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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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전우용
출판사항이순, 발행일:2011/05/25
형태사항p.342 국판:22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01122908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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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한국인의 삶과 몸, 질병에 대한 역사·인류학적 보고서

1. 한국사 전대미문의 혼란기 1945-1953. 한국인의 몸은 무엇을 겪었을까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 순간부터 1953년 7월 한국전쟁 종전까지 8년간은 한국 근현대사상 전대미문의 혼란기였다. 40여 년간 지속된 일제의 통제와 강압이 끝남과 동시에 식민지 사회를 지탱해온 질서도 함께 무너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치안과 행정체계는 일시에 무력해졌고, 수많은 정당이 만들어졌으며 저마다 새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당장 그들은 어떤 질서도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권력은 한국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군에게 옮겨갔고, 그해 말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진 뒤로는 이념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한편, 해방과 동시에 거대한 인구이동의 파도가 한반도를 덮쳤다. 해방 무렵 해외 거주 한국인은 300만 명이 넘었다. 만주와 일본, 중국 남동부 해안지대와 내륙지대까지 많은 한국인이 나가있었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남양이라 불린 동남아시아와 필리핀 일대에도 군인이나 징용노무자로 끌려가 있었다. 해방 후 1년 동안 이들 중 230만 명 이상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50만 명 이상의 북한주민이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한편, 대한민국 수립을 전후해서는 좌익폭동과 빨치산 활동에 대응한 군경의 진압작전이 또 다른 ‘전재민’들을 양산했다. 1950년 초까지 제주도와 여수 순천 일대를 중심으로 8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일자리를 위해 이곳저곳 배회하며 방랑하는 사람들, 먹을 것을 구걸하는 사람들, 거의 매일 같이 열린 대규모 정치집회에 모여드는 사람들, 갑자기 폭증한 도시인구 수용을 위해 급조한 임시수용소에 몰려드는 사람들, 그마저 얻지 못해 아무 곳에나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 서울은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도시였다. 위생이나 보건문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굶주린 채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세균과 바이러스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 치기 시작했다. 페스트와 콜레라, 두창,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등 각종 전염병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했다. 1948년에 태어난 44만 명의 아기 중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수는 무려 18만 명, 40퍼센트에 달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당대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전쟁 중 미 극동공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북한의 전쟁을 도운 중국과 소련이 어느 정도의 화력을 쏟아 부었는지는 공식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은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 한국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고통과 상처, 질병의 세계가 열렸다.

해방과 미군정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과 종전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면서 한국인의 몸 또한 물리적으로 엄청난 체험을 했다. 온갖 질병과 세균, 총탄과 포탄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거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낸 시간이었다. 이 책은 신체 위생과 질병, 의료의 관점에서 들여다본 한국인,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다.

2. 질병을 범죄처럼 다루던 시대
1946년 2월 말, 경상도 선산에서는 두창과 티푸스,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성홍열이 동시에 발생하여 많은 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한 지역에서 여러 종의 치명적인 전염병이 동시에 경합하는 일은 흔치 않지만, 해방 후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같은 해 3월에 한반도에서는 한 번도 발병한 기록이 없는 페스트가 춘천에 침투하여 사망자를 냈고, 5월 부산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불과 두 달 만에 전국에서 6천 명 이상의 환자와 3,3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11월에는 서울에서 두창이 유행했는데, 치사율이 40퍼센트에 달했다. 1949년 벽두에는 유행성 독감이 번져 열흘 만에 서울에서만 565명이 목숨을 잃었다.

성병과 결핵, 마약중독은 해방 후 한국의 ‘3대 망국병’으로 꼽혔다. 1948년 남한의 결핵 인구는 불과 3년 전인 1945년 해방 당시보다 무려 두 배로 불어났다. 열악한 영양 상태와 위생환경, 대규모 정치모임과 집회가 결핵 확산의 주범이었다. 1948년 부산 시내에서 성병치료를 받는 환자는 4만여 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부산 인구의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광범위한 궁핍과 남성 실업인구의 폭증이 성매매 여성을 늘렸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서울 답십리 전매국 공장과 진해 해군기지에 보관되어 있던 생아편 11톤과 모르핀 10톤을 싼값에 시중에 풀어버리자 마약 중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만주에서 귀환한 사람들 중에는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아편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도 많았다. 마약 확산을 막기 위해 군정청은 마약취체령을 공포하고 단속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 당시 소록도에는 세계 최대의 나환자 시설인 소록도 갱생원이 있었는데, 해방 후 일본인 직원들이 철수를 하면서 수백 명의 환자를 학살 또는 인근 바다에 유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5천여 명의 나환자들이 수용소를 탈출, 내륙 각지에 숨어들면서 나병에 대한 공포감과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의 많은 질병과 병리적 현상들은 해방 직후의 사회 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2~41쪽)

