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권 차원에서 맺은 ‘비밀약속’이 있다?
생존하는 한일외교사의 주역들을 인터뷰해 엮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
전후 한일관계사를 독도 영유권분쟁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
이 책은 과거사를 검증한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 중인 첨예한 사안에 대한 기록이다.
- 일본 마이니치신문(2009년 제21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 선정도서)
취재와 조사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해방 후 한일외교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독도밀약’이라는 특종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한일관계의 이면을 살펴볼 수 있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책이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권 차원에서 맺은 ‘비밀약속’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조약에서 독도·다케시마의 영유권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 영유권은 한일 양국 정부가 각자 주장해도 좋고, 그 주장에 대해 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현상(status quo)은 일본이 인정하되, 한국은 더 이상 시설의 증축, 병력 파견 등 현상을 깨는 행위(status quo ante)를 하지 않는다. 장래 어업구역을 설정할 때, 한일 양국은 독도·다케시마 지역을 각각 배타적 수역에 포함시키고 중복된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이 합의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간다.”
- 독도밀약의 내용
놀랍게도 1965년에 체결된 한일국교정상화조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일단 “선반에 얹어놓기로 한(棚上げ)” 비밀의 협정(取り決め)이 있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1965년 1월,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 고노 이치로(河野一郞)가 자필로 쓴 메모를 그의 비서 출신 중의원 의원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나중에 총리)가 들고 와 성북동에 있던 범양그룹 회장의 자택 홈바에서 당시의 국무총리 정일권에게 읽어주었고, 그 자리에는 김종락(김종필의 친형), 문덕주(나중에 외무차관), 그리고 시마모토(당시 ≪요미우리신문≫ 특파원)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된다.
독도 문제, 어업권 문제 등 엄청난 사안들을 다루는 비밀협상을 벌인 장소가 왜 재벌그룹 회장의 홈바였을까? 1961년의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게 된 박정희는 취약한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조국의 근대화’로 실력을 보이는 길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러서 일본의 자금을 들여와, 이미 선포해놓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박정희는 국교정상화라는 외교적 거사를 처리하는 데에 두 개의 채널을 동원했다. 하나는 외무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들로 구성된 공식채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혁명동지들’, 특히 자신의 조카사위이며 심복인 김종필과 그의 육사 동기생들로 구성되는 비공식채널이었다.
그들은 왜 독도밀약을 맺었나?
이 책은 과거사를 검증한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 중인 첨예한 사안에 대한 기록이다.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이 이는 영유권이라는 엄중한 사안에 대한 정치세력 간의 밀약을 다룬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밀약을 맺었으며, 그 밀약의 내용이 적힌 서류자료는 어디에 있을까?
한일국교정상화조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상황에서 밀약은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빠르게 굴러가는, 그리고 멈출 수도 없는 역사의 마차 위에 올라탄 당시 한일의 권력자들은 이 중대한 사안을 어설프게 자신들의 손으로 결정하느니 차라리 다음 세대의 지혜와 영단에 맡기자고 생각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에서도 남중국해의 섬들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를 ‘미해결의 해결’로 처리한 바 있다.
그러나 밀약이 적힌 서류자료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당시 한국 측 관련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종락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태워버렸다고 했다. 전두환 장군을 대표로 하는 신군부가 구세대를 숙청하기 시작할 때, 박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자료를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과 혁명주체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한다. 한편, 그 문서를 작성한 고노 이치로는 1965년 국교정상화가 된 직후 병사했다.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으로 볼 때 고노의 후손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자는 ‘독도밀약’이라는 존재를 ‘몇 쪽의 서류’가 아니라, 관련된 다양한 문건으로 시야를 넓혀 본다면 조각조각이 한국과 일본에 산재해 있을 것이라며 그 예를 들고 있다.
일본이 독도? 다케시마라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뜨거운 민족애와 영토주의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애국심은 인류의 미덕으로 칭송되는 하나의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관적인 판단, 냉정한 사실파악의 결여, 치밀한 외교전략의 준비 부족 상태에서 여과 없이 표출된 대표적인 예가 최남선의 조언, 그리고 이를 외교정책에 반영한 당시의 한국 정부가 아닌가 한다. 더구나 이러한 행동이 일부 인사들의 무책임한 낭만주의나 영웅심과 결합할 때, 그 후손은 큰 대가와 희생을 치를 수도 있다.”
