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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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귀도 크놉
출판사항울력, 발행일:2011/07/15
형태사항p.476 국판:23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89485865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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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히틀러는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의 정점에 있다. 하지만 그 범죄 행위는 결코 히틀러 한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그 시기에 독일은 짧은 시간 안에 재무장을 수행했고, 또 몇 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그건 히틀러를 믿고 그가 제시한 비전을 종교처럼 받들어 수행한 히틀러의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조력자들이 히틀러의 팔 다리가 되어 그의 전쟁과 학살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패전한 뒤에 나치 전범들을 받아들인 남미의 독재자들이 감탄했듯이, 전쟁과 학살을 수행한 나치 독일의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이고 강력했다. 그렇다면 전쟁과 학살을 수행한 히틀러의 조력자들은 대단한 능력자들이고 악의 화신들이었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견 평범한 출신에 평범한 이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반인륜적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는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인 학살을 조직한 아돌프 아이히만, 히틀러를 위해 독일 청소년들을 동원하고 조직한 발두어 폰 쉬라흐, 히틀러의 비서로서 그의 배후에서 정보를 통제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마르틴 보어만, 주류 판매상에서 히틀러의 외교장관에 오른 요아힘 리벤트로프, 히틀러의 주구로서 사법 살인을 수행한 롤란트 프라이슬러,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의사로서 생체 실험을 행한 요제프 멩겔레가 바로 그들이다. 이 여섯 명의 히틀러의 조력자들은 히틀러의 야망을 실행에 옮긴 집행인들로 저마다 아주 상이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히틀러와 그의 광기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행위가 옳지 않은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이 범죄자의 길로 빠져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은 악마 같은 스승이 생명의 혼을 불어넣어주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악의 에너지를 펼친 사악한 제자들일까? 그렇다면 그들 역시 매우 특별한 범죄자들일까? 아니면 그들은 단지 우연한 계기에 범죄 독재 정권의 일원이 된 매우 평범한 독일인에 불과할까? 이런 물음은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의미 있는 지점도 바로 이런 물음에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들과 같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리고 개인의 연약한 인간성에 기대기보다 인간 사회에 기반을 둔 명확한 규범에 의해 통치되는 정의로운 국가만이 역사의 불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히틀러의 조력자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학살자: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가 수행한 전쟁, 즉 유대인과의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경찰에게 “나는 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에서 유대인의 씨를 말리려는 히틀러의 목표를 마치 일생의 과업인 양 수행했다. 이미 패전한 것이나 다름없던 1944년 여름까지도 아이히만은 여전히 학살 대상자들을 열차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분투하였다. 아이히만은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학살 주모자였다. 그는 희생자를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었다. 아이히만의 진술에 따르면, 만일 그에게 명령이 떨어졌다면, 그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라도 맹목적이고도 광적으로 살해했을 것이다.
평범했지만 사악했던 이 죽음의 관료는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다. 수백만 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유대인 부서”는 처음에는 추방을 담당하는 주무 부서였지만, 이후 자연스럽게 유대인을 제거하는 주무 부서로 바뀌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수송 체계를 조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냉정하고 효과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일을 처리했다.
민족 말살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반제회의 이후, 아이히만의 죽음의 열차는 밤낮으로 강제수용소로 향했다. 대량 학살에 맞추어 기차시간표를 짜면서, 제국철도와 가장 큰 고객이었던 아이히만은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아이히만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꼼꼼하게 죽음의 열차가 정확하게 출발하고 도착하도록 신경을 썼다. 출발과 도착이 지체될 조짐이 보이면, 이 관료는 흥분상태에 빠지곤 했다. 아르헨티나 망명 중에 그가 한 발언에 의하면,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차 운행 시간이 지연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국철도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다른 열차의 지연에 대한 책임이 내게 전가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전선에 증원군과 보급 물자를 보내기 위해서는 제국철도에서 쓸 수 있는 모든 기차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다른 곳에 투입되었다. 아이히만은 제국철도로부터 언제나 특혜를 받았던 것이다.
