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1. 세계가 주목하는 인류학자, 권헌익의 첫 책
-인류학 분야의 노벨상 ‘기어츠 상’ 1회 수상작
권헌익 교수는 세계가 주목하는 인류학계의 거성이다. 그는 이 책 《학살, 그 이후》로 2007년 ‘인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기어츠 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베트남전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대를 이어 전해지는 전쟁의 후유증을 기록한 역작, 《베트남전의 영혼Ghost in the Vietnam War》으로 ‘조지 카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두 개의 상은 인류학 분야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만큼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뉴욕대의 메릴린 영 교수는 베트남 2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권의 저서를 가리켜 “베트남을 이렇게 철저하고 고통스럽게 다룬 책은 없었다”고 극찬하였고, 노스웨스턴대의 마크 필립 브래들리 교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최고의 저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2. ‘전쟁이 파괴한 삶의 회복’
-인류학자의 시선과 개념으로 본 역사와 공동체의 삶
이 책을 쓰기로 결정한 데는 동일한 지정학적 양극화에 사로잡힌 다른 사회의 파괴와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경제적 번영을 이룬 냉전 사회에서 자라난 나의 유년 시절을 둘러싸고 도덕적 궁지에 몰린 개인적인 경험이 일정하게 작용했다.
-9쪽
저자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이 파괴한 삶의 회복이 학문의 화두이며 공동체의 삶이 회복될 수 있는지 여부가 내 공부의 주제이자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베트남의 미라이와 하미에서 있었던 학살을 소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쟁이 파괴한 삶과 그 회복 과정을 탐구하는 그의 이야기는 한국의 이야기와도 겹치며 전쟁의 폭력과 기억, 추모와 위로의 인류학을 펼쳐 보인다. 이 책은 역사 문헌에 대한 검토와 결합하면서도 장기간에 걸쳐 수행한 현지조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는 인류학자들에게 익숙한 연구 도구를 가지고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그가 직접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전해들은 이야기의 서술과 구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미에서의 학살
-1968년 2월 25일, 다낭 남쪽에 있는 해안의 작은 마을 30가구에서 나온 남녀노소 135명이 3개 소대의 외국 병사들에게 2시간 만에 학살되었다. 학살이 끝난 뒤 군대는 시체를 한꺼번에 불도저로 묻어버렸고,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얕게 파놓았던 희생자들의 무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미라이에서의 학살
1968년 3월 16일, 바커기동부대 소속 3개 소대가 세 방향에서 미라이 지역으로 몰려가서 마을 사람들을 세 곳에 집결시켰다. 민간인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3. 아래로부터의 역사
저자는 베트남전 당시 하미와 미라이에서 벌어졌던 학살과 그 이후의 일을 냉전 구조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류학자 특유의 통찰력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E. P 톰슨이 말한 의미 그대로의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당시 일어났던 학살의 유산을 그들의 일상적 행위와 민중적 규범의 환경 안에 자리매김시키고자 했다. 베트남전쟁이 남긴 민간인 학살의 유산을 탐구하기 위해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 특히 그들의 가정의례에 직접 참여하며 조사하고 연구한다. 미라이와 하미를 비롯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영향을 받은 마을들에서 다양한 역사,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목격담과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전쟁의 폭력을 재구성하고 그들만의 추모와 위로의 변화과정을 탐구한다.
나는 1994년부터 하미와 미라이를 여러 차례 방문해서 연구를 수행했다. 대부분 여름방학을 이용했으며 1997~1998년과 2000~2001년에는 좀 더 긴 기간을 할애했다. 하미에서 연구할 때는 호이안 시내와 다낭의 시립도서관 근처에 살면서 매일 마을을 찾았다. 미라이에서는 꽝응아이 시와 마을을 정기적으로 왕래했다. 번잡한 도시에 거처를 정한 덕에 관리들은 내 존재를 용인해주었고, 또한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다양한 집단의 정보원들과 만나는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종종 1968년 당시의 현지 상황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는 전직 지역 빨치산 지도자의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 전직 연합군 하급 연락장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이 지방의 전쟁 역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는 전쟁 당시 은밀하게 활동한 민간인 출신과의 대화가 가장 매력적이라는 점도 발견했다.
