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중세의 여인들이 남성들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았으며, 대등한 형평을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아일린 파워가 다루는 중세는 현실 도피의 측면을 넘어
여성과 남성이 힘을 합쳐 나아가는 남녀평등의 세상이다.
이는 그녀가 1910년 이래 사망할 때까지 활발하게 벌여온 페미니즘 운동 및
여성 참정권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이었고,
그 후의 역사는 아일린 파워의 선견지명을 증명하고 있다.
01_ 중세 여성들의 진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연구한 아일린의 첫 저서
여인들의 위치를 여성관, 법률, 일상에서의 경제활동, 교육 등에서 파악하다
아일린 파워는 1912~13년 런던경제대학에서 ‘산업 혁명 이전의 영국 중세 시대에 있어서 여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고, 1920년까지 발표한 〈중세의 여성관〉, 〈중세의 귀족 여성〉, 〈중세 여성의 교육〉, 〈수녀원〉등의 논문과 강연을 묶어낸 것이 바로《중세의 여인들》이다. 이 책은 원고지 500매 분량이지만 향후 중세 여성 연구와 저술의 모태가 된 의미 있는 저서이다. 또한 중세의 여성관이나 중세의 일하는 여성, 중세의 여성 교육 같은 주제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장’중세의 여성관’2장 ‘귀족, 향반(鄕班), 중산층의 여인들, 3장 ‘도시와 농촌의 일하는 여성’이다. 교회와 귀족 집단에 의해 형성된 중세의 여성관은 기이하게도 기사도의 바탕이 된 ‘여성숭배’와 온갖 악의 근본으로 보는 ‘남존여비’사상이 공존하였다. 여성에 대한 상반된 두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진정한 여성의 지위를 여성관, 여성관련 법률과 일상에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2장에는 귀족 부인, 중산층 여인들의 결혼에 따른 법률적인 책임과 권리, 그리고 가정이나 영지 관리 등의 일상생활을 자세하게 살피고 있다. 3장은 신분이 높은 이들과 달리 도시나 농촌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을 살피고 있다. 여인들은 가사 일은 물론이고 돈을 벌어야 하는 부담까지 졌다. 장인 남편의 일을 돕거나 때로는 독립된 일을 하기도 했고, 과부의 경우 남편의 뒤를 이어 일을 맡아한 여러 예를 볼 수 있다.
아일린 파워는 이 책을 통해 중세를 현실 도피의 측면을 넘어 여성과 남성이 힘을 합쳐 나아가는 남녀평등의 세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10년 이래 사망할 때까지 활발하게 벌여온 페미니즘 운동 및 여성 참정권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중세의 여인들》에서 다루고 있는 5장 수녀원은 《중세의 사람들》 제3장 마담 에글런타인의 초고이다. 또한 2장인 ‘귀족, 향반, 중산층의 여자들’은 《중세의 사람들》의 5장인 가부장의 아내에서, 제 3장인 일하는 여성은 《중세의 사람들》의 제2장인 농부 보도에서 좀 더 깊이 있게 설명된다. 이 두 책을 함께 읽으면 중세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아일린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02_ 이브인가, 마리아인가?
중세 여성관과 여성들의 현실
최초의 여류 전업작가로서 여성 옹호 단체까지 결성한 ‘크리스틴 드 피산’의 활약
여성의 위치는 종종 어떤 국가나 시대의 문명 정도를 측정하는 시금석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중세의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기사도 정신에서 강조하는 여성 숭배는 성모 마리아 숭배에서 나왔다. 이는 여성의 열등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가톨릭교회는 동정녀 마리아 숭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동정녀 마리아 숭배가 확산되면서 이상적인 여성을 숭배하는 기사도 정신이 나오게 되었다. 세속의 여성 숭배는 성모 숭배의 낭만적 복사판이었다.
