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반평생 넘게 신문사 ‘납 냄새’를 맡아온 최일남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자이자 작가로서 삶에 대한 균형 감각과 폭넓은 독서 체험에서 온 깊은 인문적 향기, 세상살이에 대한 느긋한 여유와 겸허로 가득하다. 여기에 평생토록 말을 끼고 살아온 숙수(熟手)의 솜씨로 빚은 언어 감각과 비애와 근심을 웅숭깊은 웃음에 얹어내곤 하는 감칠맛 도는 대화가 그의 소설 읽는 맛을 더한다. 이번 책에 묶인 작품들은 더욱이 죽음이 결코 낯설지 않은 노년의 실존과 내면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과 세상, 풍속과 세태의 못다 한 사정을 챙기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자리를 궁굴리고 에두르는 사유와 저작(詛嚼)으로”(문학평론가 정홍수) 우리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고 있다.
‘일본어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의 한 사람으로 “걸핏하면 일제 용어로 도망가는 세대의 후덥지근한 기억”(「스노브 스노브」)에서 자유롭지 못한 최일남이다. 하나 “일제강점기의 아픈 유년기 소사부터 노년의 밤에 푸는 맨체스터 더비의 담화까지 기억이 긷고 아우르는 이야기의 진경은 말과 문학의 현재적 생명과 맥박으로 충만하다”.(정홍수)
“진짜 노년의 존엄을 찾아”(「메마른 입술 같은」) 매일의 생을 반추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미완에 그칠지라도 진실한 인간됨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애씀으로, 누구랄 것 없이 필요하고 값진 과정이 아닐까. 우리 나이로 미수(米壽)를 두 해 앞두고도 여전히 펜을 놓지 않는 노 작가의 삶과 문학적 열정에 후배 문인 누구나 아낌없는 존경으로 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최일남 선생의 문학에서 소설의 지혜와 인간의 기품은 하나다.” _정홍수(문학평론가)
“『국화 밑에서』에 이르러 이 시대의 한국 소설은 노년의 실존과 내면에 대한
또 하나의 인상적인 경지와 단단한 묘사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_권성우(문학평론가)
노년의 실존과 내면에 대한 진솔한 응시
최일남의 근작들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는 인생의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담기는 풍진세상의 희로애락이 덤덤하게 펼쳐진다. 하루에 두 군데 장례식장을 방문하게 된 주인공이 상주와 대화를 주고받는 「국화 밑에서」는 장례를 둘러싼 풍속을 평하고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 이야기가 차지면서도 시큰하다. 작가에게 세월에 따른 장례 풍속의 변화를 체감하는 일은 곧 자신을 둘러싼 실존과 죽음의 의미를 깊게 성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여 장례, 죽음, 시체, 염, 입관, 화장한 후의 뼛가루 수습 등에 대해 폭넓은 독서와 체험에서 비롯한 사유와 지식을 자연스럽게 엮는 솜씨는 물론이고, 망자를 목도하는 유가족의 심리를 허투루 넘기지 않는 묘사와 통찰 역시 날렵하기 짝이 없다.
그런가 하면 「밤에 줍는 이야기꽃」의 화자는 “생각 따로 몸 따로 늘그막 쪽잠”으로 이어지는 새벽녘마다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더비나 메이저리그 등 빠르고 명쾌한 승부의 세계를 놓지 않고 시청한다. 더러 낮 동안 겪는 구청의 컴퓨터 무료 강좌나 좌석버스에서 목격하는 동년배들의 “연민과 인멸의 냄새” 가득한 말과 행동에 그는 자기모멸과 비애를 감추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는 영어 자막과 일어 청취에 기대어 “대엿새 터울로 맛보는 밤의 흥분 ? 낙담”을 “적막강산을 벗는 자신의 괜찮은 행사”로 키워간다.
