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은?”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6년 2월 초부터 1946년 4월 말까지 시기를 다룬 『해방일기 3』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이 출간되었다.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와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일본 항복 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남북 간의 정치 풍토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북은 조선인의 자치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고, 1946년 3월 토지개혁 실시를 계기로 민심을 수렴하며 순조로운 발전을 시작했다. 반면 이남은 1946년 2월 좌익 중심의 통일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우익 결집체인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이 만들어지면서 좌우 정치세력의 분열이 깊어져 갔다.
그 배경에는 이 책의 부제가 암시하듯이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정책의 차이가 있었다. 저자는 “소련군은 ‘점령’의 의미를 최소한으로 해석해서 주민의 자치 노력을 도우려 했고, 미군은 최대한으로 해석해서 자치 노력을 막으려 했다. 소련군의 점령은 ‘해방’이었고, 미군의 점령은 ‘지배’였다.”라고 단언한다. 과연 해방과 지배의 차이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지정학적 조건과 새로이 발굴된 자료를 포함하여 해석을 가한다.
3권의 대표 사건은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였다. 시작부터 구조적 약점이 노출된 미소공위를 끝내 좌초시킨 난제는 ‘협의 상대’였다. ‘협의 상대’란 조선인 대표로 누구를 참석시킬지 어떤 방법으로 결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미군정에서는 ‘민주의원’이 협의 상대로 채택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남조선국민대표’라는 간판을 붙여놓았지만 이름이 무색하게도 대표성이 없었다. 우익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의 사보타주 전술이 가미되면서 미소공위는 암초를 향해 흘러갔다.
『해방일기 3』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은 정치사 외에도 횡령과 테러, 그리고 막가파 경찰 등 65년 전 오늘의 키워드에 대해서도 생중계하고 있다.
『해방일기』제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2.1 ∼ 1946.4.30) 개요
1945년 연말에 시작된 반탁운동을 통해 좌우익 경계선이 새로 만들어졌다. 미군정에 의지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상해ㆍ중경 임정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합쳐져 반탁 세력을 만들었고, 이것이 우익의 울타리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통해 우익 통합이 강화되면서 우익끼리만 비상국민회의로 뭉쳤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가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간판을 걸면서 미군정과 우익의 결탁이 한 차례 매듭지어졌다.
민족통일전선을 포기한 우익끼리의 결집에 대한 반발로 중도적 인물과 단체들이 대거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민전은 좌익의 주동으로 결성되었지만 통일전선을 표방하고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참여 범위가 넓었다. 심지어 비상국민회의를 떠난 임정 비주류 요인 몇몇도 민전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넓은 의미의 ‘좌익’으로도 볼 수 없는 인물들이 있었다.
민주의원은 미군정의 획책으로 만들어진 기구였다. 애초에 미군정이 바란 것은 우익이 중심을 잡되 좌익도 포괄하는, 통일전선의 성격을 가진 기구로서 미소공위에서 남조선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었다. 좌익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운 것이었다. 이 실수를 이승만이 이용해서 민주의원을 극우 세력의 아성으로 만들었다. 군정청에서 민주의원을 만드는 데 앞장선 사람이 하지의 고문으로 들어와 있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였다.
우익의 비상국민회의,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 군정청의 민주의원, 모두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국인을 대표하는 위치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었다. 우익의 비상국민회의는 김구와 이승만의 동상이몽 형국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건국을 원했고, 분단 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속셈이었다. 김구는 이와 달리 완전한 통일 민족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임정의 권위를 과신한 것이었을까? 이승만과 한민당의 ‘임정추대’ 바람잡이에 말려들어 좌익 등 다른 세력과의 협력과 연대를 도외시하고 미소공위에 대해서도 오만한 태도를 견지했다.
1946년 3월 20일 개막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의 국제주의와 미국의 국가주의가 부딪친 현장이었다. 소련 측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미ㆍ소 협력체제가 미소공위에서 지켜지도록 애쓰는 반면 미국 측은 회담이 결렬되어도 괜찮다는 배짱으로 소련 측 양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트루먼 시대의 미국은 루스벨트 시대의 미국과 달라지고 있었던 점이 배경이었다. 국제주의 노선은 약화되어 갔고, 하지의 미소공위 사보타주 전술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가 미국의 정책 결정 관계자들 사이에서 폭을 넓혀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6일 남한 단독정부 추진설이 처음으로 언론에 나타났다. 이승만과 결탁된 인물로 하지의 정치고문이던 굿펠로가 5월 하순 한국을 떠나면서 “미소공위가 조속히 재개되지 않을 경우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며칠 후인 6월 3일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수립할 것”을 제기하는 ‘정읍 발언’을 터뜨렸다. 1차 미소공위는 5월 8일 끝나고 무기한 정회에 들어갔다.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이남 지역의 경찰 인원이 해방 후 1년간 갑절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1946년 전반기를 통해 미군정의 가장 큰 사업은 국가경찰 육성이었다. 미군정하의 남한은 식민지시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이 필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토지개혁)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
1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
1946년 2월 1~11일
1946. 2. 1. 대표도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않는 ‘대표민주의원’
1946. 2. 7. 민생을 엉망으로 만든 미군정
1946. 2. 8. ‘쌀 소동’ 속에서도 한민당은 ‘딴민당’
1946. 2. 9. 조선인의 첫 ‘정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946. 2. 10. 한 가마 150원? 차라리 떡 해먹겠다
1946. 2. 11. 남한 경찰, 식민지시대보다 더 나빠졌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민주의원, 무엇이 잘못되었나?