일본인들은 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그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가? 한국 못지않게 교육수준이 높으며 국제사회에서 경제 대국이라고 인정받는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를 정리하는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하는 영토에서 독도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해 9월 8일, 이 조약이 조인되기 한 달 전에 당시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였던 딘 러스크(Dean Rusk)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는 서신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그가 독도는 한국에 영유권이 있다는 판단을 포기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중에서 하나가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역사학자 육당 최남선이 한일회담에 임하는 한국 대표들에게 경솔하고 부적절한 조언을 한 것이었다. 1948년 한국에 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역임한 유진오가 한일회담의 대표단에 들어가게 되어, 영유권 협상을 앞두고 당시의 권위 있는 사학자 최남선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최남선은 “목포, 나가사키, 상해를 잇는 삼각형의 가운데쯤에 파랑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영유권도 독도영유권과 함께 주장해두라”고 조언했다. 이제 갓 근대정부를 수립한 당시의 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힘이 달리고 준비가 부족했다. 연구태세를 비롯한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진오는 이 주장을 연합국 측, 즉 미국에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 파랑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당시 이미 체계적으로 외교를 전개하던 일본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던 영유권 외교전에서 한국의 주장이 일본의 주장에 비해 진정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인식되고 만 것이다.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판, 독도밀약!
독도밀약의 내용은 한국인들의 인식이나 정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화성(引火性)이 강한 사안이다. 이 책의 저자 노 다니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국에서 독도영유권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다는 것은 ‘괘씸죄’에 해당할 수 있는 일이니 공연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하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이승만 정권이 선포한 ‘평화선(平和線)’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사실상 철회되고 그 대신 독도밀약이 성립되는 과정은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판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한국의 독도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반론이 발을 붙일 수 있는 공식적인 발판이 되었던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시작해 한일국교정상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독도영유권을 논할 때 비로소 독도밀약의 배경과 맥락이 설명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중략) 나는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해외에서 성인기 대부분을 보낸 중년의 지식인으로서 한국에 선진적인 민주사회가 정착한 데 감격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형식적으로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왕성하면서도 실질적인 면에서는 ‘사회적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동조하는 풍토가 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이 풍토는 한국 사회를 아직도 구속하고 있는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괘씸한 생각’은 허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위험한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전후 한일관계사를 독도 영유권분쟁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
1951년부터 시작해 1965년 1월의 독도밀약에 이어 6월의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이르는 시기는 실로 총과 칼이 아니라 말과 머리로 싸운 ‘역사전쟁’의 기간이었다. 14년의 기간에 7차에 이르는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에서는 내각이 여섯 번 바뀌었고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장면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으로 바뀌는 역사의 대전환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승만 정권이 선포한 ‘평화선(平和線)’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사실상 철회되고 그 대신 독도밀약이 성립되는 과정은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판이라고 말한다.
소시샤에서 “다케시마밀약(竹島密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주관한 2009년 제21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에 �d정되었다. 이 책이 일본에서 권위 있는 학술상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후 한일관계사를 영유권분쟁이라는 시각을 통해 재해석했으며, 최초로 공개되는 많은 이야기를 포함해 사실관계를 객관적·중립적으로 기술했다는 데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서평을 쓴 일본 학자는 이 책이 “이승만 정권 시대로부터의 일한외교 교섭을 극도로 냉정한 필치로 묘사”했다고 평했다.
예상 독자층
한일관계 연구자 및 독도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
▣ 작가 소개
저자 : 노 다니엘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MIT에서 정치경제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의 펠로우로 일본의 자본주의에 관해 연구한 후 홍콩과기대학 조교수, 중국인민은행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아시아 정치경제의 실무에 대한 관심으로 학계를 떠나 미국과 일본의 정부기업 관계 컨설팅회사와 싱크탱크에서 일했다. 2006년부터 ≪월간중앙≫의 객원편집위원으로 글을 써 왔으며 저서로 『우경화하는 신의 나라』(2006), 『아라비아 경제금융지도』(2009)와 역서로 『대마불사』(2010) 등이 있다.
