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국현대사의 갈림길 ‘해방공간’에서
조선이 최악의 길로 접어든 것은 어느 시점이었을까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첫 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에 이어, 1945년 11월 초부터 1946년 1월 말까지 시기를 다룬 [해방일기 2 -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가 출간되었다.
한국현대사의 갈림길이었던 ‘해방공간’에서 조선이 최악의 길로 접어든 것이 어느 시점의 일이었을까? 여러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겠지만 역사학자 김기협은 가장 큰 고비가 1946년 1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단계로 본다. 맥아더ㆍ군정청 집단과 이승만의 마음속에서 분단 건국이 유일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유력한 목표로 떠오르게 된 것이 이 단계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전환기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귀국하자마자 우익의 영수가 되었다. 이승만과 박헌영이 좌우대립의 선봉장이었으며, 한반도 분단을 향한 미군정의 ‘복안’이 가시화된다.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세계적 냉전의 시작으로 보지만, 조선의 상황은 1945년 말부터 이미 냉전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내부 역량이 타고 넘기 어려운 격랑이었다. 급기야 1946년 1월 초순‘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은 격화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세밀히 복기한다. 그의 ‘해방일기’는 어떤 일이 한국인에게 닥치고 그에 대해 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비슷한 보조로 걸어가면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분단건국과 전쟁을 향한 비극의 길이 어떤 수순으로 한국인에게 주어졌는지, 그리고 한국인들은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갔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주어지는 길보다 더 좋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능력을 점점해 보려는 취지이다.
[해방일기]제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11.1 ∼ 1946.1.31) 개요
1945년 10월 이후 김일성 일파, 이승만, 임정, 독립동맹 등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귀국하여 국내 정치 상황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대, 특히 그 말기의 전쟁기에 일제의 폭압이 극렬해서 국내 민족운동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이북에서 김일성 일파와 독립동맹을 주축으로 좌파-중도파의 연합전선이 순조롭게 형성된 것은 소련군이 좌파를 후원하되 우파를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은 결과였다. 반면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극우파를 극력 옹호한 결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중도파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미 국무성의 공식적 ‘국제주의’ 노선과 대립하는 맥아더의 ‘국가주의’ 노선을 미군정이 따르는 바람에 이남의 정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이 연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앞에서 극렬한 반탁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반탁운동을 통해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었다. 양측은 상대방의 ‘배제’ 정도가 아니라 ‘절멸’을 외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중도파는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에 몰렸다. 1월 중 민족통일전선 시도가 실패하면서 임정 비주류 요인들이 우익 연합을 지향하는 비상국민회의 준비에서 이탈함으로써 ‘임정 분열’까지 일어났다.
1월 중순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함으로써 미소공위의 실패를 예고했다. 예비회담 실패의 결정적 이유는 미군정의 쌀 시장 통제 실패에 있었다. 이남 주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고 미소공위에까지 악영향을 미친 쌀 문제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노선이 가져온 해악의 전형적 사례였다.
‘신탁통치’ 사태,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다
해방공간에서 ‘좌우대립’은 어떤 구조로 전개되었을까? ‘극우파’-‘중도우파’-‘중도좌파’-‘극좌파’의 연속 스펙트럼 위에서 가까운 입장끼리 연합하고 먼 입장끼리 대립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보통 인식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이념을 기준으로 한 그런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극좌와 극우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나 중도파라는 ‘공공의 적’ 앞에서 양측은 공생관계를 맺었고, 양측은 미소 점령군의 존재를 이 공생관계의 강화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해방 후 몇 주일 동안에 형성된 ‘적대적 공생관계’가 모습을 바꿔 가며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음을 강조한다. 결국 1945년 말에 터진 ‘신탁통치’ 사태는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는 국면이었다.
중도파의 입장은 신탁통치에는 반대하되 3상회의 결정은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극우파는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면 3상��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극좌파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면 신탁통치에도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가지 입장 -‘3상회의, 신탁통치 모두 반대’, ‘3상회의 지지, 신탁통치 반대’, ‘3상회의, 신탁통치 모두 지지’- 중 중도파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극좌와 국우는 온갖 수단을 써서 중도파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극우파가 공권력과 자금력을 이용해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일으킨 데 대해 공산당이 합리적 대응 대신 ‘찬탁’의 맞불로 대응한 것은 반사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극우파의 무리한 노선에 대한 반대세력의 주도권을 공산당이 장악하겠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무리한 공산당의 대응은 극우파의 명분과 결집력을 더욱 뒷받침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반대세력 중에서 공산당의 극좌노선을 더욱 강화해주었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전형적 구조였다.”