하지만 중세 기사도 정신이 여성들의 실제적 지위를 고양시킨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귀족 계급 여성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었고, 기사는 하느님과 숙녀의 옹호자였을 뿐 대다수의 여성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또한 실제에서보다 중세의 낭만적 서사시에서나 더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세의 낭만적 서사시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여성을 완전 복종시켜야 한다는 중세의 여성관은 주로 교회가 주도하였다.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여 인류의 타락이 시작되었고 그 후에 인류의 고생이 시작된 만큼 여성은 유혹, 악마, 경계의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완전한 굴복이 사회의 안정에 필수적이고 그런 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중세의 여성관은 후대에 하나의 유산으로 물려졌고, 여러 세기 동안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파블리오’(운문 �화집)나 〈여자들의 악덕 blastanges des fames〉, 〈여자들의 편지 epystles des fames〉, 〈여자들의 배신 blasones des fames〉 같은 교훈적 시 등의 문학들은 여자들의 악덕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지독한 여성 혐오와 경멸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들면서 문학에서의 여성을 옹호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여성 혐오에 반대하며 여성들의 명예회복과 여성을 칭송하는 ‘시’를 주목적으로 하는 〈사랑의 궁정 Court Amoureuse〉협회가 1400년 발족하였다. 이를 주도한 크리스틴 드 피산은 깨어있는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15살에 결혼하여 25살에 아이 셋을 둔 과부가 딘 크리스틴 드 피산은 글쓰기 이외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던 최초의 여류 ‘전업 작가’였다. 그녀는 산문 논문으로 여성의 미덕을 예증하는 사례들을 편집한 《숙녀들의 도시》와 신분이 다른 여러 계급의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의무를 설명한 《세 미덕의 책》을 쓰는 등 여성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당대의 행태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녀의 행적은 《중세의 여인들》전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일린 파워의 페미니즘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중세 여인들은 아담의 아내 이브도 동정녀 마리아도 아닌 이 양극단의 중간쯤에서 실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중세의 지배적인 여성관보다는 객관적 사회 현실, 일상생활의 주고받기, 서로 사랑하는 마음 등에 영향 받았다고 보았고, 구체적 예를 추적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중세 여성은 사회적으로 남자와 형평을 이루는 존재였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피터 롬바르드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통치자가 될 운명이 아니어서 남자의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노예로 만들어질 운명이 아니었으므로 남자의 발바닥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며, 남자의 동반자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옆구리로 만들어진 것이다.(69p)
1장, 2장, 3장에 서술된 많은 중세의 여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런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03_ 중세는 남녀 평등의 시대였나?
중세 여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상당하였고, 기술·교양 교육이 이루어졌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중세의 여인들은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다. 중세의 정치 사회가 전적으로 토지의 소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땅을 소유한 지주 여성은 공적인 권리와 의무와 개인적 권리와 의무에서 남자와 동등한 지위였다.
땅을 소유할 수 있었고 심지어 군사적 의무와 결부된 토지(military tenure)도 소유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영주에게 신하의 예를 표시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유언장과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고 소송을 걸거나 소송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면 결혼을 하면 결혼 기간 동안의 권리는 유보된다. 결혼 당시 그녀가 봉토로 받아가지고 있던 땅은 결혼 기간 동안 남편의 봉토가 된다.(77p)
또한 도시 여인들은 여러 산업에서 남자들과 나란히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영국에서 실잣기와 비단 짜기 등 옷감 생산의 거의 모든 단계에 종사하였다. 이는 스핀스터, 웹스터, 브류스터의 호칭을 얻은 여인들의 이름이 인두세 대장에 올라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양조의 경우 상당부분을 여성들이 담당하였고, 소매업, 숙박업 등 다양한 업종에 많은 여성들이 종사하였다. 특히 과부의 경우 남편의 일을 계속하며 길드의 회원이 되거나 장인으로서 대접받기도 하였다. 비록 정규 길드로부터 보호도 받지 못하였고, 부업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중세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세의 산업은 여성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여러 산업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이 진출하지 않은 기술직은 거의 없었다. 푸주한, 양초상, 철물상, 그물상, 신기료 장수, 장갑 제조상, 혁대상, 잡화상, 지갑 제조상, 모자상, 가죽상, 제본상, 도금장이, 칠쟁이, 비단 축융사, 장식사, 양념상, 대장간, 금 세공장이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일했다.(114p)
그러나 여성들의 취업을 막기 위한 남자들의 견제가 심하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성들의 취업을 가로막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중세에는 같은 일을 해도 여자의 임금은 남자보다 낮았고, 남자들은 여자의 값싼 노동력 때문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중세 여인들이 가사노동만이 아니라 경제 활동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런던 혁대 장인 길드는 1344년 아내와 딸 이외에 다른 여자들과 함께 일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링컨의 풀러(fuller:양털 축융사)는 1297년 이렇게 규정했다. “축융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장인의 아내나 하녀 이외의 여자들과 함께 작업해서는 안 된다.” 1461년 브리스톨에서는 위버(weaver: 옷감을 짜는 사람)들이 아내, 딸, 하�痔結騈�여성들을 고용함으로써 “왕에게 충성을 바쳐 전쟁에 나가고, 이 나라를 지키며, 위버 기술을 충분히 익힌 남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하여 생계를 벌어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는 소청이 법원에 접수되었다. 결국 위버들은 자신의 생계를 벌어들이는 여성을 제외하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 났다.(115p)
농촌의 여인들도 도시 여인들 못지않게 힘든 일을 해야 했다. 영주의 땅에 가서 의무 노동을 하고 수레로 짐을 나르고 농장에서의 모든 농사일과 낙농장, 양계 일까지 돌보아야했다.