2부 해방공간의 미ㆍ소 대결, 극심한 좌우 대립
1946년 2월 15~25일
1946. 2. 15. 민주의원과 민전, 좌우 대결의 초점이 되다
1946. 2. 16. 냉전의 씨앗,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에서 나타나다
1946. 2. 17. 38선에서 막힌 독립동맹의 역할
1946. 2. 18. 민주의원, ‘을사5적’ 못지않은 ‘병술23적’
1946. 2. 21. 토지개혁, 좌익만의 과제가 아니었다
1946. 2. 22. ‘냉전의 아버지’ 조지 케넌
1946. 2. 23. 소련의 ‘적화 야욕’, 정말 어떤 것이었나?
1946. 2. 24. 군정청의 전염병 후안무치증
1946. 2. 25. 속이 빤했던 미군정의 정당 규제 정책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국민당이 왜 한민당을 따라가나?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2월
3부 민심을 읽지 못한 미군정 정책
1946년 3월 1~11일
1946. 3. 1. 분열의 외길로 나아가는 우익 진영
1946. 3. 2. “우리 편만 되세요. 박흥식이라도 지켜줍니다”
1946. 3. 4. 대미 예속을 향한 ‘원조경제’의 길
1946. 3. 7. 민족주의를 적대시한 경찰 2인자 장택상
1946. 3. 8. “소련 영화 상영 금지”
1946. 3. 9. 일본ㆍ미국, 참 골치 아픈 이웃들 골라서 만났다
1946. 3. 10. 이북의 토지개혁, 이남은 어쩌나?
1946. 3. 11. ‘유흥사업가’ 김계조의 배후는 누구였나?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이남이 이북보다 앞선 점 한 가지, 정치 테러
4부 미소공동위원회 개막
1946년 3월 15~31일
1946. 3. 15. 대한민국 ‘배금 풍조의 아버지’ 이승만
1946. 3. 17. 해방공간 경제의 키워드 ‘횡령’
1946. 3. 18. 하지의 미소공위 사보타주 전술
1946. 3. 21. 일본의 ‘새 국가 건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나?
1946. 3. 22. 국민당을 김구에게 갖다 바친 안재홍
1946. 3. 23. 새 국가 건설에서 학문의 역할
1946. 3. 25. 범죄의 공포에 떨며 살게 된 이남 주민들
1946. 3. 28. 새 국가 건설에서 예술의 역할
1946. 3. 29. 좌익의 제3세력으로 등장한 신민당
1946. 3. 31. 궤도에 올라선 미소공동위원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한독당으로의 우파 통합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3월
5부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조적 문제
1946년 4월 4~30일
1946. 4. 4. 이승만보다도 팔자가 좋았던 비서실장
1946. 4. 5. 미국 국가주의의 전초병 이승만과 굿펠로
1946. 4. 7. 해방공간의 경찰을 ‘막가파’로 만든 자들
1946. 4. 8. 음산해져 가는 사법부 분위기
1946. 4. 11. 미군정 비판으로 구속당하는 임정 요인
1946. 4. 12. 돈 때문에 험악해진 해방공간
1946. 4. 14. 공산당에겐 우익보다 중도파가 더 미웠다
1946. 4. 19. 미소공위 앞에서 혼란에 빠진 우익
1946. 4. 21. 정치 지형을 바꿔놓은 이승만의 ‘남선순행’
1946. 4. 25. 미소공위의 구조적 약점
1946. 4. 26. 암초를 향해 흘러가는 미소공위
1946. 4. 28. 양심적 지식인의 갈 길
1946. 4. 29. 윤봉길과 김구가 테러리스트라고?