행정적 관점에서 보자면 질병과 범죄에 대처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사회의 안정에 위해를 끼치는 범죄자와 개인의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세균은 모두 불순, 불량, 불온, 부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치안과 위생행정의 근본목적은 이들 요소를 적발, 차단, 격리, 제거하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경찰은 범죄와 질병에 관한 행정 사무를 같이 담당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경찰은 보건행정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보건위생 전담부서인 보건후생부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병원 설립과 운영, 의학교육 전반에 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한국인들에게 서양 근대 의학의 혜택을 주지 않았다. ‘근대성’을 한국인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두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미끼로 삼는 편이 식민통치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885년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출현한 뒤 60년이 지나도록, 한국인 환자의 대다수는 민간요법에 의존하거나 무당을 찾았다. 미군정 보건담당자들은 새로운 의료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미국식 의학교육과 재교육을 통해 의료인 양성을 서둘렀다. 개업의사 전성시대가 열렸고, 미군용 의약품과 유엔 구제부흥사업국의 원조 의약품을 사용하고 효험을 확인한 사람들은 곧 서양 약품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페니실린, 설파다이아진은 당대의 ‘만병통치약’이 되었고, 가짜 약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3. 질병과 고통의 전시장, 한국전쟁
1949년이 저물어갈 무렵, “내년은 38선이 이사 가는 해”라는 말이 떠돌았다. 서기 1950년은 단기 4283년으로, 뒤집어 읽으면 3824가 되는 데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말장난만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 결정 이후 좌익의 격렬한 반대운동이 이어졌고, 4월 제주 폭동, 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대한민국은 내란상태에 가까웠다. 전시 의료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는 1949년과 1950년 초에 전국의 모든 병원장을 소집하여 단기훈련을 받게 하고 예비역 군의관으로 편입시켰다.(191쪽)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의사들은 자신들이 쓸데없는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전개된 ‘전쟁 상황’은 너무도 압도적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상태의 환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쟁 발발 1년 사이에 전선은 38선에서 낙동강으로, 서울로, 압록강으로, 다시 38선으로 이동했다. 한반도를 남북방향으로 톱질하듯 오르내린 ‘톱질전쟁’ 기간이었다. 그 사이 전선의 기온은 영상 30도에서 영하 30도 사이를 오르내렸다. 한여름 무더위와 장맛비, 세균과 돌림병도 힘들었지만, 한겨울의 추위와 동상도 공포스러웠다. 군대에서 탄환이나 파편에 위한 복합골절, 동상은 생각할 여지 없는 ‘절단수술’ 대상이었다. 에테르 같은 아주 기초적인 마취약조차 없어 정신이 멀쩡한 환자를 묶어놓고 톱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술장 양동이에는 동상환자들에게서 잘라낸 손가락 발가락이 금세 수북하게 쌓였다.(244~248쪽)

전쟁 중 거의 모든 한국인은 군인이나 피란민, 포로 중 어느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1951년 8월 보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의 99퍼센트가 영양부족 상태였다.(217쪽) 광범위한 영양실조와 기생충 감염은 빈혈, 설사, 피부염 등을 국민병으로 만들었고, 천연두, 티푸스, 콜레라, 말라리아, 결핵, B형 일본뇌염은 일종의 풍토병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한 간호장교는 “복부 총상을 당한 한국군을 수술할 때에는 위속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징그러운 기생충을 꺼내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207쪽) 민간인이 처한 환경은 군인보다 더 열악했다. 한 미국 군의관은 한국을 “책에서만 보던 질병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206쪽) 1940년경 40만 명이던 결핵환자는 해방 이후 5년간의 혼란 속에서 120만 명으로 늘었고, 전쟁 1년여 만인 1951년 10월에는 28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부상과 곪아터진 상처는 종종 파상풍과 패혈증으로 �어졌고, 두창, 폐렴, 수막염, 간염 등도 아주 흔한 질병이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후방의 군인과 피란민들은 수시로 예방접종을 받았다. 그러나 주사기가 부족했다. 수십 명에게 하나의 주사기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이후 수십 년간 한국인을 괴롭힌 간염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중의 빈번한 예방주사 때문이었다.

