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연합군과 독일군 장교들이 만든 제2차 대전사에 맞서는 진실의 역사를 쓰다
‘깨끗한’ 독일군 신화 속에 숨겨진 역사를 밝혀내다
그것은 역사 투쟁이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 벌어진 인종 학살은 그저 악마와 같은 히틀러와 ‘나치친위대’의 소행일 뿐, 선량하고 무고한 독일군은 ‘깨끗한’ 전쟁 참가자였다는 ‘그들의’ 역사에 맞서는 투쟁이었다. 양심적 독일 역사학자들은 ‘그들’과 평범한 보통 독일인들이 함께 대량 학살의 가해자임을 실증적 사료를 바탕으로 밝혀내고, 인류가 지켜야 할 윤리의 수준을 높였다. 이 책은 그 모든 기억 투쟁의 과정을 역사적 실체의 재구성과 함께 담아냈다.
‘깨끗한’ 독일군 신화는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나치 시대 정규군인 국방군 장성들이 만들어낸 신화이자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 측 국가들이 유포한 신화였다. 그리고 그 신화를 바탕으로 제2차 대전사가 그 국방군 장성들 손으로 쓰였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역사가 되었다. 어떻게 패전국 장성들이 역사 쓰기의 주체가 되었을까?
널리 퍼진 생각과 달리, 나치 시대 대량 학살은 단순히 나치친위대가 저지른 것이 아니고, 정규군인 국방군 지휘부와 1800만 장병들이 그 범죄에 깊게 연루되었다. 왜 그랬을까? 평범한 독일 국민인 1800만 장병이 어떻게 나치와 함께하게 되었을까?
“유대 볼셰비즘”: 나치 이전부터 반유대주의는 있었다!
제2차 대전 당시 동부 전선(대소련 전쟁)에서 히틀러와 나치는 “유대 볼셰비즘”이라는 선전 슬로건으로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히틀러의 “유대 볼셰비즘”에 수많은 국방군 장교들이 동조했고 나치의 반인륜 범죄에 협력했다.
그들은 왜 동조하게 되었을까? 이는 군 장교 집단 내에 존재하던 반유대주의와 러시아 인식 그리고 군 특유의 정치관(대개 군주정을 지지하고 권위주의 국가를 선호하며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사회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는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반유대주의에 생물학적 편견이 더해지고 이를 표방하는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제1차 대전 이전 시기에, 군 장교들(프로이센 장교들)은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귀족 출신의 고위급 장교들은 유대인이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정치적으로 군주정을 반대하는 민주파/혁명파이며 군사적으로 전투 능력이 열등한 존재라는 식으로 반유대주의를 구성하고 있었다. 군 장교들의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제1차 대전이 발발하고 몇 달이 지난 후부터 뚜렷해지면서 “유대인들은 겁쟁이며 기피자이고 전쟁 모리배”라는 주장이 등장했고 광범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국방군 지도층은 전통적인 민족주의/제국주의적 러시아관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를 덩치만 크고 허약한 “진흙 발의 거인”이라고 보는 인종주의적/반슬라브적 경향과 동시에 러시아가 서양을 위협할 거라는 우려가 상존했다.
히틀러가 한 일은 이러한 러시아관에 반유대주의, 반볼셰비즘, 반슬라브주의를 결합시켜준 것이었다. 러시아인(슬라브인)은 본래 열등하고 무능한 인종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1917년에 국제 “유대 볼셰비즘” 통치 체제가 성공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 동부 유럽에서 “하등 인간”인 유대인 또는 “유대 볼셰비키”를 제거하고 슬라브인을 노예로 삼으며 대독일제국의 “삶의 터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에 히틀러와 국방군 장군들이 진정한 이념적 연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평범한 독일군 병사들을 가해자로 만든 국방군 학살의 역사
국방군의 전쟁 수행 수단 가운데 중요한 것은 명령 하달과 선전이었다. 1939년에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선전국을 세워 반유대주의적, 반볼셰비즘적, 반슬라브적 선전과 인종 말살 전쟁이라는 개념을 공식 계통을 밟아 징집병에게 교육했다.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나치 세계관과 민족 정치적 목표를 교육하기 위해” 통일된 교재를 만들어 각급 부대로 보급하였다. 자신의 부대 지휘관에게서 ‘유대인은 독이 가득한 기생충처럼 제거되어야 한다.’는 인종주의적 정훈 교육을 받은 국방군 장병들은 매우 뚜렷하고 구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1941년 소련 공격에 앞서서는, 볼셰비키, 파르티잔, 유대인을 적으로 설정하는 “러시아 지역에서 부대 행동 지침”을 약 300만 동부 지역 육군 장병들에게 하달하였고, 동부 전선의 부대장들도 야전 부대의 명령에서 흔치 않은 이데올로기적 명령을 하달했다. 또한 고위급 부대장들은 대러시아 전쟁에 심리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비하는 연설을 수차례 했고, 그 연설문을 복사하여 여러 부대에서 회람하게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병들로 이루어진 국방군은 어떻게 나치의 범죄에 동참했을까?