1946. 4. 30. 한국전쟁,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좌우합작보다 우익 연합이 더 급한 이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4월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은?”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6년 2월 초부터 1946년 4월 말까지 시기를 다룬 『해방일기 3』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이 출간되었다.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와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에 이어 세 번째 책이다.
일본 항복 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남북 간의 정치 풍토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북은 조선인의 자치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고, 1946년 3월 토지개혁 실시를 계기로 민심을 수렴하며 순조로운 발전을 시작했다. 반면 이남은 1946년 2월 좌익 중심의 통일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우익 결집체인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이 만들어지면서 좌우 정치세력의 분열이 깊어져 갔다.
그 배경에는 이 책의 부제가 암시하듯이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정책의 차이가 있었다. 저자는 “소련군은 ‘점령’의 의미를 최소한으로 해석해서 주민의 자치 노력을 도우려 했고, 미군은 최대한으로 해석해서 자치 노력을 막으려 했다. 소련군의 점령은 ‘해방’이었고, 미군의 점령은 ‘지배’였다.”라고 단언한다. 과연 해방과 지배의 차이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지정학적 조건과 새로이 발굴된 자료를 포함하여 해석을 가한다.
3권의 대표 사건은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였다. 시작부터 구조적 약점이 노출된 미소공위를 끝내 좌초시킨 난제는 ‘협의 상대’였다. ‘협의 상대’란 조선인 대표로 누구를 참석시킬지 어떤 방법으로 결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미군정에서는 ‘민주의원’이 협의 상대로 채택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남조선국민대표’라는 간판을 붙여놓았지만 이름이 무색하게도 대표성이 없었다. 우익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의 사보타주 전술이 가미되면서 미소공위는 암초를 향해 흘러갔다.
『해방일기 3』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은 정치사 외에도 횡령과 테러, 그리고 막가파 경찰 등 65년 전 오늘의 키워드에 대해서도 생중계하고 있다.
『해방일기』제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2.1 ∼ 1946.4.30) 개요
1945년 연말에 시작된 반탁운동을 통해 좌우익 경계선이 새로 만들어졌다. 미군정에 의지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상해ㆍ중경 임정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합쳐져 반탁 세력을 만들었고, 이것이 우익의 울타리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통해 우익 통합이 강화되면서 우익끼리만 비상국민회의로 뭉쳤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가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간판을 걸면서 미군정과 우익의 결탁이 한 차례 매듭지어졌다.
민족통일전선을 포기한 우익끼리의 결집에 대한 반발로 중도적 인물과 단체들이 대거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민전은 좌익의 주동으로 결성되었지만 통일전선을 표방하고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참여 범위가 넓었다. 심지어 비상국민회의를 떠난 임정 비주류 요인 몇몇도 민전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넓은 의미의 ‘좌익’으로도 볼 수 없는 인물들이 있었다.
민주의원은 미군정의 획책으로 만들어진 기구였다. 애초에 미군정이 바란 것은 우익이 중심을 잡되 좌익도 포괄하는, 통일전선의 성격을 가진 기구로서 미소공위에서 남조선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었다. 좌익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운 것이었다. 이 실수를 이승만이 이용해서 민주의원을 극우 세력의 아성으로 만들었다. 군정청에서 민주의원을 만드는 데 앞장선 사람이 하지의 고문으로 들어와 있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였다.
우익의 비상국민회의,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 군정청의 민주의원, 모두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국인을 대표하는 위치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었다. 우익의 비상국민회의는 김구와 이승만의 동상이몽 형국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건국을 원했고, 분단 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속셈이었다. 김구는 이와 달리 완전한 통일 민족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임정의 권위를 과신한 것이었을까? 이승만과 한민당의 ‘임정추대’ 바람잡이에 말려들어 좌익 등 다른 세력과의 협력과 연대를 도외시하고 미소공위에 대해서도 오만한 태도를 견지했다.
