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파란의 시대에 비상을 꿈꾼 절대권력
고종, 마침내 입을 열다”
우리는 그동안 고종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해 왔는가? 지난 100년을 거치면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지켜낸 올곧은 민족주의자의 원형으로, 명성황후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탈 앞에 온몸을 던진 구국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반면 고종은 엄부(嚴父)와 엄처(嚴妻) 시하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우유부단한 군주, 무기력한 군주로 각인되어 왔다. 저자는 고종에 대한 상식적인 평가와 기억이 이 같은 수준에 머무르게 된 이유가 일제의 식민사학과 해방 후 이를 확대재생산해 온 한국사학계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종의 집권 전 시기에 걸친 정책과 그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다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다.
저자는 고종의 전 시기에 걸친 정책을 해부하고, 실패로 이어진 과정과 결과까지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편견과 덧칠로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종, 44년의 비원-새로 읽는 고종시대사』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시점에 망국 책임론의 한가운데 있는 고종과 그의 시대를 새로이 조명하며, 재위 기간 내내 국왕의 권력을 강고히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왕조의 부흥을, 국권의 강대함을 꿈꿨으나 결국 성취하지 못한 비원을 잔잔하게 풀어간다. 그 속에는 파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숱하게 명멸해간 다양한 관료 군상들의 행태와 이를 지켜보며 왕권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고종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다. 이 책은 고종을 중심에 놓고 한국근대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이자, 일생에 걸친 정치적 대소사와 대원군과 민왕후와 관계된 인간적인 문제까지 동시에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고종 평전으로 추천할 만하다.
- 전환기의 고종, 그 다면적 평가를 위하여
“망국의 군주로 각인된 고종에 대한 편견을 깨다”
고종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영조와 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장기간 왕의 자리에 있었던 군주이다.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한 후,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 양위되었으니 재위기간만 44년이다. 고종 집권 44년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10여 년의 강학기 동안 권력의 정점에는 대원군이 있었다. 임오군란에 이어 일본에 의한 갑오개혁 기간에 두 번째로 대원군에게 권력을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했다. 고종은 한말 격동기를 거치면서 위정척사의 높은 파고와 숱한 민란, 청과 일본의 위협, 을미사변과 대한제국기, 그리고 국내정치세력의 음모와 행태가 부딪히는 한국근대의 역사, 그 정사의 주인공이었다.
고종은 우리가 기억하는 범주를 넘어서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던 군주였다. 고종은 대원군이 섭정할 시기에는 훗날 자신의 정치지도력과 국정을 수행하는 능력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의 드높은 파고 속에서도 열린 마음과 사고로 신진개화파들을 등용하였으며, 이들의 경험을 곧 자신의 경험으로 삼아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고종의 개국 방침은 확고하였으며 대원군의 완강한 척왜 주장은 더 이상 고종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본관, 서양관에서 확실한 차이를 가진 두 사람은 이후 정치적 결단과 방법을 달리할 때마다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고종은 신무기개발과 강병책을 추구하였다. 군통수권을 계통적으로 발효시키고 절대화할 수 있는 군령기관을 확립함으로써 군의 질서와 체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친정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처족세력인 민씨세력을 비롯하여 순수무인 출신, 서양경험이 풍부한 개화실무자들, 근왕세력들을 교차적으로 등용해나갔다. 고종은 과연 민씨들의 꼭두각시였을까? 저자는 처족을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으로 기용한 것이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국왕이 관료선발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의정부의 추천을 거치지 않고 이들을 선발하였다는 점, 내무부의 관료추천제도를 활용하여 민씨들을 대거 선발하였다는 점, 이 모든 것이 왕후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왕후 사망 이후까지 민씨들이 주요 관직에 영입되어 활용되고 있었던 점은 국왕의 주체적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곧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왕권강화에 집착하였으며 의욕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초기의 개화정책은 집권말기의 ‘광무개혁’으로 이어졌다. 광무개혁은 정치체제 면에서 서양의 입헌군주제만 수용하지 않았을 뿐, 각종 사회, 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을 개혁군주로 자리매김하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개혁은 민중에게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보다 당장의 큰 고통으로 와 닿았다. 중첩된 통치기구는 행정의 비효율화와 국정의 난맥상을 초래하였다.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가 지나쳐 개혁은 시행하였으나, 민중을 위한 개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개혁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 마련과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부딪혔던 민중은 개혁의 희생자일 수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지지기반의 폭은 넓혔으나, 어느 세력도 정권의 전위대는 되지 못하였다. 국왕으로서의 리더십 부재와 시대를 선도하지 못한 통치이념, 그리고 외세라는 변수가 작용하고 있었다.