첫째, 국방군은 나치친위대의 범죄를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는 방식으로 연루되었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후 나치친위대 특무대는 많은 유대인이 포함된 폴란드 인텔리겐치아의 제거와 살해를 자행했다. 이때 국방군은 대량 학살에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국방군 작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경찰(특무대)의 재판 관할권이 국방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국방군은 또 1941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자행된 범죄를 수수방관했다. 도시의 거리와 구석 곳곳에서 리투아니아 자경단이 유대인을 모아놓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 죽이는 등 학살을 저지르고 있을 때 국방군은 이를 저지하지 않음으로써 공모자들을 사실상 보호했다.
둘째, 국방군은 유대인 학살에 필요한 정치적 조건 조성과 물자 조달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학살 자체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세르비아 전장에서 국방군은 1941년 가을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사살하고 “인질의 살해”로 위장했다. “상부로부터의” 특별한 명령이 없을 때도 그러했다.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을 벌였다.
대량 학살이 벌어진 빌라 체르크바와 바비 야르에서 국방군과 나치친위대는 철저한 업무 분담으로 긴밀히 협력했다. 제6군 사령관 라이헤나우의 지휘하에서 빌라 체르크바의 국방군 지역 사령부는 8월 중순 유대인 등록을 명했고, 국방군 예하의 비밀야전경찰(GFP)은 유대인 성인들의 이송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라이헤나우는 빌라 체르크바의 유대인 아동 90명에 대한 처형을 명령했다.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한 키예프 인근 바비 야르의 대량 학살(1941년)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정 당국의 명령에 따라 키예프의 유대인들은 등록과 수용소 이송을 위해 한 장소로 집결하였다. 대략 34,000명이 모였다. 물론 아이들과 여자도 포함되었다. 그들 모두는 귀중품을 제출하고 의복을 벗은 후 살해당했다. 이것은 여러 날에 걸쳐 일어났다.”
국방군 장군들의 은폐된 범죄: 냉전이 선사한 면죄부
냉전은 국방군 장성을 위한, 국방군 장성에 의한 제2차 대전사를 만들었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동독)에 맞서는 우방 서독의 건설을 최우선 이해관계로 보면서 (소련과 독일이 맞선 동부 전선의) 제2차 대전사도 그에 따라 창조해냈다.
시작은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탄생이었다. 신화 창조는 1945년 되니츠 해군 제독이 제출한 마지막 국방군 보고서(“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온 힘을 다해 영웅적으로 명예롭게 싸웠다.”)에서 시작되었다. 이 보고서는 종전 직후 국방군에 대한 통일된 이미지 없이 개인의 경험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기억하는 국방군 이미지만 존재하던 독일 국민들에게 전형적 이미지를 부과하는 출발점이었다.
1945년 11월 미국 장군 윌리엄 도너번의 제안으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부에 제출한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각서(“육군이 나치당 및 나치친위대와 대립했고, 히틀러의 중요한 결정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쟁 범죄에 대한 명령에 반대했다.”)는 되니츠가 만든 이미지를 보강했다. 도너번 등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미국 대표들은 독일을 우방으로 얻기 위해 독일군 참모 집단을 범죄 조직으로 처벌하는 것에 반대했고, 특히 도너번은 상부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독일 장군들에게 최선의 변론 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국제 군사 법정은 주요 전범 재판에서, 참모부나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국제 전범 재판 규정> 제9조에서 정한 “조직”이나 “그룹”으로 볼 수 없다는 형식적 이유를 들어 “범죄 집단”으로 선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개인에 대한 법률적 판단만 하였는데, 이는 미국 측으로서는 자신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재판 이후 독일 국방군 장교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그것도 승자의 기준에 의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했다. 후속 재판인 뉘른베르크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도 피고인들은 지도적 정치가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므로 “평화에 반한 범죄에 대해서는 죄가 없음”을 선언했고,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내렸다.