(/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극한 대립처럼 보이는 오늘의 정치현상에도 이 적대적 공생관계의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들은 상대방 세력 전체를 ‘좌빨’ 또는 ‘수꼴’로 부르는데 소위 ‘좌빨’과 ‘수꼴’은 양쪽 세력의 일부 구성원일 뿐인데, 공생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그들이 양쪽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헤게모니 장악이 튼튼한 큰 까닭이 역사적 배경에 있다고 나는 본다. 이는 60여 년 전 해방공간에서 극좌와 극우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맺어진 이래 긴 세월을 통해 굳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한반도 분단을 향한 미군정의 ‘복안’
해방공간에서 두 극단파가 민의를 받들 생각을 하지 않고 조작 대상으로만 여긴 것은 의존할 외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과 미군이 극좌와 극우가 의지한 외세였다. 저자는 소련이나 미국 두 나라 다 군대 진주를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여 노력했지만 그 노력의 수준이 달랐다고 밝힌다. 소련군이 ‘해방군’ 역할을 통해 우호적 정권의 탄생을 유도하려 한 반면 미군은 ‘점령군’ 역할을 통해 미국에 종속된 정권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극우파가 ‘신탁통치 절대 반대’를 명분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자체를 배격하고 나선 것은 미군정 지도부의 국가주의 성향에 영합한 것으로 설명한다.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길에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 애치슨과 만난 시점부터 12월 중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릴 때까지 맥아더와 하지 측이 미국무성의 신탁통치 안에 대항한 흔적이 분명하다고 본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맥아더 노선’은 점령군으로서 미군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기간에 조선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애초 합의였던 국제주의 노선을 좌초시킬 움직임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2차대전 중 연합국 간의 협력관계를 중시하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로부터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구축하는 ‘국가주의(nationalism)''로 노선을 바꾸고 있었다. 종전 당시 미국은 나머지 세계 전체와 맞먹은 생산력을 갖고 있었고, 군사력에서도 원자폭탄이라는 절대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미국사회에는 원래 미국을 다른 어떤 나라와도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예외주의’ 풍조가 있었는데,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춤으로써 강력한 패권주의 노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신흥 패권주의에 가장 호되게 걸린 나라의 하나가 한국이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지키고 키우는 위성국가로 태어났다는 기본성격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내부 국민에 대해서도 잘못된 정책을 많이 수행했고, 그 폐해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것이 많이 있다. 지금부터의 극복을 위해서도 그 연원을 면밀하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반탁운동,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핵심은 신탁통치가 아니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신탁통치의 필요 여부 결정에 임시정부가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비록 신탁통치 여부를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임시정부가 제대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임시정부의 결정에 연합국들이 반대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브루스 커밍스 같은 미국인 연구자는 모스크바 결정이 “사실상 ‘신탁통치 결정’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라는 해석까지 내놓은 바 있다. 다시 말해 모스크바 결정은 민족주�자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조치를 담은 것이다. 하나가 임시정부 수립 촉진이고, 또 하나가 38선의 철폐였다. 저자는, 신탁통치는 당장의 일도 아니고 확정적인 것도 아닌데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스크바 결정 전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불합리한 태도였다고 본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에 대한 합리적인 입장이 ‘적대적 공생관계’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려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김구의 행보에 큰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반탁운동의 길을 열어준 것은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이 길을 앞장서서 달린 것은 김구였다. 그래서 저자는 “김구의 반탁운동”이라고 설명한다. 즉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은 이 시점 한반도의 분단을 원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며, 그렇다면 반탁운동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분단을 원하지 않던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이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반탁 정국을 살펴보며 ‘순수성의 신화’를 되새긴다. 김구의 ‘순수한 애국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당시 상황에 대한 실질적 이해를 가로막는 면이 있지 않은가에 대한 생각이다. 김구가 무리한 반탁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조직 수립 등 임시정부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전략가로서 이승만이 김구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반탁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임정과 김구는 당시 조선의 강력한 상징이었고 대수 조선인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1946년 1월 하순, 반탁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안 되어 임정 비주류가 이탈함으로써 이 기대가 무너지고 영도자로서 김구의 권위도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김구가 분단을 바라지 않은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앞장선 극한적 반탁운동이 조선을 분단의 길로 몰아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탁의 깃발을 쳐들기만 하면 민중은 말할 것 없고 경철, 군정청 직원, 친일파, 자본가들까지 모두 그 깃발 아래 모을 수 있으리라고 그가 정말로 믿었던 것일까? ”
(/ ''1946년 1월 28일자 일기'' 중에서)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슴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토지개혁)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독립의 길을 험하게 만든 반탁운동
1부 이승만, 주도권을 선점하다 1945년 11월 1~11일
1945. 11. 1. 하지의 IQ는 얼마?