헝가리에서 이 유대인 학살자는 자신의 “필생의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중령님, 몇 명이 죽었습니까?” 1944년에 한 젊은 나치 소위가 그에게 물었다. 아이히만은 “5백만 명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대해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겁니까?” 그러자 아이히만은, “수백 명의 죽음은 일종의 재앙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일종의 통계다”라고 대답했다. 히믈러가 1944년 8월 말에 모든 헝가리 유대인의 강제수용소 이송을 금지했을 때, 아이히만은 분개했다. 독일이 설사 패전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유대인과의 전쟁에서는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의 한 “동료”가 회상하기를, “그가 원했던 가장 큰 보상은 언젠가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에 대해 감사의 말을 건네며 그를 영접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가슴 아파했다.” 그는 그의 상관인 게슈타포 뮐러로부터 마지막 칭송을 받았다. “우리에게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50명만 있었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했을지 모른다.”
이스라엘 첩보 조직인 모사드가 아르헨티나에 망명 중이던 그를 예루살렘으로 납치해 왔다. 물론 그는 재판에서 기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것은 명령만을 따르는 군인다운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했으며, 심지어 유대 민족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납치되기 6년 전에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유대인을 독가스로 죽이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더라도 나는 그 명령을 수행했을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로 납치한 유대인 정보 요원들을 차갑게 쏘아보면서, “너희들 모두 곧 나를 뒤따르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태연히 교수대로 걸어갔다. 이 전범에게도 그의 희생자들에게 행해진 것과 똑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지중해에 뿌려졌다.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 청소년단원: 쉬라흐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인 발두어 폰 쉬라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했다. 쉬라흐는 열광적인 나치당원은 아니었다. 그는 괴벨스 같은 극악무도함, 멩겔레 같은 잔혹함, 아이히만 같은 회계적인 철저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라면, 허세도 부리고 아양도 떨었다. 바이마르 출신으로 처세에 능하고 명민했던 그는 히틀러를 주저 없이 괴테와 비교하여 부르고는, 스스로 불러낸 정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마법사 제자” 역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쉬라흐에게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는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부유한 월스트리트 은행가인 그녀의 오빠가 1920년대 후반에 젊은 발두어에게 그의 회사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쉬라흐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쉬라흐는 영혼의 포획자인 히틀러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총통 각하! 언젠가 독일 역사상 가장 큰 청소년 조직을 당신을 위해 육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
쉬라흐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보다 병적으로 한 가지에 빠져드는 괴짜에 가까웠다. 그는 청소년을 꾀어 모으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 솜씨는 형편없었다. 쉬라흐가 청소년을 모은 방법이라고는 히틀러의 이름을 판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쉬라흐는 히틀러를 선전하는 모든 기법을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쉬라흐는 “총통” 우상화를 시작한 괴벨스보다 더 적극적으로 “총통” 숭배 의식을 거행했다. “당신은 독일의 미래이기 때문에, 당신만이”라는 구호를 통해 그는 청소년들에게 섬뜩하면서도 멋진 느낌을 경험하도록 했는데, 이는 단원 선서 의식의 일부였다. 쉬라흐는 청소년들에게 그들이 아주 특별한 존재이고, 훗날 “강대국 독일”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믿게끔 만들었다. 소년들에게는 “우리는 총통에게로 행진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 행진할 것이다”라는 목표가, 소녀들에게는 “너희들은 새로운 종족의 어머니들이다”라는 목표가 있었다. 물론 실제 목표는 “총통을 위한 총알받이”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폴란드 침공에서 볼 수 있듯이, 쉬라흐의 교육 방법은 결실을 맺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쳐서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원들에게 애국심과 전투 준비, 명령에 대한 복종과 희생 의지를 전파하였다.