…… 또한 미라이와 하미를 비롯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영향을 받은 마을들에서 다양한 역사·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살 생존자, 희생자의 가까운 친척, 정부 관리, 게릴라 전쟁 참전군인, 전직 남베트남 정부 공무원, 집안 원로와 조상 사당 관리인, 묘지 관리인과 마을 장의사, 의례 전문가 등이 그들이다. …… 엄격하게 통제되는 마을의 정치 환경 속에서 마을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의 기일과 장례일같이 의례가 있는 경우는 훌륭한 기회였다. 나는 이런 조상의례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차 현지인들과 신뢰를 쌓고 관계를 확대했으며, 이런 기회를 통해 나중에 비극적 죽음을 당한 잡신들을 위한 의례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27쪽
저자는 민중의 기억을 바탕으로 철저한 현장 조사를 통해 추모의 미학을 보여준다. 책 초반부의 ‘죽음의 양극성’에서 보여주는 양손잡이 개념,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인류학의 개념 등을 동원하는 부분에서는 학술서의 흔적이 있지만 조금만 읽다보면 베트남 마을 사람들이 폭력을 기억하고 산 자와 죽은 이들을 아우르는 부분에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지역의 역사와 도덕 관습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의 관습을 죽음과 상징 변형에 관한 사회학 이론과의 비판적 대화를 이끄는 부분에서는 인류학자만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다. 툴레인대의 E. J 트루이트 교수는 이 책을 가리켜 ‘폭력과 기념과 추도에 관한 필독서’라고 평했다.
4. 1968년 원숭이해의 학살
병사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 전에도 그런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본은 군인들이 오늘은 무엇을 선물로 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또 다른 생존 여성인 바호아는 누군가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면 어떻게 하지?”, “농담하지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악운을 자청하고 있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먹을 걸 주려고 온 거야. 날 믿어, 믿으라고.”
사건이 벌어진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직후였다. 장교가 연설을 마치고는 모인 사람들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자 장교는 재빨리 손짓을 했다. 손짓을 신호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M60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 미처 묻지 못한 주검들을 깔아뭉갰다. 사람들은 시신과 무덤까지 짓밟은 일을 이 사건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족의 기념과정이 복잡해졌다.
저자는 종횡으로 엇갈리는 도덕적/정치적 양극성의 견지에서 하미와 미라이를 바라본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마을의 역사를 살피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사실 어느 편에 속한 이들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역사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베트남에 스며든 가정의례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죽은 자를 기억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부터 냉전 이후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5.추모의 미학
-의례행위에 담긴 의미와 구조
저자는 학살의 전후에 가려진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살피고 베트남만의 민간 문화를 조사한다. 그들은 죽음을 분류하고 죽은 자를 기리는 자신들만의 방식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사자를 기억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기도 했지만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들은 죽음을 ‘집에서의 죽음’-좋은 죽음과 ‘길 위에서의 죽음’-나쁜 죽음으로 나누었고, 조상숭배와 함께 가까운 곳에 잡신을 위한 사당을 짓고 그들의 죽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학살로 인한 죽음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그런 죽음은 없었다.
하미와 미라이 학살의 죽음은 너무 비극적이었던 탓에 그 희생자들이 영웅들의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또 너무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조상들의 ‘적극적인 공간’에 편입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영웅숭배의 보이지 않는 가장자리나 조상숭배의 부정적인 배경으로 좌천될 수 없었다.
-292쪽
전쟁이 끝난 후 국가는 전쟁영웅들을 추모하며 그들을 기억하고자 하였고 그 반대에 있거나 분류가 불가능했던 죽은 자들은 자연스럽게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쁜 죽음을 정복하고 그 흔적을 말살하고 영웅을 숭배하던 방식에서 조상신과 잡신이 전쟁영웅들이 지배하던 공적 영역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국가와 사회의 권력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6. 비통한 죽음으로부터 해방
-그들은 어떻게 냉전의 양극질서를 해체하고 있는가
냉전은 베트남의 전통적인 공동체와 가족 생활, 개인의 정체성까지도 갈라놓았다. 가족의 의무와 혁명국가의 반대편에서 싸운 이들은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가족과 개인, 친족들은 분열되었고 영웅적인 전사자들을 공동체의 중심부에 모으는 과정에서 온 마을 사망자들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아래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저자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조상숭배와 망령들의 추모 등 가정의례와 함께,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이장 운동(114쪽), 사당의 복원(138쪽), 기념비 건립(229쪽), 무덤 단장(263쪽) 등의 사례를 보여주면서 이 과정이 어떻게 냉전의 양극질서를 해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사당 개·보수가 양극적 역사로 갈라졌던 산 사람들을 재결합시킨다면, 무덤 단장은 죽은 자들을 화합시켰다. 가족의 매장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매장과 달리 팜주이의 ‘두형제’를 영웅과 악당으로 갈라놓지 않는다. 어느 가족묘지에는 혁명전쟁 열사와 전쟁 ‘괴뢰군’ 병사가 형제로 나란히 누워 있다. …… 베트남에서 부활한 조상숭배는 ‘이편’과 ‘저편’의 역사적인 정치적 이원성을 가족의 전통적인 화합으로 흡수함으로써 전쟁의 유산을 무화하는 데 이비지한다.
