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유럽의 역사적 뿌리를 밝힌 중세사의 고전
오늘날 유럽은 언어와 민족, 국가를 달리하지만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 정체성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이어 온 것도 아니고, 20세기 말 인위적인 국가 연합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유럽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실체이다. 오래 전부터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앞다투어 ‘유럽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뿌리’를 놓고 고심해 왔고 저마다 학문적 근거와 연구 성과들을 내놓았다. 일반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게르만의 침입’을 통해 5세기 무렵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했다고 보고, 유럽의 기원을 실질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으로 본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이가 18세기《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1737~1794년)이다.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런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저작이 바로《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이다. 이 책은 다루고 있는 주제가 워낙 광범위하고 서술이 논리적이기 때문에 이른바 ‘피렌 테제’로 일컬어지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앙리 피렌은 게르만족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로마 세계’(지중해 세계)는 유지되었고 사람들은 고대 질서 속에 살아갔다고 분석한다. 고대와 중세의 연속성을 주장한 알폰스 도프슈(1868~1953년)의 견해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그때까지 거의 고려하지 않았던 이슬람의 영향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시켰다. 지중해가 이슬람 세력에게 장악됨으로써 고대 지중해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중세 유럽사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은 생경한 역사이론이 아니라 풍부한 사실(史實)에 기반을 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명쾌하고도 깊이 있는 서술 솜씨는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나온다. 당대의 법률서, 공문서, 문학 작품, 수도원 문서뿐 아니라 주교의 편지나 상인들의 장부 등 갖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나간다. 지은이에 따르면 훈족의 동진으로 촉발된 게르만의 침입은 사실상 정치와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 로마세계의 틀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런 관점은 화폐경제, 라틴어, 교역 물품, 정기시장, 식생활 같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종교와 예술 같은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관철된다.
피렌 테제 “이슬람이 없는 유럽은 상상할 수 없다”
5세기 서로마제국 정부가 몰락한 뒤로 사실상 서방세계 전체는 로마 세계에 세운 게르만족 왕국들의 모자이크였고 콘스탄티노플이 이 복합체의 수도 노릇을 했다. 즉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수에비족은 갈라시아에, 서고트족은 에스파냐와 루아르 강 남부까지, 부르군트족은 론 강 유역에 저마다 왕국을 건설했다. 여러 ‘야만’ 민족은 저마다 고대 질서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그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언제나 서방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아프리카와 에스파냐가 그 뒤로 바그다드의 궤도에 들어갔다. 그런 지역들에서는 다른 종교가 그 모습을 드러냈고, 전혀 다른 문화가 출현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이슬람 침공은 “포에니 전쟁 이래 유럽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 “고전 전통의 종말”과 “중세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활의 축이 지중해에서 북방의 게르만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 교황은 비잔틴 황제가 이슬람교도와의 투쟁에 전념하여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게 되자 황제와 결별하고, 이 새로운 왕조와 제휴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도 새로운 시대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중세로 이행하는 기간은 길었다. 650년부터 750년까지 꼬박 1세기가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우세해진 것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 동안이었다.
이런 서방세계를 ‘유럽 세계’로 통합하고, 로마 문명에 편입되어 살아가던 게르만 민족의 전통을 부활시킨 이가 바로 샤를마뉴였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은 그 기억이 빚어 낸 결과물이다. 샤를마뉴가 이룬 ‘하나의 유럽’을 재현하자는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입주한 건물 이름이 ‘샤를마뉴 빌딩’인 걸 보면 그 상징성을 짐작할 만하다.
앙리 피렌의 역사학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1862-1935)은 온후한 인품, 폭넓은 학식, 독특한 구상력과 학계에 끼친 영향에 비추어볼 때 20세기 가장 위대한 역사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렌의 재능 가운데 하나는 역사를 쓰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낸 데 있다”는 역사가 프랑수아 도스의 평가처럼, 피렌은 당대의 기준으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썼다. 피렌은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라는 두 역사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앙리 피렌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가 있다. 첫째, 민족적?문화적 요소와 관련하여 벨기에라는 한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밝히는 과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국민사를 그 기원에서 현대까지 일관된 관점으로 서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유럽 전체를 시야에 놓고 중세사를 총괄하고 도시와 상공업의 존재 방식에 중점을 둔 독자적인 사회경제사에 몰두하는 작업이다. 셋째, 시기적으로 나중에 관심의 초점을 둔 작업이다. 즉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의 관계를 밝혀내서, ‘유럽 사회’라는 것의 탄생과 그 의미를 독특한 관점에서 구성하려는 연구 작업이 있다.