1945. 11. 2. 이승만의 첫 묘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1945. 11. 3. 냉전의 길에 앞장선 맥아더와 하지
1945. 11. 4. 식민지체제의 보존을 획책한 한민당
1945. 11. 5. 극우의 눈에는 모두가 빨갱이
1945. 11. 8.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 뻥이야!
1945. 11. 9. 조병옥, “식당도 미국식으로!”
1945. 11. 10. 미군정이 가져다준 ‘언론자유’
1945. 11. 11. ‘동양척식’ 간판만 바꾼 미군정
*베트남 이야기 (1) 베트남 해방과 조선 해방의 차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투쟁보다 포용, 선명성보다 유연성을
2부 기다리고 기다린 임정의 귀국 1945년 11월 15~30일
1945. 11. 15. 공산당, 임시정부와 대결태세를 갖추다
1945. 11. 16. ‘친미 내셔널리스트’의 탄생
1945. 11. 18. 토지개혁 과제가 절실했던 이유
1945. 11. 19. 임정을 갖고 놀려는 이승만
1945. 11. 22. 일본 군국주의 뒤를 이은 미국 군국주의
1945. 11. 23. 임시정부의 환국, 격리된 하룻밤
1945. 11. 24. 김구 선생님, 친일파 처단을 늦춰도 된다고요?
1945. 11. 25. 인민공화국, 어찌하오리까?
1945. 11. 26. 김구가 국내에 있었다면 ‘사회주의 우파’였을 텐데
1945. 11. 30. 한반도 분단을 향한 미군정의 ‘복안’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적대적 공생관계’는 시작되었다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5년 11월
3부 좌우대립의 선봉장 이승만과 박헌영 1945년 12월 1~10일
1945. 12. 1. ‘인민공화국’, 왜 그 이름에 집착했나?
1945. 12. 2. 잔치 이튿날 집에 돌아온 임정 제2진
1945. 12. 3. 4천7백리 길을 걸어 귀국한 ‘독립동맹’
1945. 12. 6. 들통나 버린 이승만의 ‘들러리 수법’
1945. 12. 7. 송진우, 뭘 믿고 임정 앞에서 큰소리를?
1945. 12. 8. 미군보다 훨씬 얌전했던 소련군
1945. 12. 9. 부도덕한 자들의 ‘물귀신 작전’
1945. 12. 10. ‘공산당’이라고 다 똑같은 공산당이 아니었다
*베트남 이야기 (2) 공산주의 발달에 유리했던 베트남의 조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친일’과 ‘협력’의 경계선은 어디?
4부 파국을 향해 떠내려가는 조선 1945년 12월 14~31일
1945. 12. 14. 독립동맹의 정치노선
1945. 12. 15. 이승만이 조급했던 이유
1945. 12. 16. 돈이 주먹을 불러오다
1945. 12. 17. 누가 돈벼락을 맞았을까?
1945. 12. 20. 매카시의 선구자 이승만
1945. 12. 21. 김구는 이승만을 ‘절대 신임’하였을까?
1945. 12. 22. 이승만이 ‘극우’를 택한 이유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민족주의의 ‘임정’, 민주주의의 ‘인공’
1945. 12. 24. 핀란드의 독립과 명예, 누가 지켰나?