-264쪽
조상숭배의 동화과정과 달리, 망령을 신당에 모시는 과정은 그들의 비극적 역사를 온전히 인정하면서 이루어진다. 이 망령들이 가진 주술적 힘은 사실 비극적 죽음을 당했다는 특별한 배경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 힘이란 원통한 역사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281쪽
조상숭배가 친족의 유대라는 이름으로 양분된 정치사를 화해시키는 데 이바지한다면, 잡신들과의 의례적 상호작용은 친족 공동체와 상상된 민족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서는 규모의 전혀 다른 관계 규범을 가르침으로써 화해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282쪽
영웅, 조상, 망령은 마을에서 공존한다. 혁명정치와 전통적인 종교 유산에서는 이 세 사회계급이 갈라지지만, 민간 의례관습에서는 서로 손을 잡고 있음을, 베트남에서 조상숭배의 부활은 단순히 전통적인 사회적 이상의 복원이 아니라 지배적인 정치적 관습에 맞선 대항 수단의 창안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이편’과 ‘저편’의 정치적 이원성을 가족의 전통적인 화합으로 흡수함으로써 전쟁의 유산을 무화하는 데 이바지한다. 또한 조상숭배와 함께 행하는 망령을 기리는 과정에서 폭력과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와 위로를 하면서 냉전의 구조를 해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베트남의 제사음식에는 ‘쏘이 더우’라는 음식이 있다. 이것은 검정콩을 넣어 밥을 지은 것으로, 사람들은 이런 흑백의 미묘한 혼합에 빗대어 인민전쟁의 가혹한 상황을 설명한다. 이 단 음식을 먹을 때는 꼭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을 입에 같이 넣어야 한다. 두 부분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261쪽
《학살, 그 이후》는 인간의 모든 죽음에는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음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애도와 위로를 받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원숭이해 집단 사망의 희생자들의 원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양극적 정치와 상징적 정복의 정치를 초월하는 것에 있으며 양극적 정치에서 부정된 인류의 화합과, 공동체 화합의 상징적 형태에 감춰진 보편적 규범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며 끝맺는다.
▣ 작가 소개
저자 : 권헌익
1993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로 임용되었고, 그가 거쳐간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채용 당시, 권헌익 교수는 인류학 석학 수백 명이 몰린 상황에서 심층면접을 거쳐 최종 낙점이 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현재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교수 겸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그곳은 케임브리지의 31개 칼리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곳으로, 노벨상 수상자 32명을 비롯해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바이런,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자와할랄 네루 등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트리니티칼리지에 한국인 교수가 임용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저자는 현재 지역적·지구적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역사와 기억을 탐구하는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국제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그를 ‘인류학 최고의 스타’이자 ‘그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본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권헌익 같은 좋은 학자가 한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런던정경대학(LSE) 교수로 가버린 일이다. 만약 그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생에게 정...말 좋은 스승이 되었을 것 같다. …… 한국은 못 알아들었고, 영국은 알아들었다.” 그는 안타까워했지만 권헌익 교수는 다시 책으로 돌아와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서문
서론
1장 죽음의 양극성
2장 1968년 원숭이해의 학살
3장 한 세대 뒤
4장 거리의 조상들
5장 영웅과 조상
6장 원통한 죽음
7장 증오비
8장 냉전의 해체
결론
미주
찾아보기
1. 세계가 주목하는 인류학자, 권헌익의 첫 책
-인류학 분야의 노벨상 ‘기어츠 상’ 1회 수상작
권헌익 교수는 세계가 주목하는 인류학계의 거성이다. 그는 이 책 《학살, 그 이후》로 2007년 ‘인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기어츠 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베트남전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대를 이어 전해지는 전쟁의 후유증을 기록한 역작, 《베트남전의 영혼Ghost in the Vietnam War》으로 ‘조지 카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두 개의 상은 인류학 분야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만큼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뉴욕대의 메릴린 영 교수는 베트남 2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권의 저서를 가리켜 “베트남을 이렇게 철저하고 고통스럽게 다룬 책은 없었다”고 극찬하였고, 노스웨스턴대의 마크 필립 브래들리 교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최고의 저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2. ‘전쟁이 파괴한 삶의 회복’
-인류학자의 시선과 개념으로 본 역사와 공동체의 삶
이 책을 쓰기로 결정한 데는 동일한 지정학적 양극화에 사로잡힌 다른 사회의 파괴와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경제적 번영을 이룬 냉전 사회에서 자라난 나의 유년 시절을 둘러싸고 도덕적 궁지에 몰린 개인적인 경험이 일정하게 작용했다.