1949년 영국 군사 법정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독일 육군 원수 재판은, 역사적 진실이 냉전의 요청에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영국 정치인들은 서독을 대서양 방위 동맹에 묶어두고자,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긍정적으로 국방군을 평가했다. 즉 독일 국방군을 보통의 군대와 같이 순수하게 군사적 견지에서 전쟁을 치른 군대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수상을 역임했던 윈스턴 처칠은 만슈타인이 두 명의 영국 변호사를 채용할 수 있도록 기금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노동당 출신 하원 의원 패짓에 의해 동유럽에서의 인종 말살 전쟁은 과소평가되었고, 이 전쟁의 계획과 실행에 대한 국방군의 가담은 간과되었다. 또 패짓은 1952년 만슈타인의 경력과 재판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담고 있는 책을 출간했다. 독일어로도 번역된 이 책은 영국과 독일에서 “깨끗한” 국방군 전설이 공고해지는 데 기여했다.
국방군 엘리트들의 자존감과 이들에 대한 독일 여론의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럽 나토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선언(1951년 1월 23일)과 서독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의 선언(1951년 4월 5일)이었다. 이 공적 선언들은 전직 국방군 장성들에게 직업의 상실이요 무능과 수치의 기간인 전후 시기에 마침표를 찍은 행위였다.
패자에 의해 쓰인 유일한 역사, 제2차 대전사
전직 국방군 장성들은 연합군의 위임으로 제2차 대전사를 쓸 수 있었다. 군사사 연구자 베른트 베그너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속담이 1945년 이후에는 들어맞지 않았다며 이렇게 평했다. “제2차 대전에 대한 서독의 역사 서술, 특히 러시아 전선의 역사 서술은 20년 넘는 기간 동안,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 -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정도로 - 패자들의 작품이었다.”
미국은 고위급 독일 장교들이 제2차 대전의 군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했다. 1946년 6월 328명의 독일 장교들이 역사 서술에 참여했다. 이들 모두가 전쟁 포로였고 대부분이 장성이었다. 그리고 미국 측의 요청으로 프란츠 할더 육군 참모장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다.
전직 고위 장교들이 이를 통해 만들어낸 국방군 이미지는 지휘관의 탁월한 전문적 식견과 기술, 그리고 장병의 비상한 용기와 인내력이었다. 그리고 “국방군 전체가, 특히 육군은 실제로 히틀러의 역사적 희생자였다. 혹은 최소한 그의 범죄적 정책에 남용된 도구였다. 국방군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히틀러의 범죄에 반대했다.”
이런 변호의 논리는 전승국의 지원 덕분에 전문 역사가들도 1960년대가 되어서나 열람할 수 있는 원자료들을 활용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1950년대 제2차 대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특권적 지위를 누린 할더와 그의 동료들을 찾아가 정보를 얻어야 했다.
이후 1950년대에 역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독일 장교들은 대중을 위한 회고록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육군 참모장 프란츠 할더, 해군 제독 칼 되니츠, 유명한 기갑부대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아프리카 독일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 등등이 그들이었다. 그 결과, 죄책을 잊어버리고 부인하는 일반적 경향은 1950년대의 자화상 속에, 즉 전쟁에 대한 기억 속에, 대중적 화보집 속에, “전쟁 모험담” 속에, 대중 소설과 영화 속에 반영되었다.
역사 투쟁: 금기가 깨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대의 독일 사회는 ‘이제 그만 끝내자.’는 심성, 즉 과거 청산 종결 심성이 형성되었다. 1950년대 독일은 집단적인 “조심스런 망각”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독일인들은 어느덧 “소위 전쟁 범죄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여론에 조용히 따라가는 다수와 진짜 전쟁 범죄자들 사이에 연대감이 조성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민 대다수의 이해관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노베르트 프라이는 “전체 사회가 민족 사회주의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그러던 1986~1987년에 ‘역사가 논쟁’은 나치 국가에서 국방군이 행한 역할 중 기왕에 알져진 것을, 특히 동부 전선 전쟁의 의미를 다시 문제 삼았다. 하지만 광범한 대중적 논쟁의 촉매는 1995년부터 열린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의 순회 전시회 <인종 말살 전쟁. 1941~1945년 독일군 범죄 전시회>였다. 1995년부터 전시회를 일시 중단한 1999년까지 90개가량의 도시에서 열린 순회 전시회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국방군 장병이 “영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도 아니었다.”는 당시 대중매체의 기본 논조와 국방군 범죄 전시회는 크게 충돌하였다. 왜냐하면, 전시회가 조화와 화해를 위해 전쟁 현실들을 지워버린 전후 합의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국방군 범죄 전시회에 독일 국민들이 크게 관심을 보이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6~1997년 전시회 반대 집회였다. 두 개의 주요 보수 정당(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이 민족민주당(NPD) 및 퇴역군인 단체들과 함께 “깨끗한” 국방군을 노래하며 반대 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 결과, 수십 만 명이, 특히 젊은이들이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고, 금기는 서서히 깨져갔다.