1945. 12. 27. 속이는 이승만, 속는 김구
1945. 12. 28. 임정, ‘반탁’에 말려들기 시작하다
1945. 12. 29. ‘반탁’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
1945. 12. 30. 송진우의 암살, 배후는?
1945. 12. 31. 임정을 나무 위에 올려놓은 이승만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12월
5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격화 1946년 1월 3~13일
1946. 1. 3. 임정, “합작은 필요 없다. 나의 길을 가겠다”
1946. 1. 4. 반탁운동, 누가 ‘기획’한 것인가?
1946. 1. 5. [임꺽정] 저자 홍명희가 화를 낸 까닭
1945. 1. 6. 김계조와 박흥식의 ‘돈벼락’
1946. 1. 7. 건전한 단체를 좌익으로 몰아가는 미군정
1946. 1. 10. 중도파를 왜 좌익으로 몰아붙이나?
1945. 1. 11. 신탁통치 문제, 효과적 대응책이 있었다
1945. 1. 12. 청년단체들은 어떻게 좌우로 갈라졌나?
1946. 1. 13. 반탁운동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베트남 이야기 (3) 조선의 독립은 베트남보다 쉬운 과제였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미군정이 격화시킨 남한의 ‘반탁’ 감정
6부 쪼개진 임정, 굳어진 좌우대립 1946년 1월 17~31일
1945. 1. 17. 미소공동위원회의 개막
1946. 1. 18. 대한민국 폭력경찰의 뿌리 장택상
1945. 1. 19. 좌익의 약점이 된 박헌영
1946. 1. 20. 스탈린까지 항의에 나선 동아일보 조작기사
1946. 1. 21.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경계
1946. 1. 24. 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리는 임정
1946. 1. 26. 미국의 굴욕, 하지의 곤경
1946. 1. 27. 장택상 경찰부장의 면피 두께는?
1946. 1. 28. 무너진 임정, 체면 잃은 김구
1946. 1. 31. 일본 순사보다 더 난폭한 미군 MP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비상국민회의는 통일전선의 포기인가?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6년 1월
한국현대사의 갈림길 ‘해방공간’에서
조선이 최악의 길로 접어든 것은 어느 시점이었을까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첫 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에 이어, 1945년 11월 초부터 1946년 1월 말까지 시기를 다룬 [해방일기 2 -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가 출간되었다.
한국현대사의 갈림길이었던 ‘해방공간’에서 조선이 최악의 길로 접어든 것이 어느 시점의 일이었을까? 여러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겠지만 역사학자 김기협은 가장 큰 고비가 1946년 1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단계로 본다. 맥아더ㆍ군정청 집단과 이승만의 마음속에서 분단 건국이 유일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유력한 목표로 떠오르게 된 것이 이 단계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전환기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귀국하자마자 우익의 영수가 되었다. 이승만과 박헌영이 좌우대립의 선봉장이었으며, 한반도 분단을 향한 미군정의 ‘복안’이 가시화된다.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를 세계적 냉전의 시작으로 보지만, 조선의 상황은 1945년 말부터 이미 냉전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향한 조선인의 내부 역량이 타고 넘기 어려운 격랑이었다. 급기야 1946년 1월 초순‘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은 격화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세밀히 복기한다. 그의 ‘해방일기’는 어떤 일이 한국인에게 닥치고 그에 대해 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비슷한 보조로 걸어가면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분단건국과 전쟁을 향한 비극의 길이 어떤 수순으로 한국인에게 주어졌는지, 그리고 한국인들은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갔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주어지는 길보다 더 좋은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능력을 점점해 보려는 취지이다.
[해방일기]제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11.1 ∼ 1946.1.31) 개요
1945년 10월 이후 김일성 일파, 이승만, 임정, 독립동맹 등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귀국하여 국내 정치 상황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대, 특히 그 말기의 전쟁기에 일제의 폭압이 극렬해서 국내 민족운동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이북에서 김일성 일파와 독립동맹을 주축으로 좌파-중도파의 연합전선이 순조롭게 형성된 것은 소련군이 좌파를 후원하되 우파를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은 결과였다. 반면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극우파를 극력 옹호한 결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중도파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미 국무성의 공식적 ‘국제주의’ 노선과 대립하는 맥아더의 ‘국가주의’ 노선을 미군정이 따르는 바람에 이남의 정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이 연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앞에서 극렬한 반탁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반탁운동을 통해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었다. 양측은 상대방의 ‘배제’ 정도가 아니라 ‘절멸’을 외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중도파는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에 몰렸다. 1월 중 민족통일전선 시도가 실패하면서 임정 비주류 요인들이 우익 연합을 지향하는 비상국민회의 준비에서 이탈함으로써 ‘임정 분열’까지 일어났다.