역자 : 김철훈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50기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 문화부, 국제부 기자 등을 거쳐 1996~1997년 일본 게이오대학 방문연구원과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2000~2001년 한국일보 자회사 한국아이닷컴 이사로 근무했으며, 다시 편집국에 복귀해 사회부, 국제부, 데스크 등으로 일하다 2005~2008년 도쿄 특파원으로 두 번째 부임했다. 특파원 임기를 마친 후 한국일보를 퇴사, 1년간 뉴시스 통신사 부국장 겸 사회부장으로 활동했다.
▣ 주요 목차
프롤로그 ‘미해결의 해결’은 왜 성립되었나
1. 밀약 위에 구축된 한일관계
2. 덩샤오핑보다 30년 이상 앞서다
3. 국교정상화까지 치열한 협상과정을 추적하다
제1장 암중모색의 시대
1. 영토를 둘러싼 분쟁의 기원
2. ‘이승만 라인’의 설정과 한일단교
3. 대담한 유화카드를 선택한 기시 노부스케
4. 한일의 두 지도자, 하야하다
제2장 숙부와 조카사위의 대일외교
1. 친일정권의 탄생
2. 한일회담, 움직이기 시작하다
3. 오노 반보쿠와 한일 로비 라인
4. 청구권 자금을 둘러싼 공방
5. 이승만 라인, 사라지다
제3장 새로운 한일 로비
1. 오노 반보쿠-김종필 라인의 소멸
2. ‘돌격내각’의 탄생
3. 정일권-고노 라인에서 움직인 사람들
제4장 독도밀약
1. 고노 이치로, 본격적으로 움직이다
2. 어업 문제를 정리하다
3. 독도밀약의 성립
4. 밀약의 형태를 만들다
5. 밀약의 ‘정치학’
제5장 두 개의 상실
1. 문서의 상실
2. 정신의 상실
에필로그 시험되는 예지
1. 나니와부시 정치의 시대
2. 나니와부시 문화의 종언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권 차원에서 맺은 ‘비밀약속’이 있다?
생존하는 한일외교사의 주역들을 인터뷰해 엮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
전후 한일관계사를 독도 영유권분쟁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
이 책은 과거사를 검증한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 중인 첨예한 사안에 대한 기록이다.
- 일본 마이니치신문(2009년 제21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 선정도서)
취재와 조사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해방 후 한일외교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독도밀약’이라는 특종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한일관계의 이면을 살펴볼 수 있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책이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권 차원에서 맺은 ‘비밀약속’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조약에서 독도·다케시마의 영유권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 영유권은 한일 양국 정부가 각자 주장해도 좋고, 그 주장에 대해 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현상(status quo)은 일본이 인정하되, 한국은 더 이상 시설의 증축, 병력 파견 등 현상을 깨는 행위(status quo ante)를 하지 않는다. 장래 어업구역을 설정할 때, 한일 양국은 독도·다케시마 지역을 각각 배타적 수역에 포함시키고 중복된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이 합의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간다.”
- 독도밀약의 내용
놀랍게도 1965년에 체결된 한일국교정상화조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일단 “선반에 얹어놓기로 한(棚上げ)” 비밀의 협정(取り決め)이 있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1965년 1월,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 고노 이치로(河野一郞)가 자필로 쓴 메모를 그의 비서 출신 중의원 의원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나중에 총리)가 들고 와 성북동에 있던 범양그룹 회장의 자택 홈바에서 당시의 국무총리 정일권에게 읽어주었고, 그 자리에는 김종락(김종필의 친형), 문덕주(나중에 외무차관), 그리고 시마모토(당시 ≪요미우리신문≫ 특파원)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된다.
독도 문제, 어업권 문제 등 엄청난 사안들을 다루는 비밀협상을 벌인 장소가 왜 재벌그룹 회장의 홈바였을까? 1961년의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게 된 박정희는 취약한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조국의 근대화’로 실력을 보이는 길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러서 일본의 자금을 들여와, 이미 선포해놓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박정희는 국교정상화라는 외교적 거사를 처리하는 데에 두 개의 채널을 동원했다. 하나는 외무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들로 구성된 공식채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혁명동지들’, 특히 자신의 조카사위이며 심복인 김종필과 그의 육사 동기생들로 구성되는 비공식채널이었다.
