를 달이다 / 차를 달이다 / 백발 / 동짓날 이틀 뒤 청재에 들어가 자심에게 부치다 / 차를 끓이며
이승소(李承召, 1422~1484)
일암 전 장로에게 주다 / 유구국 사신 자단 스님의 운에 받들어 화답하다 / 차를 달이며 연구를 짓다 / 고평 / 행산에서 한낮에 쉬다
성간(成侃, 1427~1456)
절구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즉흥시를 지어 자고 김뉴에게 바치다 / 또 세 수를 짓다 / 엄천사에서 자다 /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마천에 이르러 / 다원 / 제야 즉사 / 지리산 기행
홍유손(洪裕孫, 1452~1529)
은솥에 차를 끓이며
최숙정(崔淑精, 1432~1480)
한인수와 함께 배를 띄워 신륵사 동대에 오르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등불 아래에서 / 잠을 탐해서 / 새벽에 / 준 스님에게 주다 / 민 스님에게 주다 / 술에 취해 사가의 운을 따라 시를 지어 스님에게 주다 / 산속에 살며 / 비온 뒤에 / 바람과 비가 번갈아 치더니 조금 있다가 개다 / 대나무 홈통 / 소나무 정자 / 작설차 / 차를 끓이며 / 뇌검천에서 / 장경문 밖으로 나가 차를 달이며 / 근 선사와 이야기하다 / 보현사에서 회포를 써서 주다 / 장안사 / 진불암 / 나그네 길에 중추절 달을 바라보며 / 천원역 누각에서 / 차나무를 기르며 / 일본 스님 준 장로와 이야기 하며 / 장난삼아 짓다 / 후추와 차 도구를 보내준 것에 감사하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유관을 출발하여 / 사국의 여러 동료들에게 보내다 / 안율보에게 / 매창에 비친 달 / 동관역에 묵으며
성현(成俔, 1439~1504)
제천정에서 달구경을 하다 / 살구꽃을 읊음 / 인제헌에 차운하다 / 사탄을 건너 망일사에 쉬다 / ? 스님의 벽송당기
손조서(孫肇瑞, 미상)
육우의 다천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차를 읊다 / 정자사 / 매창에 비친 달
채수(蔡壽, 1449~1515)
매창에 비친 달
남효온(南孝溫, 1454~1492)
눈 내리는 날 아이를 데리고 정중을 찾아가다 / 은솥에 차를 끓이며
조위(曺偉, 1454~1503)
점필재 선생의 시운을 받들어 화답하다 / 동화사-낙안군 관운산에 있다 / 관아에서 우연히 쓰다 / 눈을 읊다 / 홍주 제영 / 영명사로 스님을 찾아가서 / 가섭암
최부(崔溥, 1454~1504)
중국의 차 접대
성종(成宗, 1457~1494)
매창에 비친 달
이식(李湜, 1458~1488)
즉사 / 밤에 앉아 우연히 지어 정중에게 부치다 / 금헌의 시에 차운하다 / 문연에게 1 / 문연에게 2
김일손(金馹孫, 1464~1498)
매창에 비친 달
이주(李?, 1468~1504)
망해사 / 금골산
정희량(鄭希良, 1469~1502)
눈 온 뒤에 써서 매계 선생께 받들어 올리다 / 밤에 앉아 차를 달이며 / 홀로 앉아 차를 끓이다 / 계문의 시 「상춘」에 차운하다
이목(李穆, 1471~1498)
다부
홍언충(洪彦忠, 1473~1508)
정인사 / 화운하여 산은에게 올리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
경기 도사 황군에게
박상(朴祥, 1474~1530)
상림역장 집에 묵다
김극성(金克成, 1474~1540)
소나무 난간 / 산곡의 운을 쓰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
봄눈
이행(李荇, 1478~1534)
공석 김세필이 작설차를 보내 주었기에 / 새봄 / 자미에게 편지를 부치며-아울러 종이와 돌솥을 준 데 사례하다 / 대숲에서 차 달이기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사상의 시 「취승정야연」에 차운하여 / 봄날 / 법륜사에서 새벽에 떠나며 / 장흥사에서 노닐다가 / 장흥사 사미승 사운에게 주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청학도인의 중추절에 써서 보내온 「유회」에 화답하여 / 매화시 차운
신광한(申光漢, 1484~1555)
한가한 날의 우의 / 김 사또가 숯을 보내 주신 데 사례하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
경희 선사의 시축에 쓰다
김정(金?, 1486~1521)
낮잠에서 깨어 / 벗의 시에 차운하다 / 절구
소세양(蘇世讓, 1486~1562)
경술년 입춘 / 자작 / 쌍봉의 시에 차운하다 / 낮잠 -청구자
심언광(沈彦光, 1487~1540)
서쪽 교외에 쌓인 눈 / 박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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