히틀러는 반년 동안 군 복무를 수행한 쉬라흐를 빈의 대관구 관구장으로 임명했다. 이미 그곳에서는 합병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가 사라져버린 상태였고, 흥분이 고조된 “오스트마르크 군”과 “프로이센 군” 사이에 간헐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쉬라흐는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갈등을 봉합하고 당을 대표하는 일을 그곳에서 수행해야 했다. 그는 그 일 역시 성공적으로 해냈다. 유럽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동안, 쉬라흐는 낭독회, 오페라 초연과 연극 주간을 개최하였다. 빈에서 전쟁은 이미 먼 나라 이야기였다. 다만 홀로코스트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쉬라흐는 광적인 유대인 혐오자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의식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생각했다. 지도부에서 유대인 “배척”이 계속 진행되고 비인간적인 계획들이 실행되었을 때, 이 문화 애호가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렇지만 쉬라흐는 권리 침해나 나쁜 행위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반대로, 그는 일찍부터 유대인 강제 추방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빈은 “유대인 없는” 도시가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로 유대인 추방이 진행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소도시로의 이주”였으나, 실제로는 가스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쉬라흐의 부인인 헨리에테가 오버잘츠부르크의 모임에서 네덜란드 유대인 여인들에 대한 취급 방식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았을 때, 히틀러와의 좋은 관계는 다 끝나버렸다. 쉬라흐 부부의 결혼식 증인이었던 히틀러는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소리치며, “당신은 증오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여태껏 히틀러가 그렇게 진노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에 대해 결국 가족이 공동으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인 쉬라흐도 당황하며 속죄를 청해야 했다. 그의 숙적이었던 괴벨스는 흐뭇해하면서 “히틀러는 쉬라흐를 결코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일기장에 그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2년 동안, 쉬라흐의 심리 상태는 결국 전쟁에 패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인식으로 체념 상태에 빠져 있거나, 그와 반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금 히틀러의 총애를 얻고자 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상태를 오가고 있었다. 쉬라흐는 결코 비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기회주의자였을 뿐이었다. 종전이 가까워 오자 대관구 관구장이었던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원들을 전쟁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향토방위대의 투입을 명령했으며, 최후에는 나이 든 남성과 미성년자마저도 전쟁에 투입할 것을 지시했다. 쉬라흐는 그 자신이 시구에서 칭송했던 청소년단원들을 빈, 브로츠와프, 베를린 전투에 투입시켰고, 그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그림자: 보어만
히틀러의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의 마지막 몇 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인물이다. 마지막에 히틀러는 그를 “가장 충실한 동지”라고 불렀다. 그는 항상 “제3제국”의 막후 실력자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런 자들을 간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바로 그 모습 때문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보어만에게는 권력만이 주된 관심사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남으로부터 빌린 권력이었다. 이 권력을 얻고 행사하기 위해 그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히틀러에게 복종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권력자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한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이상적인 출세주의자가 갖춰야만 하는 성격들을 모두 갖춘 그는 아랫사람에게는 잔인했고, 윗사람에게는 비굴했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이었으며, 냉혹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끈기 있고 부지런했으며, 교활한 음모를 꾸미는 술책가이기도 했다.
보어만은 서류 업무들을 처리했다. 그는 항상 주머니 속에 메모 노트와 필기도구를 갖고 다녔다. 그는 모든 지시 사항과 질문들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느닷없이 내뱉은 발언까지도 부지런히 기록했다. 히틀러가 식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 기록들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식으로 열심히 기록한 비서 덕분이다. 보어만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을 강구했다. 하지만 “제3제국”에서는 법이 안전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허울뿐인 법조문이 안전을 담보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록 의미 없이 던진 말이라도 히틀러의 말이라면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비밀리에 기록한 독재자의 발언들을 통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가 어떤 의중을 가지고 있는지 예측하고자 노력했다. 히틀러가 갑작스럽게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 때, 메모를 통해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보어만의 부하들은 비록 한밤중일지라도 그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지시 사항이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보어만은 지체 없이 전력을 다해 그 지시 사항을 처리했다.
보어만에게 명예와 명성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총통”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는 보어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한,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보어만이 히틀러를 필요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그 열성적인 비서가 필요했다. 보어만은 히틀러의 장막이 되어 그가 더 이상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감추어 주었다. 보어만은 히틀러가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통제했다.
그는 정치, 특히 이데올로기와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고 야비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세계관이 개입되는 정치나 이데올로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어만의 장점은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지 “머리를 써서 계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보어만에게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개념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애정 행각을 위해 나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악명 높은 바람둥이는 자신의 일탈 행위를 당의 요구라고 정당화시켰다. 그 요구에 따르면, 향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줄여 나가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독일 남성들이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했다.
