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일 잘하는 전해철’, 제가 아는 전해철 의원입니다 _이해찬(국회의원, 전 국무총리)
전해철 의원은 두 개의 고향을 가지고 있다. 한 곳은 그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졸업한 목포이며 한 곳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산이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 가난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가족들은 ‘밥벌이’를 위해 집을 떠났다.” 그는 취직하여 목포를 떠난 큰형이 있는 마산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고려대학교 법대에 진학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법은 정의를 유린하고 있었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목격하고 “시대에 편승하는 법조인이 아니라 정의로운 법을 수호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막 지난 그해 가을, 그는 사법고시 2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군대 임기를 마칠 즈음에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고시 준비를 할 때부터 생각했던 인권 변호사로 진로를 결정한다. “그때 마침 천정배, 임종인, 이덕우 변호사가 서울 서초동에서 ‘해마루 합동사무소’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해마루에 입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훗날 함께할 노무현 변호사를 만난다. 해마루에서 전해철 의원이 맡은 “전체 사건에서 국가보안법과 노동법 사건이 70퍼센트에서 80퍼센트를 차지했다. 특히 노동자와 관련한 사건들을 주로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은 그렇게 해마루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청문회 스타로 유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노무현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변호사는 역사를 좋아하고 창의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솔직하고 원칙적인 사람이었다.
_‘변호사’에서
2018년 오늘, 새로운 봄을 기다리며
그날의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다시 읽어본다
노무현 변호사가 종로에 출마했다. 전해철 의원은 선거캠프에 나가서 도왔다. “당선되면 국회의원을 했고, 낙선하면 해마루로 돌아와 변호사를 했다.” 2001년 12월 11일 노무현 상임고문은 링컨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낙선만 하고 있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 선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니,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일이 아니라고 말릴 일이었지만, 말린다고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한 방울의 물로 바위를 쪼갤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정치의 선한 작용을 믿었다. 그는 인간으로서도 가장 순수했다.”
노무현 후보는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 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온갖 말들이 나왔다. 전해철 의원은 변호사들을 만나러 다니며 ‘노무현 후보지지 법률지원단’을 구성했다. 2002년 12월 18일 아침, 《조선일보》에 “정몽준, 노무현을 버리다”는 기사가 터졌다. “투표일 절날 밤부터 대한민국의 통화량이 급증하기 시작해서 투표하는 내내 통화량이 내려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날 노무현은 마침내 승리하였다.”
해마루 사무실에 창고가 하나 있다. 사건 자료를 모아 두는 곳이었다. 의뢰인이 오면 직원이 창고에 가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와야 했다. 창고에서 자료 찾기는 아주 힘든 막일에 속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그걸 보고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286 컴퓨터를 쓰고 있을 때인데, 실현 불가능한 말 같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당신이 직접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어오셨다. 그게 ‘노하우’의 기반이 되었다. 그것을 발전시킨 게 참여정부의 온라인 보고 시스템인 ‘이지원’이다. _‘목포와 마산’에서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2004년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여당이지만 소수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2004년 3월 12일 새벽,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에 진입해 여야 대치 상황이 시작”됐고 “오전 11시 5분쯤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 “의장석에서 농성 중이던 여당 의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곧바로 탄핵소추안을 상정”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11시 55분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해 국민들은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들은 열리우리당에 과반이 넘는 152석을 주이면서, 제1당이던 한나라당과 제2당인 새천년민주당을 심판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전해철 의원을 민정비서관에 임명하여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전해철 의원은 “청와대 근무 초기에는 민정비서관으로 나중에는 43세의 젊은 나이에 민정수석이 되어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나이를 문제 삼는 건 옛날식 사고방식이고, 정말 실력 있는 ‘낭중치추’라고 설명했다.”
