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역사학자 김기협,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대장정에 오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우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40주째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 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 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대장정의 첫 걸음 -『해방일기』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해방일기』 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개요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후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까지는 몇 주일의 간격이 있었고, 전국이 실효적 점령 상태에 들어가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권력의 공백’ 기간에 해방 조선의 정치적 요소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의가 집중된 두 개의 초점이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었다. 민족혁명을 앞세운 쪽이 우익이고 사회혁명을 중시한 쪽이 좌익이었다. 두 진영이 혁명의 속도와 범위를 타협할 수 있다고 보는 중도파가 민의를 폭넓게 대표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로 나타났다.
9월로 접어들며 극좌와 극우가 나타났다. 일체의 사회혁명을 거부하는 극우파가 한민당을 거점으로 만들었고, 급속하고 철저한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상대방의 배제를 주장하는 대립관계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존재를 내 주장의 근거로 삼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중도파의 입지를 함께 공략했다.
10월까지 미-소 군대의 실효적 점령이 완성됨에 따라 점령군의 존재가 정치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방어적 입장에 처해 있던 소련 쪽보다 국제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앞두고 있던 미국 쪽 입장이 더 큰 작용을 일으켰다. 이북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활동 성장을 도와주며 소극적 입장을 지킨 반면 이남의 미군은 일본인의 지배자 위치를 물려받아 자치활동을 적극 억압했다. 극우파가 미군의 옹호 아래 세력을 키우고 그 반동으로 극좌파가 좌익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해방일기』 제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2011년 7월 출간예정)
10월 이후 김일성 일파, 이승만, 임정, 독립동맹 등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귀국하여 국내 정치 상황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대, 특히 그 말기의 전쟁기에 일제의 폭압이 극렬해서 국내 민족운동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우익 쪽에서 해외 민족운동세력의 비중이 컸다. 이승만과 김구는 귀국하자마자 우익의 ‘영수’가 되었다. 이북에서 김일성 일파와 독립동맹을 주축으로 좌파-중도파의 연합전선이 순조롭게 형성된 것은 소련군이 좌파를 후원하되 우파를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은 결과였다. 반면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극우파를 극력 옹호한 결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중도파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미 국무성의 공식적 ‘국제주의’ 노선과 대립하는 맥아더의 ‘국가주의’ 노선을 미군정이 따르는 바람에 이남의 정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이 연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앞에서 극렬한 반탁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반탁운동을 통해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었다. 양측은 상대방의 ‘배제’ 정도가 아니라 ‘절멸’을 외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중도파는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에 몰렸다. 1월 중 민족통일전선 시도가 실패하면서 임정 비주류 요인들이 우익 연합을 지향하는 비상국민회의 준비에서 이탈함으로써 ‘임정 분열’까지 일어났다.
1월 중순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함으로써 미소공위의 실패를 예고했다. 예비회담 실패의 결정적 이유는 미군정의 쌀 시장 통제 실패에 있었다. 이남 주민들의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고 미소공위에까지 악영향을 미친 쌀 문제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노선이 가져온 해악의 전형적 사례였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토지개혁)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해방일기』제1권의 관점과 특징
“왜 해방을 못 본 척하는가?” 실증보다 상식으로 역사를 본다
시인 서정주는 일제 말기에 열성적으로 ‘협력’했던 사실을 아주 간단한 말로 변명한 일이 있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고. 변명은 실제로 한국 사회에 통하였다. 망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렇게 협력해야만 하는 것이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해방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주어졌다는 ‘신화’가 우리 사회를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의 패전 가능성이 떠오르지조차 않았으리라는 것은 불합리한 상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버지 일기 중에서 해방 전 일본의 패전을 예견했다는 말씀을 봤다. “밤에 자리에 든 뒤에 아버지께서 전쟁 중에 내가 한 말이 그때는 기연미연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옳았다는 것을 말씀하시었다. 첫째, 일본이 금명년 중으로 전쟁에 질 것이며 지면 조선은 독립한다는 것이며, 둘째 (…)”(김성칠, 『역사 앞에서』1946년 2월 2일자)
빼어난 통찰력을 필요로 한 예견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사람인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그에 입각해 행동 선택에 관한 조언을 드렸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일 수 없다. 그분 나름의 ‘과학적’ 판단으로 믿음을 가진 상식적 예견이었다. 하지만 그 예견을 그분도 아무에게나 얘기하고 다녔을 리는 없다.
해방을 앞두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기록은 거의 없다. 김성칠도 해방 전에 예견했다는 사실을 해방 후에야 적었다. 실증적 기준으로는 이 기록이 그의 예견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역사 앞에서』 전체 내용을 통해 그의 기록 자세를 확인한 위에서야 이 기록이 신빙성을 가지는 것이다.
저자는 실증보다 상식을 중시한다. 웬만한 사람들이 일본의 패망 가능성을 상당 기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는 것도, 그 가능성을 생각한 사람들이 그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웠으리라는 것도 그에게는 상식적 판단이다. 해방의 의외성을 과장함으로써 기쁨을 강조하는 ‘눈 가리고 아웅’ 풍조를 그 판단 위에서 말하는 것이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해방이 뜻밖에 찾아왔다”는 ‘비상식적’ 상황 설명이 이 사회에 통용되어 온 까닭을 저자는 따진다.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활동이 많은 ‘지도층’의 비겁성을 그는 지적한다. 지도층에게는 사회의 장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데 앞장설 책임이 있다. 조선의 지도층이 해방 전에 일본의 패전 가능성을 거론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 “예견을 했다면 왜 그에 따른 행동이 없었냐?” 하는 추궁이 두려워 시치미를 떼는 것은 지도층의 책임을 근본적으로 외면하는 짓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김민기가 한탄한 대한민국 지도층의 비겁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권력의 횡포가 더욱더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은 협박이 통하기 때문이었고, 협박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식이 외면당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이 힘에 대한 두려움과 혼동되는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원칙과 상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극좌와 극우,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중도파의 입지를 함께 공략하다
해외 독립운동 세력 중 이승만이 10월 중순에, 중경 임시정부가 11월 하순에, 그리고 독립동맹이 12월에 귀국했다. 이들의 귀국 전 정치에 나선 사람들은 크게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나뉘었다. 빠르고 큰 변화를 바라는 진보 성향과 완만하고 신중한 변화를 바라는 보수 성향이 엇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자는 애초의 진보와 보수의 성향 차이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좌익 인사의 대부분도 지나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혁명의 진도를 늦추는 데 동의했고, 우익 인사의 대부분도 상당한 범위의 사회혁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혁명의 범위와 진도를 절충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을 좌우 구분 없이 ‘중도파’라 규정한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본 식민통치에 억눌려왔던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여러 원리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개인과 집단에 따라 어느 원리에 얼마만큼 큰 비중을 두느냐 편차가 있었지만, 그 원리들이 절대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절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를 따로 세우지 않고도,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대다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범위에 드는 사람들을 ‘중도파’로 나는 범칭한다.