“노년에 들면 마음이 너그럽고 사리분별에도 밝다고들 하던데 믿을 것이 못 된다. [……] 노회는 소년의 클릭 한 방만 못하고, 경륜은 글로벌스탠더드에 치여 별무소용이다. 나이와 함께 상승하고 속살이 찌기 마련이던 권위는 뒤를 받치는 콘텐츠가 부실하고 앙상한 만큼 하강 곡선을 긋기 바쁘다.” (「밤에 줍는 이야기꽃」)
“노인은 대체로 나이가 비슷한 타인에게 냉랭하기 쉽다. 낯선 아이와도 금세 어울려 장난을 꾸미는 떡잎들과 다른 점에서 늙으면 아이 된다는 옛말이 의심스럽다. 마주 본 얼굴에서 지치고 건조한 세월을 읽는 것이 싫어서라고 단정할 것 없다. 사는 켯속에 전봇대같이 뻗선 이치를 세우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렇게 정리하기도 하지만 해석이 너무 단조롭다.” (「밤에 줍는 이야기꽃」)
한편 「물수제비」는 혼자가 된 노년의 처연한 심경을 담은 작품으로, 마치 “헤어지는 연습이었던 셈”으로 병석에 눕기 전 아내와 교환한 숱한 대화를 회상 속에 추리는 퇴직 교장이 등장한다. 혀 짧은 소리의 초등학교 2학년짜리 손주를 아들내외 없이 보름 남짓 돌보게 된 「아침바람 찬바람에」의 화자는, 조손(祖孫) 사이의 엄청난 시대적 변천과 괴리에 당혹해한다. 그럼에도 빠르고 간편한 오늘의 혜택을 애써 부인하지 않고 “밀어낼 것 밀어내고 당길 것 당겨 데리고 사는” 노년의 그답게, 손주의 눈높이에서 비밀놀이라도 하듯 자신의 유년을 함께 되짚어보기도 한다.
“연만할수록 역경을 지혜롭게 헤치고, 대소사에 너그럽고 원만해진다는 것도 모두 헛소리인가 봐. 책에나 씌어 있는 말인가 봐요.” (「물수제비」)
“아내가 다된 서방의 외통고집과 간댕간댕 션찮은 힘의 뿌리를 왜 몰라. 서방은 서방대로 쭈그렁이 노파가 사라지고 없는 날들의 준비가 전혀 없어 두려움에 한참 떨고 있었다. 때문에 하나 마나 한 농담성 화제의 뒤끝이 필경 개운찮았다. 전립선비대증에 걸린 환자의, 노상 무지근한 잔뇨(殘尿)처럼.” (「물수제비」)
“나이가 멱에 찰수록 저 자신을 가늠 잡기 힘듭니다.” (「스노브 스노브」)
“못할 것도 없지…… 나이 먹은 유세, 옹고집, 무관심으로 위장한 샘, 괘씸죄 남발…… 에이 그만둘라네. 생각이 막혀서가 아니야. 얼마든지 끌어댈 수 있되 누워서 침 뱉는 노릇이 막상 떠름하구먼.” (「스노브 스노브」)
고색창연한 언어 감각과 촌철살인의 대화로 빚어낸 소설 미학
최일남 소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그의 절묘한 언어 감각이다.
‘칙살스럽다’(하는 짓이나 말 따위가 잘고 더러운 데가 있다), ‘헤실바실하다’(일이 시원스럽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되다), ‘호도깝스럽다’(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버리다), ‘들이당짝’(들이대고 다짜고짜로), ‘어지빠르다’(정도가 넘고 처져서 어느 한쪽에도 맞지 아니하다), ‘시망스럽다’(몹시 짓궂게 심한 데가 있다) 등 그의 소설 속 숱한 순우리말과 토착어는 자연스럽게 문장 문장으로 갈마들고 타래처럼 인물 간 대화로 이어지며 최일남 소설의 큰 특징과 매력을 이룬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문물의 내력에 비추면 새삼 놀랄 게 못 된다 이걸세. 말인들 다를까. 생성, 소멸의 계기와 유효기간이 각각 다른 사람의 입말을 누가 무슨 수로 내치고 들이나. 우리 연배는 돈 주고 배운 공력이 아깝고 그 말과 허물없이 지낸 정의(情誼)가 하도 깊어 쓰레기통에 버렸던 놈까지 다시 줍는 경우마저 있잖은가. 깨끗이 씻어 새말에 곁들이면 섞어찌개 같은 맛이 한층 구수하고.” (「국화 밑에서」)
“판이 아무리 변했기로 기왕에 존재했던 구시대 딜레탕트들의 속멋을 업신여기면 곤란하다. 나는 못한다. 마음이 그쪽에 더 간다. 함께 견딘 풍진 세월이 더불어 각별한 탓이다.” (「메마른 입술 같은」)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던 유년의 “지악스러운”(「말이나 타령이나」) 체험과 상처가, 일본어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인정하여 그 시절 일본어에 대한 기억을 “비망록(備忘錄)을 적듯이”(‘작가의 말’) 써낸 한편으로, 모국어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어진 예일 것이다.