-9쪽
저자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이 파괴한 삶의 회복이 학문의 화두이며 공동체의 삶이 회복될 수 있는지 여부가 내 공부의 주제이자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베트남의 미라이와 하미에서 있었던 학살을 소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쟁이 파괴한 삶과 그 회복 과정을 탐구하는 그의 이야기는 한국의 이야기와도 겹치며 전쟁의 폭력과 기억, 추모와 위로의 인류학을 펼쳐 보인다. 이 책은 역사 문헌에 대한 검토와 결합하면서도 장기간에 걸쳐 수행한 현지조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는 인류학자들에게 익숙한 연구 도구를 가지고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그가 직접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전해들은 이야기의 서술과 구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미에서의 학살
-1968년 2월 25일, 다낭 남쪽에 있는 해안의 작은 마을 30가구에서 나온 남녀노소 135명이 3개 소대의 외국 병사들에게 2시간 만에 학살되었다. 학살이 끝난 뒤 군대는 시체를 한꺼번에 불도저로 묻어버렸고,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얕게 파놓았던 희생자들의 무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미라이에서의 학살
1968년 3월 16일, 바커기동부대 소속 3개 소대가 세 방향에서 미라이 지역으로 몰려가서 마을 사람들을 세 곳에 집결시켰다. 민간인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3. 아래로부터의 역사
저자는 베트남전 당시 하미와 미라이에서 벌어졌던 학살과 그 이후의 일을 냉전 구조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류학자 특유의 통찰력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E. P 톰슨이 말한 의미 그대로의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당시 일어났던 학살의 유산을 그들의 일상적 행위와 민중적 규범의 환경 안에 자리매김시키고자 했다. 베트남전쟁이 남긴 민간인 학살의 유산을 탐구하기 위해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 특히 그들의 가정의례에 직접 참여하며 조사하고 연구한다. 미라이와 하미를 비롯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영향을 받은 마을들에서 다양한 역사,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목격담과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전쟁의 폭력을 재구성하고 그들만의 추모와 위로의 변화과정을 탐구한다.
나는 1994년부터 하미와 미라이를 여러 차례 방문해서 연구를 수행했다. 대부분 여름방학을 이용했으며 1997~1998년과 2000~2001년에는 좀 더 긴 기간을 할애했다. 하미에서 연구할 때는 호이안 시내와 다낭의 시립도서관 근처에 살면서 매일 마을을 찾았다. 미라이에서는 꽝응아이 시와 마을을 정기적으로 왕래했다. 번잡한 도시에 거처를 정한 덕에 관리들은 내 존재를 용인해주었고, 또한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다양한 집단의 정보원들과 만나는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종종 1968년 당시의 현지 상황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는 전직 지역 빨치산 지도자의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 전직 연합군 하급 연락장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이 지방의 전쟁 역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는 전쟁 당시 은밀하게 활동한 민간인 출신과의 대화가 가장 매력적이라는 점도 발견했다.