피렌의 역사 연구가 중세도시에서 출발한 점이 주목되는데, 사실은 큰 작업인《벨기에 역사》의 집필을 준비하는 가운데 나온 부산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자본주의 발전의 단계들〉(1914)이라는 논문은 당시 경제학자들이 논의하던 자본주의 기원론에 대해 역사학자로서의 또렷한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렌의 역사관은 급속히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1914년 8월 독일 군이 벨기에를 침략해 들어오면서 조국은 서부전선 최초의 격전지로 변한다. 그해 아들이 전사하고 1916년에는 독일 점령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런 포로 생활은 오히려 사색과 성찰의 계기가 된다. 러시아어를 공부하여 동유럽 전체의 구조적인 변천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유럽이 아닌 그 무엇’(피렌에게는 특히 이슬람)과 관계를 맺은 귀중한 경험을 했다. 피렌의 불법 억류 사건은, 벨기에뿐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학계에도 관심을 가졌고, 중립국의 아카데미를 비롯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이나 로마 교황 베네딕토 15세까지 석방에 노력을 기울였다.
억류 생활에서 다시 학계로 돌아온 이래 1935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동안 피렌은 《유럽사》 《중세사회경제사》같은 저작을 저술하면서, 학회와 국내 대학이나 미국, 프랑스, 영국, 나아가 로마나 카이로의 대학에까지 강연을 다녔다. 또 국제역사학자대회 초대 의장을 맡아 다른 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여러 형태로 외국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이 시기에 피렌은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오늘날 벨기에 역사학계의 기초를 다졌다. 바쁜 일상생활 중에서 죽기 직전까지(1935년 5월 4일) 역사연구 작업을 계속해서, 사후 대부분의 원고가 거의 완성된 상태로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유고가 아들과 제자의 손을 거쳐《마호메트와 샤를마뉴》로 파리와 브뤼셀에서 출간되었다.
사회경제사 연구의 본보기, ‘아날학파의 배후’
앙리 피렌의 역사 연구는 한 마디로 마르셀 모스(1872~1950년)가 추구한 ‘전체사회사’(histoire social totale)이다. 그러기에 훗날 아날학파 2세대인 조르주 뒤비도 《역사는 계속된다》에서 “피렌의 책은 맥이 살아서 뛰고 있다. 또한 그의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경제사를 뛰어넘어 사회사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고 말했다. 오랜 역사연구 방법론의 틀을 뒤흔든 피렌의 역사학은 ‘새로운 역사학’이라 일컬은 아날학파에 큰 영향을 주고, 사회경제사 연구의 길을 열게 된다.
피렌은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라는 두 역사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20년에 블로크와 페브르는 피렌을 만난 뒤, “전문화에 대한 거부, 사회경제사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 비교사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등 피렌의 역사관은 우리 스트라스부르의 동료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그러고는 《사회경제사연보》(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가 1929년 창간되었을 때 막후 참모는 바로 앙리 피렌이었다. 페르낭 브로델도 앙리 피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31년 브로델은 피렌의 ‘이슬람 침입 이후 지중해’라는 강의를 들었고, 이 강연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회고했다. 펠리페 2세가 아니라 지중해를 ‘주인공’으로 삼아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를 저술하는 과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 작가 소개
저자 앙리 피렌
1862년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리에주대학에 1883년에 중세 디낭을 주제로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라이프치히대학, 베를린대학 파리고등연구원에서 공부하고 1886년 헨트대학 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벨기에 역사와 서양 중세사를 강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의 침공에 맞서 저항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고, 1916년 독일로 압송되어 종전을 맞을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유럽사》를 집필하고, 뒷날 ‘피렌 테제’로 알려진 중세 초기 역사에 관한 독특한 사관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1923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국제역사학자대회의 초대의장을 맡았고,《벨기에 역사》(7권, 1900~1932), 《중세도시》(1927)를 비롯한 여러 권의 저작을 남기고 1935년에 작고했다.