히틀러의 그림자였던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협력했다. 그는 자발적인 집행인들에게 “총통”의 의지를 전하는 사자使者의 역할을 했다. 또한 히틀러에게 집행인들에 대한 온갖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의 역할과 집행인들이 누구를 처리하고 무슨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잊지 않도록 감시하고 도와주는 기억 장치로서의 역할도 했다. 종전되기 2년 전부터 보어만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그는 정적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거두기도 했다. 또한 정적들을 칭찬하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히틀러의 발언을 금과옥조인 양 비장의 카드로 사용했다. 결국 보어만은 자신이 항상 열망하던 자리, 즉 “총통” 곁의 유일한 충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콘크리트 벙커 안에서 보어만은 다른 측근들보다 더 가까이서 히틀러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 히틀러가 통제할 수 있는 구역이 제국수상청사 좌우 몇몇 거리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보어만은 자신이 바라던 목표였던 유일한 충복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수인: 리벤트로프
히틀러의 조력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전범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전범자의 길을 택했다. 요아힘 리벤트로프는 17살 때 단기간의 방문을 목적으로 캐나다로 갔고, 4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가 그곳에 정착했더라면(그는 정착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존경받는 상인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고,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상류층 여식들과 숙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세련되고 호감이 가는 청년이었다. 그는 또한 성공한 주류업자였고, 친구들 중에는 독일 민주 진영의 기대주였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한편, 그는 편협하고 거만한 파렴치한이었고,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흉악한 독재자에게 맡겨버린 우유부단한 하수인이었다. 리벤트로프는 빠른 시간 내에 히틀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었다. 1933년 초에 주류업자인 리벤트로프의 저택에서 중요한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이 모임을 통해 히틀러의 권력 탈취 구상이 마무리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이 새로운 인물을 그의 외교 고문 자리에 앉혔고, 그 후에 그를 특사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권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외국의 모든 회의론자들과의 대화를 위해 능력 있는 상류층 인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외교부의 고집 센 외교관들 중에서는 적격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히틀러에게는 자신에게 무조건 헌신하는 나치당 출신 한 명만 있으면 되었다.
리벤트로프는 언제나 히틀러의 희망을 그의 정치적 이념보다 우선시했다. 그는 결코 히틀러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히틀러의 총애와 보호를 받았으며, 특히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내에서 비주류로 벼락출세한 그를 비난했던 정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벤트로프는 하수인에 불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치 정권의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1933년 5월부터 나치 친위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하인리히 히믈러와 정치적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리벤트로프에게 맞서는 자는 또한 히믈러와 맞서게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정적들도 가지게 되었다. 훗날 리벤트로프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친위대 ?신 인사들을 외교부 요직에 앉혔다. 이런 공범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히믈러는 결코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에게서 탁월한 영국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신임을 받아 런던 주재 대사로 파견된 그는 악수惡手라는 악수는 다 두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나치식 경례”로 영국 국왕 조지 6세에게 인사했고, 그런 편협한 태도로 인해 그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조차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런 리벤트로프가 생각한 것은 “영국과 동맹을 추진하지 않거나 영국에 맞서는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리벤트로프는 샴페인 상인에서 국제 정치가에 이르는 화려한 경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 그와 몰로토프 사이에 체결됨으로써 그의 과감한 시도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조약의 체결로 인해 히틀러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불안감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함 “슐레비히홀스타인” 호가 폴란드 그단스크 시의 베스테르플라테를 향해 발포함으로써, 리벤트로프의 조력자로서의 역할도 끝나게 되었다. 이제 최고 군사령관인 히틀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을 치를 장군들이었지 외교관들이 아니었다. 리벤트로프가 그의 영웅인 히틀러와 후원자인 히믈러에게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유대인 대량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는 그 대가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리벤트로프는 “패자는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자신에 대한 혐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다른 충복들처럼, 그 역시 히틀러에게 빠져들었다. 그와 히틀러를 연결하는 마력적인 고리가 없었다면 그도 존재할 수 없었다. 히틀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조력자 리벤트로프도 존재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사형 집행인: 프라이슬러
특별재판소 소장인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종전 직전에 폭격으로 사망함으로써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가 살았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법상의 테러로 전제 정치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히틀러의 사형 집행인인 그는 제3제국이 멸망을 고하기 직전에 사망했다. 법은 히틀러의 통치를 위한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는 부정한 일을 탁월하게 처리하는 데 있어 대가였다. “제3제국” 최고의 이데올로기 재판관이었던 프라이슬러는 법정에서 자신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려 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존엄성마저도 파괴하고 말았다.