그들이 일을 많이 하고, 거친 빵, 우유, 돼지기름, 죽 등을 먹고 포도주 대신 물을 마시며 근심과 걱정도 많았지만, 그들의 삶은 안정되어 있었다. 일부 높은 신분의 사람들보다 더 큰 자급자족성을 갖추고 있었다.(135p)
그러나 농촌 사회는 꾸준히 진보하고 있었다. 비록 농촌 여인들의 삶이 힘들기는 했지만 농부의 집안에서는 남녀가 더 평등했고 서로에 대해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중세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남자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았으며, 대체로 남자와 호각 내지는 형평을 이루는 존재였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04_ 중세 여성의 교육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품행서나 처세서에서 중세 여성 교육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이들 책은 교육을 인생에 대한 준비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보았고, 순수한 지적 훈련보다 좋은 매너, 깊은 신앙심, 탁월한 가정 관리 능력을 함양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책들로 판단해 보건대 여성의 교육은 철저한 직업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여성들의 교육은 크게 (1) 귀족과 부르주아지 계급의 유복한 딸들을 위한 수녀원 학교 (2) 대귀족 부인의 시동(수행원)으로 들어가 사교 매너와 일부 지적인 기술을 배우는 것 (3) 도시의 장인 계급의 딸들을 위한 도제 제도 (4) 가난한 계급의 딸들을 위한 도시와 농촌의 초등학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성 교육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여성만을 위해 집필, 번역된 여성 질병 관련 논문들이 여러 편 있었다는 사실과 상당한 명성을 얻은 몇몇 여의사들의 이야기이다. 자클린 펠리시에 드 알마니아라닌 여의사는 14세기 초 파리에서 개업하다가 고발되었다. 그녀의 진단과 처방이 뛰어나다는 여러 증언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업은 금지되었다. 이는 의료부분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있었으며, 남자 의사들의 방해가 심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파리에는 그녀 외에도 여러 여의사들이 의료활동을 하다가 고발당한 기록이 남아있다.
여성이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의원 개업을 하고 또 아마추어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면, 즉각 남자 의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세기에 여성이 의료계에 진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 현상의 예고편이었다.(157p)
▣ 작가 소개
저 : 아일린 파워
중세 사회문화사 전공가로,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가지아 여성운동가였다. 그녀는 1889년 영국 맨체스터 인근에서 태어났다. 190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1910년에는 파리의 에콜 데 샤르트에서 1년간 유학하였다. 이후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자리를 잡았다. 1920년 인도, 미얀마,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을 일년간 여행하였는데, 이는 역사 연구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비교(比較) 사회사와 경제사 연구에 집중하며 중세의 여행가들과 상인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런던경제대학에 재직하면서 R.H. 토니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경제사와 사회사라는 학문 분야를 정립하였으며, 1926년 경제사 학회를 설립하였다. 《중세 영국의 수녀원들: 1275년에서 1535년》(1922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단행본으로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중세사 연구자로 떠올랐다. 1917~18년에 논문 〈코기셜의 페이콕〉(1920)을,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 「중세의 여성관」, 「중세의 귀족 여성」, 「중세의 일하는 여성」, 「중세 여성의 교육」, 「수녀원」 등에 관한 강연과 여러 편의 논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문 6편을 한데 묶은 것이 《중세의 사람들》(1924)이다. 이 책은 중세사의 고전이 되었고, 그녀 사후에도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아놀드 토인비, R.H. 토니, M.M.트레벨리언 등 영국의 유수한 역사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촉망받는 역사가였던 그녀는 5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급성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세의 여인들》(1920),《15세기 영국 무역의 연구》(1933), 《영국 중세사의 양모 무역》(사후 출간, 1941), 《케임브리지 대학 유럽 경제사》 제1권(J.H.클래펌과 공저, 1941) 등이 있다.
