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최고의 사학자가 말하는 조선왕조사의 모든 것
한국사, 그 중에서도 조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성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던 그는 조선의 양반사회ㆍ당쟁ㆍ과거제도 등을 소재로 대중서를 출간하며 역사를 연구자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확대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 1천여 쪽이 넘는 엄청난 양으로 ‘역사 공부의 필요성, 조선왕조사 정리의 필요성’ 등을 근간으로 조선시대를 밀도 있게 정리했다. 자, 지금부터 그가 말하는 역사와 한국사, 조선왕조사에 대해 들어 보자.
왜 조선왕조사를 정리해야 하는가?
역사는 계기적으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바로 전 시대의 역사를 총정리해 현재의 기준을 세우고 미래의 좌표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에서 전대사(前代史)를 총정리해 왔다. 《삼국사기》가 그렇고 《고려사》가 그렇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일제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현재의 전대사인 조선왕조사를 총정리해 보지 못했다. 근대사학이 일제에 의해 시작된 까닭에 조선왕조에 대한 정리는 일제의 구미에 맞게 날조되었다. 이를테면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조선왕조사가 해석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사는 지리멸렬하고 고식적이며 자생력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미개한 농업기술이 그렇고, 사대주의가 그렇고, 당쟁이 그렇고, 독선적인 유교사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제불능의 조선왕조는 가만히 두어도 망하고 말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 일본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한국인을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끌어들여 구제해 준 것이라는 논리다. 이른바 식민사관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왕조사는 보잘 것 없는 역사로 전락했고 매도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나라를 남에게 빼앗겼으니 비난받아 마땅하기는 하다. 일본사람뿐 아니라 한국의 선각자들도 유교와 양반이 나라를 망쳤으니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조(自嘲)의식에 사로잡혀 유교와 양반을 돌팔매질했다. 유교가 사대주의를 키웠다고도 하고,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며 개탄했다. 과연 그런 것인가?
역사를 보는 바른 눈이 있는 민족이 미래를 이끈다
물론 나라와 민족마다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선입견이나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점만을 들춘다든지 장점만을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단순한 흑백논리에 불과하다. 일제학자들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당쟁과 고루함으로 가득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왕조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발전된 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흑백논리다. 이는 역사를 선악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다.
역사에서 선악은 동일물(同一物)의 양면일 수 있다. 좋은 점을 뒤집어보면 나쁜 점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사람은 단결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과거시험 같은 능력주의의 소산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하다 보면 단결이 잘 될 수가 없다. 그러면 단결력을 강조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매도해야 하는가? 자원도 없는 각박한 환경 속에서 이 작은 나라가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인재를 뽑아 국가를 경영한 덕분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능력주의야말로 우리의 훌륭한 정신적 자산이 아닌가?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조선왕조는 고려 500년 동안 시련과 진통을 겪으면서 배워 온 주자학을 바탕으로 지식인 관료들의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정착시킨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귀족 문화와 원나라의 세계 문화를 종합하고 우리의 토착 문화를 가미해 독창적 문화를 건설한 국가였다. 세종 대의 집현전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틀을 만들었으며, 《경국대전》은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의 결정판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문치주의 국가를 이룩했다.
문치주의 국가의 국가 안보는 국방보다 외교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자주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대 외교는 문화 외교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동아시아 외교 관계 특성이기도 했다. 이른바 책봉 관계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가 그것이다. 문화 자존 의식에 의해 문화가 앞선 중국에게는 존경심을 표하지만 문화 수준이 뒤떨어진 몽골, 여진, 거란, 일본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세웠다.
문치주의가 강화되다 보니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덕적 수양을 강조했다. 그것은 16세기 이후의 도학 정치에서 절정을 이뤘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국왕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료들에게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료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국왕은 단지 붕당 간의 조정을 꾀하는 데 급급했다. 조선의 국왕 중 어리고 무능한 왕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정국의 소산이다.