어느 당과 어느 당 사이는 샛강이고 또 다른 어느 당과 사이는 한강이란 말이 나돈 일이 있는데 이 중도파 안의 여러 파벌(좌익이고 우익이고 간에) 사이는 모두 샛강이었다. 모든 한국인이 식민지시대에 비해 빈곤과 폭력의 위협을 덜 받는, 그리고 한국인이 뭉쳐진 힘으로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중도파가 공유하는 지상과제였다.
해방 즉시 중도파 노선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출범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1943년까지 옥고를 치른 경력으로 대중의 신뢰를 받는다는 점에서 중도파를 이끌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극좌와 극우의 협공 앞에 몇 주일 안 돼 자초하고 만다. 저자는 각각의 진영 속에서 중도파가 몰락하고 극단파가 득세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진영간 대결이라는 허구의 틀 속에서 어떤 현실적 투쟁이 벌어졌는지 검토한다.
건준의 목을 조른 것은 총독부였다. 조선인민의 열망과 의지를 건준으로 모으게 해놓고는 그 활동근거를 옥죄어버렸다. 한민당 주류 엘리트집단은 건준의 손발을 잡아 묶었다. 그리고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인민공화국’은 집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립 격화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결국 인민이 바라던 성실한 ‘건국 준비’ 대신 분란의 소지로서밖에 의미가 없는 이름만의 ‘공화국’이 남았던 것이다. 극우파가 온갖 흑색선전으로 민족주의자들의 건준 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동안 극좌파는 건준을 헤게모니 투쟁의 도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극좌와 극우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나 중도파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양측은 공생관계를 맺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다. 이 관계는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이 안성되기 전에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양측은 두 나라 점령군의 존재를 이 공생관계의 강화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해방 후 몇 주일 동안에 형성된 ‘적대적 공생관계’가 모습을 바꿔 가며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음을 강조한다.
현대정치 상황의 고찰에서 좌익과 우익을 우선 구분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저자는 해방공간에서는 좌우 구분보다 정치꾼들의 집단을 따로 떼어놓고 보기를 권한다. ‘꾼’들의 이기적 행동을 현실사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정상적 정치활동과 구분해서 보는 관점을 『해방일기』를 통해 세워보고자 하는 것이다. 극우는 우익에게 독이었고 극좌는 좌익에게 독이었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불러온 1차 변수는 외적 조건, 내적 조건은 그 종속 변수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 ‘공간’의 정치상황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이 ‘분단’이었다. 그러나 ‘점령’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실질적 의미가 있었다. 점령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이 존중받는 상황이었다면 분단문제만 하더라도 극복의 길이 더 활발하게 모색되었을 것이고, 분단은 짧은 일시적 상황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항복 접수라는 실용적 목적”으로 출발한 분단이 점령 상황 때문에 강고해진 것이다.
저자는 우선 미군정이 만들어 준 ‘적대적 공생관계’의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극단파는 소수였다. 해방공간을 주도할 입장이 아니라 눈치 보며 적응하기에 바쁠 입장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에 특권을 누리던 한국인 집단에게 엄청난 기회를 미군정이 만들어주었다. 미군정은 해방 전 일본인의 권력을 그 밑에 있던 한국인 집단에게 넘겨준 것이다. 좌익에서도 극단적 공산주의자는 소수였다. 그런데 미군정이 과거의 친일세력을 극우파로 키워내자 이에 대한 반발로 극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것은 다시 극우파의 역할을 더욱 부각시켜 주면서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미군정의 극우파 양성과 이에 따른 극좌파의 득세는 좌우의 대화의 조건을 파괴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불러온 1차 변수를 외적 조건으로 보며, 내적 조건은 그 종속변수로 간주한다. 미-소 대결이 통일국가 형성의 내부 욕구를 단순히 억누른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두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일본에 이어 이제 두 나라의 의지가 한국의 미래 결정을 한국인의 손에 맡겨놓지 않은 억압요인이 된 것이다. 문제를 먼저 일으킨 것은 미국이었다. 초기단계에서 소련은 수동적인 입장이었고, 이후 한국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미국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저자는 해석한다.
“『해방일기』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줄거리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의 하나다.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세달, 아직 시작단계에서 전쟁의 원인을 논한다는 것이 성급한 짓이지만 작업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접근방향을 한차례 제시해 두는 것이 좋겠다. 초기 미군정의 극심한 폭력성을 서술하고 보니, 전쟁의 원인을 미국 쪽에서 찾고 있는 내 작업가설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느껴졌다. 아직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1945년 10월 말의 상황으로부터 전쟁 발발까지 56개월의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 중에는 전쟁에 더 큰 작용을 할 요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초 2개월간의 미군정은 분단과 전쟁의 개연성을 늘리는 쪽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29일 본문 중에서)
‘내인론’이란 한국인들 사이의 불화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격렬한 항쟁이 내인론의 근거로 제시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결렬한 항쟁이라는 것이 외부의 작용으로 빚어진 부차적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적어도 그 실마리는 잡았다고 생각된다.” 며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한국인의 결함이 아니라 외세의 작용에 있음을 밝혀나가고 있다.