역 : 이종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 대학교 전문번역가 양성과정 겸임 교수를 역임했다.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를 번역했고 최근에는 E.M.포스터, 존 파울즈, 폴 오스터, 제임스 존스 등 현대 영미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한 이래 지금까지 140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500권을 목표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번역을 잘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며 20만 매에 달하는 번역 원고를 주무르는 동안 글에 대한 안목이 희미하게 생겨났고 번역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체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유현한 문장의 숲을 방황하는 동안 흘낏 엿본 기화요초의 추억 덕분에 산문 30여 편을 모아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우자일득(愚者一得: 어리석은 자도 많은 궁리를 하다 보면 한 가지 기특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의 넉자를 마음에 새기며 더 좋은 번역, 글을 써 볼 생각을 갖고 있다.
최근 번역서로는 『촘스키, 사상의 향연』, 『폴 오스터의 뉴욕 통신』, 『오픈북』, 『나를 디자인하라』,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파더링: 아버지가 된다는 것』, 『백만장자 파트너십』『촘스키 이펙트』,『프로이트와 모세』 등이 있고, 저서로는 『번역은 내 운명』(공저), 『지하철 헌화가』가 있다.
▣ 주요 목차
1. 중세의 여성관
2. 귀족, 향반, 중산층의 여인들
3. 도시와 농촌의 일하는 여성
4. 중세 여성의 교육
5. 중세의 수녀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중세의 여인들이 남성들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았으며, 대등한 형평을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아일린 파워가 다루는 중세는 현실 도피의 측면을 넘어
여성과 남성이 힘을 합쳐 나아가는 남녀평등의 세상이다.
이는 그녀가 1910년 이래 사망할 때까지 활발하게 벌여온 페미니즘 운동 및
여성 참정권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이었고,
그 후의 역사는 아일린 파워의 선견지명을 증명하고 있다.
01_ 중세 여성들의 진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연구한 아일린의 첫 저서
여인들의 위치를 여성관, 법률, 일상에서의 경제활동, 교육 등에서 파악하다
아일린 파워는 1912~13년 런던경제대학에서 ‘산업 혁명 이전의 영국 중세 시대에 있어서 여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고, 1920년까지 발표한 〈중세의 여성관〉, 〈중세의 귀족 여성〉, 〈중세 여성의 교육〉, 〈수녀원〉등의 논문과 강연을 묶어낸 것이 바로《중세의 여인들》이다. 이 책은 원고지 500매 분량이지만 향후 중세 여성 연구와 저술의 모태가 된 의미 있는 저서이다. 또한 중세의 여성관이나 중세의 일하는 여성, 중세의 여성 교육 같은 주제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장’중세의 여성관’2장 ‘귀족, 향반(鄕班), 중산층의 여인들, 3장 ‘도시와 농촌의 일하는 여성’이다. 교회와 귀족 집단에 의해 형성된 중세의 여성관은 기이하게도 기사도의 바탕이 된 ‘여성숭배’와 온갖 악의 근본으로 보는 ‘남존여비’사상이 공존하였다. 여성에 대한 상반된 두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진정한 여성의 지위를 여성관, 여성관련 법률과 일상에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2장에는 귀족 부인, 중산층 여인들의 결혼에 따른 법률적인 책임과 권리, 그리고 가정이나 영지 관리 등의 일상생활을 자세하게 살피고 있다. 3장은 신분이 높은 이들과 달리 도시나 농촌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을 살피고 있다. 여인들은 가사 일은 물론이고 돈을 벌어야 하는 부담까지 졌다. 장인 남편의 일을 돕거나 때로는 독립된 일을 하기도 했고, 과부의 경우 남편의 뒤를 이어 일을 맡아한 여러 예를 볼 수 있다.