조선 왕조는 지방의 토성(土姓) 양반들을 지원해 신왕조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은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의 사대부층을 구성했다. 이른바 사대부 정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권이 자꾸만 강해졌다. 이에 세조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킨 후 공신과 결탁해 강력한 훈신 세력을 육성했다. 이에 사대부 정치 시대는 가고 훈신 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사림이 훈신에게 여러 차례 타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진출은 역사적인 대세였다. 그리하여 16세기부터는 이른바 사림 정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훈신 세력이 무너지자 사림파는 자체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붕당 간의 조정이나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탕평 정책이 실시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탕평당이 생기고 외척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영조와 정조 대는 정국이 안정되고 문운이 일어났다. 이들이 죽고 어린 왕이 자리에 앉자 외척 세력이 극성을 부렸다. 그리하여 19세기는 외척의 세도 정치 시대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러한 논리 위에서 조선 왕조의 정치사를 사대부 정치 시대훈신 정치 시대사림 정치 시대탕평 정치 시대외척 세도 정치 시대로 구분하고자 한다. 훈신 정치 시대 말기에는 대부분의 연로한 훈신들이 죽자 중종 조부터 명종 조까지 외척 권신 정치 시대가 잠시 되었다. 그러나 이는 훈신 정치 시대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고자 한다. 탕평 정치 시대도 사림 정치 시대와 외척 세도 정치 시대의 과도기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림 정치의 틀인 언관권(言官權)과 전랑권(銓郞權)이 무너진 것은 영조 17년(1741)경이었고 곧 외척 세력이 강화되어 이들이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역사 공부는 현재 우리의 삶과 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해결하고 나아가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다.
또한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다. 과거 우리의 잘잘못을 정확하게 파악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이 역사 연구의 목적이다. 인간은 실험 불가능한 존재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직면한 과제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지 모른다. 가령 전쟁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 시험적으로 전쟁을 해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객관적인 주변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야겠지만 역사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떠했나를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주어진 상황이 다르고 역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일 경우가 있기 때문에 딱 들어맞는 정답은 나오지 않겠지만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이성무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남명학연구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 양반사회 연구》, 《한국 역사의 이해》1~7,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 열전》 등 다수가 있다.
▣ 주요 목차
개국전야
위화도 회군 / 요동 정벌, 무엇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나 / 위화도 회군의 결과 / 4불가론과 붉은 무덤 / 사전 개혁 /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태조
조선을 창업한 고려의 무장 이성계 / 태조 이성계의 가문 / 조선 건국의 3대 이념 / 국호 ‘조선’의 탄생 / 신생국 조선의 개국공신 / 역성혁명 / 한양 천도 계획 / 태조의 불교 정책 / 태조와 불교계를 이어 주었던 승려, 무학 / 제1차 왕자의 난 /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정종
결코 유약하지 않던 왕, 정종 / 제2차 왕자의 난과 사병 혁파
태종
시대의 악역을 떠맡은 태종 / 조사의의 난 / 함흥차사 / 왕조의 주인은 왕이다 / 명나라와의 외교 정상화 /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 태종의 외척 제거 / 태종의 불교 정책 /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된 불교 교단 / 유교와 불교가 같음을 주장한 승려 기화
세종
조선 시대 최고의 인물, 세종 / 집현전 설치 / 4군 6진 개척 / 문화 황금기를 이룩한 세종 조 / 세종 대의 과학기술 / 세종 조의 서적 찬술
문종
어린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남긴 문종 / 군 통수 체계 완성
단종
쿠데타의 어린 희생자, 단종 /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 이징옥의 난
