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통치철학 빈곤의 시대, 조선에 길을 묻다
‘공정사회’를 통해 본 통치철학 부재의 현장
연일 ‘공정사회’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하반기 국정핵심지표로 ‘공정사회’를 언급한 후 사회 곳곳에서 공정사회 건설이 오르내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행법을 어긴 인사들이 장관 후보에 올랐다가 인사청문회를 넘지 못해 탈락하고 현직 장관이 자식의 특혜 시비로 자진 사퇴하기까지 했다. 국민들의 실망감과 불신 또한 높아지고 있다.
통치는 정치적 행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지역과 성별 및 계층을 초월하여 원활한 소통구조를 만들고, 법과 제도라는 외형적 요소와 사회구성원들의 가치관 등의 내면적 요소를 통해 심층적인 의미에서 한 사회를 규율한다. ‘공정사회’를 둘러싼 국민들의 분노는 아무런 소통도 없이 법을 어긴 인사들이 자신들을 규율하려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에 대한 반발의 표출이다.
통치철학은 이러한 통치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다. 제대로 된 통치철학이라면 해당 사회의 정치 및 경제적 환경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무하거나 제어하는 문화적 요인에 대해서도 깊이 통찰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의 모습은 이 같은 통치철학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장관 후보자의 범법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밀어붙인 행태는 국민들이 통치에서 바라는 바를 제대로 몰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통치철학 빈곤의 현장이다.
조선, 지치至治의 실현을 꿈꾸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통치철학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멀리 갈 것 없다. 역사상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가 처한 정치, 경제 및 문화적 실상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그 바탕 위에 통치철학을 구상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통치철학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주목할 만한 통치철학이 존재해왔던 것이다.
특히 조선사회에는 하나의 뚜렷한 이념적 지향점이 있었다. 그것은 특정 정파의 정치적 목표나 전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경제?문화의 각 영역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그 핵심에 자리한 신념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성리학적 예교禮敎를 철저히 준행하면 장차 대동사회大同社會가 건설되리라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창건 당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지치至治”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의 통치철학》은 바로 이러한 조선의 통치철학이 시대적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한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조선의 통치철학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추적하여 통치철학의 근저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달라지는 진자의 궤적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지치”의 실현을 위한 여러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은 빈곤한 오늘날의 통치철학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해줄 것이다.
조선의 통치철학, 시대에 맞게 변화하다
왜 조선의 통치철학인가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난날 옳다고 여겼던 가치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낡디 낡은 조선의 통치철학에 아직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조선왕조의 역사적 전통은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멸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조선의 성리학적 가치관은 많은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이런 면에서 조선의 통치철학을 이해하는 일은 현대 한국사회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또한 조선의 통치철학은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통치철학의 정립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알다시피 성리학은 국가의 정치이념인 동시에,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위한 실천도구였다. 나아가 그것은 사회개혁의 이념이자 수단이었다. 조선사회는 이러한 통치철학의 완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저자들이 조선의 통치철학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다.
조선, 시대 변화에 따라 통치철학을 달리하다
저자들은 조선사회가 겪은 주요 변화에 착목해 다섯 시기에 주목한다. 첫째, 조선왕조가 갓 창업기를 벗어나 수성기守成期에 들어선 세종 시기다. 조선의 통치철학이 최초단계에서는 과연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획득했을까.
둘째, 조선이 가장 조선다운 모습을 띠게 된 16세기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의 기반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국가의 문물제도가 성리학적 가치관 위에 정비되었다. 그렇다면 해당 시기 통치철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셋째,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다. 이 시기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병자호란이 발생, 정치?군사?외교?경제 및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심각한 피해와 충격을 입는다. 비상시기를 맞은 조선의 왕? 신하들은 과연 종래의 통치철학에 어떠한 수정을 가했을까.
넷째,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기다. 탕평책의 실시로 정치가 일신되고, 도시와 시장경제가 이전 시기에 비해 상당히 발달했으며, 서민문화가 대두하고, 소중화주의가 문화계의 화두로 등장한 이 시기, 조선의 통치철학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었을까.