- 친청인가 친일인가? 분분했던 개화파 “고종의 신하인가? 원세개의 수하인가?”
고종은 항상 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부르짖는 소장 개화파들은 든든한 힘이 될 수 있었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위정척사론자들보다는 개혁을 적극 지지해주고 보좌해주던 이들이 오히려 믿음직한 정국운영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이들로 인하여 일본을 알고, 서양을 알고,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고종으로 하여금 열린 마음과 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 주역들이었다. 개명의 길로 이끌어준 고마운 신진관료 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김옥균 일파가 보인 행동은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일찍이 일본의 영향 속에서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 정변을 감행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상과 노선의 차이가 컸던 김윤식, 어윤중 등의 친청 개화파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점도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친군4영사를 비롯한 친청적 인물을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고, 나아가 수구 대신들의 해임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태도는 고종의 권력기반을 침해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규장각과 혜상공국을 폐지하라는 주장도 지금껏 쌓아올린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전제군주제가 엄연히 시행되던 조선에서 군주의 권한을 법으로 제한할 것을 상정하는 듯하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고종은 결국 김옥균을 비롯한 친일적 개화파들이 자신을 기만하고 농락한 것이라 여기며 치를 떨게 되었다.
한편 저자는 고종의 개혁정책이 한풀 꺾이게 된 원인을 정변 이후 원세개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이에 영합한 친청 관료들의 배신에서 찾고 있다. 일찍이 이홍장의 눈에 들어 조선경영의 주자로 나선 원세개는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조선 조정에 군림하면서 김홍집을 비롯한 대다수 관료들과 발빠르게 친분을 도모해 나갔다. 왕과 왕후는 늘 그의 탐색 대상이었으며 감시 대상이었다. 고종와 왕후는 청의 간섭을 피해 새로운 외교관계를 물색하려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체결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면에는 고종보다 청의 대리인, 원세개의 힘을 더 신뢰하는 친청파 김윤식과 민영익 등이 있었다. 원세개는 고종의 폐위 음모까지 꾸미면서 고종을 압박하는 수위를 높여왔지만, 이를 저지해줄 인물은 없었다. 국왕에게 충성을 보이기보다 오히려 청에 밀착하여 권력 앞에 나약한 인간의 속성을 나타낼 뿐이었다.
친청적 개화파들은 청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국가 규모를 가진 조선이 살아나갈 길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주와 자립을 부르짖기보다, 청의 보호와 우산 속에 지내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국왕은 조선이 자립할 방도를 찾으려 하였다. 자주적으로 내치와 외치를 해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이를 이루기 위한 강병과 부국에 대한 꿈만은 끝내 버릴 수 없었다.
- 정적으로 돌아선 대원군과의 관계,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발전의 걸림돌이 되다
고종에게 대원군은 감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 아버지가 형을 두고 자신을 왕의 자리에 올린 데 대해서는 기쁨보다 갚아야 할 빚이 먼저 떠올랐다.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글자로 삼천리강토를 휩쓸어 모든 관리와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있었기에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대원군은 힘없는 고종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요, 정신적 지주였다.
청년기의 고종은 달랐다. 민왕후도 곁에 있었다. 친정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 마침내 자신의 정권을 창출한 후, 신진개화파들을 등용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위정척사의 파고가 여전히 강고할 때였다. 개화에 대한 역풍 속에 일어난 임오군란 속에서 왕후는 부패한 민씨들의 상징적 존재로 성난 민중의 표적이 되었다. 대원군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종이 추진한 개화정책을 무위로 돌리는 것과 왕후에 대한 국상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홍순목과 김병국 등의 원로대신들이 눈물을 머금고 시체라도 ?은 연후에 국상을 선포해도 늦지 않다고 간언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그만큼 대원군은 절박하였다. 민왕후가 권력에 또다시 발을 붙이기 전에 확실하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려야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했던 듯하다. 고종 역시 군란 이후 대원군과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중전을 생사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망자 취급을 한 대원군이었다. 이 문제는 결국 고종이 대원군과 부자지간의 약한 고리마저 끊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이 완전하고 확실한 정적관계로 돌아선 계기는 갑오개혁의 와중에 대원군이 정무친재의 권한을 대리하면서부터이다. 일본 공사관이 발급하는 문표 없이는 궁궐 출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의 비호를 받으며 대원군이 3차 집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틈만 나면 정권을 재창출해보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던 대원군이었다. 그는 국왕의 교지를 받은 후 경복궁 영추문을 통해 입궐하였다. 백성의 여망과 내외 신인도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제일 먼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국왕의 실정을 나무랐다. 국왕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대원군을 눈물로 맞이하고 사죄하였다. 다시 한 번 권좌를 아버지에게 내어주는, 씻지 못할 굴욕의 순간이었다. 반면 대원군은 비록 일본의 힘을 빌리긴 하였지만, 정치적 역량 면에서 아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입장에서 권좌를 확보하였다.