역자 강일휴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중세 프랑스 코뮌의 성격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서양중세사 강의》(공저, 2003)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세유럽의 도시》(앙리 피렌, 1997), 《천년: 그 세기말의 징후》(조르주 뒤비, 1999), 《중세 프랑스의 귀족과 기사도》(콘스탄틴 브리텐 부셔, 2005)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등자와 쟁기가 바꾼 유럽역사》(린 화이트 주니어, 2005)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1부 이슬람 침입 이전의 서유럽
1장 게르만족 침입 후 서유럽 세계에서 지중해 문명의 존속
1. 게르만족 침입 이전의 ‘로마 세계’
2. 게르만족의 침입
3. ‘로마 세계’의 게르만족
4. 서방세계의 게르만족 국가들
5. 유스티니아누스(527~585년)
2장 게르만족 침입 이후 사회경제적 상황과 지중해 항해
1. 주민과 토지
2. 동방과의 통상: 시리아인과 유대인
3. 내륙의 상업
4. 화폐와 화폐 유통
3장 게르만족 침입 이후의 지적 생활
1. 고대의 전통
2. 교회
3. 예술
4. 사회의 세속적 성격
결론
2부 이슬람과 카롤링거 왕조
1장 이슬람의 팽창과 지중해
1. 이슬람의 침공
2. 서지중해의 폐쇄
3. 베네치아와 비잔티움
2장 카롤링거 가(家)의 쿠데타와 교황의 정책 전환
1. 메로빙거 왕조의 쇠퇴
2. 카롤링거 궁제(宮宰)들
3. 이탈리아, 교황, 비잔티움. 교황의 정책 전환
4. 새로운 제국
3장 중세의 개막
1. 경제조직과 사회제도
2. 정치제도
3. 지적 문명
결론
옮긴이의 해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앙리 피렌의 역사학
앙리 피렌 저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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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적 뿌리를 밝힌 중세사의 고전
오늘날 유럽은 언어와 민족, 국가를 달리하지만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 정체성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이어 온 것도 아니고, 20세기 말 인위적인 국가 연합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유럽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실체이다. 오래 전부터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앞다투어 ‘유럽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뿌리’를 놓고 고심해 왔고 저마다 학문적 근거와 연구 성과들을 내놓았다. 일반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게르만의 침입’을 통해 5세기 무렵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했다고 보고, 유럽의 기원을 실질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과 로마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으로 본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이가 18세기《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1737~1794년)이다.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런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저작이 바로《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이다. 이 책은 다루고 있는 주제가 워낙 광범위하고 서술이 논리적이기 때문에 이른바 ‘피렌 테제’로 일컬어지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앙리 피렌은 게르만족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로마 세계’(지중해 세계)는 유지되었고 사람들은 고대 질서 속에 살아갔다고 분석한다. 고대와 중세의 연속성을 주장한 알폰스 도프슈(1868~1953년)의 견해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그때까지 거의 고려하지 않았던 이슬람의 영향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시켰다. 지중해가 이슬람 세력에게 장악됨으로써 고대 지중해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중세 유럽사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은 생경한 역사이론이 아니라 풍부한 사실(史實)에 기반을 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명쾌하고도 깊이 있는 서술 솜씨는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나온다. 당대의 법률서, 공문서, 문학 작품, 수도원 문서뿐 아니라 주교의 편지나 상인들의 장부 등 갖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나간다. 지은이에 따르면 훈족의 동진으로 촉발된 게르만의 침입은 사실상 정치와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 로마세계의 틀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런 관점은 화폐경제, 라틴어, 교역 물품, 정기시장, 식생활 같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종교와 예술 같은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관철된다.