그 성과로 독일 국방부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독일 국방군을 평가했다. “국방군은 폭력적인 나치 정책에 참여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역할이 증대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국방군은 히틀러와 그 체제의 죄악에 점점 깊이 가담했다. 국방군의 가담 정도는 학자들이 해명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뒤늦게나마 제2차 대전 및 유럽 파시즘과 관련된 역사 신화로부터 결별을 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만의 현상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등의 대중들도 자국 역사의 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모든 곳에서 민족 신화가 무너지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는 불편한 진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그들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철저히 패배함으로써 인류 발전에 기여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군의 연구소(군사사연구소)가 나서서 자신의 과거의 흠결을 도려내는 역사는 아마도 독일밖에 없을 것이다. 홀로코스트, 좀 더 확장하면 독일의 과거 극복은 부담스런 과거를 대하는 데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인종주의자는 (특히 서구에서) 가장 치욕적인 욕이 되었고 인종주의적 학살은 절대 범죄라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하게 자리 잡았다. 독일은 철저히 패함으로써 인류의 보편적 윤리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도 과거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역사가 예상보다 더 힘들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래서 독일의 과거 극복 노력은 우리에게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 작가 소개
저자 볼프람 베테 Wolfram Wette
1971년부터 1995년까지 독일 군사사연구소(MGFA)에서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사 연구를 했으며 역사적 평화연구그룹Arbeitskreis Historische Friedensforschung을 주도했던 역사가다. 1998년 이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Militarismus in Deutschland(2010년), Der deutsche Uberfall auf die Sowjetunion 1941(2011년), Stalingrad(2003년)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다.
역자 김승렬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와 사학과(석사)에서 학업을 이수하고,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며, 계간 『역사 비평』 편집 위원(2006~2011년)을 역임했다.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유럽의 영토 분쟁과 역사 분쟁』, 『인물로 보는 유럽 통합사』 등의 공저가 있다.
▣ 주요 목차
축사_ 만프레트 메서슈미트
옮긴이 서문
제1부 러시아, 소련 및 볼셰비즘에 대한 적대 의식
제1장 20세기 독일인의 러시아 인식
제2장 러시아에 대한 나치의 인식 : "유대 볼셰비즘"
제3장 국방군 장군들의 러시아 인식
제2부 독일군의 반유대주의
제1장 반유대주의에서 홀로코스트로?
제2장 독일제국 시기와 제1차 대전
제3장 혁명의 해, 1918~1919년
제4장 전후 시기
제5장 바이마르 공화국
제6장 나치 통치 시기(19939년 까지)
제3부 국방군과 유대인 학살
제1장 국방군의 명령 하달과 선전
제2장 학살 장소
제3장 군인의 의무로 규정된 반유대주의
제4부 장군과 사병
제1장 전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프로이센-독일의 군사 엘리트
제2장 히틀러와 장군들
제3장 군복을 입은 "보통 사람"
제4장 최근 연구와 국방군 장병
제5장 전쟁 막바지, 몰락에 대한 광기와 생존 의지
제5부 "깨끗한" 국방군의 전설
제1장 전설의 탄생
제2장 전범재판
제3장 국방군의 변호하는 역사 서술
제4장 냉전이 시작되다
제5장 국방군의 범죄, 사법부, 공소시효
제6부 금기가 깨지다
제1장 역사 연구
제2장 연방군의 국방군 인식
제3장 50년 후: 금기가 깨지다
제7부 결론
후주
부록 나치의 인종 말살 전쟁과 ''평범한'' 독일 군인의 역할 : ''나치 국방군 전시회''를 둘러싼 독일의 대중적 논쟁_김승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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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과 독일군 장교들이 만든 제2차 대전사에 맞서는 진실의 역사를 쓰다
‘깨끗한’ 독일군 신화 속에 숨겨진 역사를 밝혀내다
그것은 역사 투쟁이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 벌어진 인종 학살은 그저 악마와 같은 히틀러와 ‘나치친위대’의 소행일 뿐, 선량하고 무고한 독일군은 ‘깨끗한’ 전쟁 참가자였다는 ‘그들의’ 역사에 맞서는 투쟁이었다. 양심적 독일 역사학자들은 ‘그들’과 평범한 보통 독일인들이 함께 대량 학살의 가해자임을 실증적 사료를 바탕으로 밝혀내고, 인류가 지켜야 할 윤리의 수준을 높였다. 이 책은 그 모든 기억 투쟁의 과정을 역사적 실체의 재구성과 함께 담아냈다.