이처럼 고종과 대원군은 권력을 앞에 두고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해 갔고, 그에 따라 양자의 갈등관계 또한 걷잡을 수 없이 경색되어 갔다. 종국에는 대원군이 손자인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 사건을 일으킨 것이 드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대원군이 사망하고 난 후에도 고종은 중추원 부의장 신기선을 대신 보내 제사를 돌보게 했을 뿐, 더 이상 아버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적대적 관계로 변한 두 사람의 반목 위에 명성황후라는 갈등적 요소까지 겹치면서 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저자는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 변화를 세 시기로 크게 구분하면서, 이들의 갈등과 반목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장래까지도 불행으로 몰고 가는 단초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 지배층의 분열이 망국의 요인,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면서 황제의 위의를 장엄하게 하고 황권을 강화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국격을 높임과 동시에, 국권을 강화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성공시켜 부국강병을 꾀해 나가는 것, 이는 고종의 집권 44년 동안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엔 이루지 못한 슬픈 비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고종은 집권기간 내내 강병을 꿈꾸며 군사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전투력과 병력 수가 가장 증강된 시기였다는 대한제국의 군대는 약 3만에 불과하였다. 이마저도 정부 예산의 45%에 달하는 군비를 지출하면서 마련한 것이었다. 이 무렵 100만 대군을 호령하던 일본의 군사력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인 셈이었다. 엄연한 국력의 차이 속에서 외세를 등에 업은 관료군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고종의 꿈과 멀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고종의 인사정책은 한 인물을 특정 부서에 오래 두지 않고, 여러 인물을 교차적으로 등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결과 고종의 군통수권을 뒷받침하는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1주일도 못 되어 교체되고, 군부대신의 경우에는 최소 이틀 정도에 전격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종일관 불안한 인사정책을 폈던 이유를 저자는 권력을 둘러싼 불온한 사건들이 수시로 발행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집권초기부터 계속된 각종 역모사건, 이를테면 대원군 측이 음모한 이재선과 이준용 사건은 차치하고라도 대한제국기에 들어와서까지 잦은 역모사건에 고종은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김홍륙 독다(毒茶)사건을 비롯하여, 박영효, 유길준, 조희연, 우범선 등의 개화파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화군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용익과 이근택을 축으로 하는 고종 측근 세력들이 벌이는 분열과 대립 또한 심각하였다. 이들은 외세의 지형이 바뀌는 데에 따라 국내에서의 권력변동에도 영향을 받았다. 영일동맹이 체결된 뒤에는 이지용, 박제순 등의 친일세력과 이근택 세력이 신장되고, 민종묵, 주석면, 조병식 등 친러세력과 이용익 세력이 약화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는 곧 고종의 권력보다 외세의 힘이 더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저자가 보기에 대한제국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쟁탈전과 친러, 친일 등 외세를 등에 업은 여러 계파간의 대립과 갈등은 국왕의 운신 폭을 좁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나아가 국왕권의 약화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외세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정부대신들은 그에 경도되었고 황제권은 점점 빛이 바래갔다. 어느 ?구도 정권을 수호할 만한 전위대는 되지 못하는 속에서, 늑약의 이름으로 체결된 강압의 현장에서 고종이 선택한 침묵의 저항수단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인사정책은 정국을 불안하게 하고 군통수권의 위기를 초래하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반면, 성공할 경우에는 다양한 세력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통치전략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강력한 리더십이 전제되는 경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고종의 통치 스타일은 국가가 평화로울 때에는 원만한 국정 수행을 하기에 훌륭한 리더십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제국주의 침략의 파고가 거셀 때는 지나친 신중함보다 명쾌한 판단력과 결단력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아쉽게도 그가 통치한 시대는 후자였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었다. 저자는 황제와 대신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속에서 적전(敵前) 분열을 일으킨 것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이는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에 대해 역사적 성찰로 이어질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장영숙
상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Post-Doc.)으로 재직 중이며 상명대, 인천대, 한국외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주로 고종 집권기 정치권의 동향과 사상적 변화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연구 결과물을 대중화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요 논문은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2005), 「동도서기론의 정치적 역할과 변화」(2006), 「고종의 정권운영과 민씨척족의 정치적 역할」(2008), 「『內下冊子目錄』을 통해 본 고종의 개화관련서적 수집 실상과 영향」(2009), 「대한제국기 고종의 정치사상 연구」(2009) 외 다수가 있다.