61세의 김기협이 찾은 55세의 스승, 안재홍
『해방일기』는 안재홍의 모습을 밝히는 데 상당한 역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두어 주일마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는 가상 대담을 꾸민다. 안재홍을 해방공간의 안내자로 내세우는 것이다.
안재홍을 부각시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저자는 안재홍의 중도적 정치노선을 현대 독자들에게 소개할 필요를 크게 느낀다. 둘째, 안재홍이 야심과 편견에 휘둘리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공정하게 서술하기에 적합하다. 셋째, 안재홍은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소상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를 배우고자 한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우리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방 시점에서 안재홍이 제안한 신민족주의는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와 독립국가의 민족주의는 달라야 한다는 전제 아래 구조조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조조정이라는 틀에서 신민족주의의 의미를 검토하고 싶은 것이다.”
안재홍(1891~1965)은 여운형과 함께 중도파의 길을 걸었는데 여운형(1886~1947)이 좌익과 함께하면서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겠다는 중도 좌파의 길을 택했다면 안재홍은 우익에 속하면서 좌익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중도 우파의 길을 택하였다. 안재홍은 1920년대에 ‘좌파’를 자임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해방 후의 ‘좌파’와는 다른 뜻으로, 개량주의자와 대비시킨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를 가리킨 말이었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거리를 크게 보지 않는 그의 관점을 알아볼 수 있다.
가상 대담은 저자의 상상으로 꾸민 것이다. 그러나 『민세 안재홍 선집』 7책의 내용에서 근거를 최대한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안재홍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 차례 문답을 예시한다.
김기협: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러나 조선의 경제사회 구조가 일본 지배 35년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까? 농지 소유구조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집중도가 높아져서 소작농의 비율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광공업 분야의 노동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계급 모순도 지금의 조선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의 보유자들이 우대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큰 재산과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람들 아닙니까? 선생님 주변을 둘러보세요. 식민 지배에 저항한 사람들은 재산이 꽤 있던 사람들도 재산을 잃었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능력을 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자제들은 고등교육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에 대한 우대는 바로 친일파의 옹호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안재홍: 두 가지 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35년 동안 조선에서도 계급 모순이 상당히 자라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의 대부분은 이민족 지배에 기인한 것입니다. 농지 문제만 하더라도 조선인 사이의 모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농지의 20%를 일본인과 일본 회사들이 탈취한 것이 문제의 몸통입니다. 그들의 농지만 몰수해서 영세농에게 분배해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됩니다. 조선인 지주의 경우, 극소수 악질 친일파 외에는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협력’ 문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방 전에 관리를 지낸 사람들, 사업해서 재산 모은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처럼 미련하게 살아온 사람까지 그 시대에 신문사 사장 해먹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아 그 시대에 숨 쉬고 산 것까지 친일로 몰아붙이면 비판의 실질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기준을 좁혀 아주 악질적인 경우만 철저히 처단함으로써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기 가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약간 찜찜한 채로 시키는 짓 한 것을 너무 엄하게 다스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시키지도 않는 짓을 찾아 저지른 놈들만 잡아내도 혼낼 놈들 얼마든지 많습니다.
탁월한 도덕가도 아니고 형편없는 패륜아도 아닌 보통사람들, 심지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포용해 주면 과거의 행적에서 반성할 점은 반성하며 더 훌륭한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비판에 직면하면 이를 악물고 눈을 흘기며 더 나쁜 길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 도덕적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이 사회를 위해 어떤 기준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역사 앞에서』일기 원본, 2011년 4월 26일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
- 『해방일기』의 대(代)를 잇는 의미
김기협은 『해방일기』를 시작하면서 선친의 유업을 잇는 뜻을 다짐했다. 그는 1987년 선친의 일기에 접한 이래 『역사 앞에서』 출간(1993년)과 『용비어천가』 재번역 출간(1997) 등 선친의 유업을 보완하는 일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09년에는 『역사 앞에서』개정판을 추진했다.
『해방일기』 첫 권 출간을 앞둔 시점에서 그가 『역사 앞에서』 원본의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기증을 결정했다. 어머니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교수가 36년간 지키고 있다가 넘겨주신 후 24년간 맡아 가지고 있던 원본을 사회에 돌려보내도록 92세의 어머니를 설득(?)한 것이다. 그 기쁨을 『해방일기』 첫 권 머리말에 적었다.
내 마음속에 이 작업과 맺어져 있는 일 하나를 기쁜 마음으로 밝힌다. 『역사 앞에서』로 출간된 아버지 일기 원본을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독자들 손에 이 책이 닿을 무렵에는 도서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작년 초 경기도박물관에서 6?25 전시회를 위해 대여해 갈 때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께 넘겨받은 후 20여년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자료를 사회적으로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기관에 맡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기왕이면 아버지 인연에 잘 맞는 기관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 고향에 가까운 한 연구기관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달 어머니가 한차례 건강의 위기를 겪으시는 동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 자료를 만든 분의 인연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36년간 혼자 지켜 후세에 전하신 어머니의 인연을 더 앞세울 만하지 않을까?
마침 연전에 『역사 앞에서』 개정판 작업을 맡아준 정병준 교수가 이화여대에 봉직한다는 것도 인연이 겹치는 일이다. 정 교수에게 뜻을 알렸더니 도서관에서 반갑게 받아들인다는 뜻을 며칠 안 되어 전해 왔다.
어제 어머니께 원본을 들고 갔다. 1950년 6월 25일자를 펼쳐드리니 몇 자 소리내어 읽다가 그만두고 말없이 생각에 잠기신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공공기관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생각, 이화여대가 적합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말씀드리니 묵묵히 일기만 들여다보시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가볍게 말씀하신다. “그래, 잘했다.”
