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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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최학주
출판사항나남, 발행일:2011/03/01
형태사항p.328 B5판:24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30085496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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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육당 장손이 쓴 ‘최남선 친일론’ 정면반박
“친일은 오해, 조선의 세계화가 할아버지의 꿈”…최남선 직계가족의 최초 본격 증언

육당 최남선의 장손 최학주(在美)씨가 그간의 침묵을 깨고 우리 사회에 기정사실로 굳은 조부의 친일론을 정면 반박하는 책《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부제: 조선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을 출간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의 집안에서 나온 최초의 본격 증언록이 3ㆍ1절 92주년을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먼저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육당의 행적이 조선의 세계화, 조선역사의 세계화 작업이라는 것이다. 조선사 편찬위원과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는 등 육당의 친일행적으로 인식되는 부분에서 그는 근대 세계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거진 세간의 오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육당의 친일을 시비하는 시기는 대략 1930년대부터 광복까지로, 할아버지가 일제에 부역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할아버지의 조선사편수회 참가 이유는 ‘조선인이 인지하는 조선사 편찬’이었고, 총독부에 의해 이미 반(半)일본화한 조선사를 깨뜨리고자 ‘세계사의 일부로서의 조선사’를 정립한 것”이라고 밝힌다.
즉, 육당은 20세기 초 근대화가 어느 나라든 예정된 역사의 흐름이었다면 그 방향은 세계화라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배세력인 대원군이나 민씨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 자유로웠던 육당이었기에 조선의 근대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었다. 1910년대 잡지〈소년〉에 기고한 글들이 그 단적인 예다.
저자는 “할아버지는 부단히 ‘조선적’인 것의 정립을 시도하면서 ‘세계적’인 것을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대중들이 세계적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만 ‘조선적’인 것을 인지하고, ‘조선적’인 것을 공유하는 ‘민족’의 정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적 안목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조선의 독립 부분이다. 육당은 ‘조선의 독립은 세계사의 전개 추세에 따라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최남선은〈내가 쓴 독립선언서〉에서 “나는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조선인 독자의 이기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동양 전체에 평화 내지 세계 역사의 추세에 비추어서 불가결한 것이요, 타당성의 것임을 주장하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의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 가운데 무력에 의해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는 노선이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할아버지는 무력 투쟁에 의한 조선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러했다”며 “열강들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고 있던 그 시대에 도대체 어느 민족이 자체의 무력만으로 독립을 쟁취했단 말인가?” 하고 반문한다.
육당이 보기에 근대화는 세계화의 문제였기에 ‘세계’와 ‘조선’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의 붕괴와 식민지의 청산은 세계 질서의 재편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갖고 조선학 운동을 편다. 그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라기보다 중세적 중화주의였다.
육당의 이러한 입장은 ‘친일’로 매도당한 이유가 됐다. 더욱이 외부에서 보기에 오불관언 ‘학자’로서 조선의 세계화 작업에 매진한 육당이었기에 어쩌면 그런 오해를 자초한 면도 없지 않았다. 육당이나 저자가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육당이 1949년 반민특위에 제출한〈자열서〉에서 “지조냐 학자냐 골라잡아야 할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나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알 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저자 역시 육당의 임종을 앞두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다만 어린 소견으로도 내 할아버지 육당은 역사학이 아닌 정치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당신에게 준 과제는 학문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당의 진정성은 외면당하지 않았다. 항일 독립투쟁의 선두에 섰던〈사상계〉발행인 장준하는 육당 별세 직후 특별호를 발행, 육당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선생은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처음 공개되는 내용과 사진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간 육당에 대한 연구에서는 최남선 개인의 근대화운동만 주목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최남선 선대부터 개화운동에 참여해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상세히 서술한다. 특히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한 최정섭(육당의 조부)의 유지를 최헌규(육당의 부친)가 최남선에게 전하고, 이후 최헌규가 육당의 신문화운동을 적극 후원한 배경을 담고 있다. 최남선의 아버지 최헌규는 19세기 개화운동과 20세기 근대화운동을 연결한 징검다리였다. 또한 최남선 집안의 가계도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밝혀진다.
또 최남선의 집안과 교유 관계는 일제시기 지식인의 분포도를 보여주고 있다. 최남선은 카프문학의 선두 주자인 이익상과 사돈을 맺었고, 셋째 아들 최한검은 일제시기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6ㆍ25전쟁 때 월북했다. 최남선의 셋째아들이 월북했다는 사실은 조금 알려져 있었으나, 이 책에서만큼 그 경위와 그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된 적은 없다. 또 친일파의 거두로 평가되는 박석윤은 최남선의 매제다. 논쟁이 될 만한 부분이지만 저자는 박석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했고, 그의 행적과 삶도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좌익 이익상과 친일파 박석윤은 앞뒷집에 살던 친구였다. 해방 후에는 ‘좌우익’이 모든 것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지만, 적어도 일제시기 동안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념에 의해 친분이 흩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친일, 좌익, 우익 그 모두가 용해돼 있는 최남선 집안은 그러한 일제시기 지식인의 교유 관계를 압축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최남선이 좌우합작 노선인 신간회 운동의 구심점이라는 평가 부분이다. 그간 최남선은〈동아일보〉계열로 분류돼 자치론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최남선이〈동아일보〉계열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중국의 국공합작과 같은 취지로 좌우합작 노선의 신간회를 출범시켰다고 서술한다. 나아가 육당의〈시대일보〉창간 또한 좌우익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해석과 논증은 모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학계에서 인정받는다면 조선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최남선의 운동사적 위치는 180도 달라지게 된다.

