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푸른문학상, 창비청소년문학상, 제1회 한낙원과학소설상, SF어워드 우수상 등을 수상하며
우리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지지해 온 작가 최영희
2013년 『어린이와 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길지 않은 기간 내내 장편과 단편을, 현실과 환상을,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해 온 작가 최영희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구달』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의미는 주인공 아이의 이름이다. 달이의 아빠 구종대 씨는 어린 핏덩이를 안고 흔전동에 들어온 어느 날, 옥탑 난간에 서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어느 틈엔가 하늘에 떠 있던 달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달이는 생각한다. 그때 아빠 눈에 띈 것이 ‘달’이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구난간, 구옥상, 구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성정의 구종대 씨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거라고.
열일곱 살 달이는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가 한창인 흔전동 럭키빌라 옥탑에 산다. 훌쩍 사라졌다 예고 없이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아빠가 실종되고, 생활비가 떨어진 후로 달이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달이는 매일을 효과적인 생존을 위한 일과 매뉴얼로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재현이가 울지 않았는지 귀를 기울여 확인한 후, 날마다 8시 15분 전후 골목을 내려오는 승율이의 발소리를 체크하고, 매뉴얼 1번 아침 체조, 2번 냉수 세안, 3번 소식 혹은 간헐적 단식을 순차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허기는 도통 가시지 않고 공과금이 밀려 전기방석도 켤 수 없던 어느 아침, 교복을 입고 학교에 잠입해 밥이나 먹고 나올까, 박 집사네 온돌교회를 털어 버릴까 고민하던 달이는 엊그제 한 남자에게 건네받은 명함을 떠올렸다. MS미스터리협회 마블힐지국 서울출장소 소장 공직구. 감염자니 피해자니 실험이니, 그날 공직구라는 남자가 내뱉은 말들은 밑도 끝도 없는 얘기들이었지만 ‘미스터리’, 네 글자가 달이의 머릿속을 때렸다. 그것은 지난 몇 개월간 달이의 일상을 말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MS미스터리협회, 인체 실험, 링거, 바이러스, 침입자.
그리고 설명할 길 없는 가청 능력의 출현
달이의 청력은 일반적인 가청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럭키빌라 옥탑방에 앉아서 직선거리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세란약국 2층 재현이 방의 기척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힘겨운 아침을 맞이한 열일곱 살 남자애가 이불을 바스락거리며 연거푸 돌아눕는 소리, 휴대폰을 집어 드는 소리, 365마트 강문이가 짜각짜각 이빨을 혀로 미는 소리. 먼 소리와 가까운 소리, 자연음과 기계음, 생리적인 소음과 우발적인 소리, 달이를 둘러싼 소리풍경은 다층적이고 복잡했다. 의사는 달이의 증상을 신경정신과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환청이라는 이야기였지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노름꾼의 딸로 살며 달이가 가슴에 새긴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 것. 달이는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 들려오는 소리와 실제 상황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달이는 가불받은 선금 57670원에 이끌려 MS미스터리협회의 신입 요원으로 입사한다. 공직구에 따르면 흔전동 일대에서 모종의 인체 실험이 진행 중이며 감염 의심자는 달이 포함 네 명이라고 했다. 달이의 역할은 흔전동 토박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동네 어른들의 동태를 탐문하는 것이었다. 조사를 시작한 지 며칠 후, 달이는 한심한 직장 선배 공직구의 손에서 낚아챈 자료에서 4번 감염자의 신상 정보를 읽고 충격에 빠진다. 한승율, 17세, 남, 흔전동 산 51번지 3호 거주….