『해방일기』를 책으로 펴내는 입장에서도 저자의 의지가 역사학자와 국어학자였던 그 부모님의 뜻과 어울리는 측면이 작업의 기반으로 든든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역사 앞에서』 출간으로 선친의 모습을 세상에 전한 데 이어 지난 1월에는 늙으신 어머니의 발랄한(?) 모습을 그린 『아흔 개의 봄』을 출간했다. 다른 회사에서(서해문집) 펴낸 책이지만, 『해방일기』 독자들이 저자의 사람됨과 작업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으로 권하고 싶다.
▣ 작가 소개
저자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원칙과 상식을 낯설어하는 사회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45년 8월 1 ~ 15일
1945. 8. 1. 『해방일기』를 시작합니다
1945. 8. 2. 포츠담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
1945. 8. 3. 폴란드의 해방 아닌 해방
1945. 8. 4. 모겐소가 부끄러워한 지독한 점령정책, ‘모겐소 플랜’
1945. 8. 5.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밥’
1945. 8. 6.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1945. 8. 9.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참극
1945. 8. 10. 일본의 항복 시점이 미ㆍ소 지분을 결정했다
해방의 시공간 - 1945년의 세계
1945. 8. 11. 미-소의 ‘눈치 보기’ 속에 그어진 38선
1945. 8. 12. 다급해진 총독부가 붙잡고 매달린 인물
1945. 8. 13. ‘항복’이라는 마지막 칼자루를 쥔 일본
1945. 8. 15.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었나요?
2 항복을 선언했으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 1945년 8월 16 ~ 31일
1945. 8. 16. 여운형ㆍ안재홍, ‘건국 준비’에 나서다
1945. 8. 17. 총독부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1945. 8. 18. 좌익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 8. 19. 조선의 기독교와 민족주의
1945. 8. 20. 식민지배가 키워준 지주층의 ‘민족자본’
1945. 8. 23. 소련군의 인민위원회 지지와 지원
1945. 8. 24. 정회(町會), 민중과의 접점
1945. 8. 25. 황폐한 이념시장 안의 ‘적대적 공생’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8월과 9월
1945. 8. 26. 건준을 외면한 자본가 집단
1945. 8. 28. 얄타의 배신, 폴란드의 비극
1945. 8. 30.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의 모습
1945. 8. 31. 식민지시대의 엘리트계층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온 사람들
3 남과 북 점령군의 서로 다른 모습 1945년 9월 1 ~ 15일
1945. 9. 1. ‘건국’의 주체가 되지 못한 건국준비위원회
1945. 9. 2. 전쟁광 맥아더의 손에 맡겨진 극동지역
1945. 9. 3. 임시정부의 가치는 무엇에 있었는가?
1945. 9. 4.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결별
1945. 9. 6. 극좌와 극우의 대두
1945. 9. 7. 해방공간의 실패는 우익의 실패였다
1945. 9. 8. 건국동맹은 어디에 있었는가?
해방의 시공간 - 1945년 주요 정당의 계보도
1945. 9. 9. 미군과 소련군, 어떻게 달랐나?
1945. 9. 10. 좌익과 우익은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1945. 9. 13. 하지 사령관의 첫 기자회견
1945. 9. 14. 유치하고 졸렬한 ‘인민공화국’
1945. 9. 15.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온 미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은 독립운동의 종착점 아닌 출발점
4 댄스홀과 요정이 그토록 번창한 이유는? 1945년 9월 16 ~ 30일
1945. 9. 16. 한민당의 명분과 실제
1945. 9. 17. 미군정이 풀어준 폭력의 고삐
1945. 9. 19. 김일성의 등장
1945. 9. 20. 동아시아에서 수동적 태도였던 소련
1945. 9. 21. “친일파여, 떨지 마라! 한민당이 있다.”
해방의 시공간 - 정치 1번지 종로의 정치지형도
1945. 9. 24. ‘무조건 항복’에 임하는 일본인들의 자세
1945. 9. 27. 한 달간 통화량 70% 증가의 의미
1945. 9. 28. 에드거 스노가 본 한국의 소련군과 미군
1945. 9. 29. 국민당과 한민당의 다른 점
1945. 9. 30. 그 많은 돈을 일본인들은 왜 뿌리고 갔나?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1
5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갈림길 1945년 10월 1 ~ 15일
1945. 10. 1. 독립운동 최대의 상징, 임시정부
1945. 10. 4. 한국인의 ‘준비된 근대어’, 한글
1945. 10. 5. 미군정, ‘어리석음’보다 ‘게으름’이 문제였다
1945. 10. 6. 단순치 않았던 임정 내부구조
1945. 10. 7. 세력확대를 위한 해방 후 임정의 노력
1945. 10. 8. 박헌영과 김일성의 만남
1945. 10. 11. 한민당과 아놀드의 찰떡궁합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10월
1945. 10. 12. 자기 손으로 만든 박헌영의 지도력
1945. 10. 13. 남한의 공용어가 영어였던 시절
1945. 10. 14. 조직력의 박헌영과 대중성의 김일성
1945. 10. 15. 맥아더-이승만-하지, 무슨 음모를 꾸몄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2
6장 제목 미정 제목 미정 1945년 10월 15 ~ 30일
1945. 10. 17. 염불은 싫고 잿밥만 좋았던 이승만
1945. 10. 20. 이승만은 친미파가 아니었다, 미국인이었다
1945. 10. 21. 하지에게 ‘군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1945. 10. 22. 도와주고는 후회하게 되는 사람, 이승만
해방의 시공간 - 돌아온 해외 운동세력
1945. 10. 25. 필리핀 지배가 신탁통치의 모범?
1945. 10. 26. ‘한국인의 자치능력?’ 억누른 게 누군데!