저자와의 이메일 가상인터뷰
질문 1.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
책의 제목이 말하듯 내 할아버지 최남선에 대한 기억과 그분의 작업이 한국 근대화에 남긴 영향에 관해 쓰고자 했다. 그분의 가문적 배경, 시대적 상황, 그분의 선택과 결정에 관한 육친으로서 내 소감, 당신이 글로 남긴 수많은 작업들을 지금 우리 세대가 어떻게 인식하며 성장했나 하는 것들을 다음 세대에 알려주고자 했다. 우리가 우리 근대화 과정을 사실대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명료한 미래도 설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질문 2.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나. 아쉬움은 없나.
내가 지금 찾아 볼 수 있는 육당에 관한 기록에 관해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구에게나 객관적일 수 있도록 내가 듣고 읽어 아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부분은 학계의 연구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아 내 주관적인 설명이 불가피했고, 또 어떤 부분은 우리가 아직도 분단 상태이기 때문에 언급하기 힘든 면이 많았다.

질문 3. 책 집필동기에 손자로서의 의무감도 있었나.
글쎄, 내 할아버지 최남선의 조선 근대화 작업을 파악하는 데는 당신이 평생 동안 남겨 놓은 글과 책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거기다 무엇을 더하거나 설명할 입장이 아니다. 다만 우리 세대 누구보다도 내가 육당 최남선과 더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인간적인 면을 포함해 가족의 구성원, 또는 생활인으로서의 선택과 결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의무가 있다면, 이 책의 발간으로 조금이나마 벗게 됐으면 한다.

질문 4. “집필의도가 할아버지에 대한 변명을 위해”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데.
내가 당신의 육친이 아니고, 할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우리 세대를 산 완전한 제 3자로 가정해도 한 역사적 인물 최남선과 그 작업과 관련해 무슨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책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변명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폄훼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봐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언급할 이유도 없다. 나는 다만 모두 주지하는 대로 우리의 미래는 과거의 연장이라는 생각에서 사실만을 전할 뿐이다. 내 관심은 우리의 미래다.

질문 5. 논쟁의 소지가 있는 논리가 엿보인다. 가령 일제 말기 할아버지의 여러 작업들을 세계화로 포괄 설명하는 대목들이 그렇다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가? 20세기 초 근대화가 어느 나라든 예정된 역사의 흐름이었다면 그 방향은 세계화라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화 태동은 중국의 양무운동이나 일본의 명치유신에 비해 2,30년은 뒤졌다. 하지만 깨어 있던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안 보였을 리 없다. 다행스럽게도 조선의 최남선은 기존 지배세력인 대원군이나 민씨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 자유로웠던 존재였기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었다. 당신의 1910년대 잡지〈소년〉기사들이 그 증거다. 당신은 부단하게 “조선적”인 것의 정립을 시도하면서 “세계적”인 것을 소개한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세계적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만 “조선적”것을 인지하고 그런 것을 공유하는 “민족”의 정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후 적어도 조선의 대중 속에 민족의 정체성을 완성하고서부터 최남선은 그 조선민족을 세계 속에 세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최남선의 근대화 작업은 세계화 작업이기도 하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최남선의 조선 세계화 작업은 근대화작업 초기에서부터 시작됐고, 일제 말기의 작업도 그 연장이었을 뿐이다.

질문 7. 할아버지 유품들은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계속 개인 소유로 둘 것인가.
물론 아니다. 이제 그것들을 누구든 개인소유로 두어서는 안 된다. 청계천에 있다 무너진 광문회건물이 복원되면 원래 거기에 있었던 유물들을 같은 자리에 영구히 비치할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린다.

질문 6. 이공계 전공이신데 책 내용에는 상당한 인문적 소양이 드러난다. 특별한 노력이 있었나.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다 한다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원래 지금 우리 전공이라는 게 고 3때 돼서야 이것저것 고심해서 정했던 것이지 않은가? 살면서 이력을 쌓다보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고 3때는 덜 중요하게 보였던 것이 새로운 사회적 요구로 생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책 저 책 보느라고 한눈을 좀 팔았다.