너를 들을게, 너를 구할게
연결도로가 없는 이 골목의 소리지도 속에서
혼자 장사를 하며 손자를 키워야 하는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보다 중한 일이 수백 가지는 될 터였다. 그래서 강문이는 몸의 일부가 흔들리는 이 사태를 혼자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짜각짜각……. 흔전동의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강문이도 어른 품에서 자라지 않고 저 스스로 부화하는 중이었다. 흔전동이라는 삭막한 부화기 안에서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누우며 자라는 것이다. 그건 강문이보다 조금 먼저 부화한 달이가 지나온 길이기도 했다. 달이는 진짬뽕 한 봉지와 옥수수빵을 카운터에 올려놓고는 강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본문 중에서)
흔전동의 아이들은 사방이 ‘연결도로없음’ 표지판으로 가로막힌 언덕길 위에서 스스로 자란다.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불안을 잠재우고, 각자 제 몫의 시간을 감내하며, 그 아이의 손톱이 빠진 날은 언제인지, 턱 밑에 흉터는 어째서 생겼는지를 부모들 대신 기억해 주며 자라나는 것이다. 어린이집 탁자 밑에 숨어 울던 달이에게 “달아, 뚝!” 하고 마법을 걸어 주던 재현이, 구종대 씨에 기인한 예측 불허성과 변수로 점철된 달이의 삶 위에 언제나 항수로 존재하던 승율이.
인생의 마지막 졸업장일지도 모르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반드시 따겠다는 꿈을 가진 승율이가 감염자라는 사실을 안 순간, 달이는 엄청난 물리적 고통에 빠진다. 이 계기로 달이의 청력은 한 차원 밖으로 진화하게 되고, 덕분에 인체실험에 대한 수사는 급물살을 타며 진전된다. 연고가 없는, 다시 말해 사라져도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주민 넷을 골라 미지의 바이러스를 주입한 세력은 누구인가. 피험자들의 몸속에 자리 잡은 기생체는 충실히 스스로를 살찌워 가고, 가장 먼저 2번 감염자 홍세라 씨의 기생체가 숙주의 살을 찢으며 탈출을 시도한다.
좁고 어둑한 골목 어디선가 열여덟 살을 맞이할
이 땅의 모든 달이, 재현이, 승율이를 위하여
작가 최영희는 다양한 전작들을 통해 바로 눈앞에서 숨을 쉬는 듯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을 창조해 왔다. 『구달』 속 여러 인물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최영희의 잘 직조된 문장들을 통해 입체감을 얻으며 사건의 실체를 향해 독자를 이끈다. 작품 전체를 교교히 흐르는 블랙유머, 장면마다 스며 있는 인간을 향한 신뢰와 애정,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건강히 자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구달』을 이루는 밑돌이다.
“전 청소년이 좋아요. 자기도 딱히 멀쩡하진 않으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어른들보단 청소년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어른의 입장에서 청소년들에게 해 주고픈 말은 없어요. 전 그 애들과 한바탕 겪고 싶어요. 같이 웃고, 함께 대들고 싶어요.”
최영희는 몇 해 전 어느 문학상 수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독자들을 향한 그의 깊고 뭉근한 지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듣는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이 동사의 물리적 의미, 은유적 의미, 듣는다는 행위의 주체를 차례로 톺아 보았다. 관심은 자연스레 ‘듣다’의 목적어인 ‘소리’로 이어졌다. 세상은 어떤 소리들로 채워져 있는가,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소리를 감지했을 때 청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주인공 달이는 현실의 내가 가지 못하는 길을 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소리의 발원지로 눈길을 돌리고, 거기로 갔다. 결국 누군가의 사연과 기척을 듣는다는 건, 그 존재에 눈길을 주고 그 곁으로 가는 일이며 존재론적 응답임을 달이에게서 배웠다.(작가의 말 중에서)
‘듣다’라는 동사 위를 오래 머문 자국들 위로 달이, 재현이, 승율이가 걷는다. 듣지 않으려는 자들과 듣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득세한 오늘의 세계 위에 이 소설이 놓여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작가 소개
저 : 최영희
2013년 [어린이와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제11회 푸른문학상, 제8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제1회 한낙원과학소설상, 2016 SF어워드 우수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꽃 달고 살아남기』, 소설집 『존재의 아우성』 『광장에 서다』 『안녕, 베타』 『복수는 나의 것』 『첫 키스는 엘프와』, 동화 『인간만 골라골라 풀』 『슈퍼 깜장봉지』 등을 썼다.
목 차
1장 신입 요원 구달 …7
2장 감염자들 …37
3장 연결도로없음 …79
4장 두 개의 심장 소리 …135
5장 내가 들어 줄게 …193
작가의 말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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