…… 또한 미라이와 하미를 비롯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영향을 받은 마을들에서 다양한 역사·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살 생존자, 희생자의 가까운 친척, 정부 관리, 게릴라 전쟁 참전군인, 전직 남베트남 정부 공무원, 집안 원로와 조상 사당 관리인, 묘지 관리인과 마을 장의사, 의례 전문가 등이 그들이다. …… 엄격하게 통제되는 마을의 정치 환경 속에서 마을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의 기일과 장례일같이 의례가 있는 경우는 훌륭한 기회였다. 나는 이런 조상의례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차 현지인들과 신뢰를 쌓고 관계를 확대했으며, 이런 기회를 통해 나중에 비극적 죽음을 당한 잡신들을 위한 의례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27쪽
저자는 민중의 기억을 바탕으로 철저한 현장 조사를 통해 추모의 미학을 보여준다. 책 초반부의 ‘죽음의 양극성’에서 보여주는 양손잡이 개념,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인류학의 개념 등을 동원하는 부분에서는 학술서의 흔적이 있지만 조금만 읽다보면 베트남 마을 사람들이 폭력을 기억하고 산 자와 죽은 이들을 아우르는 부분에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지역의 역사와 도덕 관습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의 관습을 죽음과 상징 변형에 관한 사회학 이론과의 비판적 대화를 이끄는 부분에서는 인류학자만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다. 툴레인대의 E. J 트루이트 교수는 이 책을 가리켜 ‘폭력과 기념과 추도에 관한 필독서’라고 평했다.
4. 1968년 원숭이해의 학살
병사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 전에도 그런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본은 군인들이 오늘은 무엇을 선물로 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또 다른 생존 여성인 바호아는 누군가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면 어떻게 하지?”, “농담하지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악운을 자청하고 있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먹을 걸 주려고 온 거야. 날 믿어, 믿으라고.”
사건이 벌어진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직후였다. 장교가 연설을 마치고는 모인 사람들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자 장교는 재빨리 손짓을 했다. 손짓을 신호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M60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 미처 묻지 못한 주검들을 깔아뭉갰다. 사람들은 시신과 무덤까지 짓밟은 일을 이 사건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족의 기념과정이 복잡해졌다.
저자는 종횡으로 엇갈리는 도덕적/정치적 양극성의 견지에서 하미와 미라이를 바라본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마을의 역사를 살피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사실 어느 편에 속한 이들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역사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베트남에 스며든 가정의례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죽은 자를 기억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부터 냉전 이후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5.추모의 미학
-의례행위에 담긴 의미와 구조
저자는 학살의 전후에 가려진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살피고 베트남만의 민간 문화를 조사한다. 그들은 죽음을 분류하고 죽은 자를 기리는 자신들만의 방식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사자를 기억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기도 했지만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들은 죽음을 ‘집에서의 죽음’-좋은 죽음과 ‘길 위에서의 죽음’-나쁜 죽음으로 나누었고, 조상숭배와 함께 가까운 곳에 잡신을 위한 사당을 짓고 그들의 죽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학살로 인한 죽음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그런 죽음은 없었다.
하미와 미라이 학살의 죽음은 너무 비극적이었던 탓에 그 희생자들이 영웅들의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또 너무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조상들의 ‘적극적인 공간’에 편입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영웅숭배의 보이지 않는 가장자리나 조상숭배의 부정적인 배경으로 좌천될 수 없었다.
-292쪽
전쟁이 끝난 후 국가는 전쟁영웅들을 추모하며 그들을 기억하고자 하였고 그 반대에 있거나 분류가 불가능했던 죽은 자들은 자연스럽게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쁜 죽음을 정복하고 그 흔적을 말살하고 영웅을 숭배하던 방식에서 조상신과 잡신이 전쟁영웅들이 지배하던 공적 영역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국가와 사회의 권력 관계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6. 비통한 죽음으로부터 해방
-그들은 어떻게 냉전의 양극질서를 해체하고 있는가
냉전은 베트남의 전통적인 공동체와 가족 생활, 개인의 정체성까지도 갈라놓았다. 가족의 의무와 혁명국가의 반대편에서 싸운 이들은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가족과 개인, 친족들은 분열되었고 영웅적인 전사자들을 공동체의 중심부에 모으는 과정에서 온 마을 사망자들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아래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저자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조상숭배와 망령들의 추모 등 가정의례와 함께,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이장 운동(114쪽), 사당의 복원(138쪽), 기념비 건립(229쪽), 무덤 단장(263쪽) 등의 사례를 보여주면서 이 과정이 어떻게 냉전의 양극질서를 해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사당 개·보수가 양극적 역사로 갈라졌던 산 사람들을 재결합시킨다면, 무덤 단장은 죽은 자들을 화합시켰다. 가족의 매장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매장과 달리 팜주이의 ‘두형제’를 영웅과 악당으로 갈라놓지 않는다. 어느 가족묘지에는 혁명전쟁 열사와 전쟁 ‘괴뢰군’ 병사가 형제로 나란히 누워 있다. …… 베트남에서 부활한 조상숭배는 ‘이편’과 ‘저편’의 역사적인 정치적 이원성을 가족의 전통적인 화합으로 흡수함으로써 전쟁의 유산을 무화하는 데 이비지한다.
