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신문 서평
말타고 달린다… 끝없는 욕망이
지난 17일 시인 유하(37) 씨를 신문사로 청해 놓고, “왜 왔느냐?”고 짐짓 패악을 부려 본다. 우리의 대중문화든 아니든, 그는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문화의 전선에 분명한 자신의 진지를 갖고 있었다. 무협·재즈·비디오·포르노그라피 등 이른바 대중문화 숲에서, 그는 시적 감성으로 숲을 제압하는 로빈훗이었다. 그래서 그는 귀했다.
‘무림일기’(89년)·‘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91년)·‘세상의 모든 저녁’(93년)·‘세운상가 키드의 사랑’(95년)·‘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99년) 등 일련의 시집들은, 항상, 그의 작품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달려들듯” 다가왔다.
그러다 느닷없이 그가 이번주 경마장 이야기를 쓴, [천일마화](문학과지성사)라는 시집으로 기어이 2000년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평론가 이광호의 말처럼 “경마장이 무림과 압구정동과 세운상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불길한 욕망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전언은 휘발하고, 더러운 욕망의 불꽃에 그을린 그림자만 잠시 어른거린다. ‘시’ 또한 ‘적중되지 않은 마권’일 뿐이다. 베팅하는 자의 돈은, 결국은 경마장의 것이다. 노동자의 뒷호주머니에 꽂힌, 때묻은 손수건 보다 한없이 누추한 문명의 꼬락서니들!
그의 시집은 장쾌한 절망으로 시작한다. ‘그대는 무진장한 물의 몸이면서/ 저렇듯 그대에 대한 목마름으로 몸부림을 치듯/ 나도 나를 끝없이 목말라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시도 벼랑 끝에 서지 않은 적이 없었다’(‘폭포’ 전문). 그렇다. ‘어둠의 자식들’이 뒷골목을 장악하던 시대에서 우리는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식들’의 시대로 훌쩍 넘어와 있다. 삶은 벼랑이다.
유하의 패러디의 본질은 야유와 통쾌에 있다. 시집 제목도 배금택의 만화에서 따왔다. 경주마를 휘감았던 질주와 황금도 시간의 조롱 속에 갇혀 박제가 된다(‘천일마화-명마 포경선’에서).
깽판치기, 톡 까놓고 말하기, 세상 깔보기, 그래서 우리 모두 조금씩 재밌어지고 위안 받기, 그리고 유하가 지닌 근원적 슬픔을 눈치 채지 못하기, 혹은 알아도 모른 척 덮어주기에 독자들은 동참하게 된다.
그는 “갬블러란 고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갬블러란 고독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얼마나 고독할 것인가.
이 시집의 제2부에 해당하는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는 느림에 관한 얘기다. 지금은 거의 상투화된 “느림”들에 대해 유하는 오래전부터 깊은 울림들을 키워오고 있었다.
우리는 지상의 탈 것들에 의해 무수히 추월 당하고 있지만, 그 무익한 시간들을 벗삼아, 추억 보다 느린 속도로 산책이나 하고 있을 뿐이지만(‘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중), 이 유한한 삶에서 명상은 우리의 몫이다.
“30대 후반의 극도의 쓸쓸함 때문에 쓰여진 시들이지요.” “극단적 절망 후에 삶의 의욕”은 용솟음치고, 그때 세상을 참신한 방법으로 야유하기 위한 무정부주의적 에너지를 재충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상한, 실패한 갈대였지만/ 하늘 아래 넉넉히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력발전소처럼 건강했다’ 중).
유하는 이제 휴지기를 가지러 떠난다. “내 창작에 소재가 됐던 대중문화가 정전화되다 보니 불온성이 퇴색해버려 시적 에너지도 고갈됐습니다.” 그는 이제 극단적 절망을 기다릴 것이고, 넉넉한 시간으로 자학하는 친구를 만날 것이다.
그는 시집을 낸 출판사를 가 보겠다며 휘적휘적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유하의 말처럼 “몽상의 대박을 쫓는 사람들(시인)”을 만나면, 항상 우리들 마음이 저릿한 이유였다.
자, 그러면 가볼까, 그대와 나 한떼의 붉은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 저편으로 사위어져가는 지금; 우리 가볼까, 회회교 여인을 휘감은 검은 천의 펄럭임처럼 은밀하게 어둠이 밀려오는 테헤란 에비뉴의 언덕, 잠심 콜롯세움의 불빛을 타고 날아온 제오공화국의 음울한 추억을 지나 박쥐 똥이 깔린 싸구려 모텔들의 불안한 낄낄거림, 무지개 살롱 오래된 외상값, 온갖 지루한 연애담과 불륜의 지린내를 밟고 지나 젊은 날의 욕정이 적중되지 않은 마권처럼 뒹구는 이씨 왕조 능 앞의 경마 중계소를… 오, 그게 뭐냐고 묻지는 말게나 (‘천일마화-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2000.11.20 김광일기자 조선일보]
말타고 달린다… 끝없는 욕망이
지난 17일 시인 유하(37) 씨를 신문사로 청해 놓고, “왜 왔느냐?”고 짐짓 패악을 부려 본다. 우리의 대중문화든 아니든, 그는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문화의 전선에 분명한 자신의 진지를 갖고 있었다. 무협·재즈·비디오·포르노그라피 등 이른바 대중문화 숲에서, 그는 시적 감성으로 숲을 제압하는 로빈훗이었다. 그래서 그는 귀했다.