‘깨끗한’ 독일군 신화는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나치 시대 정규군인 국방군 장성들이 만들어낸 신화이자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 측 국가들이 유포한 신화였다. 그리고 그 신화를 바탕으로 제2차 대전사가 그 국방군 장성들 손으로 쓰였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역사가 되었다. 어떻게 패전국 장성들이 역사 쓰기의 주체가 되었을까?
널리 퍼진 생각과 달리, 나치 시대 대량 학살은 단순히 나치친위대가 저지른 것이 아니고, 정규군인 국방군 지휘부와 1800만 장병들이 그 범죄에 깊게 연루되었다. 왜 그랬을까? 평범한 독일 국민인 1800만 장병이 어떻게 나치와 함께하게 되었을까?
“유대 볼셰비즘”: 나치 이전부터 반유대주의는 있었다!
제2차 대전 당시 동부 전선(대소련 전쟁)에서 히틀러와 나치는 “유대 볼셰비즘”이라는 선전 슬로건으로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히틀러의 “유대 볼셰비즘”에 수많은 국방군 장교들이 동조했고 나치의 반인륜 범죄에 협력했다.
그들은 왜 동조하게 되었을까? 이는 군 장교 집단 내에 존재하던 반유대주의와 러시아 인식 그리고 군 특유의 정치관(대개 군주정을 지지하고 권위주의 국가를 선호하며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사회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는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반유대주의에 생물학적 편견이 더해지고 이를 표방하는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제1차 대전 이전 시기에, 군 장교들(프로이센 장교들)은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귀족 출신의 고위급 장교들은 유대인이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정치적으로 군주정을 반대하는 민주파/혁명파이며 군사적으로 전투 능력이 열등한 존재라는 식으로 반유대주의를 구성하고 있었다. 군 장교들의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제1차 대전이 발발하고 몇 달이 지난 후부터 뚜렷해지면서 “유대인들은 겁쟁이며 기피자이고 전쟁 모리배”라는 주장이 등장했고 광범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국방군 지도층은 전통적인 민족주의/제국주의적 러시아관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를 덩치만 크고 허약한 “진흙 발의 거인”이라고 보는 인종주의적/반슬라브적 경향과 동시에 러시아가 서양을 위협할 거라는 우려가 상존했다.
히틀러가 한 일은 이러한 러시아관에 반유대주의, 반볼셰비즘, 반슬라브주의를 결합시켜준 것이었다. 러시아인(슬라브인)은 본래 열등하고 무능한 인종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1917년에 국제 “유대 볼셰비즘” 통치 체제가 성공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 동부 유럽에서 “하등 인간”인 유대인 또는 “유대 볼셰비키”를 제거하고 슬라브인을 노예로 삼으며 대독일제국의 “삶의 터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에 히틀러와 국방군 장군들이 진정한 이념적 연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평범한 독일군 병사들을 가해자로 만든 국방군 학살의 역사
국방군의 전쟁 수행 수단 가운데 중요한 것은 명령 하달과 선전이었다. 1939년에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선전국을 세워 반유대주의적, 반볼셰비즘적, 반슬라브적 선전과 인종 말살 전쟁이라는 개념을 공식 계통을 밟아 징집병에게 교육했다.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나치 세계관과 민족 정치적 목표를 교육하기 위해” 통일된 교재를 만들어 각급 부대로 보급하였다. 자신의 부대 지휘관에게서 ‘유대인은 독이 가득한 기생충처럼 제거되어야 한다.’는 인종주의적 정훈 교육을 받은 국방군 장병들은 매우 뚜렷하고 구체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1941년 소련 공격에 앞서서는, 볼셰비키, 파르티잔, 유대인을 적으로 설정하는 “러시아 지역에서 부대 행동 지침”을 약 300만 동부 지역 육군 장병들에게 하달하였고, 동부 전선의 부대장들도 야전 부대의 명령에서 흔치 않은 이데올로기적 명령을 하달했다. 또한 고위급 부대장들은 대러시아 전쟁에 심리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비하는 연설을 수차례 했고, 그 연설문을 복사하여 여러 부대에서 회람하게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병들로 이루어진 국방군은 어떻게 나치의 범죄에 동참했을까?