1946년 3월 20일 개막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의 국제주의와 미국의 국가주의가 부딪친 현장이었다. 소련 측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미ㆍ소 협력체제가 미소공위에서 지켜지도록 애쓰는 반면 미국 측은 회담이 결렬되어도 괜찮다는 배짱으로 소련 측 양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트루먼 시대의 미국은 루스벨트 시대의 미국과 달라지고 있었던 점이 배경이었다. 국제주의 노선은 약화되어 갔고, 하지의 미소공위 사보타주 전술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가 미국의 정책 결정 관계자들 사이에서 폭을 넓혀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6일 남한 단독정부 추진설이 처음으로 언론에 나타났다. 이승만과 결탁된 인물로 하지의 정치고문이던 굿펠로가 5월 하순 한국을 떠나면서 “미소공위가 조속히 재개되지 않을 경우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며칠 후인 6월 3일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수립할 것”을 제기하는 ‘정읍 발언’을 터뜨렸다. 1차 미소공위는 5월 8일 끝나고 무기한 정회에 들어갔다.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이남 지역의 경찰 인원이 해방 후 1년간 갑절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1946년 전반기를 통해 미군정의 가장 큰 사업은 국가경찰 육성이었다. 미군정하의 남한은 식민지시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이 필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토지개혁)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
1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
1946년 2월 1~11일
1946. 2. 1. 대표도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않는 ‘대표민주의원’
1946. 2. 7. 민생을 엉망으로 만든 미군정
1946. 2. 8. ‘쌀 소동’ 속에서도 한민당은 ‘딴민당’
1946. 2. 9. 조선인의 첫 ‘정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946. 2. 10. 한 가마 150원? 차라리 떡 해먹겠다
1946. 2. 11. 남한 경찰, 식민지시대보다 더 나빠졌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민주의원, 무엇이 잘못되었나?
2부 해방공간의 미ㆍ소 대결, 극심한 좌우 대립
1946년 2월 15~25일
1946. 2. 15. 민주의원과 민전, 좌우 대결의 초점이 되다
1946. 2. 16. 냉전의 씨앗,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에서 나타나다
1946. 2. 17. 38선에서 막힌 독립동맹의 역할
1946. 2. 18. 민주의원, ‘을사5적’ 못지않은 ‘병술23적’
1946. 2. 21. 토지개혁, 좌익만의 과제가 아니었다
1946. 2. 22. ‘냉전의 아버지’ 조지 케넌
1946. 2. 23. 소련의 ‘적화 야욕’, 정말 어떤 것이었나?
1946. 2. 24. 군정청의 전염병 후안무치증
1946. 2. 25. 속이 빤했던 미군정의 정당 규제 정책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국민당이 왜 한민당을 따라가나?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2월
3부 민심을 읽지 못한 미군정 정책
1946년 3월 1~11일
1946. 3. 1. 분열의 외길로 나아가는 우익 진영
1946. 3. 2. “우리 편만 되세요. 박흥식이라도 지켜줍니다”
1946. 3. 4. 대미 예속을 향한 ‘원조경제’의 길
1946. 3. 7. 민족주의를 적대시한 경찰 2인자 장택상
1946. 3. 8. “소련 영화 상영 금지”
1946. 3. 9. 일본ㆍ미국, 참 골치 아픈 이웃들 골라서 만났다
1946. 3. 10. 이북의 토지개혁, 이남은 어쩌나?
1946. 3. 11. ‘유흥사업가’ 김계조의 배후는 누구였나?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이남이 이북보다 앞선 점 한 가지, 정치 테러
4부 미소공동위원회 개막
1946년 3월 15~31일
1946. 3. 15. 대한민국 ‘배금 풍조의 아버지’ 이승만
1946. 3. 17. 해방공간 경제의 키워드 ‘횡령’
1946. 3. 18. 하지의 미소공위 사보타주 전술
1946. 3. 21. 일본의 ‘새 국가 건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나?
1946. 3. 22. 국민당을 김구에게 갖다 바친 안재홍
1946. 3. 23. 새 국가 건설에서 학문의 역할
1946. 3. 25. 범죄의 공포에 떨며 살게 된 이남 주민들
1946. 3. 28. 새 국가 건설에서 예술의 역할
1946. 3. 29. 좌익의 제3세력으로 등장한 신민당
1946. 3. 31. 궤도에 올라선 미소공동위원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한독당으로의 우파 통합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3월
5부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조적 문제
1946년 4월 4~30일
1946. 4. 4. 이승만보다도 팔자가 좋았던 비서실장
1946. 4. 5. 미국 국가주의의 전초병 이승만과 굿펠로
1946. 4. 7. 해방공간의 경찰을 ‘막가파’로 만든 자들
1946. 4. 8. 음산해져 가는 사법부 분위기
1946. 4. 11. 미군정 비판으로 구속당하는 임정 요인
1946. 4. 12. 돈 때문에 험악해진 해방공간
1946. 4. 14. 공산당에겐 우익보다 중도파가 더 미웠다
1946. 4. 19. 미소공위 앞에서 혼란에 빠진 우익
1946. 4. 21. 정치 지형을 바꿔놓은 이승만의 ‘남선순행’
1946. 4. 25. 미소공위의 구조적 약점
1946. 4. 26. 암초를 향해 흘러가는 미소공위
1946. 4. 28. 양심적 지식인의 갈 길
1946. 4. 29. 윤봉길과 김구가 테러리스트라고?
1946. 4. 30. 한국전쟁,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좌우합작보다 우익 연합이 더 급한 이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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