다섯째, 20세기 초 마침내 멸망하고 만 조선왕조의 말엽이다. 막바지의 조선왕조는 조상 전래의 성리학적 이념과 가치관에만 의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물밀 듯 밀어닥친 서구의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난파되지 않도록 효과적인 대응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근대화 압력은 조선의 통치철학에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
조선의 통치철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정도전과 세종의 민본사상, “백성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라”
이 책의 서두는 정도전과 세종의 민본사상이 장식하고 있다. 박현모 교수는 조선의 창업공신 정도전과 수성기의 왕 세종의 통치이념이 유사하다고 진단한다. 실천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정도전은 민民을 위주로 국가경영 원리와 각종 제도를 구상했다. 세종 역시 실용의 학문을 중시했고,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을 일일이 접견하여 ‘목민牧民의 도리와 책임’을 당부할 정도로 민본정치를 실천했다. 이러한 민본의 통치이념은 조광조, 이이 정약용 그리고 개항기의 서재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 ‘정치의 제1원리’가 되었다.
아울러 정도전과 세종은 재상중심체제를 이상적인 통치체제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안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하려 했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육조직계제, 즉 판서들이 국왕에게 정무를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다시 고쳐 “재상에게 일을 전부 맡기는” 의정부서사제로 환원시켰다. 재상 중심의 국가체제란 본디 정도전의 구상이었다.
정도전과 세종 두 사람은 인생 초반부에 소외된 경험을 겪으며 스스로 낮아질 수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직접 만나 정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민본을 위주로 한 그들의 통치철학은 바로 인생의 시련과 깊은 성찰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조광조와 김인후, 이상세계를 현실로 가져오다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이른 16세기, 성리학적 이상주의가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이가 조광조다. 백승종 교수는 조광조가 제시한 통치철학의 특징을 ‘요순시대’의 현세 구현 신념에서 찾는다.
조광조는 성리학 지상주의가 조선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광조의 등장은 인륜과 도덕에 기초한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도래를 확신하는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조선사회의 정치담론을 주도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몰락은 왕도정치의 즉각적인 구현이 불가능한 정치현실의 증좌이기도 하다. 성리학적 이상정치론이 실종되자 정치적 득실에 집착하는 속물정치가 조정을 지배했다.
이에 김인후가 조광조의 복권운동을 선도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선후배 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로써 조선사회에는 성리학 지상주의가 팽배했고, 조광조가 벌인 지치운동은 당파를 초월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조선은 동시대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에 가장 심화된 형태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가 되었다. 성리학을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류성룡과 최명길의 통치론, 외교적 행적을 통해 살피다
한명기 교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주목하여 류성룡과 최명길의 외교 행적을 중심으로 그들의 통치이념과 정치사상을 살핀다. 명군明軍이 참전하면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 간의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명?일 양국은 강화협상을 시작했지만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 명군의 참전은 여진에 대한 견제력 약화를 가져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주변의 여러 부족을 장악하는 빌미가 되었다. 왜란 이후 명은 자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끌어들여 누르하치의 후금과 대결시키려는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을 구사했다. 선택의 기로에 몰린 조선은 결국 명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병자호란이라는 또 다른 참담한 비극이 초래되었다.
류성룡과 최명길은 양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이 기울인 여러 가지 노력과 거기에 담긴 사상적 지향성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전쟁의 위험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식, 조선을 압박한 외세의 입김, 그리고 그러한 외압에 대한 내부의 정치적 논란을 살피면서 한 교수는 통치철학의 변화를 고찰한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외교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할 때, 전쟁과 같은 비상상황에서 조선의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생존수단은 ‘외교’일 수밖에 없어서다.