세조
철권 통치자, 세조 / 사육신과 생육신 /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 영월에유폐된 노산군 / 이시애의 난 / 불교를 보호했던 세조
예종
펼치지 못한 왕도의 꿈 / 민수의 사옥(史獄) / 남이의 옥
성종
조선 왕조의 체제를 완성한 성종 /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 양반과 문치주의 /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 조선 시대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 향촌 자치제의 발달 / 사림의 성장
연산군
절대왕권을 추구한 임금, 연산군 /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중종이 된 진성대군 / 반정 전야 / 반정 3인방 / 폐비 신씨, 폐위에서 복위까지 / 조광조의 개혁 정치 / 도학 정치의 조건들 / 조광조와 동지들의 정치적 실적 / 도학 정치의 좌절, 기묘사화 / 삼포왜란 / 초법적 기구, 비변사
인종
하늘이 낸 효자, 인종 / 효성스런 임금 / 대윤과 소윤의 굴레 /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명종
외척 세력의 틈바구니에 낀 명종 / 외척의 주도권 쟁탈전, 을사사화 / 부활되는 불교 그리고 보우 / 민란 시대의 의적, 임꺽정 /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 / 사림의 본거지, 서원의 출현
선조
사림 시대의 군주, 선조 / 사림 정치 시대의 개막 / 이준경의 유언, 붕당의 예고 / 300년 당쟁의 원류, 동서분당 / 정여립과 기축옥사 / 200년 숙원, 종계변무(宗系辨誣) / 1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세 / 임진왜란 / 분열하는 사림들, 남북 분당 / 북인의 분열, 대북과 소북의 각립 / 사림오현의 문묘종사
광해군
왕이 되기까지 고단했던 여정 / 정인홍의 회퇴변척(晦退辨斥) / 영남의 친북인 세력 / 계속되는 옥사 /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 / 대동법 시행
인조
능양군과 서인의 무력 정변 / 이괄의 난 / 효심의 발로인가 정통성 확보인가, 원종 추숭(元宗追崇) / 호서 산림 출현 / 병자호란 / 삼전도 비문 / 강빈 옥사
효종
와신상담의 군주, 효종 /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 / 북벌론
현종
허약한 군주, 현종 / 기해예송 / 갑인예송
숙종
숙종, 14세 유주에서 독단의 군주로 / 송시열의 고묘(告廟) 논란 / 이념의 두 기둥, 송시열과 윤휴 / 이단의 올가미 / 삼복(三福)을 제거하다 / 문묘에 종사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 숙종의 군권 강화 / 서인의 집권, 경신환국 / 노소 분당의 전주곡 / 남인의 집권, 기사환국 /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 / 노론 전제정치의 시작, 병신처분 / 군신간의 밀담, 정유독대
경종
장희빈의 아들, 경종 / 소론의 노론 타도, 신임옥사 / 소론의 득의 시대
영조
요순 임금처럼 어진 군주 / 무신란 / 왕권을 위한 탕평 정치 / 거듭되는 충역의 번복, 정미환국 / 절반은 충, 절반은 역, 기유처분 / 신임옥사에 대한 조치, 경신처분 / 정통성을 인정받은 영조, 신유대훈 / 사림 정치의 위기 / 비운의 사도세자 / 조선의 르네상스, 실학 / 성호학파의 실학 /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 청나라를 배우자, 북학 / 균역법 시행
정조
호학 군주, 정조 / 탕평의 재시도 / 홍국영의 세도정치 / 규장각 제도의 창설과 기능 강화 / 영남 만인소 / 정조의 왕권 강화
순조
어린 군주, 순조 /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 신분제의 붕괴 / 천주교 박해 / 벽파의 정치적 몰락 / 안동 김씨의 세도 /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 홍경래의 난
헌종
호색의 왕, 헌종 / 풍양 조씨의 세도 / 이양선 출몰 / 천주교 박해의 재연, 기해박해 / 김대건 신부 처형, 병오박해
철종
강화도령, 철종 / 왕위 계승의 변칙, 기유예론 / 동학의 창도자, 최제우 / 삼정의 문란 / 농민 항쟁의 확대 /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 암흑천지를 비춘 불빛
고종
시련의 군주, 고종 / 대원군의 10년 세도와 내정 개혁 / 대원군의 쇄국정책 / 조선의 개항 / 위정척사 운동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세계사를 바꾼 거문도 사건 / 동학과 농민 봉기 / 갑오경장 / 명성황후 시해 사건 / 상투와 단발령 / 의병 봉기 / 아관파천 / 고종의 환궁 / 대한제국의 탄생 /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 독립협회와 독립문 / 대한제국 운명의 갈림길이 된 러일전쟁 / 조약 아닌 조약, 을사늑약 / 돌아오지 않는 밀사
순종
황제 아닌 황제, 순종 / 대한제국 장교 박승환 / 대한국인 안중근 / 반만년 역사의 치욕, 국권피탈
부록
조선 왕실 세계도 / 조선의 국왕 / 조선왕조실록 편찬 일람표 / 조선의 왕릉 / 조선 시대 품계표
최고의 사학자가 말하는 조선왕조사의 모든 것
한국사, 그 중에서도 조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성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던 그는 조선의 양반사회ㆍ당쟁ㆍ과거제도 등을 소재로 대중서를 출간하며 역사를 연구자의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확대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 1천여 쪽이 넘는 엄청난 양으로 ‘역사 공부의 필요성, 조선왕조사 정리의 필요성’ 등을 근간으로 조선시대를 밀도 있게 정리했다. 자, 지금부터 그가 말하는 역사와 한국사, 조선왕조사에 대해 들어 보자.