참여정부의 청와대는 철저히 시스템으로 움직였다. 각종 현안 및 정책이 체계화된 시스템 안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 노무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제왕적 대통령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국민들에게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고자 꿈꾸었다. _‘참여정부 민정수석’에서
내가 2006년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근무할 때도 민정수석실의 주요 과제는 권력기관 개혁, 과거사 정리, 사법개혁 활동 등이었고 이를 원할히 추진할 수 있다고 총괄하는 것이었다. _‘참여정부 민정수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자마자 각각의 권력기관들은 예전의 집행기관으로 즉각적으로 변모하여 국정농단의 최전선에서 앞장서서 부패와 부정,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고 말았다. 시스템을 더욱 철저하게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 역시 중요하다. _‘권력기관 제자리 찾기’에서
이 비극을 이야기 하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프다…
반드시 노무현의 뜻을 이어받아, 그의 가치와 철학을 실현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다
“마침내 4월 30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상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했다. 노 대통령이 대검 수사를 받으러 갈 때 문재인 실장과 내가 함께 갔다.” 전해철 의원은 노 대통령이 조사를 받는 동안 입안이 바짝바짝 탔다. “그때 조사했던 사람이 우병우였고 수사기획관은 홍만표였다. 현재 우병우는 국정농단으로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구속 중이고, 홍만표는 정운호 로비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다.” 5월에도 검찰은 국세청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공을 퍼부었다. “5월 11일에는 딸 정연씨 부부가 검찰에 소환되었고, 다음 날 검찰은 정연씨가 40만 달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5월 23일 새벽, 소식을 들었다.그날 봉하마을은 울음바다였다.5월 23일이라고 쓰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통입골수(痛入骨髓), ’고통이 뼈 속 깊이 새겨지다’라는 말이다. _‘서거’에서
“그렇게 정치를 안 하겠다는 사람이 마침내 하겠다고 결정했다.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문재인은 결코 정치를 할 분이 아니었다.” 전해철 의원은 “문재인 실장과 함께 정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문재인밖에 없었다”고. “문재인이 결심을 밝히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머리에 봉하의 풍경이 떠올랐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 MB정부가 다시 박근혜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그는 믿기로 했다.
2012년 대선 뒷이야기
그리고 2017 대선
전해철 의원은 이 책에서 2012년 민주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하여 18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시점부터 대통령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작된, 결코 쉽지 않았던 안철수와의 후보 단일화 과정, 단일화 실무 협상 등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는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패배였다. 패배의 원인은 안철수와의 단일화에 너무 힘을 뺐고, 불법 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승리하고자 했던 박근혜 캠프보다 덜 절실했으며, 문재인 후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는 것”을 패인으로 분석했다. 2012년은 그가 안산에서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그는 민정수석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국회에 설치되는 각종 위원회에 되도록 참여하려고 했다.” 의정활동을 하면서 전해철 의원은 “아직은 당리당략에 치우친 정치라는 것, 상생과 타협의 문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2012년 대선 때에는 공식적인 선대위 캠프가 3개였다. 민주캠프(당), 시민캠프(시민), 미래캠프(정책)가 있었다. 시민캠프가 전국적인 조직이 되다 보니 민주캠프와 시민캠프가 늘 갈등을 빚었다. 지역에 가면 시민캠프 사람이 다 있었다. 좋은 의미로 시민의 참여였지만, 일사불란한 선거운동은 불가능했다.
반대로 2017년에는 단일한 캠프가 만들어졌다. 경선 때부터 함께할 모임이나 포럼을 처음 만들 때 내가 강하게 이야기를 했다. 시민들의 참여를 확대하되 가능한 전문가 중심으로 만들고, 선거운동은 공조직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무엇보다 국민들이 문재인 후보를 믿어주고 지지해주었다. 전국을 밝힌 촛불이 민주주의 후퇴와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하는 강고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 세상을 바꾸는 역사를 함께 만든 것이다. _‘당대표에서 대통령으로’
우리는 이름 맨 끝 자가 같은 ‘삼철’이다. 삼철은 이너써클도 아니고 비선실세도 아니다. 우리 셋의 공통점은 이름 끝 자가 철이라는 점보다 참여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모셨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과정에 어느 누구보다 각자가 처한 여건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삼철은 우리에게 자부심이다. _‘삼철이라는 프레임’에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람 사는 세상,
전해철 의원의 꿈입니다 _김진표(국회의원, 전 부종리)
『함께한 시간, 역사가 되다』는 이제 막 “새로운 길”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에 첫발을 내딛는 전해철 의원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겨 있는 책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믿는다. “그런 세상은 정치를 통해 만들어갈 수 있다”고 그리고 “정치에는 기본적으로 갈등과 싸움”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인정하는 정치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도적으로 풀어줘야” 하며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 개헌”이라고. “개헌을 통해 협치를 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다고. “이제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전해철 의원은 두 개의 고향을 가지고 있다. 한 곳은 그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졸업한 목포이며 한 곳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산이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 가난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가족들은 ‘밥벌이’를 위해 집을 떠났다.” 그는 취직하여 목포를 떠난 큰형이 있는 마산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고려대학교 법대에 진학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법은 정의를 유린하고 있었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목격하고 “시대에 편승하는 법조인이 아니라 정의로운 법을 수호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막 지난 그해 가을, 그는 사법고시 2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군대 임기를 마칠 즈음에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고시 준비를 할 때부터 생각했던 인권 변호사로 진로를 결정한다. “그때 마침 천정배, 임종인, 이덕우 변호사가 서울 서초동에서 ‘해마루 합동사무소’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해마루에 입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훗날 함께할 노무현 변호사를 만난다. 해마루에서 전해철 의원이 맡은 “전체 사건에서 국가보안법과 노동법 사건이 70퍼센트에서 80퍼센트를 차지했다. 특히 노동자와 관련한 사건들을 주로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은 그렇게 해마루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청문회 스타로 유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노무현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변호사는 역사를 좋아하고 창의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솔직하고 원칙적인 사람이었다.