1945. 10. 27. “주여, 하지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1945. 10. 28. 민심에 역행한 미군정 정책
1945. 10. 29. 미군정이 만들어준 ‘적대적 공생관계’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점령군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역사학자 김기협,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대장정에 오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우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40주째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 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 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대장정의 첫 걸음 -『해방일기』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해방일기』 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개요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후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까지는 몇 주일의 간격이 있었고, 전국이 실효적 점령 상태에 들어가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권력의 공백’ 기간에 해방 조선의 정치적 요소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의가 집중된 두 개의 초점이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었다. 민족혁명을 앞세운 쪽이 우익이고 사회혁명을 중시한 쪽이 좌익이었다. 두 진영이 혁명의 속도와 범위를 타협할 수 있다고 보는 중도파가 민의를 폭넓게 대표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로 나타났다.
9월로 접어들며 극좌와 극우가 나타났다. 일체의 사회혁명을 거부하는 극우파가 한민당을 거점으로 만들었고, 급속하고 철저한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상대방의 배제를 주장하는 대립관계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존재를 내 주장의 근거로 삼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중도파의 입지를 함께 공략했다.
10월까지 미-소 군대의 실효적 점령이 완성됨에 따라 점령군의 존재가 정치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방어적 입장에 처해 있던 소련 쪽보다 국제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앞두고 있던 미국 쪽 입장이 더 큰 작용을 일으켰다. 이북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활동 성장을 도와주며 소극적 입장을 지킨 반면 이남의 미군은 일본인의 지배자 위치를 물려받아 자치활동을 적극 억압했다. 극우파가 미군의 옹호 아래 세력을 키우고 그 반동으로 극좌파가 좌익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해방일기』 제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2011년 7월 출간예정)
10월 이후 김일성 일파, 이승만, 임정, 독립동맹 등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귀국하여 국내 정치 상황에 작용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대, 특히 그 말기의 전쟁기에 일제의 폭압이 극렬해서 국내 민족운동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민족운동 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우익 쪽에서 해외 민족운동세력의 비중이 컸다. 이승만과 김구는 귀국하자마자 우익의 ‘영수’가 되었다. 이북에서 김일성 일파와 독립동맹을 주축으로 좌파-중도파의 연합전선이 순조롭게 형성된 것은 소련군이 좌파를 후원하되 우파를 극단적으로 배척하지 않은 결과였다. 반면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극우파를 극력 옹호한 결과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중도파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미 국무성의 공식적 ‘국제주의’ 노선과 대립하는 맥아더의 ‘국가주의’ 노선을 미군정이 따르는 바람에 이남의 정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이 연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앞에서 극렬한 반탁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반탁운동을 통해 극우와 극좌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완성되었다. 양측은 상대방의 ‘배제’ 정도가 아니라 ‘절멸’을 외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중도파는 극단적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에 몰렸다. 1월 중 민족통일전선 시도가 실패하면서 임정 비주류 요인들이 우익 연합을 지향하는 비상국민회의 준비에서 이탈함으로써 ‘임정 분열’까지 일어났다.
1월 중순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함으로써 미소공위의 실패를 예고했다. 예비회담 실패의 결정적 이유는 미군정의 쌀 시장 통제 실패에 있었다. 이남 주민들의 극심한 고통을 가져오고 미소공위에까지 악영향을 미친 쌀 문제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노선이 가져온 해악의 전형적 사례였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토지개혁)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해방일기』제1권의 관점과 특징
“왜 해방을 못 본 척하는가?” 실증보다 상식으로 역사를 본다
시인 서정주는 일제 말기에 열성적으로 ‘협력’했던 사실을 아주 간단한 말로 변명한 일이 있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고. 변명은 실제로 한국 사회에 통하였다. 망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렇게 협력해야만 하는 것이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해방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주어졌다는 ‘신화’가 우리 사회를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의 패전 가능성이 떠오르지조차 않았으리라는 것은 불합리한 상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버지 일기 중에서 해방 전 일본의 패전을 예견했다는 말씀을 봤다. “밤에 자리에 든 뒤에 아버지께서 전쟁 중에 내가 한 말이 그때는 기연미연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옳았다는 것을 말씀하시었다. 첫째, 일본이 금명년 중으로 전쟁에 질 것이며 지면 조선은 독립한다는 것이며, 둘째 (…)”(김성칠, 『역사 앞에서』1946년 2월 2일자)
빼어난 통찰력을 필요로 한 예견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사람인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그에 입각해 행동 선택에 관한 조언을 드렸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일 수 없다. 그분 나름의 ‘과학적’ 판단으로 믿음을 가진 상식적 예견이었다. 하지만 그 예견을 그분도 아무에게나 얘기하고 다녔을 리는 없다.
해방을 앞두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기록은 거의 없다. 김성칠도 해방 전에 예견했다는 사실을 해방 후에야 적었다. 실증적 기준으로는 이 기록이 그의 예견을 증명해 주지 못한다. 『역사 앞에서』 전체 내용을 통해 그의 기록 자세를 확인한 위에서야 이 기록이 신빙성을 가지는 것이다.
저자는 실증보다 상식을 중시한다. 웬만한 사람들이 일본의 패망 가능성을 상당 기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는 것도, 그 가능성을 생각한 사람들이 그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웠으리라는 것도 그에게는 상식적 판단이다. 해방의 의외성을 과장함으로써 기쁨을 강조하는 ‘눈 가리고 아웅’ 풍조를 그 판단 위에서 말하는 것이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해방이 뜻밖에 찾아왔다”는 ‘비상식적’ 상황 설명이 이 사회에 통용되어 온 까닭을 저자는 따진다.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활동이 많은 ‘지도층’의 비겁성을 그는 지적한다. 지도층에게는 사회의 장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데 앞장설 책임이 있다. 조선의 지도층이 해방 전에 일본의 패전 가능성을 거론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 “예견을 했다면 왜 그에 따른 행동이 없었냐?” 하는 추궁이 두려워 시치미를 떼는 것은 지도층의 책임을 근본적으로 외면하는 짓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김민기가 한탄한 대한민국 지도층의 비겁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권력의 횡포가 더욱더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은 협박이 통하기 때문이었고, 협박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식이 외면당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이 힘에 대한 두려움과 혼동되는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원칙과 상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극좌와 극우,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중도파의 입지를 함께 공략하다
해외 독립운동 세력 중 이승만이 10월 중순에, 중경 임시정부가 11월 하순에, 그리고 독립동맹이 12월에 귀국했다. 이들의 귀국 전 정치에 나선 사람들은 크게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나뉘었다. 빠르고 큰 변화를 바라는 진보 성향과 완만하고 신중한 변화를 바라는 보수 성향이 엇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자는 애초의 진보와 보수의 성향 차이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좌익 인사의 대부분도 지나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혁명의 진도를 늦추는 데 동의했고, 우익 인사의 대부분도 상당한 범위의 사회혁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혁명의 범위와 진도를 절충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을 좌우 구분 없이 ‘중도파’라 규정한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본 식민통치에 억눌려왔던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여러 원리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개인과 집단에 따라 어느 원리에 얼마만큼 큰 비중을 두느냐 편차가 있었지만, 그 원리들이 절대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절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를 따로 세우지 않고도,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대다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범위에 드는 사람들을 ‘중도파’로 나는 범칭한다.