아일린 파워는 이 책을 통해 중세를 현실 도피의 측면을 넘어 여성과 남성이 힘을 합쳐 나아가는 남녀평등의 세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10년 이래 사망할 때까지 활발하게 벌여온 페미니즘 운동 및 여성 참정권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중세의 여인들》에서 다루고 있는 5장 수녀원은 《중세의 사람들》 제3장 마담 에글런타인의 초고이다. 또한 2장인 ‘귀족, 향반, 중산층의 여자들’은 《중세의 사람들》의 5장인 가부장의 아내에서, 제 3장인 일하는 여성은 《중세의 사람들》의 제2장인 농부 보도에서 좀 더 깊이 있게 설명된다. 이 두 책을 함께 읽으면 중세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아일린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02_ 이브인가, 마리아인가?
중세 여성관과 여성들의 현실
최초의 여류 전업작가로서 여성 옹호 단체까지 결성한 ‘크리스틴 드 피산’의 활약
여성의 위치는 종종 어떤 국가나 시대의 문명 정도를 측정하는 시금석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중세의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기사도 정신에서 강조하는 여성 숭배는 성모 마리아 숭배에서 나왔다. 이는 여성의 열등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가톨릭교회는 동정녀 마리아 숭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동정녀 마리아 숭배가 확산되면서 이상적인 여성을 숭배하는 기사도 정신이 나오게 되었다. 세속의 여성 숭배는 성모 숭배의 낭만적 복사판이었다.
하지만 중세 기사도 정신이 여성들의 실제적 지위를 고양시킨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귀족 계급 여성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었고, 기사는 하느님과 숙녀의 옹호자였을 뿐 대다수의 여성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또한 실제에서보다 중세의 낭만적 서사시에서나 더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세의 낭만적 서사시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여성을 완전 복종시켜야 한다는 중세의 여성관은 주로 교회가 주도하였다.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여 인류의 타락이 시작되었고 그 후에 인류의 고생이 시작된 만큼 여성은 유혹, 악마, 경계의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완전한 굴복이 사회의 안정에 필수적이고 그런 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중세의 여성관은 후대에 하나의 유산으로 물려졌고, 여러 세기 동안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파블리오’(운문 �화집)나 〈여자들의 악덕 blastanges des fames〉, 〈여자들의 편지 epystles des fames〉, 〈여자들의 배신 blasones des fames〉 같은 교훈적 시 등의 문학들은 여자들의 악덕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지독한 여성 혐오와 경멸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들면서 문학에서의 여성을 옹호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여성 혐오에 반대하며 여성들의 명예회복과 여성을 칭송하는 ‘시’를 주목적으로 하는 〈사랑의 궁정 Court Amoureuse〉협회가 1400년 발족하였다. 이를 주도한 크리스틴 드 피산은 깨어있는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15살에 결혼하여 25살에 아이 셋을 둔 과부가 딘 크리스틴 드 피산은 글쓰기 이외 다른 생계 수단이 없었던 최초의 여류 ‘전업 작가’였다. 그녀는 산문 논문으로 여성의 미덕을 예증하는 사례들을 편집한 《숙녀들의 도시》와 신분이 다른 여러 계급의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의무를 설명한 《세 미덕의 책》을 쓰는 등 여성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당대의 행태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녀의 행적은 《중세의 여인들》전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일린 파워의 페미니즘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중세 여인들은 아담의 아내 이브도 동정녀 마리아도 아닌 이 양극단의 중간쯤에서 실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중세의 지배적인 여성관보다는 객관적 사회 현실, 일상생활의 주고받기, 서로 사랑하는 마음 등에 영향 받았다고 보았고, 구체적 예를 추적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중세 여성은 사회적으로 남자와 형평을 이루는 존재였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피터 롬바르드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통치자가 될 운명이 아니어서 남자의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노예로 만들어질 운명이 아니었으므로 남자의 발바닥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며, 남자의 동반자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옆구리로 만들어진 것이다.(69p)
1장, 2장, 3장에 서술된 많은 중세의 여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그런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03_ 중세는 남녀 평등의 시대였나?