1월 중순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함으로써 미소공위의 실패를 예고했다. 예비회담 실패의 결정적 이유는 미군정의 쌀 시장 통제 실패에 있었다. 이남 주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고 미소공위에까지 악영향을 미친 쌀 문제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노선이 가져온 해악의 전형적 사례였다.
‘신탁통치’ 사태,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다
해방공간에서 ‘좌우대립’은 어떤 구조로 전개되었을까? ‘극우파’-‘중도우파’-‘중도좌파’-‘극좌파’의 연속 스펙트럼 위에서 가까운 입장끼리 연합하고 먼 입장끼리 대립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보통 인식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이념을 기준으로 한 그런 관점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극좌와 극우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나 중도파라는 ‘공공의 적’ 앞에서 양측은 공생관계를 맺었고, 양측은 미소 점령군의 존재를 이 공생관계의 강화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해방 후 몇 주일 동안에 형성된 ‘적대적 공생관계’가 모습을 바꿔 가며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음을 강조한다. 결국 1945년 말에 터진 ‘신탁통치’ 사태는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는 국면이었다.
중도파의 입장은 신탁통치에는 반대하되 3상회의 결정은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극우파는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면 3상��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극좌파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면 신탁통치에도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가지 입장 -‘3상회의, 신탁통치 모두 반대’, ‘3상회의 지지, 신탁통치 반대’, ‘3상회의, 신탁통치 모두 지지’- 중 중도파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극좌와 국우는 온갖 수단을 써서 중도파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극우파가 공권력과 자금력을 이용해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일으킨 데 대해 공산당이 합리적 대응 대신 ‘찬탁’의 맞불로 대응한 것은 반사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극우파의 무리한 노선에 대한 반대세력의 주도권을 공산당이 장악하겠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무리한 공산당의 대응은 극우파의 명분과 결집력을 더욱 뒷받침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반대세력 중에서 공산당의 극좌노선을 더욱 강화해주었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전형적 구조였다.”
(/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극한 대립처럼 보이는 오늘의 정치현상에도 이 적대적 공생관계의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들은 상대방 세력 전체를 ‘좌빨’ 또는 ‘수꼴’로 부르는데 소위 ‘좌빨’과 ‘수꼴’은 양쪽 세력의 일부 구성원일 뿐인데, 공생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그들이 양쪽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헤게모니 장악이 튼튼한 큰 까닭이 역사적 배경에 있다고 나는 본다. 이는 60여 년 전 해방공간에서 극좌와 극우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맺어진 이래 긴 세월을 통해 굳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한반도 분단을 향한 미군정의 ‘복안’
해방공간에서 두 극단파가 민의를 받들 생각을 하지 않고 조작 대상으로만 여긴 것은 의존할 외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과 미군이 극좌와 극우가 의지한 외세였다. 저자는 소련이나 미국 두 나라 다 군대 진주를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여 노력했지만 그 노력의 수준이 달랐다고 밝힌다. 소련군이 ‘해방군’ 역할을 통해 우호적 정권의 탄생을 유도하려 한 반면 미군은 ‘점령군’ 역할을 통해 미국에 종속된 정권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극우파가 ‘신탁통치 절대 반대’를 명분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자체를 배격하고 나선 것은 미군정 지도부의 국가주의 성향에 영합한 것으로 설명한다.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길에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 애치슨과 만난 시점부터 12월 중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릴 때까지 맥아더와 하지 측이 미국무성의 신탁통치 안에 대항한 흔적이 분명하다고 본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맥아더 노선’은 점령군으로서 미군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기간에 조선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애초 합의였던 국제주의 노선을 좌초시킬 움직임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2차대전 중 연합국 간의 협력관계를 중시하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로부터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구축하는 ‘국가주의(nationalism)''로 노선을 바꾸고 있었다. 