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아름다운 정림사터 오층석탑이 있다. 백제 문화는 정림사탑이 부여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유적일 만큼 철저하게 파괴됐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 탑만은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 백제의 옛 땅에는 왜 정림사탑을 닮은 탑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혀 세워지지 않다가 후삼국시대 이후 줄지어 나타났을까. (소정방 기념탑이 되어 살아남은 정림사탑의 역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여문은 여느 절의 천왕문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봉은사 사천왕의 한 분인 서방광목천의 배에는 만화영화의 캐릭터를 연상시킬 정도로 귀여운 사자의 얼굴이 보이고, 그 아래 사자 가죽이 매달려 있다. 어깨에도 역시 사자의 모습을 한 장식이 보인다. 이 사자는 어디서 왔을까.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석굴암의 주실 입구에는 기세등등하게 본존불을 호위하고 있는 한 쌍의 금강역사가 있다. 그런데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석굴암의 또 다른 금강역사의 머리 부분이 하나 전시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석굴암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이 얼굴 부분 뿐 아니라 오른쪽 금강역사의 오른팔과 왼쪽 금강역사의 왼손이 발견됐다. 고의로 깨버린 흔적이 역력한 이 금강역사 파편의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석굴암 창조의 고통 보여주는 금강역사상)
''서동철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오래된 지금''(도서출판 생각처럼)은 이렇게 무심히 지나치던 우리 문화유산에 작은 의문을 던지는데서 출발한다. 문화재전문기자 출신의 지은이는 이런 사소한 의문을 발전시켜 미술사에 국한되지 않은 역사 종교 민속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시각에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42편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펼쳐놓는다.
정림사터오층석탑에는 잘 알려진 대로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백제 땅을 유린하고 세운 이른바 평제비명( P?이라는 낙서가 새겨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낙서가 새겨지지 않았다면, 즉 정림사탑이 ''소정방기념탑''이 되지 않았으면 이 역시 사라져버렸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정림사탑은 통일신라시대 내내 백제고토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백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기에 남을 수 있었다.
지은이는 정림사가 물리적인 사비성의 중심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백제 왕실과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했던 상징공간이라는 점에서, 소정방의 낙서는 승리에 도취한 자의 기고만장함의 결과가 아니라 정밀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연장선상에서 통일신라시대 정림사탑을 닮은 석탑을 세우는 것은 백제계 주민을 자극하는 일종의 반국가활동이었던 만큼 백제계 석탑의 건립은 철저하게 금지될 수 밖에 없었고, 후삼국시대 이후 옛 백제지역에서 정림사탑을 닮은 탑이 줄이어 세워진 것도 백제추종세력의 백제문화에 대한 향수의 발로였다고 덧붙인다.
봉은사 사천왕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상징한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사천왕상 서방광목천의 사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그대로 헤라클레스가 네메아계곡에서 30일 동안 밤낮으로 목 졸라 죽인 뒤 그 가죽을 쓰고 다녔다는 네메아의 사자라는 것이다.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인 간다라는 BC327년 그리스 고대왕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에게 정복됐는데, 이후까지 이곳에 자리잡고 살던 그리스인들의 문화가 1세기 쿠샨왕조 이후 불교문화와 융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신화의 헤라클레스가 부처의 호위무사로 편입됐는데, 그리스무사 풍의 헤라클레스가 금강역사로 변화하는 과정은 세계 각 박물관에 남아있는 간다라 조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불교에 편입된 그리스신화의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불리우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헤라클레스는 682년 세워진 경주 감은사 서탑 사리함의 사천왕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석굴암 금강역사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이미 학계의 연구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화재와 같은 재난으로 파손되었다거나, 석굴암을 중건하면서 옛 금강역사를 폐기했다거나, 원래 두 쌍의 금강역사를 조성했다거나, 완성품을 만들려했으나 실패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석굴암 금강역사가 과장된 표정으로 위협하듯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반면 경주박물관 금강역사의 얼굴 표정은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의 근엄한 모습이라는데 주목한다. 석굴암을 지은 사람들이 먼저 경주박물관 금강역사를 만들어 놓았으나, 석굴암을 모두 조립해놓고 보니 이 엄숙하고 장엄한 세계를 수호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미 완성된 금강역사상을 폐기하고 새로 조각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겠지만 이런 결단이 있었기에 석굴암은 더욱 위대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세우는데 751년부터 774년 이후까지 최소 24년이 걸린 것도 이런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으로, 아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이런 방식의 재조성은 석굴암의 다른 조각에서도 있었을 것이며, 이런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석굴암은 더욱 위대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석굴암이나 부석사, 태안 마애불 등 우리의 많은 문화유산은 조성 당시는 물론 현재의 시각으로도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이런 미래지향적인 문화의 DNA가 지금도 우리 손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종교 갈등이 가장 큰 사회문제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가 조성한 서울 길상사 관음보살상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아름다운 절 길상사의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
또 세조의 무덤인 광릉의 수호사찰로 유서깊은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가 불교경전의 한글화 노력의 본거지답게 큰 법당을 대웅전도 극락전도 아닌 글자 그대로 ''큰 법당''이라는 한글이름으로 지은 것도 미래지향적인 문화의 전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증거로 제시한다. (20세기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봉선사) 이것이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 문화의 힘''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 시대 야외의식에 쓰이는 대형 불화인 괘불 혹은 괘불탱(영천 은해사의 것은 높이가 15m에 이른다)이 발생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을 만큼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많았던 상황에서 좁은 법당에서는 법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괘불, 우리가 겪은 비극의 크기 따라 커진 불화)
지은이는 일본에서 찻그릇이 되어 국보로 지정된 조선 사기그릇 막사발의 대부분은 일본이 자신들의 정서에 맞게 조선에서 주문 생산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한국인의 정서 달항아리, 일본인의 정서 막사발)고 설명한다.