류성룡과 최명길은 종사宗社를 보전하는 것이 그들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인식했다. 두 사람은 일찍부터 양명학陽明學과 같은 ‘이단’에 대해서도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지녔던 만큼 명분과 이상보다는 현실에 토대를 두고 국가의 위기를 해결했다. 그 과정에서 류성룡은 ‘주화오국主和誤國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최명길은 ‘조선의 진회秦檜’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사 보전’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했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나 최명길이 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국가재건을 위해 노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비전을 제시한 탁월한 경세가였다.
영조와 정조의 통치철학,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다음 조선은 그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정치체제를 쉽게 정비할 수 없었다. 숙종 시기에는 붕당간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어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숙종 후반기에 이르러 전란의 충격과 당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혼란상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18세기 조선 후기를 이끈 두 명의 탁월한 왕 영조와 정조는 어렵게 즉위에 성공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다방면에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신병주 교수는 그들의 통치철학을 해부한다. 그들 두 왕은 민본, 민주, 과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영조는 요순정치의 회복을 목표로 새로운 국가사회의 전범으로서 육경학六經學을 강조했다. 특히 그의 정치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검약의 통치철학이다.
영조와 정조는 왕이 주도하여 정치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영조시대에 피력된 군사君師 개념은 정조 대에 좀 더 적극적으로 구현된다. 정조의 정치사상은 영조의 계승이었지만 더 세련된 것이었다. 정조는 군사君師를 자처하면서 규장각을 설립하고 초계문신을 뽑아 직접 교육시켰다. 경연과 학문을 매개로 신하가 스승이고 임금이 제자의 위치에 있던 역전된 군신관계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로써 임금이 곧 스승이 되고 왕통과 도통이 하나로 합치되어 갔다.
왕권 중심의 정치기반과 논리를 축적한 정조는 화성이 완공된 말년에 이르러 마침내 군주가 태극이자 조화옹으로서의 천天 혹은 상제라는 절대군주론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은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만천’에 비유된 신료와 백성들은 ‘명월’이자 태극인 군주의 감화를 입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조는 신민의 다양성을 통합하고,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며,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화시키려는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통치철학, 그는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을까
19세기 말 조선은 서구열강으로 인해 위기를 겪으면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어 1910년 8월까지 약 13년간 존속했다. 우리 손으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던 마지막 시기였다.
허동현 교수는 이 시기 고종이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모방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을 구명하는 동시에, 전통적 통치철학의 변화를 탐구한다. 제정 러시아는 정치체제의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인텔리겐치아와 같은 지식인과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는 초기 형태의 시민사회가 이미 형성되었고, 1905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에는 서구형 국민국가에 상당히 근접했다. 대한제국이 등장한 1890년대 역시 국민국가로의 이행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독립협회 측이 실현 가능한 모델로 본 것은 일본의 입헌정체였다. 그러나 고종과 그 측근세력의 “잠재모델”은 러시아의 차르체제였다. 국민국가 만들기라는 이상적인 잣대로 독립협회 운동과 “광무개혁”의 공과를 저울로 재어보자. 국민국가란 그 정치체제의 이질성과는 별도로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국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백성을 국민으로 만들기보다 신민臣民으로 억누르려 한 대한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와는 거리가 있다. 엄밀히 말해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잡으려 애쓴 허울뿐인 왕국이었다.