첫째, 국방군은 나치친위대의 범죄를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는 방식으로 연루되었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후 나치친위대 특무대는 많은 유대인이 포함된 폴란드 인텔리겐치아의 제거와 살해를 자행했다. 이때 국방군은 대량 학살에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국방군 작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경찰(특무대)의 재판 관할권이 국방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국방군은 또 1941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자행된 범죄를 수수방관했다. 도시의 거리와 구석 곳곳에서 리투아니아 자경단이 유대인을 모아놓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 죽이는 등 학살을 저지르고 있을 때 국방군은 이를 저지하지 않음으로써 공모자들을 사실상 보호했다.
둘째, 국방군은 유대인 학살에 필요한 정치적 조건 조성과 물자 조달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학살 자체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세르비아 전장에서 국방군은 1941년 가을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사살하고 “인질의 살해”로 위장했다. “상부로부터의” 특별한 명령이 없을 때도 그러했다. 소련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을 벌였다.
대량 학살이 벌어진 빌라 체르크바와 바비 야르에서 국방군과 나치친위대는 철저한 업무 분담으로 긴밀히 협력했다. 제6군 사령관 라이헤나우의 지휘하에서 빌라 체르크바의 국방군 지역 사령부는 8월 중순 유대인 등록을 명했고, 국방군 예하의 비밀야전경찰(GFP)은 유대인 성인들의 이송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라이헤나우는 빌라 체르크바의 유대인 아동 90명에 대한 처형을 명령했다.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한 키예프 인근 바비 야르의 대량 학살(1941년)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정 당국의 명령에 따라 키예프의 유대인들은 등록과 수용소 이송을 위해 한 장소로 집결하였다. 대략 34,000명이 모였다. 물론 아이들과 여자도 포함되었다. 그들 모두는 귀중품을 제출하고 의복을 벗은 후 살해당했다. 이것은 여러 날에 걸쳐 일어났다.”
국방군 장군들의 은폐된 범죄: 냉전이 선사한 면죄부
냉전은 국방군 장성을 위한, 국방군 장성에 의한 제2차 대전사를 만들었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동독)에 맞서는 우방 서독의 건설을 최우선 이해관계로 보면서 (소련과 독일이 맞선 동부 전선의) 제2차 대전사도 그에 따라 창조해냈다.
시작은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탄생이었다. 신화 창조는 1945년 되니츠 해군 제독이 제출한 마지막 국방군 보고서(“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온 힘을 다해 영웅적으로 명예롭게 싸웠다.”)에서 시작되었다. 이 보고서는 종전 직후 국방군에 대한 통일된 이미지 없이 개인의 경험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기억하는 국방군 이미지만 존재하던 독일 국민들에게 전형적 이미지를 부과하는 출발점이었다.
1945년 11월 미국 장군 윌리엄 도너번의 제안으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부에 제출한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각서(“육군이 나치당 및 나치친위대와 대립했고, 히틀러의 중요한 결정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전쟁 범죄에 대한 명령에 반대했다.”)는 되니츠가 만든 이미지를 보강했다. 도너번 등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미국 대표들은 독일을 우방으로 얻기 위해 독일군 참모 집단을 범죄 조직으로 처벌하는 것에 반대했고, 특히 도너번은 상부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독일 장군들에게 최선의 변론 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국제 군사 법정은 주요 전범 재판에서, 참모부나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국제 전범 재판 규정> 제9조에서 정한 “조직”이나 “그룹”으로 볼 수 없다는 형식적 이유를 들어 “범죄 집단”으로 선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개인에 대한 법률적 판단만 하였는데, 이는 미국 측으로서는 자신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재판 이후 독일 국방군 장교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그것도 승자의 기준에 의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했다. 후속 재판인 뉘른베르크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도 피고인들은 지도적 정치가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므로 “평화에 반한 범죄에 대해서는 죄가 없음”을 선언했고,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내렸다.
