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다시 못 볼 기남자, 백동수
무예인이 10년간의 노력으로 완성한 한 조선 무사의 일대기.
다시 쓰는 「조선의 협객 백동수」
이 책의 초판이 2002년에 나왔으니 햇수로는 10년이 흘렀다. 10년 전에는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비롯한 귀중한 사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수정 증보판으로 내게 된 것도 「승정원일기」와 「어영청등록」「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등에서 백동수에 관한 몇 가지 귀중한 사실을 새롭게 찾아냈기 때문이다.
첫째, 1785년 봄 이율 · 홍복영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동수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선전관 신홍주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과 이인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일어난 기이한 일화를 소개했다. 백동수가 1788년에 첫 벼슬길에 나선 것으로 보았으나, 이미 3년 전인 1785년에 선전관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둘째, 지리산에 다녀 온 뒤 선전관으로 일하다 궁궐 수비를 담당하는 어영청 소속의 집춘영 초관으로 복무하다가 1789년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어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맡았으며, 이후 훈련원에서 훈련주부, 훈련판관을 거쳐 종4품의 훈련첨정으로 일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넷째, 1796년 장흥고 주부로 재직하던 중 어명을 받아 유득공, 서호수, 이서구와 함께 「무경칠서(武經七書)」 주해를 달아 편찬하는 사업에 감독으로 참여했다. 서호수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전에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는 서호수의 아우 서형수와 작업을 함께 했던 특별한 인연이 있다.
다섯째, 1802년 1월 백동수가 박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는 장용영이 혁파되기 10일 전이었다.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장용영 직할에서 이조로 소속이 바뀌게 될 정도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끝으로 백동수 말년의 일인데, 박천군수로 재직할 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아 1806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9달 동안 경상도 단성현에서 유배를 살았던 사실과 순조가 세 차례(1810, 1813, 1816)나 종3품의 군기시 부정에 제수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던 사실도 새롭게 추가했다.
큰 틀은 바꾸지 않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새롭게 발굴된 사료를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전체의 틀은 그대로 두고 작업했기에 크고 작은 문제가 여럿 있어 바로 잡았다.
무예인이 쓴 조선 무사의 일대기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전문 연구자나 집필자가 아닌 무예인이 쓴 책이다. 우리의 전통 무예를 접한 뒤 인생 행로를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잊혀진 우리 무예의 역사를 되살려놓겠다고 덤벼든 젊은 무예인의 10년 노력이 만들어낸 책이 바로 「조선의 협객 백동수」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무예도보통지」 편찬 총감독을 맡아 조선 무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백동수란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이 첫째요, 한국 무예의 역사와 조선 무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픈 욕심이 둘째다. 그리고 우리 나라 역사가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배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 작가 소개
지음 김영호
196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접한 「한국의 전통무예」라는 책 한 권 때문에 삶의 진로를 바꾸었다. 1990년 여름, ‘빗자루 도사’로 알려진 임동규 선생의 열정에 이끌려 광주로 향했다.
“천년을 이어온 민족 무예의 맥이 일제 36년의 통치로 단절된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 막노동으로 신혼살림을 꾸리며 광주에서 무예24기를 익혔다. 이듬해 겨울, 대구로 돌아온 후 주위 사람들에게 무예24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수련에 좀 더 충실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00년까지 거창과 고령에서 가야산무예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 10년 동안 수원에 살면서 세계문화유산 화성에 무예24기를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93년부터 「민족무예」라는 회보를 펴내면서, 조선 무사들의 생애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과 곧 펴낼 「전설의 검객, 김체건」(가제)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현재는 조선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를 펴낸 국사 한교를 중심으로 집필을 구상 중이다. (이메일 주소: kyh24ki@hanmail.net)
▣ 주요 목차
개정판 머리말
머리말: 누가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이야기하랴
프롤로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
제1장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
동시대 세 사람의 만남
이름난 선비들의 가르침을 받고
1767년 모월 모일, 초어정 결의
평안도와 서울 여항을 오가며
전설의 검객, 김체건을 흠모하며
검보를 익히고 검의 원리를 깨쳐나가다
협객이란 무엇인가
사도세자와 「무예신보」
제2장 젊은 무사의 자화상
야뇌 · 점재 · 인재
농사꾼과 상인에 도전하다
무과 급제 그리고 백 선달
두 벗, 박지원·이덕무와의 전국 유람
선전관에 추천되다
기린에서의 10년 잠행
산중 생활의 즐거움
“나는 뜻을 크게 세우리라”
박지원의 연암행을 권하다
결단, 다시 한양으로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하니
화보: 정조 시대 전통 무예의 재현
제3장 장수의 길이란 무엇인가
장용영 초관이 되어
장용영 장관
장용영의 군사 훈련
병서의 가르침에 충실하다
무예 이십사기를 정리하다
사라진 조선세법을 찾아서
조선세법의 가치
이십사기에 대해 토론하다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정신
조선 무예의 결정판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책을 위해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현장
제4장 다시 못 볼 기남자
이상을 실현할 무대, 비인
평생의 벗 이덕무의 죽음
화성 건설과 무장들의 전기 간행
다시 장용영으로
화성 가는 길을 호위하다
「무경칠서」를 편찬하라
벗들의 수난
정조, 서거하다
개혁파와 서얼, 그 못다 핀 꽃
아, 장용영
협객, 주창을 꿈꾼 세월
1천리 유형에 처해진 죄인
홍경래난과 박천
다시 못 볼 기남자, ‘무로써 문을 이룬?? 선비
에필로그: 야뇌의 얼굴
다시 못 볼 기남자, 백동수
무예인이 10년간의 노력으로 완성한 한 조선 무사의 일대기.