그는 모든 이들이 갈망하던 “총통”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프라이슬러는 독재자 히틀러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실로 무한한 권력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뭔가 아주 특별한 일을 위해 자신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통”은 프라이슬러를 말 잘 듣는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열렬히 갈망하던 “총통”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비극”이었다.
단 한 번도 “볼셰비키”였던 적이 없는 프라이슬러는 일생 동안 “노전사들”의 불신에 시달렸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소련군에 전쟁 포로로 붙잡힌 그는 수용소 위원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을 뿐이었다. 이는 그가 “볼셰비키”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 잔혹한 재판관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프라이슬러는 자신이 히틀러의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였음을 보여 주려 했다. 1918년의 패전은 그에게 “반역”과 같은 것이었고, 이와 같은 일이 독일 역사에서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법부의 최전선에서 “민족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들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범죄자이든 반정부 인사이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반역자”일 따름이었다. 반역자, 즉 “민족공동체에 해가 되는 자”들은 근절되어야 했다.
이렇게 그는 “공포의 법관”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성급하고 소란스러웠으며, 변덕스럽고 무뚝뚝했으며, 자만심이 가득했고 건방졌으며,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미치광이 롤란트”라고 불렀다. 그를 잘 알고 있던 한 법관은 “사람들이 전깃불을 켜듯이, 프라이슬러는 자신에 내재한 광기의 스위치를 켤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후방에서 최후의 승리를 위한 전투에 나선 사형 집행인은 죽음의 칼날을 흔들어댔다. 야만적인 사법 기관이 내린 판결을 통해 살인이 자행되었다. 이미 최후의 승리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전황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방어 능력의 붕괴”라고 불렀다. 판결을 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것이 중요했다.
구제할 길 없는 이 사형 집행인은 히틀러의 최전선이 무너지는 동안에 비장한 각오로 정의에 대항하는 마지막 대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피고인들에게 고함을 질러댔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으로 욕을 퍼부어 댔다. 그는 그들을 비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파렴치한 반역자들”의 명예가 아니라 프라이슬러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 그곳에 걸린 하켄크로이츠 깃발 앞에 앉은 한 광대가 큰 소리로 욕을 퍼부으며 자신의 광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프라이슬러의 본래의 적은 피고인들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비인간적인 판결들을 통해, 그는 피할 수 없는 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지하 공습 대피소로 가는 도중에 폭탄 파편을 맞은 사형 집행인 프라이슬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프라이슬러는 특별재판소 앞 도로 위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졌다. 그가 마지막 사형 선고 판결을 내리고 그 다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해 준비하던 그날, 이 공포의 법관 자신에게 정의의 심판이 내려졌다.

죽음의 의사: 멩겔레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기억은 아이히만과는 다른 형태로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죽음의 의사는 아우슈비츠라는 금세기 희대의 범죄 현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매일같이 위반한 유일한 나치 의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그의 행동 방식, 그의 실험 대상, 나치의 야만적 행위가 종식된 이후 수수께끼같이 사라진 그의 행적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어릴 적에 멩겔레는 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유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청소년기에 그의 집안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부모는 자주 다투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야심이 많았다. 그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어 했다. 그의 목표는 연구 분야에서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 멩겔레가 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의학이었다.