어느 당과 어느 당 사이는 샛강이고 또 다른 어느 당과 사이는 한강이란 말이 나돈 일이 있는데 이 중도파 안의 여러 파벌(좌익이고 우익이고 간에) 사이는 모두 샛강이었다. 모든 한국인이 식민지시대에 비해 빈곤과 폭력의 위협을 덜 받는, 그리고 한국인이 뭉쳐진 힘으로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중도파가 공유하는 지상과제였다.
해방 즉시 중도파 노선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출범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1943년까지 옥고를 치른 경력으로 대중의 신뢰를 받는다는 점에서 중도파를 이끌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극좌와 극우의 협공 앞에 몇 주일 안 돼 자초하고 만다. 저자는 각각의 진영 속에서 중도파가 몰락하고 극단파가 득세하는 과정을 살펴보며 진영간 대결이라는 허구의 틀 속에서 어떤 현실적 투쟁이 벌어졌는지 검토한다.
건준의 목을 조른 것은 총독부였다. 조선인민의 열망과 의지를 건준으로 모으게 해놓고는 그 활동근거를 옥죄어버렸다. 한민당 주류 엘리트집단은 건준의 손발을 잡아 묶었다. 그리고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인민공화국’은 집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립 격화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결국 인민이 바라던 성실한 ‘건국 준비’ 대신 분란의 소지로서밖에 의미가 없는 이름만의 ‘공화국’이 남았던 것이다. 극우파가 온갖 흑색선전으로 민족주의자들의 건준 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동안 극좌파는 건준을 헤게모니 투쟁의 도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극좌와 극우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나 중도파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양측은 공생관계를 맺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다. 이 관계는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이 안성되기 전에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양측은 두 나라 점령군의 존재를 이 공생관계의 강화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해방 후 몇 주일 동안에 형성된 ‘적대적 공생관계’가 모습을 바꿔 가며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음을 강조한다.
현대정치 상황의 고찰에서 좌익과 우익을 우선 구분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저자는 해방공간에서는 좌우 구분보다 정치꾼들의 집단을 따로 떼어놓고 보기를 권한다. ‘꾼’들의 이기적 행동을 현실사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정상적 정치활동과 구분해서 보는 관점을 『해방일기』를 통해 세워보고자 하는 것이다. 극우는 우익에게 독이었고 극좌는 좌익에게 독이었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불러온 1차 변수는 외적 조건, 내적 조건은 그 종속 변수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 ‘공간’의 정치상황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이 ‘분단’이었다. 그러나 ‘점령’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실질적 의미가 있었다. 점령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이 존중받는 상황이었다면 분단문제만 하더라도 극복의 길이 더 활발하게 모색되었을 것이고, 분단은 짧은 일시적 상황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항복 접수라는 실용적 목적”으로 출발한 분단이 점령 상황 때문에 강고해진 것이다.
저자는 우선 미군정이 만들어 준 ‘적대적 공생관계’의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극단파는 소수였다. 해방공간을 주도할 입장이 아니라 눈치 보며 적응하기에 바쁠 입장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에 특권을 누리던 한국인 집단에게 엄청난 기회를 미군정이 만들어주었다. 미군정은 해방 전 일본인의 권력을 그 밑에 있던 한국인 집단에게 넘겨준 것이다. 좌익에서도 극단적 공산주의자는 소수였다. 그런데 미군정이 과거의 친일세력을 극우파로 키워내자 이에 대한 반발로 극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것은 다시 극우파의 역할을 더욱 부각시켜 주면서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미군정의 극우파 양성과 이에 따른 극좌파의 득세는 좌우의 대화의 조건을 파괴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불러온 1차 변수를 외적 조건으로 보며, 내적 조건은 그 종속변수로 간주한다. 미-소 대결이 통일국가 형성의 내부 욕구를 단순히 억누른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의 형성과 전개과정에 두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일본에 이어 이제 두 나라의 의지가 한국의 미래 결정을 한국인의 손에 맡겨놓지 않은 억압요인이 된 것이다. 문제를 먼저 일으킨 것은 미국이었다. 초기단계에서 소련은 수동적인 입장이었고, 이후 한국에 대한 소련의 태도는 미국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저자는 해석한다.
“『해방일기』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줄거리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의 하나다.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세달, 아직 시작단계에서 전쟁의 원인을 논한다는 것이 성급한 짓이지만 작업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접근방향을 한차례 제시해 두는 것이 좋겠다. 초기 미군정의 극심한 폭력성을 서술하고 보니, 전쟁의 원인을 미국 쪽에서 찾고 있는 내 작업가설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느껴졌다. 아직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1945년 10월 말의 상황으로부터 전쟁 발발까지 56개월의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 중에는 전쟁에 더 큰 작용을 할 요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초 2개월간의 미군정은 분단과 전쟁의 개연성을 늘리는 쪽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29일 본문 중에서)
‘내인론’이란 한국인들 사이의 불화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격렬한 항쟁이 내인론의 근거로 제시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 결렬한 항쟁이라는 것이 외부의 작용으로 빚어진 부차적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적어도 그 실마리는 잡았다고 생각된다.” 며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한국인의 결함이 아니라 외세의 작용에 있음을 밝혀나가고 있다.