왜 조선왕조사를 정리해야 하는가?
역사는 계기적으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바로 전 시대의 역사를 총정리해 현재의 기준을 세우고 미래의 좌표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에서 전대사(前代史)를 총정리해 왔다. 《삼국사기》가 그렇고 《고려사》가 그렇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일제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현재의 전대사인 조선왕조사를 총정리해 보지 못했다. 근대사학이 일제에 의해 시작된 까닭에 조선왕조에 대한 정리는 일제의 구미에 맞게 날조되었다. 이를테면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조선왕조사가 해석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사는 지리멸렬하고 고식적이며 자생력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미개한 농업기술이 그렇고, 사대주의가 그렇고, 당쟁이 그렇고, 독선적인 유교사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제불능의 조선왕조는 가만히 두어도 망하고 말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 일본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한국인을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끌어들여 구제해 준 것이라는 논리다. 이른바 식민사관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왕조사는 보잘 것 없는 역사로 전락했고 매도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나라를 남에게 빼앗겼으니 비난받아 마땅하기는 하다. 일본사람뿐 아니라 한국의 선각자들도 유교와 양반이 나라를 망쳤으니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조(自嘲)의식에 사로잡혀 유교와 양반을 돌팔매질했다. 유교가 사대주의를 키웠다고도 하고,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며 개탄했다. 과연 그런 것인가?
역사를 보는 바른 눈이 있는 민족이 미래를 이끈다
물론 나라와 민족마다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선입견이나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점만을 들춘다든지 장점만을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단순한 흑백논리에 불과하다. 일제학자들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당쟁과 고루함으로 가득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왕조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발전된 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흑백논리다. 이는 역사를 선악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다.
역사에서 선악은 동일물(同一物)의 양면일 수 있다. 좋은 점을 뒤집어보면 나쁜 점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사람은 단결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과거시험 같은 능력주의의 소산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하다 보면 단결이 잘 될 수가 없다. 그러면 단결력을 강조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매도해야 하는가? 자원도 없는 각박한 환경 속에서 이 작은 나라가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인재를 뽑아 국가를 경영한 덕분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능력주의야말로 우리의 훌륭한 정신적 자산이 아닌가?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조선왕조는 고려 500년 동안 시련과 진통을 겪으면서 배워 온 주자학을 바탕으로 지식인 관료들의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정착시킨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귀족 문화와 원나라의 세계 문화를 종합하고 우리의 토착 문화를 가미해 독창적 문화를 건설한 국가였다. 세종 대의 집현전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틀을 만들었으며, 《경국대전》은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의 결정판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문치주의 국가를 이룩했다.
문치주의 국가의 국가 안보는 국방보다 외교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자주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대 외교는 문화 외교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동아시아 외교 관계 특성이기도 했다. 이른바 책봉 관계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가 그것이다. 문화 자존 의식에 의해 문화가 앞선 중국에게는 존경심을 표하지만 문화 수준이 뒤떨어진 몽골, 여진, 거란, 일본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세웠다.
문치주의가 강화되다 보니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덕적 수양을 강조했다. 그것은 16세기 이후의 도학 정치에서 절정을 이뤘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국왕에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료들에게 있었다. 이렇게 되자 신료들 사이에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국왕은 단지 붕당 간의 조정을 꾀하는 데 급급했다. 조선의 국왕 중 어리고 무능한 왕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정국의 소산이다.