1949년 영국 군사 법정의 에리히 폰 만슈타인 독일 육군 원수 재판은, 역사적 진실이 냉전의 요청에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영국 정치인들은 서독을 대서양 방위 동맹에 묶어두고자,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긍정적으로 국방군을 평가했다. 즉 독일 국방군을 보통의 군대와 같이 순수하게 군사적 견지에서 전쟁을 치른 군대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수상을 역임했던 윈스턴 처칠은 만슈타인이 두 명의 영국 변호사를 채용할 수 있도록 기금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변호를 맡은 노동당 출신 하원 의원 패짓에 의해 동유럽에서의 인종 말살 전쟁은 과소평가되었고, 이 전쟁의 계획과 실행에 대한 국방군의 가담은 간과되었다. 또 패짓은 1952년 만슈타인의 경력과 재판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담고 있는 책을 출간했다. 독일어로도 번역된 이 책은 영국과 독일에서 “깨끗한” 국방군 전설이 공고해지는 데 기여했다.
국방군 엘리트들의 자존감과 이들에 대한 독일 여론의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럽 나토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선언(1951년 1월 23일)과 서독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의 선언(1951년 4월 5일)이었다. 이 공적 선언들은 전직 국방군 장성들에게 직업의 상실이요 무능과 수치의 기간인 전후 시기에 마침표를 찍은 행위였다.
패자에 의해 쓰인 유일한 역사, 제2차 대전사
전직 국방군 장성들은 연합군의 위임으로 제2차 대전사를 쓸 수 있었다. 군사사 연구자 베른트 베그너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속담이 1945년 이후에는 들어맞지 않았다며 이렇게 평했다. “제2차 대전에 대한 서독의 역사 서술, 특히 러시아 전선의 역사 서술은 20년 넘는 기간 동안,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 -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정도로 - 패자들의 작품이었다.”
미국은 고위급 독일 장교들이 제2차 대전의 군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했다. 1946년 6월 328명의 독일 장교들이 역사 서술에 참여했다. 이들 모두가 전쟁 포로였고 대부분이 장성이었다. 그리고 미국 측의 요청으로 프란츠 할더 육군 참모장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다.
전직 고위 장교들이 이를 통해 만들어낸 국방군 이미지는 지휘관의 탁월한 전문적 식견과 기술, 그리고 장병의 비상한 용기와 인내력이었다. 그리고 “국방군 전체가, 특히 육군은 실제로 히틀러의 역사적 희생자였다. 혹은 최소한 그의 범죄적 정책에 남용된 도구였다. 국방군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히틀러의 범죄에 반대했다.”
이런 변호의 논리는 전승국의 지원 덕분에 전문 역사가들도 1960년대가 되어서나 열람할 수 있는 원자료들을 활용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1950년대 제2차 대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특권적 지위를 누린 할더와 그의 동료들을 찾아가 정보를 얻어야 했다.
이후 1950년대에 역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독일 장교들은 대중을 위한 회고록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육군 참모장 프란츠 할더, 해군 제독 칼 되니츠, 유명한 기갑부대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육군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아프리카 독일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 등등이 그들이었다. 그 결과, 죄책을 잊어버리고 부인하는 일반적 경향은 1950년대의 자화상 속에, 즉 전쟁에 대한 기억 속에, 대중적 화보집 속에, “전쟁 모험담” 속에, 대중 소설과 영화 속에 반영되었다.
역사 투쟁: 금기가 깨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대의 독일 사회는 ‘이제 그만 끝내자.’는 심성, 즉 과거 청산 종결 심성이 형성되었다. 1950년대 독일은 집단적인 “조심스런 망각”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독일인들은 어느덧 “소위 전쟁 범죄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여론에 조용히 따라가는 다수와 진짜 전쟁 범죄자들 사이에 연대감이 조성되었다. 이런 현상은 국민 대다수의 이해관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노베르트 프라이는 “전체 사회가 민족 사회주의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그러던 1986~1987년에 ‘역사가 논쟁’은 나치 국가에서 국방군이 행한 역할 중 기왕에 알져진 것을, 특히 동부 전선 전쟁의 의미를 다시 문제 삼았다. 하지만 광범한 대중적 논쟁의 촉매는 1995년부터 열린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의 순회 전시회 <인종 말살 전쟁. 1941~1945년 독일군 범죄 전시회>였다. 1995년부터 전시회를 일시 중단한 1999년까지 90개가량의 도시에서 열린 순회 전시회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국방군 장병이 “영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도 아니었다.”는 당시 대중매체의 기본 논조와 국방군 범죄 전시회는 크게 충돌하였다. 왜냐하면, 전시회가 조화와 화해를 위해 전쟁 현실들을 지워버린 전후 합의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국방군 범죄 전시회에 독일 국민들이 크게 관심을 보이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6~1997년 전시회 반대 집회였다. 두 개의 주요 보수 정당(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이 민족민주당(NPD) 및 퇴역군인 단체들과 함께 “깨끗한” 국방군을 노래하며 반대 집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 결과, 수십 만 명이, 특히 젊은이들이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고, 금기는 서서히 깨져갔다.