이번 소설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말이나 타령이나」는 그런 의미에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읽어봄 직하다. 천방지축 어린 나이에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완성 단계에 이른 시기를 살았던 최일남이다. 학교와 일상 가리지 않고 일본어로 말하고 밤낮으로 도열하여 동요 대신 일본군가를 암송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를 고자질하며 “오나가나 낯설고 뜨악한 말에 치여”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은 흐려지는 듯하다, “홍안의 한때를 히히거렸던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동창들의 흔한 회포의 끝이 어김없이 ‘교가 합창’으로 흐르거나, “저절로 써금써금한 왜말 찌꺼기가 나오는” 걸 뿌리칠 수 없었다고도 고백한다.
“한 세월 저쪽의 노래는 누군가의 일상에 단독으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지난 당대의 온갖 환경과 현실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입체적이다.”
“과거가 왜 나빠. 말놀이가 왜 나빠. 자네가 놀이라는 표현을 써서 그렇지. 이 둘이 곧 사람의 본색 아닌가.”
“말도 그래. 겉으로는 사람이 말을 만드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언어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의식을 심어준다구.” (「말이나 타령이나」)
그의 언어 감각이 비단 고색창연한 토착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말에 민감해온 그답게, 현대적인 문화적 추세나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불쑥불쑥 기어 나오는 신조어”(「스노브 스노브」)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 수시로 눈에 띈다. 이는 ‘인문학적 성찬’이라 불릴 만큼 장르를 넘나드는 폭넓은 독서와 문화 체험을 내내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과 겹친다. 예서 비롯된 풍부한 지식과 정보 역시 “용왕매진 말발로 농을 다투는”(「메마른 입술 같은」) 인물 간 촌철살인의 대화에 스며들어 “삶의 깊은 속내를 송곳으로 찌르고 풍자로 에둘러 일일이 웃기는 맛”(「메마른 입술 같은」)은 물론이려니와, 어지간한 역사서나 철학서 이상으로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묘파해내기도 한다.
“언문일치가 나쁘지는 않되 글 각각 말 각각의 내력은 어쩔 수 없다네. 터진 입으로 마구 주워섬긴 언어의 파편을 무수한 붓방아질 끝에 다소곳이 내미는 글과 어떻게 비교해. 게다가 이 사람아. 넓은 의미에서 비유는 글쓰기의 알파요 오메가라구. 잘빠진 비유 하나 열 문장 부럽지 않은 이치가 여기 있다네.” (「메마른 입술 같은」)
작가 소개
저 : 최일남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활동해온 대한민국 대표적인 원로 언론인이자 소설가다. 1932년 전북 전주시 다가동에서 출생했다.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953년 <문예>에 <쑥 이야기>, 1956년 <현대문학>에 <파양>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현대문학>에 <진달래>(1957)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다. 특히<경향신문>에 입사한 1962년 이후로는 거의 작품 활동이 끊어지다시피 하다가, 1966년부터 간간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한다. 1975년에는 '월탄문학상'을 수상했고, 1979년에는 '소설문학상'을, 1981년에는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최일남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또 일생 언론인이었다. 1980년에는 정치적인 문제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다. 1984년 복직되기는 하지만, 해직당했던 경험은 그에게 매우 큰 상처로 남았고, 그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1997년에는 해직 당시의 언론계에 대한 통렬한 고백을 담은 『만년필과 파피루스』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1986년에는 <흐르는 북>으로 '제10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이 되었고, 그해 '가톨릭언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인촌문학상'을 수상했다. 1999년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고문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역임했고, 200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작품집으로는 『서울 사람들』(1975), 『타령』(1977), 『흔들리는 성』(1977), 『홰치는 소리』(1981), 『거룩한 응달』(1982) ,『누님의 겨울』(1984), 『그리고 흔들리는 배』(1984), 『틈입자』(1987), 『히틀러나 진달래』(1991), 『하얀 손』(1994), 『만년필과 파피루스』(1997), 『아주 느린 시간』(2000), 『석류』(2004) 등이 있다. 대담집 『그 말 정말입니까?』(1983), 에세이집 『기쁨과 우수를 찾아서』(1985), 『정직한 사람에게 꽃다발은 없어도』(1993),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2006) 등이 있으며, 시사평론집 『왜소한 인간의 위대함, 위대한 인간의 왜소함』(1991) 등이 있다.
목 차
메마른 입술 같은 45
물수제비 73
밤에 줍는 이야기꽃 113
아침바람 찬바람에 151
스노브 스노브 187
말이나 타령이나 225
해설| 64년 동안의 사랑과 문학적 열정_권성우 254
작가의 말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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