미군 전투기는 종종 피란민을 북한군으로 착각하여 네이팜탄을 투하했는데, 아주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무기였다. 네이팜탄 피해자는 얼굴과 손목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얼굴에 달라붙은 불붙은 파편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떼어내려는 손가락을 따라 손목에까지 옮겨갔다. 피해자들은 눈, 코, 귀, 입이 손상되고 호흡기마저 상했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폭격으로 700만 명 이상이 살 곳을 잃었다. 전쟁에서 발생한 많은 고통과 죽음에는 이유가 없다.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다.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아프고 죽어갈 뿐이었다. 삶도 죽음도 너무 가벼운 시대. 아픈 시대의 아픈 사람들이 바로 60여 년전 한국인들의 초상이다.

4. 한국인, 청결과 위생 담론을 내면화하다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 중반까지 전시 의료의 역할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 발전’보다는 ‘환자 관리’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군 병원이 의술과 체계 양면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룬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난제로 남아 있던 외과 부문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었고, 항생제는 2차적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1년간의 톱질전쟁이 지나고 비교적 안정적인 대치상태가 장기화되면서 미군 의무부대는 환자 후송체계와 수단, 병원 체계와 조직 등에 관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실행에 옮겼다. 앰뷸런스와 헬리콥터 후송, 이동외과병원(MASH)의 일반화는 시공간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본국의 첨단 의료진과 의료시설이 지속적으로 지원되면서 한국전쟁의 전시 의료 수준도 높아졌다. 국군 병원은 전쟁 중 미군과 유엔군 병원들의 모델로 조직을 혁신했다. 한국에서 병원 현대화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군 병원들이었던 것이다. 군 병원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부상병이 크게 줄어든 1951년 중반부터는 민간인 환자를 함께 돌보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현대적 종합병원을 체험한 상태였다.(224~227쪽)

의료 문제에 관한 한 아직 중세의 무지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던 한국인 대다수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불과 3년 만에 서양의 의학지식을 빠르게 흡수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체득한 절박한 지식이다. 약에 대한 맹신, 항생제 남용 등 현대 한국인의 의약품에 대한 태도도 대부분 이때 형성되었다. 한국인들은 그 이전까지, 자발적으로든 강제로든 그토록 다양하고 많은 약을 몸 안에 들인 적이 결코 없었다.

인류 전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언제나 정치가들이 일으켰지만, 19세기까지의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짓이었다. 전장이 아닌 지역에서는 불안감은 있었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1차 대전 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입체전은 전방과 후방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다. 곡사포는 전선을 가로질러 상대방의 후방을 공격했고, 비행기는 넓은 지역에 흩어진 상대편 병사들을 하늘에서 관찰하게 했다. 무전기와 전보는 전쟁 상황을 국내 전역의 일반국민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와 심리적 긴장감에서, 전방과 후방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졌다. 입체전은 총력전으로 이어졌다. 총력전 체제하의 국가는 국민의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동원했다.

전쟁은 한국인 모두에게 국민이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거에 깨우쳐주었다. 전시 국가는 국민을 자신의 목적에 동원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생각마저도 감시했다. 국민의 몸과 생각은 개인의 것인 동시에 국가의 것이기도 했다. 비애국적 국민뿐 아니라 병약한 국민도 국가에 해로운 존재였다. 국가는 건강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의학의 시선으로 국민을 살폈고, 국가의 관점을 내면화한 국민들 역시 의학의 시선으로 자기 몸을 살피는 방법을 배웠다. 더불어 전쟁 중 미국이 가르친 현대 의학도 현대 한국인을 만드는 핵심지식이 되었다.

▣ 작가 소개

저자 :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인 회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상명대학교 강사와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을 지내고 2008년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종로와 본정: 식민도시 경성의 두 얼굴'', ''식민지 도시 이미지와 문화현상''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서울상업사』(공저), 『청계천: 시간, 장소, 사람』(공저), 『서울 20세기: 100년의 사진기록』(공저) 등이 있다.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주요 목차

1부 | 해방과 혼돈의 시대 1945.8~1950.6
1 미생물도 해방을 맞다
2 삶도 죽음도 너무 가벼운 시대
3 환자들, 병원에 가다
4 의사의 자격

2부| 전쟁과 상처의 시대 1950.6~1953.7
5 전쟁, 질병과 고통의 전시장
6 병원도 무기가 되는 전쟁의 역설
7 죽음 곁에서 사는 사람들
8 한국인, 의학의 눈으로 제 몸을 보다

작가 소개

목 차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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