고종이 거처한 경운궁이 러시아?미국?영국 대사관 옆이었다는 사실도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의심하게 한다.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증언처럼 고종황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힘을 다하다 독살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종이 을사조약에 동의했는지,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이름뿐인 제국의 황제와 양반들은 이 땅의 백성들이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들을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를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지키려 하지 않고 외세에 기대 명맥을 유지하려 했던 왕조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민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독립협회 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이상을 계승한 것이자 한국 현대 민주주의 사상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개별적 권리로서 인권을 중시하는 오늘날 시민사회의 눈으로 볼 때 해방 후 권위주의 시대의 뿌리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선의 통치철학이 말해주는 것들
조선 통치철학의 흥망성쇠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조선의 통치철학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다. 정도전부터 세종, 조광조 및 김인후에 이르기까지 민본을 바탕으로 요순의 정치를 현세에 구현하고자 했다. 류성룡과 최명길은 왜란으로 국운이 흔들리던 비상시기, 외교력에 의존하여 종사를 무사히 보전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두었다. 새로운 시대를 지향한 18세기 영조와 정조는 군사를 자처하면서 왕이 주도하는 민본사상의 이념을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시시각각 밀려오는 근대화의 압력을 도저히 이길 수 없던 대한제국의 상황은 심각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모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말기의 조선왕조는 성리학에 입각한 과거의 통치철학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민 중심의 통치, 놓치지 말아야 할 최우선의 통치철학
조선의 통치철학,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선의 마을은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한 위계질서가 중시되었다는 한 가지 점만 제외하면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예학이 살아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어울려 함께 사는 작은 마을공동체가 있었다. 비록 성리학적 이상의 완벽한 구현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오늘날의 초라한 시골마을 및 황폐한 도회의 거리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물론 조선의 통치철학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성리학 위주의 조선사회를 향수어린 눈길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성리학적 이상을 폐기처분하는 모습도 정당하지 못하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맞게 통치철학을 변모시키면서도 놓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민에 대한 예의였다. 민을 중심에 두는 통치, 오늘날 놓치지 말아야 할 최우선의 통치철학이 아닐까.
▣ 작가 소개
백승종|전 독일 보훔대학교 한국학과장 대리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 연구실장
한명기|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허동현|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학부대학장
▣ 주요 목차
조선의 통치철학의 첫걸음을 떼며
정도전과 세종대왕의 민본사상, “백성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라” _박현모
정도전과 세종대왕의 만남?
세종대왕이 태어나던 시기 조선의 정국
명태조 주원장의 압력: “조선의 화근禍根 정도전을 압송하라”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종 잠저에서 일어난 일
정도전과 세종 정치의 비교 1: 민본사상
정도전과 세종 정치의 비교 2: 재상중심체제
세종의 정승 임용 현황
세종과 정도전의 차이: 명나라에 대한 태도
정도전과 세종대왕, 그들이 감동을 주는 이유
조광조와 김인후, 이상세계를 현실로 가져오다 _백승종
조선에서 ‘요순시대’를 꿈꾸다
조광조를 위한 김인후의 변론
유교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광조의 통치철학
조광조와 중종
조광조가 되지 않은 김인후
16세기 유교적 통치철학의 역사적 의미
류성룡과 최명길의 통치론, 외교적 행적을 통해 살피다 _한명기
조선 외교의 최전선에서
임진왜란과 류성룡
인재를 등용하고, 전란 극복의 자신감을 가져라
명明의 의구심을 해소시키다
명군의 재참전 과정과 접반을 위한 류성룡의 노력
명일明日 강화협상의 본격화와 류성룡의 대응
현실론으로 전환한 류성룡의 자강自强 노력
병자호란과 최명길
주화의 길을 걸었던 까닭은
정묘-병자호란 시기 청의 성장과 칭제건원
청의 조선 압박과 최명길의 대응책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의 외교 행보
현실에 토대를 두고 실사구시하라
영조와 정조의 통치철학,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다 _신병주
영조와 정조시대의 전사前史
영조의 통치철학
당쟁의 경험을 극복한 탕평책
영조의 경제정책: 서민군주의 지향과 균역법
청계천 준천 공사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
문화와 편찬사업의 중흥
정조의 통치철학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1791년,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뿌리 뽑다
화성의 건설과 화성 행차
문예중흥과 편찬사업
정조의 사회통합 정책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과 정조 말년의 정국 운영
영조와 정조, 시대 상황에 맞게 통치하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통치철학, 그는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을까 _허동현
대한제국 성격 논쟁으로 본 고종의 통치철학
왜 다시 황제인가
고종의 눈에 비친 러시아: 침략자인가 독립의 옹호자인가
대한제국은 “민국이념”에 기반을 둔 자주적 제국이었나
개혁 모델로서의 러시아
대한제국은 국민국가였나
주석
찾아보기
통치철학 빈곤의 시대, 조선에 길을 묻다
‘공정사회’를 통해 본 통치철학 부재의 현장
연일 ‘공정사회’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하반기 국정핵심지표로 ‘공정사회’를 언급한 후 사회 곳곳에서 공정사회 건설이 오르내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행법을 어긴 인사들이 장관 후보에 올랐다가 인사청문회를 넘지 못해 탈락하고 현직 장관이 자식의 특혜 시비로 자진 사퇴하기까지 했다. 국민들의 실망감과 불신 또한 높아지고 있다.