피렌 테제 “이슬람이 없는 유럽은 상상할 수 없다”
5세기 서로마제국 정부가 몰락한 뒤로 사실상 서방세계 전체는 로마 세계에 세운 게르만족 왕국들의 모자이크였고 콘스탄티노플이 이 복합체의 수도 노릇을 했다. 즉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수에비족은 갈라시아에, 서고트족은 에스파냐와 루아르 강 남부까지, 부르군트족은 론 강 유역에 저마다 왕국을 건설했다. 여러 ‘야만’ 민족은 저마다 고대 질서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그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언제나 서방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아프리카와 에스파냐가 그 뒤로 바그다드의 궤도에 들어갔다. 그런 지역들에서는 다른 종교가 그 모습을 드러냈고, 전혀 다른 문화가 출현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이슬람 침공은 “포에니 전쟁 이래 유럽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 “고전 전통의 종말”과 “중세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활의 축이 지중해에서 북방의 게르만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 교황은 비잔틴 황제가 이슬람교도와의 투쟁에 전념하여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게 되자 황제와 결별하고, 이 새로운 왕조와 제휴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도 새로운 시대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중세로 이행하는 기간은 길었다. 650년부터 750년까지 꼬박 1세기가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우세해진 것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 동안이었다.
이런 서방세계를 ‘유럽 세계’로 통합하고, 로마 문명에 편입되어 살아가던 게르만 민족의 전통을 부활시킨 이가 바로 샤를마뉴였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은 그 기억이 빚어 낸 결과물이다. 샤를마뉴가 이룬 ‘하나의 유럽’을 재현하자는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입주한 건물 이름이 ‘샤를마뉴 빌딩’인 걸 보면 그 상징성을 짐작할 만하다.
앙리 피렌의 역사학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1862-1935)은 온후한 인품, 폭넓은 학식, 독특한 구상력과 학계에 끼친 영향에 비추어볼 때 20세기 가장 위대한 역사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렌의 재능 가운데 하나는 역사를 쓰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낸 데 있다”는 역사가 프랑수아 도스의 평가처럼, 피렌은 당대의 기준으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썼다. 피렌은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라는 두 역사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앙리 피렌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가 있다. 첫째, 민족적?문화적 요소와 관련하여 벨기에라는 한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밝히는 과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국민사를 그 기원에서 현대까지 일관된 관점으로 서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유럽 전체를 시야에 놓고 중세사를 총괄하고 도시와 상공업의 존재 방식에 중점을 둔 독자적인 사회경제사에 몰두하는 작업이다. 셋째, 시기적으로 나중에 관심의 초점을 둔 작업이다. 즉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의 관계를 밝혀내서, ‘유럽 사회’라는 것의 탄생과 그 의미를 독특한 관점에서 구성하려는 연구 작업이 있다.
피렌의 역사 연구가 중세도시에서 출발한 점이 주목되는데, 사실은 큰 작업인《벨기에 역사》의 집필을 준비하는 가운데 나온 부산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자본주의 발전의 단계들〉(1914)이라는 논문은 당시 경제학자들이 논의하던 자본주의 기원론에 대해 역사학자로서의 또렷한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렌의 역사관은 급속히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1914년 8월 독일 군이 벨기에를 침략해 들어오면서 조국은 서부전선 최초의 격전지로 변한다. 그해 아들이 전사하고 1916년에는 독일 점령군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런 포로 생활은 오히려 사색과 성찰의 계기가 된다. 러시아어를 공부하여 동유럽 전체의 구조적인 변천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유럽이 아닌 그 무엇’(피렌에게는 특히 이슬람)과 관계를 맺은 귀중한 경험을 했다. 피렌의 불법 억류 사건은, 벨기에뿐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학계에도 관심을 가졌고, 중립국의 아카데미를 비롯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이나 로마 교황 베네딕토 15세까지 석방에 노력을 기울였다.
억류 생활에서 다시 학계로 돌아온 이래 1935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동안 피렌은 《유럽사》 《중세사회경제사》같은 저작을 저술하면서, 학회와 국내 대학이나 미국, 프랑스, 영국, 나아가 로마나 카이로의 대학에까지 강연을 다녔다. 또 국제역사학자대회 초대 의장을 맡아 다른 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여러 형태로 외국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이 시기에 피렌은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오늘날 벨기에 역사학계의 기초를 다졌다. 바쁜 일상생활 중에서 죽기 직전까지(1935년 5월 4일) 역사연구 작업을 계속해서, 사후 대부분의 원고가 거의 완성된 상태로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유고가 아들과 제자의 손을 거쳐《마호메트와 샤를마뉴》로 파리와 브뤼셀에서 출간되었다.