또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있는 인도의 고승 지공의 부도에서 대여행가로서 그의 면모를 부각시키고(14세기 인도의 대여행가 지공의 회암사 부도), 예산 향천사에서는 주인공인 고승의 얼굴이 새겨진 부도(향천사 부도에 새겨진 멸운대사의 얼굴)를 살펴보았으며, 무오사화의 주역인 탁영 김일손이 남긴 거문고인 탁영금(무오사화의 역사 간직한 탁영금)에서 역사를 더듬기도 한다.
이밖에 합천 해인사 옆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 유정의 석장비는 일제강점기 일인경찰서장에 의해 네쪽으로 갈라지면서 오히려 감동이 커질 수 있었다(깨져서 더욱 가치 높아진 해인사 홍제암 석장비)는 글 등도 눈길을 끈다.
▣ 작가 소개
저자 : 서동철
성균관대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8년 서울신문에 입사했다. 문화전문기자로 문화재와 학술, 국악, 클래식음악을 오랫동안 담당했다. 사회부와 정치부, 행정뉴스팀에서도 다양한 시각을 길렀다. 문화부장과 국제부장,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현재는 경영기획실장으로 재직중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아름다운 정림사터 오층석탑이 있다. 백제 문화는 정림사탑이 부여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유적일 만큼 철저하게 파괴됐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 탑만은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 백제의 옛 땅에는 왜 정림사탑을 닮은 탑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혀 세워지지 않다가 후삼국시대 이후 줄지어 나타났을까. (소정방 기념탑이 되어 살아남은 정림사탑의 역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여문은 여느 절의 천왕문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봉은사 사천왕의 한 분인 서방광목천의 배에는 만화영화의 캐릭터를 연상시킬 정도로 귀여운 사자의 얼굴이 보이고, 그 아래 사자 가죽이 매달려 있다. 어깨에도 역시 사자의 모습을 한 장식이 보인다. 이 사자는 어디서 왔을까.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석굴암의 주실 입구에는 기세등등하게 본존불을 호위하고 있는 한 쌍의 금강역사가 있다. 그런데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석굴암의 또 다른 금강역사의 머리 부분이 하나 전시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석굴암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이 얼굴 부분 뿐 아니라 오른쪽 금강역사의 오른팔과 왼쪽 금강역사의 왼손이 발견됐다. 고의로 깨버린 흔적이 역력한 이 금강역사 파편의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석굴암 창조의 고통 보여주는 금강역사상)
''서동철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오래된 지금''(도서출판 생각처럼)은 이렇게 무심히 지나치던 우리 문화유산에 작은 의문을 던지는데서 출발한다. 문화재전문기자 출신의 지은이는 이런 사소한 의문을 발전시켜 미술사에 국한되지 않은 역사 종교 민속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시각에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42편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펼쳐놓는다.
정림사터오층석탑에는 잘 알려진 대로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백제 땅을 유린하고 세운 이른바 평제비명( P?이라는 낙서가 새겨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낙서가 새겨지지 않았다면, 즉 정림사탑이 ''소정방기념탑''이 되지 않았으면 이 역시 사라져버렸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정림사탑은 통일신라시대 내내 백제고토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백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기에 남을 수 있었다.