저서로는 『다시 보는 명성황후』(공저, 2006, 역사만들기), 『한국근현대인물강의』(공저, 2007, 국학자료원),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2010, 도서출판 선인』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전환기의 고종, 그 다면적 평가를 위하여
1부 강학기(1863~1873년)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1. 갑작스런 즉위, 왕도란 무엇인가?
극적인 인생 반전,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하다
공부, 또 공부
왕도란 무엇인가?
정신적인 지주, 아버지 흥선대원군
민왕후를 맞이하다
2. 책을 통해 바라본 세상
불안한 중화의 중심축, 중국
서양을 좇는 오랑캐, 일본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오랑캐 무리, 서양
2부 집권 1기(1874~1884년) 동도서기 개혁론을 채택하다
3. 드디어 정치의 중심에 서서
대원군을 하야시키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다
가자! 문호개방의 길로
4. 전통에 서양을 접목시키다
동도서기 개혁론의 채택
정조대왕을 이어 받으련다
개화서적을 수집하다
다양한 독서, 폭넓은 영향
통치기구의 개편과 폐지, 그리고 재창설
개화자강정책 추진, 개명군주로의 길
군통수권을 일사불란케 하라!
5. 정치적 위기와 대응
임오군란기, 한 달여 간 권좌를 대원군에 넘기다
왕후는 어디에 있는가?
정적으로 돌아선 아버지
변란과 관계된 죄는 묻지 않겠다
서로의 길이 달랐던 친청 개화파와 친일 개화파
폭풍 전야
그들만의 3일천하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다
벗어나고 싶은 청의 굴레
3부 집권 2기(1885~1896년) 개화자강정책의 재추진
6. 또 한 번의 통치기구 개편
처족세력의 등용문, 내무부
고종은 과연 민씨들의 꼭두각시였나?
내무부 중심의 국정운영이 불러온 결과
7. 개혁과 좌절, 그리고 극복
수면 위로 떠오른 ‘조선적’ 입헌군주제
군주권은 강고하게, 민권은 최소한으로
갑오개혁기, 세 번째로 대원군에게 권좌를 양도하다
시험받는 리더십 194
왕후와 함께 군주권을 수호하다
역사상 미증유의 일대사건, ‘여우사냥’
러시아 공사관에서 재기를 도모하다
8. 비명에 간 왕후를 그리다
우아하고 지적인 왕후
병약한 순종을 향한 한없는 모성
세계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한 정치적 동반자
그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오!
4부 집권 3기(1897~1907년), 대한제국의 흥망
9. 대한제국을 일으키다
구본신참은 곧 동교서법의 개혁 이념
높아진 민중의 정치의식
독립협회와의 격돌
정부를 비판하는 자, 용서치 않으리라!
유교에 기반한 과도기적 군주
10. 개혁의 물적 토대
서기의 확대 수용과 ‘광무개혁’
개혁의 물적 토대, 내장원
개혁 따로, 민생 따로
11. 개혁의 물리적 토대
개혁의 물리적 토대, 원수부
만세불변의 황제권력이여!
3만 대 100만
‘전투경찰’로 나선 군대
멀어져간 국민개병제의 꿈
친일파, 친러파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2. 왕조의 최후
높아져만 가는 전운
정권을 수호할 전위대는 없는가?
강압의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던 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라!