사회경제사 연구의 본보기, ‘아날학파의 배후’
앙리 피렌의 역사 연구는 한 마디로 마르셀 모스(1872~1950년)가 추구한 ‘전체사회사’(histoire social totale)이다. 그러기에 훗날 아날학파 2세대인 조르주 뒤비도 《역사는 계속된다》에서 “피렌의 책은 맥이 살아서 뛰고 있다. 또한 그의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경제사를 뛰어넘어 사회사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고 말했다. 오랜 역사연구 방법론의 틀을 뒤흔든 피렌의 역사학은 ‘새로운 역사학’이라 일컬은 아날학파에 큰 영향을 주고, 사회경제사 연구의 길을 열게 된다.
피렌은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라는 두 역사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20년에 블로크와 페브르는 피렌을 만난 뒤, “전문화에 대한 거부, 사회경제사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 비교사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등 피렌의 역사관은 우리 스트라스부르의 동료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그러고는 《사회경제사연보》(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가 1929년 창간되었을 때 막후 참모는 바로 앙리 피렌이었다. 페르낭 브로델도 앙리 피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31년 브로델은 피렌의 ‘이슬람 침입 이후 지중해’라는 강의를 들었고, 이 강연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회고했다. 펠리페 2세가 아니라 지중해를 ‘주인공’으로 삼아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를 저술하는 과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 작가 소개
저자 앙리 피렌
1862년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리에주대학에 1883년에 중세 디낭을 주제로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라이프치히대학, 베를린대학 파리고등연구원에서 공부하고 1886년 헨트대학 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벨기에 역사와 서양 중세사를 강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의 침공에 맞서 저항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고, 1916년 독일로 압송되어 종전을 맞을 때까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유럽사》를 집필하고, 뒷날 ‘피렌 테제’로 알려진 중세 초기 역사에 관한 독특한 사관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1923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국제역사학자대회의 초대의장을 맡았고,《벨기에 역사》(7권, 1900~1932), 《중세도시》(1927)를 비롯한 여러 권의 저작을 남기고 1935년에 작고했다.
역자 강일휴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중세 프랑스 코뮌의 성격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서양중세사 강의》(공저, 2003)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세유럽의 도시》(앙리 피렌, 1997), 《천년: 그 세기말의 징후》(조르주 뒤비, 1999), 《중세 프랑스의 귀족과 기사도》(콘스탄틴 브리텐 부셔, 2005)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등자와 쟁기가 바꾼 유럽역사》(린 화이트 주니어, 2005)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1부 이슬람 침입 이전의 서유럽
1장 게르만족 침입 후 서유럽 세계에서 지중해 문명의 존속
1. 게르만족 침입 이전의 ‘로마 세계’
2. 게르만족의 침입
3. ‘로마 세계’의 게르만족
4. 서방세계의 게르만족 국가들
5. 유스티니아누스(527~585년)
2장 게르만족 침입 이후 사회경제적 상황과 지중해 항해
1. 주민과 토지
2. 동방과의 통상: 시리아인과 유대인
3. 내륙의 상업
4. 화폐와 화폐 유통
3장 게르만족 침입 이후의 지적 생활
1. 고대의 전통
2. 교회
3. 예술
4. 사회의 세속적 성격
결론
2부 이슬람과 카롤링거 왕조
1장 이슬람의 팽창과 지중해
1. 이슬람의 침공
2. 서지중해의 폐쇄
3. 베네치아와 비잔티움
2장 카롤링거 가(家)의 쿠데타와 교황의 정책 전환
1. 메로빙거 왕조의 쇠퇴
2. 카롤링거 궁제(宮宰)들
3. 이탈리아, 교황, 비잔티움. 교황의 정책 전환
4. 새로운 제국
3장 중세의 개막
1. 경제조직과 사회제도
2. 정치제도
3. 지적 문명
결론
옮긴이의 해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앙리 피렌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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