중세 여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상당하였고, 기술·교양 교육이 이루어졌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중세의 여인들은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다. 중세의 정치 사회가 전적으로 토지의 소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땅을 소유한 지주 여성은 공적인 권리와 의무와 개인적 권리와 의무에서 남자와 동등한 지위였다.
땅을 소유할 수 있었고 심지어 군사적 의무와 결부된 토지(military tenure)도 소유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영주에게 신하의 예를 표시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유언장과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고 소송을 걸거나 소송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면 결혼을 하면 결혼 기간 동안의 권리는 유보된다. 결혼 당시 그녀가 봉토로 받아가지고 있던 땅은 결혼 기간 동안 남편의 봉토가 된다.(77p)
또한 도시 여인들은 여러 산업에서 남자들과 나란히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영국에서 실잣기와 비단 짜기 등 옷감 생산의 거의 모든 단계에 종사하였다. 이는 스핀스터, 웹스터, 브류스터의 호칭을 얻은 여인들의 이름이 인두세 대장에 올라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양조의 경우 상당부분을 여성들이 담당하였고, 소매업, 숙박업 등 다양한 업종에 많은 여성들이 종사하였다. 특히 과부의 경우 남편의 일을 계속하며 길드의 회원이 되거나 장인으로서 대접받기도 하였다. 비록 정규 길드로부터 보호도 받지 못하였고, 부업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중세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세의 산업은 여성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여러 산업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이 진출하지 않은 기술직은 거의 없었다. 푸주한, 양초상, 철물상, 그물상, 신기료 장수, 장갑 제조상, 혁대상, 잡화상, 지갑 제조상, 모자상, 가죽상, 제본상, 도금장이, 칠쟁이, 비단 축융사, 장식사, 양념상, 대장간, 금 세공장이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일했다.(114p)
그러나 여성들의 취업을 막기 위한 남자들의 견제가 심하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성들의 취업을 가로막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중세에는 같은 일을 해도 여자의 임금은 남자보다 낮았고, 남자들은 여자의 값싼 노동력 때문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중세 여인들이 가사노동만이 아니라 경제 활동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런던 혁대 장인 길드는 1344년 아내와 딸 이외에 다른 여자들과 함께 일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링컨의 풀러(fuller:양털 축융사)는 1297년 이렇게 규정했다. “축융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장인의 아내나 하녀 이외의 여자들과 함께 작업해서는 안 된다.” 1461년 브리스톨에서는 위버(weaver: 옷감을 짜는 사람)들이 아내, 딸, 하�痔結騈�여성들을 고용함으로써 “왕에게 충성을 바쳐 전쟁에 나가고, 이 나라를 지키며, 위버 기술을 충분히 익힌 남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하여 생계를 벌어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는 소청이 법원에 접수되었다. 결국 위버들은 자신의 생계를 벌어들이는 여성을 제외하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 났다.(115p)
농촌의 여인들도 도시 여인들 못지않게 힘든 일을 해야 했다. 영주의 땅에 가서 의무 노동을 하고 수레로 짐을 나르고 농장에서의 모든 농사일과 낙농장, 양계 일까지 돌보아야했다.