군통수권 상실과 군대해산
강제병합의 그날
독살을 입증하는 빛바랜 문서들
나가는 말 ‘망국의 군주’를 넘어서서
고종 연보
미주
“파란의 시대에 비상을 꿈꾼 절대권력
고종, 마침내 입을 열다”
우리는 그동안 고종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해 왔는가? 지난 100년을 거치면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지켜낸 올곧은 민족주의자의 원형으로, 명성황후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탈 앞에 온몸을 던진 구국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반면 고종은 엄부(嚴父)와 엄처(嚴妻) 시하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우유부단한 군주, 무기력한 군주로 각인되어 왔다. 저자는 고종에 대한 상식적인 평가와 기억이 이 같은 수준에 머무르게 된 이유가 일제의 식민사학과 해방 후 이를 확대재생산해 온 한국사학계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종의 집권 전 시기에 걸친 정책과 그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다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다.
저자는 고종의 전 시기에 걸친 정책을 해부하고, 실패로 이어진 과정과 결과까지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편견과 덧칠로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종, 44년의 비원-새로 읽는 고종시대사』는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시점에 망국 책임론의 한가운데 있는 고종과 그의 시대를 새로이 조명하며, 재위 기간 내내 국왕의 권력을 강고히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왕조의 부흥을, 국권의 강대함을 꿈꿨으나 결국 성취하지 못한 비원을 잔잔하게 풀어간다. 그 속에는 파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숱하게 명멸해간 다양한 관료 군상들의 행태와 이를 지켜보며 왕권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고종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다. 이 책은 고종을 중심에 놓고 한국근대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이자, 일생에 걸친 정치적 대소사와 대원군과 민왕후와 관계된 인간적인 문제까지 동시에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고종 평전으로 추천할 만하다.
- 전환기의 고종, 그 다면적 평가를 위하여
“망국의 군주로 각인된 고종에 대한 편견을 깨다”
고종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영조와 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장기간 왕의 자리에 있었던 군주이다.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한 후,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 양위되었으니 재위기간만 44년이다. 고종 집권 44년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10여 년의 강학기 동안 권력의 정점에는 대원군이 있었다. 임오군란에 이어 일본에 의한 갑오개혁 기간에 두 번째로 대원군에게 권력을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했다. 고종은 한말 격동기를 거치면서 위정척사의 높은 파고와 숱한 민란, 청과 일본의 위협, 을미사변과 대한제국기, 그리고 국내정치세력의 음모와 행태가 부딪히는 한국근대의 역사, 그 정사의 주인공이었다.
고종은 우리가 기억하는 범주를 넘어서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던 군주였다. 고종은 대원군이 섭정할 시기에는 훗날 자신의 정치지도력과 국정을 수행하는 능력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의 드높은 파고 속에서도 열린 마음과 사고로 신진개화파들을 등용하였으며, 이들의 경험을 곧 자신의 경험으로 삼아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고종의 개국 방침은 확고하였으며 대원군의 완강한 척왜 주장은 더 이상 고종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본관, 서양관에서 확실한 차이를 가진 두 사람은 이후 정치적 결단과 방법을 달리할 때마다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고종은 신무기개발과 강병책을 추구하였다. 군통수권을 계통적으로 발효시키고 절대화할 수 있는 군령기관을 확립함으로써 군의 질서와 체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친정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처족세력인 민씨세력을 비롯하여 순수무인 출신, 서양경험이 풍부한 개화실무자들, 근왕세력들을 교차적으로 등용해나갔다. 고종은 과연 민씨들의 꼭두각시였을까? 저자는 처족을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으로 기용한 것이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국왕이 관료선발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의정부의 추천을 거치지 않고 이들을 선발하였다는 점, 내무부의 관료추천제도를 활용하여 민씨들을 대거 선발하였다는 점, 이 모든 것이 왕후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왕후 사망 이후까지 민씨들이 주요 관직에 영입되어 활용되고 있었던 점은 국왕의 주체적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곧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왕권강화에 집착하였으며 의욕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초기의 개화정책은 집권말기의 ‘광무개혁’으로 이어졌다. 광무개혁은 정치체제 면에서 서양의 입헌군주제만 수용하지 않았을 뿐, 각종 사회, 경제적 제도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을 개혁군주로 자리매김하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개혁은 민중에게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보다 당장의 큰 고통으로 와 닿았다. 중첩된 통치기구는 행정의 비효율화와 국정의 난맥상을 초래하였다.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가 지나쳐 개혁은 시행하였으나, 민중을 위한 개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개혁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 마련과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부딪혔던 민중은 개혁의 희생자일 수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지지기반의 폭은 넓혔으나, 어느 세력도 정권의 전위대는 되지 못하였다. 국왕으로서의 리더십 부재와 시대를 선도하지 못한 통치이념, 그리고 외세라는 변수가 작용하고 있었다.