통치는 정치적 행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지역과 성별 및 계층을 초월하여 원활한 소통구조를 만들고, 법과 제도라는 외형적 요소와 사회구성원들의 가치관 등의 내면적 요소를 통해 심층적인 의미에서 한 사회를 규율한다. ‘공정사회’를 둘러싼 국민들의 분노는 아무런 소통도 없이 법을 어긴 인사들이 자신들을 규율하려 나서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에 대한 반발의 표출이다.
통치철학은 이러한 통치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다. 제대로 된 통치철학이라면 해당 사회의 정치 및 경제적 환경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무하거나 제어하는 문화적 요인에 대해서도 깊이 통찰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의 모습은 이 같은 통치철학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장관 후보자의 범법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밀어붙인 행태는 국민들이 통치에서 바라는 바를 제대로 몰랐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통치철학 빈곤의 현장이다.
조선, 지치至治의 실현을 꿈꾸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통치철학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멀리 갈 것 없다. 역사상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가 처한 정치, 경제 및 문화적 실상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그 바탕 위에 통치철학을 구상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통치철학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주목할 만한 통치철학이 존재해왔던 것이다.
특히 조선사회에는 하나의 뚜렷한 이념적 지향점이 있었다. 그것은 특정 정파의 정치적 목표나 전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경제?문화의 각 영역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그 핵심에 자리한 신념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성리학적 예교禮敎를 철저히 준행하면 장차 대동사회大同社會가 건설되리라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창건 당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지치至治”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의 통치철학》은 바로 이러한 조선의 통치철학이 시대적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한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조선의 통치철학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추적하여 통치철학의 근저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달라지는 진자의 궤적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지치”의 실현을 위한 여러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은 빈곤한 오늘날의 통치철학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해줄 것이다.
조선의 통치철학, 시대에 맞게 변화하다
왜 조선의 통치철학인가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난날 옳다고 여겼던 가치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낡디 낡은 조선의 통치철학에 아직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조선왕조의 역사적 전통은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멸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조선의 성리학적 가치관은 많은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이런 면에서 조선의 통치철학을 이해하는 일은 현대 한국사회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또한 조선의 통치철학은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통치철학의 정립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알다시피 성리학은 국가의 정치이념인 동시에,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위한 실천도구였다. 나아가 그것은 사회개혁의 이념이자 수단이었다. 조선사회는 이러한 통치철학의 완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저자들이 조선의 통치철학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다.
조선, 시대 변화에 따라 통치철학을 달리하다
저자들은 조선사회가 겪은 주요 변화에 착목해 다섯 시기에 주목한다. 첫째, 조선왕조가 갓 창업기를 벗어나 수성기守成期에 들어선 세종 시기다. 조선의 통치철학이 최초단계에서는 과연 어떠한 형식과 내용을 획득했을까.
둘째, 조선이 가장 조선다운 모습을 띠게 된 16세기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의 기반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국가의 문물제도가 성리학적 가치관 위에 정비되었다. 그렇다면 해당 시기 통치철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셋째,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다. 이 시기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병자호란이 발생, 정치?군사?외교?경제 및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심각한 피해와 충격을 입는다. 비상시기를 맞은 조선의 왕? 신하들은 과연 종래의 통치철학에 어떠한 수정을 가했을까.
넷째,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기다. 탕평책의 실시로 정치가 일신되고, 도시와 시장경제가 이전 시기에 비해 상당히 발달했으며, 서민문화가 대두하고, 소중화주의가 문화계의 화두로 등장한 이 시기, 조선의 통치철학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었을까.