_‘변호사’에서
2018년 오늘, 새로운 봄을 기다리며
그날의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다시 읽어본다
노무현 변호사가 종로에 출마했다. 전해철 의원은 선거캠프에 나가서 도왔다. “당선되면 국회의원을 했고, 낙선하면 해마루로 돌아와 변호사를 했다.” 2001년 12월 11일 노무현 상임고문은 링컨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낙선만 하고 있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 선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니,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일이 아니라고 말릴 일이었지만, 말린다고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한 방울의 물로 바위를 쪼갤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정치의 선한 작용을 믿었다. 그는 인간으로서도 가장 순수했다.”
노무현 후보는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 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온갖 말들이 나왔다. 전해철 의원은 변호사들을 만나러 다니며 ‘노무현 후보지지 법률지원단’을 구성했다. 2002년 12월 18일 아침, 《조선일보》에 “정몽준, 노무현을 버리다”는 기사가 터졌다. “투표일 절날 밤부터 대한민국의 통화량이 급증하기 시작해서 투표하는 내내 통화량이 내려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날 노무현은 마침내 승리하였다.”
해마루 사무실에 창고가 하나 있다. 사건 자료를 모아 두는 곳이었다. 의뢰인이 오면 직원이 창고에 가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와야 했다. 창고에서 자료 찾기는 아주 힘든 막일에 속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그걸 보고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286 컴퓨터를 쓰고 있을 때인데, 실현 불가능한 말 같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당신이 직접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어오셨다. 그게 ‘노하우’의 기반이 되었다. 그것을 발전시킨 게 참여정부의 온라인 보고 시스템인 ‘이지원’이다. _‘목포와 마산’에서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2004년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여당이지만 소수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2004년 3월 12일 새벽,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에 진입해 여야 대치 상황이 시작”됐고 “오전 11시 5분쯤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 “의장석에서 농성 중이던 여당 의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곧바로 탄핵소추안을 상정”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11시 55분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해 국민들은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들은 열리우리당에 과반이 넘는 152석을 주이면서, 제1당이던 한나라당과 제2당인 새천년민주당을 심판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다.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전해철 의원을 민정비서관에 임명하여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전해철 의원은 “청와대 근무 초기에는 민정비서관으로 나중에는 43세의 젊은 나이에 민정수석이 되어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나이를 문제 삼는 건 옛날식 사고방식이고, 정말 실력 있는 ‘낭중치추’라고 설명했다.”
참여정부의 청와대는 철저히 시스템으로 움직였다. 각종 현안 및 정책이 체계화된 시스템 안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 노무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제왕적 대통령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국민들에게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고자 꿈꾸었다. _‘참여정부 민정수석’에서
내가 2006년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근무할 때도 민정수석실의 주요 과제는 권력기관 개혁, 과거사 정리, 사법개혁 활동 등이었고 이를 원할히 추진할 수 있다고 총괄하는 것이었다. _‘참여정부 민정수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자마자 각각의 권력기관들은 예전의 집행기관으로 즉각적으로 변모하여 국정농단의 최전선에서 앞장서서 부패와 부정,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고 말았다. 시스템을 더욱 철저하게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 역시 중요하다. _‘권력기관 제자리 찾기’에서
이 비극을 이야기 하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프다…
반드시 노무현의 뜻을 이어받아, 그의 가치와 철학을 실현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다
“마침내 4월 30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상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했다. 노 대통령이 대검 수사를 받으러 갈 때 문재인 실장과 내가 함께 갔다.” 전해철 의원은 노 대통령이 조사를 받는 동안 입안이 바짝바짝 탔다. “그때 조사했던 사람이 우병우였고 수사기획관은 홍만표였다. 현재 우병우는 국정농단으로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구속 중이고, 홍만표는 정운호 로비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다.” 5월에도 검찰은 국세청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공을 퍼부었다. “5월 11일에는 딸 정연씨 부부가 검찰에 소환되었고, 다음 날 검찰은 정연씨가 40만 달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5월 23일 새벽, 소식을 들었다.그날 봉하마을은 울음바다였다.5월 23일이라고 쓰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통입골수(痛入骨髓), ’고통이 뼈 속 깊이 새겨지다’라는 말이다. _‘서거’에서
“그렇게 정치를 안 하겠다는 사람이 마침내 하겠다고 결정했다.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문재인은 결코 정치를 할 분이 아니었다.” 전해철 의원은 “문재인 실장과 함께 정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문재인밖에 없었다”고. “문재인이 결심을 밝히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머리에 봉하의 풍경이 떠올랐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 MB정부가 다시 박근혜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그는 믿기로 했다.