그들이 일을 많이 하고, 거친 빵, 우유, 돼지기름, 죽 등을 먹고 포도주 대신 물을 마시며 근심과 걱정도 많았지만, 그들의 삶은 안정되어 있었다. 일부 높은 신분의 사람들보다 더 큰 자급자족성을 갖추고 있었다.(135p)
그러나 농촌 사회는 꾸준히 진보하고 있었다. 비록 농촌 여인들의 삶이 힘들기는 했지만 농부의 집안에서는 남녀가 더 평등했고 서로에 대해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중세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남자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았으며, 대체로 남자와 호각 내지는 형평을 이루는 존재였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04_ 중세 여성의 교육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품행서나 처세서에서 중세 여성 교육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이들 책은 교육을 인생에 대한 준비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보았고, 순수한 지적 훈련보다 좋은 매너, 깊은 신앙심, 탁월한 가정 관리 능력을 함양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책들로 판단해 보건대 여성의 교육은 철저한 직업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여성들의 교육은 크게 (1) 귀족과 부르주아지 계급의 유복한 딸들을 위한 수녀원 학교 (2) 대귀족 부인의 시동(수행원)으로 들어가 사교 매너와 일부 지적인 기술을 배우는 것 (3) 도시의 장인 계급의 딸들을 위한 도제 제도 (4) 가난한 계급의 딸들을 위한 도시와 농촌의 초등학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성 교육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여성만을 위해 집필, 번역된 여성 질병 관련 논문들이 여러 편 있었다는 사실과 상당한 명성을 얻은 몇몇 여의사들의 이야기이다. 자클린 펠리시에 드 알마니아라닌 여의사는 14세기 초 파리에서 개업하다가 고발되었다. 그녀의 진단과 처방이 뛰어나다는 여러 증언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업은 금지되었다. 이는 의료부분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있었으며, 남자 의사들의 방해가 심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파리에는 그녀 외에도 여러 여의사들이 의료활동을 하다가 고발당한 기록이 남아있다.
여성이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의원 개업을 하고 또 아마추어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면, 즉각 남자 의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세기에 여성이 의료계에 진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 현상의 예고편이었다.(157p)
▣ 작가 소개
저 : 아일린 파워
중세 사회문화사 전공가로,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가지아 여성운동가였다. 그녀는 1889년 영국 맨체스터 인근에서 태어났다. 190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1910년에는 파리의 에콜 데 샤르트에서 1년간 유학하였다. 이후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자리를 잡았다. 1920년 인도, 미얀마,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을 일년간 여행하였는데, 이는 역사 연구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비교(比較) 사회사와 경제사 연구에 집중하며 중세의 여행가들과 상인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런던경제대학에 재직하면서 R.H. 토니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경제사와 사회사라는 학문 분야를 정립하였으며, 1926년 경제사 학회를 설립하였다. 《중세 영국의 수녀원들: 1275년에서 1535년》(1922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단행본으로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중세사 연구자로 떠올랐다. 1917~18년에 논문 〈코기셜의 페이콕〉(1920)을,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 「중세의 여성관」, 「중세의 귀족 여성」, 「중세의 일하는 여성」, 「중세 여성의 교육」, 「수녀원」 등에 관한 강연과 여러 편의 논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문 6편을 한데 묶은 것이 《중세의 사람들》(1924)이다. 이 책은 중세사의 고전이 되었고, 그녀 사후에도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아놀드 토인비, R.H. 토니, M.M.트레벨리언 등 영국의 유수한 역사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촉망받는 역사가였던 그녀는 5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급성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세의 여인들》(1920),《15세기 영국 무역의 연구》(1933), 《영국 중세사의 양모 무역》(사후 출간, 1941), 《케임브리지 대학 유럽 경제사》 제1권(J.H.클래펌과 공저, 1941) 등이 있다.
역 : 이종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 대학교 전문번역가 양성과정 겸임 교수를 역임했다.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를 번역했고 최근에는 E.M.포스터, 존 파울즈, 폴 오스터, 제임스 존스 등 현대 영미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한 이래 지금까지 140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500권을 목표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번역을 잘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며 20만 매에 달하는 번역 원고를 주무르는 동안 글에 대한 안목이 희미하게 생겨났고 번역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체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유현한 문장의 숲을 방황하는 동안 흘낏 엿본 기화요초의 추억 덕분에 산문 30여 편을 모아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우자일득(愚者一得: 어리석은 자도 많은 궁리를 하다 보면 한 가지 기특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의 넉자를 마음에 새기며 더 좋은 번역, 글을 써 볼 생각을 갖고 있다.
최근 번역서로는 『촘스키, 사상의 향연』, 『폴 오스터의 뉴욕 통신』, 『오픈북』, 『나를 디자인하라』,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파더링: 아버지가 된다는 것』, 『백만장자 파트너십』『촘스키 이펙트』,『프로이트와 모세』 등이 있고, 저서로는 『번역은 내 운명』(공저), 『지하철 헌화가』가 있다.
▣ 주요 목차
1. 중세의 여성관
2. 귀족, 향반, 중산층의 여인들
3. 도시와 농촌의 일하는 여성
4. 중세 여성의 교육
5. 중세의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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