다섯째, 20세기 초 마침내 멸망하고 만 조선왕조의 말엽이다. 막바지의 조선왕조는 조상 전래의 성리학적 이념과 가치관에만 의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물밀 듯 밀어닥친 서구의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난파되지 않도록 효과적인 대응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근대화 압력은 조선의 통치철학에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
조선의 통치철학,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정도전과 세종의 민본사상, “백성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라”
이 책의 서두는 정도전과 세종의 민본사상이 장식하고 있다. 박현모 교수는 조선의 창업공신 정도전과 수성기의 왕 세종의 통치이념이 유사하다고 진단한다. 실천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정도전은 민民을 위주로 국가경영 원리와 각종 제도를 구상했다. 세종 역시 실용의 학문을 중시했고,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을 일일이 접견하여 ‘목민牧民의 도리와 책임’을 당부할 정도로 민본정치를 실천했다. 이러한 민본의 통치이념은 조광조, 이이 정약용 그리고 개항기의 서재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 ‘정치의 제1원리’가 되었다.
아울러 정도전과 세종은 재상중심체제를 이상적인 통치체제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안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하려 했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육조직계제, 즉 판서들이 국왕에게 정무를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다시 고쳐 “재상에게 일을 전부 맡기는” 의정부서사제로 환원시켰다. 재상 중심의 국가체제란 본디 정도전의 구상이었다.
정도전과 세종 두 사람은 인생 초반부에 소외된 경험을 겪으며 스스로 낮아질 수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직접 만나 정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민본을 위주로 한 그들의 통치철학은 바로 인생의 시련과 깊은 성찰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조광조와 김인후, 이상세계를 현실로 가져오다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이른 16세기, 성리학적 이상주의가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이가 조광조다. 백승종 교수는 조광조가 제시한 통치철학의 특징을 ‘요순시대’의 현세 구현 신념에서 찾는다.
조광조는 성리학 지상주의가 조선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광조의 등장은 인륜과 도덕에 기초한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도래를 확신하는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조선사회의 정치담론을 주도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몰락은 왕도정치의 즉각적인 구현이 불가능한 정치현실의 증좌이기도 하다. 성리학적 이상정치론이 실종되자 정치적 득실에 집착하는 속물정치가 조정을 지배했다.
이에 김인후가 조광조의 복권운동을 선도했다. 그의 주장은 많은 선후배 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로써 조선사회에는 성리학 지상주의가 팽배했고, 조광조가 벌인 지치운동은 당파를 초월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조선은 동시대의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에 가장 심화된 형태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가 되었다. 성리학을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문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류성룡과 최명길의 통치론, 외교적 행적을 통해 살피다
한명기 교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주목하여 류성룡과 최명길의 외교 행적을 중심으로 그들의 통치이념과 정치사상을 살핀다. 명군明軍이 참전하면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 간의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명?일 양국은 강화협상을 시작했지만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 명군의 참전은 여진에 대한 견제력 약화를 가져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주변의 여러 부족을 장악하는 빌미가 되었다. 왜란 이후 명은 자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끌어들여 누르하치의 후금과 대결시키려는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을 구사했다. 선택의 기로에 몰린 조선은 결국 명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병자호란이라는 또 다른 참담한 비극이 초래되었다.
류성룡과 최명길은 양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이 기울인 여러 가지 노력과 거기에 담긴 사상적 지향성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전쟁의 위험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식, 조선을 압박한 외세의 입김, 그리고 그러한 외압에 대한 내부의 정치적 논란을 살피면서 한 교수는 통치철학의 변화를 고찰한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외교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할 때, 전쟁과 같은 비상상황에서 조선의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생존수단은 ‘외교’일 수밖에 없어서다.