조선 왕조는 지방의 토성(土姓) 양반들을 지원해 신왕조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은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의 사대부층을 구성했다. 이른바 사대부 정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권이 자꾸만 강해졌다. 이에 세조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킨 후 공신과 결탁해 강력한 훈신 세력을 육성했다. 이에 사대부 정치 시대는 가고 훈신 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사림이 훈신에게 여러 차례 타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진출은 역사적인 대세였다. 그리하여 16세기부터는 이른바 사림 정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훈신 세력이 무너지자 사림파는 자체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붕당 간의 조정이나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탕평 정책이 실시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탕평당이 생기고 외척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영조와 정조 대는 정국이 안정되고 문운이 일어났다. 이들이 죽고 어린 왕이 자리에 앉자 외척 세력이 극성을 부렸다. 그리하여 19세기는 외척의 세도 정치 시대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러한 논리 위에서 조선 왕조의 정치사를 사대부 정치 시대훈신 정치 시대사림 정치 시대탕평 정치 시대외척 세도 정치 시대로 구분하고자 한다. 훈신 정치 시대 말기에는 대부분의 연로한 훈신들이 죽자 중종 조부터 명종 조까지 외척 권신 정치 시대가 잠시 되었다. 그러나 이는 훈신 정치 시대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고자 한다. 탕평 정치 시대도 사림 정치 시대와 외척 세도 정치 시대의 과도기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림 정치의 틀인 언관권(言官權)과 전랑권(銓郞權)이 무너진 것은 영조 17년(1741)경이었고 곧 외척 세력이 강화되어 이들이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역사 공부는 현재 우리의 삶과 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해결하고 나아가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다.
또한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다. 과거 우리의 잘잘못을 정확하게 파악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이 역사 연구의 목적이다. 인간은 실험 불가능한 존재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직면한 과제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야만 좋은 결과를 얻을지 모른다. 가령 전쟁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 시험적으로 전쟁을 해볼 수는 없다. 이럴 경우 객관적인 주변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야겠지만 역사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떠했나를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주어진 상황이 다르고 역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일 경우가 있기 때문에 딱 들어맞는 정답은 나오지 않겠지만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이성무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를 거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남명학연구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 양반사회 연구》, 《한국 역사의 이해》1~7,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 열전》 등 다수가 있다.
▣ 주요 목차
개국전야
위화도 회군 / 요동 정벌, 무엇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나 / 위화도 회군의 결과 / 4불가론과 붉은 무덤 / 사전 개혁 /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태조
조선을 창업한 고려의 무장 이성계 / 태조 이성계의 가문 / 조선 건국의 3대 이념 / 국호 ‘조선’의 탄생 / 신생국 조선의 개국공신 / 역성혁명 / 한양 천도 계획 / 태조의 불교 정책 / 태조와 불교계를 이어 주었던 승려, 무학 / 제1차 왕자의 난 /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정종
결코 유약하지 않던 왕, 정종 / 제2차 왕자의 난과 사병 혁파
태종
시대의 악역을 떠맡은 태종 / 조사의의 난 / 함흥차사 / 왕조의 주인은 왕이다 / 명나라와의 외교 정상화 /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 태종의 외척 제거 / 태종의 불교 정책 /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된 불교 교단 / 유교와 불교가 같음을 주장한 승려 기화
세종