- 친청인가 친일인가? 분분했던 개화파 “고종의 신하인가? 원세개의 수하인가?”
고종은 항상 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부르짖는 소장 개화파들은 든든한 힘이 될 수 있었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위정척사론자들보다는 개혁을 적극 지지해주고 보좌해주던 이들이 오히려 믿음직한 정국운영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이들로 인하여 일본을 알고, 서양을 알고, 세계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고종으로 하여금 열린 마음과 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 주역들이었다. 개명의 길로 이끌어준 고마운 신진관료 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김옥균 일파가 보인 행동은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일찍이 일본의 영향 속에서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 정변을 감행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상과 노선의 차이가 컸던 김윤식, 어윤중 등의 친청 개화파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점도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친군4영사를 비롯한 친청적 인물을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고, 나아가 수구 대신들의 해임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태도는 고종의 권력기반을 침해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규장각과 혜상공국을 폐지하라는 주장도 지금껏 쌓아올린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전제군주제가 엄연히 시행되던 조선에서 군주의 권한을 법으로 제한할 것을 상정하는 듯하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고종은 결국 김옥균을 비롯한 친일적 개화파들이 자신을 기만하고 농락한 것이라 여기며 치를 떨게 되었다.
한편 저자는 고종의 개혁정책이 한풀 꺾이게 된 원인을 정변 이후 원세개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이에 영합한 친청 관료들의 배신에서 찾고 있다. 일찍이 이홍장의 눈에 들어 조선경영의 주자로 나선 원세개는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조선 조정에 군림하면서 김홍집을 비롯한 대다수 관료들과 발빠르게 친분을 도모해 나갔다. 왕과 왕후는 늘 그의 탐색 대상이었으며 감시 대상이었다. 고종와 왕후는 청의 간섭을 피해 새로운 외교관계를 물색하려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체결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면에는 고종보다 청의 대리인, 원세개의 힘을 더 신뢰하는 친청파 김윤식과 민영익 등이 있었다. 원세개는 고종의 폐위 음모까지 꾸미면서 고종을 압박하는 수위를 높여왔지만, 이를 저지해줄 인물은 없었다. 국왕에게 충성을 보이기보다 오히려 청에 밀착하여 권력 앞에 나약한 인간의 속성을 나타낼 뿐이었다.
친청적 개화파들은 청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국가 규모를 가진 조선이 살아나갈 길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주와 자립을 부르짖기보다, 청의 보호와 우산 속에 지내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국왕은 조선이 자립할 방도를 찾으려 하였다. 자주적으로 내치와 외치를 해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이를 이루기 위한 강병과 부국에 대한 꿈만은 끝내 버릴 수 없었다.
- 정적으로 돌아선 대원군과의 관계,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발전의 걸림돌이 되다
고종에게 대원군은 감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 아버지가 형을 두고 자신을 왕의 자리에 올린 데 대해서는 기쁨보다 갚아야 할 빚이 먼저 떠올랐다.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글자로 삼천리강토를 휩쓸어 모든 관리와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있었기에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대원군은 힘없는 고종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요, 정신적 지주였다.
청년기의 고종은 달랐다. 민왕후도 곁에 있었다. 친정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 마침내 자신의 정권을 창출한 후, 신진개화파들을 등용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위정척사의 파고가 여전히 강고할 때였다. 개화에 대한 역풍 속에 일어난 임오군란 속에서 왕후는 부패한 민씨들의 상징적 존재로 성난 민중의 표적이 되었다. 대원군이 재집권에 성공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종이 추진한 개화정책을 무위로 돌리는 것과 왕후에 대한 국상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홍순목과 김병국 등의 원로대신들이 눈물을 머금고 시체라도 ?은 연후에 국상을 선포해도 늦지 않다고 간언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그만큼 대원군은 절박하였다. 민왕후가 권력에 또다시 발을 붙이기 전에 확실하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려야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했던 듯하다. 고종 역시 군란 이후 대원군과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중전을 생사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망자 취급을 한 대원군이었다. 이 문제는 결국 고종이 대원군과 부자지간의 약한 고리마저 끊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이 완전하고 확실한 정적관계로 돌아선 계기는 갑오개혁의 와중에 대원군이 정무친재의 권한을 대리하면서부터이다. 일본 공사관이 발급하는 문표 없이는 궁궐 출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의 비호를 받으며 대원군이 3차 집권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틈만 나면 정권을 재창출해보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던 대원군이었다. 그는 국왕의 교지를 받은 후 경복궁 영추문을 통해 입궐하였다. 백성의 여망과 내외 신인도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제일 먼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국왕의 실정을 나무랐다. 국왕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대원군을 눈물로 맞이하고 사죄하였다. 다시 한 번 권좌를 아버지에게 내어주는, 씻지 못할 굴욕의 순간이었다. 반면 대원군은 비록 일본의 힘을 빌리긴 하였지만, 정치적 역량 면에서 아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입장에서 권좌를 확보하였다.