그 성과로 독일 국방부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독일 국방군을 평가했다. “국방군은 폭력적인 나치 정책에 참여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역할이 증대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국방군은 히틀러와 그 체제의 죄악에 점점 깊이 가담했다. 국방군의 가담 정도는 학자들이 해명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독일인들은 뒤늦게나마 제2차 대전 및 유럽 파시즘과 관련된 역사 신화로부터 결별을 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만의 현상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등의 대중들도 자국 역사의 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모든 곳에서 민족 신화가 무너지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는 불편한 진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그들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철저히 패배함으로써 인류 발전에 기여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군의 연구소(군사사연구소)가 나서서 자신의 과거의 흠결을 도려내는 역사는 아마도 독일밖에 없을 것이다. 홀로코스트, 좀 더 확장하면 독일의 과거 극복은 부담스런 과거를 대하는 데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인종주의자는 (특히 서구에서) 가장 치욕적인 욕이 되었고 인종주의적 학살은 절대 범죄라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하게 자리 잡았다. 독일은 철저히 패함으로써 인류의 보편적 윤리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도 과거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역사가 예상보다 더 힘들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래서 독일의 과거 극복 노력은 우리에게 더욱 뼈저리게 다가온다.
▣ 작가 소개
저자 볼프람 베테 Wolfram Wette
1971년부터 1995년까지 독일 군사사연구소(MGFA)에서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사 연구를 했으며 역사적 평화연구그룹Arbeitskreis Historische Friedensforschung을 주도했던 역사가다. 1998년 이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Militarismus in Deutschland(2010년), Der deutsche Uberfall auf die Sowjetunion 1941(2011년), Stalingrad(2003년)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다.
역자 김승렬
고려대학교 법학과(학사)와 사학과(석사)에서 학업을 이수하고,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며, 계간 『역사 비평』 편집 위원(2006~2011년)을 역임했다.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유럽의 영토 분쟁과 역사 분쟁』, 『인물로 보는 유럽 통합사』 등의 공저가 있다.
▣ 주요 목차
축사_ 만프레트 메서슈미트
옮긴이 서문
제1부 러시아, 소련 및 볼셰비즘에 대한 적대 의식
제1장 20세기 독일인의 러시아 인식
제2장 러시아에 대한 나치의 인식 : "유대 볼셰비즘"
제3장 국방군 장군들의 러시아 인식
제2부 독일군의 반유대주의
제1장 반유대주의에서 홀로코스트로?
제2장 독일제국 시기와 제1차 대전
제3장 혁명의 해, 1918~1919년
제4장 전후 시기
제5장 바이마르 공화국
제6장 나치 통치 시기(19939년 까지)
제3부 국방군과 유대인 학살
제1장 국방군의 명령 하달과 선전
제2장 학살 장소
제3장 군인의 의무로 규정된 반유대주의
제4부 장군과 사병
제1장 전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프로이센-독일의 군사 엘리트
제2장 히틀러와 장군들
제3장 군복을 입은 "보통 사람"
제4장 최근 연구와 국방군 장병
제5장 전쟁 막바지, 몰락에 대한 광기와 생존 의지
제5부 "깨끗한" 국방군의 전설
제1장 전설의 탄생
제2장 전범재판
제3장 국방군의 변호하는 역사 서술
제4장 냉전이 시작되다
제5장 국방군의 범죄, 사법부, 공소시효
제6부 금기가 깨지다
제1장 역사 연구
제2장 연방군의 국방군 인식
제3장 50년 후: 금기가 깨지다
제7부 결론
후주
부록 나치의 인종 말살 전쟁과 ''평범한'' 독일 군인의 역할 : ''나치 국방군 전시회''를 둘러싼 독일의 대중적 논쟁_김승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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