‘무림일기’(89년)·‘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91년)·‘세상의 모든 저녁’(93년)·‘세운상가 키드의 사랑’(95년)·‘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99년) 등 일련의 시집들은, 항상, 그의 작품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달려들듯” 다가왔다.
그러다 느닷없이 그가 이번주 경마장 이야기를 쓴, [천일마화](문학과지성사)라는 시집으로 기어이 2000년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평론가 이광호의 말처럼 “경마장이 무림과 압구정동과 세운상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불길한 욕망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전언은 휘발하고, 더러운 욕망의 불꽃에 그을린 그림자만 잠시 어른거린다. ‘시’ 또한 ‘적중되지 않은 마권’일 뿐이다. 베팅하는 자의 돈은, 결국은 경마장의 것이다. 노동자의 뒷호주머니에 꽂힌, 때묻은 손수건 보다 한없이 누추한 문명의 꼬락서니들!
그의 시집은 장쾌한 절망으로 시작한다. ‘그대는 무진장한 물의 몸이면서/ 저렇듯 그대에 대한 목마름으로 몸부림을 치듯/ 나도 나를 끝없이 목말라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시도 벼랑 끝에 서지 않은 적이 없었다’(‘폭포’ 전문). 그렇다. ‘어둠의 자식들’이 뒷골목을 장악하던 시대에서 우리는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식들’의 시대로 훌쩍 넘어와 있다. 삶은 벼랑이다.
유하의 패러디의 본질은 야유와 통쾌에 있다. 시집 제목도 배금택의 만화에서 따왔다. 경주마를 휘감았던 질주와 황금도 시간의 조롱 속에 갇혀 박제가 된다(‘천일마화-명마 포경선’에서).
깽판치기, 톡 까놓고 말하기, 세상 깔보기, 그래서 우리 모두 조금씩 재밌어지고 위안 받기, 그리고 유하가 지닌 근원적 슬픔을 눈치 채지 못하기, 혹은 알아도 모른 척 덮어주기에 독자들은 동참하게 된다.
그는 “갬블러란 고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갬블러란 고독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얼마나 고독할 것인가.
이 시집의 제2부에 해당하는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는 느림에 관한 얘기다. 지금은 거의 상투화된 “느림”들에 대해 유하는 오래전부터 깊은 울림들을 키워오고 있었다.
우리는 지상의 탈 것들에 의해 무수히 추월 당하고 있지만, 그 무익한 시간들을 벗삼아, 추억 보다 느린 속도로 산책이나 하고 있을 뿐이지만(‘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중), 이 유한한 삶에서 명상은 우리의 몫이다.
“30대 후반의 극도의 쓸쓸함 때문에 쓰여진 시들이지요.” “극단적 절망 후에 삶의 의욕”은 용솟음치고, 그때 세상을 참신한 방법으로 야유하기 위한 무정부주의적 에너지를 재충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상한, 실패한 갈대였지만/ 하늘 아래 넉넉히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력발전소처럼 건강했다’ 중).
유하는 이제 휴지기를 가지러 떠난다. “내 창작에 소재가 됐던 대중문화가 정전화되다 보니 불온성이 퇴색해버려 시적 에너지도 고갈됐습니다.” 그는 이제 극단적 절망을 기다릴 것이고, 넉넉한 시간으로 자학하는 친구를 만날 것이다.
그는 시집을 낸 출판사를 가 보겠다며 휘적휘적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유하의 말처럼 “몽상의 대박을 쫓는 사람들(시인)”을 만나면, 항상 우리들 마음이 저릿한 이유였다.
자, 그러면 가볼까, 그대와 나 한떼의 붉은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 저편으로 사위어져가는 지금; 우리 가볼까, 회회교 여인을 휘감은 검은 천의 펄럭임처럼 은밀하게 어둠이 밀려오는 테헤란 에비뉴의 언덕, 잠심 콜롯세움의 불빛을 타고 날아온 제오공화국의 음울한 추억을 지나 박쥐 똥이 깔린 싸구려 모텔들의 불안한 낄낄거림, 무지개 살롱 오래된 외상값, 온갖 지루한 연애담과 불륜의 지린내를 밟고 지나 젊은 날의 욕정이 적중되지 않은 마권처럼 뒹구는 이씨 왕조 능 앞의 경마 중계소를… 오, 그게 뭐냐고 묻지는 말게나 (‘천일마화-프루프록의 연가’ 중에서) [2000.11.20 김광일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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