2012년 대선 뒷이야기
그리고 2017 대선
전해철 의원은 이 책에서 2012년 민주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하여 18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시점부터 대통령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작된, 결코 쉽지 않았던 안철수와의 후보 단일화 과정, 단일화 실무 협상 등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는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패배였다. 패배의 원인은 안철수와의 단일화에 너무 힘을 뺐고, 불법 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승리하고자 했던 박근혜 캠프보다 덜 절실했으며, 문재인 후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는 것”을 패인으로 분석했다. 2012년은 그가 안산에서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해이기도 하다. 그는 민정수석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국회에 설치되는 각종 위원회에 되도록 참여하려고 했다.” 의정활동을 하면서 전해철 의원은 “아직은 당리당략에 치우친 정치라는 것, 상생과 타협의 문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2012년 대선 때에는 공식적인 선대위 캠프가 3개였다. 민주캠프(당), 시민캠프(시민), 미래캠프(정책)가 있었다. 시민캠프가 전국적인 조직이 되다 보니 민주캠프와 시민캠프가 늘 갈등을 빚었다. 지역에 가면 시민캠프 사람이 다 있었다. 좋은 의미로 시민의 참여였지만, 일사불란한 선거운동은 불가능했다.
반대로 2017년에는 단일한 캠프가 만들어졌다. 경선 때부터 함께할 모임이나 포럼을 처음 만들 때 내가 강하게 이야기를 했다. 시민들의 참여를 확대하되 가능한 전문가 중심으로 만들고, 선거운동은 공조직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무엇보다 국민들이 문재인 후보를 믿어주고 지지해주었다. 전국을 밝힌 촛불이 민주주의 후퇴와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하는 강고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 세상을 바꾸는 역사를 함께 만든 것이다. _‘당대표에서 대통령으로’
우리는 이름 맨 끝 자가 같은 ‘삼철’이다. 삼철은 이너써클도 아니고 비선실세도 아니다. 우리 셋의 공통점은 이름 끝 자가 철이라는 점보다 참여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모셨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과정에 어느 누구보다 각자가 처한 여건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삼철은 우리에게 자부심이다. _‘삼철이라는 프레임’에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람 사는 세상,
전해철 의원의 꿈입니다 _김진표(국회의원, 전 부종리)
『함께한 시간, 역사가 되다』는 이제 막 “새로운 길”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에 첫발을 내딛는 전해철 의원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겨 있는 책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믿는다. “그런 세상은 정치를 통해 만들어갈 수 있다”고 그리고 “정치에는 기본적으로 갈등과 싸움”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인정하는 정치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도적으로 풀어줘야” 하며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 개헌”이라고. “개헌을 통해 협치를 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다고. “이제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작가 소개
저 : 전해철
1962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목포대성초등학교, 영흥중학교를 다녔다. 목포를 떠나 마산에서 마산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제19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1987년 육군 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친 뒤, 1993년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언론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노무현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제19대, 제20대 총선에서 경기 안산상록구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간사, 국회정무위원회 간사,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목 차
여는 글
제1부 살아온 날들
목포와 마산
대학 시절 그리고 고시 합격
사법연수원 시절
결혼과 군대 생활
변호사
제2부 함께한 날들
변호사 노무현의 대통령 선거
승리 뒤의 또 다른 이야기
참여정부 민정수석
권력기관 제자리 찾기
사법개혁
과거사 정리
3부 함께할 날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문재인의 출마
의정활동
당대표에서 대통령으로
삼철이라는 프레임
정치와 정당
제4부 경기도 이야기
경기도에는 왜 정책이 없을까?
정치 청사진: 경기도의 자치분권 실현
경제 청사진: 지역별 정책 확립을 통한 균형 발전
교통 청사진: 편리한 교통으로 행복감 상승
복지 청사진: 복지 기본선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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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을 갖춘 정치인 | 김진표
전해철이 걸어온
제1부 살아온 날들
목포와 마산
대학 시절 그리고 고시 합격
사법연수원 시절
결혼과 군대 생활
변호사
제2부 함께한 날들
변호사 노무현의 대통령 선거
승리 뒤의 또 다른 이야기
참여정부 민정수석
권력기관 제자리 찾기
사법개혁
과거사 정리
3부 함께할 날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문재인의 출마
의정활동
당대표에서 대통령으로
삼철이라는 프레임
정치와 정당
제4부 경기도 이야기
경기도에는 왜 정책이 없을까?
정치 청사진: 경기도의 자치분권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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