종전 당시 미국은 나머지 세계 전체와 맞먹은 생산력을 갖고 있었고, 군사력에서도 원자폭탄이라는 절대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미국사회에는 원래 미국을 다른 어떤 나라와도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예외주의’ 풍조가 있었는데,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춤으로써 강력한 패권주의 노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미국의 신흥 패권주의에 가장 호되게 걸린 나라의 하나가 한국이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지키고 키우는 위성국가로 태어났다는 기본성격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내부 국민에 대해서도 잘못된 정책을 많이 수행했고, 그 폐해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것이 많이 있다. 지금부터의 극복을 위해서도 그 연원을 면밀하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반탁운동,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핵심은 신탁통치가 아니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신탁통치의 필요 여부 결정에 임시정부가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비록 신탁통치 여부를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임시정부가 제대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임시정부의 결정에 연합국들이 반대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브루스 커밍스 같은 미국인 연구자는 모스크바 결정이 “사실상 ‘신탁통치 결정’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라는 해석까지 내놓은 바 있다. 다시 말해 모스크바 결정은 민족주�자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조치를 담은 것이다. 하나가 임시정부 수립 촉진이고, 또 하나가 38선의 철폐였다. 저자는, 신탁통치는 당장의 일도 아니고 확정적인 것도 아닌데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스크바 결정 전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불합리한 태도였다고 본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에 대한 합리적인 입장이 ‘적대적 공생관계’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려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김구의 행보에 큰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반탁운동의 길을 열어준 것은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이 길을 앞장서서 달린 것은 김구였다. 그래서 저자는 “김구의 반탁운동”이라고 설명한다. 즉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은 이 시점 한반도의 분단을 원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며, 그렇다면 반탁운동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분단을 원하지 않던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이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반탁 정국을 살펴보며 ‘순수성의 신화’를 되새긴다. 김구의 ‘순수한 애국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당시 상황에 대한 실질적 이해를 가로막는 면이 있지 않은가에 대한 생각이다. 김구가 무리한 반탁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조직 수립 등 임시정부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전략가로서 이승만이 김구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반탁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임정과 김구는 당시 조선의 강력한 상징이었고 대수 조선인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1946년 1월 하순, 반탁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안 되어 임정 비주류가 이탈함으로써 이 기대가 무너지고 영도자로서 김구의 권위도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김구가 분단을 바라지 않은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앞장선 극한적 반탁운동이 조선을 분단의 길로 몰아넣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탁의 깃발을 쳐들기만 하면 민중은 말할 것 없고 경철, 군정청 직원, 친일파, 자본가들까지 모두 그 깃발 아래 모을 수 있으리라고 그가 정말로 믿었던 것일까? ”
(/ ''1946년 1월 28일자 일기'' 중에서)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슴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토지개혁)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독립의 길을 험하게 만든 반탁운동
1부 이승만, 주도권을 선점하다 1945년 11월 1~11일
1945. 11. 1. 하지의 IQ는 얼마?
1945. 11. 2. 이승만의 첫 묘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1945. 11. 3. 냉전의 길에 앞장선 맥아더와 하지
1945. 11. 4. 식민지체제의 보존을 획책한 한민당
1945. 11. 5. 극우의 눈에는 모두가 빨갱이
1945. 11. 8.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 뻥이야!
1945. 11. 9. 조병옥, “식당도 미국식으로!”
1945. 11. 10. 미군정이 가져다준 ‘언론자유’
1945. 11. 11. ‘동양척식’ 간판만 바꾼 미군정
*베트남 이야기 (1) 베트남 해방과 조선 해방의 차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투쟁보다 포용, 선명성보다 유연성을
2부 기다리고 기다린 임정의 귀국 1945년 11월 15~30일
1945. 11. 15. 공산당, 임시정부와 대결태세를 갖추다
1945. 11. 16. ‘친미 내셔널리스트’의 탄생
1945. 11. 18. 토지개혁 과제가 절실했던 이유
1945. 11. 19. 임정을 갖고 놀려는 이승만
1945. 11. 22. 일본 군국주의 뒤를 이은 미국 군국주의
1945. 11. 23. 임시정부의 환국, 격리된 하룻밤
1945. 11. 24. 김구 선생님, 친일파 처단을 늦춰도 된다고요?