류성룡과 최명길은 종사宗社를 보전하는 것이 그들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인식했다. 두 사람은 일찍부터 양명학陽明學과 같은 ‘이단’에 대해서도 유연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지녔던 만큼 명분과 이상보다는 현실에 토대를 두고 국가의 위기를 해결했다. 그 과정에서 류성룡은 ‘주화오국主和誤國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최명길은 ‘조선의 진회秦檜’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사 보전’이라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했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나 최명길이 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국가재건을 위해 노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비전을 제시한 탁월한 경세가였다.
영조와 정조의 통치철학,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다음 조선은 그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정치체제를 쉽게 정비할 수 없었다. 숙종 시기에는 붕당간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어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숙종 후반기에 이르러 전란의 충격과 당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혼란상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18세기 조선 후기를 이끈 두 명의 탁월한 왕 영조와 정조는 어렵게 즉위에 성공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다방면에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신병주 교수는 그들의 통치철학을 해부한다. 그들 두 왕은 민본, 민주, 과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영조는 요순정치의 회복을 목표로 새로운 국가사회의 전범으로서 육경학六經學을 강조했다. 특히 그의 정치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검약의 통치철학이다.
영조와 정조는 왕이 주도하여 정치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영조시대에 피력된 군사君師 개념은 정조 대에 좀 더 적극적으로 구현된다. 정조의 정치사상은 영조의 계승이었지만 더 세련된 것이었다. 정조는 군사君師를 자처하면서 규장각을 설립하고 초계문신을 뽑아 직접 교육시켰다. 경연과 학문을 매개로 신하가 스승이고 임금이 제자의 위치에 있던 역전된 군신관계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로써 임금이 곧 스승이 되고 왕통과 도통이 하나로 합치되어 갔다.
왕권 중심의 정치기반과 논리를 축적한 정조는 화성이 완공된 말년에 이르러 마침내 군주가 태극이자 조화옹으로서의 천天 혹은 상제라는 절대군주론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은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만천’에 비유된 신료와 백성들은 ‘명월’이자 태극인 군주의 감화를 입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조는 신민의 다양성을 통합하고,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며,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화시키려는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통치철학, 그는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을까
19세기 말 조선은 서구열강으로 인해 위기를 겪으면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어 1910년 8월까지 약 13년간 존속했다. 우리 손으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던 마지막 시기였다.
허동현 교수는 이 시기 고종이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모방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을 구명하는 동시에, 전통적 통치철학의 변화를 탐구한다. 제정 러시아는 정치체제의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인텔리겐치아와 같은 지식인과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는 초기 형태의 시민사회가 이미 형성되었고, 1905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에는 서구형 국민국가에 상당히 근접했다. 대한제국이 등장한 1890년대 역시 국민국가로의 이행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독립협회 측이 실현 가능한 모델로 본 것은 일본의 입헌정체였다. 그러나 고종과 그 측근세력의 “잠재모델”은 러시아의 차르체제였다. 국민국가 만들기라는 이상적인 잣대로 독립협회 운동과 “광무개혁”의 공과를 저울로 재어보자. 국민국가란 그 정치체제의 이질성과는 별도로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국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백성을 국민으로 만들기보다 신민臣民으로 억누르려 한 대한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와는 거리가 있다. 엄밀히 말해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잡으려 애쓴 허울뿐인 왕국이었다.