처음에 그는 학문적으로 포장된 광적인 순혈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순혈주의가 선호하는 분야였던 인류학과 유전학은 나치 시대에 아리안 민족이 아닌 종족은 열등하다는 갈색 이데올로기의 기본 교의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었다. “보잘것없는 생명”에 대한 망상이 학문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은 것이다. 멩겔레는 영리한 학생이었다. 뉘른베르크 법이 의결된 1935년에 그는 “원시적 인종과 진보적 인종 간의 차이점들”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장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룬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 젊은 박사는 독일 쌍둥이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오트마 폰 페어슈어의 연구 조교가 되었다. 학문 발전을 위한 엄청난 기회가 제공된다는 권고와 함께 나치 의사인 멩겔레를 아우슈비츠로 보낸 사람은 폰 페어슈어 교수였다. 아우슈비츠가 수많은 인종, 인간, 모든 종류의 실험 대상을 다룰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연구 천국”이라며 권고한 사람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증인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곳으로 죽음의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훤칠한 키에 흰 장갑을 낀 젊은 의사가 화물 전용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세련되고 날씬한 몸매의” 그는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인처럼” 보였다. 멩겔레가 도착한 사람들을 선별할 때, 그들은 가끔 그의 입술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또한 그들은 그가 흰 장갑을 낀 채 부드럽게 박자에 맞추어 오른쪽으로 가면 살고 왼쪽으로 가면 죽는 것을 결정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장면은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수용자들은 그를 “죽음의 천사”라고 불렀다.
멩겔레는 인간 수집가였다. 그는 화물 전용 플랫폼에 내린, 죽음을 목전에 둔 무리들 가운데서 찾아낸 쌍둥이 아이들을 “나의 기니피그”라고 불렀다. 종종 그는 쌍둥이를 차에 태우고 수용소 길을 따라 달리기도 했고, 그들에게 단것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멩겔레는 아이들의 몸에서 내장을 들어내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해부용 탁자 위에 눕혔다. 이 군주적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인간 동물원의 인간들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했다. 멩겔레는 그의 “연구” 결과를 페어슈어 연구소로 보냈다. 처음에는 설문지를, 그 다음에는 혈액 검사 자료를, 조금 더 지나서는 “긴급! 전쟁 물자!”라는 문구가 표시된 포장지에 유골을 싸서 보냈다. 1944년 여름에 들어서는 연구가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멩겔레는 마취 주사로 쌍둥이를 죽였고, 살아 있는 육체에서 장기를 빼내었고, 골수를 이식했고, 쌍둥이의 등을 맞대게 하고 꿰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이는 희생자의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살인적인 사디스트는 아니었다. 단지 멩겔레는 그의 “기니피그”의 고통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없었던 차가운 냉소주의자였을 뿐이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살인자가 아닌 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학자로서 “학문에 봉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1945년 1월, 소련의 붉은군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때, 멩겔레의 실험 대상인 3,000명의 쌍둥이 중에서 180명의 쌍둥이만이 살아남았다. 도망자로 전락한 그는 그의 연구 메모들을 자기 집으로 옮겼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의 연구 기록들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농장 일꾼으로 가장해 숨어 지냈다. 1949년, 그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나중에는 파라과이로 도피했다. 노쇠한 이민자는 어떤 죄책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형벌은 그가 발각되어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발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그에 대한 형벌이었다. “때때로 나는 쌍날 기요틴에 대한 꿈을 꾼다.” 예전에 어린아이들을 난도질했던 이 강제수용소 의사는 두통과 이통, 불면증과 소화 불량을 호소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해 상파울루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34년 동안이나 그는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그것이 바로 연구 목적으로 살인을 자행했던 대량 학살자에 대한 형벌이었다.

▣ 작가 소개

저자 : 귀도 크놉
1948년 1월 29일 트라이자에서 출생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암스테르담 대학, 그리고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사학, 정치학, 신문방송학을 공부하였고, 1975년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 저널리즘학 교수가 되었다. ''벨트 암 존탁''지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를 거쳐 1978년부터 독일공영방송 ZDF에서 근무하였다. 1984년부터 ZDF의 현대사 편집국장으로 재직하였다. 1978년부터 ZDF에 근무하면서 주목받는 현대사 관련 시리즈물을 제작하였다. 지은책으로는 『전쟁의 근원』, 『독일 통일』 등 여러 권이 있으며, 우리말로 번역된 책으로는 『히틀러의 뜻대로』와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이 있다.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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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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