그들은 왜 독도밀약을 맺었나?
이 책은 과거사를 검증한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 중인 첨예한 사안에 대한 기록이다.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이 이는 영유권이라는 엄중한 사안에 대한 정치세력 간의 밀약을 다룬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밀약을 맺었으며, 그 밀약의 내용이 적힌 서류자료는 어디에 있을까?
한일국교정상화조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상황에서 밀약은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빠르게 굴러가는, 그리고 멈출 수도 없는 역사의 마차 위에 올라탄 당시 한일의 권력자들은 이 중대한 사안을 어설프게 자신들의 손으로 결정하느니 차라리 다음 세대의 지혜와 영단에 맡기자고 생각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에서도 남중국해의 섬들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를 ‘미해결의 해결’로 처리한 바 있다.
그러나 밀약이 적힌 서류자료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당시 한국 측 관련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종락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태워버렸다고 했다. 전두환 장군을 대표로 하는 신군부가 구세대를 숙청하기 시작할 때, 박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관련 자료를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과 혁명주체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한다. 한편, 그 문서를 작성한 고노 이치로는 1965년 국교정상화가 된 직후 병사했다.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으로 볼 때 고노의 후손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자는 ‘독도밀약’이라는 존재를 ‘몇 쪽의 서류’가 아니라, 관련된 다양한 문건으로 시야를 넓혀 본다면 조각조각이 한국과 일본에 산재해 있을 것이라며 그 예를 들고 있다.
일본이 독도? 다케시마라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뜨거운 민족애와 영토주의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애국심은 인류의 미덕으로 칭송되는 하나의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관적인 판단, 냉정한 사실파악의 결여, 치밀한 외교전략의 준비 부족 상태에서 여과 없이 표출된 대표적인 예가 최남선의 조언, 그리고 이를 외교정책에 반영한 당시의 한국 정부가 아닌가 한다. 더구나 이러한 행동이 일부 인사들의 무책임한 낭만주의나 영웅심과 결합할 때, 그 후손은 큰 대가와 희생을 치를 수도 있다.”
일본인들은 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그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가? 한국 못지않게 교육수준이 높으며 국제사회에서 경제 대국이라고 인정받는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를 정리하는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하는 영토에서 독도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해 9월 8일, 이 조약이 조인되기 한 달 전에 당시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였던 딘 러스크(Dean Rusk)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는 서신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그가 독도는 한국에 영유권이 있다는 판단을 포기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중에서 하나가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역사학자 육당 최남선이 한일회담에 임하는 한국 대표들에게 경솔하고 부적절한 조언을 한 것이었다. 1948년 한국에 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역임한 유진오가 한일회담의 대표단에 들어가게 되어, 영유권 협상을 앞두고 당시의 권위 있는 사학자 최남선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최남선은 “목포, 나가사키, 상해를 잇는 삼각형의 가운데쯤에 파랑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영유권도 독도영유권과 함께 주장해두라”고 조언했다. 이제 갓 근대정부를 수립한 당시의 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힘이 달리고 준비가 부족했다. 연구태세를 비롯한 모든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진오는 이 주장을 연합국 측, 즉 미국에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 파랑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당시 이미 체계적으로 외교를 전개하던 일본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던 영유권 외교전에서 한국의 주장이 일본의 주장에 비해 진정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인식되고 만 것이다.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판, 독도밀약!