이처럼 고종과 대원군은 권력을 앞에 두고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해 갔고, 그에 따라 양자의 갈등관계 또한 걷잡을 수 없이 경색되어 갔다. 종국에는 대원군이 손자인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 사건을 일으킨 것이 드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대원군이 사망하고 난 후에도 고종은 중추원 부의장 신기선을 대신 보내 제사를 돌보게 했을 뿐, 더 이상 아버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적대적 관계로 변한 두 사람의 반목 위에 명성황후라는 갈등적 요소까지 겹치면서 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저자는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 변화를 세 시기로 크게 구분하면서, 이들의 갈등과 반목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장래까지도 불행으로 몰고 가는 단초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 지배층의 분열이 망국의 요인,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면서 황제의 위의를 장엄하게 하고 황권을 강화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국격을 높임과 동시에, 국권을 강화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성공시켜 부국강병을 꾀해 나가는 것, 이는 고종의 집권 44년 동안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엔 이루지 못한 슬픈 비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고종은 집권기간 내내 강병을 꿈꾸며 군사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전투력과 병력 수가 가장 증강된 시기였다는 대한제국의 군대는 약 3만에 불과하였다. 이마저도 정부 예산의 45%에 달하는 군비를 지출하면서 마련한 것이었다. 이 무렵 100만 대군을 호령하던 일본의 군사력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인 셈이었다. 엄연한 국력의 차이 속에서 외세를 등에 업은 관료군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고종의 꿈과 멀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고종의 인사정책은 한 인물을 특정 부서에 오래 두지 않고, 여러 인물을 교차적으로 등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결과 고종의 군통수권을 뒷받침하는 원수부 군무국 총장이 1주일도 못 되어 교체되고, 군부대신의 경우에는 최소 이틀 정도에 전격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종일관 불안한 인사정책을 폈던 이유를 저자는 권력을 둘러싼 불온한 사건들이 수시로 발행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집권초기부터 계속된 각종 역모사건, 이를테면 대원군 측이 음모한 이재선과 이준용 사건은 차치하고라도 대한제국기에 들어와서까지 잦은 역모사건에 고종은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김홍륙 독다(毒茶)사건을 비롯하여, 박영효, 유길준, 조희연, 우범선 등의 개화파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화군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용익과 이근택을 축으로 하는 고종 측근 세력들이 벌이는 분열과 대립 또한 심각하였다. 이들은 외세의 지형이 바뀌는 데에 따라 국내에서의 권력변동에도 영향을 받았다. 영일동맹이 체결된 뒤에는 이지용, 박제순 등의 친일세력과 이근택 세력이 신장되고, 민종묵, 주석면, 조병식 등 친러세력과 이용익 세력이 약화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는 곧 고종의 권력보다 외세의 힘이 더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저자가 보기에 대한제국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쟁탈전과 친러, 친일 등 외세를 등에 업은 여러 계파간의 대립과 갈등은 국왕의 운신 폭을 좁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나아가 국왕권의 약화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외세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정부대신들은 그에 경도되었고 황제권은 점점 빛이 바래갔다. 어느 ?구도 정권을 수호할 만한 전위대는 되지 못하는 속에서, 늑약의 이름으로 체결된 강압의 현장에서 고종이 선택한 침묵의 저항수단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인사정책은 정국을 불안하게 하고 군통수권의 위기를 초래하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반면, 성공할 경우에는 다양한 세력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통치전략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강력한 리더십이 전제되는 경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고종의 통치 스타일은 국가가 평화로울 때에는 원만한 국정 수행을 하기에 훌륭한 리더십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제국주의 침략의 파고가 거셀 때는 지나친 신중함보다 명쾌한 판단력과 결단력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아쉽게도 그가 통치한 시대는 후자였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었다. 저자는 황제와 대신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속에서 적전(敵前) 분열을 일으킨 것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이는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에 대해 역사적 성찰로 이어질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장영숙
상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Post-Doc.)으로 재직 중이며 상명대, 인천대, 한국외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주로 고종 집권기 정치권의 동향과 사상적 변화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연구 결과물을 대중화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요 논문은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2005), 「동도서기론의 정치적 역할과 변화」(2006), 「고종의 정권운영과 민씨척족의 정치적 역할」(2008), 「『內下冊子目錄』을 통해 본 고종의 개화관련서적 수집 실상과 영향」(2009), 「대한제국기 고종의 정치사상 연구」(2009) 외 다수가 있다.