고종이 거처한 경운궁이 러시아?미국?영국 대사관 옆이었다는 사실도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의심하게 한다.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증언처럼 고종황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힘을 다하다 독살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종이 을사조약에 동의했는지,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이름뿐인 제국의 황제와 양반들은 이 땅의 백성들이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들을 바탕으로 한 국민국가를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지키려 하지 않고 외세에 기대 명맥을 유지하려 했던 왕조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민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독립협회 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이상을 계승한 것이자 한국 현대 민주주의 사상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개별적 권리로서 인권을 중시하는 오늘날 시민사회의 눈으로 볼 때 해방 후 권위주의 시대의 뿌리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선의 통치철학이 말해주는 것들
조선 통치철학의 흥망성쇠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조선의 통치철학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다. 정도전부터 세종, 조광조 및 김인후에 이르기까지 민본을 바탕으로 요순의 정치를 현세에 구현하고자 했다. 류성룡과 최명길은 왜란으로 국운이 흔들리던 비상시기, 외교력에 의존하여 종사를 무사히 보전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두었다. 새로운 시대를 지향한 18세기 영조와 정조는 군사를 자처하면서 왕이 주도하는 민본사상의 이념을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시시각각 밀려오는 근대화의 압력을 도저히 이길 수 없던 대한제국의 상황은 심각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모방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말기의 조선왕조는 성리학에 입각한 과거의 통치철학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민 중심의 통치, 놓치지 말아야 할 최우선의 통치철학
조선의 통치철학,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선의 마을은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한 위계질서가 중시되었다는 한 가지 점만 제외하면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예학이 살아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어울려 함께 사는 작은 마을공동체가 있었다. 비록 성리학적 이상의 완벽한 구현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오늘날의 초라한 시골마을 및 황폐한 도회의 거리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물론 조선의 통치철학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성리학 위주의 조선사회를 향수어린 눈길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성리학적 이상을 폐기처분하는 모습도 정당하지 못하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맞게 통치철학을 변모시키면서도 놓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민에 대한 예의였다. 민을 중심에 두는 통치, 오늘날 놓치지 말아야 할 최우선의 통치철학이 아닐까.
▣ 작가 소개
백승종|전 독일 보훔대학교 한국학과장 대리
박현모|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 연구실장
한명기|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허동현|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학부대학장
▣ 주요 목차
조선의 통치철학의 첫걸음을 떼며
정도전과 세종대왕의 민본사상, “백성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라” _박현모
정도전과 세종대왕의 만남?
세종대왕이 태어나던 시기 조선의 정국
명태조 주원장의 압력: “조선의 화근禍根 정도전을 압송하라”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종 잠저에서 일어난 일
정도전과 세종 정치의 비교 1: 민본사상
정도전과 세종 정치의 비교 2: 재상중심체제
세종의 정승 임용 현황
세종과 정도전의 차이: 명나라에 대한 태도
정도전과 세종대왕, 그들이 감동을 주는 이유
조광조와 김인후, 이상세계를 현실로 가져오다 _백승종
조선에서 ‘요순시대’를 꿈꾸다
조광조를 위한 김인후의 변론
유교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광조의 통치철학
조광조와 중종
조광조가 되지 않은 김인후
16세기 유교적 통치철학의 역사적 의미
류성룡과 최명길의 통치론, 외교적 행적을 통해 살피다 _한명기
조선 외교의 최전선에서
임진왜란과 류성룡
인재를 등용하고, 전란 극복의 자신감을 가져라
명明의 의구심을 해소시키다
명군의 재참전 과정과 접반을 위한 류성룡의 노력
명일明日 강화협상의 본격화와 류성룡의 대응
현실론으로 전환한 류성룡의 자강自强 노력
병자호란과 최명길
주화의 길을 걸었던 까닭은
정묘-병자호란 시기 청의 성장과 칭제건원
청의 조선 압박과 최명길의 대응책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의 외교 행보
현실에 토대를 두고 실사구시하라
영조와 정조의 통치철학,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다 _신병주
영조와 정조시대의 전사前史
영조의 통치철학
당쟁의 경험을 극복한 탕평책
영조의 경제정책: 서민군주의 지향과 균역법
청계천 준천 공사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
문화와 편찬사업의 중흥
정조의 통치철학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1791년,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뿌리 뽑다
화성의 건설과 화성 행차
문예중흥과 편찬사업
정조의 사회통합 정책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과 정조 말년의 정국 운영
영조와 정조, 시대 상황에 맞게 통치하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통치철학, 그는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을까 _허동현
대한제국 성격 논쟁으로 본 고종의 통치철학
왜 다시 황제인가
고종의 눈에 비친 러시아: 침략자인가 독립의 옹호자인가
대한제국은 “민국이념”에 기반을 둔 자주적 제국이었나
개혁 모델로서의 러시아
대한제국은 국민국가였나
주석
찾아보기
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