61세의 김기협이 찾은 55세의 스승, 안재홍
『해방일기』는 안재홍의 모습을 밝히는 데 상당한 역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두어 주일마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는 가상 대담을 꾸민다. 안재홍을 해방공간의 안내자로 내세우는 것이다.
안재홍을 부각시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저자는 안재홍의 중도적 정치노선을 현대 독자들에게 소개할 필요를 크게 느낀다. 둘째, 안재홍이 야심과 편견에 휘둘리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공정하게 서술하기에 적합하다. 셋째, 안재홍은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소상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를 배우고자 한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우리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방 시점에서 안재홍이 제안한 신민족주의는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와 독립국가의 민족주의는 달라야 한다는 전제 아래 구조조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조조정이라는 틀에서 신민족주의의 의미를 검토하고 싶은 것이다.”
안재홍(1891~1965)은 여운형과 함께 중도파의 길을 걸었는데 여운형(1886~1947)이 좌익과 함께하면서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겠다는 중도 좌파의 길을 택했다면 안재홍은 우익에 속하면서 좌익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중도 우파의 길을 택하였다. 안재홍은 1920년대에 ‘좌파’를 자임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해방 후의 ‘좌파’와는 다른 뜻으로, 개량주의자와 대비시킨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를 가리킨 말이었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거리를 크게 보지 않는 그의 관점을 알아볼 수 있다.
가상 대담은 저자의 상상으로 꾸민 것이다. 그러나 『민세 안재홍 선집』 7책의 내용에서 근거를 최대한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안재홍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 차례 문답을 예시한다.
김기협: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러나 조선의 경제사회 구조가 일본 지배 35년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까? 농지 소유구조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집중도가 높아져서 소작농의 비율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광공업 분야의 노동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계급 모순도 지금의 조선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의 보유자들이 우대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큰 재산과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람들 아닙니까? 선생님 주변을 둘러보세요. 식민 지배에 저항한 사람들은 재산이 꽤 있던 사람들도 재산을 잃었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능력을 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자제들은 고등교육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에 대한 우대는 바로 친일파의 옹호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안재홍: 두 가지 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35년 동안 조선에서도 계급 모순이 상당히 자라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의 대부분은 이민족 지배에 기인한 것입니다. 농지 문제만 하더라도 조선인 사이의 모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농지의 20%를 일본인과 일본 회사들이 탈취한 것이 문제의 몸통입니다. 그들의 농지만 몰수해서 영세농에게 분배해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됩니다. 조선인 지주의 경우, 극소수 악질 친일파 외에는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협력’ 문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방 전에 관리를 지낸 사람들, 사업해서 재산 모은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처럼 미련하게 살아온 사람까지 그 시대에 신문사 사장 해먹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아 그 시대에 숨 쉬고 산 것까지 친일로 몰아붙이면 비판의 실질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기준을 좁혀 아주 악질적인 경우만 철저히 처단함으로써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기 가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약간 찜찜한 채로 시키는 짓 한 것을 너무 엄하게 다스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시키지도 않는 짓을 찾아 저지른 놈들만 잡아내도 혼낼 놈들 얼마든지 많습니다.
탁월한 도덕가도 아니고 형편없는 패륜아도 아닌 보통사람들, 심지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포용해 주면 과거의 행적에서 반성할 점은 반성하며 더 훌륭한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비판에 직면하면 이를 악물고 눈을 흘기며 더 나쁜 길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 도덕적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이 사회를 위해 어떤 기준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역사 앞에서』일기 원본, 2011년 4월 26일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
- 『해방일기』의 대(代)를 잇는 의미
김기협은 『해방일기』를 시작하면서 선친의 유업을 잇는 뜻을 다짐했다. 그는 1987년 선친의 일기에 접한 이래 『역사 앞에서』 출간(1993년)과 『용비어천가』 재번역 출간(1997) 등 선친의 유업을 보완하는 일에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09년에는 『역사 앞에서』개정판을 추진했다.
『해방일기』 첫 권 출간을 앞둔 시점에서 그가 『역사 앞에서』 원본의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기증을 결정했다. 어머니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교수가 36년간 지키고 있다가 넘겨주신 후 24년간 맡아 가지고 있던 원본을 사회에 돌려보내도록 92세의 어머니를 설득(?)한 것이다. 그 기쁨을 『해방일기』 첫 권 머리말에 적었다.
내 마음속에 이 작업과 맺어져 있는 일 하나를 기쁜 마음으로 밝힌다. 『역사 앞에서』로 출간된 아버지 일기 원본을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독자들 손에 이 책이 닿을 무렵에는 도서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작년 초 경기도박물관에서 6?25 전시회를 위해 대여해 갈 때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께 넘겨받은 후 20여년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자료를 사회적으로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기관에 맡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기왕이면 아버지 인연에 잘 맞는 기관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 고향에 가까운 한 연구기관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달 어머니가 한차례 건강의 위기를 겪으시는 동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 자료를 만든 분의 인연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36년간 혼자 지켜 후세에 전하신 어머니의 인연을 더 앞세울 만하지 않을까?
마침 연전에 『역사 앞에서』 개정판 작업을 맡아준 정병준 교수가 이화여대에 봉직한다는 것도 인연이 겹치는 일이다. 정 교수에게 뜻을 알렸더니 도서관에서 반갑게 받아들인다는 뜻을 며칠 안 되어 전해 왔다.
어제 어머니께 원본을 들고 갔다. 1950년 6월 25일자를 펼쳐드리니 몇 자 소리내어 읽다가 그만두고 말없이 생각에 잠기신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공공기관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생각, 이화여대가 적합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말씀드리니 묵묵히 일기만 들여다보시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가볍게 말씀하신다. “그래, 잘했다.”