저서로는 『다시 보는 명성황후』(공저, 2006, 역사만들기), 『한국근현대인물강의』(공저, 2007, 국학자료원),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2010, 도서출판 선인』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전환기의 고종, 그 다면적 평가를 위하여
1부 강학기(1863~1873년)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1. 갑작스런 즉위, 왕도란 무엇인가?
극적인 인생 반전,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하다
공부, 또 공부
왕도란 무엇인가?
정신적인 지주, 아버지 흥선대원군
민왕후를 맞이하다
2. 책을 통해 바라본 세상
불안한 중화의 중심축, 중국
서양을 좇는 오랑캐, 일본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오랑캐 무리, 서양
2부 집권 1기(1874~1884년) 동도서기 개혁론을 채택하다
3. 드디어 정치의 중심에 서서
대원군을 하야시키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다
가자! 문호개방의 길로
4. 전통에 서양을 접목시키다
동도서기 개혁론의 채택
정조대왕을 이어 받으련다
개화서적을 수집하다
다양한 독서, 폭넓은 영향
통치기구의 개편과 폐지, 그리고 재창설
개화자강정책 추진, 개명군주로의 길
군통수권을 일사불란케 하라!
5. 정치적 위기와 대응
임오군란기, 한 달여 간 권좌를 대원군에 넘기다
왕후는 어디에 있는가?
정적으로 돌아선 아버지
변란과 관계된 죄는 묻지 않겠다
서로의 길이 달랐던 친청 개화파와 친일 개화파
폭풍 전야
그들만의 3일천하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다
벗어나고 싶은 청의 굴레
3부 집권 2기(1885~1896년) 개화자강정책의 재추진
6. 또 한 번의 통치기구 개편
처족세력의 등용문, 내무부
고종은 과연 민씨들의 꼭두각시였나?
내무부 중심의 국정운영이 불러온 결과
7. 개혁과 좌절, 그리고 극복
수면 위로 떠오른 ‘조선적’ 입헌군주제
군주권은 강고하게, 민권은 최소한으로
갑오개혁기, 세 번째로 대원군에게 권좌를 양도하다
시험받는 리더십 194
왕후와 함께 군주권을 수호하다
역사상 미증유의 일대사건, ‘여우사냥’
러시아 공사관에서 재기를 도모하다
8. 비명에 간 왕후를 그리다
우아하고 지적인 왕후
병약한 순종을 향한 한없는 모성
세계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한 정치적 동반자
그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오!
4부 집권 3기(1897~1907년), 대한제국의 흥망
9. 대한제국을 일으키다
구본신참은 곧 동교서법의 개혁 이념
높아진 민중의 정치의식
독립협회와의 격돌
정부를 비판하는 자, 용서치 않으리라!
유교에 기반한 과도기적 군주
10. 개혁의 물적 토대
서기의 확대 수용과 ‘광무개혁’
개혁의 물적 토대, 내장원
개혁 따로, 민생 따로
11. 개혁의 물리적 토대
개혁의 물리적 토대, 원수부
만세불변의 황제권력이여!
3만 대 100만
‘전투경찰’로 나선 군대
멀어져간 국민개병제의 꿈
친일파, 친러파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2. 왕조의 최후
높아져만 가는 전운
정권을 수호할 전위대는 없는가?
강압의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던 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라!
군통수권 상실과 군대해산
강제병합의 그날
독살을 입증하는 빛바랜 문서들
나가는 말 ‘망국의 군주’를 넘어서서
고종 연보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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