-264쪽
조상숭배의 동화과정과 달리, 망령을 신당에 모시는 과정은 그들의 비극적 역사를 온전히 인정하면서 이루어진다. 이 망령들이 가진 주술적 힘은 사실 비극적 죽음을 당했다는 특별한 배경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 힘이란 원통한 역사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281쪽
조상숭배가 친족의 유대라는 이름으로 양분된 정치사를 화해시키는 데 이바지한다면, 잡신들과의 의례적 상호작용은 친족 공동체와 상상된 민족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서는 규모의 전혀 다른 관계 규범을 가르침으로써 화해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282쪽
영웅, 조상, 망령은 마을에서 공존한다. 혁명정치와 전통적인 종교 유산에서는 이 세 사회계급이 갈라지지만, 민간 의례관습에서는 서로 손을 잡고 있음을, 베트남에서 조상숭배의 부활은 단순히 전통적인 사회적 이상의 복원이 아니라 지배적인 정치적 관습에 맞선 대항 수단의 창안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이편’과 ‘저편’의 정치적 이원성을 가족의 전통적인 화합으로 흡수함으로써 전쟁의 유산을 무화하는 데 이바지한다. 또한 조상숭배와 함께 행하는 망령을 기리는 과정에서 폭력과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와 위로를 하면서 냉전의 구조를 해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베트남의 제사음식에는 ‘쏘이 더우’라는 음식이 있다. 이것은 검정콩을 넣어 밥을 지은 것으로, 사람들은 이런 흑백의 미묘한 혼합에 빗대어 인민전쟁의 가혹한 상황을 설명한다. 이 단 음식을 먹을 때는 꼭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을 입에 같이 넣어야 한다. 두 부분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261쪽
《학살, 그 이후》는 인간의 모든 죽음에는 ‘좋은 죽음’이든 ‘나쁜 죽음’이든, ‘이편’의 죽음이든 ‘저편’의 죽음이든 애도와 위로를 받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원숭이해 집단 사망의 희생자들의 원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양극적 정치와 상징적 정복의 정치를 초월하는 것에 있으며 양극적 정치에서 부정된 인류의 화합과, 공동체 화합의 상징적 형태에 감춰진 보편적 규범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며 끝맺는다.
▣ 작가 소개
저자 : 권헌익
1993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로 임용되었고, 그가 거쳐간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채용 당시, 권헌익 교수는 인류학 석학 수백 명이 몰린 상황에서 심층면접을 거쳐 최종 낙점이 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현재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교수 겸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그곳은 케임브리지의 31개 칼리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곳으로, 노벨상 수상자 32명을 비롯해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바이런,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자와할랄 네루 등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트리니티칼리지에 한국인 교수가 임용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저자는 현재 지역적·지구적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역사와 기억을 탐구하는 ‘한국전쟁을 넘어서’라는 국제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그를 ‘인류학 최고의 스타’이자 ‘그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본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권헌익 같은 좋은 학자가 한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런던정경대학(LSE) 교수로 가버린 일이다. 만약 그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생에게 정...말 좋은 스승이 되었을 것 같다. …… 한국은 못 알아들었고, 영국은 알아들었다.” 그는 안타까워했지만 권헌익 교수는 다시 책으로 돌아와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서문
서론
1장 죽음의 양극성
2장 1968년 원숭이해의 학살
3장 한 세대 뒤
4장 거리의 조상들
5장 영웅과 조상
6장 원통한 죽음
7장 증오비
8장 냉전의 해체
결론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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