『해방일기』를 책으로 펴내는 입장에서도 저자의 의지가 역사학자와 국어학자였던 그 부모님의 뜻과 어울리는 측면이 작업의 기반으로 든든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역사 앞에서』 출간으로 선친의 모습을 세상에 전한 데 이어 지난 1월에는 늙으신 어머니의 발랄한(?) 모습을 그린 『아흔 개의 봄』을 출간했다. 다른 회사에서(서해문집) 펴낸 책이지만, 『해방일기』 독자들이 저자의 사람됨과 작업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으로 권하고 싶다.
▣ 작가 소개
저자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원칙과 상식을 낯설어하는 사회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45년 8월 1 ~ 15일
1945. 8. 1. 『해방일기』를 시작합니다
1945. 8. 2. 포츠담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
1945. 8. 3. 폴란드의 해방 아닌 해방
1945. 8. 4. 모겐소가 부끄러워한 지독한 점령정책, ‘모겐소 플랜’
1945. 8. 5.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밥’
1945. 8. 6.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1945. 8. 9.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참극
1945. 8. 10. 일본의 항복 시점이 미ㆍ소 지분을 결정했다
해방의 시공간 - 1945년의 세계
1945. 8. 11. 미-소의 ‘눈치 보기’ 속에 그어진 38선
1945. 8. 12. 다급해진 총독부가 붙잡고 매달린 인물
1945. 8. 13. ‘항복’이라는 마지막 칼자루를 쥔 일본
1945. 8. 15.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었나요?
2 항복을 선언했으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 1945년 8월 16 ~ 31일
1945. 8. 16. 여운형ㆍ안재홍, ‘건국 준비’에 나서다
1945. 8. 17. 총독부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1945. 8. 18. 좌익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 8. 19. 조선의 기독교와 민족주의
1945. 8. 20. 식민지배가 키워준 지주층의 ‘민족자본’
1945. 8. 23. 소련군의 인민위원회 지지와 지원
1945. 8. 24. 정회(町會), 민중과의 접점
1945. 8. 25. 황폐한 이념시장 안의 ‘적대적 공생’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8월과 9월
1945. 8. 26. 건준을 외면한 자본가 집단
1945. 8. 28. 얄타의 배신, 폴란드의 비극
1945. 8. 30.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의 모습
1945. 8. 31. 식민지시대의 엘리트계층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온 사람들
3 남과 북 점령군의 서로 다른 모습 1945년 9월 1 ~ 15일
1945. 9. 1. ‘건국’의 주체가 되지 못한 건국준비위원회
1945. 9. 2. 전쟁광 맥아더의 손에 맡겨진 극동지역
1945. 9. 3. 임시정부의 가치는 무엇에 있었는가?
1945. 9. 4.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결별
1945. 9. 6. 극좌와 극우의 대두
1945. 9. 7. 해방공간의 실패는 우익의 실패였다
1945. 9. 8. 건국동맹은 어디에 있었는가?
해방의 시공간 - 1945년 주요 정당의 계보도
1945. 9. 9. 미군과 소련군, 어떻게 달랐나?
1945. 9. 10. 좌익과 우익은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1945. 9. 13. 하지 사령관의 첫 기자회견
1945. 9. 14. 유치하고 졸렬한 ‘인민공화국’
1945. 9. 15.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온 미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은 독립운동의 종착점 아닌 출발점
4 댄스홀과 요정이 그토록 번창한 이유는? 1945년 9월 16 ~ 30일
1945. 9. 16. 한민당의 명분과 실제
1945. 9. 17. 미군정이 풀어준 폭력의 고삐
1945. 9. 19. 김일성의 등장
1945. 9. 20. 동아시아에서 수동적 태도였던 소련
1945. 9. 21. “친일파여, 떨지 마라! 한민당이 있다.”
해방의 시공간 - 정치 1번지 종로의 정치지형도
1945. 9. 24. ‘무조건 항복’에 임하는 일본인들의 자세
1945. 9. 27. 한 달간 통화량 70% 증가의 의미
1945. 9. 28. 에드거 스노가 본 한국의 소련군과 미군
1945. 9. 29. 국민당과 한민당의 다른 점
1945. 9. 30. 그 많은 돈을 일본인들은 왜 뿌리고 갔나?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1
5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갈림길 1945년 10월 1 ~ 15일
1945. 10. 1. 독립운동 최대의 상징, 임시정부
1945. 10. 4. 한국인의 ‘준비된 근대어’, 한글
1945. 10. 5. 미군정, ‘어리석음’보다 ‘게으름’이 문제였다
1945. 10. 6. 단순치 않았던 임정 내부구조
1945. 10. 7. 세력확대를 위한 해방 후 임정의 노력
1945. 10. 8. 박헌영과 김일성의 만남
1945. 10. 11. 한민당과 아놀드의 찰떡궁합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10월
1945. 10. 12. 자기 손으로 만든 박헌영의 지도력
1945. 10. 13. 남한의 공용어가 영어였던 시절
1945. 10. 14. 조직력의 박헌영과 대중성의 김일성
1945. 10. 15. 맥아더-이승만-하지, 무슨 음모를 꾸몄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2
6장 제목 미정 제목 미정 1945년 10월 15 ~ 30일
1945. 10. 17. 염불은 싫고 잿밥만 좋았던 이승만
1945. 10. 20. 이승만은 친미파가 아니었다, 미국인이었다
1945. 10. 21. 하지에게 ‘군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1945. 10. 22. 도와주고는 후회하게 되는 사람, 이승만
해방의 시공간 - 돌아온 해외 운동세력
1945. 10. 25. 필리핀 지배가 신탁통치의 모범?
1945. 10. 26. ‘한국인의 자치능력?’ 억누른 게 누군데!
1945. 10. 27. “주여, 하지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1945. 10. 28. 민심에 역행한 미군정 정책
1945. 10. 29. 미군정이 만들어준 ‘적대적 공생관계’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점령군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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