다시 쓰는 「조선의 협객 백동수」
이 책의 초판이 2002년에 나왔으니 햇수로는 10년이 흘렀다. 10년 전에는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비롯한 귀중한 사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수정 증보판으로 내게 된 것도 「승정원일기」와 「어영청등록」「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등에서 백동수에 관한 몇 가지 귀중한 사실을 새롭게 찾아냈기 때문이다.
첫째, 1785년 봄 이율 · 홍복영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동수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선전관 신홍주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과 이인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일어난 기이한 일화를 소개했다. 백동수가 1788년에 첫 벼슬길에 나선 것으로 보았으나, 이미 3년 전인 1785년에 선전관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둘째, 지리산에 다녀 온 뒤 선전관으로 일하다 궁궐 수비를 담당하는 어영청 소속의 집춘영 초관으로 복무하다가 1789년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어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맡았으며, 이후 훈련원에서 훈련주부, 훈련판관을 거쳐 종4품의 훈련첨정으로 일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넷째, 1796년 장흥고 주부로 재직하던 중 어명을 받아 유득공, 서호수, 이서구와 함께 「무경칠서(武經七書)」 주해를 달아 편찬하는 사업에 감독으로 참여했다. 서호수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전에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는 서호수의 아우 서형수와 작업을 함께 했던 특별한 인연이 있다.
다섯째, 1802년 1월 백동수가 박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는 장용영이 혁파되기 10일 전이었다.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장용영 직할에서 이조로 소속이 바뀌게 될 정도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끝으로 백동수 말년의 일인데, 박천군수로 재직할 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아 1806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9달 동안 경상도 단성현에서 유배를 살았던 사실과 순조가 세 차례(1810, 1813, 1816)나 종3품의 군기시 부정에 제수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던 사실도 새롭게 추가했다.
큰 틀은 바꾸지 않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새롭게 발굴된 사료를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전체의 틀은 그대로 두고 작업했기에 크고 작은 문제가 여럿 있어 바로 잡았다.
무예인이 쓴 조선 무사의 일대기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전문 연구자나 집필자가 아닌 무예인이 쓴 책이다. 우리의 전통 무예를 접한 뒤 인생 행로를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잊혀진 우리 무예의 역사를 되살려놓겠다고 덤벼든 젊은 무예인의 10년 노력이 만들어낸 책이 바로 「조선의 협객 백동수」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무예도보통지」 편찬 총감독을 맡아 조선 무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백동수란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이 첫째요, 한국 무예의 역사와 조선 무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픈 욕심이 둘째다. 그리고 우리 나라 역사가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배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 작가 소개
지음 김영호
196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접한 「한국의 전통무예」라는 책 한 권 때문에 삶의 진로를 바꾸었다. 1990년 여름, ‘빗자루 도사’로 알려진 임동규 선생의 열정에 이끌려 광주로 향했다.
“천년을 이어온 민족 무예의 맥이 일제 36년의 통치로 단절된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 막노동으로 신혼살림을 꾸리며 광주에서 무예24기를 익혔다. 이듬해 겨울, 대구로 돌아온 후 주위 사람들에게 무예24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수련에 좀 더 충실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00년까지 거창과 고령에서 가야산무예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 10년 동안 수원에 살면서 세계문화유산 화성에 무예24기를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93년부터 「민족무예」라는 회보를 펴내면서, 조선 무사들의 생애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과 곧 펴낼 「전설의 검객, 김체건」(가제)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현재는 조선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를 펴낸 국사 한교를 중심으로 집필을 구상 중이다. (이메일 주소: kyh24ki@hanmail.net)
▣ 주요 목차
개정판 머리말
머리말: 누가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이야기하랴
프롤로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
제1장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
동시대 세 사람의 만남
이름난 선비들의 가르침을 받고
1767년 모월 모일, 초어정 결의
평안도와 서울 여항을 오가며
전설의 검객, 김체건을 흠모하며
검보를 익히고 검의 원리를 깨쳐나가다
협객이란 무엇인가
사도세자와 「무예신보」
제2장 젊은 무사의 자화상
야뇌 · 점재 · 인재
농사꾼과 상인에 도전하다
무과 급제 그리고 백 선달
두 벗, 박지원·이덕무와의 전국 유람
선전관에 추천되다
기린에서의 10년 잠행
산중 생활의 즐거움
“나는 뜻을 크게 세우리라”
박지원의 연암행을 권하다
결단, 다시 한양으로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하니
화보: 정조 시대 전통 무예의 재현
제3장 장수의 길이란 무엇인가
장용영 초관이 되어
장용영 장관
장용영의 군사 훈련
병서의 가르침에 충실하다
무예 이십사기를 정리하다
사라진 조선세법을 찾아서
조선세법의 가치
이십사기에 대해 토론하다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정신
조선 무예의 결정판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책을 위해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현장
제4장 다시 못 볼 기남자
이상을 실현할 무대, 비인
평생의 벗 이덕무의 죽음
화성 건설과 무장들의 전기 간행
다시 장용영으로
화성 가는 길을 호위하다
「무경칠서」를 편찬하라
벗들의 수난
정조, 서거하다
개혁파와 서얼, 그 못다 핀 꽃
아, 장용영
협객, 주창을 꿈꾼 세월
1천리 유형에 처해진 죄인
홍경래난과 박천
다시 못 볼 기남자, ‘무로써 문을 이룬?? 선비
에필로그: 야뇌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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