독도밀약의 내용은 한국인들의 인식이나 정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화성(引火性)이 강한 사안이다. 이 책의 저자 노 다니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국에서 독도영유권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다는 것은 ‘괘씸죄’에 해당할 수 있는 일이니 공연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하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이승만 정권이 선포한 ‘평화선(平和線)’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사실상 철회되고 그 대신 독도밀약이 성립되는 과정은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판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한국의 독도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반론이 발을 붙일 수 있는 공식적인 발판이 되었던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시작해 한일국교정상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독도영유권을 논할 때 비로소 독도밀약의 배경과 맥락이 설명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중략) 나는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해외에서 성인기 대부분을 보낸 중년의 지식인으로서 한국에 선진적인 민주사회가 정착한 데 감격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형식적으로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왕성하면서도 실질적인 면에서는 ‘사회적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동조하는 풍토가 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이 풍토는 한국 사회를 아직도 구속하고 있는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괘씸한 생각’은 허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위험한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전후 한일관계사를 독도 영유권분쟁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
1951년부터 시작해 1965년 1월의 독도밀약에 이어 6월의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이르는 시기는 실로 총과 칼이 아니라 말과 머리로 싸운 ‘역사전쟁’의 기간이었다. 14년의 기간에 7차에 이르는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에서는 내각이 여섯 번 바뀌었고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장면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으로 바뀌는 역사의 대전환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승만 정권이 선포한 ‘평화선(平和線)’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사실상 철회되고 그 대신 독도밀약이 성립되는 과정은 전후 한일관계사의 요약판이라고 말한다.
소시샤에서 “다케시마밀약(竹島密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주관한 2009년 제21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에 �d정되었다. 이 책이 일본에서 권위 있는 학술상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후 한일관계사를 영유권분쟁이라는 시각을 통해 재해석했으며, 최초로 공개되는 많은 이야기를 포함해 사실관계를 객관적·중립적으로 기술했다는 데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서평을 쓴 일본 학자는 이 책이 “이승만 정권 시대로부터의 일한외교 교섭을 극도로 냉정한 필치로 묘사”했다고 평했다.
예상 독자층
한일관계 연구자 및 독도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
▣ 작가 소개
저자 : 노 다니엘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MIT에서 정치경제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의 펠로우로 일본의 자본주의에 관해 연구한 후 홍콩과기대학 조교수, 중국인민은행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아시아 정치경제의 실무에 대한 관심으로 학계를 떠나 미국과 일본의 정부기업 관계 컨설팅회사와 싱크탱크에서 일했다. 2006년부터 ≪월간중앙≫의 객원편집위원으로 글을 써 왔으며 저서로 『우경화하는 신의 나라』(2006), 『아라비아 경제금융지도』(2009)와 역서로 『대마불사』(2010) 등이 있다.
역자 : 김철훈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50기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 문화부, 국제부 기자 등을 거쳐 1996~1997년 일본 게이오대학 방문연구원과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2000~2001년 한국일보 자회사 한국아이닷컴 이사로 근무했으며, 다시 편집국에 복귀해 사회부, 국제부, 데스크 등으로 일하다 2005~2008년 도쿄 특파원으로 두 번째 부임했다. 특파원 임기를 마친 후 한국일보를 퇴사, 1년간 뉴시스 통신사 부국장 겸 사회부장으로 활동했다.
▣ 주요 목차
프롤로그 ‘미해결의 해결’은 왜 성립되었나
1. 밀약 위에 구축된 한일관계
2. 덩샤오핑보다 30년 이상 앞서다
3. 국교정상화까지 치열한 협상과정을 추적하다
제1장 암중모색의 시대
1. 영토를 둘러싼 분쟁의 기원
2. ‘이승만 라인’의 설정과 한일단교
3. 대담한 유화카드를 선택한 기시 노부스케
4. 한일의 두 지도자, 하야하다
제2장 숙부와 조카사위의 대일외교
1. 친일정권의 탄생
2. 한일회담, 움직이기 시작하다
3. 오노 반보쿠와 한일 로비 라인
4. 청구권 자금을 둘러싼 공방
5. 이승만 라인, 사라지다
제3장 새로운 한일 로비
1. 오노 반보쿠-김종필 라인의 소멸
2. ‘돌격내각’의 탄생
3. 정일권-고노 라인에서 움직인 사람들
제4장 독도밀약
1. 고노 이치로, 본격적으로 움직이다
2. 어업 문제를 정리하다
3. 독도밀약의 성립
4. 밀약의 형태를 만들다
5. 밀약의 ‘정치학’
제5장 두 개의 상실
1. 문서의 상실
2. 정신의 상실
에필로그 시험되는 예지
1. 나니와부시 정치의 시대
2. 나니와부시 문화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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