조선 시대 최고의 인물, 세종 / 집현전 설치 / 4군 6진 개척 / 문화 황금기를 이룩한 세종 조 / 세종 대의 과학기술 / 세종 조의 서적 찬술
문종
어린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남긴 문종 / 군 통수 체계 완성
단종
쿠데타의 어린 희생자, 단종 /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 / 이징옥의 난
세조
철권 통치자, 세조 / 사육신과 생육신 /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 영월에유폐된 노산군 / 이시애의 난 / 불교를 보호했던 세조
예종
펼치지 못한 왕도의 꿈 / 민수의 사옥(史獄) / 남이의 옥
성종
조선 왕조의 체제를 완성한 성종 /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 양반과 문치주의 /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 조선 시대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 향촌 자치제의 발달 / 사림의 성장
연산군
절대왕권을 추구한 임금, 연산군 /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중종이 된 진성대군 / 반정 전야 / 반정 3인방 / 폐비 신씨, 폐위에서 복위까지 / 조광조의 개혁 정치 / 도학 정치의 조건들 / 조광조와 동지들의 정치적 실적 / 도학 정치의 좌절, 기묘사화 / 삼포왜란 / 초법적 기구, 비변사
인종
하늘이 낸 효자, 인종 / 효성스런 임금 / 대윤과 소윤의 굴레 /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명종
외척 세력의 틈바구니에 낀 명종 / 외척의 주도권 쟁탈전, 을사사화 / 부활되는 불교 그리고 보우 / 민란 시대의 의적, 임꺽정 /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 / 사림의 본거지, 서원의 출현
선조
사림 시대의 군주, 선조 / 사림 정치 시대의 개막 / 이준경의 유언, 붕당의 예고 / 300년 당쟁의 원류, 동서분당 / 정여립과 기축옥사 / 200년 숙원, 종계변무(宗系辨誣) / 16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정세 / 임진왜란 / 분열하는 사림들, 남북 분당 / 북인의 분열, 대북과 소북의 각립 / 사림오현의 문묘종사
광해군
왕이 되기까지 고단했던 여정 / 정인홍의 회퇴변척(晦退辨斥) / 영남의 친북인 세력 / 계속되는 옥사 /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 / 대동법 시행
인조
능양군과 서인의 무력 정변 / 이괄의 난 / 효심의 발로인가 정통성 확보인가, 원종 추숭(元宗追崇) / 호서 산림 출현 / 병자호란 / 삼전도 비문 / 강빈 옥사
효종
와신상담의 군주, 효종 /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 / 북벌론
현종
허약한 군주, 현종 / 기해예송 / 갑인예송
숙종
숙종, 14세 유주에서 독단의 군주로 / 송시열의 고묘(告廟) 논란 / 이념의 두 기둥, 송시열과 윤휴 / 이단의 올가미 / 삼복(三福)을 제거하다 / 문묘에 종사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 숙종의 군권 강화 / 서인의 집권, 경신환국 / 노소 분당의 전주곡 / 남인의 집권, 기사환국 /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 / 노론 전제정치의 시작, 병신처분 / 군신간의 밀담, 정유독대
경종
장희빈의 아들, 경종 / 소론의 노론 타도, 신임옥사 / 소론의 득의 시대
영조
요순 임금처럼 어진 군주 / 무신란 / 왕권을 위한 탕평 정치 / 거듭되는 충역의 번복, 정미환국 / 절반은 충, 절반은 역, 기유처분 / 신임옥사에 대한 조치, 경신처분 / 정통성을 인정받은 영조, 신유대훈 / 사림 정치의 위기 / 비운의 사도세자 / 조선의 르네상스, 실학 / 성호학파의 실학 /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 청나라를 배우자, 북학 / 균역법 시행
정조
호학 군주, 정조 / 탕평의 재시도 / 홍국영의 세도정치 / 규장각 제도의 창설과 기능 강화 / 영남 만인소 / 정조의 왕권 강화
순조
어린 군주, 순조 /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 신분제의 붕괴 / 천주교 박해 / 벽파의 정치적 몰락 / 안동 김씨의 세도 /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 홍경래의 난
헌종
호색의 왕, 헌종 / 풍양 조씨의 세도 / 이양선 출몰 / 천주교 박해의 재연, 기해박해 / 김대건 신부 처형, 병오박해
철종
강화도령, 철종 / 왕위 계승의 변칙, 기유예론 / 동학의 창도자, 최제우 / 삼정의 문란 / 농민 항쟁의 확대 /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 암흑천지를 비춘 불빛
고종
시련의 군주, 고종 / 대원군의 10년 세도와 내정 개혁 / 대원군의 쇄국정책 / 조선의 개항 / 위정척사 운동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세계사를 바꾼 거문도 사건 / 동학과 농민 봉기 / 갑오경장 / 명성황후 시해 사건 / 상투와 단발령 / 의병 봉기 / 아관파천 / 고종의 환궁 / 대한제국의 탄생 /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 독립협회와 독립문 / 대한제국 운명의 갈림길이 된 러일전쟁 / 조약 아닌 조약, 을사늑약 / 돌아오지 않는 밀사
순종
황제 아닌 황제, 순종 / 대한제국 장교 박승환 / 대한국인 안중근 / 반만년 역사의 치욕, 국권피탈
부록
조선 왕실 세계도 / 조선의 국왕 / 조선왕조실록 편찬 일람표 / 조선의 왕릉 / 조선 시대 품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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