지은이는 정림사가 물리적인 사비성의 중심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백제 왕실과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했던 상징공간이라는 점에서, 소정방의 낙서는 승리에 도취한 자의 기고만장함의 결과가 아니라 정밀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연장선상에서 통일신라시대 정림사탑을 닮은 석탑을 세우는 것은 백제계 주민을 자극하는 일종의 반국가활동이었던 만큼 백제계 석탑의 건립은 철저하게 금지될 수 밖에 없었고, 후삼국시대 이후 옛 백제지역에서 정림사탑을 닮은 탑이 줄이어 세워진 것도 백제추종세력의 백제문화에 대한 향수의 발로였다고 덧붙인다.
봉은사 사천왕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상징한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사천왕상 서방광목천의 사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그대로 헤라클레스가 네메아계곡에서 30일 동안 밤낮으로 목 졸라 죽인 뒤 그 가죽을 쓰고 다녔다는 네메아의 사자라는 것이다.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인 간다라는 BC327년 그리스 고대왕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에게 정복됐는데, 이후까지 이곳에 자리잡고 살던 그리스인들의 문화가 1세기 쿠샨왕조 이후 불교문화와 융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신화의 헤라클레스가 부처의 호위무사로 편입됐는데, 그리스무사 풍의 헤라클레스가 금강역사로 변화하는 과정은 세계 각 박물관에 남아있는 간다라 조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불교에 편입된 그리스신화의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불리우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헤라클레스는 682년 세워진 경주 감은사 서탑 사리함의 사천왕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석굴암 금강역사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이미 학계의 연구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화재와 같은 재난으로 파손되었다거나, 석굴암을 중건하면서 옛 금강역사를 폐기했다거나, 원래 두 쌍의 금강역사를 조성했다거나, 완성품을 만들려했으나 실패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석굴암 금강역사가 과장된 표정으로 위협하듯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반면 경주박물관 금강역사의 얼굴 표정은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의 근엄한 모습이라는데 주목한다. 석굴암을 지은 사람들이 먼저 경주박물관 금강역사를 만들어 놓았으나, 석굴암을 모두 조립해놓고 보니 이 엄숙하고 장엄한 세계를 수호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미 완성된 금강역사상을 폐기하고 새로 조각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겠지만 이런 결단이 있었기에 석굴암은 더욱 위대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세우는데 751년부터 774년 이후까지 최소 24년이 걸린 것도 이런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으로, 아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이런 방식의 재조성은 석굴암의 다른 조각에서도 있었을 것이며, 이런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석굴암은 더욱 위대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석굴암이나 부석사, 태안 마애불 등 우리의 많은 문화유산은 조성 당시는 물론 현재의 시각으로도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이런 미래지향적인 문화의 DNA가 지금도 우리 손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종교 갈등이 가장 큰 사회문제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가 조성한 서울 길상사 관음보살상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아름다운 절 길상사의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
또 세조의 무덤인 광릉의 수호사찰로 유서깊은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가 불교경전의 한글화 노력의 본거지답게 큰 법당을 대웅전도 극락전도 아닌 글자 그대로 ''큰 법당''이라는 한글이름으로 지은 것도 미래지향적인 문화의 전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증거로 제시한다. (20세기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봉선사) 이것이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 문화의 힘''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 시대 야외의식에 쓰이는 대형 불화인 괘불 혹은 괘불탱(영천 은해사의 것은 높이가 15m에 이른다)이 발생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을 만큼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많았던 상황에서 좁은 법당에서는 법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괘불, 우리가 겪은 비극의 크기 따라 커진 불화)
지은이는 일본에서 찻그릇이 되어 국보로 지정된 조선 사기그릇 막사발의 대부분은 일본이 자신들의 정서에 맞게 조선에서 주문 생산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한국인의 정서 달항아리, 일본인의 정서 막사발)고 설명한다.
또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있는 인도의 고승 지공의 부도에서 대여행가로서 그의 면모를 부각시키고(14세기 인도의 대여행가 지공의 회암사 부도), 예산 향천사에서는 주인공인 고승의 얼굴이 새겨진 부도(향천사 부도에 새겨진 멸운대사의 얼굴)를 살펴보았으며, 무오사화의 주역인 탁영 김일손이 남긴 거문고인 탁영금(무오사화의 역사 간직한 탁영금)에서 역사를 더듬기도 한다.
이밖에 합천 해인사 옆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 유정의 석장비는 일제강점기 일인경찰서장에 의해 네쪽으로 갈라지면서 오히려 감동이 커질 수 있었다(깨져서 더욱 가치 높아진 해인사 홍제암 석장비)는 글 등도 눈길을 끈다.
▣ 작가 소개
저자 : 서동철
성균관대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8년 서울신문에 입사했다. 문화전문기자로 문화재와 학술, 국악, 클래식음악을 오랫동안 담당했다. 사회부와 정치부, 행정뉴스팀에서도 다양한 시각을 길렀다. 문화부장과 국제부장,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현재는 경영기획실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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