1945. 11. 25. 인민공화국, 어찌하오리까?
1945. 11. 26. 김구가 국내에 있었다면 ‘사회주의 우파’였을 텐데
1945. 11. 30. 한반도 분단을 향한 미군정의 ‘복안’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적대적 공생관계’는 시작되었다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5년 11월
3부 좌우대립의 선봉장 이승만과 박헌영 1945년 12월 1~10일
1945. 12. 1. ‘인민공화국’, 왜 그 이름에 집착했나?
1945. 12. 2. 잔치 이튿날 집에 돌아온 임정 제2진
1945. 12. 3. 4천7백리 길을 걸어 귀국한 ‘독립동맹’
1945. 12. 6. 들통나 버린 이승만의 ‘들러리 수법’
1945. 12. 7. 송진우, 뭘 믿고 임정 앞에서 큰소리를?
1945. 12. 8. 미군보다 훨씬 얌전했던 소련군
1945. 12. 9. 부도덕한 자들의 ‘물귀신 작전’
1945. 12. 10. ‘공산당’이라고 다 똑같은 공산당이 아니었다
*베트남 이야기 (2) 공산주의 발달에 유리했던 베트남의 조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친일’과 ‘협력’의 경계선은 어디?
4부 파국을 향해 떠내려가는 조선 1945년 12월 14~31일
1945. 12. 14. 독립동맹의 정치노선
1945. 12. 15. 이승만이 조급했던 이유
1945. 12. 16. 돈이 주먹을 불러오다
1945. 12. 17. 누가 돈벼락을 맞았을까?
1945. 12. 20. 매카시의 선구자 이승만
1945. 12. 21. 김구는 이승만을 ‘절대 신임’하였을까?
1945. 12. 22. 이승만이 ‘극우’를 택한 이유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민족주의의 ‘임정’, 민주주의의 ‘인공’
1945. 12. 24. 핀란드의 독립과 명예, 누가 지켰나?
1945. 12. 27. 속이는 이승만, 속는 김구
1945. 12. 28. 임정, ‘반탁’에 말려들기 시작하다
1945. 12. 29. ‘반탁’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
1945. 12. 30. 송진우의 암살, 배후는?
1945. 12. 31. 임정을 나무 위에 올려놓은 이승만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12월
5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격화 1946년 1월 3~13일
1946. 1. 3. 임정, “합작은 필요 없다. 나의 길을 가겠다”
1946. 1. 4. 반탁운동, 누가 ‘기획’한 것인가?
1946. 1. 5. [임꺽정] 저자 홍명희가 화를 낸 까닭
1945. 1. 6. 김계조와 박흥식의 ‘돈벼락’
1946. 1. 7. 건전한 단체를 좌익으로 몰아가는 미군정
1946. 1. 10. 중도파를 왜 좌익으로 몰아붙이나?
1945. 1. 11. 신탁통치 문제, 효과적 대응책이 있었다
1945. 1. 12. 청년단체들은 어떻게 좌우로 갈라졌나?
1946. 1. 13. 반탁운동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베트남 이야기 (3) 조선의 독립은 베트남보다 쉬운 과제였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미군정이 격화시킨 남한의 ‘반탁’ 감정
6부 쪼개진 임정, 굳어진 좌우대립 1946년 1월 17~31일
1945. 1. 17. 미소공동위원회의 개막
1946. 1. 18. 대한민국 폭력경찰의 뿌리 장택상
1945. 1. 19. 좌익의 약점이 된 박헌영
1946. 1. 20. 스탈린까지 항의에 나선 동아일보 조작기사
1946. 1. 21.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경계
1946. 1. 24. 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리는 임정
1946. 1. 26. 미국의 굴욕, 하지의 곤경
1946. 1. 27. 장택상 경찰부장의 면피 두께는?
1946. 1. 28. 무너진 임정, 체면 잃은 김구
1946. 1. 31. 일본 순사보다 더 난폭한 미군 MP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비상국민회의는 통일전선의 포기인가?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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