질문 8.사생활 영역이지만, 미국에 정착한 이유가 할아버지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도 관계가 있는가.
아니다. 그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잘못된 인식은 언젠가는 사실대로 바로 잡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나는 나 아닌가? 글쎄, 좀 더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나대로 사느라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한 5년 공부하고 다음 5년은 실무 경영으로 배우고 귀국할 계획이었다. 그랬는데 내가 주로 하던 신약 개발 관계 일은 요즈음 세계 어디서 하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은 미국이 본 바닥이기도 하고…. 아무튼 별로 불편한 게 없어서인지 나는 아직도 40여 년 한국여권을 갖고 다닌다. 한국에도 매년 최소 1~2주는 일 때문에 다녀오곤 한다.

▣ 작가 소개

저자 최학주
1941년 서울 출생
1960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4년 서울대학교 공대 졸업
1966년 ROTC 예비역 편입, 한국기술개발공사 입사
1967년 미국 유학, Boston Tufts 대학원
1971년 American Cyanamid 제약공정관리부
1976년 Bristol-Myers 제약기술개발부
1981년 Block Drug(현 GlaxoSmithKline) 기술이사
2001년 Keytec, FDA Regulatory Consulting 설립
2005년 현직 은퇴. 조선광문회 건물복원추진회 자문

▣ 주요 목차

ㆍ 일러두기 24
ㆍ 들어가며 25

할아버지와 함께한 17년 31

제1부 가족사에 응축된 한국의 근현대

제1장 증조부와 개화운동
1. 해마다 설날이면 39
2. 증조부 최헌규의 자수성가 41
3. 불운의 선구자 최정욱 45
4. 할머니가 남긴 말씀 49
5. 할아버지의 자성록(自省錄) 52
6. 할아버지의 ‘자경’(自警) 57

제2장 이념의 교차로
1. 할아버지와 내 선친-오! 아버지 되기 어려움이여 59
2. 아들에게 들려준 조선사편수회 참여 경위 64
3. ‘문과(文科)는 하지 말라’ 67
4. 신경향파 작가 외할아버지 이익상 72
5. 김성수와 구국사업을 함께한 종조부 최두선 78
6.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한 왕고모부 박석윤 84

제3장 우이동 시절과 6ㆍ25
1. 소원(素園)에서의 기억들 94
2. 반민특위와 자열서(自列書) 98
3. 셋째 삼촌은 월북하고… 102
4. 우이동에 나타난 인민군 110
5. 납북을 모면한 할아버지 114
6. 고모는 피살되고 어머니는 잡혀가고… 116
7. 잿더미 된 장서 17만 권 119
8. 환도와 선친 참척 124
9. 와병과 천주교 귀의 128
10. 할아버지 떠나시고 1년 130

제2부 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

제1장 민족의 발견
1. 신문관-근대의 문을 열다 137
2. 조선광문회-조선학의 터를 닦다 147
3.〈독립선언서〉-민족을 창출하고 구현하다 155

제2장 조선 정체성의 정립
1.《동명》과《시대일보》-민족을 완성하다 165
2. 불함문화권 설정-단군이 조선의 근본이다 176
3. 계명구락부와 우리말사전
-언어가 정립되어야 사고할 수 있다 183
4. 국토 예찬과 시조 운동-조선심(朝鮮心)을 일깨우다 187
5. 신간회-민족진영의 분열을 막다 197

제3장 조선 역사의 세계화
1. 조선사편수회 참여와 프랑스 유학 시도
-조선사는 세계사다 205
2.〈송막연운록〉과 고대사 인식
-민족사의 무대는 동북아시아다 213
3.《고사통》,《역사일감》,《조선상식》
-조선의 불씨를 되살리다 219
4. 만주행과〈만몽문화〉, 그리고 학병 권유
-‘군사학을 배워 두어라’ 223
제4장 민국(民國) 정통성의 확립
1.《국민조선역사》-민국의 국사를 새로 쓰다 229
2.《조선역사사전》-50년 후를 내다보다 235
3.《한국해양사》-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가
한반도에서 합류한다 242
4.〈진실정신〉-분단 후의 세상을 성찰하다 246

제3부 육당학의 미래를 위하여

제1장 사후 기념사업
1. 친일 비판과 우이동 소원 기념비 253
2. 전기ㆍ전집 출판과 육당문고 설립 259
3. 근대 정신의 발상지 조선광문회 건물의 복원 265

제2장 육당학의 정립을 모색하며
1. 민족과 국가 269
2. 미래 지향의 ‘열린 민족주의’ 273
3. 육당학과 학제 간 연구 278
ㆍ 나가며 281
ㆍ 참고문헌 285

부록
자열서(自列書) 291
육당 최남선 연보 298
인물 생몰 참조표 309
육당 최남선과 동시대 11인 연표 312

ㆍ 찾아보기 323

작가 소개

목 차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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